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Hans Christian Andersen[1]
1805년 4월 2일 ~ 1875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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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4월 2일 덴마크 오덴세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는 바람에[2] 온 가족이 일용직 노동자 신세로 전락해 버린 까닭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훗날 연극배우가 되려고 코펜하겐으로 상경했으나, 정규 교육 부족으로 인해 배우로서 필요한 자질인 문법이나 발음이 어색해서 연극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다.
연극배우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일로 자살까지도 생각했으나, 그가 글솜씨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안 국회의원 요나스 콜린의 충고로 라틴어 학교에 뒤늦게 입학하여 문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생활도 학교장과의 갈등으로 인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이 학교장은 훗날 60세가 넘은 안데르센의 악몽에서도 등장하는 등 그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교장은 안데르센의 모든 창작 활동을 금지하고 하찮게 여겼으며,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에게 악담을 내뱉었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에 영향을 주었다.
의외로 처음에는 주로 소설을 집필했다. 동화로 유명하지만 다수의 시와 희곡을 집필한 시인이자 극작가이기도 했다. 동화를 제외하고 잘 알려진 안데르센의 대표작으로는 장편소설 "즉흥 시인(''Improvisatoren'')"이 있다. 소설가로서의 재능도 상당해 거의 첫 소설이었던 <즉흥시인>의 경우 문단과 대중 양쪽의 호평을 받으며 바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 이외에도 어느 정도 소설을 집필했고 생전에는 모두 호평을 받고 많이 읽혔다. 다만 '즉흥시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소설이 지금 와서는 거의 잊혀진 실정이다. 사실 이제 즉흥시인도 그다지 많이 읽히는 편은 아니고.
30살인 1835년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현대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는 어린이를 속이는 글이나 쓴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은 모양이다. 다만 명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앞에는 "'즉흥시인'을 집필한 뛰어난 소설가"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843년에 발표한 미운 오리 새끼가 대성공하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이 안데르센의 동화에 빠져들었다. 안데르센의 유명세가 대단해서 심지어 그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고, 말년에는 정부로부터 특별 연금까지 수령하는 등 국내외적인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했다. 안데르센을 애호하던 유명인사 가운데서 찰스 디킨스는 그와 여러 번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다.[3]
이후 1840~60년대까지 유럽이나 미국, 터키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기행문 책자를 쓰기도 했다. 작품적, 경제적 인정을 받으며 잘 살다가 갔으나 1872년 침대에서 떨어져 다친 뒤로 제대로 걷지못했고, 이후 여러 합병증 증상을 보이며 자리에 누워 병마에 시달리다가 1875년 8월 4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8월 11일에 거행된 장례식에는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세 왕비까지 참석했다.
동화가 유치하지 않고, 어른이 읽어도 이야기에 깊숙이 몰입해 가슴 속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안데르센 동화의 특징. 또한 안데르센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불우한 추억들과 주변 환경을 상당히 투영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읽기엔 이야기가 너무 암울한 경우가 많고, 아예 배드 엔딩, 새드 엔딩으로 끝나는 작품들도 많다. 자신의 동화에 자신과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캐릭터화 시켜서 등장시키는 작품도 많다.
그의 동화들 중에는 분명 작가가 있는데도 발단이나 결말 등에서 판본이 여러 가지인 작품이 제법 있다. 눈의 여왕, 빨간구두, 인어공주 문서 참조. 이것은 번역자나 편집자들이 아동용으로 눈높이를 맞추느라 내용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요 작품이 덴마크어를 직역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영어나 독일어,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우리나라에서 중역한 탓도 있다. 영국 출신 안데르센 연구가 재키 울슐라거가 그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링크 어쨌든 그의 작품은 영화, 애니메이션, 발레 등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각색되었다.
