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니/역사
1. 개요
일본의 기업 소니의 역사를 정리한 문서.
2. 창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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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는 모리타 아키오(盛田昭夫)(1921~1999)와 이부카 마사루(井深大)(1908~1997)이다. 1946년 초 일부가 무너진 도쿄의 니혼바시 백화점에서 라디오 수리점으로 시작한것이 소니 그룹의 시초다. 설립 당시의 직원도 2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 40년대 말 최초로 생산한 제품은 전기밥솥이었다.
원래 사명은 '''도쿄통신공업주식회사'''(東京通信工業株式会社)였는데, '도츠코'(東通工)란 기괴한 브랜드 네임으로는 세계 시장을 두드리기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1956년에 소니로 바꾼 것이다.[2] 이는 짧고 쉽고 산뜻한 느낌을 줄 뿐만 아니라 '세계 어디서도 똑같이 읽힌다'는 훌륭한 브랜드 마케팅의 사례로 꼽힌다. 언어학적으로 볼때 CV+CV형[3] 이라 어떤 언어에서도 발음 가능한 단어이다.[4] 어원은 sound나 sonic의 어원인 라틴어 ‘sonus’와, ‘sonny’의 합성어라고 한다. 원래 사명을 sonny라고 하려다가 '손니'라는 발음 그대로 읽으면 일어로 손실 손해라는 말과 가깝기에 n자 하나를 빼고 지금의 SONY가 되었다. 오죽했으면 워크맨으로 전 세계를 뒤흔들었을 때에도 미국인들이 토요타는 일본 기업[5] 이지만 소니는 미국 기업으로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을 정도다.[6] 정보 과거 미국에서 노키아가 일본기업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하던 일처럼 의외로 흔한 사례이기도 하다.
트랜지스터 라디오를 미국에 수출하기 이전의 극초창기의 주력 사업은 패전 이전에 일제 당국에 의해 봉인당한 단파라디오를 패전 후 정상화시키는 복구수리작업과 방송국 납품용 녹음기 제작이었다고한다.
공동 창업자 중 한명인 모리타 아키오는 제2차 세계 대전 후 미국이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될것이라 예측하였다. 따라서 미국에서 먹히면 전 세계에서도 먹힐것이라 예상하고 가족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미국 뉴욕 맨해튼 5번가에 일장기가 없다는 것을 본 모리타는 5번가에 일장기를 걸겠다는 신념으로 열심히 일하였고 결국 1962년 맨해튼 5번가에 소니 쇼룸을 열고 일장기를 걸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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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초 미국 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소니 전광판
3. 전성기
1957년 세계 최초로 트랜지스터가 들어간 포켓사이즈 휴대용 트랜지스터 라디오 생산을 시작으로 1960년 세계 최초의 상업용 트랜지스터 텔레비전을 개발하였고 1968년 출시한 트리니트론 텔레비전은 이후 약 30년 간 고성능,프리미엄 TV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1973년 트리니트론으로 에미상을 수상한 것을 비롯, 1979년에는 세계적인 베스트셀러가 된 워크맨을, 1981년에는 세계 최초로 디지털 카메라를 상용화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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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소니와 필립스가 CD 공동개발을 결정할 당시의 모습. 왼쪽부터 모리타 아키오 소니 회장과 지휘자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이다. 필립스 오디오 부문의 조프 반 튈뷔르흐 필립스 오디오 부문 대표가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참고
1982년에는 필립스사와 함께 CD라는 새로운 저장매체 포맷을 발표하였으며, 1984년에는 디스크맨, 1985년에는 핸디캠을 출시하여 세계 일류 전자기업의 이미지를 굳혔다. 1991년에는 세계 최초로 리튬이온 배터리를 상용화하기도 했다.
1987년 한창 전성기때 소니의 CEO였던 오가 노리오는 "이젠 기술력은 다 고만고만하고 [8] 앞으로는 기계 안에 들어갈 콘텐츠로 승부해야한다"고 생각하여 실제 제품의 기획·생산·마케팅 보다는 콘텐츠 미디어 분야에 대한 투자를 적극적으로 늘린다.[9] 1988년 CBS 레코드를 인수하여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를 만들고 1989년에는 컬럼비아 픽처스를 인수하여 소니 픽처스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한다.[10]
비디오 게임 시장에도 진출하는데 1993년 자회사로 소니 컴퓨터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고 1994년 12월에 플레이스테이션을 발표했다. 또한 온라인 게임에도 비교적 일찍 진출해 1995년에는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를 세워 에버퀘스트 같은 걸작을 내기도 했다. 플래닛사이드 같은 실험성 강한 작품도 냈고 MMO 계열에선 대부분의 장르를 만들어내기도 했다.[11] 이러한 80~90년대의 소니의 행보는 21세기들어 콘텐츠와 미디어 산업이 중요해진 상황에 비추어 보면 틀린 행보는 아니었고 오히려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콘텐츠 산업에 대한 무리한 투자는 1995년에 심각한 부채로 되돌아오게 된다.[12]
아날로그 시대의 소니는 아이팟과 iPhone을 내놓으며 디지털 시대의 혁신을 주도했던 전성기의 애플과 비슷한 위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link. 포브스지가 발표한 세계 IT 기업 순위에서 1980년 5위, 1990년 6위,[13] 2000년 11위를 기록하였고, 2000년대 초반까지 세계 브랜드 가치 순위에 20위권에 포함되었다.
