앨리샤 키스
1. 개요
2. 상세
3. 출생과 어린 시절
4. 커리어
4.1. 데뷔 전
4.2. 1집 Songs In A Minor (2001)
4.3. 2집 The Diary of Alicia Keys (2003)
4.6. 4집 The Element of Freedom (2009)
4.7. 5집 Girl On Fire (2012)
5. 디스코그래피
6. 수상 목록
7. 음악성
8. 가족 관계
9. 페미니스트
10. 기타
11. 관련 문서
She's living in a world, and it's on fire
그녀가 살고 있는 세상은 불이 붙어있어.
Feeling the catastrophe, but she knows she can fly away
대재앙을 느끼면서, 하지만 그녀는 날아갈 수 있다는 걸 알아.
Girl On Fire (feat. Nicki Minaj)
[clearfix]어떤 사람들은 영원한 젊음을 주는 샘물을 찾아 헤매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수십 송이 장미꽃을 바라기도 해
은쟁반에 온 세상을 담아 내게 준다 해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나와 마음을 나누고 나를 진정으로 아끼는 단 한 사람이 없다면
If I Ain't Got You
1. 개요
미국의 가수이자 싱어송라이터. 미국 여가수 중 최정상급의 가창력을 보유한 가수이며 2000년대 전세계에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중 한 명이다.
부드러운 음색과 뛰어난 가창력으로 최정상급의 아티스트 자리에 올랐으며 '''최고의 권위있는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를 통산 15개나 수상'''하며 대중들과 평론가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대중음악 평론지인 VH1에서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뮤지션 100인으로도 선정했다.[3] 또한 타임지에서도 2005년과 2017년에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 중에 하나로 앨리샤 키스를 리스트에 올렸다.
2. 상세
'''최고의 권위있는 시상식인 그래미 어워즈를 통산 15개나 수상'''하며 대중들과 평론가들의 사랑을 동시에 받았다. 대중음악 평론지인 VH1에서 역사상 가장 존경받는 뮤지션 100인으로도 선정했다.[4] 또한 타임지에서도 2005년과 2017년에 전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인물 100인 중에 하나로 앨리샤를 리스트에 올렸다. '''2000년대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아티스트 5명 중에 하나이기도 하다.'''[5] 한국의 팬들 사이에서는 '열쇠'란 애칭을 갖고 있다.[6] 또한 국내 네티즌들 사이에 '흑인치곤 예쁜 여자'로도 유명하다(...)..[7][8] 주요 장르는 피아노를 기반으로 한[9] 컨템퍼러리 R&B, 네오 소울이며 힙합, 재즈, 팝과 락 등을 크로스오버한 음악을 만들어왔다.[10] 미국 메인스트림 여가수중에서는 드물게 스스로 음악을 만드는 싱어송라이터이다.[11] 동세대에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비욘세 등과 함께 가창력으로 유명한 디바이며, 전세계적으로 큰 인기를 얻은 몇 안 되는 네오 소울 기반 컨템퍼러리 R&B 가수이기도 하다.[12] 10여 년에 걸쳐서 그녀의 백업보컬로 활동했던 저메인 폴은 미국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인 <더 보이스>에서 알 켈리의 <I Believe I Can Fly>를 열창해 우승을 차지했다.[13] 최근에는 앨리샤도 <더 보이스> 시즌 11의 코치로 합류했다. 컨템포러리 소울 아티스트인 브루노 마스, 아델, 에밀리 산데 등이 그녀의 음악을 듣고 자랐다고 밝혔다. 최근에는 '''2019년과 2020년 연속으로 세계 최고의 권위인 그래미 어워즈 단독 호스트를 맡았다.''' [14]
3. 출생과 어린 시절
이탈리아계 미국인와 아일랜드계 미국인 또는 스코틀랜드 혈통의 엄마, 중국계 미국인과 아프리카계 미국인 혈통의 아빠 사이에서 태어났다. 앨리샤는 1살 때 아빠와 헤어지고 싱글맘이 된 엄마의 품에서 자랐는데, 그녀는 어려운 가정 환경 속에서도 앨리샤에게 피아노 레슨은 꼬박꼬박 시켜줬다고 한다.
무법천지인 뉴욕 슬럼가의 헬스키친에서 자란 앨리샤는 어린 시절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항상 총을 휴대하고 다녔다. IQ가 154나 되고 공부도 매우 잘한 그녀는 미국의 아이비리그 중 하나인 컬럼비아 대학교에 이미 16살 때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지만 '''학교에서의 교육이 음악가로서 창조성을 해친다고 판단해 중퇴하였다고 한다.'''
4. 커리어
4.1. 데뷔 전
그러다 앨리샤 키스는 1996년에 컬럼비아 레코드과 계약을 맺고 맨 인 블랙 OST에 참여하며 메이저에 데뷔하였다. 그러나 선배디바들과 같이 보컬을 강조한 디바로 키우려 했던 레이블과 달리 그녀는 스스로 작곡을 하는 싱어송라이터가 되고 싶었다. 레이블 담당자가 그녀가 만든 Fallin'을 빼앗아 다른 신인 가수에게 주려 하자 앨리샤 키스는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리고 클라이브 데이비스[15] 가 설립한 J 레코드의 첫 번째 아티스트로 계약했다.
