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사코 황후

 


[image] '''일본국 황후'''
'''(まさ(
마사코
'''
<colcolor=#fff> '''출생'''
1963년 12월 9일 (60세)
일본국 도쿄도 미나토구 토라노몬 국가공무원공제조합연합회 토라노몬병원
'''재위'''
2019년 5월 1일 ~ (재위 중)
'''즉위식'''
2019년 10월 22일 (도쿄 고쿄)
[ 펼치기 · 접기 ]
<colcolor=#fff> ''''''
(まさ((마사코)[25]
'''부모'''
부친 오와다 히사시(小和田恒)[26]
모친 오와다 유미코(小和田優美子)
'''형제'''
3녀 중 장녀
이케다 레이코(池田 礼子)쌍둥이1[27] (1966.07~)
오와다 세츠코(小和田 節子)쌍둥이2[28](1966.07~)
'''배우자'''
나루히토 덴노
'''자녀'''
1녀 아이코 내친왕
'''학력'''
덴엔쵸후 후타바(田園調布雙葉) 여학원 초등과[29]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 중등과
덴엔쵸후 후타바 여학원 고등과 (전학)[30]
미국 벨몬트(Belmont) 고등학교 (졸업)
하버드대학교 (경제학 / 학사)
도쿄대학 (법학 / 수료[31])학사편입학
'''이력'''
前 일본국 외교관
'''신체'''
167cm[32]
'''십이지'''
토끼띠 (계묘년)
'''오시루시'''[33]
해당화

1. 개요
5. 세간의 평가
5.1. 동정
5.2. 비난
5.3. 반전
6. 미디어물에서
7.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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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의 126대 일왕 나루히토황후.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의 어머니이자, 아키히토미치코 상황후의 큰며느리.

2. 혼인 전


결혼 전에는 부친이 국제법 전문가인 엘리트 집안 출신에, 본인도 하버드 대학 경제학부 최우수 졸업[1]도쿄대학 법학부 3학년에 학사입학하였고, 재학 중 외무고시에 초시 합격할 만큼 촉망받는 외교관이 되었다. 미국, 일본의 최고 명문대학과 외교관이라는 엘리트 직업까지 섭렵한 화려한 이력으로 결혼 당시부터 화제를 모았다.
외교관 시절에는 일본어, 러시아어,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중국어 등 총 '''7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도 상당히 유명했었다고 한다.[2] 1991년 미일 통상회담의 미국대표 전담통역 및 1992년 미야자와 총리 주최 각 국 대사 초청 오찬회의 총리 전담통역을 했을 정도이므로 사실상 통역사 레벨의 영어실력이다. 물론 황후가 된 지금도 이러한 언어 능력은 그대로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등극 이후 공무 등을 통해서 보여준 걸 감안하면, 그동안 황후가 이러한 능력을 잊지 않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을 걸로 보인다.[3]
자세한 것은 항목 참조.

3. 마사코 황후/황태자비 시절


결혼 후에는 모든 경력을 단절당하고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발휘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서 황실의 안팎에서 모함, 비난에 시달렸던 비운의 황태자비로 살아야 했다. 특히 그녀에게 가장 요구되는 것은 '아들 출산'이었지만,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 못하다가 겨우 도시노미야 아이코 공주 하나만을 낳아 눈칫밥을 먹었다.

4. 마사코 황후/황후 시절


[image]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족들과 함께 오랜 인내의 시간을 견딘 끝에, 드디어 황실에 시집온 지 '''26년 만에 황후의 자리에 올랐다.'''

5. 세간의 평가



5.1. 동정


일본 사회에서도 마사코 황태자비를 안타깝게 여기는 의견이 있다. 하지만 일본 사회가 보수성이 강하다 보니, 그녀에 대한 동정 여론이 적극적으로 전개되지는 않는 모양이다. 오히려 그녀에 대한 동정 의견을 적극적으로 피력하는 측은 외국 언론들이다. 독일과 일본의 언론인이 집필한 '''<일본 황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라는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책이 출판되어, 일본 황실을 비판하고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동정 여론을 펴기도 하였다. 이 책은 한국에서도 번역되어 출판되기도 했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전형적인 일본모순의 희생자'''로 볼 수 있다. 그나마 국왕과 국민, 의회가 충돌, 대립하고 투쟁하고 국왕이 자발적으로 왕권을 포기하여 입헌군주제, 의원내각제 등 정치 개혁이 실현되고 구습 잔재들이 상당부분 타파된 유럽군주국들과 달리[4], 일본에도 막부 정권의 몰락에서 메이지 유신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 되는 등의 정치적인 격동을 겪었으나 국가 자체가 크게 변화하거나 정치 개혁이 이루어진 적은 거의 없었다.[5] 부락민 항목에서 알 수 있듯 일본은 과거의 악습이 여전히 유지되고 있는 경우가 많으며, 자민당 1당의 장기 집권 등에서 알 수 있듯[6] 이념 성향 자체가 매우 보수적인 편에 속한다. 특히 황실은 '살아 있는 일본 전통의 상징'과 다름없다. 하지만 마사코 황태자비는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사고 방식을 지닌 전형적인 커리어우먼이었고, 애초부터 일본 황실과는 전혀 맞지 않는 인물이었다.'''
한국을 포함한 해외에서는 "황태자와의 결혼이 한 촉망받는 외교관의 일생을 망쳐버렸다"는 평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일본에서 이렇게 말하는 사람은 거의 없고 오히려 외국의 동정적 여론과 달리, 오랜 요양과 공무 공백을 문제삼아 비난받아 왔다.

