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루이프 vs 베켄바워
[image]
[image]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리.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는 두 선수 모두가 역대 Top 10 안에 꼽히는 선수다. 이 라이벌리는 흔히 메호대전보다도 앞에 놓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국제 대회에서 미친 영향력이 훨씬 더 뛰어났기 때문. 하지만 두 전설을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젊은 축구팬들이 많이 생김에 따라 근래에는 다른 추세를 보이기도 한다.
축구사에는 의외로 세계적 라이벌리라 부를 만한 것이 많지 않다. 펠레는 동시대에 가린샤나 에우제비우가 있었지만 독보적인 1인자 취급을 받았고 마라도나 역시 플라티니, 지쿠, 굴리트, 루메니게, 마테우스, 판바스턴 등과 라이벌로 꼽혔지만 전부 마라도나와 비교하면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나마 역대급으로 한정해 '''‘펠레 vs 마라도나’'''를 꼽기는 한다.[1] 그 외에도 지단 vs 호나우두 정도만이 추가적으로 언급될 만한 수준이긴 하다. 기타의 라이벌리들은 아무래도 무게감이 떨어진다. 2010년대 이후부터는 메호대전이 전세계적으로 축구계의 이슈가 되어 크루이프vs베켄바워에 이어 동시기 축구 라이벌리 계보를 이었다.
베켄바워와 크루이프는 나이 차이도 두살에 불과하고[2] ,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던데다 특히 기량이 만개했던 20대 중후반에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직접 각 대표팀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시기에 대결했다라는 상징성'''이 더해졌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둘의 라이벌리를 뛰어넘을 만한 것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메호대전의 경우 월드컵 결승은 커녕 챔스 결승에서 만난 것도 2008-09 시즌 한 번인데, 이 때는 호날두는 맨유 시절이었고 메시는 이제 막 전성기를 시작하는 수준이었다.
펠레라는 불멸의 전설이 지나간 1970 멕시코 월드컵 이후의 1970년대 축구계는 두 말할 필요없이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의 시대였다. 공격수와 수비수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포지션의 두 선수가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축구계 전대미문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까닭은, 둘의 커리어와 그 업적이 다른 듯하면서도 너무나 비슷한 탓이다.
선빵은 요한 크루이프가 먼저 쳤다. AFC 아약스 소속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1971, 1972, 1973)를 진두지휘했고, 베켄바워는 이에 바통 터치를 하듯 FC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1974, 75, 76)를 똑같이 일구어냈다. 그리고 개인 수상으로 보면 크루이프는 발롱도르 3회, 베켄바워는 2회를 수상했다.
'''토탈 풋볼의 구현자''' 요한 크루이프와 '''리베로의 창시자''' 프란츠 베켄바워라는 굴지의 축구선수 둘의 라이벌리가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1974 서독 월드컵이다.''' 이 때 이미 둘은 세계 축구를 양분하는 두 축으로 평가받고 있었는데, 1971, 1973년 발롱도르는 크루이프가, 1972년 발롱도르는 베켄바워가 받은 상태였다.
토탈 풋볼이라는 유례없는, 축구판의 혁명이라고까지 불린 전술과 그를 구현해 내는 전력으로 결승전까지 전승으로 달려온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외나무다리에서 제압한 것이 바로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이었으니. 선수로서의 평가는 크루이프가 아무래도 더 높은 측면이 있었기에 이 둘을 비교하는 떡밥은 당대에도 흥했고, 베켄바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또한 이 둘의 또 다른 공통점 하나가 있다면 바로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성공한 대표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베켄바워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역임하면서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준우승, UEFA 유로 1988 4강,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우승'''이라는 조국에 대업적을 남겼고, 크루이프는 1988년부터 1996년까지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을 역임하면서 드림팀 1기를 이끌며 라리가 4연속 우승,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 그리고 '''1992년 구단의 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 획득''' 및 2년 후 준우승 1회를 추가하면서 구단에 큰 업적을 남긴다. 