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와 리에

 

''' 미야자와 리에의 주요 수상 이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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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 아카데미상'''
[image]
'''최우수 여우주연상'''
'''제25회
(2003년)
'''

'''제26회
(2004년)
'''

'''제27회
(2005년)
'''
키시 케이코
(카 짱)

'''미야자와 리에
(황혼의 사무라이)'''

테라지마 시노부
(아카메 48폭포)

'''제37회
(2014년)
'''

'''제38회
(2015년)
'''

'''제39회
(2016년)
'''
마키 요코
(안녕, 계곡)

'''미야자와 리에
(종이달)'''

안도 사쿠라
(백엔의 사랑)

'''제39회
(2016년)
'''

'''제40회
(2017년)
'''

'''제41회
(2018년)
'''
안도 사쿠라
(백엔의 사랑)

'''미야자와 리에
(행복 목욕탕)'''

아오이 유우
(이름없는 새)


'''블루리본상 여우주연상'''
'''제46회
(2004년)'''

'''제47회
(2005년) '''

''' 제48회
(2006년) '''
테라지마 시노부
(바이브레타)

'''미야자와 리에
(아버지와 산다면)'''

코이즈미 쿄코
(공중정원)


'''역대 키네마 준보 베스트 텐'''
[image]
'''여우주연상'''
'''75회
(2002년)
'''

'''제76회
(2003년)
'''

'''제77회
(2004년)
'''
가타오카 레이코
(해시!)

'''미야자와 리에
(황혼의 사무라이 / 현실)'''

테라지마 시노부
(바이브레이터 / 아카메 48폭포)

'''77회
(2004년)
'''

'''제78회
(2005년)
'''

'''제79회
(2006년)
'''
테라지마 시노부
(바이브레이터 / 아카메 48폭포)

'''미야자와 리에
(아버지와 산다면)'''

다나카 유코
(언젠가 책 읽는 날 / 화화)

'''89회
(2016년)
'''

'''제90회
(2017년)
'''

'''제91회
(2018년)
'''
후카츠 에리
(해안가로의 여행 )

'''미야자와 리에
(행복 목욕탕)'''

아오이 유우
(이름없는 새)



''' 미야자와 리에 '''
''' 宮沢 りえ|Rie Miyazawa '''
<colbgcolor=#d2446b> '''본명'''
'''森田(もりた りえ (모리타 리에, Rie Morita)'''[1]
'''출생'''
1973년 4월 6일 (50세)
도쿄 도 네리마 구
'''국적'''
일본
'''신체'''
167cm, B형
'''배우자'''
모리타 고(2018.03.16 결혼 ~ 현재)[2]
'''자녀'''
(2009년생)[3]
'''직업'''
배우, 가수
'''소속사'''
엠츠 기획(エムツー企画)
1. 개요
2. 활동
2.1. 출생과 연예계 데뷔
2.2. 91년 산타페 열풍
2.3. 92년 약혼과 파혼 소동
2.4. 연예계 복귀와 화려한 부활
3. 사생활
4. 출연작
4.1.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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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배우. 패션 모델가수이기도 했다. 11살에 아역광고모델 겸 연기자로 데뷔해서 91년 유명한 사진집으로 90년대의 아이콘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후 부침을 겪다가 지금은 일본에서 잘나가는 연기파 배우로 자리를 매김했다.

2. 활동



2.1. 출생과 연예계 데뷔


어머니는 일본인이고[4] 아버지는 네덜란드인혼혈이었다. 다만 엄마가 임신 중에 이혼했기 때문에 아버지의 얼굴은 본 적도 없었다고 한다. 한참 뒤에 TV 프로그램을 통해서 아버지의 당시 모습과 자신도 몰랐던 이복동생들의 존재를 알게 된다. 여튼 그러한 이유로 이모와 사촌들과 함께 자랐다.
[image]
그러다 1985년 11살의 나이로 광고모델로 연예계에 데뷔, 13세에 1대 미츠이 리하우스걸이 되면서 유명세를 얻게 된다. 그리고 1988년에는 우리들의 7일 전쟁[5]에서 첫 주연을 하면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 이 영화의 대흥행으로 코무로 테츠야에게[6] 곡을 받아서 <DREAM RUSH>라는 앨범을 내면서 가수로 데뷔해서 1990년에는 만 17세의 나이로 홍백가합전에 출연할 정도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다. 당연히 드라마와 영화, CF 출연이 연이어졌다.

