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 마리아 비안네
[image] 프랑스어: Jean-Marie Vianney
라틴어: Ioannes Maria Vianney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다르디이에서 출생, 1859년 8월 4일 프랑스 아르수포르망에서 선종.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장마리 비아네'''.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이자 성인으로 축일은 8월 4일. 그는 1818년에 아르수포르망(약칭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한 뒤 40년이 넘도록, 죽을 때까지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은 채 230여 명의 주민들을 돌보며 지냈다. 그래서 '''전세계 모든 본당신부들의 수호성인'''이다.
2009년 6월 19일부터 2010년 6월 19일까지 지정되었던 '''사제의 해(Annus Sacerdotalis)'''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선종 150주년을 기념한 것이다. 이 때 교황의 지향에 따라 고해성사를 비롯해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 전대사의 은총이 주어졌다.
농부 마티외 비아네와 마리 블루즈 사이에서 난 6남매 중 넷째였다.
비아네가 어렸을 때는 프랑스 혁명 때문에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성당과 수도원에서 쫓겨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의 눈을 피해 사목활동을 하는 사제들의 모습에서 영웅을 보았다고 한다. 비아네 가족은 먼 곳까지 가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고, 비아네 본인도 정식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무사히 첫 고해성사와 첫 영성체까지 했다. 이 때 나이는 13살. 미사를 드리는 내내 행여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창문을 건초더미로 막았다고 한다.
종교탄압이 끝나고 교회가 안정을 되찾은 1802년, 그는 사제 성소를 지니고 그에 대한 교육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다르디이를 떠날 것을 허락했다. 비아네는 20세 때 인근 에퀼리 마을로 떠나 발레 신부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애당초 혁명 때문에 기초 교육이 부실해서 성적은 좋지 못했다. 특히 라틴어를 그렇게 어려워했다고. 하루는 마티아라는 학생이 8살이나 연상인 열등생 비아네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런데 비아네가 얼마나 못 알아먹었으면… 마티아는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비아네에게 '''"이 멍청아!"'''라고 막말을 하며 싸닥션까지 날렸다. 그런데 너무 착한 비아네는 몸이 튼튼해서 마티아를 주어팰 수도 있었는데도 그냥 '''"내가 모자라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이후로 마티아와 비아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비아네 본인도 자기가 얼마나 머리가 나쁜지 알아서 발레 신부에게 "저 그냥 집에 갈게요"라고 말하곤 했지만, 발레 신부는 그가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지 알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간에 교육을 받다 말고 1809년에는 나폴레옹 군대에 징집까지 당했다. 원래 신학생으로 등록되어 있다면 면제될 일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위해 병사가 더 필요했고, 몇몇 교구들이 면제를 철회해 버렸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그렇게 리옹으로 간 비아네는 이틀 후에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했고, 그 동안 프랑스군은 그를 내버려두고 먼저 전쟁터로 가 버렸다(…). 병원에서 퇴원한 비아네는 다시 징집되어 로안으로 가던 중 '''기도하기 위해 성당으로 갔다가 부대 행렬에서 낙오되었다'''(…).
비안네는 부대로 돌아오도록 파견된 한 젊은이를 만났지만, 도리어 그를 르포레즈(Le Forez) 산 깊숙한 곳의 탈영병이 모인 레노(Les Noes) 마을로 끌고 갔다(!). 비안네는 과부 클로딘 파요의 농가에 신세를 지고 14개월을 외양간에서 숨어 지내며, 이름도 '제롬 뱅상(Jerome Vincent)'으로 바꾸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겨울에는 어찌어찌 헌병의 눈을 피해 살 수 있었지만 날씨가 풀리면 어김없이 탈영병을 수색하러 오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발효된 건초더미 속에 몸을 숨기곤 했다.
1810년 3월 모든 탈영병을 사면한다는 나폴레옹 황제의 칙령이 떨어지자 비안네는 다시 에퀼리로 돌아가, 1811년에는 삭발례[1] 를 치르고 1812년에는 베리에르 소신학교[2] 에, 1813년에는 리옹 대신학교[3] 에 입학했다. 그러나 모든 수업이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대신학교에서 역시나 학업 성취도가 딸리던 비안네는, 동기들에게 비웃음까지 당하며 퇴학당했다.
