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셀 르페브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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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목표어:et nos credimus caritati
Marcel Lefebvre
1. 개요
2. 생애
2.1. 초창기 생애
2.2. 신학생 시절
2.3. 마래-드-롬므 본당의 보좌신부
2.4. 아프리카의 선교사제와 주교성성
2.5. 튈(Tulle)의 교구장 대주교
2.6.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둘러싼 갈등과 성 비오 10세회 창립
2.7. 주교성성과 파문
2.8. 말년
3. 사상과 평가
3.1. 비판
4. 여담


1. 개요


프랑스 출신의 가톨릭 대주교이자 성 비오 10세회의 창립자이다. 세례명은 '''마르첼로'''[1]. 1905년 11월 29일 프랑스 투르쿠앙에서 태어나 1991년 3월 25일 스위스의 마르티뉘에서 사망했다.
가톨릭 교회와 관련해서 논란이 되고 있는 인물이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 교리 및 그가 설립한 성 비오 10세회와 관련해서 그렇다. 그에 대해 평가는 상반적인데, 긍정적인 평가[2]도 있지만 부정적인 평가도 있고 양면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2. 생애


Monseigneur Lefebvre - KOREAN from SSPX District of Asia on Vimeo.


2.1. 초창기 생애


프랑스 릴 시 근처에 있는 투르쿠앙에서 공장주인 아버지 르네 르페브르와 가정주부인 어머니 가브리엘 르페브르[3]의 8남매 중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양친의 집안인 르페브르 집안과 봐띤 집안 모두 공장을 소유하고 경영하는 자본가 집안이었다. 양친의 집안 사람들 모두가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은 아니었지만, 마르셀의 양친인 르네 르페브르와 가브리엘 르페브르는 결혼 전부터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이었다.
아버지인 르네 르페브르는 공장주이자 군주주의자였고 또한 프랑스 애국자였다. 공장주로서는 계급투쟁을 조장하는 노동조합에 부정적이어서, 대신 사람들에게 협동조합이나 자선단체 활동을 장려했다. 왕정복고주의자로서는 프랑스 혁명의 유산인 공화정, 정교분리, 세속 공립교육 등에 반대했으며 자신의 주장을 알리기 위해 투르쿠앙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프랑스 애국자로서는 제1차 세계 대전제2차 세계 대전 때 추축국 점령지에서 첩보활동을 했다. 결국 제2차 세계 대전 때 첩보활동 중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1944년 독일 존넨부르크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어머니는 가정주부이면서 남편의 사업을 도왔으며, 가톨릭 단체 활동에도 열심이어서 성 빈첸시오회 신심단체와 재속프란치스코회 회원으로 활동했다. 가브리엘 르페브르는 병으로 1938년 사망했다.
독실한 가톨릭 신앙인인 마르셀의 부모는 자녀들에게 미사를 되도록 매일 가도록 권했으며 학교도 공립학교가 아닌 가톨릭 학교를 다니도록 했다. 자녀들도 이런 부모의 신앙을 물려받아서 마르셀과 르네[4] 2명의 아들이 사제가 되었으며, 3명의 딸이 수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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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서 맨 왼쪽이 어렸을 적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이다.
마르셀은 그 당시 가톨릭 가정의 자녀들이 그렇듯이 출생 직후 유아세례를 받았다. 영성체는 교황 성 비오 10세의 영성체 관련 개혁의 혜택을 입어서 만 6살인 1911년 말에 첫 영성체를 했다.

2.2. 신학생 시절


마르셀도 독실한 가정의 영향으로 독실한 가톨릭 신앙을 가지게 되었다. 중등학교인 성심학교에 다니던 청소년기에 이미 성소의 마음을 품고 있던 그는, 먼저 사제의 길을 걷고 있던 형 르네 르페브르의 권고로 사제의 길을 걷기로 한 마음을 굳힌다.
마르셀은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지 않고 성령신부회(Holy Ghost Fathers)에서 설립한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한다. 교구 신학교에 입학하는 대신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한 이유는, 아버지와 형의 영향 및 자신의 소망 때문이었다. 아버지는 교구 신학교가 자유주의에 물들고 있다고 생각해 입학에 반대했고, 형인 르네도 이미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재학중이었다. 여기에 선교사제로 일하고 싶다는 마르셀 본인의 소망이 더해져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성령신부회(Holy Ghost Fathers)는 1700년 끌로드-프랑스와 풀라르 데 플라스(Claude-Francois Poullart des Places)에 의해 설립된 수도회이다. 설립 초기부터 신학교를 운영하여 18세기에 이미 뛰어난 선교사제를 여럿 배출해내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침체에 빠졌다.
침체에 빠진 단체에 다시 활기를 불어넣은 것은 유대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가톨릭 사제 가경자 프랑소와 리베르만[5] 신부였다. 리베르만 신부는 아프리카 선교를 목적으로 하는 마리아의 성심 수도회를 설립했는데, 이 수도회가 1848년 기존의 성령신부회와 통합함으로서 성령신부회에 다시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리고 재설립되다시피 한 성령신부회는 1853년 교황 비오 9세의 호소로 로마에 프랑스 신학교를 설립한다.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역시 이전의 성령신부회 신학교처럼 뛰어난 선교사제를 여럿 배출해내었다.
신학교에서 마르셀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저작을 특히 좋아했다. 가톨릭 신학교 과정 자체가 성 토마스 아퀴나스의 영향을 받았고 모든 신학생들이 성 토마스 아퀴나스를 공부해야 했지만, 신학생 마르셀은 "천사와도 같은 박사"의 저작을 특히 좋아하여 즐겨 읽었다.
마르셀 르페브르는 이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의 당시 학장인 앙리 르 플로슈 사제 등의 영향을 받으면서 전통적 신앙관을 가지게 되었다. 앙리 르 플로슈 사제는 프랑스 혁명으로부터 기원한 혁명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에 확고하게 반대한 사람으로서 신학생들에게도 혁명 사상과 자유주의 사상에 대해 경각심을 갖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1927년 마르셀의 군 복무 도중 악시옹 프랑세즈(French Action) 사건에 휘말려 신학교 학장직을 사임했다. 그런 가운데 마르셀 르페브르는 학업을 계속하여 1929년 4월에 부제 서품을 받고, 9월에 드디어 사제 서품을 받게 된다.

