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
1. 개요
대한민국의 의사. 부산복음병원(현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설립자 겸 초대 원장, 제2대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장 겸 병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창설했다. 1977년 의무의료보험이 출현하기 이전 임의가입의료보험의 체제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의료보험조합이며, 이는 이후 대대적인 언론보도를 통해 전국적인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운동을 일으키는 계기가 된다. 청빈과 봉사하는 삶을 산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며 별명으로는 '바보 의사'[4] , 한국의 슈바이처, 작은 예수 등이 있다.
EBS-e 1부 EBS-e 2부 EBS 요약
2. 상세
대한민국의 의사. 드라마 야인시대의 의사양반 역의 모델이 되었던 백인제의 수제자로 경성의전을 졸업하고 경성의전 외과 조수로 입문하고 나고야제국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게 된다. 이후 스승 백인제는 장기려를 자신의 후계자로 점찍고 대전도립병원(현 충남대학교병원) 외과장 자리를 추천하였다. 당시 조선인에게는 거의 돌아가지 않는 자리였고, 아마도 백인제는 자신이 퇴임한 후 경성의전 외과학 교실을 장기려가 이끌기를 바랬던 것으로 보이나, 장기려는 일본인들과 일하고 싶어하지 않았고 세브란스 외과 이용설의 추천으로 평양연합기독병원 외과장으로 부임한다. 그 이후 평양의과대학, 김일성종합대학의 외과 교수를 지내던 중 6.25 전쟁 중 차남 장가용과 단신으로 월남하여, 피난민들로 가득한 부산에서 복음병원을 세웠다.[5]
김일성을 수술해준 인연 덕에 장기려는 북에서 매우 우대받았는데 모범근로자로 선정되어서 포상도 자주 받았고 여러차례 상도 받았다. 김일성이 맹장염으로 앓아누운 적이 있었는데, 김일성은 장기려부터 찾았지만 그와 연락이 안돼서 소련 군의관이 집도했는데 북에서는 장기려가 수술했다더라라는 소문이 파다할 정도로 장기려의 명성은 높았고 북에서의 지위도 높았다. 심지어 종교를 부정하는 공산주의 국가에서 교회에도 가고 예배를 할 특권도 주어졌다. 게다가 그가 월남했을 때도, 북에서는 그가 월남한 것이 아니라 남측에 납치된 것이라고 판단했고, 그 덕분인지 이북에 남은 아내와 딸들과 아들들은 화를 면하게 되었다고 한다. 다른 월남자 가족은 동요계층, 심지어 적대계층에 편입되어서 수모를 당한 것을 생각하면, 정말로 이례적인 사례이다.
북에 남은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 함께 월남한 차남 장가용은 남에서 의사가 되었다. 장가용의 아들 장여구도, 원래는 목수를 꿈꾸었으나 중앙대학교 의과대학을 가서 의사가 되었고, 장여구 교수의 아들도 현재 중앙의대에 재학 중이라고 하니 그 아들도 나중에 의사가 되면 '''4대 의사 가문'''이 이루어지는 셈이다.
평양 철수로 월남한 직후에는 북에서 우대받은 일로 인해 자주 방첩대에 끌려가서 문초를 당했다. 다행히 한 미국인 선교사가 신분을 보증해줘서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을 평전에서는 '조봉암이 억울하게 죽었는데, 이러한 사회에서 온전하게 있었을까?'라는 표현으로 서술되어있다.
춘원 이광수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그를 만나고 소설 <사랑>의 주인공 '안빈'의 모델로 삼았다는 말이 있는데 장기려 본인은 부정했다. 사실 안빈이 과학에 미쳐 인도주의적 이미지가 없는 광기 가진 인물로 그린 티가 있는 것과 이광수가 보이는 비극적 죽음을 선택한 여성을 비하한 예를 생각한다면 자기가 모델이란 점에 굉장히 불쾌했을 것이다. 이러한 점은 후에 한국 최초의 부검의가 되는 문국진이 제자인데, 부검을 1950년대만 해도 두번 죽인다는 인식이 깊게 깔려 반대를 외쳤던 일화가 있다는 점에서 추측하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눈총과 고된 업무로 지친 제자 문국진이 부검의를 관두려고 할 때 불같이 혼을 내 정신을 차리게 한 것도 장기려다.