보다 못한 발레 신부는 개인 교습을 하면서까지 다시 대신학교 시험을 보게 했지만, 여전히 문턱이 높았다. 마지막으로 발레 신부는 그의 경건함이 약간 딸린 머리를 보충할 수 있지 않느냐고 교구에 청원했고, 비아네에겐 감독관이 파견되어 사제로서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치러졌다. 시험지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고, 일단 감독관들에겐 합격점을 받았다. 하지만 주교는 별로 탐탁지 않아했는데, 그 순간 그 교구장 주교가 갈렸다(…).
새로 부임한 주교는 다행히도 비아네의 신심을 높게 평가해 주었고, 1815년 6월에는 부제로, '''8월 12일에는 드디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첫 미사는 사제 서품식 다음 날 치러졌고, 발레 신부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한 고해자 역시 발레 신부였다. 본래 사제가 된 후에도 고해성사 집전 자격이 유보되어 있었던 비안네 신부는, 스승 발레 신부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사제가 될 수 있었다.
워낙 힘겹게 사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훌륭한 성직자가 되는 방법은 훌륭한 신학생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현재 가톨릭 신학생들의 좌우명처럼 여겨지고 있다.[4]
서품 3년 만인 1818년에 스승 에퀼리의 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비아네는 아르수포르망의 본당신부로 임명되어 갔다. 인구가 230여 명인 아르스는, 신자 모두가 세례성사를 받긴 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후유증으로 주민들 모두가 신앙생활에서 멀어져 있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러 오는 사람이 1명도 없었고, 그저 다들 들판에서 일을 하거나 술집에 모여 춤추고 마실 뿐이었다. 아무리 임명장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적혀 있었다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신부는 당황했다. 그는 거의 온종일 고해소에서 지내며, 이따금씩 고해소로 오는 신자들에게 제발 술집에서 놀고 마시지 말라고 설교하곤 했는데, 만약 그 신자가 그 뒤에도 놀고 마셨다고 고백하면 '''아예 사죄경을 주지 않았다'''.
한편으로 신부 자신도 마을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수 년 동안 감자로 연명하고 금식 고행을 하는 등 고생이 많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들을 다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지극히 가난하게 살았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성체조배, 미사, 고해성사 같은 사목생활에 바쳤다.
그때 악마가 나타나 고행 중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쉰 소리로 노래하거나,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거나, "비아네, 비아네, 이 감자만 먹는 놈아!"라고 외치며 신부를 많이 괴롭혔다고 한다. 비아네 신부는 이 악마를 '크라팽(쇠스랑)'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선종하기 3년 전에는 크라팽이 신부의 침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걱정하는 신자들에게 신부는 '''"여러분 모두는 침대가 있지만 제게는 없으니, 이제 아르스에서 제가 제일 가난해졌습니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비안네 신부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건 주민들이 이런 신부의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였다. 물론 처음에는 고지식하고 타협이 없는 신부의 행동을 오히려 험담했지만, 언젠가부터 하나 둘씩 교회로 돌아오던 주민들은 그가 부임한 지 8년 만에 모두 신앙심을 회복했다. 1824년에는 '프로비당스(Providence)(섭리)'라는 이름의 기숙 여학교를 열어 어려운 처지의 소녀들을 돌봤다.
게다가 그의 정성스럽고 신통(…)하기까지 한 고해성사는 입소문을 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27년부터는 1년 평균 2만 명에 달하는 순례자들이 아르스로 몰려와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려 했다. 그 탓에 미사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아예 고해소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고, 잠도 하루 2~3시간밖에 못 자는 정도가 되었다. 하루는 신부가 딱해 보였던 신자가 그를 고해소에서 꺼내기 위해 기다렸지만, 사람들의 행렬이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도 없을 정도로 붐벼 있어서 할 수 없이 억지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신부를 꺼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이 신부에게서 성유물(?)이라도 얻어가기 위해 그의 옷자락을 찢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이 정도인데도 아무리 피곤해도 고해자들에겐 언제나 정성을 다해 대했고, 고해자들이 미처 말하지 못하는 죄목도 따져가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그의 훈화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감화되어 갔다. 하지만 피로가 점점 심해진 비안네 신부는 원래 건강한 체질이었음에도 점점 쇠약해져 갔다.