2.3. 마래-드-롬므 본당의 보좌신부


사제서품을 받은 후 프랑스 릴 시 부근 마래시의 마래-드-롬므 본당의 보좌신부로서 2년간 사목했다. 마래-드-롬므 본당의 관할지에는 노동자들이 많이 살았다. 그는 다른 사목 활동과 함께 노동자와 빈자들의 고충을 들어주고 상담하는 일을 했다.
어쨌든 그는 프랑스에서 사목 중에도 해외 국가로 선교하러 갈 뜻을 품고 있었다. 형이자 앞서 사제가 된 르네 르페브르는 이미 아프리카 가봉에서 선교사제로 사목중이었고 동생에게 편지를 보내 아프리카 선교사제의 길을 종용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본인도 신학생 시절과 교구 본당 사목 중에 교구에 계속 선교사제로 보내달라 요청했다.
마침내 1931년 르페브르는 마래-드-롬므 본당을 떠나도 좋다는 허가를 받는다. 그는 선교사제가 되기 위해서 곧 성령신부회에 입회한다. 성령신부회에서 1년여의 수련생활을 마친 마르셀 르페브르는 선교사제가 되어 1932년 가봉으로 파송됐다.

2.4. 아프리카의 선교사제와 주교성성


1932년에 마르셀 르페브르는 가톨릭 선교사가 되어 아프리카 가봉에 파송되었다. 리브르빌에 있는 성 요한 신학교의 교수로 일했고, 얼마 후엔 총장이 되었다. 교구의 명령에 따라 프랑스로 잠시 돌아가 신학교 교수로 일하기도 했지만, 이내 1947년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세네갈 다카르 대목구의 주교로 성성된다. 그리고 다음해에 교황 비오 12세에 의하여 프랑스령 아프리카의 교황사절로 임명과 대주교로의 성성이 결정된다. 프랑스령 아프리카 전역에서 교황을 대리하는 역할을 맡게된것이다.

2.5. 튈(Tulle)의 교구장 대주교


1962년 교황 요한 23세에 의하여 프랑스 튈(Tulle) 교구의 교구장에 임명되었으나 같은 해에 성령신부회 총장에 피선되어 몇 달만에 교구장직을 그만두었다. 성령신부회 총장에 피선된 같은 해에 프랑스어권 아프리카를 대표하여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중앙준비위원회 위원에 임명되었다.

2.6. 제2차 바티칸 공의회를 둘러싼 갈등과 성 비오 10세회 창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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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비오 12세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교황 요한 23세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교황 요한 23세의 요청으로 소집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진행 과정에 준비위원회 위원으로 의욕적으로 참여한 그는 공의회 회기 중에서 변화한 방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기 시작했다. 공의회에서 그는 기존의 가톨릭 교회의 구원관과 전통 교리를 중요시하는 보수적 입장을 취했는데, 결국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달라진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고 1970년, 공의회 이전의 가톨릭 전통을 지지하는 사제들과 신학생들[6] 및 신자들을 규합하여 스위스에서 성 비오 10세회를 설립했다. 동시에 첫번째 신학교인 성 비오 10세 신학교[7]도 설립했다. 그는 1970년 창립때부터 1981년까지 성 비오 10세회의 총장직을 수행했다.

우리는 온 마음을 다하고 영혼을 다 바쳐, 가톨릭 신앙과 그 신앙의 보전에 반드시 필요한 성전(聖傳)의 수호자인 가톨릭 로마, 지혜와 진리의 여왕인 영원한 로마를 고수한다. 바로 이 충실한 지지 때문에 우리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기간과 그 공의회 이후에 공의회에서 유래하는 모든 변혁에서 명백히 드러난 것들을 거부함이요, 언제나 거부해 왔다. 그것은 신 현대주의(neo-Modernist)와 신 개신교주의(neo-Protestant)의 사조이다.[8]