4.2. 1집 Songs In A Minor (2001)
이어서 2001년에 첫 앨범 Songs in A Minor를 발표하며 화려하게 데뷔하였다. 본래 앨범의 제목은 'Soul in A Minor'이었지만, 메인스트림 라디오에서 그녀의 음악을 틀어주지 않을 것을 의식해 현재와 같은 타이틀로 변경됐다. 앨범이 발매되기 전 동료가수였던 인디아 아리[16][17] 등과 함께 오프라윈프리쇼에 출연했는데, 여기에서 부른 Fallin'이 미국 시청자들에 강한 인상을 남긴다. 특히 신인 가수임에도 스스로 작사, 작곡, 프로듀싱까지 해내는 그녀의 천재성은 언론과 대중들의 큰 호응을 이끌어낸다. 오프라쇼에 출연한 이후 1집 앨범의 선주문이 3배 이상 증가했으며, 발매와 동시에 235,000장의 판매고로 1위로 데뷔했다. 그리고 입소문은 더욱 퍼지며 둘 째주에는 40만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린다. 이후로도 그녀의 성공은 탄탄대로였다. 그래미 어워즈에서도 올해의 노래와 신인을 비롯해서 5개 부문을 거머쥐며 전세계적인 스타로 발돋움한다. Songs in a Minor은 네오 소울을 기반으로 힙합과 재즈, 가스펠 등을 결합한 앨범으로 애정 관계의 복잡함을 가사로 담았다. 앨범 대부분의 곡을 스스로 썼으며 프로듀싱했다. 현재까지 미국에서 740만장[18] , 전세계적으로 약 1,300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기록했으며 데뷔곡 Fallin'이 빌보드 싱글 차트 정상에 올랐다. 흑인 소울의 감성과 고전적인 클래식, 그리고 재즈를 두루 선보인 수작. 데뷔 앨범에서 선보인 레게 머리와 카우보이 모자, 그리고 특유의 보이쉬한 스타일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2000년대 초 국내에서도 흑인음악이 크게 각광을 받을 떄 유수한 알엔비 가수들이 앨리샤 키스의 음악과 패션에 영감을 받았다.[19]
4.3. 2집 The Diary of Alicia Keys (2003)
키스는 1집의 대성공으로 2집 앨범을 작업할 때 큰 압박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소포모어 징크스를 가볍게 날려 버리며 2집 앨범도 대히트를 한다. 그녀가 일기를 쓰듯 매우 자전적인 내용을 담았으며 기존의 알엔비 소울의 기반을 유지하되, 60~70년대의 복고적인 감성을 더한 앨범이다. 2003년 12월에 발매된 2집 앨범인 The Diary of Alicia Keys은 엄청난 반응을 일으키며 첫주에 미국에서 618,000장을 팔아치웠다. 미국에서 5플래티넘[20] 전 세계에서 900만장에 가까운 판매고를 올렸다. 앨범 뿐만 아니라 싱글도 성공적이었는데, You Don't Know My Name(3위)[21] , If I Ain't Got You(4위)[22] , Diary(8위), Karma(20위)가 모두 빌보드 차트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특히 If I Ain't Got You는 그녀를 대표하는 히트곡이자 2000년대를 상징하는 알엔비 발라드가 됐다. 수 많은 유명가수들이 이 곡을 커버했으며, 미국 현지에서도 데뷔곡 Fallin'과 함께 오디션 프로그램에 단골로 등장한다.[23] 국내에서도 가장 유명한 팝송중에 하나일 것이다.[24] 평단의 평가도 전작보다 더 찬양일색이었으며, 그래미 어워즈에서는 이번에도 4개 부문을 수상했으며 빌보드 뮤직어워즈 7개부문을 석권했다. 키스의 대중적 인기가 정점에 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 시기 최고의 남자가수였던 어셔와 염문을 뿌리며 큰 주목을 받았다. 함께 노래를 부른 My Boo는 엄청난 반향을 일으키며 빌보드 싱글차트 정상에 올랐다. 이듬해에 키스는 처음으로 한국에서 내한콘서트를 열었다. 당시에는 최전성기의 팝스타가 내한해 콘서트를 여는 경우가 드물었다 보니[25]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거미(가수)[26] 가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
4.4. Live 앨범 Unplugged (2005)
2005년 자신의 첫 라이브 앨범인 Unplugged를 발표했다. 미국의 대표적인 음악 채널인 mtv는 유명 가수와 함께 라이브 앨범을 줄곧 발매해왔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음악시장의 판매고가 저조해 더이상 발매를 하지 않다가 10년 만에 앨리샤 키스와 손을 잡았다. 하늘을 찌르던 그녀의 인기에 힘입어 정규앨범이 아님에도 빌보드 차트 1위로 데뷔하는 기염을 토했다.[27] 미국에서 100만장의 판매고를 올렸고 전세계에선 200만장이 판매되었다. 기존의 히트곡들과 몇 곡의 신곡을 더한 앨범으로 그래미어워즈에서 4개 부문 후보에 올랐지만 수상에는 실패했다. 당시 If I ain't got you로 국내에서도 인지도가 많이 오른 상황이다 보니, 케이블 채널인 M.net과 mtv 등에서 라이브 앨범의 DVD 영상물을 자주 틀어주곤 했다.[28]
4.5. 3집 As I Am (2007)
Unplugged 이후 2년의 공백[29] 을 가진 그녀는 2007년 말 3집 앨범을 발표한다. As I Am은 그녀의 디스코그래피에서 가장 통일성 있고 대중적인 음반이라 할 수 있다. 이 때부터 그녀의 음악을 팝적인 성향이 짙어지기 시작했고 U2등의 영감을 받아 록을 접목시키기도 했다.[30]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초 대박을 기록했다. 특히 히트 싱글인 No one은 빌보드 5주 1위를 기록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공전의 히트를 쳤다.[31] '''No one은 알리샤의 노래 중 상업적으로 가장 성공한 히트곡이며 2000년대 결산 6위, 2013년 빌보드 55주년 기념 최고의 100곡에서 역사상 48번째로 성공한 노래)[32] 로 선정되기도 하며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다.''' As I Am은 발매 첫주에 75만 장의 판매고를 올리며[33] 전작의 초동을 뛰어넘었다. 미국에서 4플래티넘[34] , 빌보드 연말결산 1위를 차지했고 전 세계적으로 65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당시에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그녀는 이듬해 그래미 어워즈에서 오프닝공연을 비롯, 3곡을 열창해 언론으로부터 많은 주목을 받았으며 에이미와인하우스, 리오나 루이스 등을 제치고 007 주제가를 부르기도 했다.[35] 본 앨범으로 그래미어워즈도 3개를 추가했다.[36] 키스는 이듬해, 한국에서 2번째 콘서트를 열었다. 태양(빅뱅)이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
