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 홍문관
1. 개요
昌德宮 弘文館
창덕궁 궐내각사 구역에 있는 홍문관 청사이다.
홍문관은 궁중의 문서 처리와 관리 및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하던 기관이다. 사헌부 · 사간원과 함께 삼사(三司)로 불릴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홍문관 문서 참조.
2. 현판
‘옥당(玉堂)’으로 써두었다. 옥당은 홍문관의 다른 이름이다. 뜻은 '옥같은 집', '옥같이 귀한 인재들이 일하는 집'이다.[1]
조선시대 옥당에 걸었던 현판이 2개 남아있다. 하나는 임진년[2] 9월에 이원영(李元英)이 전서체로 쓴 것으로 세로로 긴 모습이고#, 다른 하나는 1699년(숙종 25년) 새해 첫날에 홍문관 응교[3] 였던 응자 김진규(應紫 金鎭圭. 1658 ~ 1716)가 쓴 것으로 가로로 긴 형태이다.# 이 현판들은 현재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 중이다.
현재 현판은 2000년대에 복원하면서 새로 만든 것이다. 서예가 소헌 정도준 선생(紹軒 鄭道準. 1948 ~ )이[4] 새로 쓰고 각자장 철제 오옥진 선생(鐵齋 吳玉鎭. 1935 ~ 2014)이 새겼다.
3. 역사
1463년(세조 9년)에 세조가 집현전을 대신할 문서 보관 기관으로 처음 만들었고, 성종이 자문 및 학술 연구 기관으로 재편했다. 그때 홍문관 청사도 지은 듯 하다. 1592년(선조 25년)에 임진왜란으로 불탄 후, 광해군 때 재건했다. 1907년(융희 원년)에 홍문관 기구를 폐지했고[5] 일제강점기에는 건물마저 헐었다. 2000년 ~ 2004년에 복원했고 2005년에 일반에 개방하여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 공포는 초익공이다. 창방과 장여 사이에 소로를 두었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로 마감했다. 용두는 용마루 위에 2개, 추녀마루 위에 4개 올렸다. 지붕 측면의 합각은 나무판으로 마감했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했다.
- 정면 5칸, 측면 3칸, 총 15칸이다. 실내 구조는 아랫 그림 참조.
- 정면 온돌방 외면에는 띠살문을 달았고 하단부에는 머름을 달았다. 측면 외면은 툇간을 제외한 나머지 칸에 중인방을 두고 위, 아래로 벽을 둔 형태이다. 뒷면 외면은 가운데 3칸의 경우, 가운데에 문선을 두고 그 안에 초록색 나무판으로 만든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는 벽으로 마감하고 하단에 머름을 설치한 모습이다. 뒷면 양 가장자리 칸은 중인방 위에 문선을 두고 그 안에 창을 설치했으며 나머지는 벽을 둔 형태이다.
[1] 후술하겠지만, 세종 때 자문, 학술기관이었던 집현전을 새로 개편한 게 홍문관이다. 그래서 역으로 집현전을 옥당을 직역한 'Jade Hall'로 번역한 사례를 종종 볼 수 있다. 문명이 대표적인 예#.[2] 어느 임진년인지는 모른다.[3] 應敎. 홍문관과 예문관에 있던 정4품직.[4] 경복궁 흥례문과 유화문 및 창덕궁 진선문의 현판과 숭례문 복원 상량문을 썼다.[5] 이후 홍문관 업무는 규장각에서 담당했다.[6] 보통 전통 건축에선 단층으로 표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