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치슨 라인
Acheson line
[image]
애치슨 라인의 대략적인 모습.[1]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한다.
그동안 애치슨 라인은 미국이 '''"우리는 일본, 필리핀만 지키면 된다. 나머지는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라고 선언해서, 진짜로 니들끼리 알아서 한 탓에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통설로 널리 알려졌으나 90년대 동구권이 붕괴되며 공개된 문서를 보면 이 선언 이전에 이미 김일성이 모스크바에 찾아가 전쟁을 벌이겠다고 밀회를 하고 소련의 지지를 요청하였으며, 6.25 전쟁 역시 미군 개입 이전에 통일하겠다는 것이 전쟁 목적이었으니 남침 유도설과 함께 완전히 부정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사실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 표명'조차도 아니라서, 애치슨 자신은 이 선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여겼으며 나중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회고록에서조차 자신의 연설 장소나 제목을 혼동할 정도였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후 한국인들에겐 제대로 까이게 되었고, 미국 내에서도 정치성향을 가리지 않고, 특히 보수파에게는 평생까임권마저 얻었다.
덤으로 애치슨은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파괴된 일본의 성장을 앞당긴 구원투수로 지목받았다.[2] 전쟁특수로 쏟아져 들어온 달러가 일본의 전후복구에 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 그리고 일본과 더불어 독일의 재군비도 이 전쟁이 빌미가 되었다. 유럽 주둔 미군이 한국으로 가면서 전력공백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전범국이었던 독일은 1955년, 정식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일본에겐 상당한 수준의 재무장을 허용해주어야만 했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반도, 타이완 섬, 인도차이나 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포기한다'''라기보다는 '''상황을 봐서 도와줄지 여부를 결정하겠다''' 정도. 이는 표현에서도 나오는데 당시 애치슨이 쓴 단어는 직역하자면 방어선이 아니라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이다. 그리고 이는 만약 이 나라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지원해준다고 인식하였으며 당시 국내여론도 이렇게 인식했다.##
본래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 시 미국 육군이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연속으로 치뤘으므로 당분간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로 인해 전후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의 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3][4][5] 그런데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애치슨은 1954년의 한 세미나에서 "만약 대한민국이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더 도발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것은 사후변명이라는 의견이 있다. 6.25 전쟁 직전 미군은 국군 포병대 창설을 도우면서 포탄 낭비가 심하다며 대전차포탄 보급을 통제할 정도로 국군의 발목을 잡아놓고 있었다. 이것이 "포탄을 맞아도 멀쩡한 T-34"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애치슨 라인 바깥으로 놓아 명시적인 보장을 하지 않았고, 군사적으로는 한국군의 피복, 무장, 탄약, 운영비 모두를 관할하던 고문단이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 하여튼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비를 쓰기 싫어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다만 미국 입장에서 아시아는 바다 건너편이고, 소련이나 중국이나 육군 대국이며 미국은 해군 대국이니 유라시아 본토에서 격리되어 바다로 보호받는 도서지역을 절대로 지키겠다는 공산주의 봉쇄망도 일리는 있다.
추가적으로 당시 미국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무지도 고려해야 한다.[8] 지금에서야 모두가 한국전쟁의 전사를 익히 알고 있으니 당시 미국의 대응을 한목소리로 비난하지만, 1950년 1월 당시 구미 서방의 관점에서 제대로 근대화되었다고 할만한 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선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근대화에 근접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처절하게 털린 끝에 아예 해체되었고, 미국이 지원해준 중국 국부군은 부정부패 끝에 고작 치하 따위가 중장비의 전부인 알보병 중공군에게 대륙을 포기하고 타이완으로 도주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9]
그러므로 애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비(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지, 결코 '''공산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라인 밖의 비공산국가를 가만히 내버려두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설사 보수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NATO 밖의 우크라이나처럼 '전력을 다해 반드시 사수하는 지역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공산권에서 침공했을 때 그냥 내버려두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병력과 재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군대가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 둘 중 어느쪽을 미국이 직접 지키고 어느쪽을 지원하도록 전략을 짤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애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애치슨 선언 이후 북한에서 나온 발표의 내용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를 비난한다"'''였다. 즉 원조법안이 중요했다는 것. 그런데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 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 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애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 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애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국방비를 포함한 정부 예산 일체를 아직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2년차 정부가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 한국이 군사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여하튼 애치슨 라인은 실질적 의미는 적지만 그 당시 북한에게 사기 진작이 되는 명분을 주었고, "미국이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대해 자세한 파악을 하지 못했다!"라는 인상을 주어 남한 침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으므로 까여도 어쩔 수 없다. 애치슨 선언의 의미를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 이에 대응할 유의미한 전력을 갖춘 지상군을 신속 투입할 생각도 계획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중요한 게, 수천 수만의 인원이 장비를 다 갖추고 이동하는 것은 흔히 양판소에서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군대가 바로 움직인다는 설정과 달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어떤 부대부터, 어떻게 이동시키고, 이에 대한 보급은 어떻게 하고 등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실제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그래도 실행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일정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게 다반사다.[10]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급하게 투입된 스미스 대대 및 이들의 상위부대인 미 24사단이 대평리-공주 전투에서 전력을 손실한 채 치른 대전 전투에서 참패한 것도 급하게 투입되느라 전력을 다 갖추지 못한 것이 한 이유다.[11]