4.6. 4집 The Element of Freedom (2009)
전작에서 2년의 공백을 가진 앨리샤는 2009년 12월 마지막 주 4집 The Element of Freedom을 발표한다. 기존의 3집과 비슷한 음악을 이어갔지만 이번에는 얼터네이티브 록음악을 접목했다. '모든 장벽과 한계를 제거한 자유로움'을 컨셉으로 한 앨범으로 특별한 보정없이 그녀의 보컬을 있는 그대로 녹음했다.[37] 그녀의 인기가 정점에서 다소 내려온 시기이다. 첫 싱글인 Doesn't Mean Anything이 충공깽의 뮤직비디오와 함께 알리샤 키스 싱글들 중 가장 망하는 바람에 싱글들이 전체적으로 묻히는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래도 앨범은 잘 팔렸다. 불황임에도 미국에서 첫주에 42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으며 2플레티넘[38] , 영국에선 110만 장이 팔렸고 전 세계적으로 400만 장이 넘는 판매고를 올렸다.[39] 앨리샤의 연속 1위 기록은 이 앨범에서 깨졌다. 영국에서는 앨범이 발매되기 전에 엑스펙터에 출연해 히트곡 메들리를 열창했는데 대중으로 부터 굉장히 큰 주목을 이끌었다. 이에 힘입어 1집 이후 처음으로 영국에서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며 초대박을 터뜨렸다.[40] 이 시기에 제이지에 피쳐링을 해준 'Empire State of Mind'도 전세계적으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며 그녀의 존재감을 확인시켜줬다.[41] 그래미 어워즈에서 2개 부문을 수상했다.[42]
4.7. 5집 Girl On Fire (2012)
2012년 5번째 정규앨범 Girl On Fire를 발표하였다. 일렉트로 소울과 힙합에서 락, 레게 등 다양한 시도를 했으며 앨범의 프로듀싱은 미니멀을 추구했다. 키스는 애정관계, 그리고 신에 대해 가사를 썼다. 몇몇 곡은 그녀의 결혼, 그리고 엄마로서의 삶과 같은 개인적인 내용을 담았다. 첫 싱글인 동명 타이틀의 Girl On Fire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인기를 누렸으며[43] 앨범도 첫 주에 16만 장의 판매고로 1위로 데뷔하였다. 현재까지 미국에선 플래티넘[44] , 전 세계에서 180만 장의 판매고를 올렸다. 오랜 싱어송라이터 활동으로 전작에서 매너리즘을 느끼기 시작한 그녀는 본작에선 자신의 영향력을 줄이고 영국의 흑인 뮤지션인 에밀리산데와 싱어송라이터 브루노마스등 외부의 뮤지션들과 공동작업을 늘리기 시작했다. 타이틀곡을 비롯한 상업적인 곡도 실렸지만 앨범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다소 실험적이고 마이너하다는 팬들의 의견이 많았다. 이에 따라 자신의 커리어에서 가장 저조한 차트 성적을 냈지만 망해가는 음악시장에서는 여전히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다. 그래미어워즈에서 '알엔비 앨범' 부문을 수상하는 등 좋은 평가를 받은 앨범이다. 키스는 앨범 홍보를 위해 그래미어워즈, VMA, NBA 올스타전, 아메리칸아이돌, 엑스펙터 등에 출연했으며 수퍼볼에서 미국 국가를 부르기도 했다. 한국에선 앨범수록곡 Tears always win이 음원차트를 중심으로 소소하게 인기가 있었다. 가온차트의 팝부문에서 2주 연속 1위를 지켰다. 카페나 레스토랑 등에서 자주 틀어준 편이니 들어보면 익숙할 수도 있다.[45]
4.8. 6집 Here (2016)
2015년에는 자신이 운영하는 자선 단체인 Keep A Child에 100만달러를 기부하고, 전 세계의 고통받는 어린이들, 여성들, 동성애자 등의 인권을 대변하기 위해 We Are Here를 발표했다. 2016년에 11월 8일 자정, 6집 앨범 Here을 발표했다. 리드싱글로 In Common을 공개했다. 하향세 와중에 4년이란 긴 공백 탓에 주목도는 많이 떨어진 듯하다. 퀄리티가 상당했으나 망했다.[46] 아무튼 기존의 잔잔한 발라드 스타일에서 벗어나 전자음을 더한 트로피컬 사운드가 매우 신선하다는 호평이 많았다.[47] 여성의 인권 증진을 위해 더이상 메이크업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해 팬들을 깜짝 놀래키기도 했다. (..) [48] 인기가 없었고 앨범의 분위기와 맞지 않아서인지 In Common은 디럭스버전의 보너스트랙으로만 포함됐다. 큰 성공은 거두지 못했지만 킬링트랙을 앨범에서 제외한 것은 다소 의아하다는 팬들의 의견이 많았다. 통일성에 맞지 않아서 제외된 듯 하다. 메이크업을 지워버린 극도의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컨셉을 추구하며 프로모션이 평소보다는 제한적으로 이뤄졌다.[49] 그래도 대표적인 R&B가수답게 그래미 어워드, The Voice, 엘렌 쇼, 챔피언스 리그 및 BET 어워드 등 굵직굵직한 쇼에는 대부분 초대됐다. 앨범을 위해 10일 만에 30곡을 썼다는 그녀는, 본작에 가난한 흑인 커뮤니티의 현실비판, 자전적인 재혼가정 등 다양한 사회적 메세지를 가사에 담았다. 화려하게 치장한 상업성보단 음악 자체에 집중해서인지 평론가 평점은 전체적으로 우수한 편이다.[50] 발매 첫주에 5만 장(실판 4만 2천장)으로 빌보드 앨범차트 2위로 데뷔했다.