두 사람이 서로 맡은게 각각 국가대표팀, 클럽팀이라는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이후 성공적으로 감독직을 맡았고 거기에 두 사람 각각 국가대표팀과 클럽팀으로서 들어올릴 수 있는 최정상의 트로피(FIFA 월드컵 트로피, 빅 이어)를 차지했다는 점에 있어서도 독특한 점.[4] 흔히 역대급으로 꼽히는 선수들 중 아직 현역인 메시와 호날두를 제외하면 감독으로 성공한 케이스는 이 둘을 말고는 거의 없다. 클럽팀 감독으로서는 지네딘 지단이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하여 '''UEFA 챔피언스 리그 3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내고,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는 디디에 데샹이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유로 2016 준우승 이후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마리우 자갈루, 베켄바워와 함께 단 셋 뿐인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을 우승한 기록을 세우면서[5] 이 둘에 근접해 가고 있다.[6][7] 다만 아직 커리어가 짧아 더 지켜봐야 한다.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2016년 크루이프가 사망했을때 베켄바워가 "그의 죽음에 상당히 충격 받았다. 그는 내 좋은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나 다름없었다."라고 애도했을 정도. 크루이프 역시 2015년 베켄바워의 70세 생일때 독일의 잡지 11Freunde와의 인터뷰에서 베켄바워와의 우정을 언급했는데, "베켄바워와 정확히 언제 친구가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로 상대하면서 자연스럽게 큰 존중을 갖게 되었고 우정도 생겼다. 그가 살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키츠뷜에서 나는 스키를 자주 즐기러 갔기에 그와 만날 기회가 많았고, 그래서 같이 운동도 즐기고 저녁도 함께했다.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의 우정도 더욱 강해졌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상에 있는 자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지 알고 있다."는 말도 했다.# 크루이프가 자신의 축구관에 반(反)하는 인물에겐 엄청난 극딜세례를 퍼붓는 걸로 유명하단 점을 생각해보면 진심으로 베켄바워를 리스펙트했다는 점을 느낄수 있다.
위에서 베켄바워가 말했던 것처럼, 세간의 평가는 크루이프를 반수 정도는 위로 친다. 각종 해외 전문 매체들의 평가에서도 대개 크루이프가 베켄바워보다 조금 더 위인 경우가 많다. 이는 토탈 풋볼이라는 혁명적 전술이 당대에 가져온 영향력이 어마어마했고 현대 축구가 그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베켄바워의 리베로 전술은 현대 축구에서는 거의 사장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수 시절 보여준 기량과 1974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상 또한 아무래도 크루이프가 조금 낫다고 평가받는다.[11]
그러나, 이러한 스탯과 별개로 베켄바워는 실제 트로피와 우승으로 모든것을 보상받는다. 크루이프에겐 없는 월드컵 우승과 유로 우승을 그것도 주장으로 모두 이뤘고 커리어 전체를 놓고봐도 들수 있는 모든 트로피는 다 들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 개인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면 크루이프는 보통 역대 3~5위권, 베켄바워는 5~7위권이니 반수정도 크루이프가 앞서간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긴 하나, 베켄바워는 월드컵은 물론 유로 타이틀마저 들어올렸지만, 크루이프는 자신의 유일했던 월드컵에서 준우승에 그쳤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승리자는 베켄바워라는 관점도 존재한다. 실제 크루이프는 74 월드컵 결승전에선 경기 시작 직후 페널티킥을 얻어낸 장면을 빼면 베르티 포그츠의 밀착 수비와 베켄바워의 수비리딩에 막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선수로서의 승리'를 거둔 요한 크루이프''', ''''팀으로서의 승리'를 거둔 프란츠 베켄바워'''. 그 어느 쪽이 위인지는 각각의 판단에 맡긴다. 2010년대로 넘어가서는 크루이프의 평가는 리오넬 메시, 베켄바워의 평가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한테 계승되었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역대급의 선수시절을 넘어 감독으로서도 매우 큰 성공을 거둔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대표적인 반례로 축구계를 넘어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평가받는 인물들이라는 점도 이들의 위업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image]
1. 개요
축구 역사상 최고의 라이벌리. 요한 크루이프와 프란츠 베켄바워는 두 선수 모두가 역대 Top 10 안에 꼽히는 선수다. 이 라이벌리는 흔히 메호대전보다도 앞에 놓이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국제 대회에서 미친 영향력이 훨씬 더 뛰어났기 때문. 하지만 두 전설을 잘 모를 수 밖에 없는 젊은 축구팬들이 많이 생김에 따라 근래에는 다른 추세를 보이기도 한다.
