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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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máda České republiky[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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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장
라운델
설립
1993년 1월
총병력
30,021 명, 전투 병력 21,733 명 (2013년)[2]
Pozemní síly Armády České republiky
전차 총합
123 대 (2013년)
장갑차 총합
501 대 (2013년)
포병 총합
182 문 (2013년)
수송 트럭
3,000 대 이상 (2013년)
군용 차량
200 대 이상 (2013년)
Vzdušné síly Armády České republiky
전투기 총합
14 기 (2013년)
공격기 총합
25 기 (2013년)
훈련기 총합
9 기 (2013년)
헬리콥터
59 기 (2013년)
수송기
21 기 (2013년)
1. 개요
2. 역사
2.1.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이전
2.1.1.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2.1.1.1.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2.1.1.2.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2.1.1.2.1. 한국 독립군과의 관계
2.1.1.3.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2.2. 체코슬로바키아군 (ČSA, 1918-1954)
2.2.2. 2차대전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군
2.3.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ČSLA, 1954-1990)
2.4. 체코슬로바키아군 (ČSA, 1990-1992)
2.5. 체코군 (AČR, 1993-)
3. 편제
3.1. Generální štáb Armády České republiky (참모본부)
4.1. 개인 화기
4.2. 지상 장비
4.3. 항공 장비
5. 계급
6. 대중매체
7. 관련 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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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체코의 군대로 체코가 내륙국인 관계로 육군과 공군으로만 구성돼있다. 국방비 20억 달러,[3] 전투병력 2만명 규모[4] 의 소규모 군대지만 군대의 수준과 장비의 질은 선진국 군대에 비견할만큼 뛰어나다. 체코군의 주 목적은 NATO 조약 제5조에 의거해 북대서양 조약기구 가맹국과 체코 공화국의 상호간 공동방위를 취하는 것이다.

2. 역사



2.1. 체코슬로바키아 건국 이전


역사적으로 후스 전쟁에서 활약한 후스파 군대와 애꾸눈의 불패명장 얀 지슈카, 30년 전쟁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최고의 명장 알브레히트 폰 발렌슈타인이 유명하다. 1620년 빌라호라 전투에서 완전히 주권을 잃어버려 수세기 동안 오스트리아 제국 원수인 요제프 라데츠키를 제외하곤 딱히 주목할 만한 군인이나 군사 조직의 출현은 없었다.

2.1.1.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2.1.1.1. 프랑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프랑스 외인부대에는 체코인들이 모여들었고, 곧 체코인들로만 구성된 부대가 외인부대 모로코 사단 산하에 1개 중대 규모로 창설되었다. 이 부대는 1년간 다양한 전투에 참여했지만 서부전선의 막대한 병력 소모율을 감당하지 못했고, 1915년에 해체되어 부대원들은 각기 다른 부대로 분산되었다.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는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키고자 시도하지만, 러시아 내전이 발발하면서 전혀 뜻밖의 상황에 마주하게 된다. 이는 밑의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단락에서 설명한다.
어쨌든 이로 인해 체코슬로바키아인 부대의 재창설은 1917년에야 이루어졌다. 이번에는 프랑스 육군 보병사단 휘하에 두 개 연대 규모로 창설되었다. 이듬해 6월에 프랑스 정부가 민족자결주의 원칙을 받아들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을 공식적으로 지지하면서, 이들은 상위 프랑스 사단들로부터 분리되고 신설된 체코슬로바키아 여단으로 배속되었다. 이 날이 6월 30일인데, 현 체코군은 이 날을 창군일로 지정하여 매해 기념 행사를 가지고 있다.
이들은 전쟁이 끝나자 귀국했다.