애치슨 라인의 설정이 북한의 남침 의도를 완전히 굳히게 만든 요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애치슨 라인이 설정되기 전부터 이미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무력 남침을 결정하고 소련의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본은 맥아더가 농업국가로 만들고 있었고 그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군수물자를 빠르게 조달할 곳이 없었다. 정작 북한은 공식적으로 애치슨이 설정한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 한국과 대만, 일본, 필리핀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고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에 발행된 《로동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2]
간단하게 설명하면, 2차대전 이후 일본은 사실상 미국 군정의 식민지였으므로 미군 입장에서 애치슨 라인의 의미는 대만과 한국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전쟁터로 판단, 군시설을 집중시키지 않고 전쟁터의 배후지로는 과거 식민지였던 필리핀(대만의 배후지)과 현재 식민지인 일본(한국의 배후지)을 활용한다는 전략을 선언한 것이다.[13] 여기서 미국 정부와 미국 군부의 입장이 달라지는데 정부는 정상화 정책으로 2차대전 이전으로 군대 규모를 감축하기 위해 완전 철수를 원했고 군부는 즉각 반격 규모의 병력 유지를 주장했다.[14]
따라서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정책이 중국을 자극할 것을 염려해 군사원조를 제한하고 있었으나 혹시 전쟁이 난다면 전쟁터로써 한반도를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요약하면 애치슨 라인에 일본, 필리핀은 지리적 위치상 태평양과 바로 직결되었고 아무리 군축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곧 하와이와 미국 본토로 직결되는 문제인데다 일본은 본토를 지킬 육군도 없었으니 미 육군이 직접 투입해서 공산권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할 필요가 있어서 포함시킨거고 대한민국, 대만, 남베트남은 태평양하고 직결되지도 않았고 일본과 필리핀이 배후에 있으니 미국은 해공군만 지원하고 육군은 현지에서 잘 훈련시키면 된다는 판단으로 제외시킨 것이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학자들이 있으나 이는 무시해도 좋다. 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으로 보고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1949년 6월 26일 철수했다. 남침유도설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미국이 한반도를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공산권의 미끼로 던진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종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수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대개는 원망과 한탄조 내지는 미군도 못 믿는다 정도의 뉘앙스지만.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남침유도설 주장이 재야와 대학가에 퍼졌는데, 이건 강대국들의 외교 문서가 공개되지 않던 냉전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전차같은 무기를 주면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 침공할까봐 두려워''' 방어적인 용도로 사용할 무기만 지원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38선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그럭저럭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북한군이 전차를 가졌으니 전차를 보급해달라는 등, 당시 중국과 소련을 통해 물자와 병력 보충을 받던 북한 사정을 근거로 한 이승만의 국군 전력 강화 요구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이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이전에도 잦은 과장을 일삼았기 때문에 미국은 그것을 억지 또는 착오로 여겼다는 것이다.[15] 사실 전차는 당대 뿐만 아니라 현대 군사학적 관점에서도 한반도의 산악지형에서는 '''있으면 좋기야 하지만''' 그 위력이 제한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말레이 전역에서 일본군 전차부대의 전과는 식민지 치안군의 졸전으로 치부되었으며, 국부군에 지원된 미국제 전차는 중공군을 막아내는데 별 역할을 못했으니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에 대한 추가적인 군비지원과 증강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했다. 기실 미국이 북한 사정을 알고서 한국군을 제어하려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차를 준다고 하더라도 당시 국군이 미국의 도움 없이 제대로 운용할 능력이 있을지도 미지수.[16]
그리고 남침을 유도했다면 정작 남침을 유도한 미군은 왜 박살이 났을까?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급한 나머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주일미군의 일부 부대인 일명 '스미스 부대'(미 24사단의 1개 보병대대+1개 포대로 이루어진 대대급 부대)를 먼저 파병했는데, 얘네들은 일본에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않고 아무 걱정없이 너무 편하게만 지낸데다가, 국공내전 및 일본군과의 치열한 게릴라전까지 치른 전투의 베테랑이었던 조선인민군을[17] 우습게 보다가 큰코 다치기도 했다. 첫타자인 스미스 부대는 그렇다 쳐도 그다음에 도착한 미 24'''사단'''은 사단 전체가 대전 전투에서 역시 개박살나다 못해 무려 사단장[18] 까지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 이쯤 되어서야 맥아더를 비롯한 본국의 미군 수뇌부는 북한군의 전투력을 재평가하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단순한 경찰활동'이 아니라 실제 전쟁임을 인식하고 가용가능한 군사력을 한국에 빨리 투입시키려고 난리를 쳤다. 만약 미국의 음모론 운운하는 일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군은 왜 한국전쟁 초반에 이리 허술하게 대처했을까? 백선엽도 회고록에서 북한군을 너무 깔본다고 초기에 참전한 미군들에게 얕보지 마라고 충고했지만 그 충고를 무시하고 실전 치른 미군이 호되게 털린 다음에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고 비아냥거리자 미군 장교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오해는 지금도 이어져서 웹툰 70의 작가 김재희가 직접 애치슨 라인은 한국에서 미국이 철수하여 일본을 방위선으로 삼는 계획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흥미로운 점은 딘 애치슨은 통념과 달리 한반도에 대해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마셜과 애치슨은 의회에 그리스와 터키의 경제원조 금액은 각 4억 달러를 요청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금액은 6억 달러를 요청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직접 대치하는 곳이었으며, 두 체제(regime)가 실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뒤 애치슨은 기존 트루먼 독트린에 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문제의 애치슨 선언을 발표한다.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연구결과에서 에치슨 라인은 중요한 고려대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 실제 에치슨 라인이 오히려 미국이 한국을 지원할 수 있으므로 조기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북한이 인식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실 에치슨 라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었음'''은 물론 미국 내 보수파들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46년에만 해도 한반도에는 미 육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M7 프리스트나 M18 헬캣 같이 T-34에 유효타를 줄 수 있는 장비까지 있었지만, 모두 다 빼버리는 바람에 한국은 부산 앞까지 밀려버리고, 나중에 투입된 미군의 피해 또한 커졌다. 실제로도 1950년 말에는 의회결의 형식으로 국무장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고, 죽을 때까지 보수파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변호해야만 했다. 한국에서의 악명이야 둘째치고 미국에서도, 한국전쟁 동안 미국은 엄청난 군비를 썼고 만단위 사상자가 났으며, 외교전략을 고쳐 일본과 독일을 완전히 청소하지 못한 채 재무장시켜야 했고, 이 전쟁과 전후처리 동안 소련과 중국을 대등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 선 하나 때문에 그 전쟁이 일어났을 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애치슨이 좋은 소리를 절대 듣을 수 없다.
