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경제/역사/1980년대의 대규모 정책 실패

 



1. 개요
2. 목록
2.2.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과 임수경 방북 사건
2.2.1. 경제적 타격
2.2.2. 사회적 타격
2.3.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3. 종합


1. 개요


북한에서 1980년대 중후반에 걸쳐 경제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각종 실패한 정책들. 1970년대까지 꾸준한 성장을 이어와 당대 기준 중진국까지 진입한 북한 경제는 온갖 실패가 겹쳐 90년대 이후 후진국으로 나가떨어지게 된다.

2. 목록



2.1. 서해갑문


[image]
서해갑문은 북한 남포특별시(대한민국 이북5도 기준 진남포시)의 서쪽 15km에 위치한 갑문으로서 위에는 도로가 건설되어 남포와 황해남도를 연결하는 역할도 한다. 사실 서해안은 워낙 조차가 커서 조차를 극복할 시설(예를 들어 뜬다리부두 같은)이 필요하다.[1] 특히 남포 같은 큰 항구라면 국가 단위의 물동량을 수용해야 하는 만큼 갑문 설치의 필요성은 더욱 절실하다. 당장 남한도 인천에 갑문이 설치돼 있는 상황. 그리고 하구둑으로서의 순기능은 하고 있으니 뒤의 두 사례에 비하면 서해갑문은 훨씬 양반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부실 공사, 날림 공사, 무리한 공사의 그랜드 슬램을 달성함으로써 득보다 실이 더 많았다는 점이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착공하여 3년 내에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조선인민군 육군 1개 '''군단'''의 군 병력과 수만 명의 노동자를 투입하였다. 그러나 워낙 난공사였고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 수준이 낮아''' 완공 시기를 두 차례나 연기한 끝에 1986년에 겨우 완공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사실 김일성의 지시로 어떻게든 완공 일자를 당겨야만 했기에 그때 겨우 완공된 것이다. 이럴 바엔 자력갱생을 하지 않고 선진국에게 공사를 의뢰하는 것이 더 이득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시간적으로 여유가 없는 상태에서 날림으로 공사하느라 발생한 부실시공으로 방파제에서 틈이 벌어지고 물이 새어들어오고 갑문이 망가지는 이러한 현실 속에 유지보수를 위해 남는 게 군 인력인 북한에서는 육군 1개 건설사단이 보충작업을 위해 이곳에서 항시 대기하는 상황이 현재진행중이다. 게다가 완공된 이후에 대동강 유역의 기후가 변하면서 농업생산량과 어업생산량이 이전보다 떨어지게 되었다. 통일하면 부수고 다시 지어야 할지도 모른다. 즉 북한에서는 돈을 들여 공사를 해 생산량을 줄인다고 해야 할까?
얼마나 큰 뻘짓이었는지 남한 특수부대가 대동강을 타고 평양직할시로 침투할까봐 지었다는 소문도 있을 정도다.
참고로 조선중앙TV 뉴스에서 2005년부터 2012년까지 아나운서의 배경으로 가끔 서해갑문의 사진이 나왔다.

2.2.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과 임수경 방북 사건


축전 개최 당시 사진들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세계민주청년연맹 주최로 1947년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를 시작으로 사회주의 국가와 좌익계열 청년들의 행사로, 냉전 시기 제3세계공산권 국가에서 주로 개최되었다.[2] 특히 1989년 제13회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88 서울 올림픽에 자극을 받은 북한 정부가 의욕적으로 개최한 행사였다.[3]
북한은 아시아에서 처음 개최한다는 점에 의미를 두어 1987년부터 축전준비위원회를 두어 막대한 시설 투자와 준비에 열을 다해 177개 국가, 약 22,000명이 참가하여 성황을 이루었고 북한 정부도 올림픽보다 더 큰 규모의 행사를 개최했다고 선전할 정도였다. 당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국가들의 이런 세력과시는 신흥국 경기 대회 항목에서도 잘 드러난다.

