조지프 매카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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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조지프 레이먼드 매카시
(Joseph Raymond McCarthy)
'''출생'''
1908년 11월 14일 위스콘신 주 그랜드 폭포
'''사망'''
1957년 5월 2일 (48세) 메릴랜드 주 베데스다
'''묘지'''
세인트 메리 묘지 44 ° 14'40 "N 88 ° 26'30 "W
'''국적'''
미국
'''정당'''
(1944년에서 1957년 사이)
(1936년에서 1944년 사이)
'''배우자'''
진 프레이저
'''직업'''
변호사, 판사, 정치가, [1]
'''종교'''
천주교
1. 소개
2. 상원의원이 되기까지
3. 상원의원 매카시
5. 최후
6. 실제 그가 밝혀낸 내부 스파이들
7.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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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미국정치인. 자신의 개인적인 영달을 위해 무고한 사람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매장해 버리는 행위를 공공연히 선동해 저질렀는데, 여기서 '매카시즘'이라는 표현이 탄생했다. 사회주의적 성향이 비교적 강했던 유럽은 물론이고, 미국 본토에서도 극소수의 극우주의 세력을 제외하면 이제 매카시즘이 거의 척결된 상황이다. 그리고 좌파 정치인에게 끼친 피해가 크다 보니 조지 W. 부시, 도널드 트럼프와 함께 미국의 정치만화가들이 작품에서 가장 애용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2. 상원의원이 되기까지


사실 알고 보면 입지전적 인물의 전형이다. 매카시는 척박한 위스콘신 주의 농가에서 태어났고[2], 가정 형편이 어려웠기 때문에 20세가 되어서야 고등학교를 갈 수 있었다.
속성으로 고등학교 과정을 마친 후 밀워키에 있는 예수회 계통의 마켓 대학교에서 고학하였고, 그 학교의 법과 대학원을 졸업한 후에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여 위스콘신 주의 지방 판사가 되었다. 지방 판사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아주 유명한 낙농업 판결로 단숨에 인지도를 올린다. 대략 판결은 이런 식이다.
1. 미 연방정부가 농산물의 가격을 어느 일정기준 이하로 팔지 못하도록 최저가격제를 정하였다.
2. 이 때 어느 낙농업자가 기준보다 낮은 가격으로 우유를 팔다가 연방정부에게 걸려서 기소가 된다.
3. 매카시가 짧고 강력한 판결문을 쓴다. '우유를 값 싸게 파는 것은 소비자에게 좋은 일인데 이런 재판을 하는 것은 시간낭비다!'
상인들의 비율이 높은 곳에서 상인들에게 유리한 판결문을 작성한 것 때문에 상대적으로 상인의 비율이 높은 위스콘신에서 큰 인기를 모았다고 전해진다.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경력도 있고, 전쟁이 끝난 후 다시 판사로 돌아갔는데, 참전 이전 큰 인기를 모았던 판사였으므로 정계 입문 권유를 받게 되었다.

3. 상원의원 매카시


그리하여 매카시는 1946년 상원의원 선거에 공화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본고장인 위스콘신에서 당선되었다.
그의 당선은 진보주의자로 유명했던 로버트 라 폴렛(1906~1925)[3], 로버트 라 폴렛 주니어(1925~1947) 부자의 40년 왕조를 끝낸 사건이기도 했다. 라 폴렛 주니어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위스콘신 지역당으로 진보당을 이끌었지만 1947년에는 선거를 위히 공화당에 복당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매카시는 라 폴렛 주니어를 불과 1.3%, 5천표 차이로 꺾고 공화당 후보가 되었다(207,935 vs 202,557). 매카시는 자신의 참전경력을 강조해 "테일거너 조"[4]가 국회에 필요하다고 선전했고 이 카피가 먹혀들었다.[5]
그는 미국 정계에서 비주류인 아일랜드가톨릭 신자였기 때문에 역으로 아일랜드계 정치집단에서 많은 후원을 받았으며, 특히 소속정당은 달랐지만, 역시 아일랜드계인 케네디家의 지원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6]
여기까지는 근성으로 자수성가한 한 정치인의 모범적인 일화로 볼 수 있지만, 그 이후 엄청난 실책을 저지르게 되는데…