1974년 그가 세운 성 비오 10세 신학교는 교황청의 시찰을 받게 되었다. 시찰자로는 2명의 사제가 파견되었다. 이때 시찰차 온 사제들은 르페브르 대주교와 신학생들에게 말도 안되는 주장들을 일삼았는데, 대표적으로 가톨릭 성직자라는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정'''하는(!) 발언 등 해서는 안될 말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사실 이는 해당 사제의 자질을 의심해야 될 수준으로, 이런 행태는 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가르침도 아니며, 그 주장 자체로 이단이다. 그외에도 시찰기간 내내 미사에 한번도 참여하지 않거나 가톨릭 전통을 고의적으로 무시하는 행각을 여러번 벌였다. 결국 일련의 사태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를 격분시켰다. 자신이 지켜온 가톨릭 전통이 부정당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시찰 직후인 1974년 11월 21일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현대주의, 개신교주의, 자유주의에 물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이에 따른 교황청 노선을 따르는 것을 거부한다고 선언했다.[9]
1974년 11월 21일 선언이라고 불리우는 이 선언은 엄청난 논란을 불러왔다. 폐막된 지 얼마 안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에 대한 정면 부정이자, 일개 주교교황에 대한 불순명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 직후 교황청에서는 "성 비오 10세회는 더 이상 활동할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성 비오 10세회는 활동을 계속했다.
성 비오 10세회를 이끌면서, 그는 가톨릭의 전통 전례와 전통 교리를 계속해서 고수하고 피력했다. 이에 따라 교황청과의 갈등도 불거졌다. 성 비오 10세회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었던 아담 샤리에르 프리부르 교구장 주교의 후임 교구장 주교는 교황 바오로 6세의 지지를 받으면서 성 비오 10세회의 인가 취소와 해체를 주장했다. 바오로 6세 교황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서신을 보내기도 하고 추기경회의에서 공개적으로 이름을 거론하며 대주교를 비판하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을 받아들일 것을 촉구했으나 대주교는 받아들이지 않았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집전한 성 비오 10세회 사제 서품식
1976년 6월 29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황청으로부터 사제 서품을 하지 말 것을 경고하는 내용의 서신을 받았다. 동시에 교황청에서는 대주교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사제 서품을 강행하였다. 이에 교황청에서는 서임권을 박탈해 합법적인 사제 서품권을 박탈했다. 그로부터 1주일이 지난 후, 교황청 주교성 장관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교황에게 사죄해 용서를 받으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고, 교황청에서는 그의 성무집행권을 박탈하는 조치를 취해 그의 합법적 성무집행권을 박탈한다.
프랑스 에서의 미사에는 무려 1만여명이 참례했다
그러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성무집행권 박탈 처분을 받음으로써 합법적 성무집행권을 박탈당했음에도 성사들을 계속 집전했다. 한편, 교황청과 대주교간의 마찰이 계속될수록 그에 대한 관심도 고조되었다. 교황청의 성무 집행 정지 처분 이후 프랑스 을 방문하여 트리엔트 미사를 드릴 때에는 무려 1만여명의 전통 가톨릭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했다. 이 미사의 강론에서도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개혁에는 문제점이 많으며 자신은 올바른 일을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릴에서의 미사 이후에도 유럽과 미국 곳곳에서 트리엔트 미사를 드려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참관인이자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혁의 지지자인 철학자 장 기통도 교황 바오로 6세에게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타협할 것을 요청했다. 교황 바오로 6세와 사적인 친분을 맺고 있던 당시 이탈리아 키에티(Chieti) 대교구장 대주교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황과의 만남을 주선했다. 양측이 화해하기를 바랬기 때문이다.
릴에서의 미사 이후 주변 지인들의 설득과 중재로 교황 바오로 6세는 1976년 9월 11일 그의 알현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둘 사이에 합의를 도출하는데는 실패했다. 교황 바오로 6세는 르페브르 대주교의 말을 듣고 처음에는 "잘 알겠으며, 기도와 함께 생각해보겠다"라고 답했으나, 심사숙고한 뒤 생각을 바꿔 지인인 프랑스인 가톨릭 철학자이자 친구였고, 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참관인이었던 장 기통[10]에게 자신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요청을 거부할 것을 설명하면서 "트리엔트 미사의 자유는 공의회에 대한 평가절하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사실 바오로 6세의 판단이 일리가 있다. 당시에는 새 미사전례(바오로 6세 미사)의 도입이 채 5년도 안된 시점이었는데, 여기서 성 비오 10세회의 새미사 배격과 트리엔트 미사만 고집하는 행태를 교황이 인정해버린다면 이들은 교황청의 인정과 르페브르 대주교의 카리스마를 등에 업고 신자들을 계속 끌어모으며 새 미사에 가지 말라고 끊임없이 주장하면서 교황청의 공식 인정받은 새 전례를 배격하는 행보를 더욱 가속화했을 것이고, 결국에는 '''시기의 차이만 있을 뿐 새 전례와 2차 바티칸 공의회의 정착을 지속적으로 거부하며 몸집을 크게 불린 뒤 교황청과 다시 충돌할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또다른 거대한 교회분열사태가 일어났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1. '''공의회 및 새 미사의 유효성과 권위를 르페브르 대주교가 인정'''하는 조건으로 전통 가톨릭의 합법적 활동을 허용하던지[11] 아니면 2. '''2차 바티칸 공의회 자체를 물리던지''' 둘 중 하나인데, 여기서의 선택은 더 이상 말할 필요도 없었다. 보편 세계 공의회인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신앙적으로 무오류하며, 르페브르 대주교는 가톨릭 무오류성에 반기를 드는 것이다. 이를 인정해줄 수는 없었다.
알현 뒤 그의 요구를 거부한 교황 바오로 6세가 그를 다시금 견책한 것도 그의 일에 큰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이런 가운데 교도권에 대한 불순명이 계속되는데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확고한 전통 가톨릭 경향에 공감하는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에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추기경도 아닌데!)[12]에게 소수지만 표를 던지는 일도 있었다. 1978년에 선출된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도 선출된지 2달 후에 그의 알현을 받고 이야기를 해봤지만, 긍정적인 결론을 도출하지 못하였다.
이렇게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따른 교황청 노선을 거부함으로서 교황청과 계속 갈등을 빚는 와중에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매년 바티칸을 방문했다. 대주교 자신과 성 비오 10세회가 교황과 교황청을 인정하며, 교황과 교황청으로부터 자신과 성 비오 10세회가 승인받길 원한다는 표현이었다. 동시에 교회 위기의 최종적 해결책은 교황과 교황청에서 나올 수 밖에 없다는 대주교 본인 생각의 표현이기도 했다.