축구사에는 의외로 세계적 라이벌리라 부를 만한 것이 많지 않다. 펠레는 동시대에 가린샤나 에우제비우가 있었지만 독보적인 1인자 취급을 받았고 마라도나 역시 플라티니, 지쿠, 굴리트, 루메니게, 마테우스, 판바스턴 등과 라이벌로 꼽혔지만 전부 마라도나와 비교하면 한 수 아래라는 평가를 받았다. 그나마 역대급으로 한정해 '''‘펠레 vs 마라도나’'''를 꼽기는 한다.[1] 그 외에도 지단 vs 호나우두 정도만이 추가적으로 언급될 만한 수준이긴 하다. 기타의 라이벌리들은 아무래도 무게감이 떨어진다. 2010년대 이후부터는 메호대전이 전세계적으로 축구계의 이슈가 되어 크루이프vs베켄바워에 이어 동시기 축구 라이벌리 계보를 이었다.
베켄바워와 크루이프는 나이 차이도 두살에 불과하고[2] , 시대를 대표하는 선수들이었던데다 특히 기량이 만개했던 20대 중후반에 '''1974 서독 월드컵 결승전에서 직접 각 대표팀에서 최고의 기량을 자랑하던 시기에 대결했다라는 상징성'''이 더해졌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 둘의 라이벌리를 뛰어넘을 만한 것이 나오기는 쉽지 않을 듯 하다. 메호대전의 경우 월드컵 결승은 커녕 챔스 결승에서 만난 것도 2008-09 시즌 한 번인데, 이 때는 호날두는 맨유 시절이었고 메시는 이제 막 전성기를 시작하는 수준이었다.
2. 상세
펠레라는 불멸의 전설이 지나간 1970 멕시코 월드컵 이후의 1970년대 축구계는 두 말할 필요없이 '''요한 크루이프 VS 프란츠 베켄바워'''의 시대였다. 공격수와 수비수라는, 비교 자체가 불가능해 보이는 포지션의 두 선수가 당시는 물론 현대에 이르기까지 축구계 전대미문의 라이벌이라 불리는 까닭은, 둘의 커리어와 그 업적이 다른 듯하면서도 너무나 비슷한 탓이다.
선빵은 요한 크루이프가 먼저 쳤다. AFC 아약스 소속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1971, 1972, 1973)를 진두지휘했고, 베켄바워는 이에 바통 터치를 하듯 FC 바이에른 뮌헨 소속으로 유러피언컵 3연패(1974, 75, 76)를 똑같이 일구어냈다. 그리고 개인 수상으로 보면 크루이프는 발롱도르 3회, 베켄바워는 2회를 수상했다.
'''토탈 풋볼의 구현자''' 요한 크루이프와 '''리베로의 창시자''' 프란츠 베켄바워라는 굴지의 축구선수 둘의 라이벌리가 정점을 찍은 것이 바로 '''1974 서독 월드컵이다.''' 이 때 이미 둘은 세계 축구를 양분하는 두 축으로 평가받고 있었는데, 1971, 1973년 발롱도르는 크루이프가, 1972년 발롱도르는 베켄바워가 받은 상태였다.
토탈 풋볼이라는 유례없는, 축구판의 혁명이라고까지 불린 전술과 그를 구현해 내는 전력으로 결승전까지 전승으로 달려온 크루이프의 네덜란드를 외나무다리에서 제압한 것이 바로 프란츠 베켄바워의 서독이었으니. 선수로서의 평가는 크루이프가 아무래도 더 높은 측면이 있었기에 이 둘을 비교하는 떡밥은 당대에도 흥했고, 베켄바워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실제로 월드컵 MVP와 1974년 발롱도르 수상자는 베켄바워가 아니라 크루이프였다. 프란츠 베켄바워는 1974년 바이에른 뮌헨 주장으로 분데스리가 우승, 유러피언컵(챔스) 우승 그리고 독일 대표팀 주장으로 월드컵 우승이라는 역사상 유일한 전대미문의 업적을 달성했지만 물을 먹은 것. [3] 프란츠 베켄바워의 탄식에도 불구하고 요한 크루이프가 발롱도르를 차지했던 것은, 프란츠 베켄바워는 그 당시 최고의 전술과 시스템에서 최고의 선수였던 반면, 요한 크루이프는 새로운 시대를 여는 전술, 토탈사커의 아이콘이었기 때문이다. 저 토탈사커의 등장이 얼마나 충격적이었는가는 당시 시대의 영상의 파편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극단적으로 끌어올린 오프사이드 라인과, 그것의 완벽한 제어. 촘촘한 공수의 간격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에 상대 아르헨 공격진들이 우르르 오프사이드 트랩에 걸리는 모습이 당시 선수들과 기자들. 그리고 축구 팬들에게 얼마나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을지는 두말 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여담으로 베켄바워는 크루이프를 인정하기도 했지만 1974년 당시에는 리그, 챔스, 월드컵까지 모든 메이저 대회를 제패하고도 발롱도르를 받지 못한 것에 불만을 표하기도 했다. 그 당시 크루이프가 월드컵에서는 뛰어난 퍼포먼스를 남겼지만 바르셀로나에서의 활약상은 다소 아쉬웠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크루이프가 나보다 나은 선수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월드컵을 제패했다."'''
