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평가

 




1. 개요
2. 긍정적 평가
2.1. 정치에 대한 평가
2.1.1. 대한민국 정부 수립
2.1.2. 시장경제체제 도입
2.1.3. 자유민주주의 도입
2.1.4. 남녀평등 투표권
2.1.5. 제대로 된 사병 급여
2.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2.2.1. 농지개혁법 시행
2.2.2. 초등교육 의무화 및 교육개혁
2.2.3. 고등교육 투자
2.3. 외교에 대한 평가
2.3.1. 미국에게 대규모 지원과 원조를 얻어냄
2.3.2.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2.3.3.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4. 경제에 대한 평가
2.4.1. 경제개발의 초석 마련
2.4.2. 한국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
2.4.3.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3. 부정적 평가
3.1. 정치에 대한 평가
3.1.1. 독재
3.1.1.1. 정치깡패와 서북청년회
3.1.1.2. 진보당 사건
3.1.1.3. 견통령 사건
3.1.1.4. 발췌 개헌
3.1.1.5. 사사오입 개헌
3.1.1.6. 2.28 학생민주의거
3.1.1.7. 3.15 부정선거
3.1.1.8. 4.19 혁명
3.1.2. 인사 실패
3.1.3. 친일몰이
3.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2.1. 학살
3.2.1.1. 여순 반란 진압 과정에서의 양민 학살
3.2.1.2. 보도연맹 학살사건
3.2.1.3.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3.2.1.4. 거창 양민 학살사건
3.2.1.5.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
3.2.1.6. 문경 양민 학살사건
3.2.1.7. 강화 양민 학살사건
3.2.1.8. 제주 반란세력 소탕과정에서의 양민 학살
3.3. 외교·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3.3.1. 미흡한 전쟁 대비
3.3.2. 한국전쟁 초기 허위 전황 방송
3.3.3. 한강 인도교 폭파
3.3.4. 국민방위군 사건
3.4. 경제에 대한 평가
4. 논란
4.1. 징병제
4.1.1. 부정적 시각
4.1.2. 긍정적 시각
4.2.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질에 대한 논란
4.2.1. 부정적 평가
4.2.1.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
4.2.1.1.1. 독립운동 자금 횡령
4.2.1.1.2. 친일 민족반역자 청산 방해
4.2.2. 긍정적 평가
4.2.2.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
4.2.2.2. 안전한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놀고먹었다?
4.2.2.3.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
4.3. 친일파 대통령?
4.3.1. 강경한 반일 정책과 발언들
4.4. 미국의 앞잡이?
4.5. 순수혈통주의에 기반한 국제입양


1. 개요


이승만의 행적들을 평가하는 문서다.

2. 긍정적 평가


이승만은 아시아의 반공국가 및 비공산국가군의 지도자로 떠올랐다. 그는 공산주의자들과의 투쟁을 통하여서 뿐만 아니라 때로는 미국과 맞서기를 서슴지 않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통하여 그런 지도자가 되었다. 이승만은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그는 아시아인이었다. 그는 강력한 지도자였다. 성장하는 강력한 군대를 갖고 있었다. 반공지도자일 뿐 아니라 반(反)식민지 지도자였다. 많은 아시아인들에게 이승만은 극동지역에 존엄과 자존심을 가져다 준 인물이었다. 이런 이미지는 그가 한국의 동맹국인 강력한 나라들의 의지에 끌려다니지 않고 오히려 그들과 맞서 전쟁을 자신의 의지대로 이끌고 있다는 점에 의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유엔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의 회고록 "다뉴브에서 압록강까지" 中

그는 그의 몸무게 만큼의 다이아몬드와 같은 존재다. 그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 학자, 정치인 그리고 애국자 중 한명이다.

미8군 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이승만은 내가 만나본 한국인들 중 고령에도 불구하고 확실히 가장 날카롭고 월등히 뛰어난 인물이다.

영국 외무상 셀윈 로이드(Selwyn Lloyd)


2.1. 정치에 대한 평가



2.1.1. 대한민국 정부 수립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이승만

국부는 한 나라에 한 분, 이승만 박사뿐이니 내 이름 앞 국부라는 말은 떼어내라

김구

이승만은 건국의 주역이다. 다만 3선 개헌은 아쉽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2009년 인터뷰 中#[1]

해외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해방 후 입국하여 과도민주의원을 거쳐 UN결의안에 따라서 제헌의회 총선거를 거친 뒤 대한민국 정부의 수립을 주도하였다.
이승만은 38선 이남만이라도 단독 정부를 수립 할 것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이승만을 폄훼하고자 하는 측에서 그를 분단의 원흉이라는 식으로 매도하는 경우가 있는데, 김일성소련군정이 자리잡은 38선 이북은 1946년 2월에 사실상의 정부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만들져서 토지개혁을 하고 기간산업을 국유화 하고 군대를 개편하는 등 공산체제를 이미 굳히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승만도 원래는 한반도 전체에 민주국가를 수립하고 싶어했으나 이러한 당시 상황이 현실적으로 그것을 어렵게 했기 때문에 이에 대응하기 위하여 이남만이라도 임시정부나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이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혁적 조치에 대응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분단의 원흉은 이북에서 단독 국가 수립을 이미 진행하고 있던 김일성일 것이다. 실제로 김구가 김일성을 설득하려고 시도를 했으나 김일성은 비협조적이었고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또한 좌우합작이라는 것도 겉으로 듣기엔 그럴싸하지만 실제 동유럽이 그런식으로 공산화되었다. 2차 대전 이후 소련은 자신들이 키운 소위 '작은 스탈린'들을 동유럽 각지로 보내 '화물열차 정권'을 만들었다. 이 화물열차 정권들은 비공산세력과 연립정부를 세우고 군대, 경찰 등 권력 기구를 장악한 뒤 연립정부 안에 있는 비공산세력들을 축출하거나 정치테러와 공포 분위기 속에서 선거를 치뤄 정권을 장악하는 방식으로 동유럽 나라들을 공산화시켰다. 38선 이북의 김일성 세력도 바로 이 화물열차 정권이었고[2] 좌우합작이라는 사탕발림에 넘어가면 동유럽과 같은 결말을 맞이하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1.2. 시장경제체제 도입


광복 당시 국내에 영향력 있는 인사들은 많은 수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었다. 그 시기는 세계 일부 국가들을 시작으로 공산주의가 국가체제로 채택되어 돌아가기 시작한지 오래되지 않은 초창기였고[3]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중 어느 쪽이 더 나은 체제일지 명확히 알 수 없는 시대였다. 실제로 2차 대전 이후 신생 국가들 중 적지 않은 수가 공산주의를 선택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문제점과 미래를 명확히 꿰뚫어 봤다.

1. 재산을 나누어 가진다 : 재산을 나누어 가지면 정차 저마다 일은 하지 않고 얻어먹으려는 사람들로 가득찬다.

2. 자본가를 없앤다 : 자본가를 없애면 상업과 공업이 발달하기 어렵고 사람의 지혜가 막혀 물건들이 진보되지 못한다. 자본을 폐기하는 것보다 법률로 노동과 평등 세력을 가지게 하는 것이 낫다.

3. 지식계급을 없앤다 : 모든 사람들의 지식 수준을 높여서 현재 학식으로 양반 노릇 하는 사람들과 비등하게 되게 해야지, 지식계급을 없애자고 하면 안된다.

4. 종교단체를 혁파한다 : 평등과 자유의 사상이 열교확장되는 중에 발전된 것이니 이를 없애는 것은 인류덕의상 손해가 클 것이다.

5. 정부, 군사, 국가사상도 다 없이 한다 : 공산당 속에서도 이론이 많을 뿐더러, 공산당을 주장한다는 러시아만 봐도 정부와 인도자와 군사가 없이는 부지할 수 없다는 것을 자기들도 다 알고 있다.

이승만이 1923년에 쓴 '공산당의 당부당'의 내용 중 공산당의 부당한 점 요약.

위에 인용된 '공산당의 당부당'을 이승만이 1923년에 썼는데 이 때는 레닌도 생존해 있었고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지 얼마 되지도 않은 시점이었지만 마치 이후의 일들을 예견이라도 한 듯 이승만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이승만은 미국에서 유학하고 생활하면서 미국이라는 나라와 그 체제를 깊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는 자본주의와 민주주의로 미국이 풍요롭고 강력한 나라로 성장하는 것을 목격하며 우리도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를 선택하는 것이 번영으로 가는 길이라 생각했다. 한반도가 처한 선택의 기로에서 자본주의를 채택한 국가를 수립한 것의 혜택은 지금 우리 모두가 누리고 있으며 비슷한 시기 공산주의를 선택했던 국가들의 결말을 보면 그 차이는 더 분명해진다.

2.1.3. 자유민주주의 도입


이승만이 원한 것은 미국식 자유민주주의였다. 나중에 사사오입 개헌과 부정선거 등으로 얼룩지긴 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유민주주의를 도입했다는 점 자체에 대해선 높이 평가할 수 있다. 왜냐면 이승만 집권 기간 동안 국민들은 대통령 선거, 국회의원 선거, 지방의희 의원 선거 등 자신의 손으로 직접 뽑는 민주주의 정치 경험을 반복적으로 축적할 수 있었고, 아이러니하지만 4.19 혁명이 일어나게 된 것도 결국은 이승만 정부가 자유민주주의를 가치로 정부를 수립했고 공교육에서도 자유민주주의를 가르쳤기 때문에 그 가치에 맞지 않은 부정선거 같은 일이 일어나자 국민들의 시위가 일어나게 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승만은 지방자치제를 도입하여 한국의 풀뿌리 민주주의를 성장시켰다. 이승만이 도입한 지방자치제는 박정희의 쿠데타 이후 폐지되었다가 거의 30년이나 지나서야 노태우 정권에서 다시 부활했다.

2.1.4. 남녀평등 투표권


이승만 정권은 20세 이상 전국 모든 남녀에게 모든 선거에서 평등한 투표권을 부여했다. 지금의 현대화된 선진국 한국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뭐 대단한건가 싶겠지만 당시 한국은 이제 막 전근대 왕조국가와 식민지에서 벗어난 시점이었고 국민 중 대다수는 남녀평등한 투표권은커녕 투표권이라는 것 자체에 대한 개념도 없는 상태였다. 벨기에에 남녀 동등한 투표권이 생긴 것이 한국과 같은 1948년이었고, 그리스가 1952년, 멕시코가 1953년, 스위스는 1971년, 포르투갈은 1976년에서야 남녀간에 완전히 동등한 투표권이 생겼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초대 내각을 꾸릴 때 임영신을 상공부 장관으로 임명했다. 역사상 최초의 여성 장관이었으며 불과 근래까지도 여성 장관은 드물었던 것을 생각하면 1948년 그 시대에 초대 내각 상공부 장관에 여성을 임명한 것은 시대를 앞서갔다고 할 수 있다. 또한 1953년에는 원래 여성에게만 적용되던 간통죄를 남녀 모두에게 적용시켰다.
그리고 여성들에게도 의무교육을 비롯한 평등한 교육기회를 부여하면서 기능직 노동자부터 사무원, 의사, 교사, 군인, 경찰에 이르기까지 여성들의 사회진출이 시작되었다. 숫자는 적었지만 여성 판사, 공학사들도 이승만 집권기에 나타났다.[4] 이런 변화들에 힘입어 여성 국회의원들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것들은 조선 수백년을 포함하여 오랜 기간 차별 받아온 한국의 여권 신장 역사에 엄청난 변화였다.

2.1.5. 제대로 된 사병 급여


이승만 시기의 장군 대비 사병의 월급은 2020년 현재까지도 역대 가장 높은 봉급이다.
이승만 정권 말기인 1960년 3월 기준으로 병장 급여를 120환으로 지급했는데 이는 같은 시기의 준장의 급여인 1200환의 10%였다. 2019년 현재 준장의 급여가 대략 (수당 포함) 780만 원인 것을 감안하고 그 당시의 비율대로 보면, 병장의 급여는 78만원이 된다. 또 한홍구 교수에 따르면 현재 9급 공무원 초임에 해당하는 5급 26호봉이 360환이었으니 당시 병장은 공무원 초임의 1/3을 받은 것이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매우 오래 지낸 덕분에 사고방식이 사실상 미국인이었고 그래서 일하면 돈 준다는 사고방식이 뼛속 깊이 박혀있었다. 그래서 사병의 급여는 제대로 지급하려고 노력했다. 물론 이는 장군 월급 대비 상대적인 사병 월급을 제대로 줬다는 뜻이다. 당시 한국의 경제상황이 상황이었던지라 나라 자체가 가난했던 시절이기 때문에 장교든 사병이든 절대적인 금액으로는 적은편이었고 영관 장교조차 월급만으로는 가족들 입에 겨우 풀칠하기도 힘든 상황이었다.#
당시 군인들의 증언[5]들을 들며 이 병장 월급에 대해 말이 안된다고 반박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는 당시 절대 빈곤에 처해있었던 한국 경제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본 시각이다. 위에서 서술했듯이 당시 영관 장교들조차 월급만으로는 일가족이 제대로 먹고 살기 힘들었을 정도니 절대적인 금액으로는 당연히 적은 금액이며[6] 당시 장군이나 공무원 월급을 고려했을 때 사병 또한 제대로 급여를 쳐줬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후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사병 급여는 동결되었으며 전두환 정부 중에는 병장 급여가 준장 급여의 1.5% 수준까지 하락하기도 했다. 노태우 정부에 이르러서 비로소 사병 급여가 대폭 인상되었다.

2.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2.2.1. 농지개혁법 시행


광복 이후 가장 중요한 현안이자 농민들의 염원이었던 농지개혁을 이루었다. 이승만은 농지개혁을 이루기 위해 자신과 정치적 성향이 정반대였음에도 불구하고 조봉암을 초대 농림부 장관으로 앉혀서 대지주 계층이 중심이 된 한국민주당의 반대를 뿌리치고 유상몰수 유상분배 형식의 농지개혁법국회에서 통과시켰다.
반면 북한에서는 한국보다 먼저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형식으로 농지개혁을 했었으나 그에 대해 이승만은 아래와 같이 말했다.

북한식 농지개혁(무상몰수 무상분배)을 할 경우 정부가 대지주가 되고 농민들은 다 소작인으로 경작하게 되어, 전에는 부호의 노예가 되던 것이 지금은 정부의 노예가 되는 것에 불과하다.

이승만

이 농민 불만 해소야말로 6.25 전쟁 초반의 패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이었다. 북한이 전쟁 초기 남한 농민들에게 선전한 토지분배가 전혀 매력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기가 열심히 일해서 얻어낸 토지를 뺏아서 옆집 빈둥거리는 녀석이랑 똑같이 공짜로 나눠주겠다는데 어떤 농민이든 환영할 리가 없다.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기 직전 박헌영이 김일성에게 "인민군이 서울만 점령하면 남로당원이 들고 일어나 남조선 전 지역을 해방시킬 것"이라고 얘기했으나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국민 절대다수가 농민인 이 시기에 농심은 곧 민심이자 여론이었다. 한마디로 농지 개혁은 단순한 경제 정책이 아닌 대한민국의 안보 정책이기도 했다.
소작농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조항은 있었지만 머슴[7]들에게 땅을 분배한다는 조항은 없었기 때문에 1950년 6월 25일 쳐들어온 북한군이 머슴들한테도 땅을 분배한다고 약속하자 땅을 분배 받지 못해 불만을 품었던 머슴들이 북한군에 협력하는 사례도 일부 있었으나 남미나 제3세계 국가들이 토착 지주 계층의 반발로 산업화나 경제 개발 정책이 실패한 점[8]을 생각하면 6.25 전쟁과 함께 이 농지개혁은 대한민국에서 봉건적인 지주-소작 관계를 무너뜨리고 지주 계급을 무너뜨리면서 본격적인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판을 만들었다.