이때 비아네 신부를 만나러 온 순례자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마을에서 이런 순례자를 상대로 상권이 형성되어서, 만약 비안네 신부가 없어지기라도 하면 당장 마을 경제가 휘청거릴 판이 되었다고 한다 ()
이 무렵 비아네 신부는 수도자의 조용한 삶을 동경하기 시작해 4번 아르스를 떠났지만, 그나마도 교구장 주교가 빨리 아르스로 돌아가라고 해서 번번히 되돌아와야 했다. 다른 이유로는 한 번도 아르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잘못 판단하고, 그를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이며 허풍선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미쳤다고 비난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이나 모두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를 옹호하였다.
가톨릭 계열의 만화잡지 내친구들에서 맹상수 작가가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라는 제목으로 아르스에서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일대기를 만화로 그렸다.[5]
생존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던 이답게 비아네 신부는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켰다. 정작 신부 본인은 자신이 일으켰다고 알려진 기적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리며 겸손해했다.
비안네 신부는 프로비당스 여학교를 연 후 신자들 중에서 카타리나 라사늬와 베네딕타 라르데를 교사로, 요한나 마리아 자네를 음식과 빨래 담당으로 선발해 학교를 운영했다. 빠듯한 재정 상황 속에서도 신부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학교를 확장해 나갔다. 한번은 밀가루도 돈도 없어 소녀들을 내보내야 될 상황에 처하자, 신부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바닥에 흩어진 밀 낱알을 모은 뒤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의 유해를 낱알 속에 넣고 기도했다. 잠시 후 요한나 마리아 자네가 다락방에 올라가 문을 열자, 질 좋은 밀이 바닥에 넘쳐나도록 채워져 있었다.
어떤 날은 밀가루가 한 줌밖에 없는데 24명이 식사를 기다리게 되자, 비안네 신부는 자네에게 "밀가루 속에 누룩을 넣고 다음날 반죽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자네가 반죽을 시작하자, 반죽통이 넘칠 정도로 반죽이 커져 20~30파운드짜리 빵을 10개나 구울 수 있었다.
하루는 지하실에 보관한 포도주 통이 새는 바람에 통이 빈 걸 자네와 빌리아 자매가 발견해 신부에게 알리자, 신부는 "포도주가 달아나는 걸 허락하신 분께서는 포도주가 돌아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자네와 빌리아는 지하실 바닥에 고인 포도주를 긁어모아 2단지밖에 되지 않는 적은 양을 빈 통에 부었는데, 평소에 마시던 것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커다란 통을 가득 채웠다.
또 점심 때 신부가 호박 한 접시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조각을 너무 크게 썰자, 카타리나 라사늬는 "그러다 호박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하지만 신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큼지막하게 썰었는데, 그렇게 해서 아이들에게 충분히 나눠주고도 접시에 호박이 조금 남기도 했다.
오병이어의 기적 외에도 치유와 관련된 기적 또한 부지기수로 많았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을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종양에 손을 대자 곧바로 종양이 사라졌고, 걷지 못하는 소년에게 "다음 날부터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신부가 말한 그대로 이뤄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 증인들의 증명이 적힌 확인서도 있는데, 아래의 내용은 1859년 9월 8일에 몰냉 신부에게 송달된 확인서이다.