애치슨 자신이 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고 정치가로서도 평판이 좋았다는 점에서 애치슨 선언은 유능했지만 불행하게도 아시아 정세에 어두운 정치가가 당장 눈앞에 닥친 국내정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이 발생할 것이 예상되는 지역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는 어설픈 암시를 했다가 진짜 피 터지는 전쟁에 말려든 비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게다가 애치슨은 미국 국내만 아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럽 방면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식을 가진 정치가라 더욱 비극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정치 전반에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당장 마셜 플랜이나 서유럽의 재건, 소련 블록의 확대 방지나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창설 등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주요 업적은 사실 애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오히려 서유럽에서 그는 '''서유럽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고,'''[19] 이렇게 유럽에 상대적으로 더 관심이 있고 아시아에는 한국, 일본 및 남베트남을 제외하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후 냉전/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 왔다. 그나마 한국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6.25 전쟁 이후였고.
아이러니하게도 현 미국의 패권정책을 기반을 다져놓은 게 이 사람이고, 오히려 한국 덕분에 미국이 구해졌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당시 싱크탱크에서 이러한 정책을 주장했으나 트루먼과 국민들의 불신을 받았지만, 6.25로 인해서 공산권의 확장이 확인되면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 및 공산 세력의 위력에 놀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의 참전이 확정된 후 서둘러 한국군 지휘권을 (한국 주둔 유엔군 사령부라는 이름으로 된) 주한미군에 넘겨주게 된다. 이후 평시작전권은 돌려받았지만, 핵심인 전시작전통제권은 계속 한미연합사령부가 행사하고 있다.
2006년 동북아시아 평화포럼 참석차 방한한 리처드 리 아미티지 전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 "애치슨 라인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그어 분단이 되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당시 미국은 한국을 미국 방위선인 애치슨 라인 밖이라고 해서 북한의 오판을 가져왔다"고 밝혔고 이에 아미티지 장관은 "은혜를 모른다는 것은 잘못됐다며 당시 미군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전해졌다.기사
최근에는 중국이 부상하고 대한민국과 대만이 미국의 동북아시아의 중요 동맹국이 되자 미국정계는 하마터면 애치슨 때문에 중요 동맹국이 날아갈뻔 했다고 보기도 한다.[20]
대체역사소설인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그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비밀 회담을 제의하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그날 밤 애치슨은 분노에 찬 채로 폭음을 하고 바로 다음 날 과로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존 포스터 덜레스[21] 가 새로운 국무장관이 되고 맥아더가 한국전쟁의 작전권을 계속 가지게 되면서 미국은 아시아 중심의 외교/국방정책 노선으로 전환한다. 덕분에 애치슨은 죽은 뒤에도 자꾸 까인다.
드라마 야인시대 80회에서 잠깐 언급된다. 유진산과 전진한, 김두한의 대화에서 미국이 발표한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일본, 필리핀 일대를 설정했다고 말한다. 즉 김일성이나 소련군, 중공군이 쳐들어와도 미국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회인 81회에서는...
1. 개요
[image]
애치슨 라인의 대략적인 모습.[1]
1950년 1월 12일에 미국의 국무장관이던 딘 애치슨(1893~1971)이 선언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이다. 애치슨은 워싱턴 내셔널 프레스 클럽에서 열린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 참석하여 <아시아의 위기>라는 제목으로 연설하면서, 소련과 중국의 영토적 야욕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재확인하는 발언을 했다. 여기서 그는 태평양에서 미국의 극동방위선을 알류샨 열도 - 일본 - 오키나와 - 필리핀을 연결하는 이른바 '애치슨 라인'으로 결정한다고 발표한다.
2. 통설이었던 것
그동안 애치슨 라인은 미국이 '''"우리는 일본, 필리핀만 지키면 된다. 나머지는 니들끼리 알아서 해라."'''라고 선언해서, 진짜로 니들끼리 알아서 한 탓에 전쟁이 일어나고 말았다는 통설로 널리 알려졌으나 90년대 동구권이 붕괴되며 공개된 문서를 보면 이 선언 이전에 이미 김일성이 모스크바에 찾아가 전쟁을 벌이겠다고 밀회를 하고 소련의 지지를 요청하였으며, 6.25 전쟁 역시 미군 개입 이전에 통일하겠다는 것이 전쟁 목적이었으니 남침 유도설과 함께 완전히 부정되었다.
게다가 이것은 사실 '미국 정부의 공식 입장 표명'조차도 아니라서, 애치슨 자신은 이 선에 대해서 아주 가볍게 여겼으며 나중에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는 회고록에서조차 자신의 연설 장소나 제목을 혼동할 정도였다. 하지만 6.25 전쟁 발발 후 한국인들에겐 제대로 까이게 되었고, 미국 내에서도 정치성향을 가리지 않고, 특히 보수파에게는 평생까임권마저 얻었다.
덤으로 애치슨은 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파괴된 일본의 성장을 앞당긴 구원투수로 지목받았다.[2] 전쟁특수로 쏟아져 들어온 달러가 일본의 전후복구에 큰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 그리고 일본과 더불어 독일의 재군비도 이 전쟁이 빌미가 되었다. 유럽 주둔 미군이 한국으로 가면서 전력공백을 채워야 했기 때문에 전범국이었던 독일은 1955년, 정식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으며 일본에겐 상당한 수준의 재무장을 허용해주어야만 했다.
