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선정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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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昌德宮 宣政殿
창덕궁의 편전이다. 편전은 평상시 임금이 신하들과 함께 나랏일을 보고 경연을 하던 곳이다. 뜻은 선정을 베풀라는 뜻이 아니라[1] "정치와 교육을 널리 펼친다"이다.
편전이긴 하지만 여러 행사도 많이 열렸다. 조선 전기에는 왕비가 양로연을 여는 일이 꽤 있었으며 신하들의 아내를 불러 잔치를 여는 일도 있었다. 그리고 친잠[2] 을 행한 뒤 하례를 받는 일과 책보[3] 를 받는 의례 등을 거행하였다.
2. 역사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었다. 처음엔 조계청(朝啓廳)으로 부르다가 1461년(세조 7년) 12월에 선정전으로 고쳤다.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하였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인조 25년)에 재건한 후 오늘에 이른다.
3. 정문
4. 구조
- 현재 남아있는 궁궐 건물 중 유일하게 청기와 지붕이다. 왜냐하면 1647년(인조 25년)에 다시 지을 당시, 인경궁의 편전 광정전 건물을 헐어다 지었기 때문이다. 인경궁은 광해군이 궁궐 건설에 집착하여 세운 새 궁궐[4] 중 하나로 대부분의 지붕을 염초를 사용한 청기와로 만들었다. 인조 시기 인경궁을 훼철하면서 대부분의 건물들을 창덕궁과 창경궁 재건 공사에 활용하였는데 선정전도 그 중 하나였기에 청기와 지붕인 것이다. 이 때 옮겨온 창덕궁과 창경궁의 건물들은 이후 일어난 화재로 거의 대부분이 불탔지만 선정전만큼은 옮겼을 때 모습 그대로이다. 즉, 유일한 청기와 건물일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딱 하나 남아있는 인경궁 전각이다. 사족으로 같은 청기와 건물인 인경궁의 정전#s-6 홍정전 몸체를 많이 바꾼 후[5] 내전의 경훈각 건물로 만들었는데 이 역시 1917년 불타 없어졌다.
- 창경궁 홍화문, 창경궁 명정전 등과 함께 광해군 연간에 지은 건물 그대로이다. 따라서 17세기 건축양식의 특성을 연구할 때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현존하는 편전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 조선 후기에는 내전의 희정당을 편전으로 사용하면서 선정전은 혼전/빈전[6] 의 기능을 주로 맡았고, 그에 따라 정면에 새롭게 복도각을 설치하였다. 여기서 복도각은 혼령이 드나드는 길이다. 이는 똑같이 편전과 혼전 기능이 섞여있었던 창경궁과 경희궁의 편전인 문정전과 자정전도 마찬가지였다. 복도각은 순종황제 시기에 사라졌다가 문화재관리국에서 1997년에 복원하였다. 참고로 1926년 순종의 국상 때 마지막으로 혼전/빈전으로 기능하였다.#
- 순종 연간에 내, 외부를 서구식으로 변형하였다. 창호문도 유리문으로 바꾸고, 내부에 카페트를 깔았으며, 위에 언급한 것처럼 복도각과 옥좌의 단도 없앴다. 또한 벽체 일부를 개조하고 앞 마당에 잔디를 심는 등 원형을 많이 잃었다. 그마저도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거의 무너질 뻔 하기도 했다. 이후 부분 보수를 거쳐 1997년에 일부 달려있는 전구를 제외하고 본 모습대로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 내부는 칸막이 없이 하나의 공간으로 뚫려있으며 대들보 위를 우물천장으로 가려 서까래가 바로 보이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실내에도 단청을 칠하여 보존성을 높임과 동시에 화려함을 나타내었다. 제일 북쪽 중앙에 옥좌가 있으며 당가[7] 를 설치하여 왕의 권위를 돋보이게 하였다. 옥좌는 원래 경복궁 사정전처럼 단 위에 있어야하나 일제가 망가뜨린 뒤 지금까지 복원하지 못했다.
[1] 그 ‘선정’은 ‘善政’이다.[2] 조선시대 왕비가 직접 누에를 치고 고치를 거두던 의례.[3] 존호를 올릴 때 함께 올리던 옥책과 금보를 말한다. [4] 인경궁, 경덕궁(영조 연간에 경희궁으로 바뀐다.), 자수궁.[5] 이런 전각을 옮길 경우엔 옮긴 후에도 원래 용도와 비슷하게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창덕궁엔 이미 인정전이 있었기 때문에 같은 용도로 사용할 수 없어 건물의 골격을 바꾼 뒤 다른 용도로 사용한 듯 하다.[6] 혼전(魂殿): 임금과 왕비 신위를 임시로 봉안하던 곳. 빈전(殯殿): 상여가 나갈 때까지 왕이나 왕비의 관을 모시던 곳.[7] 옥좌 위에 만들어 다는 집 모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