2.1.1.2. 러시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1918년에 시베리아에서 촬영된 체코 군단의 모습. 기차 앞에서 깃발을 들고 포즈를 취하는 병사들, 당시 사령관 미하일 디테리흐스[5]와 그 참모들의 모습, 도열한 병사들과 군마들, 야포들의 모습이 보인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군인으로써 참전했다가 러시아군의 포로로 잡힌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과 재러 체코인, 슬로바키아인들이 모인 이 부대는 총병력 5만의 군단급 부대로 결성되었다. 이들은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맞서 싸웠지만, 볼셰비키 혁명으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신생 소비에트 정부가 동맹군과 강화를 맺어 1차 대전에서 빠지면서 위치가 붕 뜨게 된다. 그러자 이들은 이제 프랑스 외인부대에 가담하여 서부전선에서 독일에 맞서 싸우고자 내전에 중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소비에트 정부와 협약을 맺어 레닌이 주선한 경로를 따라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통해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했다. 당시 브레스트 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인해 독일과 오스트리아군이 서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향해 물밀듯이 들어오고 있어 서부 유럽 러시아 지역의 항구를 통해 이동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발트해의 주요 항구인 리가탈린 등은 독일의 수중에 떨어졌고, 내전 중인 핀란드에도 독일군이 상륙해 핀란드 백군을 지원하며 북러시아 지역을 위협했다. 발트해 항구 중 소비에트 러시아에 남은 건 상트페테르부르크 하나였지만 이미 발트 해 전체가 막스 폰 호프만 소장이 이끄는 독일군의 영향권에 들어온 이상 체코군이 여기로 나올 수는 없었다. 흑해의 경우 가장 큰 항구인 오데사에는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원수의 오스트리아군 사령부가 자리를 잡았고, 돈 강의 끝자락인 로스토프까지 동맹군이 진출했다. 그리고 이를 뚫고 나와봤자 프랑스로 가려면 적국인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통과해야만 했다. 마지막으로 백해와 면한 북러시아의 지역의 아르한겔스크무르만스크[6]는 썩 좋은 항구도 아니었던데다가 상술한 대로 내전 중인 핀란드에 상륙한 독일군의 위협을 받았고, 적군의 세력권이 아니라 영국의 지원을 받는[7] 러시아 백군의 세력권에 놓여 있어 볼셰비키와 백군 간의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결국 체코 군단도 시베리아 철도로 이동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3월에 철도 요충지인 우크라이나 바흐마하에서 요하네스 폰 에벤 보병대장의 독일군과 프란츠 로어 폰 덴타 원수의 오스트리아군에게 공격을 받았다. 붙잡히면 오스트리아의 반역자로 취급받아 총살당할까 우려했던 군단은 격렬히 저항했고, '''자신들이 입은 피해의 두 배에 달하는 피해를''' 독일군에게 안겨주었다. 별다른 충돌 없이 진격하다 큰 타격을 입은 독일군은 이들과 충돌하는 것이 무익함을 알고 그들이 첼랴빈스크로 떠날 수 있게 보내주었다.
그렇게 이동이 시작되었지만, 문제는 볼셰비키 적군이 이들을 상당히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우선 체코 군단은 당시 러시아 내에서 가장 잘 단련되고 잘 조직된 무장 세력, 그것도 군단급 세력이었기에 이들이 러시아 내에 방치되다가, 또는 이동하다가 백군에 가담한다면 내전의 판세가 뒤집어질 수 있었다. 그리고 외세, 특히 이들이 가담하고자 하는 연합군이 군단의 보호와 볼셰비키의 친독적 노선을 명목으로 내전에 개입해 혁명을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이라는 의심이 팽배했다. 한편, 군단도 군단 나름대로 독일과 조약을 맺어 혼자 세계대전에서 이탈한 배신자 볼셰비키를 불신했다. 우선적으로는 독일이 볼셰비키에게 압력을 넣는다는 의혹이 있었다. 원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는 볼셰비키와 협상해 무장을 해제한다는 불만족스런 조건으로 안전하고 수월한 통행을 보장받았는데, 여기에 체코 군단을 무장 해제시키고 서부로 넘어가지 못하게 최대한으로 억류하려는 독일의 의도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 외에는 군단 내의 공산주의자들이 볼셰비키와 내통하여 군단을 무너뜨리려 시도할 우려가 있었다.
이렇게 양측의 불신으로 갈등의 골이 깊어지던 중, 결국 사건이 발생한다. 1918년 4월, 군단은 첼랴빈스크를 지나던 도중 본국으로 송환되던 헝가리인 포로들과 만나게 된다. 독일의 포로 송환 요청에 따라 본국으로 이송되던 오스트리아군 포로들이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지배 민족인 헝가리인 포로들, 그리고 그들의 피지배 민족인 체코슬로바키아인들로 구성되어 그들을 무너뜨리고자 전쟁에 참전한 군단의 사이가 좋을 리는 당연히 없었다. 분위기는 곧바로 험악해졌고, 양측의 물리적인 충돌이 발생했다. 사태를 중재하기 위해 볼셰비키 적군이 중재를 위해 개입했지만, 이들은 독일과 굴욕적인 평화조약을 맺었기에 체코 군단만을 체포해 조사하고 일부를 총살해버렸다. 이런 볼셰비키의 모습에 폭발해버린 체코 군단은 봉기를 일으켜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장악한다. 5만에 달하는 군단 전체가 철도를 따라 이미 죽 늘어서 있었기에 이는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백군의 편에 서서 러시아 내전(시베리아 내전)에 가담해 독일과 강화한 볼셰비키 적군과 싸우기 시작하였다.
볼셰비키의 우려대로, 이로 인해 연합국도 이들을 지원할 것을 천명하며 러시아 내전에 개입한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7만의 일본군을 중심으로 5천 명 가량의 미군과 800명 가량의 영국군, 1400명 가량의 이탈리아군, 그리고 100명 가량의 프랑스 식민지군이 들어왔다. 체코 민족주의로 똘똘 뭉친 이들 군단은 자족 기능이 갖춰진 장갑열차와 연합군의 보호, 미국 군수산업체에서 위탁 생산한 러시아 무기들을 바탕으로 카잔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늘어선 철도와 보급선을 지키면서 동러시아, 시베리아 지역 백군 세력을 유지시키는 가장 중요한 군사 집단이 되었다. 한때 적군이 수월하게 전 러시아를 장악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체코 군단의 반란 이후 전세가 역전되어 시베리아는 대다수 지역이 백군 소속으로 넘어갔고, 시베리아 백군은 서부의 유데니치군, 남부의 남러시아군과 함께 삼면에서 적군을 포위했다.
하지만 1918년 말 1차 대전이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고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정부가 귀국을 종용하자 이들은 1919년부터 하나 둘씩 본국으로 귀환하기 시작했다. 이때쯤 되면 서부 지역의 백군이 일소되고 시베리아에서도 점차 백군이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었는데,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이끄는 시베리아 백군의 주축인 전러시아 임시정부의 가혹한 정책은 현지인들뿐만 아니라 체코 군단에게도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었다. 1차 대전도 끝났고 조국도 독립했겠다, 이미 남의 나라 내전에서 싸울 이유를 잃고 고향에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더 컸던 가이다 이하 군단원들은 콜차크의 백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켰[8]지만 백군미군, 일본군에게 진압당했다. 그러자 군단원들은 백군이야 어떻게 되든 적군과 협정을 맺고 내전에 중립을 선언한 후, 자신들이 장악한 노선을 따라 퇴각하는 콜차크를 이르쿠츠크에서 적군에게 넘겨버린[9] 대가로 안전한 퇴각을 보장받았다.[10] 이들이 퇴각하자 연합군도 일본군을 제외하고는 전부 물러갔고, 백군 또한 급속히 무너져내렸다. 후에 본국으로 돌아온 이들 군단의 주요 인사들은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의 요직을 맡았지만, 2차 대전 후 체코가 공산화되자 볼셰비키 혁명에 대항했다는 이유로 언급이 금기시되었다. 그래서 이들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1990년대 이후에나 다시 시작되었다.

