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목 제국

 

1. 개요
2. 특징
3. 한계
3.1. 전투방식: 공성전에 취약
3.1.1. 반론
3.2. 문화발전(학문, 지식) 불가능
3.3. 정치의 불안정
3.4. 정체성 상실
3.5. 기술발전의 둔화: 기병 전투력의 저하
3.6. 대체 전투력(기병)의 등장
3.7. 정주민화
4. 유목 제국 목록
5. 관련작품

Nomadic empire

1. 개요


유목민족이 세운 나라. 역사상 최초의 기마 유목민족은 스키타이족이라고 알려져 있다.[1]

2. 특징


기원전 8세기경부터 준가르가 멸망한 서기 18세기 무렵까지 이들은 동서양을 통틀어 최강의 무력 집단이었다.
이는 기병이라는 병종이 가진 특징 때문이었다. 기병은 강한 충격력, 고기동성을 바탕으로 중세, 심지어 전쟁에 화약을 보편적으로 사용했던 근세 및 근대 초기까지도 강한 전투력을 뽐낸 무적의 병종이었다. 그런 반면 기마술의 훈련은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생후 바로 기마술과 궁술(수렵), 투창술, 독도법[2] 등의 당시 전쟁과 매우 밀접했던 분야의 기술을 갈고 닦을 수밖에 없던 유목민들의 환경이 그들을 중근세 최강의 병사로 성장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해 유목민은 바로 기병, 그것도 중근세 전투기술에 매우 능한 정예 기병으로 삽시간에 전환될 수 있었다. 농사가 주업인 정주민들이 기마술과 궁술에 일부러 시간과 자원을 투자해서 배워야 하는것과 비교하면 유목민족은 처음부터 강력한 기병 전력을 갖추고 전쟁을 시작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는 말이다. 전투 인원의 대부분이 숙련된 기병인 장점을 이용한 스웜 전술 같은 강력한 전법들도 창안되어 유목민족은 당대 최강이 될 수 있었다.
흔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여진족과 그들이 세운 제국(, 동진국, )은 유목 제국으로 분류되지 않는데, 이들은 떠돌아다니는 유량-소요형 생활도 했고, 척박하긴 했지만 만주에서 농사도 짓고 어업, 어로도 병행하면서 정착한 상태에서 제한적으로 유목을 하며 생활하던 수렵/어렵 민족이였기 때문이다. 또한 같은 여진/만주족이라도 부족마다 생활사도 각양각색인 탓에 이들을 유목 제국으로 분류하는 것은 잘못된 분류이다. 오히려 유량생활 및 소요형 유목민(peripatetic)을 살짝띄는 반유목민 생활, 방목어로, 일부 야생식물(약초 등)들을 채집하는 것도 같이 했던 수렵채집사회 국가라고 봐야 한다. 굳이 보면 반유목민 국가로 볼 수도 있는 정도에 불과하다.[3]

3. 한계



3.1. 전투방식: 공성전에 취약


평원과 초원에서만 지내고, 주기적인 이동생활을 하며 기병 위주의 군대를 가지고 있다보니 전통적으로 기병의 역할이 크게 제한되는 공성전과 산악전, 해상전에 약했다. 특히 공성전에 약한 것이 치명적이었는데, 그 강하디 강했던 몽골 제국조차 남송이 방어를 굳히고 우주방어 태세로 나오자 40여 년간 전쟁을 해야 했으며, 자력으로 양양성을 못 뚫고 있다가 이슬람 기술자를 동원해 회회포까지 열심히 쏴대서 간신히 양양성을 함락시켰다.