4. 침체기
1995년 이데이 노부유키 CEO[14] 가 취임할 당시만 하더라도 소니는 여전히 최고의 전자기업이었다. 소니의 트리니트론과 워크맨은 세계 시장을 제패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은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뀌고 있었다. 따라서 이데이 CEO는 다가오는 시대에 디지털 기술이 가전과 오락 산업을 지배할 것이라 생각했다. 1995년 2000여명 소니의 간부들이 모인 앞에서 이데이 CEO는 "디지털 드림 키즈(Digital Dream Kids)" 전략을 발표한다. 이 디지털 드림 키즈 전략과 유비쿼터스 밸류 네트워크 전략은 스티브 잡스의 애플의 디지털 허브 전략과 함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전략으로 평가 받는다. 디지털 드림 키즈는 디지털 시대에서 자라고 디지털 기술에 친숙한 신세대를 뜻하며 그들의 꿈을 만족시킬 독창적이고 재치있는 상품을 만들어 나가자고 이데이 CEO는 주장했다. 이데이 CEO는 3단계 전략을 통해 디지털 드림 키즈를 구체화했는데 바로 1단계 "Connect", 2단계 "Synergy", 3단계 "Hub"였다.
1단계 Connect는 콘텐츠, 유통, 기기를 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소비자들을 쉽고 편리하게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다는 것이 목표였다. 따라서 1995년 이데이 CEO는 소니의 영화산업과 음반산업의 방대한 콘텐츠를 디지털로 변환시켜 인터넷과 케이블 tv로 연결하였고 별도의 인터넷 접속회사인 소네트도 설립하였다. 또한 위성 TV인 스카이 퍼펙트 서비스도 실시하고 애플의 아이튠즈 스토어보다 먼저 프레스 플레이라는 온라인 음악 상점도 개설했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를 설립하여 에버퀘스트등을 개발하고 온라인으로 다운받을수 있도록 했다. 1996년 이데이 CEO는 1단계 계획이 어느 정도 성과를 보이자 디지털 콘텐츠를 더욱 원할하게 연결하는데 컴퓨터가 필수적이라고 생각하여 VAIO 브랜드로 유명한 컴퓨터 사업을 시작하였고 i.LINK를 개발하여 제품을 더욱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도록 했다.
이에 따라 2단계와 3단계 계획도 준비했는데, 2단계 Synergy 계획은 소니의 제품이 서로 연결되면 소비자가 소니의 제품을 사게 되니 자연스럽게 다른 소니의 제품들을 구매하도록 유도하는 계획이고 3단계 Hub 계획은 전 세계 각 가정을 소니 제품으로 하나의 디지털 허브로 만드는 계획이다. 여기까지 계획이 순조롭게만 진행된다면 이데이 CEO는 TV, 각종 전자기기, 컴퓨터 등을 소니의 콘텐츠와 연결하여 하나의 홈네트워크가 되어 다양한 수익 모델이 창출될 것으로 보았고, 이렇게 소니 왕국이 건설되면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를 제패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다.
'''하지만 이 계획은 1단계에서 끝나게 되는데,''' 이데이 CEO는 소니 제품을 서로 연결하면 소비자들이 인기있는 소니의 제품을 구매하였을 때 자연스럽게 판매가 취약한 제품의 점유율도 끌어올릴 것으로 생각했으나 결과는 이와 달랐다. 소니는 제품들을 서로 연결할때 하나의 소니 네트워크를 만들기 위하여 독자적인 포맷을 고집하였다. 예를 들어 소니 TV는 소니의 멀티미디어 기기만 연결할 수 있었고 소니 멀티미디어기기는 소니 제품끼리만 연결될 수 있었다. 독자적인 포맷을 사용하였기 때문에 소니의 콘텐츠를 이용하려면 소니의 제품을 사야만 했다. 당시 소니는 기술적으로 1등 기업이었고 제품에 대한 자신감이 있었다. 소니는 혁신적이었던 제품과 다양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소니의 둘레 안에서 소비자들을 사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이러한 폐쇄적인 소니의 태도는 베타맥스의 실패에서 예견되었던 것처럼 전자시장에서 소니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소비자들은 점차 소니 제품에 매력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미래 기술 변화를 예측하는것이 거의 불가능한데도 이데이 CEO는 구체적으로 하나하나 계획을 세워가면서 미리 대비하려고 했고 너무 미래를 앞서 나가서 오히려 다가오는 기술 흐름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한것이 소니가 디지털 시대의 전자산업에서 실패한 중요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전자기기를 모두 연결한다는 발상 자체는 디지털 드림 키즈가 발표되고 약 20년 후에 IoT로 현실화되긴 했다.
이데이 CEO가 창사 이래 사활을 걸고 베가(WEGA), 바이오(VAIO)[15] 등을 성공시키기는 했지만 디지털 산업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는 이루어지지 않아 소니의 봄은 짧았고[16] 결국 이러한 영향은 계속되어 2003년 4월 '''소니 쇼크 사태'''[17] 가 일어나게 된다. 소니 쇼크 사태 이후 소니가 과거 전성기 때의 혁신적인 모습과 창의성을 거의 보여주지 못하게 되자 자연스레 전자산업 분야에서의 브랜드 가치도 하락하게 되었다. 또한 이때를 기점으로 일본 전자산업이 시대흐름에 따라가지 못하고 쇠퇴하기 시작한다.
2003년, 전 제품라인을 아우르는 프리미엄 브랜드 소니 퀄리아 (QUALIA)를 발표했으나, 개념을 상실한 가격으로 일반 사용자와 매니아층 양쪽에서 외면을 받으면서 결국 2005년 퀄리아 사업을 접게 되었다. 특히 브라운관TV를 '''84만엔''', 200만화소짜리 똑딱이디카를 38만엔 받고 팔아먹은 건 두고두고 까일만한 일.[18] 하지만 야심찬 사업답게 몇몇 제품, 특히 헤드폰같은 경우 품질면에서는 최상급이었기때문에 지금도 매니아들 사이에서 고가에 거래되고는 한다.[19]
소니는 아무래도 '세계 제일의 제품이라는 명성'만 꽉 잡고 있으면 세계 시장에서 쉽게 물건이 팔려나갈거라 생각했겠지만, 삼성과 LG의 능동적인 현지 마케팅에 밀려 제3세계 시장들도 빠르게 뺏겨버렸다.