2.1.1.2.1. 한국 독립군과의 관계


체코 군단 주요 사령관 세 명의 모습. 영상 24초 중간에 프랑스군 케피를 쓴 사람이 밀란 스테파니크, 그 왼쪽에 애꾸눈 장군이 얀 시로비, 그 왼쪽의 키 큰 사람이 라돌라 가이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할때 우리나라의 독립군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접촉한 적이 있다고 하는데 독립군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게 신형 무기를 구입해 청산리 전투를 치른 것은 유명한 일화다.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장군들과 상해 임시정부의 대표들은 많은 접촉과 소통을 유지했으며, 임시정부의 이승만 대통령이 은색 꽃병에 한국 독립을 위해 기여한 것에 대한 감사의 글을 적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총사령관 라돌라 가이다 장군에게 선물했다고 한다. 참고로 출처는 한국-체코 관계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였던 주한체코대사 야로슬라브 올샤 2세.[11]
다만 그렇다고 해서 세간의 인식처럼 체코 군단이나 가이다 장군이 한국의 독립 정신에 감화되어 적극적으로 도왔다거나 한 것은 아니다. 이들은 일본군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지원을 받았기에 자신들의 스폰서인 일본에 저항하는 한국 독립군을 공식적으로 지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군단 사령부 내부 문건에는 한국인들과의 무기 거래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일본 제국 또한 여러 정보원들을 통해 체코 군단이 한국 독립군에게 무기를 넘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이를 불쾌하게 생각하며 이 행위가 지속될 경우 개입하겠다고 군단 측에 은밀히 압박을 넣었다. 1920년 4월 7일 군단 일원인 밀로스 헤스(Milos Hess) 중령이 얀 시로비(Jan Syrovy)장군[12]에게 보낸 전보와 동년 3월 7일 체코슬로바크 데니크[13] 기사에 따르면 군단 측은 이 점을 매우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종합해보면 북로군정서와의 무기 밀매는 군단 사령부의 공식적 승인 없는 일부 군인들의 일탈적인 행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 또한 똑같은 피지배 민족으로써 동질감을 느껴 지원해준 것이라기보다는 급전을 마련하기 위함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군단원들은 한국인뿐만 아니라 중국인, 러시아인 가리지 않고 무기를 팔았기 때문이다. 당장 한국 독립운동가들을 탄압하던 장쭤린봉천군벌에게는 프랑스로부터 지원받은 르노 FT-17 전차 '''36대 가량'''을 팔아치웠다. 그리고 그들이 보유하고 있다가 팔았다는 무기 또한 흔히 생각하는 '''체코제 무기가 아니었다.''' 모국인 체코가 보헤미아 왕국모라비아 변경백국이란 이름으로 오스트리아와 헝가리의 지배를 받고 있는 상황에서 본국인 체코 무기로 무장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오히려 체코제 무기는 군단의 적인 오스트리아인들이 썼고, 군단은 러시아 제국군 소속으로 참전했다가 후에는 백군, 연합군의 지원을 받고 싸웠기에 러시아제, 미제, 영국제, 일제 등의 타국 무기로 무장했었다. 특히 미국에서 위탁 생산한 모신나강 소총이 주력이었다. 북로군정서에 넘겨준 것도 당연히 이것들.

시베리아의 용사로 체크국 건국 원훈(元勳)으로 이름을 세계에 떨친 가이 다 장군이 해삼위 혁명사건으로 실각하여 횡포한 콜차크 제독에게 원한과 증 오의 한 모습을 보여주고 다시 탄생한 조국의 품으로 가던 길에 상하이에 들러 수십 일간 아스터 여관에 체재하다가 일전 출발 귀국의 길에 올랐다. 기자는 작년 12월 중순에 가이다 장군이 상해에 왔다는 소식을 듣고 곧 서신을 보내 면회를 청하였더니 2일 후에 호의로서 승낙하는 회신이 왔다.

약속한 날에 장군을 여관으로 방문한 즉 용모 준수한 한 청년 장군이 미소 로서 기자의 손을 잡으니 실로 일면여구(一面如舊)라. 들은 즉 장군은 지금 28 세의 청년이라. 육군 소위로 출정하였다가 1918년에 시베리아군의 사령관이 되고 이로 인하여 다시 탄생한 조국 체크민국의 육군총장이 되었다. 추운 날씨 에 대한 의례적인 인사가 오간 뒤에 장군은 극히 성의 있는 태도로 아래와 같 은 담화를 우리나라에 보냈다.