4. 매카시즘


그 때까지 매카시는 정치적으로 햇병아리에 불과한 위스콘신 주를 대표하는 초선 상원의원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을 일약 정치적 거물로 일으켜 세울 수 있는 편법을 발견했으니, 그것은 바로 '''반공''' 선동이었다.
당시 미국은 마오쩌둥공산당장제스중국 국민당대만으로 몰아내고 중국을 건국한 사실과 소련의 원폭실험 등으로 인해 비정상적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공포심이 과대하게 퍼져있었고 매카시는 이를 잘 이용해먹은 셈이다. 그는 자신과 사상이 다르면 바로 사상검증에 들어갔으며 그의 검증을 통과하지 못할 시 그 대상은 (적어도 매카시에게는) 빨갱이였다.[7]
그리하여 매카시는 인류 역사상 유례가 없는 극렬 반공 활동을 벌여, 조금이라도 사회 비판적 성향이 있다면 무섭게 청문회에 소환하고 소련 스파이로 몰아붙여 사회적으로 매장을 시키게 된다. 그의 마녀사냥에 희생된 사람들 중 유명한 사람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와 영화배우 찰리 채플린[8]
그가 매카시즘으로 알려진 극렬 반공활동을 시작한 시기는 1950년 2월 9일 웨스트버지니아 주의 휠링에서 열린 공화당 집회였는데 공산주의자들이 사회 각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그 명단도 갖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는 특히 국무부 내에 205인의 간첩이 있다면서 정체 모를 문건을 흔들어 보이기까지 했다. 그가 항상 가지고 다니던 서류가방에 그 명단이 있다고 호언장담을 했다. 그는 이후에도 기자들의 질문에 항상 웃으면서 '''이 안에 모든 이름이 있다!'''라고 계속 주장했다. 물론 가방을 열어보인 적은 한번도 없었다.[9]

5. 최후


하지만 그의 아무 근거도 없는 소련 스파이(혹은 빨갱이) 사냥은 곧 밑천을 드러내게 되었고, 미국 저널리즘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던 CBS의 앵커 에드워드 머로가 자신이 진행한 시사프로그램인 '씨잇 나우(See it now)'에서 그를 공개적으로 비판함으로써 매카시는 그 영향력을 잃게 된다. 이 과정은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굿나잇 앤 굿럭이라는 영화에 상세히 나와있다.[10] 또한 유명한 첩보 스릴러 영화인 1962년맨츄리안 켄디데이트에서도 매카시를 모델로 한 캐릭터가 나온다.
거기다 매카시는 궁지에 몰리면서 머리가 안 돌아갔는지 멍청하게도 최악의 실수를 저지르고 마는데, 바로 '''군부를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 매카시는 군부 내의 고위 장교 및 장성들 사이에도 소련 간첩이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군 내부의 분노와 함께 군부 공격은 곧 원수 출신이던 아이젠하워 당시 대통령 공격[11]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매카시가 속했던 공화당조차 그를 문제삼기 시작했다.
그로 인해 1954년 12월 자기가 속한 상원에서까지 비난결의가 채택되기에 이르렀고,[12] 이때 비록 상원의원으로의 신분은 유지했으나 그의 정치 생명은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실의에 빠진 매카시는 지병인 편두통이 더욱 심해졌고, 이를 해소하기 위해 매카시는 더욱 술에 빠져들게 되었다.
결국 매카시는 실의에 빠진 채 1957년 만 48세의 비교적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 사인은 과음이 원인으로 추정되는 급성 간염. 다만 용케도 죽을 때까지 상원의원의 신분은 유지해서 장례식에 당시 부통령이었던 리처드 닉슨과 양 당의 주요 인사들이 의례적으로 참석해 주긴 했다.