1859년 7월 29일, 무려 17시간이나 고해성사를 집전한 비아네 신부는 사제관으로 돌아와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하고 외친 뒤 쓰러졌다. 그리고 닷새 뒤인 8월 4일 새벽 2시에 73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6] 마을 사람들은 무더운 날씨에 신부의 마지막을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지붕 위로 찬물을 부었고, 그가 숨을 거두자 마을 사람 전체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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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네 신부는 얼굴을 밀랍 마스크로 덮은 상태로 아르스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사실 아르스의 성당은 허름했지만, 비아네 신부가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포기하는 대신 성당을 예쁘게 꾸미는 데에 열성적이어서 보수도 많이 되고, 규모도 커졌다고. 지금도 아르스 성당에 가면 유리관에 모셔진 비안네 신부의 부패하지 않은 유해를 볼 수 있다.
비아네 신부는 1874년 10월 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가, 이어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가,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비아네 신부의 성유물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가로 세로 2cm의 작은 옷 조각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출생지인 충청남도 당진시의 솔뫼성지(천주교 대전교구)에 모셔져 있다.
라틴어: Ioannes Maria Vianney
1. 개요
1786년 5월 8일 프랑스 다르디이에서 출생, 1859년 8월 4일 프랑스 아르수포르망에서 선종.
프랑스식으로 읽으면 '''장마리 비아네'''. 프랑스의 가톨릭 신부이자 성인으로 축일은 8월 4일. 그는 1818년에 아르수포르망(약칭 아르스)의 본당신부로 부임한 뒤 40년이 넘도록, 죽을 때까지 이 마을을 떠나지 않은 채 230여 명의 주민들을 돌보며 지냈다. 그래서 '''전세계 모든 본당신부들의 수호성인'''이다.
2009년 6월 19일부터 2010년 6월 19일까지 지정되었던 '''사제의 해(Annus Sacerdotalis)'''는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 선종 150주년을 기념한 것이다. 이 때 교황의 지향에 따라 고해성사를 비롯해 일정한 과정을 거치면 전대사의 은총이 주어졌다.
2. 사제가 되기까지
농부 마티외 비아네와 마리 블루즈 사이에서 난 6남매 중 넷째였다.
비아네가 어렸을 때는 프랑스 혁명 때문에 사제들과 수도자들이 성당과 수도원에서 쫓겨나거나 살해당하는 일이 빈번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혁명가들의 눈을 피해 사목활동을 하는 사제들의 모습에서 영웅을 보았다고 한다. 비아네 가족은 먼 곳까지 가서 비밀리에 신앙생활을 했고, 비아네 본인도 정식 교육은 많이 받지 못했지만 무사히 첫 고해성사와 첫 영성체까지 했다. 이 때 나이는 13살. 미사를 드리는 내내 행여 불빛이 밖으로 새어나갈까 창문을 건초더미로 막았다고 한다.
종교탄압이 끝나고 교회가 안정을 되찾은 1802년, 그는 사제 성소를 지니고 그에 대한 교육을 받고 싶어했다. 그리고 아버지는 그를 위해 다르디이를 떠날 것을 허락했다. 비아네는 20세 때 인근 에퀼리 마을로 떠나 발레 신부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지만 애당초 혁명 때문에 기초 교육이 부실해서 성적은 좋지 못했다. 특히 라틴어를 그렇게 어려워했다고. 하루는 마티아라는 학생이 8살이나 연상인 열등생 비아네를 가르쳐 주고 있었다. 그런데 비아네가 얼마나 못 알아먹었으면… 마티아는 너무 답답하고 화가 나서 비아네에게 '''"이 멍청아!"'''라고 막말을 하며 싸닥션까지 날렸다. 그런데 너무 착한 비아네는 몸이 튼튼해서 마티아를 주어팰 수도 있었는데도 그냥 '''"내가 모자라서 미안하다"'''고 용서를 빌었다. 이후로 마티아와 비아네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가 되었다고 한다. 비아네 본인도 자기가 얼마나 머리가 나쁜지 알아서 발레 신부에게 "저 그냥 집에 갈게요"라고 말하곤 했지만, 발레 신부는 그가 얼마나 신앙심이 깊은지 알았기 때문에 포기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중간에 교육을 받다 말고 1809년에는 나폴레옹 군대에 징집까지 당했다. 원래 신학생으로 등록되어 있다면 면제될 일이었지만 나폴레옹은 스페인과의 전쟁을 위해 병사가 더 필요했고, 몇몇 교구들이 면제를 철회해 버렸기 때문이다. 별 수 없이 그렇게 리옹으로 간 비아네는 이틀 후에 병이 들어 병원에 입원했고, 그 동안 프랑스군은 그를 내버려두고 먼저 전쟁터로 가 버렸다(…). 병원에서 퇴원한 비아네는 다시 징집되어 로안으로 가던 중 '''기도하기 위해 성당으로 갔다가 부대 행렬에서 낙오되었다'''(…).