양성애자였던 안데르센은 평생 어떤 사람과도 결혼하거나 사귀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독신으로 살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릴 때 쓴 그의 일기에는 평생 성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다짐이 적혀있다고 한다.[4]
한편 젊은 시절 짝사랑했던 리보르그 보이트(Riborg voigt)에게 차인 것이 충격이 되었기 때문에 독신으로 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로 놀림을 당해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안데르센이 난생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상당히 긴 편지로 르보르그에게 고백을 했건만, '''겨우 두 줄'''밖에 안 되는 답장으로 무참하게 차였다. 대신 르보르그는 그의 용기를 높이 사서 그가 쓴 동화의 애독자가 되었다.[5]
하지만 독신으로 살겠다던 초년의 맹세가 아주 굳건했다고 볼 수는 없는게 그 이후에도 그는 소피 외르스테드(Sophie Ørsted), 후원자의 딸인 루이스 콜린(Louise Collin)등에 관심을 표한 바가 있다. 하지만 결국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데는 실패했고, 동화 나이팅게일을 쓰는데 영감을 준 스웨덴의 오페라 가수인 제니 린드에게도 고백했으나 린드는 안데르센을 친오빠처럼 생각했기에 거절했다고 했다.
한편 유명한 동화 인어공주는 연하의 남성 에드워드 콜린(Edvard collin)과의 관계를 반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친구 사이었지만, 내심 콜린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안데르센은 "여자와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며 절절한 편지로 고백을 감행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콜린은 이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백을 거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콜린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린다. 이 일 때문에 안데르센은 굉장히 상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안데르센이 쓴 작품이 인어공주로, 그의 연구자들은 왕자가 콜린을 상징하고 안데르센이 인어공주를 상징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래도 콜린은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이 때의 일을 언급하며 자신은 안데르센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잘 몰랐고 그 때문에 그가 더 많이 상처 입었던 것이라고 썼다. 못내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던 모양.
그 외에 그가 사랑했던 남자로는 덴마크의 댄서 해럴드 샤르프(Harald Scharff),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가 있지만 역시 사귀는 데는 실패했다.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종교적 신조에 반하는 일이었던 만큼 남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은 일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안데르센은 늘 짝사랑 상대에게 집착에 가까운 편지와 관심을 보여줬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안데르센의 짝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그가 훗날 쓴 편지에서 말하기를, 자신에게 행복은 가정의 형태로 찾아올 수도 있었지만 대신 뮤즈가 되어 찾아와 주었다고.
더불어, 이 작품에서 영국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듣던 신문을 보고 디킨스 집 앞마당에서 울며불며 징징거리는데 1857년 실제로 벌인 일이다. 52세이던 그가 실제로 이래서 7살 연하이던 디킨스가 다독였는데 사람들이 회고하길, 어찌된 게 7살 어린 디킨스가 더 어른같고 안데르센은 정말 아이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뭐 어릴적부터 공장에서 일하고 궂은 일을 다하던 디킨스였지만 안데르센도 마찬가지로 어릴적부터 일했으니...
처음 안데르센 동화가 나왔을 당시에는 평단과 대중들로부터 "이런 비교육적인 이야기를 애들 보는 동화라고 쓰다니!" 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물론 안데르센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이런 혹평은 점점 설 곳을 잃어갔다. 그런데 안데르센 동화 중 몇몇 편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애들 보라고 쓴 게 아닌 것 같은''' 수위를 자랑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부시통[6] 이나, 큰 크라우스 작은 크라우스 이야기.[7]
그가 동화에 끼친 영향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창작동화의 개척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동화는 그림형제처럼 민담을 재구성하거나, 저자가 불분명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축약, 왜곡,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그것이 동화의 전부였었다. 안데르센도 초창기에는 그림형제처럼 민담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를 썼으나, 점차 자신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의 비중을 늘려나갔다. 그의 동화는 자칫 교훈적이고 도구적인 의미로만 흐를 수 있는 동화라는 장르에 예술성을 불어넣어, 동화가 민담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 '''동화 스스로가 문학적으로 훌륭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동화라는 장르의 '''예술적 자율성'''을 불어넣은 셈.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창작 동화의 규격과 틀, 이야기 구조, 문체 등과 같은 기본적 요소들은 전부 '''안데르센의 창작 동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보면 그의 동화는 이러한 근대 동화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의 이름을 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은 '아동문학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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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5년 4월 2일 ~ 1875년 8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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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덴마크가 낳은 '''세계 최고의 동화 작가 중 한 명.''' 그리고 전세계적으로 친 덴마크 정서의 발흥에 기여한 일등공신. 키는 185cm. 안데르센의 이름은 어릴 때 루터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대부모가 지어준 이름이다.'''모든 사람의 일생은 신의 손가락으로 쓰여진 동화다.'''
