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르 알바시르
“우리는 국제형사재판소에 굴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수단 국민을 그들에게 인도하지 않을 것입니다.”
- 오마르 알 바시르[1]
“이 나라를 위해서 새로운 피와 새로운 동력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 다음 대선에는 출마하지 않을 것이다.”[2]
1. 개요
수단의 독재자 겸 학살자. 사실상 수단이라는 국가를 말아먹은 장본인.[3] 경제적 빈곤과 영토 상실 때문에 수단내에서도 이 인물에 대한 불만이 많은 상황이다. 수단 남부에서의 불만을 늘려서 수단 남부를 남수단으로 떼어먹히게 만든데다가 1902년 이래로 수단이 차지하고 있던 할라이브 지역에서 '''수단군이 철군하면서''' 이집트군에게 공짜로 영토를 내어준 장본인(...)[4] 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러니 수단내에서도 평가가 나빴으면 나빴지 결코 좋을리가 없는것이다.
현재 국제형사재판소에 기소된 상태이며, 그의 집권기에는 수단 내에서 이에 관련된 발언을 했다간 최대 '''사형'''까지 선고될 수 있었다.
2019년에 대규모 시위 이후 군부 세력이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군사 쿠데타로 전향해 결국 30년만에 사임했다. 알바시르가 축출된 현재 군부가 차후 2년 동안의 군정을 예고하여 민정을 기대했던 수단 시위대 내에서 불과 몇시간 만에 불만이 터져나오고 있는 상황인데, 이 때문에 수단 내에서는 군부가 수단 국민들의 불만을 해소하기 위해 알바시르에게 사형을 선고할 가능성이 있다는 말까지 나오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군부의 새 지도자가 된 이븐 아우프가 바시르의 사촌이기 때문에 사형까지 가진 않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는 편.....이었다가 이븐 아우프 본인이 이 점을 의식해서 하루 만에 사퇴하는 바람에 정말 어떻게 될지 모르게 되었다.
2. 유년 시절
오마르 알 바시르는 하르툼에서 북쪽으로 150km 떨어진 Hosh Bannaga라는 마을에서 태어났다. 초등교육을 그곳에서 마친 그는 하르툼으로 상경하여 중등교육을 마치고 사촌 파티마 칼리드와 결혼하였고, 얼마 되지 않아 두 번째 아내인 오마르 바버커 와이다드와 결혼하였다.
오마르 알 바시르는 1960년 수단 공화국 군대에 입대하였고, 1966년 이집트 사관학교로 유학을 갔다 오고 수단 사관학교를 졸업한다. 그 덕분에 공수대원으로 계급이 빨리 오르게 된다.
1973년 제 4차 중동전쟁이 일어났을 때 알 바쉬르에 있는 이집트 부대에서 근무하였고, 1975년 아랍에미리트의 군사 고문으로 재직해 있었고 돌아왔을 때 그는 기갑여단의 사령관이 되었고 이를 바탕으로 그는 군의 실세로 떠오르기 시작한다.
3.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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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공화국의 전임 대통령이었던 알 마흐디는 1989년 3월 NIF를 제외한 정당연합의 거국내각을 성립시키고 6월 30일 아디스아바바에서 SPLA측과 국민헌법회의 개최, 외국과의 군사동맹 폐기, 이슬람법 적용범위 축소 등에 합의하고 남부와의 협상을 각의에서 통과시킬 예정이었다. '''그러나 남부 협상에 불만을 가진 NIF가 주동한 쿠데타가 발생했다.''' 오마르 알 바시르 준장은 1989년 자신의 부대를 이끌고 하르툼에 무혈입성하여 아메드 알미르가니 대통령을 축출하였다. 이후 헌법을 정지시키고 국회와 정당을 해산시켰고 언론을 통제했다. 1991년 1월 1일부터 남부 3개 주를 제외한 전국에서 이슬람법 샤리아가 시행되면서 대통령 중심 연방제와 이슬람 슈라(Shura) 원칙에 따른 인민의회제 등 새로운 정치제도가 채택되고, 사법은 이슬람 국가 건설을 목표로 민사, 형사 모두 샤리아를 적용시켰다.
