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 라이온즈/2001년
1. 스토브리그
1.1. 코칭스태프 이동
김응용 해태 타이거즈 감독을 계약 기간 5년에 계약금 3억, 연봉 2억원이라는 유례없이 파격적인 대우로 영입했다.
하지만 김응용을 영입하면서 코칭스태프도 유남호, 김종모, 조충열 등 김응용과 함께 했던 해태 사단으로 채우면서 김봉근, 장효조, 이순철 등 1군 코치 3명과 김성근 2군 감독, 박정환, 장호연 등 2군 코치를 포함해 총 6명의 코칭스태프가 해임됐다. 하지만 대구상고 감독으로 있던 김한근과 영남대학교에서 코치를 하고 있던 양일환 등 삼성 출신도 코치로 영입하긴 했다.
이후 김성근은 LG의 2군 감독으로 자리를 옮겼고, 이순철은 LG의 주루코치, 김봉근은 해태의 투수코치, 장호연은 효천고 감독, 박정환은 포철공고의 감독으로 부임했다.
1.2. 선수 이동
2000년 시즌 후 감병훈 등이 방출돼 은퇴했다.
김재걸이 공익근무를 마치고 복귀했고, 권오준이 해병대 상근예비역으로 입대했다.
2001년 2월 1일, 김주찬과 이계성이 롯데 자이언츠의 마해영을 상대로 트레이드됐다. 마해영은 롯데의 중심타자였지만 선수협, 연봉협상 때문에 롯데 구단과 마찰이 있었다. 김주찬은 입단 당시에는 대형 유격수 감으로 평가받았지만, 2000년 7월 16일 마산 롯데 자이언츠전에서 관중석에다 공을 던지는 실책을 저지르고 말았다. 원래 삼성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했던 이계성은 트레이드로 친정팀에 돌아온지 1년만에 또다시 다른 팀으로 이적하게 됐다.
3월 21일에는 신동주가 해태 타이거즈의 강영식을 상대로 트레이드됐다. 강영식은 당시 김응용 감독이 해태 시절부터 아끼던 선수였다. 신동주는 2000년에도 코칭스태프와의 갈등으로 트레이드설이 많았었고, 2001년 전지훈련 때도 부상을 빌미로 중도 귀국했다.
1.3. 신인 지명
- 포지션은 지명 당시 기준.
- ※표시는 지명권 포기 등으로 입단하지 않은 선수.
- #표시는 대학 진학이나 유급으로 이후에 지명 당해가 아닌, 그 이후에 입단한 선수.
1.4. 외국인선수
부진한 마이클 가르시아, 수비가 아쉬웠던[14] [15] 훌리오 프랑코와 재계약을 포기했다. 프랑코의 수비와 주루가 수준 이하였기 때문이라고 발표했는데, 프랑코는 한국에 오기 전에 외야수로 뛴 적도 없었고 무엇보다 당시 프랑코는 마흔을 넘겼던 걸[16] 감안하면 뛰어난 성적이었음에도 프랑코는 코치진에 밉보였다는 이유로 인해 평가 절하까지 당하며 팀을 떠나야 했다.
외국인 선수 정원이 3명으로 늘면서, 투수 보강 차원에서 한신 타이거즈에서 마무리 투수를 맡았던 벤 리베라와 메이저리그 출신 투수 살로몬 토레스를 영입했고, 발이 빠르다는 이유만으로 외야수 매니 마르티네스를 영입했다.
1.5. 전지훈련
2000년 말 하와이에서 특별훈련을 가졌고, 전년도와 마찬가지로 애리조나에서 전지훈련을 실시했다. 선동열 KBO 홍보위원이 김응용 감독과의 인연으로 인스트럭터로 잠시나마 참가했다.[17]
전지훈련 중 신인 이정호가 무려 157km/h를 던져 화제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사실은 계형철 투수코치가 일부러 선수들 기 살려 준다고 선수들이 공 던질 때마다 원래 구속보다 빠른 구속을 외쳤고, 주변에 있던 기자들이 곧이 곧대로 받아적었던 것.
2. 정규 시즌
리베라의 영입으로 선발로 전향한 임창용은 14승을 기록했고, 고졸 2년차 배영수도 13승을 올렸다.
부진한 살로몬 토레스[18] 를 2경기만에 퇴출시키고,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활약한 발비노 갈베스를 대신 영입했다. 15경기에 등판해 10승을 올렸는데, 시즌 중반 잠적했다가 한참 뒤에야 복귀하는 일이 있었다.