특히 중국 다음으로 큰 시장인 인도에서 삼성전자, LG전자에게 완패를 당한게 소니로서는 가장 뼈아픈 패착 중 하나. 이데이 노부유키 전 소니 회장도 '인도 시장 깔보고 재고품이나 팔았더니 죄다 그걸 알아차려서 자기 나라 깔본다며 소니에 대한 인지도에 큰 악영향을 끼쳤다'며 후회하기도 했다. 실제로 1980년대 초만 해도 인도에선 소니를 '''가전제품의 대명사'''로 인식[20] 했으나 후발주자인 삼성과 LG가 인도 진출을 위해 최신 상품들을 적극적으로 내놓고 가정부나 하인들이 냉장고에 있는 음식들을 몰래 빼먹는게 흔한 탓에 이를 막기 위해 냉장고에 열쇠구멍을 달아 잠금장치를 설치하거나, 인기가 있는 크리켓 선수를 광고모델로 쓰는 등 적극적인 마케팅 덕분에 인지도를 높이는데 성공한다.
반면 인도 시장에 대해 근본적인 대책조차 세우지 않고 '그냥 적당히만 하면 알아서 사줄거란' 안일한 인식을 가졌던 소니는 서서히 밀리기 시작해 이젠 전자제품 양판점에 가보면 소니 TV는 삼성, LG의 TV에 밀려 구석탱이에 쳐박혀 듣보잡 취급을 당할 정도. 2006년 NHK가 직접 인도에 가서 가전제품(세탁기, 에어컨, TV, 오디오 주요 제품 종합) 인지도를 조사하니 LG가 압도적으로 1위(33%)를 차지했고, 소니는 삼성, 비디오콘(인도 가전제품업체), 필립스, 히타치보다 뒤쳐진 6위를 차지했으며, 뭄바이나 델리 여러 곳에 있는 가전제품 대형마트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인기 제품은 LG와 삼성 제품들이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소니는 구석에 처박혀있거나 관련 제품도 적었다.
이데이의 뒤를 이어 소니의 CEO를 맡게된 하워드 스트링거는 전자산업에 대한 몰상식한 이해와 무리한 콘텐츠 산업의 사업확대로 주력인 전자산업의 위기를 가속화 시켰다. 스트링거는 돈이 되지 않는 사업을 차례로 접으면서 콘텐츠 산업을 강화시키려 했다. 물론 콘텐츠 사업도 중요하긴하다. 하지만 스트링거는 소니가 근본적으로 전자분야가 중심이라는 사실을 무시했다. 로봇사업을 시작으로 소니의 핵심 산업인 전자 부문에서 대규모 인력 감축이 있었는데 이는 과거 혁신적인 제품들을 개발했던 연구소들도 포함되어 있었다.[21]
결국 소니의 상징이였던 기술을 저버리고 이데이처럼 콘텐츠를 포함한 네트워크 비즈니스를 성장시키려고 했던 스트링거는 결국 소니가 워크맨과 트리니트론처럼 혁신적인 제품을 시장에 내놓지 못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스트링거는 소니의 상징이였던 창업지 고텐야마 본사와 공장건물, 유럽본사 건물과 베를린 소니센터[22] 를 차례로 매각시키면서 기업의 정체성을 흐리게 했다고 과거 전 소니의 CEO였던 오가 노리오에게 비판을 받기도 했다.[23]
스트링거는 2009년 CES에서 "소비자는 어느 회사의 제품이라도 같은 서비스를 받을 수 있도록 호환성이 있는 것을 기대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픈 테크놀로지를 지지합니다."라고 말하며 독창적인 제품 개발을 거부한다는 것을 명확히 표명하기도 했다. 또한 "소니의 콘텐츠가 들어갈수 있다면 파나소닉 제품이여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소니의 제품이 가장 좋습니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 년 후 삼성 tv에 PSNow 서비스를 시작했다.[24] 스트링거의 체제에서 소니는 전자부분의 명성과 휼륭한 인력,[25] 오랫동안 쌓아온 혁신적인 기술들을 잃게 된다.
이 두명의 CEO를 거치며 소니는 IT 시장에서의 브랜드 가치가 빠르게 추락하게 되었고, 여러 사업부들이 적자 상태에 빠지며 위기를 맞이 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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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전산업의 꽃이라 불리우는 TV 사업에서 과거 트리니트론과 베가(WEGA)의 명성을 잇는 디지털 시장의 새로운 브랜드 "브라비아(BRAVIA)"를 2005년 공개하였으나 1년도 안되어 삼성전자에게 세계 TV 시장의 1위 자리를 빼앗기게 된다. 이후 2009년에는 LG에게도 밀리며 3위권으로 추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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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호쿠 대지진으로 인해 공장이 침수되어 가동을 중단했다고 한다. 자신들이 어려워진 상황에서도 지진 피해자들을 위해 3억엔과 라디오 3만대를 기부한다는 모양.
엔고와 가격, 기술 경쟁력 저하로 인하여 여느 일본 전자업체와 마찬가지로, 소니도 2012년 1월 기준으로 2천억엔 규모의 적자를 기록했다.(관련기사)
최근 실적 악화로 인하여 2005년부터 연임해오던 하워드 스트링거 회장은 해임되고 주주총회에서 신임된 히라이 카즈오 사장이 소니 회장(CEO)로 취임할 것이라고 한다.(관련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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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추월당한 이래 TV부문에서 소니는 완전히 왕좌를 내어준 모양새이다.[26] 그래도 UHD TV 시장의 경우에는 유럽과 북미지역 1위를 고수하고 있었으나, 삼성이 본격적으로 시동을 건 2013년 7월 이후 4개월만에 시장점유율을 왕창 뺏기고 말았다.
파나소닉이나 샤프와 다르게 소니는 나름대의 매니아층(충성스러운 고객 집단)이 존재하고 현재에도 방송장비 분야에서 독보적인 입지(방송용 카메라와 스튜디오용 헤드폰)를 지니고 있으며, 디카용 CMOS 이미지 센서와 스마트폰용 카메라 모듈의 주요 공급업체이자 다양한 분야에서 원천기술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또한 이미 전성기때 영화, 음악, 엔터테인먼트, 금융 분야로 사업분야를 다각화하여 생각보다 그리 쉽게 도산하지 않으리라는 전망도 있다.