또한 이 둘의 또 다른 공통점 하나가 있다면 바로 선수로서도 감독으로서도 성공한 대표인물들이라는 것이다. 베켄바워는 1984년부터 1990년까지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감독직을 역임하면서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 준우승, UEFA 유로 1988 4강,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 우승'''이라는 조국에 대업적을 남겼고, 크루이프는 1988년부터 1996년까지 FC 바르셀로나의 감독직을 역임하면서 드림팀 1기를 이끌며 라리가 4연속 우승, 코파 델 레이 1회 우승, 그리고 '''1992년 구단의 사상 첫 유러피언컵 우승 트로피 획득''' 및 2년 후 준우승 1회를 추가하면서 구단에 큰 업적을 남긴다. 두 사람이 서로 맡은게 각각 국가대표팀, 클럽팀이라는 차이점은 존재하지만 이후 성공적으로 감독직을 맡았고 거기에 두 사람 각각 국가대표팀과 클럽팀으로서 들어올릴 수 있는 최정상의 트로피(FIFA 월드컵 트로피, 빅 이어)를 차지했다는 점에 있어서도 독특한 점.[4] 흔히 역대급으로 꼽히는 선수들 중 아직 현역인 메시와 호날두를 제외하면 감독으로 성공한 케이스는 이 둘을 말고는 거의 없다. 클럽팀 감독으로서는 지네딘 지단이 레알 마드리드 감독으로 부임하여 '''UEFA 챔피언스 리그 3연패'''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내고,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는 디디에 데샹이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여 유로 2016 준우승 이후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우승'''하면서 마리우 자갈루, 베켄바워와 함께 단 셋 뿐인 선수와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을 우승한 기록을 세우면서[5] 이 둘에 근접해 가고 있다.[6][7] 다만 아직 커리어가 짧아 더 지켜봐야 한다.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이었지만 경기장 밖에서는 상당히 친하게 지냈다. 2016년 크루이프가 사망했을때 베켄바워가 "그의 죽음에 상당히 충격 받았다. 그는 내 좋은 친구였을 뿐만 아니라 형제나 다름없었다."라고 애도했을 정도. 크루이프 역시 2015년 베켄바워의 70세 생일때 독일의 잡지 11Freunde와의 인터뷰에서 베켄바워와의 우정을 언급했는데, "베켄바워와 정확히 언제 친구가 되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서로 상대하면서 자연스럽게 큰 존중을 갖게 되었고 우정도 생겼다. 그가 살고 있던 오스트리아의 키츠뷜에서 나는 스키를 자주 즐기러 갔기에 그와 만날 기회가 많았고, 그래서 같이 운동도 즐기고 저녁도 함께했다. 해가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의 우정도 더욱 강해졌다."고 언급했다. 그리고 "우리는 정상에 있는 자의 삶이 얼마나 고독한지 알고 있다."는 말도 했다.# 크루이프가 자신의 축구관에 반(反)하는 인물에겐 엄청난 극딜세례를 퍼붓는 걸로 유명하단 점을 생각해보면 진심으로 베켄바워를 리스펙트했다는 점을 느낄수 있다.