6. 실제 그가 밝혀낸 내부 스파이들


그의 사후 버킷 리스트의 159명 중 오직 '''9명'''만이 스파이로 입증되었다.(...) #
핵에 대한 정보 등을 넘겨준 것으로 기소된 줄리어스와 에델 로젠버그 부부는 간첩죄가 인정되어 사형판결을 받고 사형을 당했다. 이 사건을 로젠버그 부부 간첩 사건이라 한다. # 그나마도 남편인 줄리어스는 스파이가 맞지만 에델 로젠버그의 혐의는 드러나지 않았다. 그 외 알저 히스#
이 기사에서는 오언 래티모어와 해리 홉킨스도 소련 스파이로 지목하는데 두 사람은 스파이가 아니다. 논설위원이 잘못 알았거나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기술한 것으로 보인다.
오언 래티모어는 중앙아시아와 만주를 연구한 학자였고 미국이 장제스를 지원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추천으로 1941년 장제스의 보좌관이 되었으며 국민당의 비밀경찰인 남의사(藍衣社)의 감시에도 첩자로 볼 만한 부분은 하나도 나오지 않았다. 매카시파의 공격과 FBI 후버 국장의 닦달에도 그가 간첩이라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독일과 중국에서 활동한 소련 첩자 조르게의 정보에서도 래티모어에 대한 것은 없었다. 심지어 소련 해체 이후 드러난 정보에서도 래티모어가 첩자라는 증거는 없었다. 1952년 12월 의회에서의 위증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53년 5월 연방법원에서 무죄가 선고되었고 1955년 6월 두 번째 기소에서도 무죄판결이 났다. 그에게 불리한 진술을 한 소련 출신 귀순자 이고르 보골레포프는 1973년 죽음이 임박한 시점에 정보기관의 강요로 허위진술을 했다며 래티모어에게 사과하기도 했다.
해리 홉킨스는 뉴딜 정책의 기초를 디자인한 FDR의 측근이었다. 2차대전 중에는 렌드리스 프로그램이 실행되는 와중에 렌드리스의 수혜국인 소련과 만남을 가졌는데 극렬 반공주의자 쪽에서는 이 과정에서 홉킨스가 소련에 핵무기의 비밀을 팔아넘겼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근거 없는 것으로 드러났다. 예를 들면 반공주의자 측에서 홉킨스가 워싱턴에서 소련 요원과 접선했다고 주장한 바로 그 시간에 홉킨스 자신은 암 치료를 위해 미네소타에 있었다. 1963년 FBI조사에서는 이 주장을 했던 반공주의자가 거짓말을 했거나 망상증 환자였을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7. 영향


