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인정문
1. 소개
昌德宮 仁政門
창덕궁 정전인 인정전의 정문이다.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으로 들어와 오른쪽으로 꺾어 금천교를 건넌 뒤 진선문을 지나 왼쪽으로 돌면 보인다. 이는 광화문에서 근정문까지 일직선인 경복궁과 다르다. 경복궁은 예법에 따라 반듯하게 구획한 반면, 창덕궁은 자연 산세에 맞춰 지었기 때문이다.
이름 뜻은 당연히 ‘인정전의 문’이다. ‘인정(仁政)’ 자체는 맹자가 왕도정치를 강조하면서 언급했던 '인정(仁政)'에서 따왔다. 이름 그대로 '어진(仁) 정치(政)를 바탕으로 훌륭한 정치를 실현하겠다'는 의지를 담았다.
현판의 글씨는 선조 시대의 명필 북악 이해룡(北嶽 李海龍)이 쓴 것으로 전한다.
2. 역사
1405년(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었다. 건립 당시에는 행각 모서리에 십자각(十字閣)을 두었으며 문과 십자각 모두 중층이었다.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광해군 원년)에 복구했다. 이후 이괄의 난, 병자호란 때 다른 건물들이 다 불탔을 때도 무사했다.
그러나 1744년(영조 20년) 10월에 가까이 있던 승정원 건물에서 불이 나 화재를 입어 이듬해인 1745년(영조 21년) 3월에 재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 순종황제가 즉위하고 창덕궁으로 이어한 뒤 일제강점기까지 살았다. 그때 인정전 권역을 많이 변형했고 인정문 모습도 많이 바꾸어놓았다. 광복 이후인 1994년 원형 복원하여 오늘에 이른다.
3. 구조
-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총 6칸이다.
- 겹처마 양식에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세운 1층짜리 문이다.[1] 용마루, 내림마루, 추녀마루를 양상바름한 뒤, 2개의 취두와 4개의 용두, 그리고 동, 서 양쪽의 추녀마루 위에 5개의 잡상과 각 처마 끝에 토수를 놓았다.
- 기단 위에 원형 주춧돌을 놓고, 그 위에 원기둥을 올려 건물을 세웠다. 기둥머리에 기둥을 연결해주는 창방과 평방[2] 을 놓아 공포를 받치게 했다. 공포는 외 2출목, 내 3출목의 다포 양식으로 만들었고 기둥 사이마다 공포(주간포)를 두었는데 어칸에는 3개, 협칸에는 각각 2개의 주간포를 얹었다.
- 도리받침부재는 구름 모양으로 깎았으며, 중앙 2개의 기둥은 고주(高柱)라 하여 다른 기둥보다 훨씬 높게 세웠다.
- 문짝은 나무 판으로 만들었으며 중앙 열에 달았다.
- 인정문의 좌우에는 각각 10칸의 행각이 있고, 행각은 직각으로 북으로 꺾여 인정전 좌우의 행각과 바로 붙어있다. 원래 서쪽의 월랑에는 향실(香室)과 내삼청(內三廳)이, 동쪽 행랑에는 관광청과 육선루, 악기고 등이 있는 등 여러 관청들이 입주해 있었는데 현재는 향실을 제외한 전 행랑이 빈 공간이다.#
- 앞 마당이 찌그러져있다. 창덕궁 창건 당시부터 그랬다. 위에 언급한 것처럼 창덕궁은 자연 산세에 맞춰 지었고 또 남쪽에 종묘가 있어서, 종묘의 지맥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공간을 최대한 넓게 하려다보니 저런 모양이 나온 것. 이 때의 일화가 하나 있다. 태종은 이 마당이 마음에 안 들었는지 공사 책임자인 박자청을 측량을 게을리 했다는 죄목으로 옥에 가두고 행각을 부수게 한 뒤 그 곳에 담만 쌓았다. 하지만 한 달 뒤에 사면받은 박자청은 이후로도 능력을 인정받아 여러 공사를 계속 맡았고 행각도 원래 자신이 의도했던 대로 다시 만들었다. 즉, 이 찌그러진 마당은 박자청이 왕과 대립하면서까지 이루고자 한, 그가 의도했던 설계인 것.
- 위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순종 이어 이후에 달라진 부분이 많았다. 본래 정전이던 인정전이 황제의 알현소로 바뀌면서 인정문 역시 단순한 정문에서 알현소의 현관이 되었고 이 때 몸체가 많이 변했다.