혁명위원회는 1993년 10월 특별회의에서 스스로 자진해체하기로 결정하였고, 알 바시르를 혁명위원장 겸 수상을 대통령에 임명시켰다. 쿠테타 배후세력인 NIF는 정재계, 사법부, 군부, 언론계, 학계 등 요직을 독점하여 수단의 지배세력으로 등장했다. NIF는 세력을 확대하여 정통 이슬람 국가 건설에 목표를 두고, 이에 반대파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등을 탄압했다. 또한 현재까지도 NIF는 장기적으로 독재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국민을 통제하고 감시하는 조치를 강화하고 있다.
4. 대통령 집권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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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알 바시르는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하여 1996년에 임기 5년제 대통령에 당선된다. 1998년에 국회의장 하산 알 투라비의 반대와 국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통령과 대통령위원회는 새 헌법과 정당의 수를 제한하는 법률을 만들었다. 1999년 1월 알 바시르는 정치결사법을 발효시켜 1989년 쿠데타 이후 금지되었던 정당활동을 허용하는 등 일련의 민주화 조치를 취하는 듯 했지만, 그해 12월 하산 알 투라비(Hassan Al-Turabi) 국회의장과의 권력투쟁에서 불리해진 알 바시르는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시켰다. 1999년 12월 12일에 자신의 부대와 탱크를 몰고 가 반대하던 하산 알 투라비와 의회를 축출, 해산시켰고, 모두 자신들의 지지자들로 갈아치워 버렸다.
2000년 5월 집권 국민회의(NC, National Congress) 사무총장인 알 투라비의 권한을 정지시키는 법령이 발효되자, 알 투라비는 그해 6월 지지세력과 함께 신당(PNC, Popular National Congress)을 창당했다. 2000년 12월 알 바시르는 비상사태하에 주요 반정부세력들이 불참한 가운데 실시된 대선에서 5년 임기의 대통령에 당선되어 재집권에 성공했다. 총선에서는 4년 임기 국회의원 총 360명을 선출했는데, 이 가운데 350석이 집권 NC 소속이었다.
2005-2010년에는 알 바시르가 소속된 정당과 SPLA(수단 인민 해방군)과의 종전을 선언하고 전력 분담에 합의를 보았다.
2010년 알 바시르는 68%의 지지율로 다시 수단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러나 이번 선거는 부패, 폭력, 협박 등에 의한 지지율이었으며, UN 관계자들은 알 바시르가 자신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구금한다고 비판하였다.
2013년에는 대규모 반정부시위가 일어나자 수단 정부는 시위대를 강경진압해서 200명 이상의 시민이 목숨을 잃었고, 80여명이 체포됐다. 시위가 일어난 이유는 2011년 석유가 집중된 남수단이 독립한 후 재정 문제를 겪던 수단 정부가 지난 23일 연료 보조금을 삭감해 경유 가격을 갤런당 8수단파운드(약 1950원)에서 14파운드로 인상하면서 시작됐다. 공공 교통비는 26%가 올랐고, 물가가 폭등했고 알 바시르가 강경대응을 하며 유혈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사망한 시체를 들고 장례식을 했는데, 하르툼 부리 지구에서는 전날 시위 중에 총에 맞아 숨진 살라 무다티르 산후리(26)를 추모하기 위해 3000여명이 모여 시신을 실은 구급차를 호위하며 “자유, 자유” “살인자 바시르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거리행진을 벌였다. 그러나 수단 군과 경찰은 장례식을 치르고 행진하던 시위대를 향해 다시 총을 난사하여 또다시 사람들이 사망했다. 수단 정부는 시위에서 사망한 사람의 숫자가 33명이라고 주장했지만 의료단체는 200명 정도로 집계했다고 알자지라가 보도했다.자료
2014년 5월 18일에는 총리 출신의 야권 지도자 샤디크 알마흐디를 반역죄로 전격 체포했다. 알마흐디는 재판에 넘겨지면 최고 사형을 선고받을 수 있다고 한다.