이러한 매카시즘의 열풍에 의해 불과 4년 동안 사상 검증이라는 이름으로 약 1만 명에 가까운 미국 행정부 내의 인사와 비판적인 지식인들이 구속되거나 누명을 쓴 채 현직에서 물러났다. 거기다가 인문학/사회과학 연구는 침체되었고, 대중문화예술이 극도로 위축되었으며, 사회비판적인 시민운동도 거의 봉쇄되었다.[13] 하지만 매카시가 주도한 전미반미활동 조사위원회는 끝내 소련 간첩을 하나도 잡지 못했다.[14]
그런데 매카시가 공산주의자로 몰았던 사람들의 대부분이 실제 소련과 어떠한 형태로든 연관이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주장이 2003년 앤 쿨터(Ann Coulter)에 의해 제기되었다. 그녀의 주장에 의하면, 매카시에게 이 리스트를 넘겨 준 것이 CIA라고 한다.
그러나 알아둬야 할 것은, 이 발언 당사자인 앤 쿨터는 학자도 기자도 아닌 '''칼럼니스트'''에 불과하고, 미국에서도 제정신이 아닌 것으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예를 든다면 '이슬람교도는 비행기 탑승이 금지되어야 한다'라거나 '방사능 노출은 암을 예방한다' 같은 반지성주의를 공공연히 선동하는 정신나간 사람이다.
그리고 매카시즘의 피해는 일부 좌파를 제외하고는 없었다는 게 앤 쿨터의 주장이지만, 이 견해는 사실 주류 학계와 언론에선 거의 '''부인주의'''[15] 취급당한다. 실제 매카시와 동시대에 FBI가 수행한 소련 간첩 색출 프로젝트인 베노나(Venona)와 대조해보면, "매카시 리스트"는 "베노나 리스트"와 거의 일치하지 않는다.#
또한 이런 주장에 동조하는 극우 인사들은 매카시즘 열풍이 가라앉은 이후 반공주의에 대한 혐오 증세가 심해져서 소련 간첩을 열심히 잡고 신고하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게 되고 미국의 방첩망에도 악영향을 주었다고 주장하는데, 이는 전후 인과관계를 혼동한 주장이다. 그러한 반공주의에 대한 혐오 증세가 일어나게 된 원인부터가 '''무리한 매카시즘 열풍으로 인한 역풍'''이기 때문이다.
매카시 리스트의 참담한 적중률(9/159)도 그렇고, 매카시의 행동은 당시 시점으로 보든 지금 와서 보든 민주주의의 원칙을 거의 정면으로 부정하는 수준의 폭압이다. 매카시 때문에 채플린은 1972년에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을 때까지 미국에서 추방되었고, 핵무기를 만드는 맨하탄 프로젝트의 책임자인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까지 소련 스파이로 몰렸다. 미국이 내세울만한 유능한 인재들도 이랬으니 일반 시민들은 오죽할까. 하루 하루에 충실하던 성실하고 선량한 사람이 갑자기 매카시 때문에 간첩으로 몰려 직업을 잃고, 아이들에게도 여파가 끼쳤다. 실제로 이 때문에 이역만리 타국으로 망명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들이 하루하루 속출할 만큼 미국 사회에 불합리한 공포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게다가 매카시의 반공쇼는 민주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원동력으로 작용하는 '건전한 비판'을 억압했다.
또한 매카시즘은 결과적으로 중국이 핵무기를 개발하는 데 크게 일조했다. 당시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인 물리학자 및 공학 기술자 대다수가 단순히 중국계/아시아계 출신이라는 이유로 중화인민공화국스파이로 내몰려 엄청난 박해를 받았다. 첸쉐썬 본인은 장인이 장제스의 고문이었고, 미국유학을 올 당시 중국 국민당 정부에서 신분을 보증할 정도였는데도 이 꼴을 당했으니, 그 정도 빽도 없었던 다른 아시아계 인물들은 얼마나 징그러운 억압을 당했을지 알 만 하다. 결국 첸쉐썬을 비롯한 중국인 과학자들은 미국에게 환멸을 느껴서 중화인민공화국으로 돌아갔다. 이들은 중국이 핵무기미사일을 만드는데 동조한다. 지난 이야기지만, 이들이 없었다면 중국은 핵과 미사일을 개발하느라 더욱 머리를 싸매야 했다.