2.2.1. 경제적 타격


가뜩이나 부가가치를 기대하기 힘든 행사를 무리하게 연속 개최한 북한측은 막대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었다.
물론 순안공항 확장, 광복거리 조성, 류경호텔과 릉라도 경기장 건설, 평양내 고층아파트 건설[4] 등 여러가지 개발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기는 했지만 문제는 당시의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라 '''부동산 개발로 수익을 올릴 수 없다는''' 것이다.[5]그렇다고 행사를 통해 자국을 홍보해서 관광 수입을 올리는 것도 아니고, 사회주의 국가의 관광단을 초청해서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종의 과시용 성격이 강하다. 그러니까 '''버는 건 10원 한 장 없고 그냥 돈만 잡아먹는 등골 브레이커였다'''는 얘기다. 이러니까 당연히 손해만 볼 수 밖에 없었다.
같은 시기 서울올림픽이 선수촌 아파트 분양으로 제법 쏠쏠하게 흑자를 냈고 한국에 대한 이미지 제고를 통해 이후 관광 활성화의 시발점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어쨌거나 북한은 이미 지나치게 과도한 군사비 부담과 충분한 물적 토대가 갖추어지지 않은 관료적 계획경제의 모순으로 인해 저성장 상태에 놓여있었고, 과도한 행사 비용 부담으로 인해 휘청거리게 된다. 사실 북한 뿐만 아니라 당대 동유럽 국가들도 비슷한 문제를 겪었다. 다만 동유럽 국가들과 다른 점이라면 동유럽 국가들은 부분적으로 공장을 짓겠다고 서방으로부터 외채를 잔뜩 빌렸다가(덕택에 단기적으로 호황을 누리기는 했다. 그 이후가 문제였지만) 오일쇼크와 이자율 상승으로 돈을 제때 갚기 힘들어진 영향이 큰 반면에 북한은 군사비 비중이 컸다는 점이다.
게다가 이때 외국인들을 위해서 찍어낸 '외화와바꾼돈표'에 의해서 일종의 통화량 팽창으로 북한의 외환경제는 지속적으로 대미지를 입어 소련 붕괴, 자연재해와 더불어서 고난의 행군을 불러오게 되는 주요한 원인이 된다.