2.2. 91년 산타페 열풍


사실 미야자와 리에를 당시 한국에서까지 유명하게 만든 것은 1991년 한국 기준 '''19세의 나이에 전라 사진집 <산타페>를 출간한 것'''이었다. 신인급들이 소속사의 요구[7]로 찍거나 전성기를 지난 여배우들이 노후를 삼기 위해 누드 사진집을 찍던 시기에, 인기 최정상의 여배우가 당대 최고급의 카메라맨과 만나서 누드 사진집을 낸 것이니 당연히 시장에선 폭발적인 반응을 일으켰다. 크레용 신짱 초반부의 에피소드에서도 짱구가 <산타페>를 보물처럼 여기는 장면이 나오고, 미즈노 슌페이도 자신의 책에서 저 <산타페> 열풍을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산타페>는 리에 본인이 찍고 싶어서 찍은 것도 아니고, 매니저를 겸했던 미야자와 리에의 어머니가 '''"딸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를 누드로 남겨야 한다"'''라고 주장해서 찍은 것이라고 한다.[8] '유명 사진작가이자 누드사진가인 시노야마 기신이 크게 의미를 두지 않고 한 제안을 미야자와 리에의 어머니가 덥썩 문 것이, 사진집이 나온 계기'라는 것이 현재의 일반적 통설인 듯 하다.
참고로 미성년 시절에 찍기는 했으나 현행 av와 누드를 찍을 수 있는 하한선인 만 18세는 넘겨서 촬영한 것이기에 합법 출판물이라, 일본의 중고 서점에서 어렵지 않게 구입 가능하다. 후방주의[9] 미야자와 리에의 헤어누드 사진집 발매 이후 근 10년간 일본에서 여자연예인들의 누드 사진집 열풍이 불기도 했다. 이 와중에 비비안 수도 소속사의 은근한 강요에 결국 헤어누드를 찍었는데, 이 당시 나이가 만 18세가 막 안된 때였다. 지금 같았다면 난리가 났을 이야기다.
참고로 <산타페>는 당시 한국에서도 음지로 상당한 인기를 누렸다. 당시 초창기였던 PC통신 자료실에서는 이 사진집에서 발췌한 사진들이 올라오기도 했는데, 사실 전화선을 이용하던 모뎀의 속도가 2400bps이던 시절이라 극악의 난이도긴 했다. 현재 웬만한 케이블 모뎀이 10,000,000 Bps니까 사진 하나 받으려면 얼마나 시간을 잡아 먹어야 했을지 짐작이 갈 것이다. 그런 느린 속도의 PC통신도 거의 보급되지 않을 시기라서 현재 같으면 당연히 컴퓨터로 보겠지만 그 당시엔 청계천이나 용산구어둠의 경로로 몰래 사서 봐야 했다. 요즘 학생들은 거들떠보지 않을 정도로 노출 수준은 적지만, 당시 청소년들에게는 보물과도 같았다. 당연히 부모님이나 선생에게 걸리면 죽도 밥도 안됐다. 이 정도로 상당한 유명세를 타서 미야자와 리에의 한국내 인지도도 자연스레 높이 올라갔다.
이러한 인기에 누드집이 금기시되던 한국에서도 이례적으로 대형출판사에서 정식 출간하고 신문광고까지 했다. 이후, 한국내에서 누드사진집 열풍이 불어서 가수 유연실[10]민해경이 연이어서 누드 사진집을 내기도 하였으나, 답이 없는 완성도에 당시 한국의 보수적 시선이 더해지면서 오히려 자신들의 커리어를 완전히 마감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의 누드 사진 열풍은 약 10년 후에 이승희로 다시 시작되었으나, 그 다음부터는 중견 여자 연예인들의 여흥 내지는 B급 이하 여배우들의 전유물로 전락했다. 특히 이승연의 위안부 누드 파문은 이러한 열풍에 종지부를 찍었다.