게다가 조지프 매카시는 민주주의 원칙과 상충되는 위원회를 세워서, 어거지로 사람에게 낙인을 찍었다. 이단심문소 성격이 농후한 방식이 저때도 나왔다는 뜻이다. 사실 매카시의 방법은 중세마녀사냥과 똑같았다. '미국 사회의 문제점을 비판하는 사람이 있다 → 그 사람을 잡아와 윽박지른다 → 너 소련 간첩이지? → 친구 있지? → 그 친구 잡혀옴 → 친구 있지? → 무한반복...' 매카시즘은 백 번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16]
조지프 매카시가 저 난리를 칠 때, 공개적으로 전향하고 반공 열풍에 동조했던 영화 감독 엘리아 카잔(1909~2003)[17]이 특히 비난에 휩싸였다. 1999년에 아카데미 공로상을 받을 때도 반대 시위가 줄을 이었다. 공로상 수여식이 열리면 모든 참석자가 의례적으로 기립박수를 하는 것이 관례인데, 엘리아 카잔이 수상할 당시에는 참석한 영화인의 절반 정도가 일어서지도, 손뼉을 치지도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로 팀 로빈스는 무표정하게 쳐다봤으며, 스티븐 스필버그짐 캐리는 앉아서 박수만 쳤고, 에드 해리스는 팔짱을 끼고 노려봤고, 에디 머피는 머리를 긁적이며 외면했다. 그 외에도 시선을 돌리거나, 눈을 감거나, 천장을 보면서 손뼉을 친 사람도 많았다. 참고로 그 때 시상식장 출입구 앞에서는 '엘리아 카잔에게 상을 주다니. 아카데미의 수치다!'라고 야유하는 시위가 열리는 판국이었다. 그 때 엘리아 카잔에게 상을 수여한 사람들이 공교롭게도 리버럴 성향으로 유명한 마틴 스콜세지로버트 드 니로다. 그나마 드 니로의 경우 훗날 매카시즘을 다룬 영화 Guilty by Suspicion 출연 직후 인터뷰에서 "(영화출연을 위해 관련자료를 수집, 연구하면서) 당시 많은 사람이 고통받았던 것을 알았다. 하지만 엘리아 카잔도 자기 나름대로 신념을 갖고 행동했던 모양이다."라며 조심스럽게 쉴드를 쳐 주긴 했다. 1분 30초부터 객석을 비추기 시작하는데, 사람들 표정이 가관이다. 반면 매카시즘 때문에 억울하게 1952년에 미국에서 추방당한 찰리 채플린이 1972년 아카데미가 바치는 평생공로상을 수상하기 위하여 미국을 방문했을 때는 모든 할리우드 관계자들이 빠짐없이 기립 박수로 경의를 표했다.
이걸 가지고 할리우드리버럴리즘조차 같은 사안에 대해 좌익에 대해서는 후하게 우익에 대해서는 혹독하게 대하는 르상티망(Ressentiment)의 메카니즘이 존재함을 증명한다는 우편향적 매도도 있으나, 이는 오류가 있는 주장이다.[18] 오해와는 달리 당시 공개적으로 반공을 천명하는 것 자체는 당시 시대상 절대로 영화계에서 매장되는 행위가 아니었다. 로널드 레이건도 그렇고 존 웨인도 그렇고, 훗날 결과론적인 비판을 받은 것을 제외하면 매카시즘이 팽배했던 당시에 공개적으로 지지 표명을 했지만 그들의 경력에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는 않았다. 엘리아 카잔이 이렇게까지 증오를 받은 이유는 전향도 전향이었지만, 무엇보다 자기 혼자서만 살아남으려는 추악한 속셈으로 영화계의 동료들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빨갱이로 몰아''' 모함을 해 몰락시켰기 때문이다.[19]
매카시의 견책안 통과 보고를 받은 대통령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워즘[20]이다.(McCarthy'''is'''m is now McCarthy'''was'''m)"라는 명언을 남겼다. be동사의 현재형, 과거형 변화를 가지고 한 말장난.