2.2.2. 초등교육 의무화 및 교육개혁


낮은 교육 수준에서 서구식 민주주의를 실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에 이승만은 교육을 최우선시하였고 여성도 동등한 교육 기회를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여 전국민의 초등학교 6년 의무교육을 실시하였다. 이 사업을 위해 당시 문교부 예산의 최대 80%를 할당했으며 광복 당시 초등학교 수는 2,800여개였고 한국전쟁 때문에 전후에는 이보다 훨씬 적었으나 1960년에는 4,600여개로 늘어났다. 그 결과 1959년엔 전국 적령 남녀 아동의 95.3%가 취학하는 성과를 거두었다.[9]
초등교육 의무화와 더불어 수만개의 국문보급소를 전국 각지에 설치하고 성인을 대상으로 문맹퇴치운동을 벌여서 1958년까지 550여만 명의 수료생을 배출했다.[10] 이런 노력으로 광복 당시 80%였던 문맹률을 1959년에는 22%까지 낮췄다. 중학교도 광복 당시 불과 97개에서 1960년에는 1,000여개까지 늘어났다. 중학생 수도 5만여명에서 53만여명으로 10배 넘게 늘었다.[11] 그리고 교육 행정을 일반 행정에서 분리시키고 교육자치제도 실시하여 교육 지원 예산이 기존처럼 일반 행정으로 쓰이지 않고 교육 사업에만 쓰일 수 있게 되었다.
이승만이 시행한 이런 교육개혁들은 매우 중요한 효과들을 가져왔다. 먼저, 전통 사회에서의 신분 차별 교육과 달리 전국민에게 남녀 불문 계층 불문 동등한 교육 기회를 부여하여 한국 사회의 평등화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리고 이승만 시절 학교에서 강조된 실용주의적 '일인일기' 교육과 과학기술 교육은 기존의 한국 사회에 팽배하던 문(文)을 숭상하는 숭문주의 문화에서 벗어나 과학적이고 실용주의적인 가치관을 확산시켰다.[12] 이러한 의무교육들과 후술된 고등교육 확대로 배출된 양질의 풍부한 노동력은 이후 한국의 성장의 근본적인 토대가 되었다.
국민들이 사회생활[13]같은 교과내용을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교육을 받았고, 그 결과 부정선거 이후 이승만 정권 퇴진 운동에 나서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물러나게 된 것도 그가 시행한 의무교육 덕이라 볼 수 있다.[14]

2.2.3. 고등교육 투자


이승만은 전쟁 후 폐허가 된 한국의 복구 과정에서 고급인력들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광복 당시 전문학교 이상의 대학 졸업자는 전체 인구의 0.2% 미만에 불과했다.[15] 그리하여 초등교육의 의무화뿐만 아니라 국가를 이끌 고급인력의 양성을 위해 고등교육에도 투자하여, 외국어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한국외국어대학교와 공학 인재를 양성하기 위한 인하공과대학(현재 인하대학교) 등의 대학들을 설립하였다. 대학과 전문학교는 광복 당시 19개에서 1960년 68개로 대폭 늘어났고 대학생 수는 10만명으로 늘었다.

조금만 더 견디면 전쟁이 끝난다. 전쟁이 끝나면 우리는 나라를 새로 건설해야 한다. 전후 복구와 나라를 발전시키려면 고급 교육을 받은 인재가 필요하다. 그 때를 위해 대학 재학생들을 보존시켜야 한다. 아무리 욕을 먹더라도 이것만은 양보할 수 없다

이승만

그리고 이승만은 한국전쟁 중에도 대학생들만은 보존해야한다는 신념으로 1951년 2월 18일 대학생 징집연기조치를 시행하고, 부산에 '전시연합대학'을 설립하여 피난 온 대학생들의 학업이 끊기지 않게 그곳에서 수업을 계속하여 고급 인력을 보존하였다.

2.3. 외교에 대한 평가


나는 한국인의 용기와 인내심, 그리고 이승만의 힘과 지혜에 깊은 감동을 받고 떠났다. 나는 이대통령이 공산주의자를 상대할 때는 '예측불가능성'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통찰력 있는 충고를 한데 대해서 많은 생각을 해보았다. 내가 그 후 더 많이 여행하고 더 많이 배움에 따라서 그 노인의 현명함을 더욱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리처드 닉슨 부통령의 회고록 中

이승만은 철저한 외교주의자로 독립운동을 하는 내내 일관되게 외교독립론을 견지하였다. 국제 정세를 읽는 눈 만큼은 한국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물론, 역대 대통령 가운데에서도 가히 독보적이었다. 미국에서 국제법과 국제정치를 공부했고 미국 각계 인사들과 교류하면서 국제적인 인식과 소양을 쌓았기 때문이었다. 미국에 있으면서 일본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요구한 일본 내막기를 저술했다. 또한 한국의 독립을 위해서는 미일 관계, 미일 개전의 중요성을 일찍 간파하고 미국에서 일본의 위험성, 호전성, 잔혹성을 알리는 활동을 끊임없이 개진했다.[16]
6.25 전쟁이 발발하고 나서는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긴 것도 미국으로 하여금 이 전쟁에 개입하고 책임을 지우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외교적 책략에 미국이 홀딱 넘어가서 미국은 한국이라는 늪에 넣은 발을 당장에 뺄 수 없게 된 것이다. 이로써 한반도 분쟁에 있어서 북한의 군사 행동을 장기간 저지할 수 있는 명분과 더불어 한국전쟁 때 발생할 수 있는 미국의 태도 전환에 대한 억제력을 확보했다.
또한 독도 문제에 있어서 일본을 상대로 초강경책을 펼쳤다. 평화선 선포를 통한 독도의 영유권 편입도 이런 정책의 일환이었다. 아무리 당시 일본이 패전국이었다고 하지만, 두 나라 간의 국력 차이를 생각하면 말 그대로 배짱으로 밀어붙인 외교 정책이라 말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이승만을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평화선 선포만큼은 잘 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하기도 한다.[17]
이러한 성공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외교전을 펼칠 때 강경책을 매우 선호했다. 미국에게 어떤 요구를 하고 만약 받아들이지 않으면 더 강한 요구를 하고, 그래도 안 되면 저대로 못 피해가도록 도박 수까지 던지며 밀어붙였다. 이 때 모든 사안을 본인이 철저하게 본인이 주도하여 일선 외교관들은 이승만의 의사를 전달하는 역할만 수행했다. 이런 강수가 잘 먹힌 대표적인 사례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휴전 협상을 마무리 짓고 발을 빼려는 미국을 제대로 붙들어 매어 놓았고 이승만이 성사시킨 이 조약은 한국의 안보와 발전에 절대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 효과는 2020년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나의 모든 단독행동들, 나의 모든 말들은 미국을 괴롭히는게 아니라 미국을 도와주기 위함이었다. 미국이 이승만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있다고 확신하는 순간 미국은 미국이 가진 가장 효과적인 협상수단을 잃게 될 것이다. 나아가 우리 모두의 희망을 잃게 될 것이다.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할 것인가에 대해 모른다는 두려움이 공산주의자들에게는 항구적인 견제가 된다.

이승만이 리처드 닉슨 부통령에게 1953년에 한 말

이승만의 위 발언은 미국이 북한소련을 상대로 유리한 협상테이블에서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 자기가 미친놈처럼 굴었다는 얘기인데 그의 외교적 행보들이 아무 생각없이 허투루 된게 없음을 알 수 있다. 저 말조차도 사실은 한국의 이익을 위해 그가 "내가 하는 행동들이 결국엔 미국에도 이익이 된다"라며 미국을 납득시키기 위한 것이다.
혹자는 미국의 고위인사들의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은 경우가 꽤 있는 것을 이유로 그의 외교력을 부정적으로 보는 경우가 있는데, 이승만은 이렇게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활용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그게 바로 당시 미국 고위인사들 사이에서 이승만에 대한 평가가 좋지 않았던 이유다. 이승만은 국익을 위해서 철저히 미국을 이용했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선 이승만이 부정적으로 보이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이는 일각의 프레이밍과 달리 이승만이 미국의 앞잡이가 아니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승만을 공격한답시고 한편으로는 미국 고위인사나 기관의 악평을 인용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라고 주장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다.

2.3.1. 미국에게 대규모 지원과 원조를 얻어냄


이승만은 미국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를 알았다. 한국의 지정학적 위치를 이용할 줄 알았고 미국을 비롯한 국제정세를 활용해 그를 달래려는 미국으로부터 수많은 경제적, 군사적 원조를 얻어냈다. 한 예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 8억 달러를 끌어오는데 성공했는데 이는 후에 박정희가 한일협정을 체결하며 일본에게 받은 무상차관 3억 달러보다도 훨씬 많은 돈이었다.

2.3.2. 이승만 라인(평화선) 선포




2.3.3.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2.4. 경제에 대한 평가



2.4.1. 경제개발의 초석 마련


1960년대 이후의 경이적인 경제성장과 국가발전은 그 이전의 이승만 정부에 의한 전제조건의 구축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로버트 올리버

6.25 전쟁으로 인해 거의 대부분의 기반 시설이 파괴되었고 당시 한국 경제의 상황은 한 마디로 말해서 절망 그 자체였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폐허가 된 나라의 경제를 살리는 기반을 닦기 위해 힘썼다. 그 예로 충주 비료 공장, 한국유리공업, 문경 시멘트 공장 등을 설립하고 PL-480(한미잉여농산물원조협정)을 맺었고 이른바 삼백산업[18]으로 불리는 신흥 산업을 번성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당시 미국은 일본이 상품을 생산하게 한 뒤 한국에는 원조자금을 지원하여 그 원조금으로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필요한 상품들을 수입해서 쓰기를 원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자체적인 공업생산력을 갖추는게 중요하다고 판단하여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자체 공장들을 세운 것이다.
1955년에는 영암선을 개통하여 석탄을 서울로 직송하여 연료를 장작에서 석탄으로 바꾸었다. 이것은 벌거숭이가 되어 파괴되는 산림을 보호하는 효과도 있었다. 기존에 전국에서 산에서 나무를 베어 장작을 쓰는 방식으로 생활을 하느라 산이 거덜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으로 한국은 아무런 기반도 없는 말 그대로 제로의 상태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1950년대 말, 한국의 절대 빈곤은 거의 50%에 달했다.[19] 산업의 대외의존도는 90%에 이르렀고, 공업생산은 일제 말기의 절반 수준도 안 되었다. 1959년 미국 상원외교위원회에서 작성한 <퀼른 보고서>는 "많은 면에서 대한민국은 대여된 시간 위에 존재"하고 있으며 "미국 원조 없이는 한국 경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평가를 내렸다.[20] 왜냐면 폐허의 상황에서 임기 10여년 동안 모든 경제 문제를 해결한다거나 당장의 가시적 효과를 낸다는건 불가능한 일이다. 실제로 1970년까지 한국 정부 재정의 약 3분의 2가 미국의 원조로 충당되었다. 미국이 한국에 대한 경제 원조를 중단한다면 한국은 당장 재정 파탄이 날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승만은 당장의 임기응변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는데 힘썼고 그래서 절대 빈곤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정부 예산을 전국민의 6년 의무교육 시행에 쏟아붓고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비료 공장과 시멘트 공장을 지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국방비를 제외하고 가장 많은 예산을 쓴 곳이 바로 교육 예산이었다.
그리고 기업, 산업체의 기술자들을 해외로 연수 보내어 기술력을 배워오도록 했고 학생들을 국비로 해외에 유학을 보내고, 국내에도 대학교들을 세워 인재를 양성했다. 1953 ~ 1960년까지 정규 유학생 자격으로 4,884명의 학생이 해외로 나갔으며[21], 기술 훈련 유학생 자격으로는 1953 ~ 1961년 동안 2,309명이 해외로 나갔다.[22] 그리고 교육계, 경제계, 언론계, 노동계 등 각계 지도자 940명이 미국에 연수를 다녀왔다. 이게 어느정도였냐면 1956 ~ 1957년 기준으로 미국내 외국인 유학생 중에 한국인이 캐나다대만에 이어 3위를 차지할 정도였다.[23] 그 외에도 9,186명의 국군 장교와 부사관들이 미국에 파견되어 전문 교육을 받고 돌아왔다. 이런 각종 유학생들의 거의 대부분이 미국으로 갔다. 일제시대의 영향으로 인해 기존에는 유학이라고 하면 일본 유학이었지만 이승만 정권의 이런 정책은 그런 유학 패턴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고 일본 중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24] 이렇게 유학 보내진 인재들과 국내에서 양성된 대졸 고급인력들은 이후 박정희 정부 시기에 맹활약하며 한강의 기적을 이끌게 된다.
즉, 1960 ~ 1970년대 한국의 눈부신 경제성장은 이승만이 닦아놓은 기반 위에 가능할 수 있었다. 동남아 국가들은 물론이고 인도 같은 나라가 소수의 엘리트 인력이 중요한 달탐사 로켓은 쏘아올릴 수 있으면서도 나라 전반의 산업화는 여전히 지지부진한 이유도 국민 일반의 교육과 훈련 수준이 낮아서 노동력의 질이 낮기 때문이다.
또한 무시할 수 없는 것이 농지개혁법인데, 토지개혁 하나가 막혀서 경제 성장이 퇴보한 필리핀 같은 예를 들어도 토지 개혁의 중요성이 경제개발에 결정적인 요소임을 빼놓을 순 없다. 박정희 정권이 실행한 경제개발 5개년 계획도 시작은 사실 이승만 정부 때 처음 나온 계획으로 1959년에 발표되었고 국제연합한국부흥단(UNKRA)의 한국경제재건계획이 건의되기도 했으며 산업개발위원회에서 작성된 경제개발 3개년 계획안(1960∼1962)이 정부가 마련한 경제개발계획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박정희 정권 시절 이 계획을 변형하여 만든 것이 바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다.

2.4.2. 한국 원자력 발전의 아버지


이승만은 시슬러 박사에게 원자력 발전이 석탄보다 300만배나 많은 전기를 생산한다는 얘기를 듣고 한국도 원자력 개발 체제를 갖도록 지시했고 1950년대 말부터 원자력법을 공포하였다.# 1956년에 문교부 기술교육국에 원자력과를 신설하였고 1959년에는 원자력원과 원자력연구소를 설립했다. 후에 여기서 배출된 전문인력들은 한국의 원자력발전 도입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원자력연구소는 처우도 대단히 좋아서 연구수당과 위험수당을 본봉의 100%씩 더 받았다. 즉, 본봉의 3배를 받았다.## 한국 최초의 연구용 원자로도 이 때 세워졌다.
1인당 6,000달러나 드는 미국의 알곤국립연구소 프로그램에도 4년간 150여명의 훈련생을 파견하였다. 당시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60달러 정도에 불과했으니 얼마나 큰 투자였는지 알 수 있다. 당시 시슬러 박사는 지금 시작하면 얼마나 걸릴지 묻는 이승만에게 20년 정도 후면 이루어질 것이라 얘기했는데 정확히 20여년 후인 1978년 4월에 고리 1호기가 준공되었다. 이승만이 원자력 발전 연구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오랜 기간 한국에 큰 혜택을 가져다 준 우리나라의 원자력 발전은 이보다 훨씬 늦어졌을 것이다.

2.4.3. 국익을 위한 환율 정책


1950년대 한국은 전쟁의 파괴로부터 경제를 복구를 하고 국민의 의식주 기초 생활을 위한 물자 수입을 하는 것이 시급한 과제였다. 하지만 한국은 외환 부족 상태에 있었고 부족한 외환을 주로 원조 자금, 유엔군 지출 경비 등으로 충당하였다.
이승만 정부는 복수환율제를 운용하였는데 외화를 최대한 끌어오는데 중요한 기여를 하였다. 당시 이승만 정부는 협정 환율은 미국으로부터 받는 무상 원조 물자 판매 가격을 가급적 낮게 책정해 민간기업의 재건 활동을 지원했다. 그리고 수출 시장에서는 협정 환율보다 높은 시장 환율의 영향을 받게 했는데, 민간 부문의 수출 활동을 억제하지 않기 위한 일종의 수출지원정책이었다.
한마디로 말해서 미국에서 받은 원조는 최대한 값싸게 민간 부문에 판매하고 수출은 상대적으로 고환율의 영향을 받도록 해서 수출로 벌어 들이는 외화를 극대화하려는 조치였다. 미국이 이에 대해서 끊임 없이 이 복수환율제, 저환율정책에 대한 시정을 요구했지만 이승만은 이를 거부하고 이 때문에 1950년대 후반 한미관계가 갈등에 놓이기도 했다.
다만 이승만 정부의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 등, 복잡한 환율 제도와 관련해 외환프리미엄이라는 경제적 지대가 창출됐는데, 이 때문에 많은 자본가들은 국가가 보유한 외환을 배정 받기 위해 애썼다. 1951년 11월에 공정 환율과 시장 환율의 비율은 3.03에 이르렀다.

3. 부정적 평가


이승만은 여러 일을 했다고는 볼 수 있지만, 그가 범한 많은 과오 중에서도 민족으로부터 용서 받을 수 없는 것은 외세의 국가이익 추구에 편승하여 이 나라를 분단하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제시대 때 민족을 배반한 친일 역적들을 싸고 돌아 민족정기를 흐려놓은 점과 12년의 통치 기간에 이 나라를 자주 아닌 열강 예속으로 전락시켰다는 사실도 들어야 할 것이다.