2015년 대선에서도 야권 주요 후보들의 보이콧 속에서 94.1%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선거감시단은 투표 기간을 하루 연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투표율이 저조했다고 발표했고, 미국, 영국, 노르웨이 등의 국가들은 선거의 정당성 및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기도 했다. 현재 수단의 시민활동가들은 26년째 통치중인 바시르 대통령의 집권연장에 항의하는 뜻이라도 표시할 수 있는 방법은 투표거부 뿐이라고 주장하며 투표에 참가하지 말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TV를 보든 어디든 온통 알 바시르 대통령뿐이며 다른 후보들은 누가 나왔는지 그들의 공약이 무엇인지도 알 수도 없을 정도라고 한다. 게다가 수단 방송은 모두 정부의 영향 아래에 있어서 선거운동기간에도 알 바시르만 방영했다. 그래서 투표결과가 뻔하다며 투표하러 가지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나오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보면 그저 그런 일반적인 독재자와 흡사하나, '''그가 욕을 먹는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5.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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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단 내전 당시의 참상을 찍은 사진들 중 유명한 사진. 1993년 2월 남수단 아요드 지방에서 사진기자 케빈 카터가 찍은 사진으로 1994년 퓰리처상 보도사진부문을 받은 수단 아이를 기다리는 독수리라는 사진이다. 다만 이 사진 때문에 케빈 카터는 구설수에 시달려야 했고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단, 케빈 카터는 자살하기전에 경제적인 어려움이 심각했고 수단 내전 이전에도 세계 각지의 비슷한 사태가 터진 지역들을 다니면서 이미 PTSD가 임계점 이상으로 시달려온 사례이다.
알 바시르는 사실상 제2차 수단 내전을 복잡하게 만든 원흉이며 수단 내전을 처참하게 만든 장본인으로 이 내전으로 '''무려 190만에 달하는''' 사망자가 발생했고 약 400만명의 수단 인들이 난민이 되어 사막 이곳 저곳을 헤매고 다녔고 기아에 시달려야 했다. 그 아이 중 한명이 바로 위에 있는 아이다.
또한 오마르 알 바시르는 이란혁명수비대를 본따서 이슬람 민병대인 국민방위군(PDF)을 조직했다. 공무원과 교사, 학생 그리고 고등교육을 원하는 사람들은 국민방위군 입소 훈련을 반드시 거쳐야만 했다. 정부는 거리에서 젊은이들을 잡아다가 훈련소로 끌고갔는데 이렇게 끌려가 모집된 국민방위군의 수는 약 15만명에 달했다고 한다. 국민방위군은 북부에서 발생하는 민간인 시위를 진압하는 역할로 투입되었으며, 남부 반군과의 교전에도 투입되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강제로 학살을 강요받아서 정신적으로 충격받아 후유증에 시달리기도 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가혹행위와 구타로 인해 사망하는 것으로 확인된다. 그러나 수단 정부는 이렇게 국민방위군이 벌이는 전쟁을 지하드 즉, 모든 무슬림이 마땅히 지켜야 할 신성한 의무라도 주장했다. 오마르 알 바시르는 남부에서 전사한 병사들을 "자신들의 피로 남부를 적셔서 그곳에서 존엄과 명예가 싹터오르게 하는 순교자"라고 말했다.