1805년 4월 2일 덴마크 오덴세에서 가난한 구두 수선공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는 바람에[2] 온 가족이 일용직 노동자 신세로 전락해 버린 까닭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훗날 연극배우가 되려고 코펜하겐으로 상경했으나, 정규 교육 부족으로 인해 배우로서 필요한 자질인 문법이나 발음이 어색해서 연극배우로 성공하지 못했다.
연극배우의 꿈을 이루지 못한 일로 자살까지도 생각했으나, 그가 글솜씨에 재능이 있다는 걸 안 국회의원 요나스 콜린의 충고로 라틴어 학교에 뒤늦게 입학하여 문학을 배우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생활도 학교장과의 갈등으로 인해 순탄치만은 않았는데, 이 학교장은 훗날 60세가 넘은 안데르센의 악몽에서도 등장하는 등 그에게 상당한 트라우마로 남았다. 교장은 안데르센의 모든 창작 활동을 금지하고 하찮게 여겼으며, 헤어지는 순간까지 그에게 악담을 내뱉었다고 한다. 이는 나중에 안데르센의 미운 오리 새끼에 영향을 주었다.
의외로 처음에는 주로 소설을 집필했다. 동화로 유명하지만 다수의 시와 희곡을 집필한 시인이자 극작가이기도 했다. 동화를 제외하고 잘 알려진 안데르센의 대표작으로는 장편소설 "즉흥 시인(''Improvisatoren'')"이 있다. 소설가로서의 재능도 상당해 거의 첫 소설이었던 <즉흥시인>의 경우 문단과 대중 양쪽의 호평을 받으며 바로 그를 유명하게 만들었다. 그 이외에도 어느 정도 소설을 집필했고 생전에는 모두 호평을 받고 많이 읽혔다. 다만 '즉흥시인'을 제외한 거의 모든 소설이 지금 와서는 거의 잊혀진 실정이다. 사실 이제 즉흥시인도 그다지 많이 읽히는 편은 아니고.
30살인 1835년부터 동화를 쓰기 시작했는데, 현대에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당시에는 어린이를 속이는 글이나 쓴다고 욕도 많이 얻어먹은 모양이다. 다만 명성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 앞에는 "'즉흥시인'을 집필한 뛰어난 소설가"라는 문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1843년에 발표한 미운 오리 새끼가 대성공하면서 남녀노소를 불문한 모든 사람들이 안데르센의 동화에 빠져들었다. 안데르센의 유명세가 대단해서 심지어 그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되고, 말년에는 정부로부터 특별 연금까지 수령하는 등 국내외적인 유명인사로 자리매김했다. 안데르센을 애호하던 유명인사 가운데서 찰스 디킨스는 그와 여러 번 만나 친분을 쌓기도 했다.[3]
이후 1840~60년대까지 유럽이나 미국, 터키 등 여러 나라를 여행하면서 기행문 책자를 쓰기도 했다. 작품적, 경제적 인정을 받으며 잘 살다가 갔으나 1872년 침대에서 떨어져 다친 뒤로 제대로 걷지못했고, 이후 여러 합병증 증상을 보이며 자리에 누워 병마에 시달리다가 1875년 8월 4일, 7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8월 11일에 거행된 장례식에는 덴마크의 국왕 크리스티안 9세와 루이세 왕비까지 참석했다.
동화가 유치하지 않고, 어른이 읽어도 이야기에 깊숙이 몰입해 가슴 속 깊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안데르센 동화의 특징. 또한 안데르센은 자신의 작품에 자신이 어린 시절 겪은 불우한 추억들과 주변 환경을 상당히 투영했기 때문에, 어린이들이 읽기엔 이야기가 너무 암울한 경우가 많고, 아예 배드 엔딩, 새드 엔딩으로 끝나는 작품들도 많다. 자신의 동화에 자신과 자신 주변의 인물들을 캐릭터화 시켜서 등장시키는 작품도 많다.