일제강점기때부터 외과의사로 살아왔고, 그의 아래에서 일한 제자들은 모두 다 외과 전문의이긴 하나 해방이후 국가가 주관하는 첫 외과전문의 시험에는 응시하지 않았다. 그 이유로는 의사가 되려고 공부했지 전문가가 되려고 공부한 것은 아니라고. 하지만 대한외과학회 회장을 지내기도 했다.
부산에서 현 고신의료원의 전신인 복음병원을 세워 가난한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했다. 이외에도 부산에 설립한 의료시설이 많다. 부산 지역 대학병원 외과의 뿌리는 장기려로 시작되거나 직간접으로 연관되어있으며, 심지어 장기려 박사가 제2대 원장 겸 의과대학장으로 재직했던 부산대학교병원에는 장기려를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초량동에 정식으로 장기려 기념관이 세워졌다.
1995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지병인 당뇨병에 의한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84세. 독실한 개신교인으로 매우 청빈한 삶을 살았다.[6] 죽을 때까지 본인의 개인 사택 없이 고신대학교 복음병원의 옥탑방에서 기거했다.
3. 업적
그의 가장 큰 업적은 1968년 청십자 의료보험이라는 의료보험을 창설, 많은 사람에게 골고루 나은 의료혜택을 입도록 한 것이다.[7]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8] 은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출현하기 이전에 유일하게 성공했던 임의의료보험조합으로 전국적으로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인 청십자운동을 일으키는 계기와, 의료보험조합의 필요성에 대해서 국민들에게 큰 인식의 전환을 마련시켰다.[9]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의료보험 도입에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한 것에는 이견이 있다. 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 현행 의료보험의 기초가 되었으며, 의료보험 도입으로 인한 의료환경변화의 여파를 생각한다면 그가 한국 의료계에 끼친 영향은 독보적이라고 한다.[10] 반면, 의료보험연합회는 1997년 발간한 "의료보험의 발자취"에서 청십자의료보험에 대해서는 1968년 이후 시작된 임의가입의료보험조합 중에서 유일하게 성공했던 사례로 격찬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서 1977년 의무의료보험조합이 등장하기 전까지의 공백기를 매웠다고 평가한다. 하지만 의료보험의 도입에 대해서는 당시 보건사회부 중심의 관의 주도로 진행되었다고 서술하고 있다.
그는 의료보험을 도입한 의료행정가이기 이전에 유능한 외과의사였는데, 이러한 공적으로 장기려는 1976년 국민훈장 동백장을, 1979년 막사이사이상(사회봉사부문)을 받았으며, 1995년 인도주의 실천 의사 상 등을 받았다. 노년에는 당뇨병에 시달리면서도 백병원 명예원장으로서 집 한칸 없이 협소한 옥탑방에서 지내면서 마지막까지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박애와 봉사정신으로 인술을 펼쳐 한국의 성자로 칭송 받고 있다. 1943년 국내 최초 간암 환자의 간암 덩어리를 간에서 떼어내는데 성공하였고, 1959년에는 간암 환자의 간 대량절제술에 성공하였다. 한국 외과학에서 미개척 분야였던 간장외과의 발전과 의료 인재 양성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4. 이야깃거리