3.1.1. 반론


유목 민족이 공성전에 약할지는 모르나, 유목 제국이 된 시점에서 그냥 말 타고 방목, 사냥을 하는 수준의 군대를 생각한다면 오판이다. 유목 민족 특유의 한계는 유목 제국 자신의 힘으로 복속시킨 정주민들의 공성기술을 이용해서 충분히 극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몽골 제국도 이런식으로 제대로 된 공성병기를 갖추었고, 오스만 제국 역시도 우르반 대포까지 동원하면서 악명 높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뚫어버렸던 사례가 있다.
몽골 제국이 남송을 상대로 40여년을 싸웠다 하는데, 착각하기 쉬운 점이 '''남송도 그 시기 세계 최강국이다.''' 군사력을 포함, 어떤 지표를 보건 몽골 제국을 제외하면 명백한 세계 최강국이며, 지형도 북송때와 달리 방어전에 적합하다. 그랬기에 몽골 제국 역시 총력을 동원, 정주민도 활용하여 공성병기 및 해군까지 동원해서야 간신히 뚫을 수 있었던 것이지, 유목민의 공성능력이 부족해서 질질 끌린게 아니다.* 어떤 의미로는 겨우 40여년 만에 뚫어낸게 대단하다고 볼 수 있을 정도다.
북송과 금나라가 연합하여 요를 멸망시킬 때에도 공성전에서 죽을 쑨 건 오히려 정주민족인 북송군이었다.

3.2. 문화발전(학문, 지식) 불가능


결정적으로는 자원 부족 때문에 테크를 탈 수가 없었다. 유목 문서를 참조해 보면 보다 자세히 알 수 있겠지만, 대다수 유목민족이 정주민족이 되지 못한 이유는 그들이 활동하던 지역이 스텝, 사막농업에 부적합한 곳이었기 때문이다.[4] 일반적으로 에너지는 생산자와 최종소비자의 간격이 짧을수록 전환 효율이 높다.

같은 크기의 땅이 있다고 가정할 경우.

유목민: 목초지의 풀(생산자) → 가축(1차 소비자) → 사람(최종 소비자)

정주민: 논밭의 곡식(생산자) → 사람(최종소비자)

각 단계에서 50%의 에너지 비효율이 발생한다고 가정하면 정주민은 50%, 유목민은 25%의 에너지만 얻을 수 있다.

거기에 더해 목초지의 풀보다 논밭의 곡식 쪽의 에너지 생산량(탄수화물)이 월등하다.[5]

위의 도식으로 인해 목축과 농업은 인구 부양력에서 월등한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다. 농업 쪽의 인구부양력이 월등히 좋고, 그 말은 잉여생산물도 많이 남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욕구계층이론과 같은 심리학만 봐도 알 수 있듯, 일반적으로 배고픔 등의 기초적 생리욕구가 달성되어야 보다 상위적 가치를 가진 것들(학문, 지식, 문화, 국민의식 등)이 발전하게 되는데, 목축을 기반으로 한 유목민들은 정주민에 비해 그럴 여지가 상당히 적었다는 말이다.
실제로 유목세력이 정주세력에게 결정적으로 밀리기 시작한 것이 흑사병과 화약무기 도입 이후다. 화약무기란 것이 총화기+화약으로 이뤄지는데, 이건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분야다. 가난한 야만인이 부유한 문명인에게 밀리는 분기점이 화약의 도입이고, 흑사병이 유라시아를 한번 휩쓸어버렸을 때, 정주세계는 인구가 대폭 감소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빠르게 복구해버렸다(오히려 인구감소로 개개인의 영양상태가 호전되었을 정도로! 개개인에겐 몰라도 전체적으로는 과잉인구를 한번 다이어트 해준 격이었다). 하지만 유목세계는 한번 줄어든 인구를 복구하는 데 몇 배의 시간이 걸렸고, 이것이 화약의 시대와 겹치면서, 빠르게 발전하는 정주세계를 따라잡을 기회를 영영 놓쳐버렸다.
또한 구술로 전달하기 힘든 수준의 지식을 후대로 전하기 위해서는 문서가 있어야 하고 이 지식이 지속적으로 발전하려면 도서관 같은 것도 필요해지는데 모든걸 들고 돌아다녀야 하는 유목민 입장에선 감당하기 힘든 비용이 된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유목민들이 나무위키 같은 데이터베이스를 인터넷으로 제공해야 하는데 서버는 트럭이 끌고 다니는 트레일러 속에다 데이터 센터를 만들어 이 속에다 넣어 싣고 다니면서 회선은 위성 인터넷 요금을 내고 쓰며 그 상태로 대륙을 횡단하며 서비스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기술적으로 불가능하지는 않겠지만 결국 품질과 비용 문제로 정주민의 방식을 따라갈 수가 없게 된다.