2.7. 주교성성과 파문


1987년 만 82세로 연로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의 후임으로 세울 주교를 성성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또 다시 논쟁을 불러왔는데, 주교 성성을 받기 위해서는 교황의 허락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파국을 피하기 위하여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성 비오 10세회와 협상에 들어갔다. 당시 신앙교리성 장관이었던 요제프 라칭거 추기경이 교황청 측 협상자로 선임되어 후임 주교 성성 문제, 교리 문제, 전례 문제 등에 대하여 성 비오 10세회와 협상을 시작했다. 동시에 교황청에서는 추기경 2명을 파견하여 성 비오 10세회의 각급 기관들을 시찰했다. 이 때의 협상 끝에 합의가 도출되었는데, 이에 따르면 성 비오 10세회 측에서는 자신들이 추천한 사제들 중 1명을 교황의 동의를 얻어 주교로 성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교황청 측에서 주교 성성 허락을 자꾸만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자, 참다못한 르페브르 대주교는 "아니 그럼 내가 죽을 때까지 기다리라는 것인가!"라면서 교황청 측에서 애초에 주교 성성을 허용할 의사가 없는 것이라고 판단했고, 이윽고 그는 자신을 지지한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가 참석한 가운데 1988년 6월 30일, 교황의 허락 없이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 4명의 사제를 주교로 성성하였다.[13] 뒤이어 교황은 그와 그가 서품한 4명의 주교와 주교 성성식에 참석한 안토니오 드 카스트로 마이어 주교 6명을 모두 파문했다. 이어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은 7월 2일 자의 교서 《하느님의 교회》(Ecclesia Dei)에서 르페브르의 주교 서임식을 비판하면서, 이는 가톨릭교회를 분열시키는 행위에 해당하기 때문에 명백히 파문에 처한다는 입장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주교성 교령

뚤르의 전임 주교요 대주교였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지난 6월 17일의 교회법적 공식 경고와 그의 의도를 철회하라는 거듭된 호소에도 불구하고, 교황의 위임 없이 교황의 뜻을 거슬러 4명의 사제를 주교로 축성함으로써 이교적 행위를 자행하였으며, 따라서 교회법 제1364조 1항과 제1382조에 규정된 제재를 초래하였다.

모든 법률적 효력을 감안하여, 본인은 위에 언급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와 베르나르 펠레, 베르나르 티씨에 드 말레레, 리차드 윌리엄슨, 알퐁소 데 갈라레타 신부는 사도좌에 (사면이) 유보된 자동 처벌의 파문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바이다.

더 나아가, 본인은 캄포스의 전임 주교인 안토니오 데 카스트로 마이에르 주교가, 그 전례 거행에 공동 축성자로서 직접 참여하고 그 이교적 행위를 공공연하게 지지하였으므로, 교회법 제1364조 1항에 규정된 파문 제재를 받았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사제틀과 신자들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교를 지지하지 말라고 경고하는 바이다. 이를 어길 경우, 자동 처벌의 파문이라는 중벌을 받을 것이다.

주교성에서,

1988년 7윌 1일,

주교성 장관 베르나르디노 강땡 추기경

1988년의 주교성성식
이런 교황청의 결정에 대해서, 르페브르 주교를 비롯한 성 비오 10세회에서는 자신들은 가톨릭의 일원이며, 주교 서품은 전통 가톨릭의 수호와 유지를 위한 것일 뿐, 이교가 되려고 한 건 아니었다면서 파문 결정에 불복했다.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성성받은 주교 4명에 대한 파문은 2009년 1월 21일에 교황 베네딕토 16세에 의해 철회되었다. '르페브르 대주교가 임명한 주교들의 파문 제재 사면' 교령에는 '이 교령으로 1988년 7월 1일 주교성이 선언한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 제재를 사면한다. 또한 본인은 '''오늘 날짜로 당시 발표한 교령이 법적 효력을 상실''''한다고 되어있다.

[교황청 주교성]

르페브르 대주교가 임명한 주교들의

파문 제재 사면에 관한 교령 (2009년 1월 21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1988년에 서품한 네 명의 주교들에게 내려진 파문 제재를 교황 성하께서 사면하신 조치와 관련하여, 교황청 주교성 장관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이 2009년 1월 21일자로 서명한 교령이 발표되었다.]

이 교령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베르나르 펠레이 주교는 1988년 6월 30일 서품된 다른 세 명의 주교를 대표하여 교황청 비오 10세 형제회원 재일치(Ecclesia Dei) 위원회 다리오 카스트리욘 오요스 추기경에게 보낸 2008년 12월 15일 서한에서 1988년 7월 1일 교령으로 공식 선언한 주교성의 자동 파문 제재(excommunicatio latae sententiae)의 철회를 다시 한 번 요청하였다. 이 서한에서 펠레이 주교는 다른 사항과 더불어 “우리는 계속 가톨릭 신자로 머물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인 로마 가톨릭 교회에 우리의 온 힘을 기울여 봉사하겠다는 굳은 다짐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을 자녀다운 마음으로 받아들입니다. 우리는 베드로의 수위권과 그 특권을 굳게 믿고 있으며, 그러기에 현재의 상황이 우리에게 커다란 고통이 되고 있습니다.”라고 천명하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는 관련 당사자들이 표명한, 파문 제재에 따른 영적 고통에 대한 아버지다운 연민을 가지시고, 앞에서 말한 서한에서 그들이 사도좌 당국자들과 필요한 토의를 거쳐 현안 문제가 신속하고 온전하며 만족스럽게 해결되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이겠다는 약속을 신뢰하시면서,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의 주교 서품에 따른 교회법적 지위를 재고하도록 결정하셨다.

