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산4구역 철거현장 화재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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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요약도'''
'''사고 일자'''
2009년 1월 20일 07시 10분경(UTC+9)
'''사고 유형'''
화재
'''사고 지점'''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 옥상
'''부상자'''
22~24명[1]
'''사망자'''
7명[2]
1. 개요
2. 배경 및 전개
2.1. 관련 논쟁
3. 용산 참사 그 이후
4. 관련 인물/단체
5. 관련 작품
6. 둘러보기


1. 개요


2009년 1월 20일 서울특별시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에서 발생한 화재사건.
단순한 화재사건이라면 사회적으로 큰 문제가 되지 않았었겠지만, 철거민과 전국철거민연합 회원들이 재개발 보상문제와 관련하여 해당 건물에서 농성 중이었고, 경찰의 진압에 철거민들이 화염병과 새총형 투석기 등 각종 무기로 저항하는 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6명(철거민 2명, 전철연회원 3명, 경찰 1명)이 사망하고, 24명이 부상을 입는 대참사가 벌어졌다. 이후 병원에서 치료받던 중상자 1명이 사망하면서 사망자는 7명으로 늘었다.
이후 이 참사의 책임소재와 관련하여 '불법 과격시위에 대한 적법한 대응'이라는 주장과 '과잉진압'이라는 주장이 부딪히며, 당시 논란이 벌어졌다.