2012년 11월 말, 국제 신용평사가 피치가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으로 강등하며 주가와 가치가 동반폭락했다. 문제는 더 심각해질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는 것이다. 소니가 과거에 안주하는 동안 삼성과 LG가 추월한게 결정적인 문제이다. 2014년 1월 27일에는 무디스도 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으로 강등했다.
중고 게임 사용을 막는 기술 특허를 준비하여 많은 게이머에게 충격을 주었지만 다행히 적용하지는 않을 것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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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2013년도 회계자료를 보면 소니가 처한 상황을 알 수 있는데 매출 기준으로는 모바일, 디스플레이 등의 전자 부문이 70% 가까이 차지하나 '''영업이익에서 전자 부분은 줄줄이 적자를 보고 소니를 먹여 살리는 것은 금융 부문의 수익'''이며 그 외 영화, 음악 부문에서도 약간의 수익을 얻고 있다. 그나마도 2013년도 2분기에 영화사업 부문이 적자나서 실적이 악화되고 있다.
2013년 1월 17일, 미국 맨해튼에 있는 미국 법인 건물을 11억 달러에 매각했다. 이게 미국 법인 폐쇄는 아니고 세들어 있는 형식으로 남게 된다고 한다. 또한 2013년 2월 28일, 도쿄의 사옥 중 하나인 '소니시티 오사키'빌딩을 1천 110억엔(1조 3천억원)에 매각했다. 소니시티 오사키빌딩은 2011년 3월에 완공된 25층짜리 건물로서, 소니 도쿄 본사 건물과도 가까운 도쿄도 시나가와구에 있다. 이 빌딩에는 소니의 TV 및 오디오 사업부 임직원 5천여 명이 근무 중인데, 이들은 앞으로 세들어 사는 형태로 근무하게 된다. (기사)
이렇게 기업이 소유한 본사 건물을 매각하고 세들어 사는 경영 방법이 있는데 이건 정말 눈물이 흐를 정도로 가난해진 기업들이 쓰는 방법이다. 즉 일시적으로 빌딩을 매각하여 현금유동성을 올린 다음 재정 상태가 나아지면 다시 인수하는 것이다. 당연히 이는 일시적인 스팀팩 수준의 대처법이며 세를 계속 내야 하므로 재정 상태가 확 나아지지 않는 이상 기업에 부담이 점점 커지게 된다.
2013년 10월 17일 현재 카메라 부분을 위주로 개발해 나가고 있다. 대표적으로 '''미러리스 풀프레임'''이다. 바디 가격만 1499달러와 1999달러라서 충격과 공포를 안기고 있다. 다만 화소가 기본 풀프레임에서 D800E급과 비슷한 화소를 자랑하고 있다. 굳이 DSLR처럼 큰걸 쓸필요가 없어진다. 특히 캐논의 6D와 70D에 갈 유저들을 끌어모을 수 있다는 점.[27] 하이브리드 카메라는 무려 '''고정 2.8조리개''' 줌렌즈로 나왔다.
엑스박스 원과 경쟁구도인 플레이스테이션 4가 발매 첫날에 100만대 판매를 달성하며 PS3과 달리 순항 중이다. 발매 2주만에 판매량 210만 대를 돌파했다. 1대를 팔 때마다 300달러의 손해가 났던 PS3와 달리 이번 PS4는 18달러가 남는다고 한다. (기사)
2014년 1월 27일 국제신용평가기관 무디스에서 투자적격등급 최하위의 Baa3에서 투자주의등급인 Ba1으로 한 단계 강등했다. 숫자 높아졌다고 좋아할거 아니다. a가 줄었으니 나빠진거다. 주력 분야인 TV, PC 등의 가전제품 분야의 하락세가 계속될 것으로 예상되어 타격이 크다. (기사)
2014년 들어 PC 부분 사업을 전부 매각했다.
2009~2011년 회계연도에서 줄줄이 적자를 보다가 2012년 회계연도에서 430억엔의 흑자를 보았으나 다시 2013년 회계연도(2013년 4월~2014년 3월)에서 연결 손익이 1300억엔 적자로 추정된다고 발표했다.
2014년, 2년만에 한국에 공식 출시한 상반기 플래그십 스마트폰인 엑스페리아 Z2가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또한 국내 렌즈교환식 카메라 점유율 시장에서 1위를 차지하여 이벤트도 진행중이다. (링크)
2014년 7월 28일, 실적 악화로 도쿄도 미나토구에 위치한 본사 건물의 토지를 자회사인 소니생명보험에 528억엔에 매각하기로 결정되었다. 2014년 9월 17일 소니는 2014년 회계연도(2014년 4월~2015년 3월)의 실적 전망을 기존의 500억엔 순손실에서 2300억엔 순손실로 수정하면서 상장 56년 만에 처음으로 배당을 하지 않으며 1000명 규모의 감원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2014년 9월 17일 소니 상장 56년 만에 처음으로 주식 배당을 하지 않았고 18일 소니의 주가는 13% 폭락해 도쿄 증권거래소가 일시적으로 거래를 중지 시켰다.
2014년 10월 21일 해지펀드 써드포인트의 대니얼 로브가 소니 주식 7%를 전량 매각했다. 소니 계열사중에 그럭저럭 이익이 나는 소니 엔터테인먼트를 분리시켜 가전사업에 투자를 늘리고 회생해야 한다는 압박을 넣어와서 분사보다는 경영 정상화를 꾀하는 현 경영진(히라이 CEO)의 의견충돌이 있었고 결국 포기하고 매각.
2014년 11월, 추수감사절 기간에 소니 픽처스가 영화 디 인터뷰 관련 해킹을 당해 약 5억달러 (5천억원) 수준의 피해를 보았으며 매각설이 나올 정도로 큰 타격을 입었다.