수단에서는 내전 기간 동안 무슬림 정부군들이 종교적 광신에 휩싸여 대부분 흑인들인 비이슬람 아프리카 토착 종교인들과 기독교인들의 마을을 무차별로 폭격하고 방화, 약탈, 민간인 살인, 납치, 강간 등을 저지르고 비무슬림 민간인들을 납치하고 구금했다. 이러한 종교 청소가 대놓고 벌어졌는데도 수단 정부와 이슬람권에서는 "서구 사람들도 '옛날에는' 학살 저질렀으니 쌤쌤이거든?" 식으로 어처구니 없는 뻔뻔한 물타기에 급급했다. 그러다가 우습게도 후술하는 다르푸르 학살로 흑인 무슬림까지 죽이는 일이 벌어져 이슬람권에서도 부랴부랴 "같은 무슬림을 죽이다니 뭔 짓이냐?"라는 비난이 나왔으며, 카다피도 "나도 국제적으로 욕 먹지만 적어도 바시르 얼간이처럼 같은 무슬림을 학살하지는 않았다"라고 비꼬았을 정도였다.
이러한 학살은 현재 제2차 수단내전이 끝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는데 2003년에는 오마르 알 바시르가 기소되기까지한 이유인 '''다르푸르 학살'''이 터지며 그 악명성이 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이렇게 내전과 학살이 일어나는 곳에서 당연히 기아가 발생할 수밖에 없고, 현재 이러한 참상으로 5세 이하 수단 어린이의 38% 가량인 2백만 명이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하며, 극심한 낙후지역인 수단 동부는 수단에서 가장 가난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가운데 산모의 조기 수유중단과 위생불결에 의한 어린이 설사 대유행 등으로 영양실조가 만연한 것으로 확인된다.
6. 무자비한 샤리아 폭정
1989년 쿠데타 직후 오마르 알 바시르는 수단의 어느 집회에서 한 손에는 코란, 다른 한 손에는 칼라시니코프 자동소총을 들고 연설을 했는데 이 연설이 막장이었다. 그 내용이 '''"나는 우리 내부에 있는 배반자들과 돈을 위해 일하는 자들을 숙청하겠다고 여러분 앞에서 맹세한다. 이들은 국민의 적이자 군대의 적이다. 국가를 배신한 사람은 삶의 영광을 누릴 자격이 없다."''''''수단을 엄격한 샤리아에 의해 통치되는 이슬람 국가로 만들겠다.''' - 오마르 알 바시르
오마르 알 바시르는 이 연설대로 행정기관, 군대, 사법부, 대학, 노동조합, 전문직협회, 준국영기관 등 모든 기관을 상대로 단계적인 숙청을 실시했다. 카트미야와 인사르 운동 등 저명한 이슬람 분파의 활동은 금지되었으며, 소유물과 자산 사원과 성지가 국가에 몰수되었다. 기독교 신자들의 활동은 차단되거나 억압당했다. 그다음엔 무자비한 언론탄압이 시작되었고, 수백 명의 정치인, 언론인, 박사, 노동조합원이 재판 없이 체포되어 감옥에 들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수단 정부는 부인하고 있는 이른바 "유령의 집"으로 끌려가서 고문을 당했는데, 1994년 국제연합 인권위원회거 발간한 보고서에 의하면 이곳에 감금된 사람들은 자백을 강요당하며, 불고문과 구타, 전기 고문, 그리고 무자비한 강간을 당했다고 한다.
1991년 발표된 새로운 이슬람 형법에 따라서 무장강도를 한 사람은 공개적인 장소에서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십자가형에 처해졌으며, 간통죄를 범한 사람은 돌로 쳐서 죽이고 배교자는 살해하였다. 하르툼 당국은 음악과 춤 결혼식을 제한하고 남녀가 함께 섞여서 춤추는 것을 금지하는 공공질서 법령을 시행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이 법령을 위반한다며, 음악회와 결혼식 피로연을 해산시켰다. 여성들은 공공생활을 '''전혀''' 누릴 수가 없었으며, 1991년 발표된 대통령령에 따라 여성의 활동이 제한되었고, 국가이슬람전선 소속 기관인 "도덕의 수호자 및 선의 옹호자"가 부과한 엄격한 옷차림만이 여성들에게 강요되었다. 1996년에는 대중 교통과 극장, 영화관, 잔치, 소풍 등 공개된 자리에서 남녀가 합석하는 행위, 이슬람 신자로서 이성을 마주보는 행위, 남녀가 운동하는 여성을 지켜보는 행위를 금지하는 규정을 실시했다. 한마디로 종교는 억압의 수단이 되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교육계에서 아랍어 사용을 강요하고, 비아랍권의 문화를 격하시키는 이른바 "아랍화 정책"을 추진했다.