2. 배경 및 전개


2006년 용산 4구역에서 총 30조원에 달하는 뉴타운이라는 재개발사업이 추진되었다.
2007년 주거세입자나 임차상인에 대한 보상문제[3][4]가 불거졌고, 생존권 보장과 관련한 시위가 벌어졌다.
세입자의 87%가 이미 협상 후 떠난 상태였으며, 당시 시위로 구속자 28명 가운데 21명이 전철연 소속으로 실제 거주지 세입자는 7명 뿐이었다. 사망자 5명 가운데서도 거주지 세입자는 2명, 전철연은 3명이었다. 또한 재개발 사실이 확정된 이후 들어온 전철연측 세입자가 20명이었으며, 철거 확정 지역이니 사실상의 권리금은 존재하지 않았다. 보증금 또한 세입자들의 주장과는 달랐는데, 보증금 8천만원이라고 주장한 집은 2004년에 5천만원, 2006년 재계약 때 2천3백만원이었다. 5천만원의 보상금을 제시받았다는 주장도 사실과 다르며, 실제로는 8천만원 이상의 보상금을 제시받았으며, 이 와중에도 전철연측 세입자들은 2천만원 이상의 임대료가 체납되고 있는 상태였다. 추가로 임대차계약서에는 철거가 시작되면 바로 가게를 비우고, 수리를 하지 말며, 굳이 한다면 그 비용을 청구하지 않는다는 특약 조항과 각서까지 작성했다. 철거될 가게인걸 뻔히 알고 들어와선 주인이 말리는데도 굳이 수리를 한 저의는? 이것이 재개발지구에서 보상금을 노리고 빈번하게 행해지는 "알박기"라는 행위이다.
2008년 용산 제4구역 도심 재개발 사업과 관련하여 보상 내용에 반발하는 상가 세입자 26세대가 남아 2008년 4월 철거대책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겨울부터 강제철거가 시작되었고, 아직 각종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철거민들은 농성에 돌입했다. 서울시는 '동절기 철거 금지' 원칙을 밝혔지만, 법원과 경찰은 응하지 않았고 2009년 2월 착공을 목표로 강제철거가 시작됐다.
2009년 철거대책위원회 회원들은 투쟁비용을 마련하고 화염병·염산병을 제조한 뒤 전국철거민연합회 소속 회원들과 함께 2009년 1월 19일 새벽 3시경 용산 남일당 건물을 불법으로 점거하였다. 이들은 이주대책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농성을 벌이며 경찰과 행인, 차량 등을 상대로 화염병을 투척하였다. 경찰은 건물 주변 곳곳에 화재가 발생하는 등 상황이 심각해지자 관련자 대화 주선을 통해 평화적인 해결을 모색하였으나 농성자들은 장기 투쟁을 공언하고 경찰력 철수를 주장하면서 대화를 거부하였다. 이후 경찰은 1월 20일 6시 25분 경찰 특공대를 투입해 불법 농성을 종료시키고 27명을 검거하였으나 진압이 시작되고 농성자들이 저항하는 과정에서 화염병으로 인한 화재가 발생하였으며[5] 경찰관 1명을 포함해 6명이 사망하고 25명이 부상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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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지 출처)
1월 20일 오후 용산역 앞과 용산참사 현장 앞 도로에서, 용산 참사에 대한 항의를 목적으로 한 촛불집회가 벌어졌다. 시위에는 전국철거민연합 회원 및 시민 등 1000여명이 몰렸다. 경찰은 물대포 등으로 진압하였고, 일부 시위대의 투석전이 벌어지기도 했다. 시위대는 다음날 새벽에 자진해산했다. 추모제 및 촛불집회는 서울이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벌어졌다.
1월 22일 '용산참사 무엇이 문제인가'라는 제목으로 100분 토론이 진행되었다.
1월 28일 100분 토론 시청자투표 관련, 경찰청에서 경찰들을 대상으로 투표 참가를 독려하는 지시를 내렸다는 것이 밝혀지면서, 논란이 벌어졌다. #