2.2.2. 사회적 타격



북한은 이로서 본의 아니게 '''대놓고 체제경쟁 패배를 인증했다'''. 당시 외대생인 임수경남한 사람으로서 민간통일운동으로 참석하는 바람에 화제가 되었다. 물론 동년 3월에 문익환 목사가 방북한 일이 있었다. 그러나 임수경은 일개 대학생에 불과했던 만큼 남북한 주민들 모두 휴전선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임수경에 충격을 받는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임수경의 자유분방한 모습이 오히려 통제사회인 북한 일반 주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던 것이다. 북한에선 청바지를 미 제국주의 상징으로 선전했는데, 정작 통일투사로 선전했던 임수경은 청바지를 입고 다녔다.
또 임수경은 아무런 사전 원고 없이 사람만 모이면 하는 즉석 연설을 하기도 했고, 김일성 생가 만경대 순례를 거부하기도 했다. 결국 수행원이 겨우겨우 설득을 하고나서야 간신히 방문했다. 그런데 가장 큰 것은 공개석상에서 '''"북한 체제에도 심각한 문제가 있다"'''라고 비판을 하는 것이었다.
이런 임수경의 행동은 북한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라면 방북자가 북한 사회에서 이처럼 자유로운 활동을 하기는 어렵다. 세계 학생축전이라는 큰 행사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라 북한 역시 세계 각지에서 모인 좌파 청년들 눈 앞에서 임수경의 돌출 행동을 제어하지 못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명철김일성대 교수 등 1990년대 탈북자들의 증언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게 바로 '''임수경 충격'''이다. '''임수경을 보고 적어도 남한이 북한보다는 자유롭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축전이 끝난 후 북한 정부에서 사상무장을 다시 해야 한다느니 하면서 한동안 통제가 강화되었다는 후문이 있다.
1990년 남북 고위급 회담으로 서울을 대거 방문한 북한 기자단은 당시에 5년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인 임수경의 집을 방문하여 임수경의 부모와 인터뷰하여 '''남한 체제를 비판'''하려고 했는데 정작 그 뉴스를 본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아니? 정치범이 수감당하고도 가족이 아무 일이 없다니?!'''" 사실 지금보다 레드 콤플렉스가 훨씬 심했고 민주주의도 걸음마 단계에 불과했던 6공화국 초창기의 남한에서 임수경의 가족들이 정말 아무런 해도 입지 않고 일상을 이어나갈 수 있었느냐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임수경 문서 참조). 하지만 북한 사람들 관점에서 봤을 땐 또 얘기가 달라지므로(...). 확실히 연좌제를 시행중인 북한에 비하면 훨씬 나은 정도가 아니라 아무 일 없는 것이다.
그리고 중산층에 불과하다는 가정집에서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식탁을 내놓은 데 대한 것과 통조림이 산더미처럼 쏟아진 것에 대해서 충격을 먹었다'''고 한다. 당시 북한에선 외국인들이 다닐 법한 길에 위치한 가정집들에 통조림을 두어개씩 나누어주며 '''"혹시 외국인 손님을 받을 일이 있으면 대접하라"'''라고 지시했다. 한마디로 '''북한에선 통조림이 부의 상징'''인 셈.
그나마 당시에는 상대적으로 경제 사정이 나아서 행사가 끝나면 그 때까지 참았다가 반납 안하고 먹어도 좋다고 했다고 한다. 그 이후 경제가 막장이 되면서 이런 선전물품들의 가치가 워낙 올라가 소모되지 않았으면 도로 회수하고 있다. 외국인 왔다 가서 깠다고 뻥치고 먹어버리려 해도 북한에선 외국 관광객들에게 일일이 감시 겸 가이드가 붙어서 얘들이 그런 사람 온 적 없다고 해버리면 처벌받아서 그런 짓은 못 한다. 그런데 임수경 집의 냉장고에선 '''통조림이 산더미처럼 쏟아졌고 상다리가 부러질 것 같은 식탁까지 내왔으니''', 그런 모습을 본 북한 사람들은 눈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임수경은 당시 남한 기준으로 봐도 잘 사는 집 출신이긴 했다. 그 당시 집에 컴퓨터가 있었고[6][7] 부친이 당시 서울지하철공사 공보실장이었을 정도니 말이다. 허나 북한 입장에선 혁명열사가 부르주아라고 말할 수가 없었고, 그야말로 혹 붙여주려고 왔다가 되려 자기한테 혹 붙이고 간 꼴이 되고 만 것이다.
사실 그 전에 5년형을 북한 언론이 비판할 때부터 북한 내부의 분위기는 "'''그럼 사형이 아니란 말이냐?'''" 였다고 한다. 판문점으로 남쪽에 돌아가는 임수경을 보고 "'''아이고 저 새파란 처녀가 죽으러 가는구나......'''" 라고 생각하는 분위기였을 정도.
당시 이를 본 북한 예술인 김용도 경악했고 우리가 속고 있는 거 아니야? 이런 북한 사람도 많았다. 결국 김용도 이후 중국으로 가서 잠적하고 몇 해 안가 90년 초반에 탈북해 한국에서 살게 되었다. 그가 써서 한때 제법 팔린 <머리를 빠는 남자>라는 책자에서도 임수경을 언급했다.
어찌되었건 일어난 일만 돌아보면, 임수경은 방북했다가 돌아온 뒤 국회의원까지 한 것을 생각해보면 북한이 체제경쟁에서 진 것[8]을 포함해서 확인사살까지 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출신성분이 불온하면 입당은 꿈조차 꾸지 못하는 북한의 실정을 놓고 본다면 이는 분명한 '''북한의 체제경쟁의 패배나 다름없다.'''
더구나 김일성은 생전에 함경도 사람은 간부로 등용하지 말라는 명령까지 할 정도로 특정 지역에 대한 반감이 높은 것도 존재한다. 한국도 지역감정이 심각한 수준이라고는 해도 특정지역 출신의 고위직 진출 금지 같은 막장스런 상황은 결코 공공연하게는 일어나지 않는다. 더구나 임수경은 북한으로 치면 반역죄인인데 요덕 수용소아오지 탄광로 간 것이면 그나마 행운이고 실제론 무시무시한 총살형이 반기는 판국에 총살은 커녕 국회의원까지 지냈다는 사실을 볼 때[9] 북한에서 볼 땐 이만한 컬처 쇼크도 없다.
그리고 여기까지 읽었으면 알겠지만 지금으로부터 34여년 전인 '''1989년'''에[10] 북한 주민들은 남한과 자국(북한)의 차이를 실감하고 저 정도의 충격을 받았다는 뜻이다.