한국현대인물사론: 민중운동의 사상과 지도노선 - 송건호 저. 한길사. 1984. p235~256 중에서. (#)

넷째, 이승만 정권은 정치 이데올로기로서 미국식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나 이를 뒷받침할 사회경제적 배경이 전무했는데다, 이승만 자신이 자유민주주의의 의식보다는 자신의 권력 강화와 유지에 더 몰두하여, 정치 체제는 권위주의화의 길을 밟았다. 또한 자유민주주의 이념은 공산주의와의 대결이라는 분단 상황의 논리로 인하여 실제로는 반공 이념으로 대체되거나 변질되었다. (중략) 다섯째, 정권 구조의 측면에서 보자면, 이 정권은 본질적으로 이승만 한 사람에 의해 지배되는 가부장적 권위주의 체제였다.

김수명(1991), 이승만 정권의 흥망과 그 정치사적 의미. 한국정치학회보, 25(1), 103-132.[25]

북의 김일성 남의 이승만

모두가 없어지지 않는 한

나라의 평화통일은 기대 못 한다

제국의 앞잡이여!

붉은 사냥개여!

민족을 기만하고

나라를 망치려는

너의 배짱은 그 무엇이냐

북성남만(北成南晩)[26]

-

김창숙

1946년 남한에서는 이승만 노인의 눈, 어두운 독재와 부패한 자유당 관권 중심의 '해방 귀족'들이 도량하여 민족의 장래는 어두워만 갔다.… 마침내는 4·19의 반독재 학생혁명을 유발하고 말았다.

-

박정희

이승만은 일제강점기 때 항일 운동을 하고 독립에 기여했지만 독단적인 행동으로 독립운동 세력의 분열을 여러 차례 일으켰으며 게다가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주어[27] 친일파의 청산을 방해하여 지금까지도 대한민국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 NL 세력이나 브루스 커밍스식 수정주의 사관을 추종하는 입장에선 '남북분단과 민족상잔의 원흉'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게다가 이승만의 독선적인 모습은 해방 이후에 보여준 대통령에 대한 권력 욕심과 독재 정치로 더욱 심화됐다. 민주 국가를 천명했음에도 스스로 민주주의의 원칙을 저버렸다.[28] 서북청년회 등 정치 깡패를 이용한 반대파 억압, 제주 4.3 사건, 보도연맹 사건 등과 같은 양민학살, 전쟁 대비 미흡과 한국 전쟁 당시 한강 인도교 폭파, 국민방위군 사건 등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책임은 없다 하더라도 대통령으로서 간접적 책임이 존재한다. 국방력이 준비되지 않았음에도 북진통일을 고수한 점, 국회 프락치사건,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진보당 사건, 3.15 부정선거 등 자유민주주의 질서를 파괴한 독재 행위, 이로 인해 발생한 4.19 혁명 등이 일어났다.
그리고 군인, 관변단체, 학생을 동원해 자신에 대한 신격화를 추진했다.[29] 남산공원을 이승만의 호 우남을 따서 우남공원으로 명명했으며, 공원 가운데에 자신의 동상[30]을 세웠고 생일에는 탄신제가 거행되었다. 측근들의 부정부패도 이어졌다. 또한 이승만이 계속 주장한 북진통일론이 중국과 소련에게 위협으로 다가왔으며, 미국은 이승만의 북진통일 주장 때문에 대한민국 군대를 10만 명으로 제한을 두기도 했다.
일각에서는 이승만이 초대 건국대통령이었단 점에서 재평가를 하고 국부로 모셔야 된다고 주장하지만 앞서 언급한 실정으로 반대 의견도 만만치 않다.
[image]

독립운동 당시에는 이승만과 김구는 적대적인 관계가 아니었지만 정권을 잡은 후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김구를 축소시키려 하였다.[31] 먼저 김구의 백범일지를 금서로 지정하고 학계에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자신의 업적, 외교독립론을 강조하라고 지시하였다. 지금은 매년 6월 26일에 김구 추모제가 꽤 성대하게 열리는데, 제대로 열리기 시작한 것은 4.19 혁명 이후인 1960년이다. 이후 김구의 아들인 김신5.16 군사정변에 동조했고, 군인 출신이었던 박정희가 외교론자인 이승만을 격하하고 무장투쟁론자인 김구를 격상하며 현재까지 이 입지가 굳어지게 된다.

3.1. 정치에 대한 평가


이 문단에서는 초대 대통령으로서의 행적들을 다룬다.

3.1.1. 독재


이승만은 모든 자유주의자와 자신에게 반대하는 좌익세력들은 추방되어야 하며, 그들은 언론의 자유를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국 텍사스의 푸트만 법률사무소에서 근무하던 마우리 메버릭(Maury Maverick)이 1949년 8월 록펠러재단에 제출한 보고서에서 발췌

이승만은 파시스트다. 공산주의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은 극단적이다. 그는 공산주의자는 모두 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의 내부 안전부서(department of Internal Security)에서 근무한 케네스 E. 맥더걸 대위가 1954년 10월 발간한 책에서 발췌


한국정부가 재판도 없이 사람들을 죽였다. 공산주의자가 아닌데도 단순히 이승만 정권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목숨을 잃은 경우도 있다.

미군 소속 첩보 기관인 특무대 CIC(Counter Intelligence Corps)가 1951년 4~5월에 작성한 보고서에서 발췌


한국 정부는 허용되어서는 안 될 야만적이고 잔인한 행위에 대해 관대하다. 우리에게 책임이 있다. 우리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이를 계속 허용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과거 전쟁에서 저질러진 전쟁 범죄에 대한 재판도 끝내지 못했다. 우리의 젊은이가 목숨을 바쳐 싸우고 있는 그곳에서 같은 범죄가 또다시 저질러져선 안 된다.

1950년 11월 1일 영국 상원에서 스트라볼기(Strabolgi) 의원의 발언

학살을 저지른 이승만을 체포해야 한다. UN에 있는 영국 대표는 이승만을 부정하고 그의 정권을 끝내도록 요구해야 한다.

브로크웨이(Fenner Brockway) 의원의 발언

이승만과 그 도당이 우리가 지금까지 지키고자 했던 모든 명분을 완전한 조롱거리로 만들고 있다. 이승만이 한국을 통치하기에 적합하지 않은 만큼 UN이 한국을 맡아야 한다.

영국의 레이놀즈 뉴스(the Reynolds News)

[32]

3.1.1.1. 정치깡패와 서북청년회

이승만 정권은 정치깡패들과 서북청년회를 대거 이용하여 정권에 반대하는 시민들과 정치인들을 탄압하였다. 정치깡패들은 정권의 비호 아래 각종 이권사업에 뛰어 들어 수많은 불법을 저질렀다. 임화수, 곽영주, 유지광, 이정재 등이 대표적인 인물들로, 이들이 벌인 사건으로는 장충단집회 방해 사건, 고대생 습격 사건, 충정로 도끼 사건, 대구 매일신문 테러 사건 등이 있다.

3.1.1.2. 진보당 사건



3.1.1.3. 견통령 사건



3.1.1.4. 발췌 개헌



3.1.1.5. 사사오입 개헌



3.1.1.6. 2.28 학생민주의거



3.1.1.7. 3.15 부정선거



3.1.1.8. 4.19 혁명



3.1.2. 인사 실패


외교에는 귀신, 인사에는 등신

- 1954년 11월 27일 사사오입 개헌 과정을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중.

이승만은 역대 대통령 중 가장 측근 문제가 많았으며, 인재 보는 능력은 확실히 부족했다.[33]
  • 국방부참모총장인 채병덕더글러스 맥아더를 비롯한 미군 장성들한테 무능한 인물로 여겨졌고 실제로 그러했는데, 이승만은 그런 채병덕을 오히려 철저하게 총애했다. 한 번은 미국 대사관 관리들과 미군 장성들이 "한국에서 제일 뚱뚱하고 둔해 보이는 장성(채병덕은 167cm의 키에 110kg의 체중이었다.)을 하필이면 육군참모총장에 임명했는가?"라고 이승만에게 묻자, 이승만은 "나의 채 장군은 날씬한 장군이 못 가진 기민성을 갖고 있어요. 전문적인 군사 지식은 물론 우리나라에 무슨 무기가 필요한가를 잘 알고 있는 경험으로 뭉쳐진 장군이야. 또 미남 장군들의 큰 눈이 보지 못하는 것을 채 장군의 졸리는 듯한 눈은 꿰뚫어 본단 말이야!"라고 대답했다. 그러나 한국 전쟁이 터지고 나서 채병덕은 맥아더를 만났을 때, 한국 청년들 200만 명을 동원해 훈련시켜 북한군을 물리치겠다는 엉뚱한 대답을 했고 이에 맥아더는 이승만을 만난 자리에서 채병덕을 해임시키라고 말했다. 결국 채병덕은 사실상 육군참모총장 자리에서 해임되어 고작 100여 명의 독전대를 거느린 자리로 좌천되어 전선으로 쫓겨났다가 1950년 7월 27일 하동 고개에서 북한군 6사단의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34]
  • 민간인 학살에는 용감했지만 막상 실전에서는 맨날 도망만 간다는 무능한 장군이라고 미군들한테도 경멸을 받았던 김종원[35]을 정작 이승만은 "이순신 장군에 비길 만하다."라며 끝까지 감싸고 돌았다.
  • 국방부장관이라는 신성모는 할 줄 아는 것이 눈물을 흘리는 것밖에 없어서 세간에서는 이 사람을 낙루장관(落淚長官)이라 불렀다. 결국 이승만도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는지 6.25 전쟁 중에 국민방위군 사건을 계기로 경질해버렸다.[36]
  • 내무부장관 최인규 역시 변변찮은 위인으로 할 줄 아는 게 이승만에게 아양을 떠는 것밖에 없어서 세간에서는 지당장관(至當長官)이라 불렀다.[37] 그는 4.19 혁명 때 미국의 매카너기 대사가 전달한 미국의 외교문서도 일부러 은닉하고 이승만에게 안 보여줘서 사태를 더 심각하게 키웠다. 결국 대사가 직접 찾아와 이승만 대통령에게 사실을 설명하고 나서야 이승만은 모든 걸 알았다. 결국 혁명재판에서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이승만의 양아들이 된 이강석은 아버지 빽으로 서울대학교 법학과에 입학했다가 다른 서울대 학생들의 반발로 인해 중퇴, 결국 정부에 반발을 할 수 없는 학교인 육군사관학교에 또다시 아버지 빽으로 진학한 후 장교로 임관한다. 이후에도 어찌나 이승만의 빽을 믿고 전횡을 일삼았는지 가짜 이강석 사건이 벌어질 정도였다.
  • 곽영주는 아예 애초부터 이정재, 임화수, 유지광 일당과 한 패거리였으며, 평소의 행실도 영 좋지 않았고, 특히 4.19 혁명에서 민간인에게 발포를 명령한 주범이다. 정치깡패가 아닌 나머지 구 자유당 인사들에게는 상당히 관대했던 박정희가 곽영주의 사형을 집행한 걸 보면 도를 넘었다고 할 수 있다.[38]
  • 이기붕과 그의 아내인 박마리아 역시 이승만의 총애를 받는 최측근이었다.[39] 문제는 이기붕의 아내인 박마리아인데, 지나치게 오만하고 탐욕스러워서 자신의 배를 채우는 것밖에 모르는 여자였는데다가 시국을 보는 눈도 없어서 4.19 혁명이 일어나자 정치 깡패를 동원하여 시위에 참가한 국민들을 폭력으로 억누르려 했다가 들통나 수많은 원성을 들었으며, 이기붕 역시 그런 아내의 권력욕을 제어하지 못하여 둘 다 파멸로 치닫고 말았다는 것이다.
특히 1950년대 후반부터 고령[40] 때문에 판단력에 상당한 문제점을 보였고, 가족(특히 프란체스카 도너 여사)과 측근들이 대통령직을 대행했음이 미 대사관의 보고서에 나타나 있다. 사실 측근 부분은 단순히 주변인 뿐만 아니라 이승만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애초에 이런 사람을 측근으로 둔 게 이승만이다. 그나마 이승만의 인사 중에서 성공적이었던 게 조봉암 농림부 장관을 비롯한 초기 내각과 한국전쟁 당시의 군부 정도였다.
정작 우스운 일은 이승만이 대통령으로 있던 때에는 그를 우상으로 받들던 자유당 사람들이, 막상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쫓겨나고 1년 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일으키자, 박정희를 맹종하면서 대신 이승만은 철저히 외면해 버렸다는 것이다. 이승만을 미워하는 박정희의 눈밖에 날까봐 외면하기도 했겠지만, 이제 이승만에게 더 이상 빨아먹을 단물이 없었다는 점이 결정적이었다.[41]

3.1.3. 친일몰이


이승만은 대통령 시절 반대 세력 배척을 위해 모함을 자주 하였다. 그 중 하나는 친공(親共)이었고 다른 하나는 친일몰이였다. 자기한테 반대하면 친일파거나 배후에 일본 정부가 있다는 식이다.[42]
  • 에게 반대하면 친일이다.

근래에 와서 친일파 문제로 해서 누가 친일파며 누가 아닌가 하는 것이 민간에서 혼동된 관계가 있으므로 내가 다시 설명하고자 하는데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왜정시대에 무엇을 하든것을 가지고 친일이다 아니다하는 것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때 뭘 했든지간에 그때 친일로 지정 된 사람이 지금부터 무엇을 할 것인가를 그 사람의 의사와 행동으로 표시되고 안되고에 친일이다 아니다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이다.

가령 이전에 고등관을 지내고 또 일본을 위해서 열정적으로 일한 사(史)적이있을지라도 그 사람이 지금와서는 그 일을 탕척받을만한 일과 사실이 있어 가지고 모든 사람이 양해를 받을만한 일을 해서 진정으로 친일 아니다 하는 것을 증명 받을만하면 전에 일은 불문하고 애국하는 국민으로 인정하고 대우해줄 것이다. 그러나 전에 고관이나 악독한 짓은 하지 않았어도 동시에 일인을 반항해서 싸우거나 그런일은 없었을지라도 일인들과 친근히 지내서 반일이나 배일분자는 아닌데 지금와서는 말로나 행동으로 친일이 아닌 것이라는 행동을 뵈여서 모든 사람의 마음 가운데 의혹 가지만 한것은 친일로 규정하니 할 수 없을 것이다.

이승만, 1954년 4월 8일 동아일보

일인들이 물건을 제조해다가 거대한 액을 잠재로 수입시켜서 그 개정을 총 선거비용으로 친일자를 내세워서 정권을 도모하려고 하고 있는데 그 물건에는 저의 부사산을 그려서 한편에는 일본섬과 한편에는 한국 반도를 그려서 이것이 다 저의 것이라고 표시(…)모든 친일 분자들을 일본에 모아다 보호해놓고 이 분자들을 통해서 우리나라 국권요란을 선동하기를 마치 이전이 조말년에 망명객들을 모아다놓고 남의 국모를 암살하며 침략하든 악습을 행하고 일인들의 야심을 우리가 더 말할 것 없이 보고 안 진 것이다.(보고 있는 않을 것이다.)

이승만, 1954년 5월 14일 동아일보

요즘 우리 국세에 위급한 문제는 소련이 한반도를 차지하려는 계획과 중공이 한반도를 자기에세 부속시키고자해서 과거 사년동안 전쟁을 하였으며 즉 이북반도를 차지하고 이남을 마저 합병시키는 것이 그 사람들의 목적이고 또 일본이 친일하는 한인들과 반정부 한인들을 이용하여 다시 한반도를 병합하려는 목적을 가진 것을 우리가 다 알고 있는 이 때

이승만, 1954년 10월 21일 경향신문

일본공산당들과 친일하는 한인들이 동경과 연락해서 민심을 선동하고 있으니 이것은 경찰이나 민간에서나 정부를 보호하며 반공정책을 지지하는 사람들을 다 전적으로 이런 반역행동을 가진자를 조사보고 하여 중벌로 다스려야 될 것

이승만, 1954년 12월 10일 동아일보

한편으로 대통령에 나를 선출하고 부통령엔 반대당인 민주당 장면 박사를 선출한 사실만 보아도 그렇고 친일용공의 표수가 그렇게 많이 나왔다는 사실엔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민심의 소재를 측정하기다 곤란하다.

