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복왕조

 

1. 개요
2. 설명
2.1. 정복왕조와 침투왕조의 차이
2.2. 정복왕조와 침투왕조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
3. 침투왕조
4. 정복왕조
5. 비슷한 사례
5.1. 한국
5.2. 중근동 & 인도 반도
5.3. 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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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국의 사회경제사학자인 비트포겔(Karl A. Wittfogel)이 붙인 중국정복한 이민족 왕조를 일컫는 명칭이다.

2. 설명



2.1. 정복왕조와 침투왕조의 차이


동북아 지역은 북방의 유목민 사회와 남방의 농경 사회가 존재하였으며 양자 간의 분쟁이 끊이지 않았다. 한나라백등산 전투명나라 때의 토목의 변과 같이 한족 왕조들이 위기에 빠지는 경우도 있었으나 기본적인 생산량과 인구의 차이 때문에 일시적인 공격과 약탈이었을 뿐 장기간 지배는 어려웠고 지배했다 하더라도 한화되거나 축출되는 결말을 보여주었다. 여기서 한화된 왕조를 침투왕조, 축출된 왕조를 정복왕조라고 부른다. 침투왕조의 경우 한족을 지배하기 위해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한화정책을 사용하였고 한족에 흡수되어 사라졌다. 정복왕조의 경우 한화를 경계했기 때문에 자민족 통치와 한족 통치를 분리해서 시행하였다.

2.2. 정복왕조와 침투왕조의 차이가 발생하는 이유


일반적으로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통치할 경우에 두 가지 모습을 보여주게 된다. 첫째는 통치자가 피통치자보다 고도의 문화를 보유하는 경우이고 둘째는 통치자가 피통치자보다 낮은 문화를 보유하는 경우이다. 첫 번째 경우에는 통치의 조직과 정책이 정복민족 고유의 것을 기준으로 하는데 무리가 없다. 따라서 피통치자 고유의 사회조직을 변화시키거나 동화하는 것을 통치정책의 중심으로 삼게 된다. 두 번째 경우, 정복민족의 미숙한 통치조직은 피정복민족에 대한 통치를 불가능하게 만든다. 따라서 피정복민족이 가지고 있는 체계와 조직을 전면적 또는 부분적으로 수용하고 개조하여 새로운 통치방법을 만들어 내게 된다. 이 경우 정복민족 고유의 통치조직과 정책에 결정적인 변화가 나타나게 된다. 즉 정복국가의 통치조직이 점차 사라지고 피정복국가 고유의 것을 답습하게 되는 것이다. 결국 통치에 있어서 피정복민족의 참여는 필수적이 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유목민족 왕조의 한화는 필연적이라고 볼 수 있다. 일찍이 육가가 "말 위에서 얻은 천하를 말 위에서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라고 했듯이 유목민족들은 중국을 정복할 능력은 가지고 있었지만 다스릴 능력은 부족했다. 무력은 있지만 문화적인 역량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국에 있었던 유목민족 왕조들은 한화되었거나 멸망하여 초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유목민족 왕조들의 통치를 보면 그들이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알 수 있다.
가장 대비되는 것이 북위와 원나라이다. 이들의 정책은 극에서 극을 달리고 있다. 북위는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서는 중국인이 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했고 적극적으로 한화정책을 펴 나갔다. 이러한 정책으로 중국을 다스릴 수 는 있었지만 민족적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되었고 자신들의 장점 또한 소실되어 멸망하게 되었다. 원나라의 경우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중국을 다스리기 위해 중국에 자신들의 통치체제를 적용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정책은 중국인들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궁극적으로는 정치가 혼란해지면서 초원으로 돌아가게 되었다.
, , 세 제국은 중국을 비교적 성공적으로 지배하였다. 이들은 이원적 지배체제를 사용하여 자신들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도 중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릴 방법을 찾았다. 유목민족은 유목민족의 방식으로 한족은 한족의 방식으로 통치하는 것이다. 이 세 민족은 자신들의 장점을 살리면서도 중국을 효율적으로 지배해 나갔다. 청나라의 경우에는 더욱 심혈을 기울여 만주족에 대한 한족의 불만을 잠재우는 동시에 양 민족의 조화를 꾀하기까지 했다. 이 세 제국이 멸망한 이유는 내부적 혼란에도 있지만 외부의 요인이 크게 작용하였다.

3. 침투왕조


지배민족인 유목민족과 피지배민족인 한족 간의 사회, 문화적 차이가 크기 때문에 이질감을 느끼기 쉬웠고 유목민족의 통치제도로 농경문화 사회를 통치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따라서 침투왕조들은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사용하여 점차 한족 왕조처럼 변하는 방법을 사용하였다. 오호십육국의 오호(선비족, 흉노족, 갈족, 저족, 강족)들이 세운 나라들이 대표적이다.