3. 진실
흔히 이 선언을 통해 한반도, 타이완 섬, 인도차이나 반도가 애치슨 라인에서 제외되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보다 정확히는, '''포기한다'''라기보다는 '''상황을 봐서 도와줄지 여부를 결정하겠다''' 정도. 이는 표현에서도 나오는데 당시 애치슨이 쓴 단어는 직역하자면 방어선이 아니라 방어적 주위(defensive perimeter)이다. 그리고 이는 만약 이 나라들이 위험에 빠진다면 지원해준다고 인식하였으며 당시 국내여론도 이렇게 인식했다.##
본래 애치슨 라인의 진정한 목적은 국제분쟁 발생 시 미국 육군이 즉시 지원할 수 있는 범위를 한정한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미국 정부는 세계 대전을 2번이나 연속으로 치뤘으므로 당분간 큰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은 낮다고 여겼고, 현실적으로도 이를 부담스럽게 생각했다. 그로 인해 전후 급속히 군비를 축소하였고, 그로 인해 한국전쟁 발발 직전에 이르러서는 미군의 군기나 장비 상태가 엉망이 되었다.[3][4][5] 그런데 이승만은 계속 북진통일을 강력하게 주장했다. 애치슨은 1954년의 한 세미나에서 "만약 대한민국이 확고한 보장을 받았더라면 더 도발적이고 호전적으로 변했을 것"이라고도 말했다.
이것은 사후변명이라는 의견이 있다. 6.25 전쟁 직전 미군은 국군 포병대 창설을 도우면서 포탄 낭비가 심하다며 대전차포탄 보급을 통제할 정도로 국군의 발목을 잡아놓고 있었다. 이것이 "포탄을 맞아도 멀쩡한 T-34"의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외교적으로는 애치슨 라인 바깥으로 놓아 명시적인 보장을 하지 않았고, 군사적으로는 한국군의 피복, 무장, 탄약, 운영비 모두를 관할하던 고문단이 발목을 잡고 있었던 것. 하여튼 미국이 한반도에서 군비를 쓰기 싫어했던 것은 사실인 듯 하다.
- 약간의 반론을 첨가하자면 실제로 포탄 낭비가 심했던 건 사실인데 옹진반도의 국지전에서 북한군 1명을 죽이는데 105mm 곡사포탄 350발과 각종 박격포탄을 포함하여 14,700여발을 소모했다. 당시 한국군 포병대는 미군보다 더 많은 포탄을 소모하고 전과는 저 수준이었다. 당연히 이런 비상식적인 포탄 소모를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는 일이다. 그리고 T-34는 57mm 대전차포로 320m 이내에서 격파할 수 있고 실제로 철갑탄을 사용해서 격파했다는 증언, 기록이 있다. 물론 코앞에서 쏴서 맞췄는데도 튕겨나갔다는 증언 및 기록[6] 도 있다. 게다가 당시 미국 자체가 한창 군축중이라 주일미군도 대전차포탄이 24발뿐이었을 정도였으니 한국군의 군비를 마냥 대줄 수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여기에 6.25 전쟁 10대 미스터리 문서에서도 언급하고 있지만 당시 이승만 정부의 대북 강경론은 미국은 물론이고 UN 한국소위원회조차 우려를 표하며 한국군의 탄약 불출에 제동을 걸 지경이었다. 당시엔 중국이 무너진 상태였고, 소련은 핵폭탄 개발에 성공해 핵 우위도 무너진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이승만 정부나 김일성 정부나 서로서로 고강도 도발 발언을 쏟아내는데 옆에서 보고 있자면 조마조마한게 당연.
다만 미국 입장에서 아시아는 바다 건너편이고, 소련이나 중국이나 육군 대국이며 미국은 해군 대국이니 유라시아 본토에서 격리되어 바다로 보호받는 도서지역을 절대로 지키겠다는 공산주의 봉쇄망도 일리는 있다.
추가적으로 당시 미국의 유럽 외 지역에 대한 무지도 고려해야 한다.[8] 지금에서야 모두가 한국전쟁의 전사를 익히 알고 있으니 당시 미국의 대응을 한목소리로 비난하지만, 1950년 1월 당시 구미 서방의 관점에서 제대로 근대화되었다고 할만한 군대는 동아시아 지역에선 사실상 전무했다. 그나마 근대화에 근접했던 일본군은 미군에게 처절하게 털린 끝에 아예 해체되었고, 미국이 지원해준 중국 국부군은 부정부패 끝에 고작 치하 따위가 중장비의 전부인 알보병 중공군에게 대륙을 포기하고 타이완으로 도주하는 실정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이 딴에는 미국식 훈련 프로그램과 '''미국제 장비'''로 무장을 시켜주고 미군 고문이 직접 자문을 해주는 한국군 정도면 서방의 입장에서는 동아시아 신생국 치고 그럭저럭 괜찮은 군대로 평가할 수 있었다.[9]
그러므로 애치슨 라인 선언의 진정한 의미는 라인 밖의 비(非)공산국가가 공산군의 침공을 받았을 경우, 해당 국가가 적국의 공격을 막아내며 버티는 동안 미국은 유엔을 통해 해당 국가에 도움을 준다는 것이었지, 결코 '''공산군의 침공에 저항하는 라인 밖의 비공산국가를 가만히 내버려두겠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설사 보수적으로 해석한다고 해도 NATO 밖의 우크라이나처럼 '전력을 다해 반드시 사수하는 지역이 아니라는 의미이지, 공산권에서 침공했을 때 그냥 내버려두겠다는 의미는 절대 아니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병력과 재원이 한정된 상황에서 '''군대가 있는 나라와 없는 나라''', 둘 중 어느쪽을 미국이 직접 지키고 어느쪽을 지원하도록 전략을 짤지는 뻔한 일이다.