비안네는 부대로 돌아오도록 파견된 한 젊은이를 만났지만, 도리어 그를 르포레즈(Le Forez) 산 깊숙한 곳의 탈영병이 모인 레노(Les Noes) 마을로 끌고 갔다(!). 비안네는 과부 클로딘 파요의 농가에 신세를 지고 14개월을 외양간에서 숨어 지내며, 이름도 '제롬 뱅상(Jerome Vincent)'으로 바꾸고 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다. 겨울에는 어찌어찌 헌병의 눈을 피해 살 수 있었지만 날씨가 풀리면 어김없이 탈영병을 수색하러 오는 병사들의 눈을 피해 발효된 건초더미 속에 몸을 숨기곤 했다.
1810년 3월 모든 탈영병을 사면한다는 나폴레옹 황제의 칙령이 떨어지자 비안네는 다시 에퀼리로 돌아가, 1811년에는 삭발례[1] 를 치르고 1812년에는 베리에르 소신학교[2] 에, 1813년에는 리옹 대신학교[3] 에 입학했다. 그러나 모든 수업이 라틴어로 이루어지는 대신학교에서 역시나 학업 성취도가 딸리던 비안네는, 동기들에게 비웃음까지 당하며 퇴학당했다.
보다 못한 발레 신부는 개인 교습을 하면서까지 다시 대신학교 시험을 보게 했지만, 여전히 문턱이 높았다. 마지막으로 발레 신부는 그의 경건함이 약간 딸린 머리를 보충할 수 있지 않느냐고 교구에 청원했고, 비아네에겐 감독관이 파견되어 사제로서의 자질이 있는지에 대한 평가가 치러졌다. 시험지는 프랑스어로 되어 있었고, 일단 감독관들에겐 합격점을 받았다. 하지만 주교는 별로 탐탁지 않아했는데, 그 순간 그 교구장 주교가 갈렸다(…).
새로 부임한 주교는 다행히도 비아네의 신심을 높게 평가해 주었고, 1815년 6월에는 부제로, '''8월 12일에는 드디어 사제로 서품되었다!''' 그의 첫 미사는 사제 서품식 다음 날 치러졌고, 발레 신부의 보좌신부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고해성사를 집전한 고해자 역시 발레 신부였다. 본래 사제가 된 후에도 고해성사 집전 자격이 유보되어 있었던 비안네 신부는, 스승 발레 신부의 피나는 노력 덕분에 사제가 될 수 있었다.
워낙 힘겹게 사제 교육을 받았기 때문인지, "훌륭한 성직자가 되는 방법은 훌륭한 신학생으로 사는 것이다."라는 말을 남겼다. 이 말은 현재 가톨릭 신학생들의 좌우명처럼 여겨지고 있다.[4]
3. 아르스의 본당신부로서
서품 3년 만인 1818년에 스승 에퀼리의 발레 신부가 세상을 떠나자, 비아네는 아르수포르망의 본당신부로 임명되어 갔다. 인구가 230여 명인 아르스는, 신자 모두가 세례성사를 받긴 했지만 프랑스 혁명의 후유증으로 주민들 모두가 신앙생활에서 멀어져 있었다. 주일 미사에 참례하러 오는 사람이 1명도 없었고, 그저 다들 들판에서 일을 하거나 술집에 모여 춤추고 마실 뿐이었다. 아무리 임명장에 '사랑이 부족하다'고 적혀 있었다지만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신부는 당황했다. 그는 거의 온종일 고해소에서 지내며, 이따금씩 고해소로 오는 신자들에게 제발 술집에서 놀고 마시지 말라고 설교하곤 했는데, 만약 그 신자가 그 뒤에도 놀고 마셨다고 고백하면 '''아예 사죄경을 주지 않았다'''.