2.3. 92년 약혼과 파혼 소동


1992년 11월 27일 스모선수이자, 훗날 65대 요코즈나로 승격된 오제키 리키시인 다카노하나 코우지(貴乃花光司)[11]와 19세의 나이로 약혼을 발표할 때까지가 미야자와 리에의 첫 리즈 시절이다. 헌데 문제는 바로 그 다음에 터졌다. 바로 한국에도 알려졌던 '''파혼 스캔들'''이었다. 완전한 파혼이 발표된 것이 1993년 1월 27일로, 약혼 발표가 있고 불과 '''2개월''' 정도 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 파혼의 이유가 바로 산타페였다. 미야자와 리에와 다카노하나 코우지는 <산타페>가 발표된 후에 약혼하였는데, 약혼 3개월만에 다카노하나의 집안[12]과 일본 스모계가 일치단결하여 '''"누드 사진 찍은 여자를 며느리로 받을 수 없다!!!!"'''고 해서 미야자와 리에가 파혼당한 것이다. 일본이 성적으로 개방되었다고 성진국 드립도 치는 사람이 있는 것 보면 꽤나 의외. 일본도 분야마다 성에 대한 인식이 꽤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가부키, , 스모 등 일본의 전통 문화를 계승하는 업계의 보수성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며, 스모 업계에선 2020년대에도 여성이 모래판 위에 올라서는것을 엄금하는 등, 현재까지도 극도의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고 있다. 소규모 도장도 아닌 장차 도장 일문의 대규모 연합을 이끌어 갈 거대 가문 후계자의 안사람이 연예인, 그것도 대중 앞에 헐벗은 몸을 드러냈다는 것은 받아들일 수도 있을 수도 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하여튼 이에 다카노하나는 후에 "이 파혼은 나의 의사는 전혀 포함되지 않은, 집안의 반대로 인한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전여옥은 "미야자와 리에가 오키나와 출신이라서 차별받는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참고로 이에 대해서 쌍방 합의에 의한 파혼이라는 이야기도 있는데, 이 경우에도 미야지와 리에 본인보다는 어머니의 의사가 크게 반영된 것이라는 것이 정설이다.
여튼 파혼기자 회견장에서 나타난 미야자와 리에는 '다카노하나를 사랑한 것을 후회하지는 않지만, 다시는 결혼 같은 것은 안 하겠다'고 선언하는 나름대로 의연한 모습을 보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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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건 말만 그랬던 모양으로, 파혼의 충격과 미야자와 리에가 불륜을 일으켜서 파혼했다는 설까지 돌면서 미야자와는 자살 소동만 2번[13][14]일으켜서 언론 보도를 탔고, 거식증에 걸려 '''체중이 30kg 대로 줄어들어서 뼈만 앙상한 시기'''를 보낸다. 그녀의 키는 일본 여배우치고는 상당한 장신인 167cm인데, 키와 체중을 고려하면 건강이 완전히 엉망이 되었을 것이라는 건 말할 것도 없다. 심지어 거식증에서 회복되는 도중에도 술자리 스캔들 사진이 떠돌아서 또 한 번 논란이 일었다. 결국, 미야자와 리에는 1996년에 연예계 무기한 활동정지를 선언하고 미국으로 이주했다.[15]

2.4. 연예계 복귀와 화려한 부활


이후, 일본으로 복귀해서 자잘한 방송에 출연을 시작한다. 그러나 드라마 <협주곡> 정도를 제외하면 그리 흥행을 못했고 '한때의 반짝스타'의 전형으로 완전히 커리어가 끝나는 듯 하였으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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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영화 <유원경몽(2001)>[16]으로 모스크바 국제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을 한 것을 기점으로 겨우 재기하게 된다. 이때부터 미야자와 리에는 '한때의 반짝스타'에서 '해외에서 인정받은 연기파 여배우'로 변모하였고, 2003년에 찍은 『황혼의 세이베이(たそがれ清兵衛)』로 일본아카데미상 최우수여우주연상, 닛칸스포츠영화대상 여우조연상, 키네마준보 여우주연상, 마이니치영화콩쿨, 블루리본상 여우조연상 등 당대의 영화제를 휩쓸면서 완전한 부활을 선언하게 된다. 2004년에는 드라마로 하시다상, 2005년에는 영화 『아빠와 산다면(父と暮せば,2005)』으로 블루리본상-여우주연상과 야마지후미코영화상 여배우상을 수상하였다. 연극에서도 『투명인간의 증기(透明人間の蒸気,2004)』로 요미우리연극대상 우수여우상을 수상하는 등 배우의 길을 걷고 있다. 2015년도 '종이달'로, 2017년도 '행복 목욕탕'으로 일본 아카데미상 최우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며 연기파 배우로 자리매김하는데 성공한다.
여담으로 짱구가 좋아하는 영화배우기도 하다.