결론적으로는 데뷔 후 그녀의 커리어에서 처음으로 망한 음반이라 할만하다. 스트리밍이나 유튜브 순위 등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는 것. 하는 음악도 올드스쿨 소울이 기반인 데다가 분명히 엄청난 미인이 맞는데도 이상하게 나이들어보이고 촌스러워 보이는 스타일링이나 뮤직 비디오 컨셉에 4년간의 공백기까지 겹쳐서 고루한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 그러나 뮤지션으로서 그녀의 브랜드와 음악이 완전히 쇠퇴한 것은 아니다. 앞에 서술한 바와 같이 6집은 음악적으로도 굉장히 우수한 평가를 받았다. 또한 저명한 언론지인 타임즈에서는 2005년에 이어서 2017년에 다시 한번 그녀를 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 100인 중에 하나로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고, # 최고 권위의 그래미어워즈에도 계속해서 공연자로 초대받고 있다. 이미 12년이나 넘게 인기를 누린 뒤, 상업적으로 점점 하향세를 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51] 미국에서도 앨리샤 키스가 현재 핫하다고 생각은 안 하지만, 음악성을 갖춘 좋은 싱어송라이터로 평가하고 있다.[52]
4.9. 7집 ALICIA (2020)
2019년과 2020년 연속으로 그래미상 단독 호스트로 선정됐다. 진행에 상당한 호평을 얻었다.
리드 싱글로 공개되었던 알앤비 발라드 "Show me love"가 빌보드 핫 100 90위를 기록했다. 알앤비 남성보컬 미겔과 듀엣을 한 곡이다. 이어서 그래미에서 공연을 선보인 "Underdog" 역시 잘빠진 곡이 빛을 발하며 빌보드 핫 100 69위를 기록하는 등 차트 하위권이지만 그녀의 최근작치고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2012년 "Girl on Fire" 11위 이후 가장 높은 순위를 기록한 것이다. "Underdog"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헌정곡으로 모두가 쉽게 따라 부르도록 캐치하고 간단한 멜로디로 구성되었다. 두 싱글 모두 골드(50만장) 인증을 획득했다. 앨범 발매 직전 칼리드와 부른 미디엄 템포 알앤비곡 So done과 팝사운드 느낌의 Love looks better가 공개되었다. 9월 18일 일곱 번째 정규 앨범 ALICIA가 발매되었다.
첫주 초동은 스트리밍 합산 6만 3천장으로(순판 5만 1천장) 빌보드 200 4위를 기록 하였다. 전작 Here과 비교해봐도 팬덤은 크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유지된듯하다. 하지만 그래미 같은 굵직한 시상식에서 호스트로 활약한 것은 아쉽게도 화제성을 키우는데 도움이 되었다고 보긴 힘들듯. Here에선 핫 100에 진입시킨곡이 한곡도 없었지만 이번 앨범에선 선공개한 싱글(Show me love(90위) Underdog(69위)들을 하위권이지만 그래도 핫 100에 짧게나마 진입하면서 약하게나마 대중들의 호응을 이끌어냈다는 점에서 장족의 발전이라고 할수있다. 음악성면에서는 굉장히 크게 호평받으며 메타크리틱 점수 77점을 부여받았다. 이는 전작 Here(76점)보다 높은 점수이며 1집 Song in a minor(78점)에 이어 앨리샤 키스의 커리어에서도 가장 높은 점수의 앨범이다.
5. 디스코그래피
5.1. 앨범
5.2. 싱글
- 앨범형 아티스트에 가까웠던 앨리샤는 생각보다 1위곡이 많지 않다. 하지만 스트리밍, 아이튠스 등 변수가 없이 라디오 방송횟수만으로 순위를 매기던 00년대 차트에선 상위권에 들기 어려운 경향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빌보드 싱글 디케이드 차트(00~09)에서 앨리샤는 3번째로 가장 큰 성공을 거둔 아티스트로 선정됐다.