그의 동화들 중에는 분명 작가가 있는데도 발단이나 결말 등에서 판본이 여러 가지인 작품이 제법 있다. 눈의 여왕, 빨간구두, 인어공주 문서 참조. 이것은 번역자나 편집자들이 아동용으로 눈높이를 맞추느라 내용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또한 주요 작품이 덴마크어를 직역한 것이 아니라, 이미 영어나 독일어, 일본어로 번역된 것을 우리나라에서 중역한 탓도 있다. 영국 출신 안데르센 연구가 재키 울슐라거가 그 점을 지적한 바 있다. 링크 어쨌든 그의 작품은 영화, 애니메이션, 발레 등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이 각색되었다.
2. 독신
양성애자였던 안데르센은 평생 어떤 사람과도 결혼하거나 사귀지 않고 독신으로 생을 마감했다. 그가 독신으로 살게 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으나 어릴 때 쓴 그의 일기에는 평생 성관계를 맺지 않겠다는 다짐이 적혀있다고 한다.[4]
한편 젊은 시절 짝사랑했던 리보르그 보이트(Riborg voigt)에게 차인 것이 충격이 되었기 때문에 독신으로 살게 되었다는 설도 있다. 어렸을 때부터 외모로 놀림을 당해 자신감이 없고 소극적인 성격이었던 안데르센이 난생 처음으로 용기를 내어 상당히 긴 편지로 르보르그에게 고백을 했건만, '''겨우 두 줄'''밖에 안 되는 답장으로 무참하게 차였다. 대신 르보르그는 그의 용기를 높이 사서 그가 쓴 동화의 애독자가 되었다.[5]
하지만 독신으로 살겠다던 초년의 맹세가 아주 굳건했다고 볼 수는 없는게 그 이후에도 그는 소피 외르스테드(Sophie Ørsted), 후원자의 딸인 루이스 콜린(Louise Collin)등에 관심을 표한 바가 있다. 하지만 결국 연인관계로 발전하는 데는 실패했고, 동화 나이팅게일을 쓰는데 영감을 준 스웨덴의 오페라 가수인 제니 린드에게도 고백했으나 린드는 안데르센을 친오빠처럼 생각했기에 거절했다고 했다.
한편 유명한 동화 인어공주는 연하의 남성 에드워드 콜린(Edvard collin)과의 관계를 반영했다고 알려져 있다. 겉으로는 친구 사이었지만, 내심 콜린에게 연정을 품고 있었던 안데르센은 "여자와 같은 마음으로 당신을 사랑한다"며 절절한 편지로 고백을 감행했으나 또 거절당했다. 콜린은 이성애자였기 때문이다. 더구나 고백을 거절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콜린은 다른 여자와 결혼해 버린다. 이 일 때문에 안데르센은 굉장히 상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 때 안데르센이 쓴 작품이 인어공주로, 그의 연구자들은 왕자가 콜린을 상징하고 안데르센이 인어공주를 상징한다는 데 동의하고 있다. 그래도 콜린은 말년에 쓴 회고록에서 이 때의 일을 언급하며 자신은 안데르센의 사랑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를 잘 몰랐고 그 때문에 그가 더 많이 상처 입었던 것이라고 썼다. 못내 미안한 감정이 남아 있었던 모양.
그 외에 그가 사랑했던 남자로는 덴마크의 댄서 해럴드 샤르프(Harald Scharff),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대공 카를 알렉산더가 있지만 역시 사귀는 데는 실패했다.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종교적 신조에 반하는 일이었던 만큼 남성과 육체적 관계를 맺은 일도 없는 것으로 보인다.
안데르센은 늘 짝사랑 상대에게 집착에 가까운 편지와 관심을 보여줬지만, 결국 어느 누구도 안데르센의 짝이 되어 주지는 않았다. 그가 훗날 쓴 편지에서 말하기를, 자신에게 행복은 가정의 형태로 찾아올 수도 있었지만 대신 뮤즈가 되어 찾아와 주었다고.