1월 31일 철거대책위원회 회원 등 700명은 1월 31일 14시부터 서울역 광장에서 사전 집회를 마치고 영정 차량 5대를 앞세우며 청계광장으로 진출하려 했고 경찰은 남측광장 끝에서 차벽으로 이를 제지하였다.저녁이 되자 집회 참가자는 1,500명으로 늘었고 예금보험공사 앞에서 열린 ‘제2차 범국민 추모대회’에 참석한 후 전 차로를 점거한 채 명동 방향으로 가두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경찰 버스 타이어와 유리창이 파손되었고 차로점거 차단 근무를 하던 경찰 부대원을 폭행한 시위대 5명이 검거되었다.
2월 1일 청계천에서 열린 용산참사 추모집회에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등 야당 대표인사들이 참가하여 경찰의 강제진압을 규탄했다. 이에 대하여 여당인 한나라당은 연초의 국회 폭력사태의 연장선상에 있는 행위라면서 야당을 비난했다.
2월 2일 임시국회가 개회했다. 야당은 이를 '용산국회'를 규정하여 '용산참사 진상 규명' 에 초점을 맞추었고, 여당은 '경제국회'로 규정하여 이에 반발하였으며 검찰은 '경찰의 과잉진압'에 대해 무혐의로 보고 '시위대의 화염병'이 화재의 원인이라고 잠정 결론을 내렸다.
2월 3일 오전 희생자 유가족들은 검찰 수사와 관련하여 검찰청을 항의 방문, 검찰 청사 내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관련 기사 이 날 PD수첩에서 '용산 참사, 그들은 왜 망루에 올랐을까?'라는 제목으로 용산참사의 원인을 조망했다.
2월 8일 용산참사 변호인단은 국민참여재판을 신청했다.
2월 9일 검찰의 최종 수사결과가 발표되었다. 원래는 5일에 발표할 예정이었지만, 보강수사를 위해 연기되었다. 최종 수사결과, 경찰 진압은 무혐의로 결론내려졌으며, 용역업체 및 철거민 20여명이 기소되었다.
2월 11일 청와대가 용산참사를 무마하기 위하여 연쇄 살인 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그 전부터 끊임없이 제기되었던 의혹이었으나, 이 날 이를 지시하는 해당 이메일이 공개되었다. 이에 대해 청와대는 그러한 지침을 내린 바 없다고 부인하다가, 홍보관 개인이 저지른 일이라고 밝혔다.
2월 20일 용산참사 변호인단이 검찰에게 수사기록 열람을 요청했지만, 검찰이 거부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에 따라 사건 은폐 의혹이 제기되었으나, 검찰은 아직 공범의 기소 절차가 남았기 때문에 수사기록 공개를 미룬 것이라고 해명했다.
3월 2일 검찰은 국민참여재판 신청에 대해, 재판 절차가 이중으로 이루어지는 등의 문제로 부적절하다며, '반대'의견을 표명했다. 관련 기사
3월 26일 법원은 용산참사 재판을 국민참여재판으로 하지 않겠다고 결정내렸다. 증인이 너무 많아 재판이 장기간 소요되는 등의 문제로 국민참여재판이 부적절하다는 것.
10월 28일 서울중앙지법은 기소된 농성자 9명 중 7명에 대하여 징역 5~6년형을, 2명은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관련하여 용산참사 282일 사건일지.
11월 22일 국제 엠네스티의 아이린 칸 사무총장이 용산참사현장과 유족들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24일 기자회견에서 한국인권상황이 우려된다고 언급했다.
12월 30일 용산참사 관련 합의안이 극적으로 타결되었다.
한편, 상기했던 대로 피고측에서 수사기록을 요구했지만 검찰측에서 공개를 거부하자 피고측은 법원에 관련 서류의 열람과 등사를 허용해달라 요청했다. 법원은 수사기록 확인을 허가했지만 검찰측은 법원의 허가마저도 무시했다. 검찰의 피고측에 대한 방어권 침해 및 법원 명령에 대한 무시에 대해 헌법소원이 제기되었으며, 2010년 헌법재판소는 피고측의 손을 들어주면서 이를 위헌으로 판결했다. 기사헌법재판소 2009헌마257