- 정부에서 의료수가를 책정할 때 장기려의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참고했다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은 일종의 봉사단체의 성격으로 의료수가 중 인건비 부분이 빠진 상태였고 이것은 현재 의료수가가 낮아지게 된 요인이라는 설이 있다. 한국의 의료수가는 미국을 제외한 동남아 국가보다도 낮은 상태로 대부분 의료기관이 보험수가 이외의 방법으로 수입을 올려 유지하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는 선의로 인건비를 뺐지만 이는 한국 의료의 고질적인 낮은 의료수가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니, 마냥 좋다고 하기는 어려울 수 있다.[11] 실제 한국의 경우 장비를 사용하는 의료비용이 의료인이 직접 참가해서 전문적인 기술을 요하는 의료비용보다 높다. 실제 맹장염 수술수가는 26만원(2015년기준)인데 비해 MRI 는 40-100만원에 달한다.기사보기
- 반면 의료보험연합회에서 발간한 "의료보험의 발자취"에 따르면 당시 수가책정은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을 참고하지 않았다고 되어있다. 당시 복지연금국을 중심으로 수가작업이 진행되었는데, 그 당시 수가조사 데이터는 국립의료원, 서울대학교병원, 연세의료원, 가톨릭의대성모병원, 적십자병원, 고려병원, 한양대부속병원, 순천향병원, 백병원, 필동성심병원, 을지병원의 의료수입내역을 기반으로 하였다고 한다. 또한 종합된 진료행위에 대하여는 모든 행위를 과별로 분리하여 과별 퍼센티지를 부여한 다음 각 행위의 난이도를 상대평가하였다. 가장 난이도가 높은 시술에 일정한 기준점수를 부여한 다음 각 행위들을 그에 비교하여 배점한 난이도 평가에는 과목별로 10명씩의 전문의들이 참여했고 이 점수표에서 이상치를 제외한 나머지를 평균하여 최종치를 결정하였다. 같은 방식으로 소요시간과 빈도가 조사되었는데, 소요시간은 시간이 많이 들수록 빈도는 드물수록 일정한 가중치를 부여하였고 반대의 경우에는 경감하였다. 결국 난이도가 주요변수가 되고, 시간 및 빈도가 조정변수가 되는 일정한 공식에 조사치가 대입되어 각 행위의 수가 수준이 결정되었다. 보건사회부는 완료된 수가을 검증하기 위해서 국군통합병원 의료수가를 조사하여 일일이 작업결과와 대비하여 일부 내용을 다시 수정하는 과정을 거치기도 하였다. 당시 수가책정원칙에 따르면 지방차별제를 실시하고 의료보험수가는 단체계약수가이고 향후 보험실시로 잠재수요가 유효 수요화하여 환자수가 증가될 것을 감안하여 관행수가보다 낮게 책정하되 당시 대기업 공제조합과 의료기관과의 계약수가가 관행수가의 80% 선이었으므로 이보다 다소 낮은 75%선에서 결정하기로 하였다. 최종적으로 결정된 수가는 관행수가의 약 55%수준이었으나 서울지역 종합병원을 기준으로 한 수가였기에 가산율 20%와 약가 등을 감안했을 때 결국 제정원칙에서 정한 75%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않은 것이었다. 제 검사료의 경우 제정수가가 당시 국립의료원이나 모 대학부속병원의 관행수가보다 높았다고 한다.
- 의료보험연합회의 의료보험의 발자취는 97년도에 작성되었다. 이 문건은 국민의료보험이 시작된 1977년의 20년이 지난 시점에서 정부와 보험연합회의 행적을 부각시키기 위해 작성된 자료라는 점은 비판적인 시각으로 볼 필요가 있다. 그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본 문건에서 사설 민간 의료 보험이었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에 수페이지의 분량을 할애하여 치적을 기렸다는 점을 비추어 본다면, 장기려의 청십자 의료보험이 현재 국민건강보험에 끼친 영향을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의료 수가의 경우 관행수가의 75%를 적정하게 결정한 점 역시, 관행 수가에 비해 저수가로 운영하던 사설 보험 조합이 있었던 점, 특히 그 실제 대표로 청십자 보험 조합이 있었던 점을 고려해야 한다. 장기려 박사와 청십자 운동의 헌신으로 이루어낸 청십자 의료보험이 수가 산출 영향에 대해 관의 위주로 서술된 문헌에 언급이 없다는 이유로 이 부분에 전혀 영향을 끼치 않았다는 주장은 어느 정도 비판적으로 봐야 할 부분이다.