2.3.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1983년 김일성의 지시로 평안남도 순천에 연간 10만 t 규모로 추가건설'''되던''' 비날론 공장이었다. 북한 정부는 이 공장이 완공되면 400여 가지 화학제품 생산이 가능해 경공업 발전의 토대가 되어 이밥에 고깃국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실은 시궁창이었기에 가장 큰 100억 달러를 날려버리고 말았다. 비날론 문서 참고.
그나마 돌아가던 기존 비날론 생산도 90년대 연이은 대홍수로 탄광이 물에 잠기자 석탄생산을 감당하지 못해 1994년에 이르러 모두 중지되었을 정도. 여기에 고난의 행군이 닥치자 노동자들이 설비 대부분을 몰래 고철로 바꿔먹었다고 한다.
2007년에는 김정일이 비날론 재건을 지시해 2010년 2·8비날론연합기업소가 재가동에 들어갔다. 물론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는 손도 못 대고 고철 상태로 방치되다가 결국 철거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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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5월, 인공위성이 촬영한 '순천비날론연합기업소' 의 사진을 2004년에 촬영한 모습과 비교해보면 아무 것도 남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11] 철거하는 데만 20년 가까이 걸렸다.

2009년 7월, 일본의 아시아프레스에서 현지취재한 영상. 일부 시설은 여전히 남아있는데 계속 폐허가 되어 있는 상태로 공장 부지 일부는 '''아예 주민들의 으로 전락한 상황이다.''' 2010년대 이후에도 복구 계획자체가 전무한 상황.
북한처럼 자본이 메마른 경제에서는 치명타가 될 수 있는 돈 낭비였다. 정확히는 자본이 메마른 경제라서가 아니라, 애초에 케인스의 이론은 당연히 그 나라가 자본주의일 때 적용되는 얘기다. 즉 민간 시장이 확실히 분리되어 있을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개인의 자본이 (공식적으로는) 허용되지 않는 배급제 사회주의에선 당연히 의미가 있을 리가 없다. 즉 저 건설을 위해 노동자를 고용해서 오는 "고용창출" 효과와, 임금을 지급하고 노동자들이 그 임금으로 소비를 하여 오는 경제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인데 당연히 둘 다 북한같은 사회주의적 구조에선 의미가 대폭 줄어든다.