이 조치로 상호 신뢰 관계가 공고해지고 비오 10세회와 사도좌의 관계가 강화되고 견고하게 되기를 바란다. 크리스마스 축제 끝에 찾아온 이 평화의 선물이 보편 교회의 사랑의 일치를 촉진하고 분열의 걸림돌을 제거하는 표지가 되기를 바란다.

이제는 비오 10세회 전체가 교회와 온전한 일치를 신속히 이루어 가시적인 일치의 표징인 교황의 권위와 교도권을 진심으로 인정하고 진정으로 충성한다는 사실을 보여 주기를 바란다.

교황 베네딕토 16세 성하께서 명시적으로 부여하신 권한에 따라 본인은 이 교령으로 1988년 7월 1일 주교성이 선언한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 주교에 대한 자동 파문 제재를 사면한다. 또한 본인은 오늘 날짜로 당시 발표한 교령이 법적 효력을 상실하였음을 선언한다.

 

로마 교황청 주교성에서 2009년 1월 21일

장관 조반니 바티스타 레 추기경

<원문 Congregation for Bishops, Decree Remitting the Excommunication ?atae Sententiae?of the Bishops of the Society of St. Pius X, 2009.1.21.>


2.8. 말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총장직에서 물러난 이후는 물론이고 주교 성성 이후로도 성 비오 10세회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주교 성성 이후에도 사목 활동을 계속했는데 이는 선종 몇 주 전까지 계속되었다. 선종 전 해인 1990년 6월에는 그가 젊었을 적 선교사제로 활동했던 아프리카 가봉을 방문하여 성 비오 10세회 소속 성당을 축성하고 신자들에게 견진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또한 1987년에는 한국 선교를 지시하여 한국에 사제를 파견했고, 서초구 인근에 성모무염시태성당을 세우고 성 비오 10세회 교구를 만들었다.[14]
가봉을 방문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1991년 3월 8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생전의 마지막 미사를 봉헌했다. 미사 후 그는 성전(聖傳) 동호회에 속한 수도회 설립자들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 차를 타고 파리로 떠났다. 그러나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다음날 새벽 중도에 차를 돌려 스위스로 돌아갔다. 그 날 오전 그는 스위스 마르티뉘의 병원에 입원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병원 입원 중에 수술을 받을 때까지 성체를 영했다. 종부성사는 3월 11일 받았다.
1991년 3월 25일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스위스 마르티뉘의 병원에서 으로 선종했다. 향년 86세. 선종한 지 8일만에 장례미사가 봉헌되었고 시신은 스위스 에콘에 있는 성 비오 10세 신학교 지하 묘소에 안장되었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장례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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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묘비

3. 사상과 평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구원되지 못한다고 교회는 가르친다.''' 가톨릭 신자인 우리가 믿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인즉, 교회가 항상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또 다른 하느님, 또 다른 진리, 또 다른 구원이 있을 수 없으며 오직 그리스도 예수님만이 계실 뿐이다. 그것이 우리 그리스도인 생활의 중심이며 기초인 동시에 목표이고, 언젠가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생활한 것에 대한 보상으로 영광스러운 관을 쓰게 되는 것도 그것을 통해서이다. 한마디로 지상에서건 천국에서건 오직 하나이신 우리 기쁨, 예수 그리스도밖에 아니 계신 것이다. 확신하건대, 이 진리를 단언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들 이해하리라. 우리가 아닌 예수님이 직접 당신의 은총을 받기에 적당한 방법을 골라 주셨다. 당신이 택하신 수단은 십자가인즉, 지상의 우리 제대 위에서도 십자가 및 십자가 상에서의 당신 희생이 계속되도록 정하셨다.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의 갈바리아[15]

가 계속되는 곳은 우리 제대 위 말고는 어느 곳에도 없다.[16]

지지자들에게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리와 전례를 지키려는 '''전통 가톨릭 경향의 정초를 놓았다'''는 평을 듣는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교리와 전례 보전에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은 것이다.
교리와 전례에 있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들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결과물이라 할 수 있는 교회일치주의와 바오로 6세 미사 등에 반대하거나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교황 바오로 6세의 새 미사 의무화에 강하게 저항하였다. 그는 가톨릭을 유일한 참 종교라고 생각했으며, 바오로 6세 미사는 미사이긴 하되 흠결이 있는 미사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교회일치주의나 종교간 대화는 잘못된 것이고 트리엔트 미사를 고수하려는 사람들에게까지 바오로 6세 미사를 의무화하는 것도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평생 가톨릭의 교리와 전례에 있어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의 전통을 지키려고 강하게 노력했다. 그리고 그의 노력은 수많은 충돌에도 불구하고 어느정도 성과를 거두었는데, 특히 트리엔트 미사와 관련해서 그렇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제한적으로 트리엔트 미사를 허용한 조치와 교황 베네딕토 16세가 대폭 트리엔트 미사를 허용한 조치는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영향을 받은 전통 가톨릭 신자들을 의식해서 취해진 조치이다.참고로 현재까지 트리엔트 미사를 봉헌하는 단체들 중 가장 규모 있는 단체는 그가 세운 성 비오 10세회라고 한다.
그의 사상을 그대로 이어받은 성 비오 10세회의 성향과 최근 행보에 대해서는 해당 문서를 참고하자.