3. 평가
은하영웅전설의 작가 다나카 요시키는 자신의 추리 모험소설 월식도의 마물에 찰스 디킨스와 함께 안데르센을 등장시켰는데, 상당히 소심하고 정서불안증이 있는 어린아이 같은 인물로 묘사했다. 작가의 말로는, 안데르센에 대해 조사하니 실제로 그런 성격이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소설에 두 사람이 만나 이야기하는 대화들은 실제로 이 둘이 만나서 나눈 이야기들이다.안데르센은 성공한 ‘미운 오리새끼’이며, 고결한 ‘인어공주’이다. ‘꿋꿋한 양철 병정’이자, 왕의 사랑을 받는 ‘나이팅게일’이며, 악마 같은 ‘그림자’이다. 우울한 ‘전나무'이기도 하고, 불쌍한 ‘성냥팔이 소녀’이기도 하다.
전기 작가 재키 울슐라거
더불어, 이 작품에서 영국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듣던 신문을 보고 디킨스 집 앞마당에서 울며불며 징징거리는데 1857년 실제로 벌인 일이다. 52세이던 그가 실제로 이래서 7살 연하이던 디킨스가 다독였는데 사람들이 회고하길, 어찌된 게 7살 어린 디킨스가 더 어른같고 안데르센은 정말 아이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뭐 어릴적부터 공장에서 일하고 궂은 일을 다하던 디킨스였지만 안데르센도 마찬가지로 어릴적부터 일했으니...
처음 안데르센 동화가 나왔을 당시에는 평단과 대중들로부터 "이런 비교육적인 이야기를 애들 보는 동화라고 쓰다니!" 라는 반응이 적지 않았다. 물론 안데르센의 명성이 높아지면서 이런 혹평은 점점 설 곳을 잃어갔다. 그런데 안데르센 동화 중 몇몇 편은 '''지금 시점에서 봐도 애들 보라고 쓴 게 아닌 것 같은''' 수위를 자랑하기도 한다. 예를 들면 부시통[6] 이나, 큰 크라우스 작은 크라우스 이야기.[7]
그가 동화에 끼친 영향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창작동화의 개척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의 동화는 그림형제처럼 민담을 재구성하거나, 저자가 불분명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축약, 왜곡, 구전되어오는 이야기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고 그것이 동화의 전부였었다. 안데르센도 초창기에는 그림형제처럼 민담을 재구성하는 이야기를 썼으나, 점차 자신이 직접 '''창작'''한 이야기의 비중을 늘려나갔다. 그의 동화는 자칫 교훈적이고 도구적인 의미로만 흐를 수 있는 동화라는 장르에 예술성을 불어넣어, 동화가 민담의 하위 장르가 아니라, '''동화 스스로가 문학적으로 훌륭한 장르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동화라는 장르의 '''예술적 자율성'''을 불어넣은 셈.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창작 동화의 규격과 틀, 이야기 구조, 문체 등과 같은 기본적 요소들은 전부 '''안데르센의 창작 동화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어찌보면 그의 동화는 이러한 근대 동화의 시발점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의 이름을 딴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상은 '아동문학계의 노벨문학상'으로 불리고 있다.
4. 작품
4.1. 소설
- 즉흥시인
4.2. 동화
콩깍지 안에 완두콩 다섯 형제가 자라고 있었다. 콩이 다 익자 한 장난꾸러기가 콩깍지를 까서 새총으로 완두콩 다섯 개를 발사한다. 그 중 가장 작았던 막내는 한 가난뱅이 여자가 살고 있는 집의 창틀에 떨어진다. '뭐든 될대로 되라'던 막내는 그 창틀에서 싹을 틔운다. 가난뱅이 여자에게는 먼저 떠나보낸 두 자식과 앓아누운 딸이 있었는데 마지막 남은 딸도 언제 죽을지 모를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 창틀에서 싹을 틔운 완두를 본 딸은 완두를 더 가까이서 보고 싶어하고 여자는 딸의 침대를 창문 가까이로 옮겨 준다. 완두가 성장해가면서 따뜻한 햇빛을 받은 딸의 증세도 점점 호전되고, 마침내 막내 완두가 꽃을 피우자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던 딸은 스스로 몸을 세워 콩 꽃에 입을 맞춘다. 다른 네 완두 형제 중 셋은 비둘기가 먹어치웠고 나머지 하나는 수채 속에 빠져서 퉁퉁 불어 썩어버린다.