이러한 만행은 현재까지도 지속되는 중이다. 현재 수단에서는 기독교 박해가 매우 심각하며 전세계에서 6위나 하는 기독교 탄압국이다. 수단은 2014년 W.W.L.(World Watch List, 기독교박해지수)에서 11위에 올랐으며, 미국 국무부는 수단을 기독교 및 인권침해국가로 특별 지정하고 있다.
현재 수단에서는 다른 종교인들은 이유 없이 구금되는 것이 일상이라고 하며, 수단 정부에 의해 거의 대부분의 목사가 감옥에 갇혀 돌에 맞고 폭행을 당하고 있다. 수단 법원은 2014년 5월 15일이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임신 중인 여성 마리암 이브라힘에 ‘종교 배반’과 ‘신앙심 포기’ 혐의를 씌워 사형을 선고할 정도로 강력한 '''샤리아''' 법을 적용하고 있다. 이슬람교도가 개종할 경우 범죄로 규정해 사형에 처할 수 있다. 또 여성이 타 종교를 믿는 남성과 결혼하면 간통 혐의로 처벌할 수도 있다. 수단 종교부는 2013년 4월 이후 새로운 교회의 구성에 대한 허가를 내주지 않고 있고, 교회 건축도 불허하고 있다.
2014년 12월 2일에는 수도 하르툼에 있는 바흐리복음주의교회가 무장 경찰들에 의해 파괴되었다. 증언에 의하면 수단 경찰들이 교회 재산을 포기하라고 강요하면서 교회 부지를 포위한 채, 이를 거부하는 약 40명의 성도들을 폭행하고 체포하였으며 교회를 파괴했다. 2014년 11월 17일에 처음으로 이 교회에 대한 경찰의 단속이 시작되었는데, 당시에 경찰은 몇몇 가정집과 교회 벽을 불도저로 무너뜨렸으며, 목회자의 집과 청소년 센터로 사용하던 건물도 파괴했다. 기사
그 외에도 기독교로 개종한 임산부를 감옥에 가두고 채찍질 100대와 이어서 교수형을 선고했으며, 같은 달 23일 이 여자는 달수도 채우지 못한 딸 마야를 교도소 안에서 출산했는데 심지어 쇠사슬에 손목이 묶인 채 출산을 했다고 한다. 이에 전세계적인 비난 여론이 빗발쳤고 이 여자는 딸과 함께 어찌저찌 풀려나긴 했다.
현재 수단에서는 샤리아가 무자비하게 적용되는데 무장 강도의 손과 발 하나씩 절단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며, 수단에서는 '''술을 마셨다고, 또는 복장이 불량하다는 이유로 그외에도 별의별 황당한 이유에 대한 형벌로 태형을 가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말할 정도다. 실제로 여성 언론인이자 유엔 직원 루브나 아흐메드 후세인도 ‘음란하게’ 바지를 입었다는 이유로 다른 여성 10명과 함께 현지 경찰에 체포된 적이 있을 정도이며, 수단의 젊은 여성이 불륜을 저질렀다는 이유로 돌팔매질에 의한 사형선고를 받게 하는 막장짓을 저지르거나, 이슬람의 예언자 마호메트의 이름을 학생들이 곰 인형의 별명으로 쓰도록 허락했다는 혐의로 실형이 선고된 사례도 있을 정도로 수단에서는 샤리아에 의한 독재와 인권유린이 자행되고 있다.