‘아아 나의 조국도 수백 년 노예의 치욕을 당하다가 지금 부활하였소. 작년 3월에 귀국이 독립을 선언하고 역사에 유례를 볼 수 없는 용기와 애국심을 발 휘한 것을 볼 때 세계가 다 놀라고 칭찬하였지만 그중에 가장 기쁜 감동을 받 은 것은 아마 우리(체크) 국민이었을 것이요. 그때로부터 나는 귀국 독립운동의 진행을 동정과 기도로써 주목하였더니 오늘 여기서 한국인을 만나 어찌 반 가운지 모르겠소.’

‘나는 귀국의 전도(前途)를 혁혁한 희망으로 보오. 지금은 비록 일본이 압박 할지나 세계의 대세는 이미 일본의 군국주의를 용납할 시기가 지났소. 그러니 까 귀국민이 통일과 인내와 용전(勇戰)으로 나아가면 독립을 완성할 날이 멀지 않을 것이오.’

‘나는 가장 친하여야 할 우국의 일인으로 귀 국민에게 고하려 하오. 그것은 안으로 굳게 단속하고 밖으로 힘 있게 선전(宣傳)하여 용장(勇壯)한 최후의 일 전을 준비하라 함이오.’

장군은 그 청랑한 음성으로 한 시간 이상이나 담화를 계속하였는데 그 중 에는 발표하기 어려운 구절도 있지만 최후로

‘나는 구라파에 가서 필로서 설로서 귀국의 독립운동을 선전하겠소. 같이 부활하는 국민의 청의(請誼)로서 인도와 자유를 위하여 인류의 의무로. 원컨대 나를 귀국의 동지로 알아주시오. 내 호의를 귀 동지들에게 전하여 주시오’ 하 고 다시 만날 때는 피차에 영광 있는 독립국민으로 만나기를 약속하고 길게 악수하였다.

익일에 안창호와 장군과의 긴 시간의 담화가 있었고, 여운형씨와도 양차 회견하여 간담이 있었다.

출발 시에 부두에서 여운형씨가 온 것을 보고 통역을 대동하고 배에서 내 려와 ‘성탄절에 주신 선물은 영원히 기념하고 나의 국민들에게 자랑 하겠소.’ 하며 다시금 우리의 끝까지 건국하기와 자기는 우리의 동지로 구주에서 힘쓸 것을 약속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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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신문 제37호(1920년 1월 13일자 기사)[14]

사령관 가이다 장군의 경우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를 찾은 임정 인사인 여운형과 개인적으로 만났고, 그가 돌아가는 길에 자기 부관 한츠를 동행시켜 보낸 적이 있다. 일본의 영향에 놓인 체코 군단의 사령관으로써 이는 분명 이례적인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내전이 끝난 이후 귀국길에 상하이에서 이광수[15]로 추정되는 독립신문 기자와 인터뷰하고[16] 여운형과 다시 만나 오랜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을 만큼 한국 독립에 상당한 관심을 가졌을 수 있다. 그러나 이를 그가 완전히 진심으로 한국 독립운동에 관심을 표한 증거라고 믿기는 힘들다. 그는 독립신문과의 인터뷰와는 달리, 본국으로 돌아가 한국을 위해 뭔가 행동을 하지는 않았다. 1920년 펴낸 자서전 《나의 기억들》에서 극동 한인에 대한 이야기를 짤막하게 언급하고, 1927년 자신이 해외에 체류하며 얻은 기념물을 전시할 때 상해 임정에게 받은 은컵[17]을 소개한 정도가 다이다. 자서전에서 가이다는 한인들과 중국인들이 일본에게 영토를 뺏기고 폭압적인 지배를 받고 있어 반일 감정이 크다는 사실을 알리긴 했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 한인들과 중국인들을 자신의 '''열광적인 추종 세력'''이라고 소개했다. 가이다는 그 이유로 이들이 자신의 체코 군단이 '어떻게 일본의 음모를 물리쳤는지' 보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데, 이에 대한 구체적인 설명이 없을 뿐더러, 가이다 봉기 당시가 아닌 내전의 전체적인 기간 동안 체코 군단이 일본군에 상당한 도움을 얻고 그 영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는 곧이곧대로 믿기는 어려운 주장이다. 그리고 또 가이다가 전시회에서 임정에게 받은 은컵을 소개할 때, 그 설명란에는 '''자신이 주도해 상해 임정을 설립했다'''는 잘못된 설명이 붙어 있었다.[18]
물론 이 정도로의 지지라도 고마운 것이고, 이들로부터 얻은 무기가 이후 한국 독립운동에 큰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들의 도움을 확대해석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2.1.1.3.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이탈리아 전선에서도 체코 군단이 결성되어 이탈리아 왕국군 소속으로 싸웠다. 다만 그 결성은 1918년 1월로 상당히 늦었다. 원래 이탈리아 내에 거주중인 체코 및 슬로바키아인들이 그리 많지 않았던데다, 이탈리아의 전쟁 참여도 늦었기에 초중반에는 체코인 포로들이 그리 많지 않았기 때문이다. 거기다 이탈리아는 달마티아 지역을 노리고 전쟁에 참여하고 있었는데 여기는 체코, 슬로바키아인들과 같은 슬라브 계통인 크로아티아인들이 살고 있는 지역이었다. 그래서 이탈리아 정치계는 슬라브계인 체코인들을 지원하는 것을 꺼렸다.
다만 이 상황 속에서도 체코, 슬로바키아인들의 이탈리아 지원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특히 1916년 프란티셰크 흘라바체크라는 체코인 장교가 탈영해서 이탈리아 측에 귀순, 고리치아 지역의 상세한 정보를 이탈리아에 불어버림으로써 11차 이손초 전투에서 이탈리아가 승리하는 데 기여한 뒤로는 이탈리아 정계의 체코군단 논의가 더 활발해졌다.
그리고 12차 이손초 전투(카포레토 전투)에서 이탈리아군이 괴멸적인 패전을 겪은 뒤, 급해진 이탈리아는 체코인들과 슬로바키아인, 그리고 슬로베니아인들을 한데 묶어 5개 연대를 새로 창설했다. 이후 이들은 많은 전투에 참여했고, 종전 직전의 비토리오 베네토 전투에도 예비대로 참여했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는 하나 둘 고국으로 돌아갔지만 해산하지는 않았다. 당시 신생 체코슬로바키아와 주변국 간의 갈등 상황이 지속되고 있었기 때문에, 부실한 군대를 가지고 있던 체코 정부는 이탈리아군 사령관들의 지휘를 받는 이들 이탈리아 체코 군단을 주변국과의 전쟁에 투입했다. 이들은 폴란드, 헝가리와의 국경 분쟁과 전쟁에 참여해 브라티슬라바톄신 지방을 지켜냈다. 이후 프랑스 군사고문단이 체코군 창설을 지원하기 위해 들어오자, 체코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들 연대들의 이탈리아인 사령관들을 프랑스인들로 교체하고 체코군 편제에 편입시켰다.

