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시/역사

 




1. 고대


'''삼국 시대 진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거렬성
(居烈城)
(663년 이전)

거타주
(居陀州)
(663)

청주
(菁州)
(685)

강주
(康州)
(757)

청주
(菁州)
(799)

강주
(康州)
(825)
남강 유역을 따라 구석기시대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다. 진주 대평리, 이곡리 청동기 유적이 유명한데, 대평리 유적은 기원전 청동기시대 마을 취락, 방어시설, 전쟁 유적이 발견되기도 하였다.
처음으로 들어선 나라는 삼한변한의 12국 중의 고순시국(古淳是國)으로 추정되며, 경상북도 상주시 함창읍과 더불어 고령가야(古寧伽倻)로 추정되는 곳이기도 하다. 자타국 역시 진주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가야의 영역이었고, 백제가 동진했을 때 영역에 들어가 거열성(居烈城)으로 불리어졌다. 신라 진흥왕 때 신라에 편입되었고, 신라 문무왕 3년(663)에 통일신라에 병합된 뒤 거열주(居烈州)라 불리게 되었다. 신문왕 5년(685)에 청주(菁州)로 그 명칭이 변경되었다. 참고로 충청북도 청주시와는 한자가 다르다.
신라 경덕왕 16년(757) 강주(慷州)로 불리게 되었다. 이 때부터 통일신라9주 5소경 중 지금의 도청(행정)에 해당하는 치소를 강주에 설치해, 강주 11군 27현을 관할하는 행정 중심지가 되었다. 이 때부터 1천 년 이상 지금의 서부경남+경북 남부 일부 지역을 관할하는, 경주시, 상주시와 더불어 영남의 주요 도시로 기능하게 된다.
후삼국시대에는 호족 윤웅이 진주를 지배하다 의령태수 왕봉규가 찬탈한다. 왕봉규는 권지강주사를 자칭하고 강주의 지배자로 후삼국시대 중후반부 927년까지 살아남아 번영했지만 고려군의 침공으로 멸망했다.

2. 고려


'''고려 시대 진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강주
(康州)
(천수 1)

진주
(晉州)
(940)
태조 23년(940) 진주(晉州)로 개명되었다. 성종 2년(983) 전국 12목중 하나인 진주목으로 승격되었다. 한때 경상진주도, 진합주도라는 이름으로 지역명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후 무신정권 집권자였던 최충헌, 최이, 최항 삼부자는 진주를 봉토로 받아 공작으로 군림하였다.[1]

3. 조선


'''조선 시대 진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진양대도호부
(晉陽大道護府)
(1392)

진주
(晉州)
(1402)
태조 1년(1392) 진양대도호부[2]로 정해지다가 태종 2년(1402) 전국 20목 중의 하나인 진주목으로 강등되었다. 그러나 '''경상도 5대 도시'''(경주, 상주, 진주, 안동, 성주)[3] 로 기능하였다.
남강을 따라 형성된 충적평야가 있고 바다와 인접해 있어서 각종 물자가 풍부한데다가 교통의 요지에 위치한 입지조건 때문에 한때는 '''경상도 최고의 대도시'''라는 위엄을 자랑했던 시절도 있다. 동래(부산)고 대구고 안동이고 경주고 간에 전부 진주의 위엄 앞에서는 고개를 숙여야 했다. 기생문화로 대표되는 유흥문화는 풍요롭고 인구가 많은 대도시가 아니면 발달할 수가 없는데, 조선시대 3대 기생하면 '''강계 기생'''과 '''평양 기생''', 그리고 '''진주 기생'''이었다.
또한 임진왜란 당시 진주성 전투가 벌어진 곳이었으며 당시 내성과 외성, 절벽과 해자, 남강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요새였으며 전라도로 가는 길목을 잡는 중요 거점 지역이었다. 그래서 1862년 임술농민봉기(진주민란)가 벌어졌다는건 당시 조선이 '''자정작용이 거의 불가능한 막장상태'''에 빠졌다는 의미가 된다. 진주같은 대도시에 민란까지 벌어질 지경이면 당시 안동 김씨 정권은 손도 못 쓸 정도니까.
하동군 평사리 최참판댁에 살던 소설 토지의 주인공 서희간도 용정에 갔다가 귀국한 후에는 하동이 아닌 진주에서 살게 되는 것도 이런 맥락. 이후 소설의 상당 부분이 진주를 배경으로 이루어진다. (2부 이후부터) 이 시기 백정들의 권리 찾기 운동인 형평사 운동(1923년)이 일어난 곳도 이 곳이다.
고종 32년(1895)에 고종이 8도제를 폐지하고 전국을 23부로 나누어 관찰사를 두었는데 이때 진주에는 23부 중의 하나인 진주부(지금의 도격)가 설치되고, 진주목은 진주군으로 개칭되어 군수(참서관)를 두었다.
1896년 경상도가 남북으로 분할될 때 경상남도청 소재지가 되었다.