한편으로 신부 자신도 마을 주민들을 위해 기도하면서 수 년 동안 감자로 연명하고 금식 고행을 하는 등 고생이 많았다. 자신이 가지고 있던 모든 물품들을 다 이웃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자신은 지극히 가난하게 살았으며, 하루의 대부분을 성체조배, 미사, 고해성사 같은 사목생활에 바쳤다.
그때 악마가 나타나 고행 중에 시끄러운 소리를 내거나, 쉰 소리로 노래하거나, 고양이 울음소리를 내거나, "비아네, 비아네, 이 감자만 먹는 놈아!"라고 외치며 신부를 많이 괴롭혔다고 한다. 비아네 신부는 이 악마를 '크라팽(쇠스랑)'이라고 불렀는데, 그가 선종하기 3년 전에는 크라팽이 신부의 침대를 불태우기도 했다. 걱정하는 신자들에게 신부는 '''"여러분 모두는 침대가 있지만 제게는 없으니, 이제 아르스에서 제가 제일 가난해졌습니다"'''라고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비안네 신부의 노력이 결실을 보기 시작한 건 주민들이 이런 신부의 모습을 지켜보고 나서였다. 물론 처음에는 고지식하고 타협이 없는 신부의 행동을 오히려 험담했지만, 언젠가부터 하나 둘씩 교회로 돌아오던 주민들은 그가 부임한 지 8년 만에 모두 신앙심을 회복했다. 1824년에는 '프로비당스(Providence)(섭리)'라는 이름의 기숙 여학교를 열어 어려운 처지의 소녀들을 돌봤다.
게다가 그의 정성스럽고 신통(…)하기까지 한 고해성사는 입소문을 타 프랑스 전역으로 퍼져나갔고, 1827년부터는 1년 평균 2만 명에 달하는 순례자들이 아르스로 몰려와 그에게 고해성사를 보려 했다. 그 탓에 미사와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아예 고해소에 갇혀 지내는 신세가 되었고, 잠도 하루 2~3시간밖에 못 자는 정도가 되었다. 하루는 신부가 딱해 보였던 신자가 그를 고해소에서 꺼내기 위해 기다렸지만, 사람들의 행렬이 도저히 중간에 끊을 수도 없을 정도로 붐벼 있어서 할 수 없이 억지로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가 신부를 꺼냈다(…). 그 와중에도 사람들이 신부에게서 성유물(?)이라도 얻어가기 위해 그의 옷자락을 찢거나 머리카락을 뽑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다.
이 정도인데도 아무리 피곤해도 고해자들에겐 언제나 정성을 다해 대했고, 고해자들이 미처 말하지 못하는 죄목도 따져가며 사람의 마음을 꿰뚫어보았기 때문에 그의 훈화를 들은 사람들은 하나 같이 감화되어 갔다. 하지만 피로가 점점 심해진 비안네 신부는 원래 건강한 체질이었음에도 점점 쇠약해져 갔다.
이때 비아네 신부를 만나러 온 순례자들이 어찌나 많았는지 마을에서 이런 순례자를 상대로 상권이 형성되어서, 만약 비안네 신부가 없어지기라도 하면 당장 마을 경제가 휘청거릴 판이 되었다고 한다 ()
이 무렵 비아네 신부는 수도자의 조용한 삶을 동경하기 시작해 4번 아르스를 떠났지만, 그나마도 교구장 주교가 빨리 아르스로 돌아가라고 해서 번번히 되돌아와야 했다. 다른 이유로는 한 번도 아르스를 떠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동료 사제들은 그를 잘못 판단하고, 그를 무식하고 지나치게 열성적이며 허풍선이라고 하거나 심지어는 미쳤다고 비난하곤 하였다. 이에 대해 그의 주교는 “저 신부만큼이나 모두 미쳤으면 좋겠다.”고 하며 그를 옹호하였다.