3.3. 정치의 불안정


학문이 발전하지 못하였다는 말은 세련된 교육학, 정치학 같은 과학, 경제 발전의 기반이 되는 학문이 없었다는 말로 풀이될 수 있는데, 이는 국가의 운영에 있어 매우 치명적인 문제가 되었다. 단적인 예로 몽골 제국은 과격한 환경주의자[6]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문명을 부수고 사람을 마구잡이로 죽이고 다녔다. 이는 정치학, 경제학에 지식이 있었다면 '인구는 국력'이라는 기초적 상식 아래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유교의 '장자 상속'이니 중세 유럽의 '살리카 법'이니 하는 것들은 문화를 쌓아올린 정주민들이 권력의 계승 과정에서 불필요한 소모를 줄이고 한정된 힘의 최대 집중화 방법에 대해 최대한 머리를 싸매고 고민한 결과물이다. 그러나 유목민족의 대부분은 힘있는 자가 최고인 '약육강식'부터 해서 균등 분배 같은 부족 단위로는 합리적일지 몰라도 제국을 다스리기에는 형편없는 권력 계승 방법을 버리지 못하였다. 약육강식의 부족제 때문에 왕위를 둘러싼 세력다툼이 걸핏하면 일어나 정치가 안정되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내분이 발생하여 이는 유목제국이 자멸하게 되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3.4. 정체성 상실


또한 학문적, 사상적 발전에서도 뒤쳐졌다. 물론 이들에게도 문화가 없던 것은 아니었지만 정주민들의 문화가 '거대 제국'의 유지를 통해 만들어진 문화였던 것과는 달리 유목민들의 문화는 소규모 집단의 경영에 특화된 문화였기 때문에 유목민들만의 지식으로는 유목 '제국'을 통치하는 것에는 분명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피정복민의 문화와 지식을 이용해야 하는 근본적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고, 이게 역으로 동화작용을 일으켜버린 것이다. 정주민들의 잉여 생산물은 정주민 지배계층에게는 다소 당연한 것이었으나, 매번 척박하게 살던 유목민들에게는 아닌 밤중에 떨어진 엄청난 부와 재보로 보일 수밖에 없었고, 가뜩이나 문화적으로 불리한 유목민들은 금세 정주민의 문화와 재력에 편승하여 유목민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사태가 발생했다.
종교의 영역에서도 이는 바로 드러났는데, 원래 유목민들이 대부분 본래 믿던 텡그리 신앙이란 것은 거의 구전설화, 민속신앙 수준으로 빈약했기에 어딜 정복하든 정복지의 종교에 바로 동화되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빠르게 잃는데에 일조했다. 근대에 종교가 집단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에 일반적인 문화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단걸 감안하면 사소한 문제가 아니었다.