3.1. 북위, 북제, 북주


북위는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설명할 때 가장 좋은 예시를 보여준다. 태무제의 화북 통일 이후 효문제는 지배의 안정을 위해 적극적인 한화정책을 사용하였다. 도읍을 낙양으로 천도하였고 호성(胡姓)을 한성(漢姓)으로 바꾸게 하였다. 황성의 경우 탁발씨에서 원씨로 바꾸었다. 또한 유목민족의 풍습과 언어를 금지하고 유목민족과 한족의 결혼을 장려하는 등 한화에 힘썼다.
그러나 급격한 한화정책에 선비족의 불만이 누적되어 523년에 북위 멸망의 원인인 6진의 난이 발생하게 된다.

3.2. 수나라, 당나라


지배층의 핵심이 북주 때부터 내려오는 한족화된 선비족인 관롱집단이었다. 다만 당나라는 측천무후 이후 관롱집단의 세가 약해지고 한인 비귀족 출신이 득세하기 시작한다.

4. 정복왕조



4.1. 요나라


요나라는 북면관과 남면관이라는 통치 기관의 이중화를 통해 국가를 운영하였다. 상경임황부의 북면관은 유목민족들을 통제하였고 중경재정부의 남면관은 한족들을 다스리게 하였다. 북면관은 요가 독자적으로 창안한 관제로 행궁, 부족, 속국에 관한 업무를 담당했고 주요 기관으로는 최고 권력 기관인 북추밀원이었다. 남면관은 중국의 제도를 참고해서 조직한 관제로 주현 · 세금 · 군마 · 한인과 발해인에 대한 민정을 담당했다. 남면관의 최고 권력 기관인 남추밀원이었다.
황제는 날발(捺鉢)이라는 제도를 통해 제국을 순행하면서 지방을 위무하고 신료회의를 하여 전국을 다스렸다.

4.2. 금나라


초기에는 호복과 변발을 강요하였으나 송나라의 제도를 따르게 되었다.
중앙의 발극렬(포기레) 제도와 지방의 맹안모극제, 도포긴·포긴제 군사제도의 맹안모극제와 북방수비에 거란인을 배치

4.3. 서하


당샹(당항)족[1]의 나라. 한화 정책 및 한화 현상을 두려워해서 매우 경계했으며, 당항족이라면 자신들의 변발을 유지하는 정책을 펼쳤다. 서하에서 만든 서하 문자로 한자, 중국어로 적혀진 유교 사서들, 불교 경전들을 번역했다. 대장경 역시 서하 문자로 썼다.

4.4. 원나라


몽골인은 천호장, 한족은 행상서성. 이후 천호, 만호는 추밀원으로 행상서성은 중서성으로 변화. 중서성의 행정관청으로 행중서성 설치.
몽골 특유의 군사제도 유지. 중앙군은 추밀원, 지방군은 행중서성이 통제.
몽골인·색목인·한인·남인의 신분제.

4.5. 청나라


만주족 가한이 지배 민족에 따라 다른 신분으로 지배. 만주의 가한, 몽골의 대칸, 한족의 천자, 티베트의 보호자인 전륜성왕.
팔기군. 만주팔기, 몽골팔기, 한팔기로 구분.
표기에 있어 한자만주 문자를 병기하는 만한합벽.
관직임명에 있어 만주족과 한족을 같이 두는 만한병용제. 하급관리에 한해서는 사용하지 않았다.
변발과 호복 강요, 문자의 옥.

5. 비슷한 사례



5.1. 한국


  • 고조선
    • - 전근대에는 실존했던 것으로 여겨졌으나, 현재는 실존하지 않은 설화 속의 왕조라는 게 정설이 되었다.
    • 위만조선 - 위의 기자조선과 달리 확실히 실존했던 이민족계 한국 왕조다.
  • - 창업군주인 대조영고구려화된 속말말갈의 후손이라는 견해가 있지만 현재로서 대조영의 혈통에 대해 확실히 밝혀진 것은 없다.

5.2. 중근동 & 인도 반도


의외로 중동 및 남아시아 일대에도 침투왕조나 정복왕조들과 비슷한 성향의 왕조들이 들어선 적도 있었다.[2] 동북아시아에서 몽골계, 그리고 마지막에는 퉁구스계가 주로 많이 활약했다면 서양에서는 투르크계들이 대부분 차지했다.

5.3. 유럽


투르크족과 우랄계 마자르족이 대표적으로 정복왕조에 가까운 왕조들을 세웠다.

[1] 탕구트라고도 부른다.[2] 출저: 김호동 교수의 아틀라스 중앙유라시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