3.1. 비판


성청 방송은 2일 지난달 29일 르페브르대주교의 불법적인 사제 서품에 대한 성청의 공식적인 침묵을 깨뜨리기 위한 일련의 조처로 그에 대한 아프리카 추기경 2명의 비판 내용을 공개했다.

먼저 1962년 르페브르 대주교로부터 주교 서품을 받았으며 현재 세네갈 「다카」 대교구장인 티안둠 추기경은 '''『귀하가 로마에 충성을 선언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2차 「바티깐」 공의회와 교황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있는 것은 귀하 스스로를 교회의 거룩한 친교밖에 내던지는 행위』'''라고 경고했다

다음으로 아프리카 ─마다가스칼 주교회의 심포지움 의장인 쥰그라나 추기경은、르페브르 대주교가 지난해에 성무집행 정지 처분을 받았음에도 사제 서품을 거행한 것은 '''『교회를 거부하고 교회에서 이탈하려는 불순명에 기초를 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1977년 7월 24일 가톨릭 신문 기사

한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주교 서품식 하루 전인 6월 29일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주교 서품식을 하지 말라고 마지막으로 호소했으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이를 무시했다.(중략)

6월 17일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6월30일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이루어진 주교 서품은 명백하게 교황의 뜻을 거역한 것이라고 밝힌 교황청은 특히 교황 성하께 대한 불복종과 그에 속한 교회 구성원들과의 일치를 공개적으로 거부함으로써 교회법 751조 규정에 의한 분열 행위를 정식으로 저지른 것이라고 강조했다.

교황청은 이에 따라 르페브르 대주교나 그에 의해 서품된 주교 모두 자동적으로 '''파문'''을 당하게 된 것이라고 밝혔다.

1988년 7월 10일 가톨릭 신문 기사1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은 각국 교회들이 자국어로 미사를 봉헌할 수 있게 한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결정에 반발해왔으며 교회가 성 문제에 지나치게 관대하며 비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해서도 타협적이라고 비난해 왔다.

새로운 시대의 움직임에 발맞추려는 교회의 쇄신과 민주화를 위한 움직임에 대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이러한 보수적인 견해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의 해석을 둘러싸고 1968년 이래 바티깐과 총돌을 빚어왔으며 1976년에는 교황 바오로 6세에 의해 성무집행 중지 처분까지 받았다.

뿐만 아니라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티깐이 「신앙의 장애」가 되어왔으며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거짓 신의 사도이며 반그리스도교적 현대주의 대표자」라고 비방을 되풀이해왔다.''' 또한 그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는그러한 교황과 교계제도에 대해서 의무를 지니지 않을 뿐아니라 바티깐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크리스찬의 임무일지도 모른다고 주장해왔다.

이러한 르페브르 대주교의 반교회적인 언동에도 불구하고 바티깐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다른 종파로 분리돼 나갈 경우 미칠지 모르는 교회의 이미지 및 파란을 피하기 위해 다각적으로 그를 설득해 왔다.

이러한 노력의 하나가 지난 5월 5일의 요세프 라칭거 추기경과 르페브르 대주교의 만남이었다. 르페브르 대주교와 교리 문제에 관한 교황의 측근 고문인 라칭거 추기경은 수개월 간에 걸친 치열한 논쟁을 벌인 끝에 합의에 도달, 르페브르 대주교는 제2차 바티깐 공의회에 대한 사목을『전통에 의한 것으로 이해한다』고 인정하고, 바티깐은 르페브르 대주교가 추천한 4명 중 1명을 주교로 서품하도록 인정한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르페브르 대주교는 자신이 서명한 합의를 깨뜨리고 다음날인 5월 6일 기자회견에서 멋대로 합의안을 비난하고 『4명 모두의 서임을 추진하겠다』고 밝힘으로써 르페브르 대주교 및 그의 추종자를 설득하여 교계제도 내로 수용하려는 바티깐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었다.'''