2015년 2월 19일, 소니의 일등공신 브랜드인 워크맨도 분사시키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기사에 따르면 소니의 유일한 하드웨어 생산품은 플레이스테이션과 이미지 솔루션 관련 제품 위주가 될 것이며 그 외에는 음악과 영화같은 미디어 관련 사업에 집중할 것이라는 내용이다. 실제로는 One Sony 정책의 실패 이후 히라이 소니가 추구하는 새 정책의 일환이다. 이때 시점까지도 분사되었던 소니 비주얼 프로덕트의 실적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에, 앞으로 2017년까지 여러 분야에 걸쳐 분사화를 추진한다고 한다.
한편으로는 차세대 먹거리를 발굴하기 위해 올림푸스와 함께 의료산업(소니 올림푸스 메디칼 솔루션)(소니 라이프 케어), 국제 교육 산업 (소니 글로벌 에듀케이션) 부동산 산업 (소니 리얼 에스테이트) , 드론 산업(에어로센스)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의 다각화를 시도하고 소니가 강점을 나타내는 분야인 이미지 센서 투자를 적극 감행했다.
2015년 4월 30일의 연결실적발표에서, 2014년도의 매상고는 8조 2,159억엔, 영업이익은 685억엔, 순손실은 1,260억엔의 적자로. 전년도의 1,284억엔의 손실에서 약간 개선되었음을 발표했다. 최초 예상했던 500억엔의 적자보다는 크지만, 예상치로 수정했던 2,000억엔의 적자보다는 월등한 수치여서 주가가 크게 상승했다.
이런 실적 개선에는 이미징 센서, 플레이스테이션 4와 엔저가 큰 역할을 했고 특히 TV의 매출이 크게 회복되는 성과도 있었다. 그러나 히라이가 직접 '소니 비즈니스의 핵심이 될 것'이라고 밝힌 모바일 분야에서 무려 '''2,204억 엔'''의 적자를 기록해서 모바일 부문 매각설이 나돌았다.
5. 부활
2015년 10월 29일 발표한 회계연도 2분기 (2015년 7~9월) 발표에서 순이익 336억엔, 영업이익 880억엔을 기록했다고 발표했다. 회계연도 상반기 (4월~9월)로 잡으면 순이익이 1159억엔으로, 전년 동기(1091억엔 적자) 대비 흑자로 돌아선 것은 물론, 상반기 기준으로 무려 5년만에 흑자로 돌아섰다. 또한 매출액은 전년 동기대비 소폭 감소한 3조7007억엔, 영업이익은 1849억엔 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파나소닉(1113억엔)이나 히타치(975억엔)의 상반기 이익보다 많은것으로, 이대로라면 2015년에는 3년 만에 연간 기준 흑자로 전환될 것으로 예상되는 등 서서히 부활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
소니의 이러한 흑자 전환은 드론에까지 사용되며 수요가 급증한 이미지센서(259억엔)와 게임기(239억엔) 분야에서 대대적인 흑자를 달성했기 때문이며, 카메라 부문 수익도 전년 동기 대비 29%나 늘어나는 등 주요 수익원에서 짭짤한 수익을 낸 것이 크다. 즉 기존의 특화 산업에서 더욱 큰 이익을 낸 것이며, 이는 지속적 수요가 발생할 수밖에 없는 고부가가치 산업에 치중된 일본 기업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반면 모바일은 스마트폰 시장의 경쟁 심화로 여전히 2분기 기준 206억엔 적자를 기록하여, 적자의 폭은 줄었으나 여전히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이다. 다만 소니 모바일의 토토키 사장이 2017년 회계분기 (2016년) 에서의 흑자 전환을 자신했고, 신형 엑스페리아 Z5 패밀리의 평가도 좋은 편이어서, 마냥 전망이 어둡지만은 않다. 특히 소니는 타사와는 달리, PC 부문을 매각하여 전망이 어두운 부문을 정리했고, 차후 모바일 시장의 성장가능성을 소니도 잘 알기 때문에 쉽사리 철수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던 와중 4월 28일 소니는 2015년 회계 연도(2015년 4월~2016년 3월)의 연결 당기순이익을 발표했는데, 1,477억엔(한화로 1조 5737억)을 기록해 '''5년 만에 흑자가 났다.''' 디지털카메라와 TV 사업부, 플레이스테이션(PS)등 고부가가치 제품 판매 호조에 힘입어 전자부문이 5년 만에 흑자를 기록한 것이다. 매출은 8조1,057억엔로 직전 회계연도 대비 1% 줄어들었는데, 이는 스마트폰 등 모바일 사업부의 매출 20%가 쪼그라든 게 매출 하락의 원인이 됐다. 또한 모바일 사업부는 614억엔 적자를 냈지만, 작년에 비해서 영업손실이 1561억엔(1조 6,632억)이나 줄어들었다. 장기적으로 모바일에서 이익을 낼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으며, 단기적 손실을 그룹 차원에서 안고 갈 여유가 있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것.
2016년 6월 분기 실적이 발표 되었는데, 전사 매출과 영업익이 구마모토 지진으로 타격을 입은 와중에도 영업익은 흑자를 유지했고 특히 플래그십 모델에 집중한 MC 사업부가 400만 달러의 영업이익을 기록하였다.
