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완군

 



'''조선 장조의 증손[1]'''
'''흥완군
興完君'''

'''군호'''
흥완군(興完君)[2]
'''시호'''
문간(文簡)
'''본관'''
전주(全州)
'''이름'''
정응(晸應)[4]
'''초명'''
시응(是應)
''''''
시백(眂伯)
'''양조부'''
은신군
'''양조모'''
남양군부인 남양 홍씨(南陽 洪氏)
'''생조부'''
이병원[5]
'''생부'''
남연군
'''생모'''
군부인 여흥 민씨(驪興閔氏)
'''부인'''
정경부인[A] 대구 서씨(大丘 徐氏)
정경부인[A] 순천 박씨(順天 朴氏)
'''자녀'''
1남[6]
'''생몰
기간
'''
'''음력'''
1814년 2월 16일 ~ 1848년 5월 18일
'''양력'''
1814년 3월 7일 ~ 1848년 6월 18일
1. 개요
2. 생애
3. 사후
4. 여담
5.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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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왕족. 남연군의 네 아들 중 둘째 아들로 흥녕군의 첫째 남동생, 흥인군, 흥선대원군의 둘째 형이다.

2. 생애


1814년 2월 16일 한성부에서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6대손이자 원종의 적3남 능창대군의 양7대손인 이채중(李采重)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인현왕후의 큰아버지 민정중의 4대손 민경혁의 딸 여흥 민씨이다.
왕실의 후손이었지만 종친의 대우는 그의 고조할아버지 안흥군의 대에서 끝났고 그의 가족은 단지 왕족 출신 양반일 뿐이었다. 그러나 2살 때인 1815년 12월 9일 아버지 이채중이 정조(조선)의 이복동생이자 숙종(조선)의 3남 연령군의 양손자인 은신군양자가 되어 남연군 군호를 받고 종친으로 편입하면서 이정응 역시 왕족이 되었다. 1829년 1월 1일 흥완부정(興完副正)으로 봉해졌다. 1830년에는 흥완도정(興完都正)이 되었으며 당시 죽은 효명세자[7]의 수원관을 맡았다. 1833년에 품계 소의대부(昭義大夫)와 군호 흥완군(興完君)을 받았으며 그 무렵 이름을 '정응(晸應)'으로 고쳤다.

1834년 아내 대구 서씨와 사별하고 3살 연하의 순천 박씨재혼했다. 순조 사후 산릉도감과 빈전의 대전관(代奠官)으로 참여했다. 1836년에는 오위도총부 도총관에 임명받았는데 그해 아버지 남연군이 사망하는 아픔을 겪었다. 3년상을 마친 뒤 다시 오위도총부 도총관 직을 맡았고, 1844년 10월에는 동지정사 자격으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8년 5월 18일에 한성부 자택에서 사망했다. 향년 35세.[8]

3. 사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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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완군의 묘.
조카 고종이 즉위한 직후인 1864년 7월 9일에 시호 '문간(文簡)'을 받았고, 1865년 9월 14일에는 대왕대비 신정왕후 조씨가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 판종정경(議政府領議政 判宗正卿)'으로 증직시켰다.
묘소는 처음에 충청남도 서산군 보현동(普賢洞) 인좌에 있었다. 그러다 후손들이 두번째 부인 순천 박씨가 묻힌 경기도 양주군 와부면 도곡리 산 97-1 안골[9] 금대산(金臺山)의 갓무봉 언덕으로 이장했다. 그 때 충청북도 충주에 묻혔던 첫 부인 대구 서씨의 유해도 옮겨 3명을 합장했다.

4. 여담


  • 흥선대원군이 형제들과 사이가 안 좋다는 이야기가 있다. 어느 정도는 사실이나 큰형 흥녕군과 둘째형 흥완군과의 관계는 나름 괜찮았다. 흥녕군은 흥선대원군이 9살 때 사망했으니 나쁘고 말고 할 게 없었다. 그리고 남연군 부부가 사망한 이후로는 흥완군이 나머지 형제들을 잘 챙겼다고 한다. 다만 흥완군도 꽤 이른 나이에 죽었고, 그나마 제일 오랫 동안 봐온 68세까지 살았던 셋째 형 흥인군과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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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완군 조복