이승만, 1956년 5월 27일 경향신문

이어 이 대통령은 반정부신문들은 있는 소리 없는 소리로 정부하는 일을 헐어댄다고 전제한 다음 매우 격노한 어조로 "그렇다면 소련의 정부를 원하느냐? 중공의 정부를 원하느냐? 일본의 정부를 원하느냐?"하고 일갈

이에 신문기자는,

"각하의 말씀 매우 듣기 거부합니다. 한국판도내에 친일 친공하는 신문은 하나도 없습니다.

1956년 6월 28일 경향신문

이 대통령, 여(與)조직부장들에 훈시.

이 대통령은 이십육일하오경회루 에서 자유당각도 및 핵심당부 조직부장 이백삼십오명을 한희석중앙위부의장의 안내로 접견하고 "큰 성을 이루어서 모든 사람이 원하는 동시에 도달한 것을 믿고 바란다"고 말하였다. 이 대통령의 훈시요지는 다음과 같다.

"지금은 어려운 때인데 각 지방에서 자유당의 지도자들이 이와 같이 모여서 내가 만노 보게 되니 감사하며 또 다같이 합동해서 각 지방에서 잘해난다고 하니 나로는 정성껏하며 나할 것을 힘껐 다 바쳐서 할 것이다. 앞으로 선거가 있을 것을 알고 반대하는 사람들은 즉 공산당이나 친일하는 사람들이 각방면으로 파괴시켜서 저희의 목적을 세우려고 애쓰고 있는 이 어려운 때에 모든 사람들이 이와같이 잘해나가니 마음에 든든하게 생각되며 모두 충성과 충심에서 나오는 결정과 정신이 마음속과 뇌속에서부터 잇는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1959년 8월 27일 동아일보

이승만은 외부 발표 뿐만 아니라 내부 측에 말할 때도 반대자가 친일파라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 이승만 측근들도 비슷하게 친일몰이를 하였다.

이기붕씨는 이 대통령이 민주당의 대통령 후보자 신익희씨를 친일분자라고 지적한데 대 하여 "자기는 그들을 친일분자라고는 생각치않으나 친일한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본다"고 말하였다.

1956년 4월 18일 경향신문

문교부장관 이선근 씨는 지난 26일 이리 고등여학교 강당에서 각교 교장 교직원 및 대학생을 소집해놓고 노골적인 여당지지선거연설을 행하였는데 이날 연설에서는 이 장관은 "목 살겠다고 웨치는(외치는) 놈들은 일본이나 38 이북으로 보따리를 싸서 쫓아내야 된다"폭함함으로써 시민들의 큰 분격을 사고 있다.

(…)

민주당 이리 시[43]

위원장 이춘시 씨 담 = 수 많은 후예들을 교육시키는 책임자의 입장에서 그와 같은 폭언을 함부로 한다는 것은 정당인의 입장에서보다도 이 나라의 국민의 한 살믕로서 슬퍼아니할 수 없다. 정치를 잘하자는 사람들은 모두 공산당이나 친일분자란 말인가?

1956년 4월 30일 동아일보

"지금은 국제외교를 각국 대통령이나 수상이 직접해결 해야 할 국제정세에 처하여 있다. 이 중대한 시기에 외교를 직접담당해 온 이승만 박사만 이 이 나라를 구출할 수 있으므로 공산주의자가 아니고 친일파가 아니라면 누구나 다 이박사를 지지해야 할 것이다.

(…) 요즈음 어느 당의 대통령 후보자는 미국에서 자기의 외교정책에 관하여 발표했는데 그 첫 조항이 일본 사람과 친하자고 하는 것을 보고 나는 놀랬다.

도대체 이웃에 사는 강도와 어떻게 친해질 수 있느냐? 과거 우리나라를 식민정책으로 압박해왔고 지금도 그 때의 근성으로 차별대우를 하고 있는 일본과 우리가 어떻게 친해질 수 있단 말이냐?"

자유당, 1960년 2월 8일 동아일보

  • 당시 인식

"친공친일언사해명하라"

……이대통령의 돌연한 담화에 반응심각

……"항일투쟁 이박사 못지 않다."

"매국매족이란 위협적이다."

신·조 양씨 응수

이 대통령은 12일 공보실을 통해서 "어떤 정당의 지도자들은 一. 자신들이 정권을 잡으면 일본과 협의해서 친선을 이루겠고 二 괴뢰와 합해서 통일하겠다" 는 등의 망설을 발한 바 있다고 야당측의 대통령입후보자를 비난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1956년 4월 14일 동아일보

이대통령은 반대당을 용공친일이라고 비난하여 선거전에 제일탄을 던지는가 하면 그렇게 없는 사실을 날조하는 것은 선거공세로서는 가장 졸렬한 수단이라고 정부에 응수한다. 처음 정강 정책으로부터 시작하던 선거전은 인신공격을 전개될 것 같기도 하고 이대통령이 단수를 높여 반공반일의 국책적 문제를 새삼스러이 들고나옴(…) 이승만 박사가 선거전이 본격화하는 요즈음이제 새삼스러이 반공반일의 국책적 문제를 가지고 반대당을 비난

1956년 4월 16일 경향신문

이 대통령은 대통령 후보자로서의 아무런 정견공약을 아직 공표하지 않았으며 다만 "친일·친공 분자를 경계"해야 한다는 일담화로써 민주당대통령후보 신익희 진보당대통령 후보 조봉암 양씨를 간접적으로 비난한일이 있었다.

1956년 5월 1일 경향신문

민주정치의 원칙인 정치의 대사로써 "갈아보자"는 말만 해도 반정부적인 동시에 반국가적인 사상으로 규정하려는 범재자의 태도를 우리는 자주 발견한다. 심하여 이를 친공에다가도 친일에다가도 붙여서 숙청의 대상으로 삼으려고도 하는 듯 하다.

1956년 5월 26일 경향신문

당신네들이 부통령에 대한 경고결의안을 낼 때에는 어떻게했나 이 나라 국민이 굶주리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이것을 해결시키는 것이 당면한 모든 문제보다도 더 긴급하고 더 중요하다고 하는 그 말 한마디가 용공이요 친일이라고해서 경고결의안을 낸 선례를 맨든 것이 누구인가?

김영선 민 의원, 1957년 1월 27일 동아일보


3.2. 사회·문화에 대한 평가



3.2.1. 학살


이승만 집권기에 터진 민간인 학살은 사망자가 최대 수십만 정도에 이른다. 워낙 오랜 시간이 흘러서 정확한 희생자 수는 알 수 없다. 실제로 이승만 집권기 동안 전국 각지에서 공산 반란이나 폭동이 일어난다거나, 마을 내 공산주의자들이 같은 주민들을 인민재판하여 찔러 죽이고 학살하고 다니는 일이 잦았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그들을 소탕해야 하는건 맞았으나 그 과정에서 공산세력 뿐만 아니라 무고한 주민들도 함께 희생당했다는 것이 문제였다. 비록 이승만이 직접 "공산세력과 무관한 무고한 민간인들을 학살하라"고 지시하지는 않았더라도 국정 책임자이자 통수권자인 대통령으로서 상황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책임은 피할 수 없다.

3.2.1.1. 여순 반란 진압 과정에서의 양민 학살



3.2.1.2. 보도연맹 학살사건



3.2.1.3. 경산 코발트탄광 학살사건



3.2.1.4. 거창 양민 학살사건



3.2.1.5. 산청, 함양 양민 학살사건

국군이 1951년 2월 7일 경상남도 산청군, 함양군에 사는 주민들을 "무장공비에 협력했다"는 이유로 학살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일곱 마을이 초토화되고 가현(123명), 방곡(210명), 점촌(62명), 서주리(310명)에서 사람들이 죽어나가서 총 희생자 수는 705명에 달했다.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의 주동 세력이 일으킨 일로, 당연하지만 제대로 된 이유도 근거도 있을 턱이 없고, 설령 있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는 극악무도한 범죄였다.#

3.2.1.6. 문경 양민 학살사건

국군 제2사단 70여명이 경상북도 문경리의 마을에 불을 지르고 남녀노소를 가릴 것 없이 학살해 마을 주민 136명 중 어린이 9명, 여성 44명, 남성 83명이 억울하게 죽은 사건이다.# 이후 6.25 전쟁이 끝나고 문경 양민 학살 사건을 정부는 무장공비가 선량한 양민들을 죽였다고 조작하였으나, 오랜 시간이 지난 2008년, 참여정부가 진행한 과거사 청산 막바지 과정에서 그 진상이 밝혀지고 이후에도 속속 보도가 나오고 있다. #, #, #

3.2.1.7. 강화 양민 학살사건

문경 양민 학살사건과 같은 해 벌어졌으며, 1.4 후퇴가 벌어질 당시 국군 산하의 강화향토방위특공대가 중심이 되어 212 ~ 500명의 강화 주민을 조선인민군의 협조자로 아무 근거없이 몰아 집단 학살한 사건이다.## 유족 측에서는 국군에 의해 학살당한 양민의 숫자를 400 ~ 500여명으로, 대한민국 국가기록원은 212명으로 집계하고 있는 상황. 진실화해위에서는 430여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했다. 이렇게 증거가 수없이 나왔음에도 학살의 주동세력에서는 민간인을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였다.

3.2.1.8. 제주 반란세력 소탕과정에서의 양민 학살


보고에 의하면 최근 대통령(이승만)과 내무장관(신성모)의 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원들이 한국군에 6,500명, 국립경찰에 1,700명이 공급될 예정이다. 이들은 남한 전역에 있는 9개 경비대와 각 경찰청에 배정될 것이다. 모든 단체들간의 상호합의에 따라, 서북청년단은 경찰에서 단원 20명당 경사 1명, 50명당 경위 1명, 2백명당 경감 1명 등의 비율로 경사급과 간부급 요원으로 배치하도록 합의돼 있다.

주한미군사령부, 「G-2 일일보고서」, 1948. 12. 6., 4․3은 말한다 제4권, 123쪽에서 재인용

서북청년단 개개인이 직접 군대에 지원해서 들어간 게 아니라 그 집단을 군대에 보냈다. 서북청년단은 당시에도 정치깡패였다.
다음은 서청 경찰관 출신 박형요 씨의 증언이다.[44]

당시는 몰랐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이승만이 우리를 이용했다고 여겨집니다. 당시 서청 문봉제 단장은 이 대통령의 신임을 받던 측근 중의 측근이었습니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공산당을 없애야 한다는 명분 하나를 앞세워 현지 사정도 잘 모르는 대원들을 대거 투입한 것입니다. 국민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집권욕만 생각한 것이지요. 이 대통령의 허락없이 어느 누가 재판도 없이 민간인들을 마구 죽일 수 있는 권한이 있겠습니까. 이 대통령이 ‘죽이지 말라’고 했으면 제주도에서와 같은 학살사태가 있을 수 있습니까. 내가 살고 있는 가시리에서는 며칠 전에 집집마다 제사를 지냈습니다. 대부분 억울한 죽음이었다고 들었습니다. 아무튼 학살의 총책임자는 이승만이라고 생각합니다.

朴亨堯(83. 表善面 加時里, 西靑출신 경찰관)의 증언., 4․3은 말한다 제4권, 124쪽에서 재인용

제주도에 간 서북청년단들은 송요찬이 특별중대로 만들었는데 장교나 헌병도 건드릴 수 없는 권력을 얻었다.

난 1948년 7월 계몽연극단 20명과 함께 제주에 왔습니다. 그런데 아무도 연극을 보러오지 않아 흐지부지될 때에 송요찬 연대장이 우리를 무장시켜 특별중대를 만들었습니다. 1개 중대는 4개 소대 80여 명으로 구성됐습니다. 중대장은 대위 계급장을 달았지만 우린 없었습니다. 송요찬 연대장은 9연대 헌병과 장교들을 집합시킨 가운데 “특별중대에 대해서는 타치하지 말라. 만약 손대면 너희들 죽도록 터질 줄 알라”고 해서 기분이 좋았지요. 우리는 한림, 월정, 성산 등지를 순회하며 주둔했습니다. 9연대가 철수하고 2연대가 주둔하자 월정리에 주둔하고 있던 우리 특별중대원 88명은 그대로 2연대 11중대 소속이 됐습니다. 총살집행을 할 때는 “희망자 나오라”고 해서 갔는데, 한번은 한림면 귀덕리에서 총살이 있을 때 내가 일부러 빗나가게 쏘아 한 사람을 살린 적이 있습니다. 내가 그 사람들 신분도 모르고 그냥 남의 말 듣고 하는 건데, 그렇다고 쏘지 않으면 내가 의심을 받으니까 일부러 빗나가게 쏜 것이지요.

노윤복(78세, 남제주군 성산읍 성산리, 당시 서청 특별중대원, 2002. 3. 28 채록) 증언.,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0쪽

거기다 이렇게 서북청년단을 보내면서도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어주지 않았다.

이승만 정부에서 서청 대원들을 대거 경찰이나 군인으로 내려보내면서 월급이나 보급 체계를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현지 조달하라는 식으로 내몬 것도 문제였다. 역시 서청출신 경찰관으로 ‘2백명 부대’에 이어 제주에 왔던 박형요는 “일선 지서로 배치될 때, 홍순봉 경찰국장이 연설하기를 ‘현재 상황이 여의치 않으니 식량이나 월급을 보낼 수 없다. 가서 마을에서 얻어먹으며 진압하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물론 일선 지서마다 경찰후원회가 조직돼 이들을 뒷바라지했으나, 그것은 처음부터 한계를 드러낼 수밖에 없었다. 자연히 민폐가 생길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1쪽

이 상황에서 서북청년단은 제주도 총무국장조차 때려죽였으나 어떠한 처벌도 받지 않았다.

1948년 11월 9일 제주도 총무국장 김두현(金斗鉉, 53)이 서청의 손에 고문치사 당한 사건도 서청의 위세를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다. 제주도 행정 2인자가 보급문제에 불만을 품은 서청들에게 희생된 것이었다. 특히 서청 제주단장 김재능은 자기 사무실에서 심한 매질을 한끝에 김두현 총무국장이 실신하자, 숨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인데도 밖으로 내버려 끝내 절명케 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11월 9일, 서북청년 단원들이 제주도 총무국장인 김두현을 타살했다.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는 서청 단원들은, 김두현이 알려진 공산주의자이며 자기들은 단지 그를 조사하려 했을 뿐이지 죽이려 한 것은 아니라고 말했다(A-1).

Hq. USAFIK, G-2 Periodic Report, No. 987, November 13, 1948.,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총무국장 살해사건 때 경찰이 범인을 잡아 구금해야 마땅한 일이지만 그러지 못했습니다. 홍순봉 경찰청장도 김재능 서청 단장에게 양보했어요. 범인들을 9연대원으로 보내는 것으로 사건을 무마했습니다. 살인범들이 처벌 받기는커녕 군인이 된 것입니다.

金浩謙(서울시 은평구 역촌1동, 당시 서귀포경찰서장) 증언 (제민일보 4‧3취재반, 앞의 책 ④, 163쪽).,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272쪽

이 정도면 한국판 홍위병이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위군중에게 경찰이 발포함으로써 도화선이 된 좌익계의 투쟁은 남한 전역의 73개 시‧군에 파급되어 연인원 110만 명(300만 명이 참가했다는 주장도 있음)이 참가하는 8‧15이후 가장 큰 규모의 대중투쟁이었다.(朝鮮通信社, 󰡔朝鮮年鑑-1948年版󰡕, 1947, 258쪽)…그런데 전국적으로 엄청난 파장이 있있던 이 사건에 인민위원회 세력이 강했던 제주에서는 참여하지 않았다. 중앙 일간지에는 이 무렵 제주도에서 10‧1 대구사건의 여파로 10월 9일 소동이 일어나 전남 본토에서 미군부대가 파견되었다고 일제히 보도하고 있으나, 그것은 와전된 것이었다. 이는 제주도 미군정청 공보관 케리 대위의 1947년 신년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그는“(작년을 회고컨대) 육지 각 지방에 소요사건이 발발해서 여러분의 동포 가운데서 많은 희생자를 내었습니다. 그러나 제주도내에 한하여서는 여러분이 시국에 대한 정당한 인식을 함으로써 여사(如斯)한 불행한 소요사건이 없었다는 것은 대단히 반가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濟州新報󰡕, 1947년 1월 1일.)고 밝히고 있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78쪽

1948년 1월에 쓴 미 24군단 정보보고서에도 이런 내용이 있다.