2017년 2분기에는 이미지센서 사업과 게임기 사업의 약진과 프리미엄 TV, 모바일 사업의 이익률 증가 덕분에 20년만에 해당분기 영업익 최고치를 기록했다.# 특히 부진했던 TV 부문 사업은 초고화질 TV 등 가격대가 높은 프리미엄 제품에 주력해 이익률을 빠르게 높이고 있으며 OLED TV 판매에서 성과를 거두면서 대당 1500달러 이상의 프리미엄 TV 부문 '''세계 시장 점유율 36.1%로 1위'''를 차지했다고 한다.[28]
그리고 2018년 4월 27일에 발표된 소니의 2017년도의 영업이익은 무려 7,349억엔을 기록. 당초 예상했던 6,300억엔을 상회하는 것이 되었으며, 1998년 이래 최대를 기록한 것은 물론이었다. 매상고 역시 전년 동기대비 12.4% 증가한 8조 5,440억엔. 특히 G&NS 분야와 HE&S 분야가 각각 1조 9,438억엔, 1조 2,227억엔의 매상고를 기록한 것이 큰 영향이었다. G&NS 분야에서는, 플레이스테이션 4의 판매가 상승세를 멈추지 않는 것과, 네트워크 (PSN) 판매를 포함하는 소프트웨어의 판매 증대의 영향. HE&S 분야는, 4K OLED 브라비아 등 고부가가치 모델에의 시프트에 따른 제품 믹스의 개선이 큰 영향이 되었다. 또, 사양세로 말해지는 IP&S 분야에서도 매상도와 영업이익이 동시 증가. 고부가가치에 포커스를 두는 전략이 옳았다는 것이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 작년도에서 805억엔의 대폭 손실을 기록한 영화분야도 441억엔의 흑자에 시프트, Fate/Grand Order의 호조에 따라, 음악분야 역시 전년 대비 24% 증가한 8,000억엔의 매상고와 1,278억엔의 영업이익을 기록했다. 히라이 카즈오 사장이 취임한 때인 2012년과 비교해보면 완전 부활이라는 말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수준이다. 히라이 사장은 정크 등급까지 내몰렸던 소니를 완전 부활이라는 기적에 이끌고 요시다 켄이치로 사장에게 뒤를 맡기며 경영 일선에서 떠났다.
그렇지만 MC 분야는 다시 소니의 걱정이 되었다. 고정자산의 감손손실 313억엔의 계상에 따라, 전년도에 흑자 전환했던 영업이익이 다시 276억엔의 적자에 돌아선 것인데 이에 따라 소니는 '18년도의 스마트폰 판매대수를 축소, 염가형 모델을 정리할 예정에 있다.
2018년 5월, 캐나다 기업 DHX미디어가 보유하고 있는 만화 '피너츠'(Peanuts)의 지분 80%의 절반가량을 1억8천500만 달러(약 1천980억원)에 인수한다고 한다. 소니는 피너츠의 지분39%를 보유하게된다. 또한 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 투자회사 무바달라가 보유하고 있던 EMI뮤직퍼블리싱 지분 전량을 인수한다고 한다. 간접지분까지 포함해 소니가 갖게 되는 EMI 지분은 90%에 달한다. EMI는 록그룹 ‘퀸’과 세계 3대 디바 ‘비욘세’ 등의 음원을 대거 보유한 음반사이다. 인센티브 등의 비용을 포함한 총 인수금액은 23억달러에 달할 것이라고 한다.#
2018년, 보유하고 있던 스포티파이 지분 절반을 소각했다. 2019년 CES에서 요시다 켄이치로 CEO는 소니가 '창조적 엔터테인먼트 기업'이라면서 영화,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 분야를 소니의 최우선순위로 삼겠다고 공언했다. 그렇게 소니 픽처스가 매각되리라는 예상은 일단 수그러들었다. 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를 종합 콘텐츠 플랫폼으로 키워보겠다는 의지를 천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2007년에 설립했던 소니의 자체 OTT 서비스 '크래클'은 매각됐다.
2019년 4월에 발표된 2018년의 영업이익은 '''8,942억엔(9조 3천억원)'''으로 다시 최대치를 경신했다. 특히 G&NS분야에서만 3조원이 넘는 영업이익을 올렸고 픽쳐스와 뮤직도 각각 5천7백억원과 2조 4천억원의 이익을 기록하면서 소니의 엔터테인먼트 기업으로서의 위상을 확인시켜줬다. 그 반면 MC 분야는 약 1조원이라는 막대한 손실을 기록했는데, 소니가 스마트폰 시장에서 철수했더라면 영업이익 10조원을 넘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영향때문인지는 몰라도 2019년 4월 MC사업부는 EP&S 사업부로 통합되었으며 동아시아와 유럽시장에만 집중한다는 보도가 나왔다. 같이 발표된 2019년 영업이익 예상치는 8,100억엔으로 전년대비 약 9퍼센트 감소할 것으로 내다봤다. 이유는 PS4의 판매고가 이미 정점을 찍어 매출이 둔화되고 있으며, 동시에 PS5 출시를 위한 대규모 투자가 이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역대 최고 영업이익 연속 경신과 수익다변화 성공이라는 성과에도 불구하고 답이 안나오는 MC 사업을 어떻게 할 것인지는 여전히 소니의 큰 숙제로 남았다.
2019년 5월, 요시다 켄이치로 CEO가 사티아 나델라 마이크로소프트 CEO와 만남을 갖고 클라우드 게이밍, 인공지능, 이미지센서 등 여러 분야를 포괄하는 다방면의 협력을 합의했다.
2019년 8월, 라쳇 & 클랭크 시리즈, Marvel's Spider-Man 시리즈로 유명한 게임 제작사 인섬니악 게임즈를 2억 2900만 달러에 인수했다.
2019년 11월, 피터 래빗 등의 저작권을 가진 미국 실버게이트 미디어를 200억엔(약 2140억원)에 인수했다.
2019년 12월 10일, 소니의 주가가 장중 한때 7천268엔까지 상승해 17년 만에 최고치를 기록했다.
2020년 CES에서 소니의 센서들과 자율주행 시스템을 탑재한 '''전기자동차''' 프로토타입인 VISION-S를 깜짝 공개하면서 엄청난 호응을 이끌어냈다. 양산차 시장에 진출할 가능성은 부정했지만 연내에 주행시험은 하겠다고 한다. "자동차 메이커 되지 않겠다"
2020년 4월에 중국의 동영상 커뮤니티 사이트 '비리비리'에 4억달러를 투자하여 지분 4.98%를 취득했다.
2020년 5월, 소니가 기업 을 소니그룹으로 변경하는 계획을 발표하였다. 이때 포함되어 있던 소니 파이낸셜 홀딩스 완전 자회사화 를 약 4000억엔(4조5000억원)을 투자해 2020년 9월 2일에 자회사화 완료 되었다.