7. 국제 테러리스트 단체 지원
수단 정부는 이른바 지하드를 주장하며 전세계적으로 지하드를 하는 단체들을 후원했다. 1991년 말까지 1000명의 이집트 반란군을 맞아들였으며, 아부 니달 등 팔레스타인 지도자들도 매우 반갑게 맞아들였다. 카를로스 자칼이라고 불리는 악명높은 테러리스트 일리치 라미레스 산체스 역시 이라크와 리비아에서 보호를 거부당한 뒤에 수단에서 잠시 보호를 받았다. 또한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를 지원하기도 했다. 심지어 국제테러리스트로 지명된 오사마 빈 라덴에게 5년간 은신처를 제공하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수단은 테러리스트를 지원하는 불량 국가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집트 의회 대변인 살해사건의 범인이 수단에서 암살 훈련을 받았다는 자들이라며 수단을 비난했고, 튀니지는 알투라비와 수단의 장부 관료가 튀니지 반정부 활동가와 공모하여 튀니지 대통령의 암살을 위해 무기를 밀반입했다고 주장했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싸우다가 퇴역한 알제리인들은 수단에서 훈련을 받은 이후 알제리로 돌아가 군사정권에 저항하는 운동을 시작했고, 수단에서 훈련받은 리비아인들은 1993년 카다피의 암살을 시도했고, 1995년에는 리비아에서 반군 공격을 시작했다. 수단에서 훈련을 받은 팔레스타인 하마스 조직원들은 가자 자구에서 이스라엘 민간인이 탄 버스를 대성으로 한 자살 폭탄 테러를 실시했다. 또한 수단은 소말리아의 아이드 민병대와 에리트레아와 에티오피아의 이슬람 무장투쟁 단체를 후원했다. 오마르 알 바시르는 1993년 뉴욕 세계무역센터 폭파 테러에 관여했다, 실제로 이 사건과 관여한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 가운데 6명이 수단인이였다. 또한 이 공모자들을 도와준 혐의로 기소된 사람들 중에는 수단 출신 국제연합 외교관 두 사람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마르 알 바시르는 세계무역센터 폭파 혐의로는 기소되지 않았지만, 뉴욕의 주요 건물 폭파를 포함하여 반미 도시 테러 전쟁을 벌이자는 선동 모의를 한 혐의로 기소되어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 국무부는 수단을 테러지원국으로 지정하였다.
수단의 테러 활동 개입은 1995년 6월 호스니 무바라크에 대한 암살 시도로 절정에 달했다. 무바라크는 아프리카통일기구 정상회담 참여를 위해 에티오피아 아디스아바바 공항에서 시내로 향하던 중 테러를 당했다. 용의자들은 수단의 "안전한 농장"에서 암살 작전 준비를 마치고 에티오피아 국경을 넘어온 이집트인들이였다. 범인들은 체포되었지만 3명은 수단으로 도망갔다.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는 수단이 이 공격을 조직했다고 비난했고 실제로 수단 정보 기관이 이 테러에 개입된 것이 사실로 드러났다. 이에 무바라크는 격분해서 하산 알 투라비[5] 와 오마르 알 바시르를 '''"폭력배, 범죄인, 정신 나간 놈"'''이라고 욕을 퍼부었다. 이에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가 개입하여 수단에 여러가지 제제를 가한 후 달아난 이집트인 세 명을 에티오피아에 넘기라고 요구했다.