3.5. 기술발전의 둔화: 기병 전투력의 저하


유목민 입장에서 정말로 심각했던 문제 중 하나로, 정주민이 기술발전테크를 타면서 무기가 발전할수록 병사 개인의 숙련도가 적게 필요한 현상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유목민들의 병력은 어쨌든 오랜 유목 생활, 고도의 기병훈련을 해야 양성할 수 있다. 그러나 정주민이 가진 화승총병, 포병은 어지간한 신참도 1~2년 정도 빡세게 훈련시키면 바로 유의미한 전투병으로 사용할 수 있다. 극단적 예시를 들면 논산훈련소 갓 나와서 현대 대한민국 기본 보병장비(자동소총 혹은 경기관총)를 갖춘 신병과 중세의 역전노장 배테랑 기병을 1:1로 붙이면 어떻게 되겠는가? 어지간해선 신병이 이긴다. 굳이 이렇게까지 가지 않아도 전열보병 시기만 봐도 차이는 확 벌어진다. 수년, 십수년의 전투경험으로 단련된 병사들이라고 해 봐야 제대로 훈련된 소수의 지휘관의 지휘 아래 징집된 지 1년도 안 된 병사들의 뿜어내는 화망에는 속절없이 갈려나갔다. 이 당시에는 이미 기병의 시대가 저물어가고 있었다.
테크의 저주는 규모의 경제와 맞물렸다. 농업은 갈수록 발전했다. 물론 목축도 발전한 것이 사실이나, 농업 자체가 목축에 비해 인구부양력이 월등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고, 현대의 고도로 발전된 낙농업조차 곡물 사료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있다. 이자가 1%붙었다 해도, 100조 원의 1%는 1조 원이고, 1000원의 1%는 10원이다. 이미 판돈부터가 너무 다른 상황이라 인구수 격차가 확연히 벌어지기 시작했다.
따라서 유목민 입장에서는 운동장이 너무 기울어진 것이다. 100명의 유목민 기병이 사망자 10명을 내고 2000명의 정주민 보병을 죽였다. 그런데 다음 날, 유목민 기병은 10명 보충되었는데, 정주민 보병은 5000명 보충되었다. 이미 승패는 물량에서 나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정주민 보병은 1년의 전투 훈련만 해도 되지만, 유목민 기병은 수년에 거친 전투 훈련을 해야하는 상황, 그렇다고 정주민에게 기병이 없느냐면 그것도 아니라 정주민의 경제력으로 찍어내면 물량으로 극복할 수 있었다. 그러다가 점차 정주민은 야포기관총을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유목민은 기병을 투입해야 하는 상황까지 겹쳐버리면 패배는 확정된 상황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문화적 측면에서 애초에 열세였는데, 전쟁에서조차 우위를 점하게 되지 못한 시점에서 유목제국은 명을 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기병의 우수함은 개활지에서 드러난다고 나무위키의 전쟁사 관련 문서마다 기술되어있긴 하지만 기관총은 기병과 유사한 지형적 상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병이 충격력으로 적들을 밀어내는 수준이라면 개활지의 기관총 진지는 그 시야에 들어가기만 하면 종류를 막론하고 척추동물은 살아있는게 불가능한 수준이라 기관총의 등장은 사실상 유목민식 기병 전술의 완벽한 사형선고였다고 볼 수 있다.
실제로도 19세기부터 유목제국들은 동네북 신세가 되어서 더이상 전쟁사의 주무대에 서지 못하고 변방으로 전락한다. 몽골만 해도 과거엔 중국의 모든 국력을 기울여 방어전을 펼쳤으나, 무기가 발달한 20세기엔 한낱 지방군벌에게 몽골 전체가 정복되었다.

3.6. 대체 전투력(기병)의 등장


또한 정주민이 작정하고 기병을 키우면 그 기술력과 생산력 때문에 유목민들은 또 한계를 겪게 된다. 단적인 예로 흉노에 시달리던 전한한무제 때에 이르러 수십만의 보병에 목초지를 증가시켜 10만 단위의 기병을 흉노와의 전쟁에 투입하여 정면으로 승부를 벌인 끝에 선우의 권력을 파괴해 유목민족들을 분열시켰고 나폴레옹 전쟁 당시 공포의 기병대장으로 알려진 조아킴 뮈라와 그 기병은 정주민족의 국가 프랑스에서 나온 군대이며, 역대 최강의 기병대 중 하나로 알려진 윙드 후사르 역시 폴란드의 정예기병이었다. 당장 말에게 먹일 사료도 없어서 방목하며 키운 유목민과 달리 정주민들은 농사를 짓고 남은 잉여 작물이나 여물도 있었고, 또는 아예 가축 사료로 쓰기 위해 재배한 귀리 같은 것도 있었다. 당연히 풀만 먹인 말과 사료를 먹인 말의 체격 차이는 안 봐도 비디오였고 때문에 유목민은 일시적인 동원력으론 정주민에게 앞설지 몰라도 정주민이 유목민의 씨를 말려버릴 작정으로 나갔다면 기병 전력에서도 현저히 밀리게 된다. 물론 유목 문서에도 나와있지만 이것도 약간 편견인데, 유목민들이라고 가난해서 중장기병을 키우지 못하는 건 아니다. 거란족이나 몽골 제국의 중장기병들 역시 무시무시한 명성을 떨쳤다. 본인들의 생산력이 낮아도 부유한 남의 자산을 털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런 사례는 정주민 국가들 중에서도 중앙집권이 자리잡아 효율적인 군 동원이 가능한 경우에 한하며, 유목제국 등이 평상시의 군사력에선 윗문단에서 정주민 국가들의 기술의 발전에 따른 무기의 발달을 보듯이 19세기 이전까지는 정주민 국가들을 압도하는건 맞으며 19세기 이후부터는 역전당했다고 할 수 있다