임창용을 대신해 마무리를 맡은 벤 리베라는 전반기에만 36경기에 등판해 21세이브를 올릴 정도로 확실한 마무리였지만 등판하면 1이닝 이상씩을 소화하는 등, 그만큼 혹사당하기도 했다. 결국 허리 부상을 당했고 올스타 브레이크 중 장기간의 치료가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으면서 결국 퇴출됐다. 리베라를 대신해 3차례 올스타에 선정된 카를로스 바에르가를 영입했으나, 이때 바에르가는 노쇠화를 겪고 있던 터라 외국인 관광객이라는 취급만 받았다.
김기태는 슬럼프로 제대로 출장하지 못했지만 새로 가세한 마해영과 당초 예상과 달리 장타력을 뽐내며 20-20 클럽에 가입한 매니 마르티네스가 그 공백을 메웠다. 8월 17일 대구 한화 이글스전에서는 프로야구 최초로 4타자 연속 홈런[19] 을 기록했다.
2위 현대 유니콘스와 6.5경기 차로 여유롭게 1위를 정규시즌 1위를 확정지었다. 1987년 이후 14년만에 정규시즌 1위.
2.1. 선수 이동
4월 16일, 김지훈이 해태 타이거즈로 현금 트레이드됐다.
4월 27일, 김영진과 조정권이 한화 이글스의 내야수 김승권을 상대로 트레이드됐다.
7월 30일, 이강철이 현금 트레이드로 해태로 돌아갔다. 무릎 수술 후 좀처럼 부진에서 벗어나지 못하면서 본인이 트레이드를 요청했는데, 친정팀으로 돌아간 후 귀신 같이 부활해 4년 더 활동하고 은퇴했다.
3. 포스트시즌
정규시즌 3위였던 두산 베어스와 상대했다. 두산은 10승 투수도 없었고 마무리 진필중이 팀내 최다승(9승) 투수일 정도로 투수진이 처참했다. 게다가 두산은 준플레이오프와 플레이오프를 거치면서 체력적인 문제가 있었기에, 이번만큼은 삼성이 우승할 것이라는 의견이 압도적으로 우세했으나, '''삼성이 졌다.''' 자세한 경기 결과는 2001년 한국시리즈 항목 참조.
4. 선수별 개인 성적
- 진한 표시는 리그 5위내 성적. 붉은 글씨는 1위 입상 성적.
- 투수는 이닝이 많은 순서대로, 타자들은 타수가 많은 순서대로.
- 시즌 중 이적한 선수들은 당해 삼성 소속 성적만 기록.
4.1. 투수
- 우완
- 좌완
4.2. 타자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5. 수상 및 기록
[1] 페넌트레이스에서는 1위였으나 한국시리즈에서 3위 두산 베어스에게 업셋을 당해 준우승으로 최종 순위는 2위.[2] 당시 신인 최고 계약금. 다만 이는 언론 발표상이고 실제로는 5억원이었다. 당시 SK 와이번스에 입단한 정상호와 차이를 두기 위해 계약금을 살짝 부풀렸다.[3] 건국대 진학 이후 2005년 입단.[4] 경희대 진학 이후 2005년 입단.[5] 한양대 진학 이후 2005년 입단.[6] 동의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7] 인하대 진학 이후 2005년 입단.[8] 동아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9] 인하대 진학 이후 2005년 입단.[10] 고려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11] 경성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12] 경희대 진학 이후 2005년 입단.[13] 영남대 진학 이후 지명권 포기.[14] 애초에 내야수로 뛰던 선수를 외야수로 기용한것 자체가 비상식적인 기용이었다.[15] 선수들에게 타격기술 및 자기관리 등 조언을 하면서 코치진들에게 밉보였다고 한다.[16] 프랑코의 정확한 나이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어쨌든 KBO 공식 프로필인 1961년보다 전에 태어났다.[17] 결과적으로 보면 이는 선동열을 수석코치로 2004년에 영입하는 초석이 된다. [18] 원래 토레스는 1997년 은퇴해 코치로 일하다가 3년만에 선수로 복귀를 하면서 삼성에 입단했다. 토레스는 미국 귀국 후 7년 더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하고 은퇴했다.[19] 이승엽-매니 마르티네스-카를로스 바에르가-마해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