1988년 7월 10일 가톨릭 신문 기사2

교황청과 일치한 전통 가톨릭 성향의 신자들에게는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거부하는게, 도대체 어딜 봐서 전통 가톨릭인가?'''라는 평을 듣는다. 세속국가에 비유하자면, 헌법을 부정하는 사람을 과연 '원칙을 지키려는 애국자'라고 추켜세울 수 있을지는 논란이 일어날 수 밖에 없다.[17] 물론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온다는 믿음은 가톨릭의 기본적인 믿음이지만, 이 기본적인 믿음들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막는게 교도권이 하는 일이다.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전통 가톨릭를 자처하면서도, 교도권에 대한 순명을 지키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한 결점을 남겼다고 할 수 있다. SSPX신자들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가 신념 있는 참된 가톨릭 성직자라고 포장하지만, 정작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가톨릭 교회의 교도권을 대놓고 무시하였다. 이는 명백하게 비정통적이고 비가톨릭적인 행위이다.[18][19] 이러한 입장에서 보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통적인 가톨릭 신자라고 할 수 없으며''' 다르게 생각해보면 주관적인 입장을 가지고 교도권(베드로좌)에 대항하여 파문 받은 사제이다.[20]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유는 이전 관습을 고수한다는 명분이 있기 때문에 전통주의 성향의 일부 현대 가톨릭 신자들에게도 지지를 받는 것이다. 물론 다른 부분에서 전통적인 신자들은 성 비오 10세회를 배척한다.
또한 위에서도 강조되었지만, 과거보다 교황청이 성 비오 10세회에 대해 온건한 스탠스를 취한다고 해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파문이 철회된 것은 아니다. 파문이 철회된 사람은 어디까지나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서품 받은 베르나르 펠레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마예레, 리처드 윌리엄슨, 알폰소 데 갈라레타 주교들 한정이지, 당사자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아직까지도 교회와의 전혀 일치되지 않았다. 당연히 교황청이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말을 '옳다.'고 인정한 것도 아니다. 당장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교황청의 허용만 하더라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의 입장과는 큰 차이가 있는데,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는 바오로 미사의 '결함'을 주장하며 트리엔트 미사를 고집했지만, 교황청은 트리엔트 미사와 바오로 미사가 둘 다 '옳으므로' 트리엔트 미사를 허용한 것이다. 이 둘에는 명백한 차이가 있다.
물론 성 비오 10세회 및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그리고 기타 전통 가톨릭주의자들의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요구가 '여론'이라는 의미에서는 트리엔트 미사의 허용에 영향을 주었을지도 모르나, 트리엔트 미사에 대한 허용을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개인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수용'으로는 해석할 수 없다. 이 둘은 다르다.
정치적으로는 포르투갈안토니우 살라자르 정권과 스페인프랑코 정권 등 권위주의 독재정부를 2차세계대전에서 중립을 지켰다는 이유로 옹호한 것, 이슬람에 대한 지나친 일반화와 과격한 편견을 표출하는 모습을 보인 것, 비시 프랑스 하의 가톨릭 교회를 옹호한 것, 프랑스의 극우정치인 장 마리 르 펜국민전선과 연대한 것 등 극우 성향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특히 이 부분은 마르셀 르프르브에 대한 다른 비판이 주로 교리문제에 근거하여 교회 내에서 가해지는 데 비해, 교회 바깥의 사회적 인식과도 큰 관련을 가진 비판이라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질 만 하다. 유럽의 진보주의자들(대부분 무신론자나 진보적 개신교인)은 정교분리를 당연시하는 세속주의적 원칙에 따라 기독교(특히 가톨릭)에 비판적인 태도를 취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유럽의 역사에서 가톨릭 교회는 천년 이상의 긴 세월동안 정치권력 구조의 중요한 일부분이었고, 이 때문에 사회 변화에 대한 요구가 폭발적으로 성장한 18~19세기 이후에는 구체제(앙시앵 레짐)의 가장 중요한 보루 역할을 했다는 역사적 기억 때문이다. 즉, 유럽의 정치사에서 가톨릭은 절대왕정시기부터 대부분의 사회 변화에 저항한 아주 강경한 복고주의적 보수의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
이 때문에 가톨릭의 영향력(특히 정치적 영향력) 확대에 대한 우려는 유렵(특히 가톨릭의 영향력이 큰 국가들)의 급진주의나 진보주의, 자유주의에서 세속적 보수주의에 이르는 넓은 정치적 스펙트럼 전반에서 발견되는 현상이다. 간단히 말하자면 가톨릭이 반동적 극우세력이나 파시즘 세력과 손을 잡고 사회를 과거로 되돌리려고 시도하지 않을까 우려하는 것. 이러한 우려가 지나치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 당장 가톨릭의 교세가 강했던 이베리아 반도의 독재정권들이 자국내의 가톨릭 세력을 주요한 권력 파트너로 삼아 정권을 공고히 한 바 있고, 가톨릭 교회 역시 아직 교황령 내에서의 세속권력을 가지고 있던 19세기 후반 비오 9세 무렵만 해도 멀쩡한 유태인 집안 아이를 유괴해다가 세뇌해서 가톨릭 사제로 키우는(...) 만행을 아무렇지도 않게 저지르는 등의 전과가 이미 있었던 것.
이 측면에서, 요한 23세의 2차 바티칸 공의회는 세속주의적 정치세력들에게도 높게 평가받는 경우가 많다. 이는 말하자면 종교의 사회적 영향권을 순수하게 종교적 영역으로 재설정함으로써 변화한 사회상과 조화를 이루고 이전까지 분쟁관계였던 진보주의, 자유주의 정치세력과도 화해하려는 시도로 받아들여졌던 것. 따라서 이에 저항하여 종교 원리주의의 유지를 주장한 마르셀 르페브르의 주장은 사회적으로 경계의 대상이나 엄중한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고... 더구나 르페르브가 지도한 성 비오 10세회 내에서 권위주의 독재정부나 극우 파시즘에 대한 지지나 종교적 배타주의, 반유대주의적 흐름이 적지 않게 튀어나오면서 이런 우려가 정말 근거있다는 것을 스스로 입증해 버린 셈이다.