[3] VH1에선 10년마다 300인의 아티스트와 음악 관계자의 설문을 통해 가장 존경받는 뮤지션 100인을 선정한다. 앨리샤 키스는 비욘세와 함께 2000년대에 활동한 여성 아티스트 중에서는 유일하게 리스트에 들었다.[4] VH1에선 10년마다 300인의 아티스트와 음악관계자의 설문을 통해 가장 존경받는 뮤지션 100인을 선정한다. 앨리샤 키스는 비욘세와 함께 2000년대에 활동한 여성 아티스트 중에선 유일하게 리스트에 들었다.[5] 빌보드 지에 의해 에미넴, 어셔, 넬리, 비욘세와 함께 2000년대 미국에서 제일 성공한 아티스트 중 하나로 선정됐다.[6] 'Key'는 열쇠라는 뜻도 있지만 피아노 건반에서 따온 이름이다. [7] 소녀시대의 태연이 라디오에서 '흑인치곤 예쁜 여자'라고 앨리샤 키스를 소개하는 바람에 인종차별적 발언이라고 비난을 받았었다. 여전히 앨리샤 키스의 검색어에는 '흑인치곤 예쁜 여자'가 함께 뜬다.[8] 나무위키에서도 이러한 표현에 대해 "~로도 유명하다(...).." "여전히 검색어에는 이 표현이 함께 뜬다" 등등 경각심 없이 반 장난성으로 서술하는 것으로 미루어 볼 때 한국에서는 이러한 발언이 별 거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이러한 표현은 아주 심각한 인종차별적인 발언이다. 일단 아름다움에 인종은 없으며,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인종 이름 붙이면서 말하는 것 자체가 심각한 인종차별이다. 예를 들어, 미국 백인 우월 주의자가 당신에게 "아시아인 치곤 예쁘네/잘생겼네. 난 아시아인은 다 칭챙총 고양이눈인 줄 알았는데 니는 안 그러네" 등의 발언을 하면 기분이 어떻겠는가? 그리고 미국에서 인종차별은 제일 민감한 문제라, 길거리에서 어떤 인종에 대해서든 인종차별을 했다간 웬만한 사람들은 당신의 행동을 지적하고 좋지 않게 볼 것이다. 애초에 인종차별 때문에 수많은 고통과 아픔을 겪고 수많은 사회 운동을 한 끝에 인종차별이 법적으로 폐지된 곳이 바로 미국이다.[9] 그녀의 음악은 항상 피아노가 중심이다. 라이브 공연을 할 때도 절대 빠지지 않는다.[10] 4집 앨범부터는 전자음을 결합한 실험적인 트랙도 눈에 띈다.[11] 미국 팝계에서 혼자서 음악을 만들 줄 아는 여가수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 전문 작곡자들의 도움을 받는다. 앨리샤는 대표곡 <If I ain't got you> 과 <Fallin'>등을 혼자 쓰고 프로듀싱했다.[12] 네오 소울이란 장르 자체가 미국 밖에서 인기가 높지 않다. 비슷한 유형의 탑 가수로 80년대 이후 전세계 7천만장의 앨범 판매고를 올린 여자보컬이 이끄는 영국의 소울 음악, Smooth jazz, Sophisti-pop 밴드, 샤데이(Sade)를 들 수 있다.[13] 특히 앨리샤의 2집 앨범의 히트곡 <Diary>가 유명하다. 이 곡으로 함께 그래미어워즈에 노미네이트되기도 했다.[14] 그 밖에 그해 히트곡 메들리와 신곡을 불렀고 주요 대상도 호명했다. 당연히 여전히 그녀가 음악계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상당히 높음을 의미한다.[15] 팝음악계에서 가장 유명한 CEO이다. 휘트니 휴스턴 등을 직접 키운 아리스타의 전사장으로 유명하다. 미국 인기 오디션 프로그램인 아메리칸 아이돌 제작에도 참여하였다. 그가 친딸과 같이 유독 예뻐한 아티스트가 딱 2명 있는데, 하나는 휘트니 휴스턴이고 다른 하나는 앨리샤 키스이다. 반면 켈리 클락슨과는 음악적 견해의 차이로 갈등이 상당히 깊었다.[16] 데뷔 초 앨리샤 키스와 라이벌 구도를 이뤘던 흑인 여성 싱어송라이터이다. 특히 2002년 그래미어워즈에서 7개 부문이나 후보에 오르며 언론에 크게 화제가 되었지만, 단 하나의 수상도 하지 못하며(..) 앨리샤에 판정패를 당한다. 이후에 인디아 아리 역시 4개의 그래미를 수상하긴 했다.[17] 두 사람 다 좋은 평가를 받는 훌륭한 음악가이지만, 대중적인 인기와 스타성에 있어서는 앨리샤의 압승이었다. 두 사람 다 네오소울, 여성, 흑인, 싱어송라이터에 똑같은 2001년에 데뷔했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단, 인디아가 6살 연상이다. 앨리샤는 아주 빠르게 데뷔했고 인디아는 조금 늦게 데뷔한 것.), 이후 빌보드 핫 100에서 top10 싱글을 10곡이나 만들어낸 앨리샤와는 달리 인디아의 싱글차트 최고 순위는 47위다. 즉 앨리샤에게는 확실히 대중적으로 사랑받는 곡을 뽑아내는 재능이 있었던 것이다. 또한 보컬 역시 부드러운 중저음 그루브를 중시하는 인디아에 비해 진성 벨팅으로 고음을 지르는 앨리샤가 확실히 어필하기에 좋았다. 앨리샤가 엄청난 미인인 것도 인기에 한몫 했고.[18] 사운드 스캔에서 640만장이 집계되었으나 소니BMG사운드클럽에서 따로 발매돼 100만장이 더 팔렸다. 음반시장이 컸던 90년대에서 2000년대 초까지는 이런식으로 앨범이 따로 발매되었다.[19] 특히, 국내의 정상급 여성 알엔비 가수인 거미와 임정희의 초창기 음악과 컨셉은 앨리샤 키스의 영향을 받았다는 평가도 많았다. 그밖에 휘성과 세븐 등은 직접 방송에서 앨리샤의 음반을 홍보해주는 등 그녀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과시하기도 했다.[20] 500만장 인증, 실판 480만장+[21] 8주간 3위를 차지했다.[22] 1위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엄청난 롱런으로 연간 순위에서는 3위를 차지했다.[23] 하지만 원곡이 워낙 유명한데다 노래의 맛을 살리기 힘들어서 곧 잘 망하는 곡이다.