4. 일제강점기


'''갑오개혁 이후 진주시 행정구역 변천사'''
진주군
(晋州郡, 1896)

진주부(晋州府, 1939)
진양군(晋陽郡)

진주시(晋州市, 1949)
진양군(晋陽郡)

'''진주시'''
(1995)
1914년 함안군 상봉면, 하봉면, 상사면이 진주군에 편입되어 사봉면이 되었고, 진주군 축동면, 부화곡면, 곤양군(昆陽郡)을 사천군으로 통폐합하면서 내륙 도시가 되었다.
무역항으로서 부산, 마산의 입지가 급상승하면서, 1925년 경상남도청이 진주에서 부산으로 이전되었다.[4]
1938년 진주읍에 도동면, 평거면이 편입되고, 1년 후 진주읍이 진주부로 승격되고 진주군의 잔여지역이 진양군으로 개칭되었다.

5. 대한민국


1949년 진주부가 진주시로 개칭되었다.
1950년대 초중반 6.25때 폭격으로 구시가지 대부분이 파괴되면서 시가지 복원 사업을 통해 만들어진 시가지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으며, 중앙시장도 그때 지금의 위치로 왔다고 한다.
1973년 진양군 정촌면과 내동면의 일부가 진주시에 편입되었다. 이후 1995년 진주시와 진양군이 다시 통합되었고 그 해 3월 2일 문산면이 문산읍으로 승격되어 현재에 이른다. 남강댐 건설로 생겨난 호수인 '진양호'의 이름은 옛 진양군에서 따온 이름이다.
1960년대~1990년대에 경제 개발 정책이 경부선경부고속도로를 중심으로 발전하였기 때문에, 경남 서부는 경제 개발에서 제외가 되면서, 낙후지역의 적절한 인지도를 가진 쇠락했던 지역 정도의 위치까지 전락했으며, 진주시도 이때 성장 동력을 잃어가면서 도시 발달이 정체되었다.[5] 그래도 진주시는 경남 서부권의 거점도시 역할은 계속 맡고 있고, 인구도 그렇게 적은 편은 아닌 35만여 명으로 위안할 점이며, 진주상 비슷한 위상에 있었던 경주, 상주, 안동은 진주에 비해 인구도 적은데다, 진주는 오랜 시간동안 인구가 소폭이나마 증가하고 있지만 이들은 인구가 지속적으로 감소하고 있다. 진주시는 이렇게, 빠르게 공업화가 진행된 경남 지역에서 뚜렷한 문화적 색깔을 가진 도시로 유지되고 있다.
[1] 당시 고려는 군현제였으며 고려가 봉한 오등봉작제는 형식상 봉건제이다. 진짜로 땅을 때줘 공작으로 봉하는 건 고대 중국의 주나라의 제도로 진작 끝난 제도였다.[2] '진양(晉陽)'이란 이름은 훗날 진주군 진주읍이 ()로 승격 분리되면서, 남은 진주군이 개칭된 '진양군'으로 부활했다. 또한 조선 세조(수양대군)의 왕자 시절 군호 중 하나인 '진양대군(晉陽大君)'의 '진양'도 여기서 딴 것.[3] 대구임진왜란 당시 경상 감영이 상주에서 이전한 이후부터 성장했고, 동래(부산)는 일본과의 교역으로 나름 흥하던 도시이긴 했지만 중심도시로서의 역할은 아니었다.[4] 경남도청이 재이전하기 전 마산과 진주가 유치를 놓고 대립했으나 결국 누구도 얻지 못하고 1983년 계획도시인 창원으로 가버렸다.[5] 이는 비단 진주만의 문제가 아니며, 조선시대까지 찬란한 문화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던 내륙의 중심도시들이 1960년대~1990년대에 들어서 경부ㆍ경인라인 중심의 경제 개발 정책으로 인해 몰락한 경우는 공주, 상주, 안동, 충주 등 아주 많으며, 이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발달된 도시에게 영향을 줘서, 대표적 사례인 군산목포의 경우에는 전라도의 해운 화물의 중심지로 활약하다가 교통 인프라 부실로 인해, 산업화 시절때 해운 화물의 상당수가 부산항인천항에게 뺏기면서 몰락을 면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