이렇듯 수단이 테러 행위를 지원한 것이 드러나 이웃 정부들에게 욕을 먹고 왕따 신세가 되고 미국과 서방으로부터 경제제재를 받아 가뜩이나 안 좋은 수단 경제는 추락하고 만다. 나중엔 테러지원 중단을 끝까지 거부하자 단단히 빡친 미국이 보낸 미 공군의 공습과 폭격으로 개털리자 무서워서 바로 요구를 받아들이며 테러지원을 포기했다. 이에 따라 테러를 후원하던 수단의 정부 기구가 사라졌고 외국 전투원들도 수단에서 전부 추방되었다. 특히 이렇게 해서 나간 사람 중에는 오사마 빈 라덴도 있었다. 오마르 알 바시르와 절친한 사이인 알 투라비의 말에 의하면 빈 라덴은 배신감에 치를 떨며 수단을 떠났다고 한다.
물론 현재까지도 테러 단체 몇몇은 몰래 지원을 하고 있다. 대표적으로 팔레스타인의 하마스를 지원하기도 하며, 우간다의 인간백정인 조지프 코니가 이끄는 신의 저항군을 지원하고 있다. 이 인간백정을 지원하는 이유는 우간다의 요웨리 무세베니가 오마르 알 바시르가 남수단을 점령하고 나면 바로 아래에 위치한 우간다가 여러모로 위험해질 수 있다고 판단했고, 이에 남수단 반군들에게 무기를 지원하자 오마르 알 바시르가 요웨리 무세베니를 견제하기 위해서 조지프 코니를 지원한다고 한다.
물론 조지프 코니가 깽판을 쳐대자 미국 측에선 정반대로 요웨리 무세베니를 지원하고 있다. 정말 우스운 사실은 기독교도들을 학살하던 그가 기독교인인 조지프 코니를 지원한 탓에 아랍권 무슬림도 "이 색히, 아주 이랬다 저랬다 하네"라고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 사실 신의 저항군 지원도 그렇고, 이 학살자의 독실한 무슬림 행세는 무바라크 치하 이집트나 아사드 치하 시리아 같이 급진 이슬람주의자 세력이 자신의 정권과 유리된 개별 야권 세력으로 자라는 가능성을 정권 내에서 뿌리째 뽑아 버리려는 시도란 분석이 주류다.
8. 몰락
2019년 4월 11일에 수단 군부는 바시르 대통령을 축출했다고 밝혔다. # 그리고 군부는 바시르의 형제 2명도 체포했다. # 그러나 민간 시위대 측에서는 "바시르 개인이 죽어 없어지는 거나 보려고 거리로 나선 게 아니다"라는 주장과 함께 민주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시위를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수단 군부가 바시르의 집에서 거액의 현금이 든 가방을 발견했다고 밝혔다. # 이후 수단 내의 현역 판사들까지 민간 정부로의 이양을 요구하는 시위에 가세하면서 바시르가 권좌에 돌아올 수 있을 가능성은 사실상 없어졌다. # 결국 바시르 前 대통령은 테러자금혐의에 대한 검찰조사를 받을 것이라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이후 검찰은 바시르 前 대통령을 시위대를 살해한 혐의로 기소했다.#
2019년 6월 16일에 바시르 前 대통령은 돈세탁과 거액의 외화소지혐의 등으로 검찰에 출두했다.# 국제형사재판소는 수단측에 바시르 전 대통령의 신병을 인계하라고 촉구했다.# 8월 19일에 바시르 前 대통령은 법정에 출두했고 경찰조사관은 심문에서 바시르가 사우디로부터 9천만달러를 받은 점을 인정했다고 밝혔다.# 게다가 비밀금고에서 거액을 돈다발을 쌓아놓고 뇌물 등으로 활용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과도정부가 바시르의 소속정당을 전면 해산시킨다고 밝혔다. # 수단 법원은 12월 14일에 바시르에게 2년형을 선고했다. # 단, 12월 14일의 선고는 위의 혐의들 중 가장 가벼운 혐의에 대한 결정으로 수단 공화국 현지에서는 바시르에 대한 재판이 모두 끝나려면 2020년 연말까지는 기다려야 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이 많다.