3. 두 인물의 선수 시절 커리어 비교
3.1. 팀 커리어
3.1.1. 요한 크루이프
- AFC 아약스 (1964~1973, 1981~1983)
- 페예노르트 로테르담 (1983~1984)
3.1.2. 프란츠 베켄바워
- FC 바이에른 뮌헨 (1959~1977)
- 분데스리가: 1968-69, 1971-72, 1972-73, 1973-74
- DFB-포칼: 1965-66, 1967-68, 1968-69, 1970-71
- 유러피언컵: 1973-74, 1974-75, 1975-76
-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1966-67
- 인터컨티넨탈컵: 1976
- 뉴욕 코스모스 (1977~1980, 1983)
- 북미 축구 리그: 1977, 1978, 1980
3.2. 개인 커리어
3.2.1. 요한 크루이프
- 발롱도르: 1971, 1973, 1974
- 발롱도르 드림팀 2군: 2020
- FIFA 월드컵 골든볼: 1974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74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FIFA 100: 2004
- 네덜란드 올해의 축구 선수: 1968, 1972, 1984
- 에레디비시 득점왕: 1966-67, 1971-72
-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8] : 1976-77, 1977-78
- 북아메리카 축구 리그 MVP: 1979
- 네덜란드 올해의 운동 선수: 1973, 1974
- 옹즈 드 옹즈: 1977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72, 1977
- IOC 올해의 유럽 축구 선수: 1970-71, 1972-73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IFFHS 레전드: 2016
3.2.2. 프란츠 베켄바워
- 발롱도르: 1972, 1976
- 발롱도르 드림팀: 2020
- FIFA 월드컵 실버볼: 1974
- FIFA 월드컵 브론즈슈: 1966
- FIFA 월드컵 베스트 영플레이어: 1966
- FIFA 월드컵 올스타팀: 1966, 1970, 1974
- FIFA 월드컵 역대 베스트 XI: 1994
- FIFA 월드컵 올타임 드림팀: 2002
- UEFA 유로 토너먼트의 팀: 1972, 1976
- UEFA 유로 올타임 XI: 2016
- 월드 사커 올해의 팀: 1966, 1967, 1968, 1969, 1971, 1972, 1973, 1974, 1975, 1976, 1977
- 월드 사커 역대 베스트 XI: 2013
- 독일 올해의 축구 선수: 1966, 1968, 1974, 1976
- 키커 분데스리가 올해의 팀: 1965-66, 1966-67, 1967-68, 1968-69, 1969-70, 1970-71, 1971-72, 1972-73, 1973-74, 1974-75, 1975-76, 1976-77
- 북미 축구 리그 MVP: 1977
- 레지오날리가[9] 올해의 선수: 1965
- FIFA 100: 2004
- FIFA 20세기 월드팀: 1998
- FIFA 20세기 유럽팀: 1998
- FIFA 공로훈장: 1984, 2004
- FIFA 회장상: 2012
- UEFA 회장상: 2012
- 라우레우스 공로상: 2007
- FIFA XI: 1968
- 옹즈 드 옹즈: 1976
- 마르카 레전드: 2012
- 바이에른 뮌헨 역대 베스트 XI: 2005
- 골든풋: 2010
- 월드 스포츠 1950~1970년 월드 베스트 XI: 1970
- IFFHS 레전드: 2016
- IFFHS 최우수 유럽 선수 (1956~1990)
- 독일 스포츠 명예의 전당
4. 두 인물의 감독 시절 커리어 비교
4.1. 팀 커리어
4.1.1. 요한 크루이프
- AFC 아약스 (1985~1988)
- KNVB 베이커: 1985-86, 1986-87
-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1986-87
- FC 바르셀로나 (1988~1996)
- 라리가: 1990-91, 1991-92, 1992-93, 1993-94
- 코파 델 레이: 1989-90
- 수페르코파 데 에스파냐: 1991, 1992, 1994
- 유러피언컵: 1991-92
- UEFA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1993-94
- 유러피언 컵 위너스컵: 1988-89
- 유러피언 슈퍼컵: 1992
4.1.2. 프란츠 베켄바워
-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 (1984~1990)
- FC 바이에른 뮌헨 (1993~1994, 1996)
-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 (1990~1991)
- 디비지옹 1: 1990-91
4.2. 개인 커리어
4.2.1. 요한 크루이프
4.2.2. 프란츠 베켄바워
5. 평가
위에서 베켄바워가 말했던 것처럼, 세간의 평가는 크루이프를 반수 정도는 위로 친다. 각종 해외 전문 매체들의 평가에서도 대개 크루이프가 베켄바워보다 조금 더 위인 경우가 많다. 이는 토탈 풋볼이라는 혁명적 전술이 당대에 가져온 영향력이 어마어마했고 현대 축구가 그 유산에서 벗어나지 못한 반면 베켄바워의 리베로 전술은 현대 축구에서는 거의 사장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선수 시절 보여준 기량과 1974년 월드컵에서의 활약상 또한 아무래도 크루이프가 조금 낫다고 평가받는다.[11]
그러나, 이러한 스탯과 별개로 베켄바워는 실제 트로피와 우승으로 모든것을 보상받는다. 크루이프에겐 없는 월드컵 우승과 유로 우승을 그것도 주장으로 모두 이뤘고 커리어 전체를 놓고봐도 들수 있는 모든 트로피는 다 들었다고 해도 무방하다. 단 개인의 활약에 초점을 맞추면 크루이프는 보통 역대 3~5위권, 베켄바워는 5~7위권이니 반수정도 크루이프가 앞서간다는 것이 일반적 시각이긴 하나, 베켄바워는 월드컵은 물론 유로 타이틀마저 들어올렸지만, 크루이프는 자신의 유일했던 월드컵에서 준우승에 그쳤기 때문에 결국 진정한 승리자는 베켄바워라는 관점도 존재한다. 실제 크루이프는 74 월드컵 결승전에선 경기 시작 직후 페널티킥을 얻어낸 장면을 빼면 베르티 포그츠의 밀착 수비와 베켄바워의 수비리딩에 막혀 거의 아무것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월드컵과 인연을 맺지 못했다.