3. 사생활


  • 많은 부분에서 미국 배우 브룩 쉴즈와 공통점이 많다. 부모가 이혼한 뒤 쭉 어머니 슬하에서 컸고 아역 배우로 연예계 생활을 시작해 극성인 어머니 때문에 성공하긴 했지만 피해도 본 점이 그것.[17] 사실 어린 나이에 누드집 찍은 아시아 스타론 비비안 수도 있긴 하다만. 그 외 일본엔 지금은 줄어드는 추세긴 하다만 과거 스즈키 쿄카, 나카마 유키에, 사와지리 에리카그라비아 출신 배우가 꽤 있긴 했었다. 물론 누드랑 그라비아는 다른거긴 하지만.
  • 2009년, 혼전임신을 해서 만삭의 몸으로 결혼했으나, 2012년 이혼했다.
  • 2018년 3월 16일, 이전부터 열애설이 돌던 V6의 멤버인 모리타 고와 재혼했다. V6 팬클럽에서 모리타가 팬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통해 결혼사실을 알렸다고 한다.#

4. 출연작



4.1. 영화


  • 1988년 우리들의 7일 전쟁 - 나카야마 히토미 역
  • 1989년 어느 쪽으로 하지 - 나미코 역
  • 1992년 고우히메 - 고우히메 역
  • 1994년 47명의 자객 - 카루 역
  • 1995년 천수각 이야기 - 카메히메 역
  • 2000년 택시 운전수의 사랑 - 진웬 역
  • 2002년 황혼의 사무라이 - 이누마 토모에 역
  • 2004년 토니 타키타니 - 에이코/히사코 역
  • 2005년 아슈라 - 오사에 역
  • 2007년 오리온 자리에서 초대 - 도요다 도요 역
  • 2008년 꿈대로 - 나카노 준코 역
  • 2010년 야지마 미용실 THE MOVIE ~ 꿈을 잡는 네바다~ - 선술집 여사장 역
  • 2013년 수수께끼는 저녁식사 후에 - 쿠마자와 미호 / 팬텀 소로스 역
  • 2014년 마녀 배달부 키키#s-4 - 코키리 역
  • 2014년 종이달 - 우메자와 리카 역
  • 2015년 화장실 피에타 - 하시모토 케이코 역
  • 2016년 렛츠락! 죽어서 하는 밴드 - 테즈카 히로미 역
  • 2016년 행복 목욕탕 - 후타바 역
  • 2019년 인간실격 - 쓰시마 미치코 역
  • 2020년 일본독립 - 시라스 마사코 역