5. 후손


1831년 본처 대구 서씨에게서 아들 이재원(李載元)을 얻었다. 그러나 거의 낳자마자 자녀 없이 죽은 형 흥녕군에게 양자로 보냈다. 아버지 남연군 집안의 제사를 받들 장손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였다. 그런데 흥완군은 이재원만 낳고 다른 자식없이 죽었다. 그래서 정작 흥완군 자신의 후사는 한동안 없었다.(...)
그래서 흥완군의 양자를 들여야했다. 처음에는 동생 흥선군 이하응의 장남인 친조카 이재면이 양자로 들어갔다. 그러나 1864년 1월, 이재면의 동생 이명복익종의 양자로 입적한 뒤 으로 즉위하자 대왕대비 조씨가 이재면을 다시 본가로 돌려보냈다.
그래서 또 대가 끊겼다.(...) 이재면이 본가로 돌아간 그해 8월에 실제 혈통 상으로 '''21촌(...) 조카뻘인''' 선조의 9남 경창군의 9대 종손(宗孫) 음현령 이신오(李愼五)[10]의 장남 이을경(李乙經)이 흥완군의 새 양자로 입적했다. 이을경은 이재완(李載完)으로 개명했으며 1899년 사도세자가 장조로 추존받자 황제의 4대손에 해당하여 '완순군(完順君)' 군호를 받았다. 이 후의 가계는 완순군 항목 참조.
[1] 흥완군의 양할아버지 은신군영조의 동생 연령군의 봉사손이었다. 그러나 계대 문제로 조선시대 당시에 은신군의 후손들은, '우리는 연령군의 제사를 챙길 뿐, 엄연히 사도세자(장조)의 자손'이라고 인식했고, 왕실에서도 그들에게 영조 - 사도세자의 후손 자격으로 군호를 주었다.(20세기 중반부터는 연령군을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다.) 사실 당대에 연령군의 후손으로 인정받았다면, 흥완군은 숙종의 5대손이기 때문에 군호를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자세한 것은 연령군, 낙천군, 은신군 항목 참조.[2] 군호는 인천의 옛 지명인 흥녕부(興寧府)에서 유래했다. 형제들의 군호도 마찬가지.[3] 참고로 이는 흥완군과 같은 항렬의 왕족들의 이름들도 마찬가지인데 먼저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익종, 문조)의 이름은 '영('''旲''', '''日''' + 大)'이며 철종은 왕이 된 이후 원범에서 '변('''昪''', '''日''' + 弁)'으로 개명했다. 은전군의 양손자 완평군 역시 초명은 '병('''昺''', '''日''' + 丙)' 이었다가 '승응('''昇'''('''日''' + 升)應)'으로 바꿨으며 완평군 이전의 은전군 양손자였던 경평군의 이름 역시 '호('''晧''', '''日''' + 告)' 였다. 은언군의 큰손자이며 상계군의 양자이자 풍계군의 친자 익평군의 이름 역시 '희('''曦''', '''日''' + 羲)'였고 철종의 큰 형인 회평군도 원래 이름은 원경이었는데 '명('''明''', '''日''' + 月)'로 고친 것이다. 영평군 역시 원래 이름은 '욱('''昱''', '''日''' + 立)' 이었다가 후일 '경응('''景'''('''日''' + 京)應)'으로 개명했다.[4] 여담이지만 형제들의 이름을 보면 재미있는 규칙을 찾을 수 있는데, 첫째는 흥녕군 이창응(李昌應), 둘째는 흥완군 이정응(李晸應), 셋째는 흥인군 이최응(李最應), 막내가 흥선군 이하응(李昰應)인데 이최응을 제외하고는 전부 가운데 이름자의 부수가 날 일(日)자다. 이최응의 最의 부수는 갈 왈(曰)인데, 아무래도 남연군이 이름을 지을 때 비슷한 글자를 골라서 붙인 것으로 보인다.[3][5]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5대손.[A] A B 사후 추증. 생전에는 군부인이었다.[6] 후술하겠지만 친자가 있었으나 자식없이 죽은 큰형에게 양자로 보냈다. 그러다 정작 본인의 대가 끊겨 새로 양자를 들였다.[7] 왕세자의 무덤을 '원(園)'이라고 한다.[8] (당시 나이 셈법인)세는 나이 35세.[9]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도곡1리 안골.[10] 1868년 흥선대원군이 종친 항렬자 통일령을 내리자 이신응(李愼應)으로 개명했다. 1870년 사망. 장남이 출계했기에 그의 차남이 경창군파의 종손 자리를 물려받았는데 그 사람이 정미칠적의 한 사람인 이재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