2.4. 류경호텔



2.5. 1984년 북한의 대남 수해지원



3. 종합


'''서해갑문 건설에 약 70억 달러,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로 약 60억 달러, 그리고 비날론 공장 증설로 약 100억 달러, 총합 230억 달러[12]를 허무하게 낭비한''' 북한 경제는 이 때부터 끝없는 나락으로 빠지기 시작하였다.
이 중에서도 직격탄은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였는데, 다른 사업은 유동성 자산이나 현물 자산을 활용할 수 있었으나 세계청년학생축전 유치 비용은 얄짤없이 외화 현금이였다. 즉, 60억 달러라는 막대한 현금을 날려버린 셈.
여기에 더불어서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과 소련이 붕괴하면서 무역길이 막히며 커다란 타격을 입었다. 냉전 시기에는 소련이나 중국이 정치적인 이유로 저급한 북한 제품을 구매해줬지만 냉전 종식 이후에는 그럴 필요가 없어졌고 더군다나 소련 붕괴 이후 러시아의 경우에는 경제상황이 너무도 나쁘다보니[13] 정치적 성향차이도 차이지만 북한을 도와줄 여유 자체가 안되었다.
공산권에서 소련에 버금가는 영향력을 행사했던 중국의 경우 세계 10대 경제대국으로 소득이 크게 신장하긴 했지만 아직 1인당 소득으로 따지면 형편이 없었다. 전체 경제력으로 따진다면 인구가 훨씬 적은 일본 경제력의 반은 커녕 1/8에 불과했고, 인구 600만에 불과한 홍콩이 중국 경제력의 1/5, 인구 2000만으로 역시 성 하나 수준인 대만의 경제력이 중국 전체 경제력의 40%였던 시절이었으며, 한국의 경우는 90%였다. 더군다나 다른 국가에 수출하기에는 북한 제품의 품질이 낮았고 이미 북한보다도 값싸게 물건을 수출할 수 있는 나라들이 넘쳐나다보니 경쟁력에서 밀렸다.
여기에 각종 자연재해로 인한 식량 생산량 감소가 겹쳐지면서 결과적으로 고난의 행군을 자초하게 된다.
더 심각한 건 북한에서는 아직도 이 흑역사들을 혁명과업의 치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반성했다면 지금 그 꼴 날 리도 없었겠지만, 문제는 수령절대주의라는 주체사상의 이념문제가 걸린다는 것. 여기에 대한 실책을 인정할 경우 주체사상의 해석여지에 따라 김부자가 스스로에게 인민재판을 당한 뒤 인민의 손에 죽어야 하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이 발생하거나, 그렇지 않다고 해도 스스로의 정치적 정당성에 치명적인 영향력을 끼치게 된다. 반성이 없으면 발전도 없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 할 수 있겠다. 또한, 독재국가의 최대 약점인 소수 높으신 분들의 오판이 나라 전체를 시궁창으로 몰아넣을 위험성을 여실히 증명하는 사례라고도 할 수 있다.