우선 정면 3칸 중 앞 면의 가운데 칸과 뒷면의 좌, 우 협칸만 통행할 수 있게 한 뒤, 나머지 칸은 전부 유리창과 벽으로 막았다. 그리고 문짝도 근대식 나무 문으로 조성했으며 현판도 떼어냈다.[4] 또한 원래 인정문과 인정전은 별개의 건물이었으나, 인정전 좌, 우에 건물과 바로 연결되는 행각을 덧댄 뒤 그 행각을 인정문 행각과 연결되게 하여 인정문에서 인정전까지 실내 이동을 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정문 행랑은, 원래 바깥 쪽만 벽과 문으로 나누고 인정전 마당 쪽으로는 기둥만 놓았던 것을 개조 이후엔 전부 벽으로 막은 뒤 귀빈 대기실 등으로 활용하였다. 1990년대 조선시대 원형의 모습으로 복원하여 현재는 볼 수 없다.
- 다른 궁궐 건물의 문들과는 다르게, 용마루에 오얏꽃(자두꽃) 문양이 박혀있다.[5] 바로 대한제국 국장 및 황실의 문장이었던 '이화문(李花紋)'이다.[6] 대한제국 황실이 전주 이씨라 오얏꽃을 문장으로 삼은 것이다. 이렇게 가문 문장을 새겨넣는 것은 개화기 서양이나 일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7] 크게 순종이 이어했을 당시에 박았다는 주장과 일제강점기 이후에 박았다는 의견이 있다. 전자는 이미 구한말에 궁에 유리창과 커튼, 카페트를 들이는 등 다방면에서 외국식을 도입했던 것을 들 수 있고, 후자 일제 설은 일본이 전통 양식 파괴를 위해 일부러 용마루에 박았다는 것이다. 다만, 이것이 와전되어 꽃 종류를 구분하지 못하고 사쿠라를 박았다는 루머가 나돌기도 했다. 이 오얏꽃 문양은 1990년대 인정전 일곽의 원형 복원 당시에도 떼지 않았고 지금까지 있다.
4. 여담
- 조선 왕들의 즉위식을 이 곳에서 많이 열었다. 정전이 아닌 정전의 정문에서 거행한 이유는 대부분 선왕의 장례기간에 즉위식을 하기에, 분위기가 화려함과 웅장함보다는 슬펐기 때문이다.# 10대 연산군을 시작으로 17대 효종, 18대 현종, 19대 숙종, 21대 영조, 23대 순조, 25대 철종, 26대 고종까지 임금 8명이 이 곳에서 왕위에 올랐다.
- 이 곳에서 임금이 직접 죄인을 국문하는 친국을 많이 열었다. 사안의 중대함에 따라 장소가 달라졌는데 꽤 무거운 죄를 저지른 중죄인들을 주로 인정문에서 심문했다. 즉 여기까지 왔다는 건 사실상 살 가망이 없다는 얘기다.(물론 다 그렇다는 건 아니지만) ## [8]
- 성종 시기 문과의 초시[9] 와 중시[10] 를 동시에 치를 때, 인정전에서 함께 보면 부정행위가 있을 것을 염려해 인정전 마당에선 중시를, 인정문 마당에선 초시를 치르게 하였다. #
[1] 한옥에서는 주로 ‘단층(單層)’으로 표현한다.[2] 창방 위에 얹혀 공포를 받치는 넓은 직사각형 단면의 긴 건축 부재.[3] 부재(部材)의 두 끝 부분에만 칠한 단청.[4] 북쪽의 중앙 칸은 나중에 통행할 수 있게 바뀌었으며 현판도 나중에 다시 걸었다.[5] 이는 인정전도 마찬가지. 단 인정문에는 앞 뒤로 3개, 총 6개가 박혀있고 인정전에는 5개가 박혀있다.[6] 배꽃을 가리키는 이화(梨花)와 헷갈리지 않도록 주의. 이화학당, 이화여자고등학교, 이화여자외국어고등학교, 이화여자대학교의 이화는 배꽃(梨花)이다.[7] 일본의 중세 건축물에 가면 가몬(일본)을 이렇게 새겨넣는 것을 자주 찾아볼 수 있다.[8] 경희궁에 왕이 머물 땐, 숭정문에서 했다.[9] 과거의 첫 시험.[10] 당하관(堂下官) 이하의 문, 무관에게 10년마다 한 번씩 보게 하는 과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