[24] 워낙 오랫동안 사랑받은 곡이다보니 앨리샤를 몰라도 이 곡은 알 것이다.[25] 90년대까지만 해도 인기가 떨어지면 한국을 찾는 경우가 많았다.[26] 당시 한국의 앨리샤 키스..[27] 첫주에 20만장이나 팔렸다.[28] 앨리샤는 흑인음악팬들을 제외하면 한국에서 크게 유명하다 할 순 없지만, 이 시기는 어느 정도 인기가 있었다. 이 때는 팬카페 회원수도 1만 5천명이 넘었고 활동도 활발했다.[29] 정규 앨범으로는 무려 4년의 공백이다...[30] The thing about love나 Go ahead 등이 대표적이다.[31] 2위도 7번이나 했다. 앨리샤 키스는 1위도 많이 했지만 유독 2위도 많이 했다. Fallin'도 1위를 6번했지만 2위도 5번이나 했다. 본 3집 앨범 역시 4주간 1위를 했지만 조쉬그로반의 캐롤음반과 경쟁하며 2위를 7번이나 했다.[32] 휘트니 휴스턴의 I'll Always Love You가 49위인 걸 감안하면 차트에서 얼마나 성공했는지 알 수 있다.[33] 흑인 여성 가수 역사상 최다 판매고이다.[34] 400만장 인증, 실판 390만장+[35] 이에 심기가 불편했는지, 에이미와인하우스는 키스의 음악이 매우 지루하다며 디스하기도 했다.[36] 본작의 수록곡인 No One과 Superwoman으로 2년연속 알엔비 여성 보컬을 수상한 것이 특이하다.[37] 보통 팝가수들은 마디마다 끊어서 앨범을 녹음한다. 가장 잘된 것을 이어 붙이는 식이다.[38] 200만장 인증, 실판 160만장+[39] 하지만 대진운이 나빠서 무려 40만 장이 넘는 판매고로도 2위에 그쳤다. 당시에 오디션 신드롬을 일으켰던 수잔보일의 데뷔 음반이 1위를 차지했다.[40] 영국에서 1집은 120만 장, 2집은 60만 장, 3집은 40만 장, 4집은 110만 장, 5집은 25만장의 판매고를 기록했다. 4집은 음반시장이 많이 축소된 시기에 발매되었기 때문에 1집보다 더욱 큰 상업적인 성과를 얻었다고 할 수 있다. [41] 이 곡에서 가장 유명한 그녀의 코러스 파트는 키스가 직접 작곡했다.[42] 그녀의 커리어 중 유일하게 알엔비 이외의 장르에서 그래미어워즈를 수상한 곡이기도 하다. 대표적인 알엔비 아티스트인 그녀는 올해의 노래, 신인상을 받은 Fallin'과 올해의 랩과 피처링 부문을 수상한 Empire State of Mind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알엔비 부문에서 수상하였다. 하지만 그녀가 주로 활동한 2000년대 초중반에는 빌보드 차트 30위 안에 20곡이 흑인음악이었을 정도로 매우 경쟁이 치열하였다. [43] 빌보드 차트 11위에 그쳤지만 굉장히 꾸준히 사랑을 받으며 미국에서 500만장 인증을 받았다. 당시 높은 디지털 싱글 판매고와 라디오 방송횟수로 차트 상위안에 드는 것이 당연한 인기였지만 빌보드 차트가 갑작스레 룰을 변경해 유튜브 조회수를 적극 반영하며 결국 톱텐에도 들지 못하고 말았다. 그 밖에 유럽 전역과 남미, 아시아 일부에서도 히트했다. 브라질에서는 인기 드라마 주제가로 삽입돼 티비에서 지겨울 정도로 나왔다고 한다.[44] 100만장 인증, 실판 80만 장+[45] If I ain't got you처럼 메가히트한 것은 아니라 모를 수도 있다.[46] 사실, 업계의 판도가 바뀐 4집 앨범 이후 싱글이 망하는 게 팬들에게 익숙하긴 하다.[47] 전작의 When it's all over 등 앨범 수록곡에서는 꾸준히 시도한 스타일인 듯하다.[48] 지미 키멜 쇼에 출연했을 때, 지미 키멜이 "당신은 화장을 안 해도 그렇게 이쁘니깐 지울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사실이긴 하다.[49] 앨리샤는 평소 앨범이 발매되면 극악의 프로모션 일정을 소화해왔다. 하지만 커리어가 쌓이며 예전보다는 활동이 느슨해진 감이 있다.[50] 메타크리틱 76점으로 그래미를 수상한 전작보다도 점수가 훌륭한 편이다. 퀄리티는 좋지만 사실상 대중의 관심은 받지 못했다고 해두자.[51] 이 음반을 냈을때 이미 1집 이후 16년차였다.[52] 우리 나라에서 자우림이나 이소라 같은 가수를 현재 멜론차트에서 못 뜬다고 퇴물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은 드물것이다. 애초에 앨리샤 키스는 이런 가수들처럼 상업적으로도 대성공했지만 기본적으론 음악성에 기반을 둔 싱어송라이터이다.[53] 스트리밍 합산[54] 예외로 스페인 가수 Alejandro Sanz에 피쳐링한 Looking for Paradise는 Latin 차트 성적 기록.[55] 6주.[56] 01년.[57] 02년, 디케이드 29위.[58] 어셔와 듀엣.[59] 6주.[60] 04년.[61] 05년, 디케이드 36위.[62] 04년.[63] 05년.[64] 5주.[65] 07년.[66] 08년, 디케이드 6위.[67] 10주.[68] 07년.[69] 08년.[70] 제이지의 피쳐링.[71] 5주.[72] 09년.[73] 10년.[74] 09년.[75] 10년.[76] Eve에 피쳐링.[77] 9주.[78] 디케이드 51위.[79] 6주.[80] 04년.[81] 05년.[82] 12년.[83] 13년.[84] 7주.[85] 12주.[86] 에이즈 자선모금 싱글[87] 드레이크의 싱글에 피쳐링.[88] Cham의 싱글에 피쳐링.[89] 50 Cent[90] Dr. Dre가 새롭게 편곡, 앨리샤가 피쳐링.[91] 007 퀀텀오브솔러스 주제가, 잭화이트와 듀엣.[92] 비욘세가 피쳐링 참여.[93] 존 메이어가 피쳐링.[94] Alejandro Sanz의 싱글에 피쳐링.[95] Latin 차트.[96] 맥스웰이 듀옛 참여.[97] 켄드릭 라마가 피쳐링한 어메이징 스파이더맨 2의 사운드트랙.[98] Mateo의 노래에 피쳐링.