2.2. 체코슬로바키아군 (ČSA, 1918-1954)


Československá armáda (Czechoslovakia Army)
체코슬로바키아의 군대.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해체 이후 구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출신 군인들이 자발적으로 임시로 구성한것이 그 시초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 내부에 슬로바키아인 비중이 심각하게 낮다는 구 오스트리아 제국군의 문제점까지 계승됐다. 또 점차적으로 해외의 체코슬로바키아 군단도 신생 체코슬로바키아 임시군에 합류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임시군은 초기부터 보헤미아의[19] 독일 분리주의자들의 소요사태, 톄신 지방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 전쟁, 남슬로바키아, 루테니아 지방에서의 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 전쟁 등 우여곡절을 겪였다. 이후는 체코슬로바키아군/1938년 항목 참조.
이 시절엔 소규모지만 엘베 강다뉴브 강을 지키기 위해 해군도 있었다.영문위키

2.2.1. 2차대전 직전의 체코슬로바키아군


1938년 당시 체코슬로바키아군은 중부유럽에서 독일 국방군 다음으로 강한 군대였다. 동부유럽의 2인자였던 북쪽의 폴란드군과 비교해보면 체코슬로바키아 육군과 폴란드 육군의 규모는 거의 비슷했으나 질적으로 체코슬로바키아가 압도적이었고 '''폴란드 공군력은 체코슬로바키아 공군력의 30% 수준에도 못 미칠정도'''였다. 총기의 경우 독일군의 총기와 동등하거나 약간 우월한 성능을 가질 정도였으며 전차의 경우는 독일 육군의 전차 성능을 능가했다. 독일과의 국경지대에는 상당히 발달한 국경요새도 있었다. 프랑스, 영국, 소비에트 연방과 방위조약을 맺어 전시에는 나치 독일을 쌍방향에서 압박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군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었다. 독일과의 국경지대에는 상당히 요새화가 진척되었으나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지대는 그 수준이 미약했고 슬로바키아 지역에 주둔하는 군구의 사단수가 부족해 이곳을 장악당한다면 소련의 지원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이 됐을 것이다. 군대 내부에는 12,000명의 수데텐 독일인이 근무하고 있어 전시에 큰 내부의 위협이 될 수 있었고 공군력은 괜찮았으나 루프트바페에는 훨씬 못 미쳤다.
믿음직한 동맹인줄 알았던 영국, 프랑스는 나치 독일의 프로파간다에 선동당해 독일에게 유화정책을 펼쳤고 가장 강력한 동맹관계를 맺었던 소련조차도 프랑스가 참전할 경우에만 개입하겠다고 밝혔으며 단독적으로 개입한다고 해도 체코 내부의 소련의 영향력이 강해져 소련의 위성국으로 전락할 수 있던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 체코슬로바키아와 독일 사이에 전쟁이 발발한다면 체코슬로바키아군은 독일군에게 큰 피해를 줄 수 있었을 것이다.
체코슬로바키아군/1938년 항목, 녹색 작전 항목 참조.

2.2.2. 2차대전 당시의 체코슬로바키아군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체코슬로바키아군은 해체되고 몇개의 군사조직이 탄생하게 된다.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보헤미아-모라바 보호령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의 군대, 서유럽, 중동, 소련에서 활동하던 수많은 독립군조직이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군의 활약을 다룬 영화로는 영국 본토 항공전에 참전한 93명의 체코인 파일럿을 다룬 다크 블루 월드와 체코인 특수부대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암살작전을 다룬 새벽의 7인이 있다. 참고로 워낙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인지도가 없다보니 이 항목 작성 전까지만 해도 다크 블루 월드가 폴란드군 항목에 버젓이 폴란드 파일럿의 활약상을 다룬 영화로 게재되어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군/제2차 세계 대전 항목 참조.