- 그림 없는 그림책
가난한 화가가 시골에서 도시의 한 골목길로 이사왔다. 혼자 쓸쓸해하던 그에게 달이 매일 밤 세계를 일주하며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는 연작 단편이다.
아파서 죽어가는 아이를 둔 어머니가 아이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온갖 고생을 다 하며 사신을 찾아가는 이야기. 용감하고 헌신적인 어머니는 아이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것을 희생한 끝에 마침내 사신(사실 죽음 그 자체)를 만난다.
- 모래장수 올레(Ole Lukøje)
"모래장수"(영어로는 Sandman)는 민화에 등장하는 인물(?)로, 잠잘 시간이 된 어린이들의 눈에 부드러운 모래를 불어넣어 잠이 오게 만드는 존재이다. 안데르센 동화에 등장하는 모래장수는 "올레 루코헤"라는 이름이 있으며, 어린이를 잠재운 후 착한 어린이에게는 아름다운 그림이 그려진 우산을 펼쳐 좋은 꿈을 꾸게 하고, 나쁜 어린이에게는 아무 그림도 없는 우산을 펼쳐 꿈이 없는 깊은 잠을 자게 만든다. 모래장수 올레는 형제가 있는데, 그 역시 이름이 올레로 똑같지만 그가 잠을 재운 사람은 다시는 일어나지 않는다. 즉 사신. 모래장수 올레는 형제 올레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라며 사실 사신 올레도 상냥한 존재라고 말한다. 이 동화에 크게 영향을 받은 그래픽 노블 작품이 바로 유명 작가 닐 게이먼의 DC 코믹스 작품인 샌드맨 시리즈. 작중에 등장하는 영원 일족의 구성원인 주인공 꿈이 이 동화처럼 모래도 사용한다.
항목의 신화에서 기원하는 프시케 석상을 조각하는 한 예술가의 이야기인데, 애니메이션 안데르센 동화에서는 다르게 각색되었다. 부모없이 고아로 지낸 어떤 남자아이(키르토)가 아버지의 뒤를 이어 조각상팔이로 생계를 꾸리고 있었다가 우연히 만나게 된 프시케라는 귀여운 소녀와 사랑에 빠지게 되어 같이 지내게 된다. 그러던 어느날 프시케가 갑자기 사라지게 되고 소년은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프시케의 조각상을 만들게 된다. 조각상이 완성되었을즈음 아름다운 어른 미녀가 소년의 앞에 다시 나타나게 되는데 그녀는 성장한 프시케였으며 나비의 요정이었기에 소년과 보냈던 나날을 기특하게 여긴 신들의 축복으로 우화하여 나비처럼 아름다운 미녀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 이었다. 그러나 소년은 그녀가 프시케라는걸 믿지 않고 예전에 사랑했던 여자아이=조각해낸 프시케야말로 진짜다라고 하며 그녀를 돌아보지 않게되어 프시케는 충격을 먹고 신들도 격노한다. 자신의 예전 모습을 한 조각을 없애면 된다고 생각한 프시케는 조각칼을 주워 그 조각상을 부수려 하나 얄궂게도 소년이 가로막아 자신을 사랑했던 소년이 죽게된다. 프시케는 슬픔에 빠지고 신들도 슬퍼하여 하늘과 바다가 미쳐돌아가게 되자 프시케는 죽은 소년을 안고 그대로 같이 바다에 빠져 목숨을 끊는다.