- 학창시절 당시: 처음에는 사범학교[12] 에 진학해 교사로서 평생 헌신하는 것이 자신의 사명이라고 생각했으나 실력도 모자라고 학비도 문제여서 포기했고, 공학자로서 국가에 헌신하겠다는 생각에[13] 여순공과대학에 진학하려고도 했는데 예과 시험에서 탈락했다. 게다가 집안이 가난하여 학비를 감당할 수 없어서 결국 당시 조선에서 학비가 가장 적게 드는 경성의학전문학교(현 서울대학교 의과대학)로 진학하였다. 조선에는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현 연세대학교 의과대학)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사립이다보니 당시 연 학비가 경성의전이 35원에 세브란스의전이 100원으로 세 곱절 정도여서 포기하였다고 한다. 이후 1928년 4월 1일 경성의전에 31등으로 입학하고 수석 졸업한다.[14]
- 눈물과 정이 매우 많은 성격이었다고 한다. 지나가는 걸인에게 적선을 한다는 것을 한 달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몽땅 주었다가 그 걸인이 수표 도둑으로 오해를 받아 경찰서에 끌려가는 바람에 경찰서로 소환되어 해명하는 해프닝을 겪기도 했다. 치료비가 없었던 환자에게 자신의 급여를 가불해 지불하기도 했고, 병원 측의 반대로 치료비 대납이 원활하지 않자 뒷문을 열어줄테니 밤에 몰래 도망가라고 했다는 이야기라든지, 죽을때까지 한국전쟁으로 헤어진 부인을 그리워하며 독신으로 살았다든지하는 이야기가 있다. 그 외 원리 원칙을 지키며 살아온 일화에 대해 무수히 많은 일화가 있으나 여기에 일일이 나열하기 어려우니 평전 '장기려, 그 사람'을 참고하기 바란다.
- 가장 대표적인 사례는 1985년 남북 이산가족 상봉 때 정부가 제안한 특별 상봉을 거절한 것. 누가 보아도 그만한 특혜를 받고도 남을 자격이 있는 그였으나, 수십 년 동안 그리워했던 가족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왔음에도 다른 이산가족들과 형평성이 맞지 않는다며 결국 거절했다. 당시 북에서는 남한이 장기려를 납치해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장기려가 북에 가지 않으면 세계 여론이 북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우려한 정부는 거의 반강제로 장기려를 북에 보내려 했으나 이에 분노한 장기려가 "오냐, 그럼 가주겠는데 대신에 북에 가면 안 돌아올거다."고 엄포를 놓자 경악하여 보내지 않았다.[15]
- 현봉학의 스승이다. 이 사람이 이산가족 관련 움직임을 보인 것이 집안도 그렇지만, 스승인 장기려도 특혜가 아닌 포괄적인 만남을 원한다는 것에서 동기였다는 발언이 있었다. 영화 국제시장이 좋은 소리를 못 듣는 이유와 김무성 대표로 불똥 튄 것을 생각하면 이래저래 씁쓸한 일. 그리고 희대의 집단 사망사건이자 먼 훗날 세월호 참사에도 한발을 걸치게 된 오대양 사건당시 부검을 지휘한 문국진도 제자이었기에 해상에 관련된 유명한 사건들에 연관된 제자들을 둔 셈이 되었다.
- 죽기 직전까지도 자신에게서 수술을 받고 싶다고 고집하는 사람이 있으면 노구를 이끌고 직접 진료를 했다고 한다. 평소 가난한 사람들을 왕진하며 다니곤 했는데 죽기 며칠 전 평소보다 일찍 사람들을 찾아가 치료하며 "올해는 못 올 것 같아 일찍 왔네"라고 했다고 한다.
- 장면 총리 여동생이 되는 수녀원장과의 한국전쟁 전 이북에서 인연과 유한양행 창업주 유일한 회장 여동생이 되는 유순한과의 인연도 있다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를 관통하는 또 다른 줄기라는 의견도 있다.