제주도는 우익진영과 좌익진영으로 분열되어 있지만, 대부분의 지식인층 지도자들과 대중들은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고 있다. 좌익인사들은 이렇다할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있으며, 소위 좌익분자라고 불리우는 인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다. 대부분의 제주도민들은 국내외적 정치 상황을 잘 모르기 때문에 우익이나 좌익에서 터져 나오는 모든 종류의 선전선동에 쉽게 휩쓸린다. 우익인사들은 ‘빨갱이 공포’를 강조하며 주로 청년단체와 공직에서 좌익인사들의 척결을 통하여 섬을 장악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하고 있다.

제주도의 좌익은 반미를 하지 않고 있으며, 최근의 테러는 우익이 선동한 것이다. 전체적으로 볼 때 제주도 주민들은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에 일차적인 관심을 갖고 있으며 정치에는 별 관심이 없다.

Hq. USAFIK, G-2 Weekly Summary, No. 123, January 23, 1948.,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146쪽에서 재인용

봉기를 일으킨 세력은 소수일뿐이다. 4.3 사건 진상보고서에도 이렇게 나와있다.

무장대는 남로당 제주도당 군사부 산하 조직으로서, 정예부대인 유격대와 이를 보조하는 자위대, 특공대 등으로 편성되었다. 4월 3일 동원된 인원은 350명으로 추정된다. 4‧3사건 전기간에 걸쳐 무장세력은 500명 선을 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무기는 4월 3일 소총 30정으로부터 시작해 지서 습격과 경비대원 입산사건 등을 통해 보강되었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536

또한 1949년 6월 7일 경찰특공대는 이덕구를 사살하는 과정에서 무장대 측 보고서를 입수[45]하여 제주경찰청에 보관을 하였는데, 여기서도 마지막으로 정비된 인원이 501명(각급 지도부 35명, 통신대 34명, 유격대 120명, 특무대 312명)으로 기록하고 있다.[46]

3.3. 외교·안보·국방에 대한 평가


1980년대 들어서는 운동권 사이에서 퍼진 브루스 커밍스식 수정주의 사관에 따르면, 이승만은 분단과 민족상잔의 원흉으로 찍힌 바 있다가 1990년대 탈냉전 시기 러시아 정부가 구소련 시절 기밀문서를 공개하면서 죽은 이론이 됐다.
정용욱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교수는 미군정의 존 하지를 인용해가며 이승만이 자신의 정치적 배경을 위해 활동했을 뿐 외교에서마저도 실패했다고 주장했다.# 맥아더도 면담을 거절하는 걸 기어코 고작 몇 분밖에 만나지 못하거나, 유엔 총회도 이미 끝나간다는 걸 알자 마지막까지 방문을 미뤄놓고선 그 모든 것을 자신의 정치적 활동으로 포장해서 떠들었다는 주장이다. 링크된 기사에는 하지가 이승만의 활동에 대해 평가한 편지 내용의 대부분이 번역되어 있다.[47]

3.3.1. 미흡한 전쟁 대비


"아침은 해주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는다."라며 북진통일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였다.[48]
국방의 최고책임자로서 북한의 남침 준비를 파악하고 대비를 하지 못한 것은 책임이 있다. 전쟁 발발 이전 산발적인 국지전 양상이 이어져가고 있던 와중에 전병력의 1/3을 휴가를 보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전쟁 발발 이후 3일만에 수도 서울을 뺏긴 것은 장비/인력 부족이라는 사실을 피할 수 없다. 또한 당시 감시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던 건 최전방에서 인민군과 직접적으로 교전을 벌이고 정탐했던 일선 부대장의 보고밖에 없었다. 다만 당시 계속된 비상근무태세로 국군의 피로도가 가중된 상태였고 국가산업이 농업에 편중되어 있었기에 휴가를 보내는 것이 불가피했다는 사실을 감안할 필요는 있다.
한편, 당시 미국 국무부 장관이었던 애치슨의 담화인 애치슨 라인에서 미국은 한국을 제외하고 라인을 그었다. 물론 이것은 미국이 한국을 버린다는 의미가 아니라 약간의 원조를 통해서 한국이 스스로 방어할 수 있다는 메세지를 미 의회에 주기 위해서였다.[49] 미국은 1949년에 10월 6일에 군사방위원조 법안의 302조를 통해서 한국 등에 2,660만 달러 가량의 원조를 계획했고 1950년 1월에는 26일에는 '한미 상호군사원조협정'이 체결되었다.[50] 당시 미국은 북한이 남침할 능력과 의지가 없다고 판단하고 있었고 북한이 본격적으로 소련에게 무기를 구입하기 이전에는 북한의 전력이 남한을 압도할다고 할 수준까지는 아니었다. 또한 미국은 전차같은 장비를 제공하지 않았을 뿐 57mm M1 대전차포같이 방어전에 사용할 무기는 어느 정도 제공하고 있었다. 실제로 전쟁 초기에 제6사단은 57mm 대전차포를 이용하여 기갑장비에 어느정도 타격을 주면서 선전하기도 했다.[51] 6사단은 전쟁발발 직후인 6.25일부터 6.28일까지 907발의 57mm 포탄을 소모하였다. 즉, 전쟁 이전에 이미 해당 대전차포를 수령한 상태였다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전쟁을 준비하던 북한은 소련제 T-34 전차를 운용했는데 이 전차를 상대하기에는 국군이 보유한 대전차화기의 위력이 상당히 부족하다는 것이 드러났다. 일단 57mm 대전차포의 원본인 6파운더2차 세계대전 당시 나름대로 잘 써먹었던 물건이고 어지간한 중형전차는 그럭저럭 상대할 수 있었던 물건이다. APCBC는 논외로 하더라도 AP 사용시 500m에서 112mm를 관통하고 1000m에서도 89mm를 관통하여 60도 경사의 45mm 두께의 장갑을 가지는 T-34-85의 전면을 관통할 수 있어야 할 것 같은데[52] 경사장갑이라 실제로 전면에서 관통하려면 약 320m 근처까지 와야했다. 만약 한국군이 APDS를 쓸 수 있었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었겠지만 그건 영국군만 썼던 물건이라 의미가 없다. 당시 미국은 한국 지형에서는 전차의 사용이 제한적일 것이고 57mm 대전차포 정도면 한국 지형에서 사용될 전차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으나 어떤 이유에서인지 격파가 되지 않았다. 덕분에 초기에는 한국군이고 미군이고 할 것 없이 북한군의 T-34 앞에서 고전해야 했다. 사실 전차의 이용이 제한적일 것이라는 판단은 길이 좁고 논밭이 많았으며 교량이 버틸 수 있는 하중도 제한적이었던 당시 한국 지형을 생각하면 아주 틀린건 아니었다. 실제로 M26 퍼싱이 한국에 와서 지형 문제로 고생했고 영국의 센추리온 전차도 어디 처박는다거나 셔먼 전차가 전복되는 등 당시 한국 지형이 전차를 굴리기 좋지 않은 상황인건 사실이다. 문제는 당시 한국군의 역량은 그 상황에서도 전차에 대응하기 힘들었다는 것. 하다못해 대전차지뢰라도 잘 활용했으면 대책없이 밀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제대로 된 지원이 있었다면 점심은 평양, 저녁은 신의주 발언이 사실화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53] 미국의 입장에선 강력한 북진의사를 내보이는 상황에서 전차같은 무기를 제공했다가 선제공격이라도 한다면 국제적으로 큰 문제가 될 상황이었기에 회의적이었다.[54] 실제로 미국은 북한의 선공보다 남한이 선제공격을 시도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한 적도 있었을 정도였다. 그래서 이승만이 공공연하게 강력한 북진의사를 내비친 것이 6.25 전쟁 초기에 북한에게 큰 전력차로 인해 무기력하게 밀리게 된 것에 일조했다는 비판이 있다.

3.3.2. 한국전쟁 초기 허위 전황 방송




3.3.3. 한강 인도교 폭파




3.3.4. 국민방위군 사건




3.4. 경제에 대한 평가


1960년에 농촌의 82%, 서울의 39%는 전기조차 들어오지 않을 정도였다.[55] 이 부분은 1962년 “우리 민족의 나갈 길“에서 박정희가 '이승만 자유당 독재 정권이 12년 동안 기간 산업의 토대가 되는 전력 문제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하는...'이라고 비판했다.#
아울러 심각한 실업률도 문제였다. 1950년대 말 한국의 실업률 공식 집계는 30%에 달했는데, 특히 대졸자들의 절반이 실업자였다. 그래서 각 언론들은 신문을 통해 "비싼 등록금을 내고 졸업해봐야 실업자만 되는데, 대학교는 만들어서 무엇하느냐?"라고 비꼬았다.[56]
나라를 지키는 군인들도 쪼들리기는 마찬가지였다.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강원도 화천 3사단 포병중대 행정병이었던 강호창의 증언에 의하면 휴가를 나간 병사들이 "군대에 돌아가봤자 제대로 먹지 못해서 배가 고프니, 차라리 그냥 집에 있겠다."며 귀대를 거부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또한 5.16 쿠데타에 참여한 이석제는 "1960년 나는 육군 중령이었는데 받는 월급이 너무 적어서 겨우 거지 신세를 면할 정도였고, 어느 날은 며칠째 집에 양식이 떨어져서 출근도 못하고 맹물로 허기를 때워야 했다."는 증언을 남기기도 했다. 적은 월급에 지치다 힘들게 제대한 군인들도 취업에 실패하고 실업자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한 예로 현역 장교가 제대한 옛 상관한테 "나한테 돈을 준다면, 다시 군대로 입대시켜 주겠습니다."라고 거짓말로 속여서 돈을 뜯어낸 사기 사건이 있었다(1959년 7월 26일자 조선일보 기사).[57]
결국 이승만 정부에 대한 불만이 누적되었고, 급기야 1960년 4월 19일 이승만 정권을 몰아내려는 4.19 혁명을 일으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삼백산업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한국 최초의 재벌 계층을 만들었고 이들을 집중 육성하면서 국가 경제가 재벌에게 집중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 또한 이승만이 독재하는 과정에서 재벌들은 정부에게 정치자금을 주고 정부로부터 특별 융자를 받고 도입된 외자를 특별 불하받는 식으로 각종 특혜를 받았다. 즉 정경유착을 한 것이다. 이와 반대로 정경유착에 협조하지 않은 유한양행의 설립자 유일한이 정치자금 청탁을 뿌리쳤다가 보복성 회계감사를 받기도 했다.
소비재 위주의 경공업 건설에 치중해서 이를 뒷받침하는 생산재 부문의 공업 건설이 늦어졌고 공업생산 원료의 90%가 해외로부터 도입되어 국내 생산 원자재의 개발이 상대적으로 늦어졌으며 이는 한국 경제의 외국 의존도를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특히 심한 인플레이션과 1953년 2월의 화폐개혁 실패로 약 3년 동안 발행고는 11배면서 물가 지수는 18배로 올라간 것도 이승만 정부의 경제 실패 요인 중 하나라고 꼽힌다.

4. 논란



4.1. 징병제



4.1.1. 부정적 시각


1945년 광복 직후 미군정 시기에는 국군 창설을 준비하면서 의용병제 즉 모병제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이것은 1948년 정부 수립 이후에도 그대로 이어져서, 당시는 개별 부대의 지휘관들이 주둔지 부근 지역을 돌면서 청년들에게 입대를 권유하는 식으로 모병을 하였다.[58] 그러다가 1949년 8월 6일 병역법을 공표하면서 국민개병제, 즉 징병제를 도입하였고, 행정적인 준비를 거쳐서 그 다음해인 1950년 1월 6일에는 최초로 전국적인 징병검사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당시 국가재정을 전적으로 미국의 원조에 기대고 있던 상황에서 미국이 "국군 10만명 제한", "그 이상의 원조는 어떤 경우에도 없음"이라고 못을 밖으면서 징병제는 징병검사 한번 이후 바로 유야무야돼버렸다. 결국 1950년 3월 다시 병역법을 개정해서 징병제를 폐지하고 미국의 요구대로 모병제로 전환하였다. #
이승만 정권이 미국으로부터 물자 원조를 조금이라도 더 받아내려고 징병제를 고집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모병제를 권유하는 미국을 설득하지도 못했고 국가 안보의 초석이 되어야 할 병역 제도가 고작 8개월 동안 모병제 → 징병제 → 모병제 식으로 지그재그 하면서 혼란만 일으켰다.
이후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당장 다급해진 이승만 정권은 가두모집, 가택 수색 등의 방법으로 청년들을 강제 징병하기 시작했고, 그 이듬해인 1951년 5월에야 병역법을 개정하면서 공식적으로 징병제를 재도입하였다. 그리고 그 뒤로는 미국의 감군 요구에도 불구하고 60만 대군을 유지해야 한다는 명분으로 현재까지, 60년이 넘게 징병제를 고수하게 된 것이다. #
결과적으로 지난 수십년간 대한민국 남성들은 이승만 때문에 병역의 의무로 막대한 고통을 받아온 것이다. 그리고 가끔 누군가가 한국은 휴전 국가이기 때문에 징병제인건 어쩔 수 없다고 하는데 이 역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군대가 환경이 좋고 급여, 복지가 제대로 되어 있고 군대를 향한 인식이 좋다면, 군인으로서의 메리트에 반해서든 애국심으로든, 군인으로 취직하려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당장 미국만 해도, 2000년대 당시 하루가 멀다하고 종교 간 갈등이나 폭탄 테러 등이 일어나 언제 죽을지 모르는 중동 쪽으로 자발적으로 지원한 군인들이 많았다. 모병제인데도 말이다. 군인을 향한 시선이 좋고, 국민들이 군인을 존경하며, 급여도 좋으니 모병제인데도 몰리는 이들이 많았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미국처럼 몇십년 전부터 군인을 향해 좋은 시선이 정착되게 하고 군인에 대한 대우를 미국처럼 좋게 되도록 체계를 마련해 놓았으면, 앞서 말한 미국처럼 모병제를 실시했어도 애국심에서든 급여나 복지 등의 메리트에 매력을 느껴서든 나라를 지키기 위해 지원하는 이들이 넘쳤을 것이고 따라서 징병제를 실시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4.1.2. 긍정적 시각


수십년간 한국 남성들이 "이승만 때문에" 병역 의무로 고통 받았다는 주장은 대단히 논리적 비약이 심한 억지다. 징병제는 김일성이 일으킨 한국전쟁 때문에 생긴 것이지 이승만 때문에 생긴게 아니다. 그리고 군대가 환경이 좋고 군인 대우가 좋으면 모병제로도 충분해서 징병제가 필요없다는 주장도 1960년에 임기가 끝난 이승만과는 무관한 억지스러운 주장이다. 지난 60여년간의 군인 대우가 도대체 이승만과 무슨 연관인가. 오히려 장군대비 병사의 월급이 역대 가장 높았던 정부가 이승만 정부였다. 병장준장 월급의 10%를 받았으며 심지어 2020년 현재에도 이것에 한참 못미친다.
그리고 일본 자위대 항목을 보면 알겠지만, 모병제가 된다고 반드시 군에 대한 대우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다. 군인에 대한 대우와 똥군기는 징병제와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며, 단순히 모병제로 바뀐다고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대단한 오산이다. 오히려 모병제를 하더라도 제도적인 문제가 발생하면 징병제보다도 더한 막장 군대로 변할 수 있다. 또한 모병제 국가라고 해서 군인에 대한 인식이 좋을 수도 없다. 현재 모병제를 실시하는 국가들에서도 군인은 대부분 대대로 군인 가문 출신인 사람이나, 애국심이 유달리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대부분 꺼려하는 직종이다.
심지어 군인에 대한 대우가 좋다고 평가받는 미군조차도 이라크 전쟁 이후로는 지원자가 없어서 인원수를 충당하기 위해 갱스터, 양아치, 저학력 백수들까지 선발해서 병사들의 질적 저하가 문제되고 있다. 또한 미군과 한국군을 비교하기도 힘든 것이, 미군은 이미 당시로도 세계 1위의 경제력을 자랑하던 국가였으며, 자국 군대를 넘어 유럽과 소련에게 물자 지원을 퍼줄 정도로 경제력이 넘사벽이었기에 병사들을 충분히 먹여 살릴 자본이 넘쳤지만, 건국 당시의 대한민국은 경제 전반이 빈약했다. 모병제조차도 나름의 문제점이 있으며, 모병제가 되었다고 무조건 징병제보다 낫다고 볼 수는 없다. 군인이란 직종은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에서 이미 기피 직종이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시 징병제는 오히려 대한민국에 긍정적 영향들을 끼쳤다. 먼저, 지금을 기준으로 생각해서는 안되며 당시 한국의 객관적인 상황을 알아야한다. 1945년에 식민지에서 벗어난 이후 한국은 소수의 도시민들을 제외하곤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던 농촌 사람들은 여전히 전근대적 구습과 가치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들은 1950년대 실시된 징병제 아래 군대에서 처음으로 근대적인 생활양식을 배우고 근대적인 기계들을 다루는 기술도 배울 수 있었다. 글 읽는 법도 배웠다. 박정희, 전두환 군사독재에 대한 부정적 인식 때문에 지금 우리는 군대라고 하면 왠지 구습의 상징 같은 시대에 뒤떨어진 곳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1950년대 기준으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징병제를 통해 전국 방방곳곳의 수많은 농촌 출신들이 근대화되었고 군대에서 배운 기술과 조직력, 협동심, 집단생활 경험은 1960년대의 경제발전에 긍정적으로 연결되었다.[59]

4.2. 독립운동가로서의 자질에 대한 논란



4.2.1. 부정적 평가


이승만의 독립 운동 활동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비판이 있다.