''''선수로서의 승리'를 거둔 요한 크루이프''', ''''팀으로서의 승리'를 거둔 프란츠 베켄바워'''. 그 어느 쪽이 위인지는 각각의 판단에 맡긴다. 2010년대로 넘어가서는 크루이프의 평가는 리오넬 메시, 베켄바워의 평가는 크리스티아누 호날두한테 계승되었다.
또한 이들은 공통적으로 역대급의 선수시절을 넘어 감독으로서도 매우 큰 성공을 거둔 명선수는 명지도자가 될 수 없다의 대표적인 반례로 축구계를 넘어 모든 스포츠 종목을 통틀어 평가받는 인물들이라는 점도 이들의 위업을 제대로 느끼게 해주는 부분이다.
6. 관련 문서
[1] 첨언한다면 펠레와 마라도나의 비교는 과거의 선수가 저평가받는 경향과 마라도나가 은퇴한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20세기 말~ 2000년대 초까지는 마라도나의 우위로 평가 받았으나, 이제는 마라도나가 펠레와 마찬가지로 현역에서 은퇴한지도 오랜 세월이 지났고, 2000년대 중반에 펠레의 플레이를 담은 펠레 에테르노라는 다큐가 방영되면서 펠레가 재평가 되었으며, 도핑의 심각성이 두각되면서 마라도나 우위론이 그전에 비해서 적어지고 펠레 우위론이 많아졌다.[2] 공교롭게도 메날두 또한 두살 차이다.[3] 막상 크루이프 또한 1972년 AFC 아약스를 이끌고 '''트레블'''을 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발롱도르 포디움에도 들지 못한 경력이 있다. 그리고 이 해 베켄바워는 UEFA 유로 1972에서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을 이끌면서 우승을 차지하게 되어 발롱도르를 수상하였다.[4] 단 각 팀에서의 감독으로서 유종의 미를 거두는 부분에서는 두 사람은 차이가 좀 있었다. 베켄바워는 통일 직전 순수 서독 축구 국가대표팀의 마지막 FIFA 월드컵 우승을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에서 안겨주고 박수칠 때 떠났지만, 크루이프는 1994년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당초 얕봤던 AC 밀란에게 0:4로 패하며 준우승을 한 이후 수페르코파 우승을 빼면 실질적으로 2년에 이르는 시기를 무관으로 보내면서 결국 크루이프는 누녜스 회장 간의 감정의 골은 점차 깊어져버려 1995/96 시즌 말미에 지휘봉을 내려놓고 만다.[5] 단 자갈루는 선수 시절 주장으로서 우승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주장과 감독으로서 모두 월드컵을 우승한 것은 베켄바워와 데샹 단 둘 뿐이다.[6] 공교롭게도 지단과 데샹 모두 유벤투스 FC와 프랑스 축구 국가대표팀에서 동시기 같이 활약한 팀 동료라는 공통점이 있다.[7] 단 데샹은 선수로서의 종합적인 평가는 크루이프와 베켄바워, 그리고 지단 같은 역대급 선수들과 동급으로 평가받지는 못한다.[8] 돈 발론 어워드[9] 당시의 2부 리그[10] 돈 발론 어워드[11] 당장 월드컵 골든볼뿐만 아니라 1974년 발롱도르 또한 크루이프의 차지였으며, 1974년 월드컵에서 크루이프의 기회 창출 횟수는 무려 '''36회'''로 월드컵 역대 최다 기회 창출 기록이다. 우승만 했으면 1986년 월드컵에서의 디에고 마라도나의 활약상과 필적했을거라는 평가가 있을 정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