- 어느날 장기려가 해외 여행을 가고 싶다고 했다. 평소에 사치라곤 모르던 장기려가 해외 여행을 가고 싶어하길래 사람들이 대체 어디를 얼마나 가고 싶으면 저러시나 싶어서 어디를 가고 싶으시냐고 물었는데 장기려는 동베를린에 가고 싶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사회주의 국가이자 적성국인 동독엔 왜 가고 싶냐고 묻자 장기려 박사는 내 아들 학용이가 거기 있다고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실제로 북에서 의사가 된 장기려의 장남 장학용은 북에서도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동베를린에 열린 사회주의권의 의학학술대회에 참여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그 소식을 장기려가 들은 것이다. 당장 가더라도 아들을 만나긴 불가능했겠지만 아들이 밟았던 땅을 밟아보고 싶었던 것이다.
- 평양에서 남쪽으로 피난 올 때 원래는 버스를 타고 혼자 먼저 가고 이후에 부모와 부인을 비롯한 가족 모두가 따라오기로 되어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남 장가용이 아버지의 짐을 들어주기 위해 얼떨결에 동승하게 되었고, 그것이 가족과의 이별이 되었다고 한다.[16]
- 장기려와 처차남이 탄 버스가 평양을 지날 무렵 부인과 딸이 피난하는 행렬을 장기려와 차남이 목격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인을 보고도 응급환자가 실린 버스를 세울 수 없어 그냥 지나치게 되었고 그것이 마지막으로 벅스에서 부인을 본 것이라고 한다. 또한 차남이 어머니하고 외치는 순간 50~100미터를 지나치는 바람에 더더욱 세울 수 없었고 차후 만나리라 생각했지만 지인들 말로는 이후 남은 가족들은 평양에 머물렀다고 한다. 그후 장기려는 평생 재가하지 않았다.
- 끝내 상봉은 못 하였지만 같이 월남한 차남 장가용과 함께 찍은 사진을 북의 아내에게 보냈는데 아내는 사진을 보더니 장기려의 사진을 보며 울음을 터트리면서 "이게 가용이구나, 아버지와 꼭 닮았어."라고 했는데 사진을 가져온 사람이 "그 분이 장기려 박사님이고 옆의 젊은이가 가용입니다."고 말해주자 어안이 벙벙해져서 아무 말도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평양에서 살며 고생을 덜 하긴 했어도 그래도 홀몸으로 시부모와 5남매를 키우느라 원체 고생을 하느라 당연히 자기 남편도 자기만큼 늙었을 줄 알았고 그래서 생각보다 훨씬 덜 늙은 남편을 아들로 안 것.
- 죽기 직전까지도 아내에게 배운 노래를 부르며 아내를 그리워했다.
-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서 고문에 의한 경부압박질식사였다는 진실을 밝히는데 공헌한 국과수 부검의 황적준과 중앙대병원 당직의였던 검안의 오연상은 각각 고려대학교와 중앙대학교 출신이었음에도 장기려와 연관이 짙은 편이다. 상술하였듯 중앙대 의대에서 수학한 손자 장여구의 스승이 바로 오연상이었고 황적준은 위에서 소개한 장 박사의 제자 문국진의 문하에서 부검을 배웠었다. 국과수로 가기 전 몸 담았던 고신대학교 의대에서 퇴임할 때에 기념 인터뷰에서 밝힌 점으로 보아 장기려와 직접적인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 국내에서 유일한 곤충법의학 전공 교수로 있는, 고신대학교 교수 문태영이 바로 문국진의 아들이라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에서 민주주의 수립에 장기려가 알게 모르게 세운 업적이 있지 않나 하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
- 장기려가 타계하기 직전에 장기려의 애제자들이 장기려의 흉상을 만들어주려 했는데 중환으로 죽어가던 장기려는 분노하여 "내 흉상을 만드는 놈은 지옥에나 떨어져라!"고 일갈했는데 제자들이 기겁하여 주저앉아 버렸고 놀란 사진기사는 방 밖으로 달아나 버렸다고 한다. 진정한 복음주의 크리스천이었던 장기려에게 흉상을 만든다는 건 십계명을 어긴다는 것과 같은 의미였다는 것. 그런데 문제는 장기려가 이렇게 화를 냈는데도 흉상은 기어이 만들어 졌다(...).