2.3.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ČSLA, 1954-1990)


Československá lidová armáda (Czechoslovak People's Army)
냉전당시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 1945년 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군들이 조직하긴 했으나 어째서인지 1954년부터 인민군이라는 명칭을 쓰기 시작했다. 1955년 바르샤바 조약의 가맹국이 되었고 바르샤바 조약 가맹국들중 소련, 동독, 폴란드와 함께 군사력이 강한 편이었다.
평시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의 주력을 이루는 부대는 체코에 주둔하고 있던 서부군집단으로 전체 병력의 85%가 서부군집단 소속이었다. 슬로바키아에 주둔하고 있던 동부군집단은 전체 병력의 15% 수준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주로 군사 학교, 군창고, 후방 정비소 등이 대부분이었다.
서부집단군은 예하에 2개 군[20] 을 두고 있으며 총 3개 전차사단과 5개 차량화소총병사단을 두고 있었다. 여기에 전시 동원령이 떨어질 경우 동부군 예하의 카테고리 C급 전차사단 2개가 2개 차량화소총병사단과 1개 포병사단, 1개 공중강습여단으로 보강되면서 새로운 군을 창설하게 되어 있었다. 여기에 6개 전투기연대/4개 전폭기연대/3개 정찰전대로 구성된 공군을 보유하고 있었다.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 항목 참조.

2.4. 체코슬로바키아군 (ČSA, 1990-1992)


Československá armáda (Czechoslovakia Army)
1990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정권 붕괴 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해체까지 잠시동안 존속했던 체코슬로바키아군이다. 민주화 이후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은 시민의 군대가 아니라 공산당의 군대라고 간주되고 군대의 민주주의시민, 조국에 대한 무한한 헌신을 위해 군대 이름에서 '인민'을 빼버렸다.
1991년에는 바르샤바 조약을 탈퇴하고 유럽 군축 조약에 서명하였다. 1990년부터 1991년에는 걸프전에 참전했다. 1993년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이 해체됨에 따라 체코군슬로바키아군으로 분할되었다.

2.5. 체코군 (AČR, 1993-)


Armáda České republiky (Army of Czech Republic)
체코슬로바키아 연방 해체 이후 현대의 체코군. 1933년 체코군은 총병력이 90,000 명이나 됐는데 1999년에는 63,601 명으로, 2005년에는 35,000 명으로 감소했다. 그후 감축은 계속되어 현재 전투병력 20,000 명, 비전투병력 10,000 명으로 크게 감소했다. 2300대의 전차와 3000 대, 20만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은 이제 전투병력 2만명, 전차 120대가 되었고 1999년에 나토에 가입하였고 유럽안보협력기구의 일원으로써 세계각지에 군대를 파병하여 평화유지와 인도주의적 작업에 기여하고 있다.
본래 징병제를 시행 중이었으나 민주화 이후 복무 기간을 점차 단축하여 모병제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가서는 군축으로 정원도 적어서 상당수가 합격판정은 받아도 가지 않았다. 결국 징병제는 2004년 완전히 폐지되었고 국가 비상 사태와 전쟁시에만 동원령이 발령된다.
2013년 7월 1일에는 대대적인 군사조직 개편이 있었다.
2016년 이후로는 체코에서도 너무 국방비 감축 및 군대 감축한 게 아니냐며 다시 국방 투자를 늘리자는 의견이 많이 나온다. 체코 의회에서도 2017년부터는 국방비 지출을 조금씩 늘리기 시작했지만 일단은 예비군 전력 위주로 투자중이다.

3. 편제



3.1. Generální štáb Armády České republiky (참모본부)



3.1.1. 체코 육군


Pozemní síly Armády České republiky

3.1.2. 체코 공군


Vzdušné síly Armády České republiky

4. 장비


체코는 중소규모의 군대를 유지하고 있음에도[21] 준수한 군사 과학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로 유명하다. 과거에는 수많은 무기를 개발했으나 유럽 군축의 영향으로인지 군수산업이 마개조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마개조 기술은 이스라엘에 가까울 정도이다. 이 분야에서 인지도가 있는 무기는 T-72M4CZ, BVP-M2SKCZ가 있다.
[image]
러시아군도 꾸준히 무기를 개량하고 있으니 러시아 무기보다 체코 무기가 월등히 좋다는 오해는 하면 안된다.
체코제 무기는 비단 소련을 필두로하는 공산권 국가뿐만 아니라 프랑스제 무기처럼 제3세계 국가들에게 인기가 높은데 주요 수요국으로는 유고슬라비아, 리비아, 콩고민주공화국, 이라크, 인도 등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대표적인 체코제 무기로는 Vz.26, ZB-53, LT vz. 38, Vz.58, Vz.61, CZ75, L-39가 있다.
아래의 표에는 원산지가 체코가 아닌 경우 ''이탤릭체''로 처리한다.

4.1. 개인 화기





90년대 이후 체코가 NATO에 가입하면서 장비들의 퀄리티가 점점 서방화되기 시작했다.

4.2. 지상 장비



독일에서 LT vz. 38을 노획하여 38(t)로 사용한 적이 있고, 헝가리에서 슈코다 T-21을 카피해 40M 투란을 만든 적이 있었다. 특히 독일군은 38(t)의 차체로 마르더 Ⅲ, 헤처, 등을 만들었고 나중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이를 역설계해 ST-1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들여오게 된다.