- 돼지치기 왕자
허영심 많은 공주와 그 공주를 사모하던 왕자의 이야기. 공주는 가리는 게 많은 철부지였지만 아름답기로 소문이 나있었는데, 이웃 나라의 손재주 좋은 '아우구스틴'이라는 왕자는 그 공주를 사모해 귀한 꽃을 선물로 보내며 청혼을 했다. 그러나 공주는 '금방 시들어버리는 꽃보다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조화가 더 좋다'라며 사정없이 꽃을 내버린다. 상심한 왕자는 '이렇게 된 이상 현피로 간다'로 나서 돼지치기로 변장해 공주의 나라에 찾아간다. 그리고 흔들면 여러가지 소리가 나는 방울이 달린 손악기를 하나 만들어 그 악기에 눈독을 들인 공주에게 키스 50회에 팔겠다 제안한다. 성격 까다로운 공주는 더러운 돼지치기와 키스하는게 꺼려졌지만 그보다 그 악기가 더 탐나 결국 키스 50회를 하고 악기를 손에 넣었으나 며칠 가지도 못해 싫증이 나자 공주는 그 악기를 손바닥 뒤집듯이 버린다. 오기가 생긴 왕자는 이번에는 가장자리에 각기 크기가 다른 방울을 달아 물을 부으면 멜로디가 연주되는 항아리를 만들었고 여기에도 눈독을 들인 공주에게 이번엔 키스 100회를 제안한다. 공주는 전과 똑같이 항아리가 탐이 나 시녀들에게 자기 모습을 가리게 하고 왕자와 100회의 키스를 한다. 그러나 그 자리를 국왕에게 들키고 대노한 국왕은 공주와 왕자를 국외추방 시켜버린다. 공주가 차라리 꽃을 선물했던 그 왕자와 결혼하는게 나았겠다며 울자, 왕자는 마침내 자기 정체를 밝힌 뒤, '당신은 만물의 참된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청혼을 거절당하길 잘했다'라고 공주를 비난하고 공주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성으로 돌아가 문을 닫아버린다. 공주는 성문 앞에 혼자 남아 울면서 슬프게 노래하는 것으로 동화는 끝난다.
4.3. 기행문
- Shadow pictures
- 시인의 바자르
"안데르센의 지중해 기행"으로 번역되어 나왔다. 지금은 절판.
- A visit to Spain 1862
- A visit to Portugal 1866
4.4. 희곡
- 1828- 1829년의 도보여행기, 홀멘스 운하부터 아마게르섬 동부까지
- 니콜라이 탑에서 사랑을
- Mulatto(1840)
- The Moorish girl
4.5. 자서전
- The true story of my life
"안데르센 자서전: 내 인생의 동화"로 번역되어 나왔다.
- Collected works
- En Biografi
- The fairy tale of my life
5. 작품 미디어
5.1. 애니메이션
[image]
- 안데르센 이야기(アンデルセン物語, 1971년)- 81년과 80년대 후반에 MBC로 더빙 방영. 52부작으로 비디오로는 만화 세계 옛날 이야기 등과 묶여져서 비디오로 84년 현대영상에서 더빙하여 낸 바 있다. 한국애니 은비까비가 이 애니에 나온 두 주인공 포지션과 설정을 베꼈다고 할 정도이다. 무시프로덕션에서 제작. 52부작.
- 안데르센 이야기 극장판 アンデルセン 物語, 1968. - 극장판으로 위에 있는 티브이판과 달리 도에이에서 3편을 묶어 만든 극장판이다. 빨간 구두, 엄지공주, 성냥팔이 소녀 3편을 묶어 제작.
6. 창작물에서의 등장
- 덴마크 드라마 1864에서 잠시 등장한다. 주인공들이 일하던 영지의 남작 저택에 초대되어 동화를 낭송하는데, 도중 덴마크와 독일 연방 간의 전쟁[8] 이 발발했다는 엄청난 소식이 날아들어 낭송회가 중단되자 울먹거린다. 웃음 포인트는 안데르센이 운 이유가 비극적인 전쟁이 발발해서가 아니라 전쟁 비보가 자신의 동화를 끊어먹고 관객들이 그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서라는 점이다. 다만 순진한 그답게 '불쌍한 내 동화가 무슨 죄가 있다고' 라는 식으로 울먹거리며, 초청자인 남작이 그를 위로해준다.
- 게임 《Fate/EXTRA CCC》에서 캐스터로 등장하며 문서 참고. 독설을 내뱉고 일하기 싫어하는 소년의 모습으로, 독자들의 '이런 비정한 이야기를 쓰는 사람은 피도 눈물도 없는 사람일 것이다' 라는 인식에 의해 전신에 동화속 인물들같은 상처를 입고 있다고 한다.