미국에서 교포들 모아놓고 연설이나 하고 미국 대통령에게 진정서나 올리고 한 게 독립 운동이 되는 건가요? 똑바로 말해 그 사람들 독립 운동 때문에 우리가 독립된 거요? 독립 운동 했다는 거 말짱 엉터리요, 엉터리.

박정희 #[60]



4.2.1.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

말이 되는 대책이 있어야 참여해서 돕지, 시간만 낭비하기 싫다.

김규식

이완용있는 나라를 파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마저 파는구나.

신채호

당신이 사퇴해야만 독립운동 세력이 통합된다.

안창호

저런 썩은 대가리와 함께 일할 수 없다.

이동휘[61]

이승만은 독립운동 시기 다른 독립운동가들과 갈등을 빚었다. 이 시작은 유학 시기 장인환, 전명운 의사의 더럼 스티븐스 저격사건 통역을 자신은 살인자를 두둔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거절하였다. 박용만과의 하와이에서의 대립, 대한민국 임시 정부에서의 대립과 위임통치 청원 문제 등 꾸준히 이어졌다. 또한 상술했듯이 도산 안창호 선생과 대립 후 '이승만 친위대'라 불릴만한 동지회을 결성 기존 미주 한인 사회의 국민회와 많은 갈등을 빚었다.

이승만은 미국에 충성하는 자기의 행동을 늘 정당화시켰다. 안창호, 박용만 그리고 김규식을 미군 정보당국과 민간 첩보기구에 급진적인 볼셰비키 공산주의자라고 보고했다.

<박용만 평전>

FBI보고에는 또 1931년의 문서를 인용하여 이승만이 박용만을 '간통자, 착취자' 그리고 나중에 '일본 밀정'으로 중상모략한 일이 있다.

방선주, <재미한인의 독립운동>, 1989, 89쪽

1924년 가을, 안창호는 미국 입국을 위해 상하이 주재 미국영사에게 입국비자를 신청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서재필에게 알려 스펜서(Spencer) 상원의원을 통하여 미 국무성에 교섭한 즉, '워싱턴에 주재하고 있는 한인지도자가 안창호를 공산당원이라고 하였기 때문에 비자를 줄 수 없다.'라는 회답을 받았다.
1923년 1월의 일본 정보문서 또한 '이승만이 미국으로 돌아가 안창호를 공산주의자라고 선전하였기에 안창호의 미국에서의 신용은 추락하였다'고 본국에 보고하고 있다.[62] 그리고 이승만은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63][64]

판사님! 이들은 박용만 패당이며, 미국 영토에 한국인 군대를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위험한 반일 행동을 하며, 일본 군함 이즈모가 호놀룰루에 도착하면 파괴하려는 음모까지 꾸민 무리들입니다. 이것은 미국과 일본 사이에 중대 사건을 일으켜 평화를 방해하려는 것입니다. 판사님. 저들을 조처해 주십시오!

이승만, 하와이 법정 증언에서

이승만은 미주에서의 박용만과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하고 그가 일구어 놓은 조직을 가로챈 점 등은 비판 받을 만한 행보다. 후에 조직을 빼앗긴 박용만 측에서 하와이에 정박해 있는 일본 순양함 이즈모 폭파 논의가 일어난 것을 두고 법정 같은 공개된 장소에서 폭로하였다. 이승만의 밀고는 "신한민보"와 "(국민회)공고서", "재미한인오십년사"(김원용)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65]

4.2.1.1.1. 독립운동 자금 횡령

첫째, 하와이의 동포들이 공동 결의로서 임시정부에 직접 납입하려고 한 인구 세금을 중간에서 가로채 유용하고, 정부에서 임명한 세금 징수 사무를 맡아서 처리하는 징세 위원을 불법으로 처벌하였다.

둘째, 대통령에 위임 발행한 외국 공채의 수입도 거의 전부 유용하고 심지어는 수지보고조차도 하지 않았다.

셋째, 본래의 임무인 외교와 선전에 관해서도 하등의 볼 만한 성적이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일편의 보고도 하지 않았다.

1925년 3월 10일 임시정부가 구미위원부 폐지를 의결하면서 주장한 부정, 비리 사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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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주관하던 구미위원회는 밑에 파리통신부를 두고 외교업무를 직접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동포의 인구세와 애국금까지 독점하는 등 임시정부 업무를 전횡하여, 대통령의 독주라는 비난을 받았다. 1924년 상해 임정 개혁파가 이승만 대통령을 탄핵하고 난 후에는 임정으로 보내던 소규모의 독립운동자금마저 끊어버렸으며, 결국 구미위원회는 이승만이 탄핵된 뒤 1928년 해체되었다.

4.2.1.1.2. 친일 민족반역자 청산 방해

이승만은 독립운동가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정부 수립 이후 친일 민족 반역자 청산을 방해했다.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제대로 된 활동을 못하고 해체된 것도 이승만이 친일 민족 반역자 청산에 적극적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오히려 경찰은 반민특위원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당시 글을 읽은 사람은 모두 친일 민족 반역 행위를 했다는 의견도 있으나 이것은 단지 물 타기에 불과하며[66], 이승만이 친일파 출신을 그대로 등용하되 권력의 핵심에 손이 닿지 않는 한직에 몰아넣는 방식으로 숙청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던 악질 친일파 민족 반역자인 노덕술이나 김창룡과 같은 자들을 측근으로 두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데 사용한 것은 명백하며, 이후 대한민국의 역사에도 큰 악영향을 끼쳤음을 부정할 수 없다.[67] 그러나 일각에서는 당시 중국의 국공내전이 발발하고, 대구 10.1 사건, 제주 4.3사건, 여순반란사건 등 국내외적으로 공산 세력의 폭동이 극심했으며 오랜 기간 미국에 있다가 한국에 돌아와 타 정치인보다 지지 세력이 미미할 수 밖에 없었고, 좌우익의 대립으로 인한 국가적 위기 해결을 위해 친일파 청산에 대해서 이승만이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다.
결국 이승만의 이러한 행적은 많은 오해를 만들어서 평생을 반일주의자로 살아온 그에게, 진보세력이 그를 친일파로 매도하는 굴욕을 안겨주게 되었다.

4.2.2. 긍정적 평가


이승만은 국외에서 이름이 알려진 독립운동가 중 한 사람으로서 노선으로서는 외교 독립론을 견지했다. 이승만은 한국 독립에 영향을 주는 여론을 미국 내에서 만들었고, 그가 미국 내에서 지지를 쌓아갈 때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자 한국에 무지했던 미국 내에서 한국 독립에 대한 처리에 영향을 주는데 기여를 하였다.
외교 독립 노선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성과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외교 독립 노선이 성과가 없었다고 주장한다면 같은 잣대로 따졌을 때 무장 투쟁도 성과가 없었던건 어차피 마찬가지다.[68] 애초에 광복은 일본 제국주의의 패망과 더불어 외교론, 무장 투쟁론, 실력 양성론 등 여러 독립운동 노선의 성과가 복합적으로 나타난 결과이다. 임시정부의 노선 역시 외교론에 무장 투쟁 노선을 결합한 형태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1941년 '일본 내막기'라는 책을 저술해 일본에 대해 순수한 시각을 갖고 있었던 미국인들에게 일본 제국주의의 위험성을 알렸다.[69]
3.1 운동이 벌어지자 이를 미국에서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도 이승만이었다. 그 이전 대한제국 시절이던 1898년 4월에는 매일신문이라는 한국 최초의 민간 일간신문[70]을 양홍묵, 유영석과 함께 창간했다. 순한글 신문이었으며 민족의 대변지로 한글신문시대에 기여하였고, 외세에 저항하는 한국 신문의 전통을 확립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국주의 열강의 이권요구와 횡포에 대해 가차없이 비판했다.# 후에 제국신문도 창간했다.
그리고 105인 사건이 벌어지자 미국 각지를 돌며 '조선에서 저렇게 일제에 의해 기독교인들에 대한 핍박이 이어지고 있는데 기독교 국가라는 미국은 왜 가만히 있느냐. 조선을 도와야한다'라며 미국내 여론 조성을 했다.
이승만은 미국의 대통령과 정부 관료들을 비롯한 고위층들과 지속적으로 접촉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받기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 국제연맹 총회, 워싱턴 군축회의 등 각종 국제회의에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해 한국의 실상과 독립 문제를 알렸다.
태평양 전쟁이 터지자 미국내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인과 같은 적성국민 취급을 받았는데 이승만이 미 법무장관 프랜시스 비들에게 미국내 한국인을 일본인과 동등하게 대우하지 말것을 요구하여 실제로 비들은 1942년 2월 9일에 "외국인등록법에 따라 등록한 한국인 가운데 자의로 일본 국적을 취득하지 않은 사람에 한해 적성국 외국인에 가해지는 규제에서 특별 면제한다"고 발표하였다. 이승만 덕분에 미국 내 한국인들이 보호를 받은 것이다.
그리고 항일단파방송 사건 등에서 드러나듯이 한국어 방송을 직접 진행하면서 태평양 전쟁에서 일제가 패망해가는 전쟁 상황을 고국의 동포들에게 전달하고 독립 운동을 독려했다. 또 미국 국무부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요청한 것도 이승만이며, 한국인들을 연합군에 편입시켜 대일전쟁을 수행하도록 하여 독립권을 얻어내려고 했다.
이승만은 미국육군전략사무처(OSS)의 굿펠로우 부국장을 만나서 한인 특공대원들을 훈련시켜 한반도에 잠입시키는 게릴라전 계획도 추진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은 일제의 핍박을 받던 우리나라의 독립을 위해 누군가 반드시 해주어야 할 외교 활동을, 자신에게 주어진 상황에서 흔들리지 않고 실천했다. 총칼을 드는 것 역시 독립운동이지만, 교육이나 언론 등의 수단으로, 혹은 외교적 방법으로 외국에서 일제의 침략을 알리고 주권 회복을 위해 일하는 것도 독립운동이다. 이승만은 두 번째와 세 번째 케이스로, 기회주의적인 모습을 보였던 일부 인물들과 달리 끝까지 변절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수행했다.

4.2.2.1. 다른 독립운동가들과의 갈등?

이와 관련하여 특히 스티븐스 저격사건이 자주 지적 당하는데, 당시 이승만이 이에 대한 통역을 거절했던 것은 미국의 여론이 매우 안 좋았고 외교독립론자였던 그는 이 사건자체를 부정적으로 봤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약소국이며 어디에 있는 나라인지도 모를 조선이라는 나라 사람들이 미국 그것도 자기네 나라 외교관을 살해한 것이니 어떤 나라든 여론이 좋을리가 없다.
본래 현대 외교관은 군주, 곧 국가의 "주권"의 대리자 개념으로 시작한 근대 외교관에 기반하고 있으며 이는 지금도 유효하다.[71] 따라서 외교관을 살해하는 것은 해당 국가의 주권을 짓밟는 모욕 행위에 해당된다. 현대에 비해 외교관이 가지는 대중적 위신이 엄청났던 당시엔 더욱 그러하였고, 당시 미국인들의 눈에 스티븐스 저격 사건이 어떻게 보였을지는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내가 하버드 대학에 재학하고 있을 때 일본이 한국을 말살하기 위해 한국정부의 고문으로 앉혀놓은 스티븐스가 두 한국 사람에 의해 샌프란시스코에서 암살되었다. (중략) 그리고 안중근 열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했다. 신문에는 한국 사람들은 잔인한 살인광들이며 무지몽매해서 그들의 가장 좋은 친우인 이토 히로부미와 스티븐스를 살해했다는 기사들이 가득 실리곤 하였다. 어떤 학생들은 나와 이야기하는 것을 두려워 했고 나의 교수는 나를 얼마나 무서워했는지 나의 석사논문을 나에게 우송해 주고는 떠나기 전에 나를 만나주지 않았다.

이승만이 1912년에 쓴 '청년 이승만 자서전' 中

위에 나온 이승만의 글을 보면 스티븐스와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 때[72] 당시 미국 내의 여론분위기가 어떤 상황이었는지를 알 수 있다.
아무리 친일 미국인이라 하더라도 한 나라의 외교관을 죽이는 행동은 미국인들로 하여금 한국을 적으로 여기게끔 만들 뿐이었다. 이승만이 생각하기에 일본인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교육받은 근대화된 한국인들이 해외로 나오는 것이었다. 한국인들이 해외에 나가 활동하며 "우리 한국인들은 일제의 탄압이 어울리지 않는 문명인이자 개화인이자 자유인들이다"라는 인식을 서방 국가들에게 심어줘야 한국 독립의 당위성이 설득이 되고, 미국의 심장부에서도 그런 인식이 통용이 되어야 그것이 곧 독립으로 가는 길이라 판단했다.
그리고 위임통치 청원 사건에 대해서도 신채호는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았는데 이승만은 없는 나라마저 파는구나

신채호

라고 비난했으나 이것도 비약이 대단히 심한 비난이며 이승만이 했던 청원의 내용은 "한국의 완전한 독립을 보장한다는 조건하에 일본의 통치로부터 한국을 해방시켜 국제연맹의 위임통치 아래 두는 조치"였지 나라를 판다거나 타국의 식민지가 되는게 아니었다. 게다가 이건 이승만 뿐만 아니라 김규식이나 안창호 등 다른 독립운동가들도 유사하게 가지고 있던 구상이었다. 현대의 사람들 중에서도 이런 신채호의 시각을 일방적으로 추종하는 경우가 있는데 신채호의 저런 주장은 그가 국제정세와 국제법에 대해 제대로 아는게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치 이승만을 제외한 나머지 독립운동가들은 똘똘 뭉쳐있었는데 이승만이 분탕을 쳐서 이승만VS나머지 의 갈등이었던 것처럼 사람들이 착각하곤 하지만 실제론 이승만과 상관없이 당시 임시정부를 비롯한 독립운동가들은 항상 분열되어 있었고 온갖 파벌로 나뉘어져 싸우고 있었다. 당장 박용만누구에게 암살당했는지 생각해보라. 심지어 한길수는 독립운동을 한다는 사람이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공작을 벌였다. 분열이나 분탕이라는 것은 그 사람만 아니면 안정적으로 뭉쳐져 있을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모두가 사분오열인 상황에서 특정인만 분열자로 프레이밍 하는 것은 비합리적이다.
어떤식으로 독립을 해야하는가에 대한 노선 차이와 사상의 차이는 있을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거기서 오는 갈등이라는건 혼자서 일어나는게 아니라 상호간에 일어나는 것이다. 서로 다른 노선과 사상에서 오는 갈등이 이승만에 대한 비판거리가 된다면 반대로 이승만과 갈등을 빚은 상대 독립운동가도 갈등을 빚은 것에 대해서 똑같은 비판을 받아야 할 것이다. 이승만이 누군가와 패권 싸움을 하는데 조직력을 낭비했다고 비판한다면 같은 논리로 그 상대에 대해서도 이승만과 패권 싸움을 하느라 조직력을 낭비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 상호간에 갈등을 빚었는데 그게 마치 이승만의 잘못이라는 일방적 비판은 이승만은 악이고 상대는 선이라는 정답을 정해놓고 얘기하는 이중잣대에 불과하다. 게다가 앞서 얘기했듯이 이승만이 아니어도 원래 분열과 파벌 싸움이 일상이었다.