2020년 5월 13일 업계에 따르면 미국 시장조사업체 NPD의 올 4월 북미 TV시장점유율 조사 결과 소니는 판매량 기준 1.1%로 5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매출액 기준으로도 점유율 4%로 시장에서 존재감이 크게 하락했다. #
2020년 7월 포트나이트로 유명한 에픽 게임즈에 2억 5000만 달러를 투자해 회사 전체의 1.4%에 해당하는 지분을 취득하였다.
2020년 12월 소니가 AT&T로부터 애니메이션 스트리밍서비스 크런치롤을 약 12억 달러에 인수했다.#
2021년 2월 소니는 미국 음악출판회사 코발트 뮤직그룹으로부터 음악 배급지원 등을 다루는 ‘AWAL’부문과 음악 사용료를 아티스트 대신에 수금하는 2가지 사업을 4억3000만달러에 인수한다고 발표했다.#
2020회계연도 (2020년 4월∼2021년 3월) 소니는 처음으로 연간 순이익 1조 엔을 돌파하였다고 한다. 코로나19가 확산해 소비자들이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면서 플레이스테이션 등 게임 관련 기기의 수요와 소프트웨어 판매량이 증가 하였고 음악 스트리밍 등 네트워크 서비스의 매출액도 증가하였다. 또한 소니 계열사 애니플렉스가 배급에 관여한 극장판 귀멸의 칼날: 무한열차 편이 공전의 인기를 누린 것도 실적 개선에 기여했다.#
2021년 2월 4일 카도카와 와의 재정 협력을 발표하였다. 소니는 카도카와의 지분 2%를 구매하고 애니메이션 및 소비자 게임에 대해서 협력한다고 한다.#
[1] 보통 전자기업들이 최소 한두번은 이전과 완전히 달라진 글씨체의 로고타입으로 바꾸는데 비해 소니의 경우는 50년대부터 디테일한 부분만 바뀐 로고타입이다. 굳이 이런 회사를 찾자면 히타치나 파나소닉 정도. 자회사였던 아이와가 80년대 이후 두번씩이나 이전과는 180도 다른 글씨체로 바꾼 것과 대조적이다.[2] 비슷한 이유로 마쓰시타전기(松下電氣)가 7, 80년대에 수출용 제품에 파나소닉(Panasonic)이라는 상표를 달았으며, 2008년에는 회사이름을 아예 파나소닉으로 바꾸기도 했다. 물론 후지쯔(富士通 Fujitsu)같이 뜻과 발음이 어렵건 말건 그냥 밀고 나가는 기업도 있다. [3] C는 Consonant(자음), V는 Vowel(모음)을 뜻한다.[4] 발상이 비슷한 사례가 코닥필름. 설립자인 조지 이스트먼은 코닥이라는 이름이 어떤 언어에서도 발음하기 쉽다고 하여 이 이름으로 회사를 냈다. [5] 때문에 당시 일본 제품의 대중적인 이미지를 벗어버리기 위해 렉서스라는 고품격 브랜드를 새로 만들었다.[6] 1990년대 중순부터 "소니는 일본 기업입니다."라고 홍보를 했더니만 해외에서 반응은 그랬냐? 였었다고 한다. 그래서 소니도 이젠 일본 기업으로 알든지 말든지 포기했다. [7] 최초의 디지털카메라는 코닥에서 만들었다.[8] 이 당시만 하더라도 가전제품의 대명사라고 하면 소니가 대표적인 트레이드마크였다. 전 세계 가정에 소니 제품이 들어가지 않은 곳이 없었을 정도였으며, 당시에 제작된 할리우드 영화에 등장하는 가전제품의 대부분은 소니였다.[9] 오가 노리오 항목에서도 서술한 바와 같이 오가 노리오는 음악가였기 때문에 이와 관련된 가전기기들(특히 음향기기)의 제작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더구나 그가 은퇴 후 벌인 일이 자신이 와병 중에 요양했던 가루이자와에 음악회당을 건립한 것이었다.[10] 당시에 미국인들은 기술적으로 우위에 있는 일본이 미국의 문화까지 잠식한다고 경계했다. 컬럼비아 픽처스 문서 참고.[11] 하지만 온라인 게임을 담당하던 소니 온라인 엔터테인먼트는 소니의 경영난으로 2015년 콜럼버스 노바에게 매각되어 데이브레이크 게임 컴퍼니로 변경되었다.[12] 1991년 8000억엔에 가깝던 잉여금이 1994년 말 2400억엔까지 줄어들었으며 소니의 부채 규모는 1조 500억엔까지 증가했다. 1995년 이데이 노부유키 CEO는 취임하자마자 자회사에서 뛰어난 회계능력을 발휘하던 이바 타모츠를 CFO(최고 재무책임자)로 임명하면서 "앞에 도산이라는 거대한 폭포가 있다"라고 위기감을 주었으며 이바 타모츠의 노력으로 2000년 부채 규모를 현저히 줄이고 재무구조를 개선하는데 성공한다. 하지만 부채 상환률은 높였지만 상대적으로 연구개발에 투자는 줄어들면서 이후 전자기업으로서의 위상은 추락하게 된다. [13] 당시 애플은 19위, 삼성전자가 21위를 기록했다. 그 당시 1위는 IBM.[14] 당시 일본에서 이례적으로 혁신적인 CEO로 평가받던 인물로 포춘지가 올해의 기업인으로 선정하기도 하였다. 1995년 당시에는 혁신적으로 평가 받았던 디지털 개혁안을 내놓고 아이보와 OLED 등과 같은 신기술과 콘텐츠 산업에 많이 투자했다. 하지만 구체성이 결여되어 결과적으로 보았을때 현재 소니에게 악영향을 준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의 디지털 개혁안은 이데이 노부유키 항목에 자세히 서술되어 있다.[15] 소니는 컴퓨터 시장에 NEC, 후지쯔, 샤프(소위 일본의 컴퓨터 빅3)보다 진출을 늦게 했다.[16] 이데이 CEO는 1996년 바이오 사업을 준비하면서 디지털 콘텐츠를 강화하기 위하여 자체적인 컴퓨터 OS를 가지고 있던 스티브 잡스가 오기 직전 몰락하고 있던 '''애플'''을 인수하려고 하기도 했다. 당시 이사진들의 반응이 "쓰러져가는 회사 인수해서 뭐하려고"라고 였다고. 