[1] 맨츄리안 켄디데이트굿나잇 앤 굿럭에서 매카시의 발언 영상을 그대로 사용했다.[2] 맥(Mc)이 들어간 성씨를 보면 알다시피, 스코틀랜드계 내지 아일랜드계 미국인이다. 미국에서 같은 백인들 사이에서조차 알게 모르게 차별 대우를 받던 아일랜드계 미국인이 판사라는 나름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건 일단 대단한 일.[3] 오랫동안 공화당 소속이었지만, 1924년 대선에서 진보당으로 독자 출마해 16.6%를 득표했다. 다음해 심장마비로 급서.[4] Tail Gunner는 비행기 뒤쪽에서 기관총을 쏘는 후방사수를 뜻한다. 2차대전 참전 당시 매카시의 보직이기도 했다.[5] 라 폴렛 주니어는 낙선 후 아예 트루먼 행정부의 해외 원조 사업에 뛰어들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라 폴렛 주니어 진영에서는 선거 중에 매카시가 친공 행보를 보인 미국 전자-라디오 노조의 지지를 받았다고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말년의 라 폴렛 주니어도 세월이 흐르면서 고립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로 활동했기 때문. 첫 선거에서 친공몰이를 당한 매카시가 매카시즘의 어원이 된 셈이다. [6] 이는 후에 대통령이 되는 존 F. 케네디에게 정치적인 부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사실 케네디도 정계 입문 초기에는 닉슨과 함께 강력한 반공주의 활동으로 입지를 다졌기 때문에... 케네디는 생각보다 훨씬 강경파인데, 한 예로 1960년 대선에서도 '미사일 격차'라는 일종의 정치적 수사로 닉슨을 유약한 인물로 몰아세웠다. 물론 이건 나중에 닥터 스트레인지러브에서 패러디, 풍자된다.[7] 악명높은 매카시즘의 창시자답게 판단 기준도 상당히 자의적이었는데, 빨갱이의 기준이라는 것이 완전히 공산주의를 신봉하지 않더라도 자본주의의 폐해를 비판하거나 아나키즘 성향을 보이는 사람, 미국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비판하는 사람, 소련이나 중국 등 공산 국가에 조금이라도 연줄이 있거나 그들에 대한 강경책을 비판하고 평화 협정 등 평화적인 수단을 주장하는 사람, 공산주의에 대해서 단순히 사회학적 연구 목적으로 연구하는 사람들도 공산주의자로 몰았다는 것이다. 더 가관인 건 공산주의와 관련 없어도 자기보다 더 뛰어나거나 자신에게 마음에 안 드는 사람도 빨갱이로 찍어 버렸다. 즉, 공산주의자든 아니든 미국의 정책에 무조건 복종을 거부하고 옹호하지 않거나 자기 눈에 거슬리는 사람은 전부 빨갱이로 무작정 찍어서 없애 버린다는 것이다.[8] 위대한 독재자의 마지막 장면인 최후의 연설이 공산주의 색채를 띄었다든가,(사실 공산주의 색채라기보다는 아나키즘과 자본주의 및 기존 체제에 대한 비판이 더 강하다.) 모던 타임즈가 산업주의를 까고 있다든가 해서 문제가 된 것이다. 극작가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 때문에 화가 나서 크루서블을 썼다.[9] 정작 그 가방에는 위스키 1병과 건조안주만 나왔다고 한다.[10] 이 영화에는 공산주의자들을 고발하는 매카시의 연설 장면이 나오는데, 이 장면에서 연기가 너무 과장되었다는 지적이 시사회에서 나왔다고 한다. 그러나 그 장면은 배우가 연기한 것이 아니라 실제 매카시의 연설을 찍은 필름을 삽입한 것이었다고…[11] 사실 여부를 떠나서, 군부 고위급에 스파이가 있다는 주장은 몇 년 전까지 군의 최고위층이었던 아이젠하워에게까지 책임을 전가할 수 있는 문제였다. 더군다나 아이젠하워는 민주당 20년 정권 끝내 보자고 공화당이 온갖 노력을 다해 영입해서 대통령까지 만든 인물이었다. 공화당으로선 자당 소속 대통령까지 팀킬할 수 있는 매카시의 지나친 돌출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12] 이 때 민주당에선 유일하게 존 F. 케네디가 기권했다. 병원에 입원 중이라는 이유였지만 아일랜드계에 대한 후원 때문에 일부러 기권한 거 아니냐는 의혹이 있다.[13] 어느 사회에서나 문제는 일어나며, 사회풍자적인 대중문화, 비판적 시민운동은 건전한 방향으로 사회 문제를 해결하도록 한다. 또한 사회과학자는 문제 해결법을 연구한다. 하지만 모든 게 위축되면서 각종 문제는 속으로만 곪았고, 결국 베트남 전쟁을 계기로 단번에 터지는 바람에, 1960년대~1970년대의 사회적 혼란을 불렀다.[14] 미리 말해두는데, 미국에도 공산당은 존재한다. 1960년대 대법원에서 합법으로 확정되면서, 지금도 정식 정당으로 활약한다. 문제는 정당 자체가 너무 작다.[15] 사료 및 타당성 조사, 과학적 검증이 바탕이 된 역사적 사건의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태도를 가리킨다. 예를 들어 '''나치유대인을 대량학살하지 않았다.''' 식의 주장이다.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포함한 수많은 증거와 증언이 있음에도 저런 극단적인 주를 하는 인사들이 간혹 존재한다. [16] 물론 별 의미는 없는 가정인 게, 매카시의 인성이나 보신주의석 성향을 감안하면 친구든 가족이든 빨갱이로 얻어걸리면 다 팔아넘길 위인인 게 뻔하다.[17] 제임스 딘이 출연한 에덴의 동쪽, 말론 브란도가 출연한 워터프론트의 감독으로도 알려져 있다.[18] 물론 배신자라는 출신 성분에 대한 본능적인 거부감은 있었지만, 당시 사회 분위기상 비이성적인 수준으로 '빨갱이'들을 때려잡는 데만 혈안이었던 터라 이런 거부감은 상대적으로 미뤄졌다.[19] 참고로 숀 펜의 아버지인 레오 펜도 그 리스트에 있었는데, 훗날 엘리아 카잔은 어느 공석에서 레오 펜에게 인사를 청했지만 '''레오는 카잔을 애초에 보지도 못한 듯이 무시하고 지나쳤다.''' 당시 꼬마였던 숀 펜은 '아버지는 늘 모든 사람에게 친절했는데 충격이었다'고 회고했다.[20] 직역하면 매카시즘은 이제 매카시였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