[1] 결혼 전 본명은 '''미야자와 리에'''.[2] 2009년 기업인 남성과 결혼했으나, 2012년 이혼 후 모리타 고와 재혼했다.[3]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4] 미야자와 미츠코, 일명 '리에 마마'로 알려져 있다. 2014년 작고.[5] 일본 청춘영화계의 대박으로 떠올라 인지도가 상당해져 <우리들과 경찰 아저씨의 700일 전쟁>으로도 패러디될만큼 유명해진 영화이다. 내용은 청소년들과 어른들의 갈등이 엄청난 스케일로 번진다는 내용이다.[6] 영화 엔딩곡을 코무로 테츠야의 유닛 TM NETWORK가 불렀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7] 사실 1980년대에도 여배우들의 누드 사진집은 많았다. 예를 들어서 드라마로 큰 인기를 끌었던 카와카미 마미에 같은 경우에는 16살의 나이에 시노야마 키신의 누드를 찍었는데, 소속사를 옮기며 아이돌 노선을 탈피하면서 소속사의 요구에 부모님의 허락으로 나온 거였다. 특히 아버지는 "배우 생활을 하려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이야기했다고. 2017년 인터뷰로는 "'야마구치 모모에도 그런 아슬아슬한 사진을 찍었지만 시장에 나오지 않았고, 일단 찍어놓고 안 내보낸 여배우들도 많았다'고 이야기를 했지만, 나는 '모모에도 찍었다'는 말에 용기내서 내보냈다"고...[8] 리에는 이거 찍기 직전까지 몰랐다고 한다. 엄마가 모든 계획을 꾸미고 딸에게는 "대개의 여배우들이 누드 찍는 시점이 느리다. 절정기를 넘어서 촬영은 별로다. 아름다운 것은 아름다울 때에 찍어야 한다."고 설득했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한국이라면 어림도 없을 이야기일지도.[9] 이 당시만 해도 여고생 누드는 아무것도 아니었고, 심지어 초등학생이나 중학생의 누드도 합법적으로 출판되던 시기였다. 혹자는 일본의 사회의 야만성이 드러난 사례로 보기도 하는데, 16살 고1 여고생이 연예계에 데뷔하기 위해 누드를 찍거나 12살 잘 나가던 아역배우가 터닝포인트를 만들기 위해 누드를 찍던 시기였다. 지금은 사회문제가 되면서 1999년 법률 개정으로 미성년자의 누드 촬영이 금지되었다.[10] 유연실은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남기고 싶었다"는 표현까지 따라해서 완전히 미투상품이라는 것을 공공연히 하였다.[11] 한국씨름으로 빗대어보면 이만기, 강호동에 견줄 수 있을 정도로 스모 역사에 길이 남을만한 선수였다.[12] 다카노하나의 아버지 즉 1대 다카노하나의 22살 많은 큰형은 1대 와카노하나이자 요코즈나였고, 와카노하나의 사위인 2대 와카노하나도 요코즈나였으며 1대 다카노하나 본인도 오제키까지 올랐던 스모 성골가문이었다.[13] 첫 번째는 파혼한 바로 그 해 8월에 호텔에서 유리를 깨서 손목을 그은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그로부터 몇년 후에 스캔들이 연이어 터진 이후였다. 일단 미야자와 리에는 첫번째 사건은 말 그대로 사고라고 하고 있고, 2번째는 사건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다.[14] 여담으로 2번째 자살 소동을 일으켰을 당시 불륜상대로 지목되던 이는 가부키배우 나카무라 칸쿠로(훗날 나카무라 칸자부로로 개명)였다. 둘이 불륜사이라고 지목되었던 이유는, 미야자와가 손목을 그은 채 발견되었던 호텔이 그 당시 나카무라도 똑같이 묵고 있던 호텔이었기 때문. 몰론 나카무라 본인은 불륜설에 대해 일절 부인하면서 아예 당시 촬영하고 있던 영화속 분장을 그대로 한 채 "미야자와 리에와 만나기로 약속을 한 건 맞지만 실제로는 만나지 않았다"고 화를 내면서까지 기자회견을 가졌다. 이 당시 불륜상대로 지목되었던 나카무라는 훗날 2012년 식도암으로 인한 중증 호흡장애증후군으로 사망하는데, 미야자와 리에는 나카무라의 빈소에 조문을 가기도 했다.[15] 미국으로 건너가서 거식증 치료를 했던 것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16] 이 영화가 무서운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연은 왕조현으로 영화발표회에서 '은퇴예정을 발표'했으며 실제로 2002년에 영화 한 편을 더 찍고는 은퇴했다. 그리고 본문의 미야자와 리에가 공동주연에 가깝게 나왔고, 영화의 나레이션으로는 유원경몽의 감독인 양범과 친분이 있는 임청하이다. 남자 주연이 매기 큐의 한 때 연인으로 알려졌던 오언조인데, 유명한 여자배우들에 휩싸여서 눈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이다.[17] 위에도 나와있듯 딸이 가장 아름다운 시기의 모습을 담고 싶은 어머니에 의해 만 18세의 나이에 누드집을 찍게 되었으나, 역설적이게도 그 가장 아름다울 시기에 그것 때문에 한동안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리고 브룩 쉴즈는 자신이 배우로 성공하지 못해 한이 맺혔던 어머니 때문에 사춘기도 오지 않은 나이에 누드로 연기를 해야 했고, 심지어 어린 매춘부 컨셉으로 플레이보이 화보를 찍을 뻔도 했다. 사실, 미국도 70년대에는 아동누드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이 없었다. 이당시는 영화잡지에서 브룩실즈의 누드 포스터를 줄 정도였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