그리고 애치슨이 연설한 시점에서 미국 국무부가 가진 한국 관련 현안은 미국 의회에서 계류 중인 한국 원조법안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런 이유로 애치슨 선언 이후 북한에서 나온 발표의 내용은 '''"조선반도를 식민지화하려는 미제국주의자를 비난한다"'''였다. 즉 원조법안이 중요했다는 것. 그런데 당시 미국 의회는 극도로 예산 감축에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듣도 보도 못한 신생국을 위한 직접적인 군대 파견과 같이 대규모 자금이 투입되는 정책 실시를 기피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발표된 애치슨 선언이 내포하는 의미란, 신생 대한민국은 미국이 약간의 원조금만 주면 자기 스스로 국가를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국 의회에 보내는 것이었으며, 결국 한국 원조법안은 의회에서 통과되었고 애치슨은 이걸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한 달 뒤에 한반도에서는... 한국 정부 역시 이승만 대통령이 감사전문을 보내고 외무장관이 환영을 표하는 담화를 발표했는데, 이것은 국방비를 포함한 정부 예산 일체를 아직 미국 원조에 의존하고 있던 2년차 정부가 의례적으로 한 말이지 한국이 군사적으로 자립하겠다는 뜻은 당연히 아니었다.
여하튼 애치슨 라인은 실질적 의미는 적지만 그 당시 북한에게 사기 진작이 되는 명분을 주었고, "미국이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 지역에 대해 자세한 파악을 하지 못했다!"라는 인상을 주어 남한 침공에 자신감을 가지게 하였으므로 까여도 어쩔 수 없다. 애치슨 선언의 의미를 군사적 관점에서 보자면 결국 '''미국은 한반도 유사시 이에 대응할 유의미한 전력을 갖춘 지상군을 신속 투입할 생각도 계획도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게 중요한 게, 수천 수만의 인원이 장비를 다 갖추고 이동하는 것은 흔히 양판소에서 지도자의 말 한마디에 군대가 바로 움직인다는 설정과 달리 현실에서는 불가능하다. 어떤 부대부터, 어떻게 이동시키고, 이에 대한 보급은 어떻게 하고 등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을 세워야 실제로 움직이는 게 가능하다. 그래도 실행과정에서 혼란이 발생하고 일정이 지연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는 게 다반사다.[10] 실제로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급하게 투입된 스미스 대대 및 이들의 상위부대인 미 24사단이 대평리-공주 전투에서 전력을 손실한 채 치른 대전 전투에서 참패한 것도 급하게 투입되느라 전력을 다 갖추지 못한 것이 한 이유다.[11]
애치슨 라인의 설정이 북한의 남침 의도를 완전히 굳히게 만든 요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애치슨 라인이 설정되기 전부터 이미 김일성을 비롯한 북한 수뇌부는 무력 남침을 결정하고 소련의 스탈린에게 지속적으로 지원을 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일본은 맥아더가 농업국가로 만들고 있었고 그때문에 한반도에서 전쟁이 난다면 군수물자를 빠르게 조달할 곳이 없었다. 정작 북한은 공식적으로 애치슨이 설정한 미국의 아시아 방위선에 한국과 대만, 일본, 필리핀이 모두 포함된다고 보고 있었다. 이 사실은 당시에 발행된 《로동신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12]
간단하게 설명하면, 2차대전 이후 일본은 사실상 미국 군정의 식민지였으므로 미군 입장에서 애치슨 라인의 의미는 대만과 한국은 중국의 영향력 아래 있는 전쟁터로 판단, 군시설을 집중시키지 않고 전쟁터의 배후지로는 과거 식민지였던 필리핀(대만의 배후지)과 현재 식민지인 일본(한국의 배후지)을 활용한다는 전략을 선언한 것이다.[13] 여기서 미국 정부와 미국 군부의 입장이 달라지는데 정부는 정상화 정책으로 2차대전 이전으로 군대 규모를 감축하기 위해 완전 철수를 원했고 군부는 즉각 반격 규모의 병력 유지를 주장했다.[14]
따라서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정책이 중국을 자극할 것을 염려해 군사원조를 제한하고 있었으나 혹시 전쟁이 난다면 전쟁터로써 한반도를 활용하겠다는 생각은 있었다.
요약하면 애치슨 라인에 일본, 필리핀은 지리적 위치상 태평양과 바로 직결되었고 아무리 군축 바람이 불어도 그것은 곧 하와이와 미국 본토로 직결되는 문제인데다 일본은 본토를 지킬 육군도 없었으니 미 육군이 직접 투입해서 공산권의 태평양 진출을 저지할 필요가 있어서 포함시킨거고 대한민국, 대만, 남베트남은 태평양하고 직결되지도 않았고 일본과 필리핀이 배후에 있으니 미국은 해공군만 지원하고 육군은 현지에서 잘 훈련시키면 된다는 판단으로 제외시킨 것이다.
3.1. 남침유도설
한국전쟁이 터지자마자 미군이 곧바로 파병되었다는 점에서 애치슨 라인 선언이 공산권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한 떡밥이었다고 주장하는 일부 사학자들이 있으나 이는 무시해도 좋다. 이미 전쟁이 발발하기 1년 전쯤 쓰여졌다가 몇년 전 공개된 미국 기밀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한반도를 '''"전략적 가치가 없는 곳"으로 보고 하루빨리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기로 이미 합의해놓은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1949년 6월 26일 철수했다. 남침유도설이 설령 사실이라 해도 미국이 한반도를 중요시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한민국을 공산권의 미끼로 던진 거나 다름없는 것이었다.
참고로 이런 주장을 하는 사학자들이 모두 종북주의자들이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보수 인사들이 이런 주장을 하는 경우도 의외로 많았다. 대개는 원망과 한탄조 내지는 미군도 못 믿는다 정도의 뉘앙스지만. 1990년대 초중반까지 남침유도설 주장이 재야와 대학가에 퍼졌는데, 이건 강대국들의 외교 문서가 공개되지 않던 냉전기의 연구를 바탕으로 한 수정주의 역사학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인 것이다.