4.2.2.2. 안전한 미국에서 호의호식하며 놀고먹었다?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의 독립운동 자금을 횡령하여 그걸로 좋은 옷 사고 스테이크 썰면서 "안전한" 미국에서 사치를 부리며 호의호식했다고 비난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뭘 모르고 하는 소리다. 이런 주장을 하는 사람들은 "이승만이 재산도 없이 홀로 미국에 갔는데 무슨 돈이 나서 거기서 생활을 하냐?"라고 하지만 이승만은 미국 각지의 학교교회, 지역단체들에서 강연비를 받고 강연을 하며 돈을 벌었다. 그리고 현지 교민들로 이루어진 후원회와 개별적으로 이승만을 도와주는 미국인 후원자들도 있어서 이들이 이승만의 활동비를 지원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안전한" 미국에서 활동했다며 공격하는 것은 공격을 위한 공격이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독립운동의 목적은 조국의 독립이지 누가누가 더 열악한 곳에서 활동했나를 겨루는게 아니다. 그야말로 주객이 전도된 사고방식에 불과하다. 그런 논리라면 (조국 독립엔 전혀 도움도 안되겠지만) 아프리카 오지에서 발가벗고 독립운동을 했으면 가장 칭송받을 것이다. 당시 전세계 최고 강대국이자 동아시아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 할 수 있는 나라가 미국이었다. 동북아에 가장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나라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저런 공격을 하는 세력들은 똑같이 미국에서 활동한 박용만이나 서재필 또는 프랑스에서 활동한 서영해 등에 대해서는 같은 공격을 하지 않는다는 점도 재밌는 부분이다.
또한 중국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마치 일제시대 수십년간 일체의 여가도 없이 산 줄로 착각하는 것도 하나의 판타지다. 심지어 의열단은 중국 기생들 사이에서도 유명할 정도로 방탕했으며, 여운형도 막장적인 여자관계로 유명했다. 최소한 이승만은 그런 짓거리는 하지 않았으며 미국에서 현지 동료들과 또는 미국 지식인들과 만나서 일상적인 교우관계를 갖는 것을 두고 마치 엄청난 사치라도 한 것인양 호의호식이라고 표현하는건 다분히 의도적인 비난에 불과하다.
'이승만의 조직은 안창호의 국민회를 테러하여 자금을 탈취했다'는 주장도 있는데 이것도 여러 왜곡이 섞여 있다. 일단, 샌프란시스코에 있던 안창호의 국민회가 아니라 하와이에 있던 하와이 국민회였으며 테러를 하여 자금을 탈취한게 아니라 하와이 국민회가 회관 건축비를 유용했기 때문에 이승만이 그것을 문제 삼아 하와이 국민회 김종학 회장을 파면시켰던 것이다.

4.2.2.3.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노력

1943년 5월 15일 이승만은 미국의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대략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한을 보냈다.

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날 한국에 행한 잘못을 바로잡을 때다. 1905년과 1910년에 일본이 한국을 병탄하도록 도움으로써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위반한 건 미국이다. 일본이 대한제국을 멸망시킨 것을 시작으로 팽창을 거듭한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 이어졌고 결국 미국은 막대한 병력과 비용을 낭비하게 되었다. 서양 정치인들이 일본의 팽창주의를 억제할 수 있는 것은 한국이 유일하며 독립된 한국이 동양 평화의 보루라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데서 비롯된 일이다. 그런데 아직도 미국은 임시정부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소련이 종전 후 한국에 '소비에트 조선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소문이 들리는 상황에서 그들의 극동 진출을 막고 현재의 대일 전쟁도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기 위해서는 미국이 당장 임시정부를 승인하고 한국인들을 대일 전쟁에 참전시켜 실질적으로 미국을 도울수 있게 해야한다. #

미국이 일제의 위험성을 알지 못하고 일제가 대한제국을 멸망시키는 것을 가만히 둔 결과가 진주만 공습으로까지 이어지고 그 결과 미국은 수많은 병력과 전비를 낭비하게 됐음을 지적하는 이 서한은 이승만의 국제적 통찰력을 잘 보여준다. 그러면서 독립된 한국만이 동양 평화의 보루임을 지적하며 일본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 임시정부를 인정해 줄 것을 설득하고 공식적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게 해야한다고 얘기했다.
위는 대표적인 예시일 뿐 이승만은 이 서한에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미국이 1882년의 조미수호통상조약을 어겼다는 점을 상기시키는 등 최대한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으로 루즈벨트와 미 국무부를 압박했다.[73] 임시정부는 결국 국제적 승인을 받지는 못했으나 이승만은 이렇게 백방으로 한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다. 이외에도 이승만은 미국내에서 자신이 가지고 있는 하버드, 프린스턴 인맥과 고위직 네트워크를 최대한 활용하려 했고 그가 미국의 이너 서클에 들어가려고 노력한 것도 이때문이다. 미국 내 여론전을 위해 엘리트 미국인들로 이루어진 한미협회도 발족시켰다. 이승만이 아니라면 당시 한국인들 중 이정도로 미국의 최고위급들과 연결될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4.3. 친일파 대통령?


이승만을 혐오하는 한국의 진보/좌파 진영에서는 이승만이 일제강점기 초기 미국에서 망명 생활을 하면서 일본 군함 이즈모호 폭파 시도를 미국 당국에 고발하거나 반민특위 해체를 명령하고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며 보도연맹 학살 사건 당시, 독립운동가도 처형시킨 일들을 들어 그가 친일파라고 비판하고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일제시대에도 독립운동가였고 임시정부 수장이기도 했으며 대통령이 되고 난 1948년 이후에도 줄곧 일본을 상대로 강경한 반일 정책을 펴나갔다. 이승만이 친일파 인사들을 등용하거나 반민특위를 해체했다고 하더라도 그가 일본과의 전쟁까지 불사하고 해군을 동원하여 독도를 일본의 압력으로부터 지켜낸 일은 강력한 반일 신념 덕분이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74] 더구나 당시는 한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고 온 나라가 초토화된 상황이었다. 심지어 북한군과 중공군이 쳐들어와 수도 서울이 두 차례나 함락되고, 나라가 망할 뻔한 절체절명의 위태로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끝내 일본과 손을 잡지 않았다.
심지어 1954년 7월 29일 미국 대통령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와 가진 백악관 회담에서 이승만은 한일 국교 재개 문제로 실랑이를 벌이다, "내가 대통령에 있는 동안은 일본과 상종도 하지 않겠다."라고 단호하게 한일 국교 재개에 대해 반대했고, 그러자 화가 난 아이젠하워는 의자에서 일어나 나가 버렸다. 아무것도 가진 것도 없는 나라인데다 북한의 침략을 막아낸 것도 미국 덕택이었음에도 이승만은 일본과의 국교를 재개하라는 미국 대통령의 권유를 끝까지 거부할 정도로 매우 강경한 입장이었던 것이다. #. 만약 이승만이 정말로 친일파였다면 이러한 권유를 거부하기는 커녕, 오히려 냉큼 수락했을 것이다.[75] 이런 이승만을 친일파라고 부르는 것은 마치 평생 동안 강경한 반공 인사였던 김구를 가리켜 김일성한테 부역한 공산주의자, 혹은 북한 첩자라고 누명을 씌우는 것만큼이나 크게 잘못된 일이다.
심지어 이승만에 대해 매우 부정적인 리영희조차 그의 책인 "역정: 나의 청년시대- 리영희 자전적 에세이"[76]에서 "미국 정부는 이승만의 반일적 고집에 골치를 앓았다."라고 서술하여 이승만이 결코 친일파가 아니라 오히려 강경한 반일 성향이었음을 인정했다.

4.3.1. 강경한 반일 정책과 발언들


대표적인 경우들을 거론한다면, 우선 1952년 1월 18일에 독도 해역을 지키기 위해 선언한 이른바 '평화선' 혹은 '이승만 라인'을 들 수 있다. 이승만이 평화선을 선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일본 언론들은 '오만 무례하고 불손한 한민족', '한국의 해양 주권 선언은 영토 침략'이라며 잔뜩 흥분하였다. 그리고 일본이 평화선을 불법이라고 항의하면서 고기잡이를 계속하자 이승만은 불법 어로를 하는 어선을 붙잡아 어민을 억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1952년 9월 이승만이 해군에게 평화선을 침범하는 일본 어선은 나포하고 필요할 경우에는 발포하라는 명령을 내림으로써 한국과 일본 사이의 갈등은 뜨겁게 달아올랐다.[77] 나중에 그렇게 해서 한국 해군에 의해 억류당한 일본 어민의 수는 4천 명에 달했으며, 그 과정에서 44명의 일본 어민들이 죽었다.
두 번째로는 1954년 3월 14일 일본 도쿄 메이지 스타디움에서 개최된 월드컵 극동 예선에서 원래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한 번씩 경기를 하는 홈 앤드 어웨이가 원칙이었지만, 이승만은 한국 땅에 절대 일본 축구팀의 입국을 허용할 수 없다고 강력히 반대하여 두 경기를 모두 일본 도쿄에서 치러야 했다.[78]
세 번째로 이승만은 1955년 12월에 미 국무성 관리들이 한국을 희생해 일본을 지원하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들 중에는 일본과의 맹목적 사랑에 빠진 이들이 있다고 경고했으며[79], 미국인들 이외에 도대체 누가 일본을 믿느냐고 개탄하기까지 했다.[80]
네 번째로 이승만은 대만이 일본과 가깝게 지내는 걸 비판하면서 심지어 "4억 중국인은 다시 일본의 지배하에 노예가 되느니 지금과 같은 공산주의의 속박을 원할 것이다."라는 말까지 했다.[81]
다섯 번째로 이승만은 1959년 6월 15일 대일 경제단교 및 일본 왕래금지 성명을 발표하였다. 당시 언론은 이승만 정권의 경제단교 조치에 대해 그것은 일본을 제재하는 게 아니라 한국을 제재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82]
그 밖에도 이승만은 한국전쟁 초기에 전황이 불리해지자 일본군을 데려와야 한다는 미군의 제안에 "만약 그렇게 하면 공산군보다 먼저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이라고 강력히 반대한 바 있다.[83] 또한 이승만이 미국에 있다가 조선이 해방되자 귀국하고 나서 가장 처음 한 일이 바로 조선총독부 건물 안에 들어가서 망치로 눈에 보이는 물건들을 모조리 때려부수는 것이었는데, 왜놈들 물건이 보기 싫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울러 이승만은 조선은행에 보관되어 있던 금괴를 일본한테 빼앗겼다고 자주 분통을 터뜨렸다고도 한다. #.
또한 그의 집권 기간 12년 내내 일본과의 국교 수립은 끝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수교 협상이 있긴 했으나 일본측이 적반하장식 태도로 나오자 결렬되었다.
재밌는 점은 뉴라이트 세력들은[84] 이승만을 찬양하면서 동시에 반일 민족주의를 혐오하는 모순을 벌인다는 것이다.[85] 간혹 뉴라이트들 중에서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극렬히 증오하는 몇몇 인사들은 이승만의 이러한 반일 민족주의적인 정책이나 발언들 대해서 한국 정부라거나 혹은 한국인들이 그랬다는 식으로 애매모호하게 주체를 얼버무리며, 이승만이 했다는 사실을 숨기려고 한다. 물론 그런 처사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는 유치한 수작에 불과하다.[86]

4.4. 미국의 앞잡이?


'이승만은 친일파다'라는 주장 말고도 이승만을 비하하려는 사람들이 말하는 대표적인 것이 '이승만은 미국의 앞잡이다', '미국 하수인이다'라는 주장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오히려 미국 대통령들을 비롯한 많은 미국 인사들과(해리 트루먼, 존 하지, 아이젠하워 등) 뜻이 달랐고 자주 부딪혔다.
왜냐면 이승만은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활용하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었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내에서 "Sick man Rhee"가 이승만의 별명이었을 정도였다. 갈등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는 주장까지 미국에서 나왔다.[87] 미국인들은 당연히 남의 나라인 한국의 입장이 아닌 자국 미국의 입장에서 볼 수 밖에 없으니 이승만이 맘에 들지 않았겠지만 한국의 입장에서 봤을 때 이승만은 철저히 한국의 이익을 위해 미국을 뽑아먹을 수 있는 한 최대한 뽑아먹는 대통령이었다. 이런 사람이 미국의 앞잡이라 할 수 있는가.
그가 대통령이 된 후 뿐만 아니라 그 전인 1946년 6월에도 미군정 사령관 존 하지는 이승만의 정치 자문가였던 로버트 올리버에게 "그의 그치지 않는 반소언동 때문에 미국이 장차 한국에서 설립할 어떤 정부에도 이승만은 결코 참여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경고하기까지 했고 장택상에게 이승만을 정계에서 축출할 것을 제의하기도 했다.[88]
이승만이 대통령이 된 이후에도 마찬가지라서 이승만은 미국이 원하는대로 움직여주지 않았고 심지어 1953년에는 미국이 이승만을 제거하는 에버레디 계획을 세우기도 했을 정도다. 그리고 한국전쟁 후 아이젠하워가 한국과 일본이 수교를 맺고 잘 지내길 요청했을 때도 이승만은 거절했다. 아무것도 없는 신생약소국이자 한국전쟁에서도 미국 덕에 나라를 지킨 입장이었음에도 이런 대응을 한 것이다.
이런 이승만의 행보를 보면 아무리 봐도 그가 미국의 앞잡이였다거나 미국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꼭두각시였다는 식의 평가는 절대 할 수 없다. 오히려 이승만은 미국을 국익에 적극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다.

4.5. 순수혈통주의에 기반한 국제입양


제인 정 트렌카 대표는 한국전쟁 이후 혼혈아동의 국제입양에 대해 "당시 많은 나라가 전쟁을 겪었다. 또 전쟁 과정에서 혼혈아동을 포함해 보호를 필요로 하는 많은 아동이 발생했다. 그러나 다른 어떤 나라도 '아버지의 나라'로 보낸다며 이렇게 대거 입양을 보낸 사례가 없다"며 "심지어 혼혈아동이 전쟁을 벌인 적군의 아이들도 아니었는데 왜 이들을 내보내야 했는지 정말 이해하기 힘든 일이다"고 말했다. #