가톨릭 계열의 만화잡지 내친구들에서 맹상수 작가가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라는 제목으로 아르스에서의 요한 마리아 비안네 신부의 일대기를 만화로 그렸다.[5]
4. 기적
생존시부터 성인으로 추앙받던 이답게 비아네 신부는 여러 가지 기적을 일으켰다. 정작 신부 본인은 자신이 일으켰다고 알려진 기적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리며 겸손해했다.
비안네 신부는 프로비당스 여학교를 연 후 신자들 중에서 카타리나 라사늬와 베네딕타 라르데를 교사로, 요한나 마리아 자네를 음식과 빨래 담당으로 선발해 학교를 운영했다. 빠듯한 재정 상황 속에서도 신부는 하느님의 섭리를 믿고 학교를 확장해 나갔다. 한번은 밀가루도 돈도 없어 소녀들을 내보내야 될 상황에 처하자, 신부는 다락방으로 올라가 바닥에 흩어진 밀 낱알을 모은 뒤 성 요한 프란치스코 레지스의 유해를 낱알 속에 넣고 기도했다. 잠시 후 요한나 마리아 자네가 다락방에 올라가 문을 열자, 질 좋은 밀이 바닥에 넘쳐나도록 채워져 있었다.
어떤 날은 밀가루가 한 줌밖에 없는데 24명이 식사를 기다리게 되자, 비안네 신부는 자네에게 "밀가루 속에 누룩을 넣고 다음날 반죽하라"고 지시했다. 이튿날 자네가 반죽을 시작하자, 반죽통이 넘칠 정도로 반죽이 커져 20~30파운드짜리 빵을 10개나 구울 수 있었다.
하루는 지하실에 보관한 포도주 통이 새는 바람에 통이 빈 걸 자네와 빌리아 자매가 발견해 신부에게 알리자, 신부는 "포도주가 달아나는 걸 허락하신 분께서는 포도주가 돌아오게 하실 수도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자네와 빌리아는 지하실 바닥에 고인 포도주를 긁어모아 2단지밖에 되지 않는 적은 양을 빈 통에 부었는데, 평소에 마시던 것보다 더 좋은 포도주가 커다란 통을 가득 채웠다.
또 점심 때 신부가 호박 한 접시를 아이들에게 나눠주면서 조각을 너무 크게 썰자, 카타리나 라사늬는 "그러다 호박이 부족할지도 모른다"며 걱정했다. 하지만 신부는 아랑곳하지 않고 큼지막하게 썰었는데, 그렇게 해서 아이들에게 충분히 나눠주고도 접시에 호박이 조금 남기도 했다.
오병이어의 기적 외에도 치유와 관련된 기적 또한 부지기수로 많았다. 죽을 병에 걸린 사람을 일어나게 하는가 하면, 종양에 손을 대자 곧바로 종양이 사라졌고, 걷지 못하는 소년에게 "다음 날부터 걸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자 신부가 말한 그대로 이뤄지기도 했다. 그 중에서 증인들의 증명이 적힌 확인서도 있는데, 아래의 내용은 1859년 9월 8일에 몰냉 신부에게 송달된 확인서이다.
1859년 3월 27일, 우리, 즉 장 루이 샤나르 시장과 프랑수아 베르즈, 본당신부 장 프랑수아 줄리앙, 레지옹 도뇌르 훈장 수훈자 자크 드니즈, 장 롱바르, 벤자민 펠리시에 교장은 증언하고 확인하기를, 43세인 로사 에이스릭 부인이 1858년 7월부터 말하는 능력을 완전히 상실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르스 순례에서 돌아온 후 그녀는 온전히 신뢰받을 만한 남편의 확신에 의해 지난달 2번째의 9일 기도의 셋째 날인 23일 밤에 신비로운 방법으로 말하는 능력을 다시 얻었다는 것을 확신합니다. 아래 서명한 이들은 이 기적의 진실성에 대해서 확인합니다. 몽모랭 회의장에서 발표함.