2.1. 관련 논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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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가장 큰 논쟁은 화재의 원인이었다. 화재로 인한 사망자는 모두 건물 옥상에 설치된 망루가 불길에 휩싸이면서 발생했기 때문이다.
당시 시위대는 미리 화염병을 준비하고 있었으며[6], 이유는 알 수 없으나 망루와 옥상에는 시너가 쏟겨져 있었다.[7]
이에 따라 경찰 측은 사건 직후부터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의해서 화재가 발생했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부상을 당한 특공대원도 '시위대가 던진 화염병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고 증언했다. 또한 화재 원인 및 과잉 진압에 대한 논란이 일자, 서울경찰청은 '철거민들의 불법농성에 대한 동영상'을 게재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후 공판에서 진압 작전에 참여한 경찰특공대원이 진압 당시 화염병 던지는 것을 눈으로 보진 못했으며, 유리병 깨지는 소리가 들리고 불이 올라 화염병으로 생각한 것이라고 증언하면서 화염병 투척 여부가 논란이 되었다.
이에 대하여 철거민들은 '경찰이 망루 진입을 위해 철판을 전기톱으로 뜯던 중 튄 불꽃'이 바닥에 뿌려진 신나와 만나 화재가 발생되었다고 주장했다. 특히 철거민들은 경찰의 물대포로 인하여 화염병의 심지가 물에 젖어 불을 붙일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발화 시점'과 ' 실제 화재가 발생한 시점'간의 시차를 설명하지 못한다. 화재는 이후 진압작전이 한창 벌어지는 가운데 발생했으며, 만약 발화의 원인이 전기톱의 불꽃이었다면, 화재는 진압작전 이전에 발생했어야 했다. 화재 발생시점과 경찰 진입시점을 비교해 보면 전기톱에 의한 화재는 시간상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검찰이 발표한 최초 수사 결과는 화재의 원인을 '화염병'으로 잠정 결론을 내렸고, 이에 따라 시위를 주도한 자들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이는 시위대가 미리 화염병을 준비한 것에 대한 책임이었다.
하지만 최초 수사 결과 발표 당시 검찰은 시위대의 투척에 의해 발생한 것인지, 시위대가 실수로 떨어뜨린 것인지 등에 대해서는 '보다 정확한 조사가 필요하다.'라고 유보했다.[8]
이후 화재의 원인은 '화염병'으로 잠정 결론이 난 가운데, 책임소재에 대한 논란이 빚어졌다.
  • 시위대가 경찰을 향해 투척한 화염병이 화재의 원인이다.
  • 경찰을 피해 시위대가 망루 위로 도망치던 가운데 '화염병'이 떨어졌다.
  • 망루 안에서 밖으로 던진 화염병이 시너가 뿌려져 있던 옥상 바닥에 떨어져 불이 붙었고, 물대포가 불길을 망루 쪽으로 돌려 화재가 커졌다.[9][10]
물론 화염병이 원인이 아니라는 주장도 끊임없이 제기되었다.
  • 망루 입구에 콘센트와 배전기, 발전기들이 존재했다는 점을 들어 누전이나 합선이 화재의 원인이 되었다는 것. 현장 검증 과정에서 이러한 가능성이 제시되었다.
  • 환기가 제대로 되지 않은 망루 안에 다량의 신나가 뿌려져 있었고, 이로 인해 유증기가 발생하여 화재가 일어났는 것. 이에 대한 근거로 내세우는 것은 당시 '정체불명의 가스'로 환각, 구토 등을 호소한 철거민들과 경찰특공대가 있었다는 점이다. 단, 정말로 그랬다면 사후 검진 등으로 확정이 났을 텐데 그러지 않았다.