게다가 미국은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 국군을 무장시킬 무기를 지원해 달라고 졸라댔을 때도 '''전차같은 무기를 주면 한국이 그 무기 가지고 북한 침공할까봐 두려워''' 방어적인 용도로 사용할 무기만 지원하였다. 당시 이승만은 매번 북진통일을 외쳐 댔는데, 아시아보다는 유럽에 더 신경을 쓰고 싶었던 미국 정부는 혹시나 일어날 말썽을 사전에 차단하려 했다. 덤으로 당시 한국은 빨치산 토벌과 38선상에서의 국지전에서 북한을 상대로 그럭저럭 불리하지 않은 전투를 하고 있었다. 문제는 북한군이 전차를 가졌으니 전차를 보급해달라는 등, 당시 중국과 소련을 통해 물자와 병력 보충을 받던 북한 사정을 근거로 한 이승만의 국군 전력 강화 요구 자체는 올바른 것이었지만, 이이 대한 제대로 된 근거를 제시하지 못했고 이전에도 잦은 과장을 일삼았기 때문에 미국은 그것을 억지 또는 착오로 여겼다는 것이다.[15] 사실 전차는 당대 뿐만 아니라 현대 군사학적 관점에서도 한반도의 산악지형에서는 '''있으면 좋기야 하지만''' 그 위력이 제한되는 것으로 평가되고 있고, 말레이 전역에서 일본군 전차부대의 전과는 식민지 치안군의 졸전으로 치부되었으며, 국부군에 지원된 미국제 전차는 중공군을 막아내는데 별 역할을 못했으니 미국의 입장에서는 한국에 대한 추가적인 군비지원과 증강이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하기에 충분했다. 기실 미국이 북한 사정을 알고서 한국군을 제어하려 거절한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전차를 준다고 하더라도 당시 국군이 미국의 도움 없이 제대로 운용할 능력이 있을지도 미지수.[16]
그리고 남침을 유도했다면 정작 남침을 유도한 미군은 왜 박살이 났을까? 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급한 나머지 일본에 주둔하고 있던 주일미군의 일부 부대인 일명 '스미스 부대'(미 24사단의 1개 보병대대+1개 포대로 이루어진 대대급 부대)를 먼저 파병했는데, 얘네들은 일본에서 제대로 된 군사훈련도 받지 않고 아무 걱정없이 너무 편하게만 지낸데다가, 국공내전 및 일본군과의 치열한 게릴라전까지 치른 전투의 베테랑이었던 조선인민군을[17] 우습게 보다가 큰코 다치기도 했다. 첫타자인 스미스 부대는 그렇다 쳐도 그다음에 도착한 미 24'''사단'''은 사단 전체가 대전 전투에서 역시 개박살나다 못해 무려 사단장[18] 까지 포로가 되었을 정도였다. 이쯤 되어서야 맥아더를 비롯한 본국의 미군 수뇌부는 북한군의 전투력을 재평가하고, 한국에서 벌어지는 분쟁이 '단순한 경찰활동'이 아니라 실제 전쟁임을 인식하고 가용가능한 군사력을 한국에 빨리 투입시키려고 난리를 쳤다. 만약 미국의 음모론 운운하는 일부의 말이 사실이라면 미군은 왜 한국전쟁 초반에 이리 허술하게 대처했을까? 백선엽도 회고록에서 북한군을 너무 깔본다고 초기에 참전한 미군들에게 얕보지 마라고 충고했지만 그 충고를 무시하고 실전 치른 미군이 호되게 털린 다음에 "거봐라, 내가 뭐라고 했냐?"고 비아냥거리자 미군 장교들이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할 정도였다.
게다가 이런 오해는 지금도 이어져서 웹툰 70의 작가 김재희가 직접 애치슨 라인은 한국에서 미국이 철수하여 일본을 방위선으로 삼는 계획이라고 말했을 정도다.
3.2. 트루먼 독트린과의 관계
트루먼 독트린은 한반도의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는데 해리 S. 트루먼은 공산주의를 막기 위해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경제원조 개시를 역설했다. 당시 국무장관은 조지 C. 마셜이었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과의 동맹을 위해 노력했던 마셜은 이제 소련과의 정면대결이 불가피하다고 보았다. 트루먼 독트린에 대한 미 상원의원 청문회에서 국무차관은 딘 애치슨이었다. 그는 트루먼 독트린을 한국에도 적용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한국을 방어해야 할 또 하나의 나라라고 언급하였다. 그러나 이에 대해 많은 상원의원들은 경악했다. '''왜냐하면 미국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극동(Far East)의 전쟁에 개입하게 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었다.'''나는 자유민들이 그들 자신의 방식으로 그들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고 개척하도록 우리가 도와야만 한다고 믿습니다(I believe that we must assist free peoples to work out their own destinies in their own way). 47년 3월 미 의회, 트루먼 출처##
흥미로운 점은 딘 애치슨은 통념과 달리 한반도에 대해 무지하지도 무관심하지도 않았다. 마셜과 애치슨은 의회에 그리스와 터키의 경제원조 금액은 각 4억 달러를 요청했지만 한국에 대한 경제원조 금액은 6억 달러를 요청했다. 미국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었다. 당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직접 대치하는 곳이었으며, 두 체제(regime)가 실험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3년 뒤 애치슨은 기존 트루먼 독트린에 비해 한 걸음 뒤로 물러난 문제의 애치슨 선언을 발표한다.
4. 결과
지금까지 한국전쟁의 연구결과에서 에치슨 라인은 중요한 고려대상조차 되지 않았다는 점, 실제 에치슨 라인이 오히려 미국이 한국을 지원할 수 있으므로 조기에 전쟁을 끝내야 한다고 북한이 인식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사실 에치슨 라인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다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이 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오늘날까지도 한국인들에게 '''불구대천지 원수가 되었음'''은 물론 미국 내 보수파들에게도 욕을 바가지로 먹고 있다. 46년에만 해도 한반도에는 미 육군이 주둔하고 있었고 M7 프리스트나 M18 헬캣 같이 T-34에 유효타를 줄 수 있는 장비까지 있었지만, 모두 다 빼버리는 바람에 한국은 부산 앞까지 밀려버리고, 나중에 투입된 미군의 피해 또한 커졌다. 실제로도 1950년 말에는 의회결의 형식으로 국무장관직에서 쫓겨날지도 모를 위기를 겪었고, 죽을 때까지 보수파들에게 자신의 연설을 변호해야만 했다. 한국에서의 악명이야 둘째치고 미국에서도, 한국전쟁 동안 미국은 엄청난 군비를 썼고 만단위 사상자가 났으며, 외교전략을 고쳐 일본과 독일을 완전히 청소하지 못한 채 재무장시켜야 했고, 이 전쟁과 전후처리 동안 소련과 중국을 대등하게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되었으니, 어쩌면 그 선 하나 때문에 그 전쟁이 일어났을 지 모른다는 가능성만으로도 애치슨이 좋은 소리를 절대 듣을 수 없다.