5. 선종
1859년 7월 29일, 무려 17시간이나 고해성사를 집전한 비아네 신부는 사제관으로 돌아와 "저는 더 이상 못합니다." 하고 외친 뒤 쓰러졌다. 그리고 닷새 뒤인 8월 4일 새벽 2시에 73세의 나이로 선종하였다.[6] 마을 사람들은 무더운 날씨에 신부의 마지막을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지붕 위로 찬물을 부었고, 그가 숨을 거두자 마을 사람 전체가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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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아네 신부는 얼굴을 밀랍 마스크로 덮은 상태로 아르스 대성당에 안치되었다. 사실 아르스의 성당은 허름했지만, 비아네 신부가 자신의 소유물을 모두 포기하는 대신 성당을 예쁘게 꾸미는 데에 열성적이어서 보수도 많이 되고, 규모도 커졌다고. 지금도 아르스 성당에 가면 유리관에 모셔진 비안네 신부의 부패하지 않은 유해를 볼 수 있다.
비아네 신부는 1874년 10월 3일 교황 비오 9세에 의해 가경자가, 이어 1905년 1월 8일 교황 비오 10세에 의해 복자가, 1925년 5월 31일 교황 비오 11세에 의해 성인이 되었다.
우리나라에 비아네 신부의 성유물의 일부가 보관되어 있다. 가로 세로 2cm의 작은 옷 조각으로,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출생지인 충청남도 당진시의 솔뫼성지(천주교 대전교구)에 모셔져 있다.
[1] 머리카락 일부를 잘라내는 것. 요즘에는 하지 않는다. 1972년에 교황 바오로 6세의 명령으로 폐지했기 때문이다. 김수환 추기경도 삭발례를 할때 매우 기뻤다고 한다. [2] 중ㆍ고등학교 과정. 한국 가톨릭에도 옛날에는 소신학교(성신중ㆍ고등학교)가 있었다. 연세 지긋하신 신부님들을 보면, 중ㆍ고등학교까지도 소신학교를 졸업하신 분들이 많다. 그러나 성신중에 의해 성신고도 1982년 폐교되었고, 대신 예비 신학생 모임이 생겼다. 가톨릭 신학대학(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신부가 되려는 사람은, 예비 신학생 모임에 최소 1년은 출석해야 한다. 각 교구마다 성소국이 있고, 중등부ㆍ고등부ㆍ일반부로 나뉘어져 있어, 사제직을 지망하는 남학생들과 남자 청년들을 관리한다. 2010년 가톨릭계 남학교인 서울 동성고등학교에서는 예비 신학생 학급을 만들어 기숙사 생활을 시키고 기초 신학과 어학을 가르치는 등, 부분적으로 소신학교를 부활시켰다.[3] 대학ㆍ대학원 과정.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대신학교를 졸업해야 한다. 한국 가톨릭에는 6개의 대신학교가 있다.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수원가톨릭대학교, 인천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대전가톨릭대학교, 대구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 광주가톨릭대학교인데, 과정은 거의 대동소이하므로 자세한 것은 성신교정 항목 참조.[4] 2005년에 KBS에서 제작한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신학생들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원과 하루 - 150년 만의 공개, 가톨릭 신학교>에서도 당시 2학년생이었던 김익호 욥 신부(2014년 사제서품, 천주교 의정부교구)의 책상에 붙은 표어로 등장한다.[5] 맹상수 작가는 석기소년 또로의 작가로 내친구들에서는 다른 성인의 일대기인 '''몰로카이 섬의 다미안 신부''', '''성모님의 기사 콜베'''를 연재했다. 참고로 몰로카이 섬의 다미안 신부, 아르스의 비안네 신부, 성모님의 기사 콜베 세 작품 모두 아내 손옥희가 스토리를 담당했다.[6] 격무에 시달리고도(고해성사는 상당히 고된 업무 중에 하나이다.) 그 당시 기준으로 70을 넘겼으면 상당히 오래 산 것이다. 그 당시의 수명을 생각해 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