6. 수상 목록
7. 음악성
7.1. 보컬
비욘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와 함께 지존급 가창력으로 평가받는다. 흑인답게 그루브가 뛰어나며 음색도 매우 좋다. 다만 무리한 목 사용으로 라이브에서 삑사리가 참 자주 난다. 이는 알리샤 키스 음악의 주된 테마인 '소울' 창법 때문이기도 한데, 소울 벨팅 창법 자체가 쌩목으로 긁어대는 창법인 데다가 데뷔초부터 난이도 높은 노래를 오직 라이브로만 공연해왔기 때문.
스스로 곡을 만드는 작곡자이다 보니 신곡들의 경우는 그녀의 현재 목 상태를 감안해 노래를 만드는 듯 하다. [104]
여전히 대부분의 공연을 라이브로만 소화하고 있다. 대부분의 디바들은 생각보다 립싱크 공연이 많은데 앨리샤 키스는 선배 가수인 휘트니 휴스턴등과 함께 라이브만 고집하는 가수로 유명하다.
7.2. 작곡
스스로 노래를 만드는 싱어송라이터이다. 그 유명한 If I Ain't Got You와 Fallin'을 '혼자' 만들었다! [105] 특히 Fallin'의 경우 지난 20년간 여성 뮤지션이 단독으로 작사 작곡을 해서 빌보드 차트 1위에 오른 유일한 곡이다. 네오 소울의 대표적인 아티스트로, 고전적인 소울 음악을 현대적인 감성으로 재해석하는 작업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106] 고전적인 소울에 현대적인 감성의 R&B와 힙합 등을 더하는 것. 3집과 4집 앨범은 팝과 얼터네이티브 록 등의 크로스오버를 시도했으며 최근에는 전자음을 더하거나 사회적인 메세지를 가사에 담는 등 음악가로서 다양한 시도를 하는 듯하다. 음악계에서는 싱어송라이터를 자처하는 스타들이 많지만 실제로는 아주 적은 참여로 이름만 올리는 아티스트들이 매우 많다. 앨리샤키스처럼 주도적으로 음악을 직접 쓰고 혼자서 작업할 수 있는 여성 아티스트는 생각보다 매우 적다.
8. 가족 관계
9. 페미니스트
페미니스트이다. 2016년 '노 메이크업' 선언을 했다. 이른바 탈코르셋. 문서 프로필 사진에서 볼 수 있듯 화장을 잘 하지 않으며, 심지어 더 보이스 등 공식 석상에 참여할 때도 민낯이다. 지미 키멜 쇼에 출연했을 때, 진행자 지미 키멜이 "당신은 화장을 안 해도 그렇게 이쁘니깐 지울 수 있는 거 아니냐"며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머리도 더이상 붙임머리를 하지 않고[108] 대충 묶거나 터번을 쓴다.'''I do what the fuck I want.'''
존나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거야.
단 '노 메이크업' 선언과 무관하게 실제로는 메이크업을 하고 공식석상에 나타나기도 한다. 대표적인 것이 2019년 그래미 시상식 호스트를 맡았던 때로 '''알리샤 키스의 메이크업 담당자가 직접 증언한 사실이다.'''# 색조화장은 하지 않지만 피부결과 눈썹을 정돈하고 가슴에 글리터와 셰이딩을 빡세게 넣었다. [109] 메이크업을 하면서도 메이크업을 안한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애쓴다며 '노메이크업 메이크업인가?'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다.
위의 애덤 리바인과의 설전 역시 비슷한 맥락에서 나온 거였는데, 알리샤 키스가 립밤을 바르는 걸 보고 애덤 리바인이 립스틱을 바르는 줄 알고 건넨 농담에 발끈해서 한 말이다. 그런데 사실 알리샤가 쓰던 립밤은 색조가 들어가서 발색이 되는 모델이었다. 즉 사실상 립스틱과 아주 큰 차이는 없는 모델이었고 또 욕을 좀 먹었다.