최종적으로 검찰은 '''농성자들이 진입을 시도하는 경찰특공대를 향해 시너를 뿌리고 화염병을 던진 것'''을 '''화재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았으며,[11] 1심 재판부는 화재원인에 대해 '''"농성자들이 망루 내부로 진입한 경찰특공대들에게 불이 붙은 화염병을 투척해 망루 내부 3층 계단 부근에 불을 내 망루 안의 세녹스의 유증기에 불이 옮겨 붙어 망루 전체에 화재가 발생했다"'''며 경찰특공대가 사용한 전동그라인더가 화재의 원인이라는 변호인측의 주장을 배척했다.[12] 이는 항소심상고심에서도 그대로 인정되었다.
이외에도 참사 당시 중요하게 다루어졌던 논쟁으로는 진짜 철거민이 아닌 외부세력(전문시위조직)의 개입 문제였다. 이는 당시 사망한 농성자 5명 가운데 3명이 진짜 용산4구역 철거민과는 무관한 전국철거민연합 회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발생했다. 이에 따라 용산 철거민들의 시위가 과격화된 것이 이들이 뒤에서 사주한 것이 아니냐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논란이 일었다. 당시 경찰과 여당 측에서는 이들 '범죄단체'의 영향으로 시위가 '도심테러' 성격이 되었고 이에 따라 정당하게 진압이 이루어졌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야당 측에서는 사태 본질을 외면하고 과잉진압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니냐고 주장했다.
또한 진압작전에 철거용역을 투입한 것에 대하여 논란이 일었다. 당시 경찰측에서는 "용역이 투입됐더라도 처벌 근거가 없고, 중요한 사안으로 보지 않는다”라고 밝혔으나, 2009년 2월 3일자 PD수첩에서 진압작전 당시 철거용역과 경찰이 합동작전을 벌인 정황과 철거용역이 철거민들에게 물대포를 발사했다는 동영상이 공개되었다. 이로 인하여 경찰에 대한 비난 여론과 과잉진압 의혹이 높아졌다. # 결국 경찰은 수사보강을 위하여 수사결과 발표를 5일에서 9일로 늦추었다. 이후 경찰에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한 후, 용역업체 직원들을 기소하자 한겨레 등 일부 언론에서 꼬리 자르기 의혹을 제기했다.
한편 이 참사에 대한 논란이 커진 원인에는 경찰이 사망한 것도 있지만, 그 사망한 경찰이 일반 경찰이 아닌 경찰특공대란 점도 있었다. 경찰특공대는 원래 중범죄 진압 및 체포를 위한 전문 훈련을 받으므로 투입 자체는 문제가 아닐 수도 있었다. 하지만 경찰특공대가 대테러부대 임무를 맡은 정예부대란 이미지를 가진 특성상 시위대를 전문 테러범으로 여기고 과잉 진압을 한게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게 된 것이다.[13] 사실 과거에도 수차례 경찰특공대를 투입하여 시위나 파업을 진압한 적이 있어 공권력 남용 논란이 있었는데 이번에 사망자가 나오면서 크게 불거진 것.
다만 이 시위가 도심 테러 성격을 보였던 것을 부정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 왜곡이다. 해당 사건의 농성자들은 행인과 차량들이 지나다니는 도심 한복판에서 화염병을 무분별하게 투척하였으며, 인근 건물에서 투척된 화염병으로 인해 화재가 발생하기까지 했다. 비극적인 사고로 끝났다고 해서 근처에서 대기 중이던 경찰력은 물론 인근 주민들까지 언제라도 무고한 희생자로 만들 수 있었던 행동들을 묵과해선 안 될 것이다.