8월 22일 함독 총리가 22일 전쟁범죄와 관련해 국제형사재판소에 협조하겠다고 밝혔다.# 바시르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중형을 받을 경우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 이후 최대 규모의 전범 재판이다.
10월 20일에 수단을 방문한 파투 벤수다 국제형사재판소 검사장은 바시르 전 대통령을 비롯한 다르푸르 대학살 용의자들을 더 이상 지체 없이 재판장에 세워야 한다고 촉구했다.#
9.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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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르 알 바시르의 간략한 생애 요약
오마르 알 바시르는 1989년부터 세계 최악의 10대 독재자 순위에 포함돼, 2007년에는 '''김정일과 로버트 무가베, 탄 슈웨, 이사야스 아페워키와 같은 쟁쟁한 후보들을 누르고''' 세계 최악의 독재자 순위 1위에 오른 기록을 가지고 있다.
현재 그가 수단에서 뺴돌린 돈은 위키리크스의 자료에 의하면 약 90억 달러 정도로 한화로 약 9조원 정도의 금액이라고 하는데 전쟁을 하면서 병사들이 약탈한 자금을 자신이 가져간다는 것이 가장 유력하다.
오마르 알 바시르는 쿠테타로 집권한 후에 계속해서 국민들을 통제하고 독재정치와 경제난 등으로 국민들로부터 인기는 없으나 남부 반군의 약화, 반정부세력의 분열 등으로 29년간 꽤나 안정되게 정권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과격 이슬람화 정책과 내전으로 인한 난민발생, 인권문제로 서방으로부터 원조 중단 등으로 수단의 대외적 고립현상이 일어나 여러가지 문제점들이 발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난제들을 타개하기 위해 국내적으로 국민과의 대화분위기를 조성하고, 남부반군과의 협상에 노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별로 성과는 없다.
현재 수단의 언론은 1970년에 모두 국유화되었으며, 수단의 언론 자유는 매우 제한되어 있다. 수단에는 현재 SNBC와 Khartoum TV 등 2개의 TV 방송국이 있으며, 라디오 중파방송은 5개 지역에서 방송하고 있다. 4개의 주요 아랍어판 일간지와 2개의 영어판 월간지는 정부의 통제하에 발행되고 있고, SUNA 통신은 관영 언론이다. 영어판 일간지 카르툼 모니터(Khartoum Monitor)는 남부지역을 대변하는 신문인데 이 신문은 세 차례의 폐간과 국유화, 압류, 구금 등 탄압을 겪어왔다. 수단의 독립언론 '알 아얌'지 편집장 마흐굽 모하메드 살리흐는 '''"수단에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면 내전이 대재앙으로 번지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내전 중인 시리아를 방문해 시리아 바샤르 알아사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했다. #
10. 관련 문서
[1] 자신에 대한 국제형사재판소의 체포영장이 나오자 한 말[2] 2015년 대선을 앞두고 한말 '''그런데 출마를 해서 당선되었다'''[3] 이 자가 저지른 학살과 남수단에 대한 차별정책 때문에 부족 단위로 자기들끼리 싸우던 남수단인들이 살기 위해 똘똘 뭉쳐 결국 분리 독립했고 여기에 다르푸르에서도 지옥도가 펼쳐지면서 수단은 전세계 하위 10위권 내를 항상 유지하는 진정한 취약국가로 전락하였다.[4] 참고로 수단과 이집트는 여러모로 사이가 나쁜나라이다. 그런데, 상대국에게 영토를 내어준 셈이니 평가가 나빴으면 나빴지 좋을리가 없다.[5] 오마르 알 바시르와 굉장히 친한 사이로 오마르 알 바시르의 쿠데타를 주도적으로 한 인물이며, 수단에 이슬람 율법 샤리아를 적용하게 만든 자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2000년대 들어 바시르와 사이가 틀어져 두 차례 감옥 생활을 했으며, 2016년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