10. 기타
- 지난 2010년 유명작곡자이자 프로듀서인 스위즈 비츠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스위즈가 전부인인 마숀다와 이혼을 하지 않은 상태에서 그녀와 만남을 가져서 논란도 있었다. 최근에는 전부인도 자녀들을 동반한 채 피서지 휴가에 동참한 장면이 파파라찌에 찍히는 등 잘 지내는 것으로 보인다. (참 쿨한 서양식 마인드...)[110] 여담으로 앨리샤 키스는 사생활에 대해 언급하는 것을 극도로 꺼려서 동성애자 의혹이 끊이지 않았는데, 결혼과 함께 관련 루머는 종결된 듯하다.
- 제이지, 비욘세 부부와 친하다. 비욘세와는 14살 때 컴럼비아 레코드에 비슷한 시기에 계약하며 친해졌다. 각자 1집 앨범을 발표한 뒤 합동 투어를 했으며,[111] 함께 듀옛을 한 Put It In A Love Song은 서로의 성공을 자축하는 의미를 담은 곡이다.[112] 사실상 타이달[113] 에 참여한 멤버들과는 모두 친하다고 생각하면 될 듯. 그밖에 존메이어, 어셔[114] 등과도 친구이다. 과거에는 프린스와도 친분이 있어서 그의 헌정공연을 수차례 했으며 함께 투어에서 공연도 했다.
- 대표곡 If I ain't got you는 발매된 지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노래방 팝차트에서 10위안에서 빠지지 않을 정도다. 발표 당시 한국에서 내로라하는 수많은 뮤지션들이 이 곡을 커버했으며 최근까지도 오디션쇼에 꾸준히 선곡되왔다. 이 곡은 미국 오디션쇼에도 그녀의 데뷔곡 Fallin'과 함께 수없이 불러졌다. 하지만 원곡이 너무 유명한데다 곡의 맛을 살리기 힘들어서인지 아마추어 출연자들은 대부분 이 곡을 부르고 망했다. 다만, 더보이스2의 배틀라운드에서 이뤄진 공연은 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
- 흑인음악 팬층을 중심으로 상당한 매니아층을 거느렸고, 워낙 유명한 노래를 가진 덕분에 국내에서 2번 내한 콘서트를 열었다. The Diary of Alicia Keys를 발표한 2004년과 As I Am 활동시기인 2008년이다. 각각 거미(가수)와 태양(빅뱅)이 오프닝 공연을 맡았다.
- 국내에 피아노 여류시인 ALICIA KEYS란 팬카페가 있다. 그녀가 데뷔한 2001년에 개설되어 3집 앨범시기까지는 운영이 잘 되었고..(그녀의 공백 시기가 길다는 걸 감안하면 이때도 10년 가까이 잘 운영된 거다.) 5집 앨범까지는 어느 정도 명맥이 이어졌지만.. 이후에 앨리샤가 4년을 더 쉬어버렸고.. 지금은 유령카페가 됐다. 2집 앨범이 한국에서도 대히트를 했을 때는 회원수 15,000명에 하루 조회수가 2천이 넘어가기도 했다. 그녀가 내한 공연을 한 2004년과 2008년 콘서트에 각각 티켓 120장씩 팬클럽형식으로 공동구매를 했으며 현수막과 티셔츠를 자체 제작도 했었다! 최근 디씨 앨리샤 키스 갤러리가 개설됐다. 생긴지 얼마 안되었지만 앨리샤의 최근 정보나 관련 음반 이야기를 나누는 몇안되는 국내 팬사이트다.
- 2020년 11월 26일에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BTS의 신곡 Life Goes On을 라이브 커버해 큰 화제가 되었다. 이 트윗을 보고 방탄소년단은 리트윗을 하며 정말 감사하고 영광이라고 고마움을 밝혔다.
11. 관련 문서
[104] 자연히 이전보다 음역대는 낮아졌다.[105] 미국 팝은 한 곡 마다 4~5명씩의 작곡가가 달라붙어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106] 그래미 자체가 보수적인 곳이라서 테일러 스위프트, 노라 존스, 비욘세, 아델, 앨리샤 키스 등 고전적인 음악을 기반으로 하는 아티스트들을 편애하는 경향이 있다.[107] 애덤 리바인이 무례한 말을 한 것도, 앨리샤가 심각한 욕설을 한 것도 아니고 두 사람이 상당히 친하기 때문에 화기애애하게 웃으면서 농담 따먹기 하듯 한 말이다.[108] 흑인들은 엄청난 곱슬머리가 많기 때문에 머리를 기르면 아프로 헤어스타일이 된다. 극소수의 예외를 빼면 생머리나 웨이브진 머리를 한 흑인 여자 연예인들은 99% 본인의 머리를 밀고 붙임머리나 가발을 착용한 것이다.[109] 이 날 가슴골 노출이 심한 의상이었다.[110] 외국에서는 별거를 한 뒤 한참 뒤에 이혼을 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111] 앨리샤, 비욘세, 미씨엘리엇이 함께 Verizon Ladies First Tour을 돌았다.[112] 앨리샤의 남편인 스위즈 비츠가 프로듀싱했다. 그는 비욘세의 빌보드 1위곡 Check on It도 프로듀싱했다.[113] 제이지와 비욘세를 중심으로 스포티파이, 유튜브 등에 대항해 슈퍼스타들이 모여서 만든 유료 스트리밍 사이트이다. 고퀄의 음질을 자랑하지만 비싼 회원권 때문에 무진장 욕을 쳐먹었다.[114] 그와는 서로의 커리어가 피크에 있던 2004년 쯤에 잠깐 사귄듯 하다. My Boo라는 합동곡을 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