3.7. 정주민화


유목 제국들은 저마다 문화나 민족의 구성등에서 차이가 있긴 했지만, 한가지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것은 후기로 갈수록 유목민 비율이 줄어들고 정주민 비율이 높아진다는 것이었다. 그 이유에 대해선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지만 대표적인 이유는 정주하며 농사를 짓거나 상업에 종사하는 것이 유목보다 훨씬 덜 위험하고 안정적이면서 돈도 많이 벌기 때문.
쉽게 말해 힘이 약하면 망하고, 힘이 강하면 농경지대를 정복해 정착해버린다. 약하든 강하든 결국 유목생활을 청산한다는 것. 기본적으로 호모 사피엔스에게 우호적인 환경에서 살고 싶은 욕망 때문이다.
지금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일부, 러시아, 몽골, 북아프리카, 중동, 일부 아메리카 원주민등을 제외하면 대부분 정주민들에게 흡수되어 사라진 상태다. 그나마 저 나라들도 유목민이 남아있거나 유목민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정도지 이미 그 나라들의 주류 세력은 도시에 사는 정주민화된 후손들로 대체되었다.

4. 유목 제국 목록



5. 관련작품


[1]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스키타이보다도 훨씬 이전에 '키메르'라고 불리는 집단이 지금의 크림반도와 카프카스 산맥 북부 부근에서 번성했다고 한다. 이 키메르족은 나중에 스키타이족의 압력 때문에 지금의 터키인 소아시아 반도와 유럽으로 도주하는데, 일부 학자들이 키메르족이 훗날 서유럽의 주민인 켈트족이 된다고 추측하기도 한다.[2] 이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정주민들보다 길을 찾고 지도를 읽는 능력이 중시되었다. 반면 정주민족의 경우 평생 태어난 곳에서 사는 경우가 드물지 않았다. 집성촌이 대표적이다.[3] 물론 금의 경우는 거란 유민들도 있었고, 금에서 갈라져 훗날 몽골제국의 괴뢰국이 된 동진국에도 거란 유민과 몽골인들이 있기도 했으며, 청은 만주족과 몽골, 몽골계 민족들과 그 외 다른 퉁구스계 제족들의 동군연합을 띄긴 했었다.[4] 이들이 유목 민족이 된 이유 자체가 이들의 거주지가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것이 크다.[5] 사람은 풀을 소화할 수 없어 풀을 소화해 성장하는 가축을 가져다 목축하게 된 것이기 때문이다. 즉 농사가 가능한 땅에서는 유목보다는 농사를 짓는 게 더 이득인 셈[6] 물론 실제로는 인간만이 아니라 환경도 파괴하고 다녔다.[7] 키메르인들이 어느 계통의 민족인지는 불분명하나, 일단 인도유럽어족 계통이라는 것은 확실하다고 보여지며, 현재 주류 역사학계는 이들을 켈트족 계통이라고 추정한다.[8] 회의적 시선도 있었으나, 연구를 통해 흉노족과 로열 스키타이의 궤멸 이후 중앙아시아 곳곳에 거주하던 스키타이족 사이의 혼혈로 밝혀지며 유목 민족 확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