만약 애플이 소니로 인수되었으면 현재 IT시장의 판도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하지만 소니가 자회사끼리 서로 사이가 좋지않은걸 보면 오히려 손해였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이후 소니가 본격적으로 휘청거리기 시작하자 거꾸로 애플이 소니를 인수할 것이라는 루머도 나오게 된다.[17] 도쿄증시의 소니 주가가 3만엔 선에서 5백엔 대로 폭락한 사태. 소니의 주가는 2003년 4월 25일부터 같은 해 4월 27일까지의 이틀 사이에 모두 27%가 빠지면서 시가총액중 8,950억엔(약 10조원)이 공중으로 사라졌다. 이는 소니에서만 그치지 않고 자국의 다른 전자업체에게까지 도미노로 영향을 주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부터 2017년까지 소니의 주가는 4천엔을 넘지 못하고 있었으며, 7천엔을 돌파한 것은 2019년 12월이 되어서다.[18] 일반 전자기업이라면 변명거리도 없이 까일만한 일이지만 소니는 이때 그때까지 쌓아놓은 브랜드 프리미엄으로 명품 전자기업으로 나가보려고 했던 것이라 다른 기준을 적용해야하는 것은 맞다. 스메그나 밀레같은 명품 빌트인 가전업체에 가성비를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다. 문제는 가격 책정이 해도해도 너무했을 뿐만 아니라 LCD, PDP TV와 아이팟같은 MP3 플레이어가 팔리고 있는 시기에 브라운관 TV나 MD 플레이어같이 한 세대씩 뒤떨어지는 물건들을 들고 나왔다는 게 문제였다. 현재 기준으로 비유하면 아무리 최상급 품질을 갖춘 '명품' 피처폰이 초고가로 발매된다고 해봤자 팔릴 리가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며, 소니가 얼마나 자신들만의 세상에 갇혀서 자만했는지를 알려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남아있다.[19] LG전자가 2015년 '초프리미엄 가전브랜드'를 내걸고 런칭한 LG 시그니처가 소니 퀄리아를 참고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물론 LG전자는 롤러블 OLED TV처럼 비싸지만 그만한 가격이 납득되는 기술력과 AS 서비스의 제품을 출시해서 퀄리아의 전철을 밟지 않고 있다.[20] 시골 마을에서도 라디오, 카세트, TV, 심지어 소니가 생산하지 않았던 다른 회사의 세탁기까지 죄다 소니라고 불릴 정도로 가전제품에 대한 상징은 곧 소니였다.[21] 이중에서 소니의 TV 및 액정 연구소였던 A3 연구소를 폐쇄한 것은 지금까지도 소니의 발목을 잡고있다.[22] 여기를 한때 대한민국의 국민연금공단이 가지고 있었다. 2010년 6월에 5억 7천만 유로에 사서 7년 뒤인 2017년 10월에 11억 유로에 팔았다. 시세차익이 7천억 가량 된다.[23] 오가 사장은 옛 소니의 본사건물인 고텐야마의 오래된 건물이 철거되는 것을 보고 소니의 정신이 깃든 곳이 사라져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한때 소니 샐러리맨들의 상징이었던 시나가와구 고텐야마 지역에는 소니의 60년대 본사건물, 공장건물, 90년대 본사건물과 테크놀로지 센터가 있었으나 현재는 모두 매각되어 소니 역사 홍보관만 남아있다. 소니라는 브랜드의 정체성과 가치를 누구보다도 소중히 여긴 오가 노리오 전 CEO가 2011년 사망하면서 창업자로부터 내려온 소니의 기업 정체성이 종말을 맞이했다고 보는 시각이 일본에 존재한다.[24] 다만 2019년, 애플이 삼성, 소니 등의 타사 TV에 아이튠스와 애플TV 어플리케이션을 탑재하면서 소니의 이 당시 전략이 아주 생뚱맞은 것은 아니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기는 하다. 자사 하드웨어와 독자 생태계에 종속되는 것의 한계를 애플 역시 체감하고 있는 것. 하지만 애플이 2019년 기준으로 욕을 좀 많이 먹고 있기는 해도 여전히 업계 최고의 모바일 AP를 디자인할 수 있는 기술력을 유지하는 것과 달리 소니는 스트링거 체제에서 안그래도 간당간당해져가던 기술력 우위를 완전히 포기했다는 큰 차이가 있다.[25] 이때 인력의 상당수가 삼성으로 이직했다는 말이 있다. 사실이라면 삼성의 기술이 급속하게 발전한데는 소니의 기술이 중요한 역할을 한 셈이다. 실제로 스트링거 체제 말기인 2011년 삼성과 합작한 S-LCD의 지분이 삼성에게 전부 매각되면서 많은 수는 아니지만 핵심 기술을 알고 있는 일부 연구원들이 삼성으로 이직을 했고 이후 삼성 TV의 화질이 급격히 상승했다고 한다. 실제로 지금의 삼성디스플레이는 S-LCD를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삼성에 다니는 사람들이 일본인들이 삼성 쪽으로 많이 이직을 했다는 말을 하는 것을 보면 삼성 이직 루머는 사실 같다. 그리고 소니 모바일 쪽 출신 직원들이 삼성에 이직을 해서 갤럭시 S6를 제작했다는 루머가 있다.[26] 그래도 이 당시만 해도 중국기업들이 글로벌 시장에 막 진입하던 시점이라 한국, 일본 전자회사들이 전 세계 TV점유율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었다.[27] 물론 큰 이유가 따로 있긴 하다. 여러 옵션과 그로 인해 좋은 인터페이스.[28] LG전자 32.2%, 삼성전자 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