[1] 일례로 서해안의 인천항서울과 붙어 있음에도 조차 때문에 하역량이 부산항에 '''심하게(거의 4배)''' 밀린다. 물론 서울은 물동량에 큰 영향을 주지 못하는, 공업 기능을 상실한 서비스 기능 위주의 도시이고, 부산항싱가포르처럼 입지가 심히 좋은 것이 보다 근본적인 격차의 원인이긴 하지만. 애초에 인천항은 수도권 위주의 물동량을 담당하지만 부산항은 대한민국 전국의 물동량을 담당한다. 게다가 부산항에는 철도(부산진역)와 도로 시설이 잘 되어 있기 때문에 부산항으로 들어온 물자가 전국으로 수송되기에 편리하다는 점도 부산이 인천에 크게 앞서는 원인 중 하나. 문제는 이런 부산항조차 최근 유행인 초대형 선박이 접안하기에는 얕다고 준설 요구가 들어오는 판이라는 점인데 하물며 조차가 큰 서해안은...[2] 지금도 이 행사는 명맥이 유지되고 있는데 이 평양축전 후로 공산권이 붕괴되어버리면서 1993년에 열리지 못하다가 1997년 쿠바 아바나, 2001년 알제리 알제, 2005년 베네수엘라 카라카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프리토리아, 2013년 에콰도르 키토, 2017년 러시아 소치 등에서 계속 개최되었다. 그러나 위상은 동구권 붕괴 전에 미치지 못한다.[3] 북한은 서울 올림픽이 개최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썼다. 올림픽 개최는 체제 경쟁에서의 패배를 의미하기 때문에 공동 개최 같은 것을 주장하거나 항공기 폭파 테러를 벌이는 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한의 단독 개최를 저지하기 위한 총력전을 벌였지만 실패했고, 설상가상으로 우방이나 다름없던 중국소련까지 참가하여 북한으로 하여금 뒷목잡기를 시전하게 만들었다. 굳이 비교하자면, 미국일본, 그 외의 우방국들이 평양 올림픽에 참석해 축하해주고, 각종 협력을 약속한 정도의 충격일 듯.[4] 고층아파트 건설자체는 필요한 상황이기는 했다. 당시 북한도 남한처럼 막 베이비붐 세대들이 집을 마련해야할 시기가 온지라 고층아파트 건설이 당연히 필요했던것이다. 다만 90년대 중반 이후에는 예산 부족으로 거의 맥이 끊겼다는게 문제고 2000년대 중반 이후로는 부동산 개발업이 활성화되면서 고층아파트를 올리고 있는 상황이지만 가격대가 너무 비싸고 부실공사도 판을 친다는 문제점이 있다..[5] 물론 1990년대 이후로는 사정이 확 달라져서 2000년대에 평양을 중심으로 부동산 시장이 활성화되었으며 2018~19년 부동산 침체기 이전까지는 부동산 개발로 각 국영기업이나 국가기관에서 부동산 개발을 통해 돈을 왕창 벌어왔다고는 하지만 이때는 언감생심의 일이었다. 사실 개혁개방 정책을 펴던 중국조차도 이때는 부동산 배급제를 시행하던 시절이었다.[6] 80년대말, 정부가 교육용 컴퓨터를 지정할 때 16비트 컴퓨터값이 크게 떨어졌는데, 16비트 XT, AT 기준으로 올림픽 전이라면 100만원대에서 200만원 정도가 신문 카탈로그 표시 가격. 올림픽 뒤에는 100만원 잡고 XT라면 본체와 모니터 키보드 마우스 세트가 100만원 안쪽이었다고 보면 얼추 비슷하다. 8비트라면 80년대 후반 기준으로 본체 30만원대 + 모니터 30만원대에서 조금 더 하는 수준으로 보면 된다. 당연히 지금과 물가나 소득수준이 다르므로 지금의 100만원과는 가치가 다르다. 일례로 당시 라면이나 죠스바 가격은 100원 정도였다.[7] 지금만큼이나 교육열이 심하던 시절이라서, 정부가 컴퓨터교육을 강조하기 시작하자 자식있는 가정에서는 집에 '''자동차는 없어도''' 자식 컴퓨터는 사주려고 했다. 그래서 당시 부유층의 기준은 컴퓨터같은 자식교육용 비싼 장난감보다는 아파트에 사느냐(1기 신도시가 지어질 때였다)와 어떤 차를 모느냐가 확실하다. 이런 것 따지지 않아도 당시 사회에서 부친의 직장 직위가 이미 부유층이라 봐도 되지만.[8] 이것은 90년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면서 이미 한국 대학가를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다.[9] 그러나 당선 이후 방북 당시에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발언을 했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어지고 오히려 북한을 옹호하는 태도를 보이면서 탈북 대학생을 '''변절자'''라고 폭언하여 욕을 먹었고 동시에 정치인의 자질도 의심받아 20대 총선 때 출마는 커녕 소속 정당에서도 쫓겨나면서 사실상 정치생명이 끝나버렸다.[10] 즉 아직 민주주의가 정착된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기에다가(1987년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겨우 2년밖에 안 됐을 때다), 경제적으로도 비록 경제성장률은 높았을지언정 아직 부족한 게 많았던 개발도상국 시절이다.[11]
[
라디오 세상
]
100억 달러 투자 '순천 비날론 공장' 폐허로
, 자유아시아방송 워싱턴-노정민
[12] 참고로 1990년의 북한 GDP는 147억 달러에 불과했다(...). # [13] 1992년 당시 물가상승률이 공식통계로 2000%에 달했던 상황이었고 이후로 물가상승률은 낮아졌지만 빈곤율은 엄청나던 상황이었다, 더군다나 새로 민영화된 기업에서 세금체납과 임금체불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던지라 정부에서 연금이나 공무원 급여도 체불되는것이 일반적이었고 기업도 임금체불을 해서 임금 대신에 물건을 대신 받아서 팔아치워야 했던 일이 다반사였으며 학교에서도 겨울철에 난방도 제대로 못할 지경이었다. 그나마 러시아는 소련시절에 국가차원에서 대중들에게 별장을 지급해서 별장이 대중화되어있던 관계로 도시민들이라도 농사를 지어서 최소한 먹고살 만큼의 농작물을 자체 수확할수있었기에 북한처럼 식량난을 겪지는 않았다. 물론 북한도 텃밭농사를 장려시키기는 했지만 국토면적의 차이를 극복하기는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