애치슨 자신이 변호사로서 성공적인 업적을 남겼고 정치가로서도 평판이 좋았다는 점에서 애치슨 선언은 유능했지만 불행하게도 아시아 정세에 어두운 정치가가 당장 눈앞에 닥친 국내정치 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분쟁이 발생할 것이 예상되는 지역에서 발을 뺄 수도 있다는 어설픈 암시를 했다가 진짜 피 터지는 전쟁에 말려든 비극'''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게다가 애치슨은 미국 국내만 아는 정치가가 아니라 유럽 방면에 대해서도 넓은 지식과 훌륭한 인식을 가진 정치가라 더욱 비극적이다. 한마디로 말해서 국제정치 전반에 무감각한 사람은 아니라는 것. 당장 마셜 플랜이나 서유럽의 재건, 소련 블록의 확대 방지나 북대서양 조약기구의 창설 등 트루먼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주요 업적은 사실 애치슨의 머리에서 나왔던 것이다. 오히려 서유럽에서 그는 '''서유럽의 구원자'''라는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일본을 제외한) '''아시아에 대해서는 무지하고 무관심했던 것이 큰 화근이 되었고,'''[19] 이렇게 유럽에 상대적으로 더 관심이 있고 아시아에는 한국, 일본 및 남베트남을 제외하면 그다지 관심이 없는 미국의 외교정책은 이후 냉전/탈냉전 시기 내내 지속되어 왔다. 그나마 한국에 제대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도 6.25 전쟁 이후였고.
아이러니하게도 현 미국의 패권정책을 기반을 다져놓은 게 이 사람이고, 오히려 한국 덕분에 미국이 구해졌다고 발언했다고 한다. 당시 싱크탱크에서 이러한 정책을 주장했으나 트루먼과 국민들의 불신을 받았지만, 6.25로 인해서 공산권의 확장이 확인되면서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통과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북한 및 공산 세력의 위력에 놀란 이승만 대통령은 미군의 참전이 확정된 후 서둘러 한국군 지휘권을 (한국 주둔 유엔군 사령부라는 이름으로 된) 주한미군에 넘겨주게 된다. 이후 평시작전권은 돌려받았지만, 핵심인 전시작전통제권은 계속 한미연합사령부가 행사하고 있다.
2006년 동북아시아 평화포럼 참석차 방한한 리처드 리 아미티지 전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김대중 전 대통령과 만나 "애치슨 라인은 미국과 소련이 38선을 그어 분단이 되고 전쟁이 일어났으며 당시 미국은 한국을 미국 방위선인 애치슨 라인 밖이라고 해서 북한의 오판을 가져왔다"고 밝혔고 이에 아미티지 장관은 "은혜를 모른다는 것은 잘못됐다며 당시 미군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전해졌다.기사
최근에는 중국이 부상하고 대한민국과 대만이 미국의 동북아시아의 중요 동맹국이 되자 미국정계는 하마터면 애치슨 때문에 중요 동맹국이 날아갈뻔 했다고 보기도 한다.[20]
5. 대중매체
대체역사소설인 스탈린의 편지에서는 애치슨 라인을 그은 것까지는 똑같지만 스탈린이 트루먼에게 비밀 회담을 제의하면서 맥아더의 해임이 취소되고, 그날 밤 애치슨은 분노에 찬 채로 폭음을 하고 바로 다음 날 과로로 인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그리고 존 포스터 덜레스[21] 가 새로운 국무장관이 되고 맥아더가 한국전쟁의 작전권을 계속 가지게 되면서 미국은 아시아 중심의 외교/국방정책 노선으로 전환한다. 덕분에 애치슨은 죽은 뒤에도 자꾸 까인다.
드라마 야인시대 80회에서 잠깐 언급된다. 유진산과 전진한, 김두한의 대화에서 미국이 발표한 태평양안전보장선에서 대한민국을 제외하고 일본, 필리핀 일대를 설정했다고 말한다. 즉 김일성이나 소련군, 중공군이 쳐들어와도 미국은 관심이 없다는 뜻으로 말한다. 그리고 그 다음회인 81회에서는...