- 시장에서 바가지 씌우려는 상인들이 부르는 값보다 언제나 비싼 값을 주고 물건을 샀다고 한다. 이에 사람들이 "박사님이 그래서 바보 소릴 듣는 겁니다. 그게 바가지 씌우는 값인줄 정말 몰라서 그러십니까?"고 하자 "그 바가지 씌운 값을 깎으려 해봤자 그 사람들이 앞으로 바가지를 씌우지 않겠는가? 차라리 이렇게 올려서 주면 앞으로 겁이 나서라도 그러지 않겠지."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 '사랑의 원자탄'으로 유명한 손양원과 약간의 인연이 있다. 마취 기사이자 비서로 장기려와 함께 일하며 '장기려의 막내아들'로 불릴 정도로 장기려와 가깝게 지낸 손동길이 있는데, 손동길은 손양원이 순교한 당일 태어난 막내 아들이다. 다만 손양원과 장기려가 직접 만난 적은 한 번도 없다.
-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생전 독실한 개신교(장로회) 신자로, 북한에 있을 때부터 평양 산정현교회에 출석하였고, 6.25 당시 부산에 피난온 산정현교회 교인들과 함께 교회를 재건하는데 앞장섰다. 휴전 이후 산정현교회 교인들 상당수는 서울로 올라가 1954년 후암동에 자리를 잡고 산정현교회의 이름으로 다시 예배를 했으나, 함께 서울로 떠나지 못하고 부산에 남은 장기려를 비롯한 산정현교회 일부 교인들은 1956년 부산 중구 부평동에 예배당을 짓고 산정현교회의 이름 그대로 교회를 이어 나갔다. 부산 산정현교회는 1982년 사하구 괴정동 현재의 위치로 이전했다.
- 장기려가 설립한 복음병원이 고신대 재단에 편입되어 고신의료원이 되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장기려를 예장고신 신자로 알고 있는데, 장기려는 산정현교회에서 은퇴한 후 1988년 무교회주의를 선언하고 교회를 떠났으며, 피난 직후 초량교회에 잠깐 출석했던 것을 제외하고는 산정현교회 외의 다른 교회에 소속된 적이 없다. 그리고 장기려가 출석하던 부산 산정현교회는 고신 소속이 아니라 예장 독노회(현재는 합동복구측으로 개칭) 소속이었다가 1979년 예장 통합에 가입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장기려가 부산 산정현교회를 떠날 당시에는 예장 통합 소속이었다. 즉 장기려는 예장 고신이 아닌 예장 통합 소속 장로였으며, 1988년 교회를 떠난 후에는 무교회주의를 선언하고 '종들의 모임'이라는 초교파 신앙 단체에 관여, 활동하며 여생을 보냈다.
- 장기려는 1959년 10월 20일 우리나라 최초로 간암환자의 간엽절제수술을 성공했다. 대한간학회는 2000년부터 10월 20일을 '간의 날'로 제정하고 기념하고 있다. 참고로 '세계 간염의 날(World Hepatitis Day)'은 7월 28일이고 이는 B형간염 바이러스와 백신을 발견하여 1976년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버룩 새뮤얼 블룸버그의 생일을 기념한 것이다.