3. 용산 참사 그 이후



3.1. 2016년 이전


이 사건 이후 '상가권리금 문제'나 '강제 퇴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하고자 시도를 하긴 했지만 여전히 제정되지 않고 있다.[14]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박근혜 대통령은 '정부차원에서의 용산 참사 진상 조사위원회 설치가 필요하다.'라는 '의견'을 피력한 바 있었다. 하지만 공약으로 내걸지는 않았으며, 정부 차원의 진상 조사위원회는 구성된 적이 없다.
2015년 서울시에서는 '용산사고 재발방지를 위해 기록화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진상조사단을 구성하여 새로이 진상을 규명하기로 했다. 이 기록물은 용산참사 7주년인 2016년 1월에 발간될 예정이다. 관련 기사
하지만 보고서 발표를 연기하였으며, 아직 작성 중에 있다. 방대한 양으로 인하여 이를 정리하고 작성하는 데에 시간이 걸린다는 것.
짤방 다 죽게 생겼다. 이놈들아가 이 사태에서 나온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당시 상황을 보도하던 MBC 뉴스데스크의 리포트에서 철거민의 외침이다.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인 김석기는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 당시 무소속[15]으로 경상북도 경주시 선거구에 출마하여 낙선하였다. 당시 용산 참사의 희생자 유가족들이 경주까지 내려가 낙선운동을 벌였다.
한편 유가족들은 2013년 공항공사 사장 후보로 김석기가 거론되자, 이를 반대하는 긴급기자회견을 열기도 했다.
화재 가능성이 높은 장소에서 위험한 작전을 펼쳤다는 점에서 20년 전인 1989년 동의대 사태와 공통점이 많다.

3.2. 2016년


2016년 4월, '용산4구역 정비계획 변경안’이 통과되면서, 주거 및 공원지구로 재개발 중이다. # 한편 서울시는 재개발과 함께 이전 세입자와 용산참사 사망자에 대한 위로·보상 합의안도 이행하겠다고 밝혔다.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곳은 현재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가 건축중이다.
그러던 중 김석기 당시 서울지방경찰청장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누리당 후보로 다시 경주시에 출마하였는데, 이때에도 희생자 유가족들이 경주로 내려가 낙선운동을 벌였음에도 44.97%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그리고 용산참사 변호인인 권영국씨가 무소속으로 경주시에 출마를 했으나 낙선했다.
용산참사가 벌어졌던 국제빌딩 용산4구역은 용산참사 사건으로 인해 건설사가 발을 빼면서 사업이 중단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효성그룹과 건설 계약에 성공하면서 2016년 11월 28일 기공식을 가지고 사업이 재개되었다. 2020년 경까지 아파트오피스텔, 공원 등을 건립하는 복합단지로 조성할 예정이다. 기사 서울 지하철 4호선 신용산역 바로 앞으로 입지는 뛰어난 편이었으나, 용산 참사 사건으로 인해 정치적 부담을 진 건설사들이 섣불리 뛰어들지 않았는데, 2015년 말에 와서 효성그룹이 사업자로 나서서 조합과 재계약에 성공한 것이다.