[1] 쿠릴 열도는 포함되지 않는다.[2] 사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이 수세에 몰리면서부터 일본의 재무장과 재벌 부활이 이미 계획중이었다.[3] 이는 데이비드 핼버스탬의 논픽션 <콜디스트 윈터(The Coldest Winter)>에 자세히 나와 있다.[4] 심지어 6.25 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기지에 "기념물"로 둔 M26 퍼싱 전차까지 가져왔다고 한다. 당시 군축 탓에 보급이 시원찮아서 극동군에서 오키나와 등에 유기물자를 회수할 정도로 열악했던 것. 일본 내 공장에서 급조하여 만든 저질 부속품 때문에 한국에 상륙한 뒤 얼마 안 가서 퍼져나가 전차병들이 환장했다고...[5] 미국은 아니지만 한국전쟁에 참전한 캐나다의 경우에도 UN 결의에 따라 파병하게 되었을 때 파병할 상비전력이 본토에 없어 새로이 지원자들을 모집해 부대를 편성, 훈련시켜서 한국으로 보냈을 정도였다. 당시 캐나다 참전용사 중 한분의 이야기를 다룬 국내 다큐에서 나온 내용이었다. 허쉬 가(家)의 둘째가 먼저 파병되었는데 얼마후 큰형도 자원입대해서 한국에 왔고 같은 중대에 속했지만 형제들은 이를 몰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중공군과의 격전에서 간신히 적을 막고 전사자들을 옮기는데 동생이 형의 시신을 발견했고 이게 트라우마가 되어 평생을 괴로워하던 동생은 나중에 별세하면서 부산의 UN군 묘지에 안장된 형과 함께 묻어 달라고 유언했고 결국 대한민국 국가보훈처까지 이 사례가 전해져 동생의 유골이 형과 함께 안장되게 되었다. 본래는 배우자만이 허용되는데 동생도 한국전 참전용사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걸로 보인다.[6] 수원 등 여러 곳에서 전과를 냈는데, 아예 청주 전투에서 한 문으로 3대나 잡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7] 미 공군은 핵무기와 폭격기만 있으면 만사가 해결되므로 해군이 퍼먹는 예산이나 좀 줄이고 자기들 잘 봐달라는 식으로 홍보하고 있었으나 해군은 이에 반발하여 제독들의 반란이 발생하는 등 미군 내에서도 우여곡절이 많았다.[8] 뉴욕이나 워싱턴 DC같은 미국의 심장부가 동부에 위치해 있고 유럽은 미국의 동부지역에서 대서양만 건너면 도착하는, 태평양 너머의 아시아보다 지리적으로 소련의 위협에 가끼이 노출된 상태다. 더구나 미국의 다수이자 주류를 이루는 미국 백인들은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온 유럽계 사람들이다. 때문에 미국은 아시아보다 유럽에 대한 위협을 보다 심각히 여기는 것이다.[9] 6.25 전쟁 초기에 백선엽, 김종오 등 좋은 성과를 거둔 명장들의 성공 비결 중 하나도 미군 고문과의 원활한 소통이었다.[10] 출동을 목적으로 설치된 119나 파출소/지구대조차 장비 갖추고 지원 요청하고 하는 데 시간이 걸린다. 하물며 병사 개인이 40kg을 짊어지고 가야하는(이건 창칼 쓰던 시대도 마찬가지) 군대가 출동하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좀 더 간단히 봐서, 긴급한 연락이 왔을 때 직장이든 집에서든 1분 안에 준비해서 현장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11] 작계 어쩌구 하면서 재차 한반도에서 전쟁이 나면 미국 본토에서 증원될 전력의 규모를 정하고, 어떻게 투입할지 계획하고, 실제로 미군의 사전배치선단이나 대형수송기로 전차 등 중장비나 스트라이커 여단의 신속투입 등을 훈련하는 게 괜한 행동이 아니다.[12] 출처: 박명림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13] 미군의 판단은 정확했다. 중국은 대만을 전쟁터로 생각했으나 북한의 김일성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전쟁터가 한국으로 결정됐다.[14] 결과적으로 군부의 입장이 맞았던 것으로 판단되면서 군부의 영향력이 커지고 케네디 때는 "미국에는 화이트 하우스와 펜타곤이라는 2개의 정부가 있는 것 같다"고 불평을 터뜨릴 정도까지 갈등이 심화됐다.[15] 가령 이승만은 미국에게 북한이 해주에서 서울까지 포격이 가능한 대포 4문을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했는데 그 거리는 70km가 넘는다. 미국 또한 이 사실을 지적하면서 말이 안되는 소리라고 반응했다.[16] 미국이 한국에게만 이랬던 것도 아니고 일본에게도 경찰예비대 시절에는 M24 채피를 던져주고 미일상호방위원조협정이 체결된 이후에나 M4 셔먼이 도입되었다. 게다가 미국만 이랬던 것도 아니라서 소련 역시 한반도는 전차 운영에 부적합하다는 판단하에 북한이 요구한 전차 지원수량 500대 중 절반도 안되는 242대만 제공하고 나머지는 항공기 지원으로 전환했다. T-34 쇼크에 하도 데인 국군은 그동안 지형조건이고 뭐고 간에 주력전차 전력 증강에 혈안이 되어왔지만 최근에는 주력전차보다는 한반도 환경에 좀 더 적합하다고 여겨지는 공격 및 무장헬기 전력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17] 당시 인민군에는 홍군과 김원봉의 조선의용대 소속으로 국공내전과 중일전쟁에서 실전 경험을 쌓은 병력이 무려 3개 사단이었다! 이들은 인민군 선봉으로 전쟁 초기 경험이 일천한 국군을 완전히 개발살내버렸다.[18] 24사단장 윌리엄 딘 소장. 자세한 내용은 수색 및 구출 작전 중 순직한 기관사인 김재현(철도 기관사) 문서 참고.[19] 사실 애치슨 입장에서는 억울한 것이, 당시 미국 정부나 미국 의회, 미국 정보부에서도 아시아, 특히 한반도에 대한 정보가 빈약했다. 지금이야 이런 것들 때문에 백악관 내에서도 아시아 전문 자문관들이 배치되어있지만 당시는 현재 21세기같은 동아시아 정세가 형성되기 한참 전이었기 때문.[20] 물론 이는 결과론이긴 하다만 만일 대한민국과 대만이 공산화되었다면 미국은 그야말로 일본과 필리핀 둘로 미국의 최후 방어선을 삼아야 하는 악몽과 같은 시츄에이션에 처해졌을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몇년 후엔 이 사건마저 터지고 말았으니 필리핀도 위태로왔기는 마찬가지였을지도 알 수 없다. 동남아까지 공산화할 위급한 상황에 대한민국이 이미 공산화된 이후였으면 결국 남은건 일본 뿐이었을텐데 그에 대한 막대한 비용을 치뤄야 했을 것을 생각한다면 이만큼 미국에게 악몽이 될 일은 없다.[21] 대일강화조약을 주도한 외교통으로 아시아 우선 전략을 주장했고 강경한 반공주의자였다. 실제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정부에서 국무장관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