5. 관련 저서
[1] 음력 1911년 8월 14일[2] 공교롭게도 크리스마스다. 평생동안 예수의 인격을 흠모하던 크리스천인 그였기에 편안히 눈을 감을 수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평안도는 김씨 정권이 자리잡기 전까지는 한반도에서 개신교의 성지로 유명했었다. 그리고 서울백병원은 스승 백인제가 설립한 병원이다.[3] 한국에서는 인동 장씨가 대부분을 차지하여 이쪽으로 오인할 수 있지만 안동 장씨다.[4] 아래에 언급되지만, '바보'라는 칭호는 장기려의 선량한 품성을 칭송하는 표현이다. 이와 비슷하게 바보가 긍정적으로 쓰이는 케이스는 노무현을 칭송하는 '바보 노무현'과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을 지칭하던 '바보 추기경'이 있다.[5] 본래 10월 19일 국군과 UN군이 평양을 점령하자 다친 그들을 치료했으나 50여일 뒤인 12월 4일, 북한군들이 중공군들과 평양으로 다시 들어온 다는 소식에 부인 김봉숙의 권유에 따라 남으로 피난했다.[6] 사실 엄밀히 말해서 재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수중에 천만 원 정도는 남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천만 원을 자신을 간병해 주었던 간호사에게 전부 주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 간호사가 받지 않으려고 하자 장기려 유족들이 제발 받아달라고 호소를 했다.[7] 이전판에는 최초의 의료보험이라고 명기되어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국내 최초의 의료보험은 1955년 설립된 부산노동병원의 의료보험조합이다. "의료보험의 발자취", 의료보험연합회, 1997.[8] ET 할아버지로 유명해지는 채규철, 김서민 등과 함께 설립. 1977년 의무보험이 시작되기 전 임의가입의료보험조합시절 유일하게 성공한 의료보험조합으로 청십자운동이라는 전국적인 의료보험조합 설립운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다. 이후 1989년 전국민 의료보험제도가 본격적으로 도입되자 자연스럽게 해산되었다. 그러나 청십자의료보험을 통해 만든 병원은 아직 부산 전포동에 청십자병원(행복한병원)이란 이름으로 남아있다.[9] 1963년 의료법에 따른 최초의 의료보험조합은 중앙의료보험조합인데 업무를 시작한지 몇개월 되지 않아 납부문제 등의 어려움으로 문을 닫는다. 이후 몇개 의료보험조합이 설립되었으나, 임의가입의 제도적 한계와 불신의 문제로 제대로 운영되지 못하였다. 그 과정에서 유일하게 성공한 것이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이었다. 청십자의료보험조합의 성공비결은 국가에서 1억원 가까운 막대한 예산투입과 당시 부산시의 지방비를 지원한 것, 그리고 부산사람들의 의료보험조합에 대한 상대적으로 높은 신뢰도와 상대적으로 높은 납부율로 지적된다.[10] 만약 이 사람이 의료보험 조합 활동으로 오늘날 미국 보험회사들처럼 수익 활동에 치중했다면, 오늘날 우리나라 국민건강보험은 그 모습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나타났을 가능성이 높다.[11] 장기려가 나쁘다는 뜻은 아니다. 이후에는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거치면서 보강된 복지 정책의 일환으로 수가가 계속 낮아졌는 데, 이에 상응하는 만큼 의료인들의 수익이 보장되느냐를 놓고 찬반 논쟁이 한번씩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 이를 알만한 의료인출신 방송인 한 명이 이를 무시한 발언을 하다가 심각한 후폭풍을 맞았다는 것을 생각하면...[12] 당시 조선에는 사범학교로 경성사범학교(현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대구사범학교(현 경북대학교 사범대학) 등이 있었으며, 일본에는 도쿄고등사범학교(현 쓰쿠바대학), 히로시마고등사범학교(현 히로시마대학), 와세다대학 고등사범부 등이 있었다. 사범학교는 초등교사를, 고등사범학교는 중등교사를 양성하는 곳이다.[13] 지강유철의 평전 '장기려, 그 사람'에는 "공업이 국가 사회를 유익하게 하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나와 있다.[14] 단, 4년 성적 평균으로 석차를 냈기 때문에 실제로는 차석이었다고 한다.[15] 사실 장기려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다. 북에서는 장기려가 남측에 끌려갔다고 간주했기 때문에 장기려의 가족들이 북한에서 대우를 받고 살 수 있었던 것인데 만일 정부의 말을 듣는다고 한다면...? 어떻게 될지는 상상에 맡긴다.[16] 차남 장가용은 아버지의 뒤를 따라 의사가 되었고, 2008년에 사망했다. 장가용의 아들이자 장기려의 손자인 장여구 서울백병원 교수도 의사가 되어 3대 의사 가문을 이루어내었다. 나아가 장여구의 아들도 중앙대 의대에 재학 중이므로 이 아들까지 의사가 되면 4대에 걸친 의사 가문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