4. 여담


그의 생애와 사상을 다룬 다큐멘터리가 2012년 제작되었다. 제목은 <르페브르 대주교 - 다큐멘터리 필름>(Marcel Lefebvre – Archbishop in Stormy Times)이다. 한국어 더빙판을 본 링크에서 볼 수 있다. <르페브르 대주교 - 다큐멘터리 필름>(Marcel Lefebvre – Archbishop in Stormy Times)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말르레 주교[21]가 엮은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전기인 《마르셀 르페브르》가 있다. 한국에는 2011년 번역되었다. 일반 서점에서는 구할 수 없고 성 비오 10세회에 가면 구할 수 있다. 이 책 외에도 르페브르 대주교의 강론 모음집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도 한국어로 번역되어 1999년 선우미디어에서 출판됐다.
개인적 성품은 온화하면서 단호했다고 한다. 교회에서 강론할 때나 타인과 대화할 때나 흥분하지 않고 조근조근하게 말했다고. 단 위에서도 보다시피 말투는 조곤조곤 하면서도 말 자체는 상당히 과격하게 하였다.

[1] 마르셀은 마르첼로를 프랑스식으로 읽은 것이다.[2] 해외의 가톨릭 언론을 확인해보면 어느 쪽으로 평가하든 트리엔트 전례의 지속에 관해서는 그와 그의 SSPX 영향을 부정하는 평가는 드물다.[3] 결혼 전 이름은 가브리엘 봐띤[4] 마르셀의 형과 아버지는 이름이 같다.[5] 1804-1852, François Libermann, 본명 Jacob Libermann[6] 성령신부회 총장직에서 물러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게 로마의 프랑스 신학교 학생들 중 전통주의자들이 접촉을 해왔다.[7] 에콘 신학교[8] 《마르셀 르페브르》, 베르나르 티시에 드 말르레, 한국 성 비오 10세회, p838[9] 여기서 나타난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 측 반응에서도 대응 방식의 문제가 드러난다. 이런 사제들의 행각을 봤으면, 교황청에 시찰온 사제들의 문제점이 있음을 보고하고 제대로 된 다른 시찰단을 보내주면 순명하겠다고 요청할 수도 있는데 대놓고 11월 21일 선언을 통해 교황청 자체를 반대하는 식의 행보를 보였으니...[10] 장 기통은 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순명했지만 동시에 성 비오 10세회의 입장도 이해하는 사람이어서, 나중에 인터뷰에서 본인이 만약 교황의 위치에 있다면 트리엔트 미사를 특정한 상황 하에 허가해줄 생각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11] 이 1번 해결책을 선택한 쪽이 현재 교황청 지도 아래 합법적으로 일치되어 활동하고 있는 전통 가톨릭 단체들(성 베드로 사제회, 그리스도왕회, 착한 목자회, 성 베네딕토 센터 등)이다.[12] 가톨릭 교회법상, 이론적으로 교황 선출자격은 모든 세례받은 성인 가톨릭교도 남성에게 주어진다. 하지만 관례상, 역사상 적어도 추기경은 되어야 교황 후보에 적합하다고 여겨져 왔던 상황에서 주교에게, 그것도 전임 교황과 대착점에 섰던 주교에게 표가 갔다는 것은 당시 자유주의자 내지는 진보주의자들에게도 적지 않은 충격이었을 것이다.[13] 당시 르페브르 대주교는 83세의 고령인 데다 암에 걸려 언제 세상을 뜰지 모를 상황이었기 때문에 주교 성성은 그에게 하루라도 빨리 처리해야 할 시급한 문제였다. 교황청은 1명의 주교 서품엔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으나 주교 성성 허용은 계속 미루고 있었다. 그러자 르페브르는 4명을 서품하여 반발한 것.[14] 방한 계획도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시행되지는 못했다.[15] 십자가상 희생제사[16]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 마르셀 르페브르, 선우미디어, p26-49[17] 현대 한국의 사례에 비교해본다면, 흔히 태극기집회라 불리는 친박집회 참여자들이 받는 비판과 비슷하다. 참여 당사자들은 자신들이 헌정질서를 파괴하려는 세력에 맞서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하려는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반대파측은 오히려 이들이 박근혜의 헌정 문란 행위를 옹호하고 적법절차에 의해 이뤄진 탄핵을 사기나 날치기라고 비하함으로써 오히려 헌정질서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적인 부분을 부정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 즉 르페르브 역시 가톨릭 전통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가톨릭 전통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인 교황의 교도권을 부정함으로써 가톨릭 전통 중 자신들에게 편리한 것만 취사선택하여 지키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는 비판을 듣고 있는 것이다.[18] 개신교를 가리키는 용어인 '프로테스탄트'도 교황의 교도권에 대항한 복음주의자들이라는 데서 유래되었다.[19] 교도권을 온전히 존중하는 현대 가톨릭 신자들은 교황의 권한과 권위를 인정하는 만큼 교황공석주의자들을 부정적으로 본다. 아니, 개신교도보다 더 명백히 부정적으로 볼 것이다. 개신교는 가톨릭 교회 밖으로 나갔다고 모두가 인정한다. 하지만 교황공석주의자들은 스스로를 '참된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며, 오히려 가톨릭 내부에서 신자들의 올바른 관점을 왜곡하려 들기 때문에 그 해악이 더 크다. 가톨릭과 개신교와의 문제가 어디까지나 '외부의 문제'라면, 공석주의자들은 내부에서 문제를 일으킨다.[20] 이러한 행동의 근원은 전통에 대한 불완전하고도 모순된 개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별히 로마의 주교와 주교단이 지닌 교회의 보편적 교도권을 반대하는 전통의 개념은 모순된 것이다.[21] 마르셀 르페브르 대주교에 의해 1988년 주교가 된 4명 중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