전체적으로 바르샤바 조약의 가맹국으로 활동하던 시기라 소련제 차량들의 비중이 높다.




4.3. 항공 장비


'''체코슬로바키아군(1918~1954)의 항공 병기'''
'''전투항공기'''
'''전투기'''
A-18, BH-21, BH-33, S-20, B-534, B-35, B-135, ''S-199'', ''S-92''
'''폭격기'''
S-6, S-16, A-100, A-101, S-328, ''B-72(Tupolev SB)''. ''MB-200''
'''훈련기'''
S-218, E-39, B-122, Z-XII, Z-26
'''정찰기'''
A-11, A-30, A-32, S-28
'''다목적기'''
Ae-45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1954~1990)의 항공 병기'''
'''전투항공기'''
'''전투기'''
''S-102/3'', ''S-104'', ''S-105'', ''S-106'', ''MiG-29''
'''공격기'''
L-39ZA, ''Su-7'', ''Su-22'', ''Su-25''
'''폭격기'''
''B-228''
'''헬리콥터'''
''Mi-24/35'', ''Mi-1'', ''Mi-2'', ''Mi-4'', ''Mi-17''
'''훈련기'''
L-29, L-39, Z-42
'''다목적기'''
L-60
'''수송기'''
L-410, L-610, ''An-12'', ''An-26'', ''An-30''. ''IL-14'', ''Tu-134''
'''체코슬로바키아군(1990~1993), 체코군(1993~)의 항공 병기'''
'''전투항공기'''
'''전투기'''
''JAS-39''
'''공격기'''
L-159
'''헬리콥터'''
''Mi-24/35'', ''Mi-17'', ''W-3 Sokol''
'''훈련기'''
L-39
'''수송기'''
L-410, ''A320'', ''C-295'', ''Challenger 600'', ''Jak-40''
'''UAV'''
Sojka III, ''RQ-11B'', ''Skylak II''

이외 제2차 세계 대전 후 체코슬로바키아가 단기간적으로 사용한 항공 장비에 대해선 링크 참조.

5. 계급


[image]
출처 : 체코군 사이트#
위에서부터 순서대로 - 부사관 - 준사관 - 위관급 장교 - 영관급 장교 - 장성급 장교순. 육군과 공군은 같은 계급장을 공유한다.
독특하게도 위관급 장교의 경우 타 유럽권 국가에서 찾아보기 힘든 화살촉 모양의 문양[22] 이 그려져 있는 것이 특징인데, 2011년에 개정이 되기 전에는 부사관 계급장도 똑같은 모양의 무늬를 사용했다. 또 특이한 점은 부사관 계급이 3개로 단순한 대신 준사관을 5계급으로 세분화했다는점이다.모병제 도입에 따라 군의 전문화를 도모함에 따라 그런것으로 생각된다.

6. 대중매체


체코 소재의 전장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게임을 제작하는 보헤미아 인터랙티브 스튜디오가 ARMA2 : Army of Czech Republic DLC를 출시하였다.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의 경우 ARMA 시리즈의 모딩 커뮤니티 CSLA 스튜디오에서 시리즈마다 모드를 배포하고 있다.
유진에서 발매한 워게임 EEALB에서 바르샤바 조약의 가맹국중 하나로 체코슬로바키아 인민군이 등장한다. 보급차량이나 장갑차, 자주포, 자주대공포등 일부 장비의 성능이 꽤나 우수하나 전체적으로는 딱히 특출난게 없어서 암울한 편
Paradox Interactive의 전략게임 HOI에도 등장하는데, 기본IC가 40이나되고 기술등급 8등급, 7등급짜리 연구진이 있으며 연구도 상당히 진척돼있는 괜찮은 국가로 나온다. 1933년부터 시작하면 세계적인 패권국가가 될 수 있으며 1938년 독일의 주데텐란트 할양요구를 거부할시 현실 역사와는 다르게 영국프랑스가 체코슬로바키아의 편에서 참전하기 때문에 준비만 해놨다면 독일군을 완전히 이길 수 있다.

7. 관련 사이트


체코군 영문위키 문서
체코군 체코어위키 문서[23]
체코 공화국 국방부 사이트
체코 공화국 나토 사이트
체코군 포병 사이트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공군 기념 사이트
체코군 모병사이트
체코군 군사행사 Bahna 사이트
체코슬로바키아군 정보 사이트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공군 기념 사이트
군사신문
군사박물관 사이트
http://forum.valka.cz
http://www.military.cz/