한국의 해외입양은 1953년 이승만 정권 때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는데 이승만은 '일국일민(一國一民)주의'를 정치적 신념으로 내세우며 한국전쟁 당시 외국군과 한국 여성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아동은 '아버지의 나라'로 강제로 보냈다. 심지어 키워주는 어머니가 있음에도 해당 가정을 해체시키고 혼혈 아동은 무조건 강제로 이주시켰다.
[1] 김영삼은 이승만과 동시대에 활동하며 그를 직접 목격한 사람이다.[2] 애초에 김일성은 소련군 장교였다[3] 실질적인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라 할 수 있는 소련의 건국이 1922년이다.[4] 조경원,이배용, '해방 이후 여성교육정책의 변화와 여성의 사회진출 양성-미 군정기(1945)~제1공화국시기(1960)', "한국교육사학"[5] 1955년부터 1960년까지 강원도 화천 3사단 포병중대의 행정병으로 근무했던 강호창의 증언에 의하면, 휴가를 나간 사병이 안 돌아오는 경우가 많았는데 데리러 가보면 "배가 고파서 못 견디겠다."라면서 부대로 돌아오는 것을 거부하는 일이 잦았다고 한다.(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년 9월 20일/ 113쪽) 또한 5.16 쿠데타를 일으킨 세력들이 쓴 책인 <한국군사혁명사>에 의하면 "장군은 트럭으로 날라다 먹고, 장교는 지프로 날라다 먹으며, 하사관은 등으로, 사병은 반합으로 날라다 먹으니 피차 마찬가지."(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1권/ 인물과사상사/ 2004년 9월 20일/ 113쪽)라는 내용이 언급된다.[6] 때문에 당시 미군수품 같은 것들을 몰래 빼돌려 암시장에 파는 등의 부패도 많았다.[7] 비록 1894년 갑오개혁으로 인해 공식적인 신분제는 폐지되었으나, 어디까지나 법률적으로만 없어졌을 뿐이지 실제로 농촌 사회에서는 50년 넘게 계속 머슴과 백정 같은 하층 계급들이 차별과 천대를 받으면서 살았다.[8] 농사지을 사람이 줄어들면 지주의 수입도 줄고 도로나 통신 인프라가 늘어나면 그 지역 지주의 권력도 약해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현대도 그렇지만 지주들은 상당히 보수적이다. 중남미 국가들이 2차 대전 이후 농산물과 광물 수출로 한때 반짝하다가 만성적인 외채 위기로 주저 앉은 것에는, 대지주 계층이 권력을 장악하여 전근대적인 사회 질서를 유지한 것이 큰 이유라는 분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9] 김기석,강일국, '1950년대 한국교육', 문정인,김세중 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10] 김기석,강일국, '1950년대 한국교육', 문정인,김세중 편, "1950년대 한국사의 재조명", 선인[11] 오천석, "한국신교육사"[12] 오천석, "외로운 성주"[13] (1954년 기준으로) 제1차 교육과정기의 중학교 교육과정에 있었던 지금의 일반사회와 같은 역할을 한 교과다. <김대현, 교육과정의 이해, 학지사, 1판 8쇄 347쪽>[14] 교육의 양적 성장은 4.19 발발의 한 요인이 되기도 했다. 이들은 미국식 민주주의 이념교육을 받은 세대로 자유민주주의의 보편성과 우월성을 주장하면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민주주의의 보편적 원리의 실현을 주장하며 최소한의 민주주의적 절차조차 무시되는 현실에 궐기했던 것이다. <한국사연구회, 새로운 한국사길잡이(하)제3판 한국사연구입문, 지식산업사, 초판 11쇄 430쪽>[15] 교육50년사편찬위원회, "교육 50년사, 1948-1998", 42p[16] 출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못 받았지만 정말로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다를 벌이자 관심을 받게 되었다.[17] 게다가 일본 정부가 아직 군정이 미처 끝나지 않은 때에 전격적으로 해서 일본은 즉각적인 대처를 못했고 이후 대처를 하려고 배도 보냈으나 이승만은 족족 나포하는 것으로 답을 했다.[18] 제분, 제당, 면방직 공업의 원료로 쓰이는 밀가루, 설탕, 면화 등이 모두 흰색이어서 '삼백산업'이라고 불린다[19] 한국전쟁과 기복신앙확산연구/ 김흥수 지음/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1999년/ 32쪽[20]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2004년 7월 9일/ 279쪽[21] 김종철, "한국교육정책연구", 314p[22] 馬越徹, "현대한국교육연구", 232p[23] "An Evaluation of the Uniqueness of Education growth in Korea", Noel F. McGinn, et al.,op. cit.,p.92[24] 유영익, "건국대통령 이승만"[25] #[26] 김창숙, <심산 유고>, 199~200p, 성균관대학교 대동문화연구원 편역, 1973[27] 반민특위 담화를 다섯 차례나 발표하고 반민법 법률 개정안을 본회의에 상정하였으며,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에게 지시하여 6.6 반민특위 기습사건을 주도했고 11일에는 특경대를 해산시켰다.[28] 1956년에는 사사오입 개헌이라는 비논리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3선을 허용한다."라는 헌법 정신에 위배되는 헌법을 만들었다. 1960년에는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밖에 없었지만 부통령 선거를 둘러싸고 잘 알려진 3.15 부정선거가 터진다.[29] 이승만의 생일마다 집집에는 태극기가 달렸고, 이승만 찬가를 불러야 했으며 국민 학교와 관공서마다 이승만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뿐만 아니라 화폐에도 얼굴이 들어갔다.[30] 높이는 무려 25m로 당대 동양 최대 규모 크기였다.# 오늘날 평양의 김일성 동상 높이는 20m 정도다.[31] 실제로 둘이 완전히 갈라선 기간은 광복 후 장덕수 암살 문제로 완전히 갈라지고 나서 몇 년 뿐이다. 이전까지는 노선 차이가 있고 약간의 갈등은 있었을지언정 줄곧 편지를 주고받으며 형님, 아우하던 친한 관계였다.[32] 출처: 한국전쟁과 집단학살/ 김기진 지음/ 푸른역사[33] 사실 이건 이승만 본인의 자질 문제인데, 이승만은 누가 되었건 무조건 자신한테 충성만 하면 다 고위관직에 뽑아주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서 아부만 잘하면 아무나 등용했다는 이야기.[34] 출처: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1권/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 56~58쪽[35] 거창 양민 학살사건을 조사하러 온 국회의원들한테 자기 부하들을 북한군으로 변장시켜서 총격을 가한 다음, 북한군의 음모라는 거짓된 누명을 씌우기까지 한 인물이었다.[36] 국민방위군 사건 때에도 신성모를 파면시키라는 국회의 요구에 대해 이승만은 처음에는 "강을 건너다가 말을 바꾸어 탈 수 없다."라고 거부했으나, 국민방위군 사건의 진상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결국 신성모를 해임시켰다.[37] '지당하신 말씀입니다'의 그 지당이 맞다.(...)[38] 다만, 여기에는 곽영주가 박정희의 인사에 개입하여 그를 해임시키라는 압력을 넣었던 것에 대한 개인적인 원한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39] 특히 박마리아는 이승만의 아내인 프란체스카와 매우 절친한 사이였는데다가, 이기붕 본인의 건강이 무척 쇠약하여 사실상 이기붕의 업무마저 대신할 정도로 이승만 정부에서 입지가 무척 강했다. 프란체스카 본인이 평생 한글과 한국어를 몰랐기 때문에 영어가 능통한 박마리아한테 크게 의존했다.[40] 1960년에 이승만은 이미 85세였다. 이승만은 윈스턴 처칠보다 1살 아래이며, 이오시프 스탈린보다도 4살이나 연상이다. 지금도 85세면 장난 아닌 고령이다.[41]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60년대편 3권/ 47~48쪽[42] 이것만 보더라도 이승만의 반일 민족주의 성향이 대단히 강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데, 정작 한국의 반일 민족주의를 증오하면서 이승만은 찬양하는 모순된 성향을 지닌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은 이승만의 이러한 반일 민족주의적인 모습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침묵을 하고 있는 것이 블랙 코미디다.[43] 현재의 전라북도 익산시[44] 朴亨堯(83. 表善面 加時里, 西靑출신 경찰관)의 증언이다. 일본군이나 독일군에서도 멀쩡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있듯이 서북청년단에서도 멀쩡하고 정의로운 사람이 있는데, 박형요 씨가 그 경우로 이 분은 제주도민에 대한 무차별 학살을 막기도 했다.[45] 전직 경찰관 文昌松이 1995년 이 보고서 필사본을 엮어 '한라산은 알고 있다. 묻혀진 4‧3의 진상'이란 제목의 책자를 발간했다고 한다.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146쪽에서 재인용, 159쪽[46] 제주 4.3 사건 진상보고서, 146쪽에서 재인용, 187쪽[47] 다만 존 하지 자체가 대단히 무능력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이 사람의 평가가 의미가 있는지는 의문이다. 게다가 존 하지는 이승만과 시종일관 대립하던 인물이었다.[48] 정확히는 이승만이 아니라 신성모의 발언이다. 실제 정부수립 초기만 해도 이 발언은 어느 정도 먹혔는데, 그때는 소련이 북한에 대규모 군사지원을 해주기 전이었다.[49] 이에 대해서 2006년에 김대중을 만난 아미티지 전 미국 국무부 부장관은 "당시 미군 철수가 조기에 이루어졌고 애치슨 라인도 실수였다"고 인정했다.##[50] 한국전쟁, 박태균.[51] 한국군 57mm 대전차포. 그러나 57mm 대전차포의 위력이 부족해서 실제 성과는 보병에 의한 성과라는 이야기도 있다.[52] 수직으로 환산하면 90mm.[53] 저 말 자체는 신성모의 발언이기는 하지만.[54] 물론 그렇게 제공받은 무기를 제대로 굴릴 수 있냐는건 별개의 문제인데 당시 한국군의 상황을 생각하면 무리다. 필요한 물자를 지속적으로 미국이 대준다면 모를까.[55] 다시찾는 우리역사 제 3권/ 한영우 지음/ 경세원/ 2004년 발행/ 186쪽[56]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245~250쪽[57] 실업이 바꾼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017년 11월 25일 발행/ 245~250쪽[58] 한국전 참전 장성들의 회고에 자주 나오는 내용인데, 정작 청년들을 모아서 입대를 시켜도 군수물자 지원이 제대로 안돼서 훈련도 못시켰다는 이야기들이 많다.[59] 유영익, '1950년대를 보는 하나의 시각', "한국근현대사론", 262p[60] 그런데 교포들을 대상으로 활동한 건 주로 안창호였고 이승만은 주로 미국 현지인과 지식인들을 대상으로 한국의 실상을 알리고 여론 조성을 하는데 집중했다.[61] 참고로 소련의 자금을 받아 활동하던 공산주의자다[62] 조선총독부 경무국 상해정보(고경 제245호 : 1923.1.28) <일본외교사료관자료>[63] "이승만은 자신의 라이벌들의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 그는 한길수, 김원봉, 김규식 등을 모두 공산주의자로 몰아부쳤다." - "우남이승만과 건국사"[64] 다만, 김원봉은 실제로 공산주의자였다. 그리고 한길수는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방해하는 인물이었으며 심지어 미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지 않도록 공작을 벌이던 인물이다.("방선주 저작집" 1권) 김규식도 1924년 9월 재중국 소련 무역 대표부 석유 과장의 이름으로 된 한 보고서 기록에 따르면, "김규식은 과거에 한인 공산주의자들의 지도자였고 국제 공산주의 조직인 코민테른의 2차 회의에도 참가했었음. 현재에 그는 그의 신념을 바꾼 변절자이며 사업 쪽으로 방향을 돌리려는 그의 시도도 실패하고 있는 인물임. 미국 석유의 판매를 비롯한 몇 차례의 회사 설립을 위한 그의 시도는 알려져 있음"이라고 기록되어 있는걸 보면 당시에 이승만이 그를 공산주의자로 생각했을 이유도 있었다고 보여진다.[65] 다만 이때의 미국은 친일 국가였으므로 미국령 하와이에서 일본 군함이 한국인들의 손에 침몰했다면 미국과 일본의 외교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박용만 이승만 할 것 없이 다함께 끝장날 확률이 대단히 높았다.[66] 반민특위가 대상으로 삼은 사람들은 일제 치하에서 복무한 중하위급 기술 관료 모두가 아니라 그들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자들이거나 일제의 식민지 독립 운동 탄압에 앞장서며 악영향을 끼치던 수백 명이었다.[67] 일각에서는 반민특위 활동이 소급입법금지원칙 위반이라는 주장을 하기도 한다. 정확히 말하자면 소급입법금지 대상은 이미 완료된 사실에 대한 입법(진정소급입법), 진행 중인 사실에 대한 입법(부진정소급입법)으로 분류된다. 친일반민족행위 문제는 통상 전자에 해당하는데, 진정소급입법의 경우 원칙적으로는 위헌이지만 예외적으로 정의실현 등의 차원에서 소급입법을 할 공익이 더 크다고 한다면 허용된다는 것이 우리나라 학설과 헌법재판소 판례의 견해다. 우리나라의 경우, 군사 독재 문제와 친일 청산의 문제 두 부류에 한해서 진정소급입법을 허용하고 있다. 그리고 해외에서도 소급입법금지의 예외를 규정하는 경우는 꽤 있다. 가령, 남미의 경우 군사 독재 관련 과거사에 관해서는 소급입법의 예외로 둔 사례가 있으며 그 옛날 나치 문제, 기타 전쟁 범죄의 경우도 문제가 발생한 당시의 당사국에서는 처리가 곤란한 문제인 바 소급입법의 예외로 규정하곤 한다. 소급입법금지 원칙이 보편적인 규범인 것은 맞지만, 과거사 청산같이 그에 대한 예외 역시 정당하다면 얼마든지 보편적으로 인정된다. 친일파 재산 환수에서 본 헌재의 판례.[68] 무장 투쟁이 성공했다는 평가를 들으려면 무장 투쟁으로 한국이 일제를 무너뜨리기라도 했어야 한다.[69] 발간 당시에는 별 관심을 받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진주만 공습이 일어나자 인지도를 얻게 되었다.[70] 서재필이 창간한 독립신문은 2년 앞선 1896년 창간되었으나 주 3회 발간됐기 때문에 일간지는 아니었다. 독립신문이 일간으로 바뀐 시점은 1898년 7월로 매일신문보다 늦다.[71] 이제는 외교 업무가 너무 힘들어져서 대사 파견이 기본이 되었기에 예전만한 존재감이 안 느껴질 뿐이다.[72] 두 사건은 불과 1년 간격으로 일어났다[73] 이승만이 1941년에 미국에서 출판한 일본 내막기에서도 이 부분을 지적하면서 미국인들의 치부를 자극했다. 펄 벅은 당시 한 잡지에 기고한 서평에서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이 1905년에 수치스럽게 파기했다는, 미국인들 대부분이 모르고 있는 사실을 이승만이 지적해줘서 기뻤다'고 썼다.[74] 역대 한국 대통령들 중 어느 누구도 해군을 동원해서, 더구나 발포까지 하면서 독도 영해로 넘어오는 일본 어민들을 체포해서 잡아가두는 초강수를 둔 사람은 없었다.[75] 간혹 이승만의 반일 정책을 그저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치부하는 사람들도 있으나, 만약 그랬다면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미국 대통령이 일본과 수교를 하라고 요구를 하는데 이승만이 거절했던 일을 설명할 수가 없다. 오히려 일본과 수교를 하면서 리베이트를 잔뜩 챙겨 자신의 권력 강화에 이용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이승만이 미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일본과의 국교 수립을 강력히 반대한 일은 그의 반일 정책이 진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해석해야 옳다.[76] 창작과비평사/ 1988년/ 370쪽[77]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61~264쪽[78]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166쪽[79]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아도 대단히 정확한데, 실제로 미국 국무성 내부에는 한국을 희생해서라도 일본의 세력 팽창을 이루어내려는 친일 성향의 미국인 관리들이 상당히 많다. 이승만의 국제 정세를 보는 안목이 굉장히 뛰어났음을 보여주는 증거.[80]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70쪽[81]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2권 271쪽[82] 강준만 저/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편 3권 236쪽[83] 이승만 집권기의 한국은 미국이 경제 원조를 끊으면 당장에 나라가 망할 만큼 경제 사정이 매우 부실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승만은 미국의 제안을 거부했을 만큼, 반일 감정이 무척이나 강했던 것이다.[84] 물론 이승만을 고평가한다고 해서 모두 뉴라이트인 것은 아니다.[85] 이는 뉴라이트의 세계관 때문이다. 뉴라이트는 한국 사회에 대해 "소수의 깨어있는 엘리트 VS 다수의 무지한 대중"이라는 이분법적 세계관을 적용시키고 있으며, 특히 "다수의 무지한 대중들"은 저열한 사고관인 민족주의에 찌들어 있는 반면 "소수의 깨어있는 엘리트(이승만, 박정희 등)"는 민족주의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대중들을 지배할 권리가 있다고 믿는다. 그런데 뉴라이트가 추앙하는 소수의 깨어있는 엘리트에 속하는 이승만이 강경한 반일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을 인정하게 되면, 뉴라이트의 기초적인 세계관 자체가 심각한 모순에 휘말려 무너지기 때문에 뉴라이트들은 이승만의 반일 민족주의적인 면모에 대해 계속 침묵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다.[86] 뉴라이트 인사들이 2019년에 공동저술한 책인 반일종족주의에서는 한국의 반일 정서가 1980년대에 들어서 생겨났다거나 혹은 좌파들이 만든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으나, 이는 이승만의 사례만 봐도 얼마든지 반박이 가능한 허황된 주장이다. 1950년대를 쭉 집권했던 이승만 정권 하에 있었던 평화선 선포 같은 반일 정책이나 이승만 개인이 강경한 반공 우익이면서 반일 민족주의자였다는 사실만 봐도 뉴라이트 인사들의 주장은 터무니없는 정치적 진영 논리에 불과하다. 뉴라이트 쪽 사람들 중 일부는 심지어 한국의 독도 영유권을 부정하거나 한국이 독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불법이고 저급한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이라고 비난을 하기도 하는데, 그 주장대로라면 평화선을 선포하고 해군까지 동원해 일본 어민들을 체포하면서 독도를 지킨 이승만은 불법으로 독도를 점거한 저급한 반일 민족주의의 상징이 되어버린다.[87] 미국이 제거를 실제로 실행하지 못한 이유도 이승만에 대한 한국인들의 지지도가 워낙 높아서 제거했다간 역효과만 날 것 같아서였다.[88]존 하지는 문제가 많았는데 캘리포니아 주립대의 제임스 매트레이 교수는 미국이 그를 미군정 사령관으로 임명한 건 실책이었으며 그는 한국의 역사나 한국인에 대해 아는게 아무것도 없었고 행정경험도 없었기 때문에 정부조직을 이끄는 일에 문외한이었다고 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