3.3. 2017년


연합뉴스에 따르면 2017년 12월 29일 용산참사 사건 철거민 중 현재 재판을 받는 1명을 제외한 25명이 특별사면되었다.
2017년 7월 5일 고급 주상복합 아파트인 용산 센트럴파크 해링턴 스퀘어로 일반 분양이 완료되었으며, 2020년 8월 입주 예정이다.

3.4. 2018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각종 진상규명의 일환으로 실시된 경찰청 진상 조사위에서 "경찰지휘부가 안전 대책이 미비했지만, 진압을 강행했다"며 "(진압과정에서) 순직한 경찰특공대원과 사망한 철거민 등에게 사과를 하고, 유사사건 재발방지를 위한 제도 개선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3.5. 2019년


1월 6일 MBC의 탐사기획 스트레이트에서 용산참사를 다뤘다. 방송중에는 뜻밖에도 삼성이란 이름이 등장한다. 삼성물산이 철거업체를 감독했었단 것이 밝혀졌다. 이에 대해서 삼성물산은 감독한단 것은 진행 상황을 보고받는 것일 뿐, 직접 관여하는 것이 아니라 해명했다고 한다. [스트레이트 34회 Full] 경찰특공대는 왜 용산으로 갔나?
1월 17일 유가족들은 지난 6일 방영된 MBC '스트레이트' 인터뷰에서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금 똑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현재 경찰도 똑같은 그런 원칙을 가지고 하지 않을까"라고 답해 공분을 샀고, 이에 항의했다. "철거민 계속 죽어가는데... 김석기는 국회 활보"
1월 19일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용산참사를 다뤘다, 그 당시 사망한 경찰청 소속 김남훈 경사의 아버님 김권찬씨가 직접 출연하여 "대체 작전 받아서 움직이는 아들이 왜 아들만 1층에서 죽었는지 나에게는 숙제다."라며 괴로운 심정을 토로했다.[16] 그알은 김석기 자유한국당 의원을 찾아가서 이에 관하여 물었지만 김석기 의원은 "경찰의 법 집행은 정당했다고 믿고 있다. 민간인 조사위원들의 판단이 대법원 판단 위에 있냐"라며 이미 대법원의 판단으로 끝난 건이란 입장을 밝혔다. ‘그것이 알고싶다’ 용산참사와 김석기, 전과자가 된 철거민들(종합) 하지만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는 당시 경찰이었던 당사자까지 나와 그 당시 경찰이 이상했단 식의 진술, 그리고 현 민갑룡 경찰청장은 경찰의 진정성이 인정되었을 때 사과를 하겠단 입장까지 밝힌 상황이다. 민갑룡 경찰청장 "'용산참사' 사과, 진정성 인정받을 때 할것" 더불어 그알에서는 용산참사에 관련해서 경찰에 유리한 쪽으로 몰아가기 위한 댓글부대가 있었단 것까지 내보냈다. 강호순 사건을 활용해 촛불을 차단하라는 지시 메일까지 발견됐다. # 이에 관해서 윗선은 개인적인 행동으로 마무리를 지었다고 한다. ‘그알’ 용산참사 덮기 시작, 댓글부대 동원+강호순 사건 활용 지시
1월 21일 김석기 의원이 최근 용산참사를 다룬 탐사기획 스트레이트, 그것이 알고 싶다가 경찰이 잘못되었단 식으로 일방적 편파방송을 했다며 기자회견을 열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자신은 정당한 판단하에 명령을 내렸을 뿐이며 최근 민노총 관련 폭력 사태가 벌어져도 경찰이 지켜보는 한심한 모습이 현 정권 탓이라고까지 했다. 당연히 이에 대해 유가족들은 성명을 내고 그게 정당하단 것은 또 다시 시민과 경찰이 죽어도 된단 소리냐며 비판하고는 그 당시 그가 지키려고 한 것은 시민도, 경찰도 아닌 경찰청장으로 내정된 자신의 안위와 범죄자 이명박 정권의 안위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해당 기사
이에 대하여 한겨레는 사설로 [사설] 최소한의 양심마저 저버린 김석기의 '적반하장' 김석기 의원을 비판했다.
1월 31일 민주당 박주민 의원이 박주민, '용산참사 진압 책임자' 김석기 징계안 발의 경찰청이 공식적으로 위법성이 있단 것을 공개했음에도 불구하고 유가족들을 상처입히는 김석기 의원에 대해 국회의원으로서의 자질이 의심스러웠다며 징계안을 발의했다고 밝혔다.