7. 관련 문서
[1] 실제 덴마크어 발음은 핸스 크라이스티안 아너슨에 가깝다.[2] 아버지는 나폴레옹 전쟁에 참전했다가 돌아온 뒤 전쟁 후유증으로 신경쇠약에 걸려 사망했다. 이 때 그의 어머니는 눈의 요정이 아버지를 데려갔다고 말했는데, 이것이 훗날 눈의 여왕을 창작하게 된 배경으로 여겨진다.[3] 그러나 디킨스가 존 러셀 백작(버트런드 러셀의 조부)에게 보낸 서신에 “안데르센은 이 방에서 5주를 머물렀는데 영원한 기간으로 느껴졌다”라고 적었을 정도로 굉장히 시달렸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로 안데르센과의 교류를 완전히 끊어 버렸다.[4] Lepage, Robert (18 January 2006). "Bedtime stories". The Guardian. Retrieved 19 July 2006.[5] 정확하게는 리보르그도 안데르센에게 관심은 있었던 모양이나 과거에 결혼까지 생각한 남자친구와의 관계가 가족들의 반대로 파탄난 것 때문에 트라우마가 생겨서, 안데르센이 고백을 해오자 옛날 일이 반복될까봐 두려워서 가차없이 차버렸다고. [6] 한 병사가 전쟁터에서 돌아오던 길에 마녀를 만난다. 병사는 마녀의 부탁으로 나무 구멍을 통해 내려갈 수 있는 던전에 들어가 세마리의 개들(이 개들은 던전에서 각자 구리 동전, 은화, 금화 더미를 지키고 있다. 부시통을 찾는 와중에 병사는 마녀가 준 앞치마로 개들을 유인해가며 돈을 가진다.)을 소환하는 부시통을 얻는다. 그런데 병사가 부시통을 넘기라고하는 마녀의 목을 베어 죽인다! 참고로 부시통은 원래 마녀의 할머니가 깜빡 잊고 던전에 두고 온 물건이라 원래 병사것도 아니다. 그리고 이후 지하에서 얻은 금화로 흥청망청 사치도 부려보고 개들을 시켜 1년내내 구리궁전에 갇혀 지내는(하찮은 병사와 결혼한다는 예언 때문에 갇혀지낸다.) 한 왕국의 공주를 성에서 꺼내 밀회를 가진다. 그런데 이게 들켜서 병사가 사형을 언도받는데, 사형장에서의 마지막 소원으로 담배를 피고 싶다며 마법의 부시통을 써서 세마리 개들을 소환, 그 자리에서 재판관과 신하들과 왕과 왕비를 죽이고 백성들의 요청에 따라 왕이 된다. 그리고 공주는 병사하고 결혼한다. 공주는 병사와 결혼하는게 싫지만은 않았다고 한다.[7] 내용은 대충 덴마크판 흥부 놀부라고 보면 된다. 그런데 흥부 놀부는 놀부가 죄를 뉘우쳐서 흥부하고 다시 화목하게 사는 결말이지만, 큰 크라우스 작은 크라우스는 흥부 포지션인 작은 크라우스가 놀부 포지션인 큰 크라우스를 속여서 돌까지 넣은 자루속에 넣고 물속에 빠트리는 결말이다.[8] 1864년 발발했던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 독일계 지역인 슐레스비히 공국을 동군연합으로써 오랜 세월 동안 보유하고 있던 덴마크가 이 지역을 완전히 합병하려 하자, 독일의 맹주였던 프로이센 왕국과 오스트리아 제국이 이에 반발하며 일으킨 전쟁이다. 이 전쟁에서 덴마크는 완패했고, 엄청난 영토를 빼앗기고 말았다. 전쟁 자체는 작았고 또 지금까지도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사실은 독일 통일이라는 엄청난 후폭풍을 몰고 온 대사건이었다. 종전 직후 덴마크로부터 빼앗은 영토 문제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간의 분쟁이 터졌고, 이 때문에 1866년 보오전쟁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여기서도 승리한 프로이센은 통일에 더욱 박차를 가해 4년 뒤에는 보불전쟁에서 통일의 방해자였던 프랑스 제국마저 순식간에 패배시키고 독일 제국을 결성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