[1] 다음 정보는 체코 공화국 국방부 웹사이트에 게재된 정보에 의거한다.[2] http://www.mocr.army.cz/scripts/detail.php?id=51566[3] 한화 약 2조 2,120억원[4] 총병력 3만명중 8,000명은 군무원이다.[5] 발트 독일인 출신 러시아 장군으로, 조상이 체코에서 에스토니아로 이주한 사람이다. 1차대전 당시 참모로서 이름을 날렸고, 이후 내전이 벌어지자 체코 군단 사령관을 거쳐 콜차크 정부에 가담했다. 콜차크가 무너진 이후에는 중국조선을 거쳐 도피했다가 백계 러시아인들이 모여 있는 하얼빈으로 돌아와서 표트르 브란겔이 유고슬라비아에서 설립한 러시아 전군연합 극동지부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1937년 상하이에서 사망했다.[6] 당시 무르만스크는 건설된 지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7] 내전 이전인 1917년부터 영국은 같은 연합군인 러시아와의 무역로를 독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무르만스크에 함대를 파견했었다.[8] 가이다 봉기. 이때 독립운동가 한창걸 선생의 부대를 포함한 일부 적군 소속 한인부대도 체코인들의 봉기에 가담했지만, 봉기가 실패하자 일본군에 체포되어 고문을 포함한 갖은 고초를 겪었다.[9] 넘겨진 콜차크는 곧바로 처형당했다.[10] 이때 적군이 군단에 요구했던 것에는 콜차크 외에도 러시아 황실의 '''6억 4천 5백만 루블의 금괴'''가 있었다. 체코 군단이 카잔에서 획득했던 것인데, 한시바삐 본국으로 가고 싶었던 군단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금괴를 적군 측에 넘겼다. 그런데 이때 적군이 넘겨받은 금괴는 약 4억 1천만 정도뿐이었고, 나머지 2억 3천은 현재까지 소재가 불분명하다. 이 논란에는 여러 설명이 있는데 일각에서는 이를 체코 군단이 다 넘겨주지 않고 본국에 가져가 은행을 세우는 데 썼다고 설명한다. 다른 한편에서는 마찬가지로 체코군이 일부 빼돌려 가지고 갔지만 바이칼 호에서 파르티잔의 공격을 받아 열차를 빠뜨려 잃어버렸다고 주장한다. 또는 애초에 금괴가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11] 이외에도 체코군단 후손의 집에 가면 은비녀나 금비녀 한국식 가락지 같은 당시 쓰일 법한 유물이 나온다는 이야기가 있다.[12] 1888 ~ 1970. 애꾸눈인데, 케렌스키 공세 당시인 1917년 우크라이나 츠보리우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한쪽 눈을 잃었기 때문이다. 이 전투에서 체코 군단과 러시아군은 에두아르트 폰 뵘에르몰리 원수의 오스트리아군 5천 명과 조우하여 '''약 3천 3백명을 포로로 잡는 대승을 거두었다.''' 1차 대전이 끝난 이후에는 1926년부터 1933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장을 역임했고, 1938년에는 나치 독일과의 전쟁 위험이 급증하자 에드바르트 베네시 대통령의 요청으로 총리의 자리에 오른다. 하지만 전쟁까지 결의했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교적으로 체코를 돕는 나라는 없었고, 결국 '''뮌헨 협정'''이 체결되어 체코슬로바키아는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과 괴뢰국인 슬로바키아 제1공화국으로 분할 점령된다. 조국의 독립영웅이었던 그는 이때 히틀러와 악수하며 협정에 서명한 것 때문에 나머지 인생 30년이 크게 꼬이게 된다. 점령 기간 동안 시로비가 크게 뭘 한 건 없었는데, 그는 명망 높은 인사였던 터라 원래 감시가 심했던데다 1942년에 체코 총독 대리였던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 친위대장이 체코인들에게 암살된 이후에는 독일의 체코 레지스탕스 운동 탄압이 극심해졌기 때문이다. 다만 시로비는 이 와중에도 개인적으로 레지스탕스 운동에 자금을 보탰다고 한다. 독일이 패망한 이후에는 신생 소비에트 정부에게 체포되어 인민재판에 넘겨졌고, 독일에 결탁한 혐의로 20년 형을 선고받았다. 비록 1960년에 사면받기는 했지만 그는 그로부터 약 8년간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 후스 전쟁의 리파니 전투를 그린 그림을 지켜야 했다. 이 일로 크나큰 정신적 상처를 입은 그는 1968년부터 자신을 적극적으로 변호했지만, 2년 뒤인 1970년에 죽었다.[13] 체코 군단이 열차 이동 도중 자체적으로 발행한 신문.[14] 황정식,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체코군단, 동국사학 제67집, 320~321에서 발췌[15] '무정'을 쓴 그 소설가 맞다. 의외로 당시 상하이로 건너가 임시정부 휘하의 독립신문에서 일하고 있었다. 우리가 흔히 아는 악질 친일파의 모습으로 변절하는 것은 귀국 이후 1922년부터.[16] 이 내용을 실은 기사가 위의 독립신문 37호 기사다.[17] 당시 전시 번호는 165번. 여운형이 상해 임정 명의로 체코슬로바키아 건국을 축하하며 제작한 은컵이다. 정부가 정부의 독립을 축하하며 공식적으로 전달한 은컵이지만, 가이다의 행보를 조사하던 체코 정부 요인은 그저 '가이다가 한국인들로부터 은컵을 선물로 받았다'고 개인적인 선물을 받은 것으로 보고했다. 이는 당시 상해 임정이 한 국가의 정부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고, 가이다는 체코 정부의 외교관으로 온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18] 황정식,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체코군단, 동국사학 제67집, 307~341[19] 비단 수데텐란트 뿐만 아니라 보헤미아의 거주하고 있던 독일인 전반.[20] 소련군과 마찬가지로 체코군에서 군, Army는 서방의 군단 규모 부대이다.[21] 자체 내수 규모가 적다는 뜻이다. 대한민국은 거대한 군대를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자체 수요가 대단히 많고 군수산업에 대한 투자도 수월한 편이나 체코, 스웨덴은 정반대이다.[22] 국공내전 당시 국민당군 계급장에도 비슷한 삼각형이 있긴 하다.[23] 본국위키라서 그런지 정보 업데이트가 더빠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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