3.6. 2020년


김석기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기호 2번으로 경주시에 다시 출마해 당선되었다. 권영국 변호사는 이번에는 정의당 소속으로 경주에 출마해 김석기 의원과 대결했으나 낙선했다.

4. 관련 인물/단체


  • 김석기: 용산 참사 당시 무리한 진압을 명령한 당사자이자 용산 참사 이후 경찰청 수사국을 통해 투표를 독려하였다.
  • 전국철거민연합: 용산 참사 당시 강경한 농성을 주도한 단체. 2020년 현재도 각종 이권사업에서 불법점거 및 시위를 계속하고있다.
  • 백동산: 용산 참사 당시 용산경찰서장. 정년퇴임 이후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취재진의 용산 참사 인터뷰 요청에 "얘기를 해야 할 것 아니야 저 새끼들이 왔다고, 저런 새끼들 만나서 할 얘기가 뭐가 있어! 저 새끼들 내가 쥐어 팼으면 어쩔 거야 그 순간에!"라는 폭언을 했다. 본인도 어지간히 시달린 듯.

5. 관련 작품


  • 영화
    • 두 개의 문 - 사건 당시와 재판을 취재한 다큐멘터리.
    • 공동정범 - 사건 이후 투옥되어었던 5인이 특별사면 된 후 용산파와 연대파로 나뉘어 서로 반목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다큐멘터리.
    • 소수의견 - 사건에 대해 직접 다룬다기 보다는 영향을 받았다고 보아야한다. 원작소설이 용산참사 이전에 집필을 시작했다고 한다.
    • 신과함께-인과 연 - 원작 신과함께의 이승편을 다룬 영화. 원작 자체가 용산참사에서 비롯된 철거, 재개발 문제에 영향을 받고 만들어져 이러한 요소에 영향을 간접적으로 받게되었다. 다만 시대상이 달라 원작처럼 직접적으로 나오진 않는다.
    • 염력 - 강제 철거에 맞서는 철거민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연상호 감독이 사회 문제를 반영했다고 한다. 다만 해당 작품은 초능력 설정과 사회 고발이라는 두 메시지 중 어느 하나도 제대로 전달되지 못했다는 혹평을 받았다.
  • 만화
    • 신과함께 - 이승편 마지막 편에서 간접적으로 언급된다. 철거 시위 현장에서 저승차사가 6명이 사망 할 것을 생사부를 보고 한탄하는 장면으로 언급된다. 이승편 자체가 재개발, 철거의 문제를 다루고 있어 용산참사의 영향을 받은 것이 여실히 보여진다.
    • 내가 살던 용산 - 여러 만화가들이 모여 생존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재구성한 만화.
    • 용산개 방실이 - 용산 참사 희생자인 양회성 씨 가족의 요크셔테리어 방실이가 양회성 씨 사후 식음을 전폐하다가 세상을 떠난 실화를 바탕으로 그린 만화.
  • 연극
    • 리스트 - 극단 '날'이 제작한 연극
    • 용산, 의자들 - 이오네스코의 의자들을 각색한 연극으로 고립의 장소인 망루에서 밤을 지내던 부부가 서울 산동네에서 재개발로 철거민 신세가 된 자신들을 위로하고자 사회적 인사들을 초청해 메시지를 전한다는 줄거리로 구성되었다.
    • 여기,사람이 있다
    • 어머니 날 낳으시고 - 인칭 교차극으로 진행되는 연극
    • 타인의 고통
>그 경험은 방사능 피폭과 비슷해요, 라고 고문 생존자가 말하는 인터뷰를 읽었다. 근육에 침착된 방사성 물질이 수십년간 몸 속에 머무르며 염색체를 변형시킨다. 세포으로 만들어 생명을 공격한다. 피폭된 자가 죽는다 해도, 몸을 태워 뼈만 남긴다 해도 그 물질이 사라지지 않는다.
>2009년 1월 새벽, 용산에서 망루가 불타는 영상을 보다가 나도 모르게 불쑥 중얼거렸던 것을 기억한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아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피폭이 아직 끝나지 않았다. 광주가 수없이 되태어나 살해되었다. 덧나고 폭발하며 피투성이로 재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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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사 마다 22~24명으로 인원수가 다르다.[2] 6명은 현장에서 사망, 나머지 1명은 병원에서 사망하였다.[3] 주거세입자에게는 4개월분 주거이전비가 지급되었으며, 임차상인에게는 3개월분 휴업보상비만 지급될 뿐, 권리금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4] 권리금에 대한 보상은 이루어지지 않았던것이 첫째로 이 지역에는 상권에 비해 권리금이 없었다. 이미 10여년 전부터 재개발지구로 묶여있었고 상가 주인들도 그것때문에 임대료도 저렴하게 내놨었다. 권리금따위는 붙일 여지도 없었다.(상식적으로 언제 재개발될지 모르는데 권리금이라는게 말이 되겠는가?) 게다가 권리금은 세입자들끼리 주고 받는 돈이지 상가주인과는 관계없다. 당시 세입자들의 주장도 이정도 월세로는 이정도 상권에 들어갈수 없다는 것이었다.[5] 대법, 용산참사 철거민 9명 유죄 확정 재판부는 화재 원인에 대해서 “피고인 등이 불붙은 화염병을 던져 3층 계단 부근에 뿌려져 있던 세녹스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고 인정한 원심에 대해서도 위법을 발견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6] 이미 그 전부터 도로에 화염병을 던지고 있었다. 심지어 시내버스가 지나가고 있는데 그 주위에 화염병을 던지는 영상이 방송된 바 있다.[7] 지금까지도 원인불명임.[8] 시위대가 그냥 일부러 투척한 것이라면 방화 등으로 인한 중형이 구형될 수 있다. 하지만 다른 원인에 의한 '미필적 고의'이거나, 실수로 떨어뜨린 것이라면 최소한 방화 혐의는 없다.[9] 이와 관련해서 인화물질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고 무리하게 물대포 진압을 한 경찰에 대한 비판이 존재한다. 즉, 신나가 바닥에 뿌려져 있다는 사실을 경찰 측에서 인지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화재에 대한 대비 없이 무리한 진압작전을 펴서 벌어진 일이라는 주장이다.[10] 다만 당시 무전을 들어보면 경찰은 화재가 발생하자 곧바로 물대포 진압을 중지하고 진화를 위해 물대포를 화재현장으로 돌렸다. [11] ‘용산참사’ 농성자들 징역 8~5년 구형 [12] 용산참사 이충연 위원장 등 7명 징역 5년~6년 실형 [13] 특히 이와 관련해서 진상조사단에 있었던 모 정치인이 철거민의 행동에 대하여 '도심 테러적인 성격이 있다'라고 언급하면서 논란을 빚기도 했다. 관련 기사[14] 권리금은 상가건물 임대차보호법에서 다루고 있다.[15] 새누리당으로 출마하고자 하였으나 비난여론으로 인하여 공천받지 못했다.[16] 여기서 김권찬씨는 용산참사의 유가족들 또한 괴로운 분들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