5.2. 비난


특히 우익 세력들이 마사코 황태자비를 싫어한다. 진보적인 가치관으로 일본 황실궁내청과 끊임없이 마찰을 일으킨 주제에 후계자(아들)도 낳지 못했다는 것이 그 이유이며, 실제로 궁내청부터가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해 상당한 차별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에서 더 나아가, 마사코 황태자비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일관적으로 부정적으로 평가하거나 인신공격을 서슴치 않는 일본 극우도 많다. 대표적인 예로 코오리 쿠니오 전 야스쿠니 신사 구우지의 발언이 있다.
또한 한국의 엄마부대에 해당하는 일본의 중년(즉 마사코 황태자비와 비슷한 연령대) 극우 아줌마들이 이 경향이 엄청나게 강하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1) 자신과 다를 것도 없는 '평민 출신'[7] 주제에 무려 황태자에게 구혼받아 황태자비가 되어 2) 아들도 못 낳는 주제에 부부금슬은 좋아서 이혼당하거나 소박 맞지도 않고 3) 오랫동안 건강이 나빠 공무에 제대로 임하지 못해 자신의 세금을 '날로 먹으며' 4)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껌뻑 죽는 '백인들'에겐 동정적으로 평가받는 마사코 황태자비가 눈엣가시를 넘어 불구대천의 원수로 보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일웹에서 '커티시(curtsy, カーテシー)'[8]로 검색해보면 가관이다. 커티시에 대한 정보를 다룬 사이트보다 먼저 뜨는 게 마사코 황태자비의 커티시가 '키코 님, 마코 님, 카코 님' 등의 아키시노노미야 모녀들보다 못하다며 구구절절이 까대는 극우줌마들의 블로그다. 읽어 보면 내용은 완전히 며느리에게 생트집 잡는 시어머니이며, 마치 복붙한 것처럼 하는 말도 다 똑같다.
심지어 학벌에도 트집을 잡아, 하버드 대학교, 도쿄대학,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부한 학력에 대해 "외교관이던 아버지 오와다 히사시의 빽으로 입학해서 졸업했다"며 학력과 능력을 부정한다. 당연히 US 대학평가에서 탑티어인 하버드대, 옥스퍼드대와 20위권인 도쿄대를, 고작 외교관 빽으로 합격할 수 없음은 물론이다. 게다가 도쿄대일본의 모든 대학의 정점일뿐더러 일본의 국공립은 오로지 입시성적만 보기 때문에, 그런 곳을 부정이나 빽으로 입학하면 일본이 뒤집어진다. 한국에서 서울대를 빽과 부정입시로 입학했다고 생각하면 쉽다. "래드클리프 여대에 다니다가 하버드 대학에 편입학했다"고 깎아내리는 이들도 있는데, 물론 거짓 소문이다. 마사코 황태자비는 미국 벨몬트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바로 하버드 대학에 진학했다. 래드클리프 여대가 하버드 대학과 합쳐진 것은 오와다 일가가 미국으로 이사하기(1979년) 전인 1977년이고, 그 이전에도 애초에 래드클리프 여대는 '여자대학의 하버드'급 입지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사실들을 모두 싸그리 무시하고 '래드클리프'란 이름만 어디 주워 들어서 내뱉는, 전형적인 무식한 소리인 것이다.
자신들이 싫어하는 좌익과 황위 계승 문제를 엮어, "마사코 황태자비의 친정아버지 히사시가 좌익이며, 일본 좌익들의 숙원들 중 하나인 황실을 없애기 위해 외손녀 아이코 공주에게 황위를 잇게 하려 한다"고 음모론까지 펼친다.[9] 딸인 아이코 공주자폐설이 있다는 루머에서 발전한, "아이코 공주가 장애가 있고 대역(카게무샤)을 쓰고 있다"는 주장까지 하는 것은 덤.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긴 요양 문제와 아들이 없는 문제가 겹쳐졌으니, 일본 황실을 숭배하고 만세일계[10]에 집착하는 넷 우익에게는 황실의 골칫덩이로 찍힌 셈이다.

5.3. 반전


그러나 아키히토 천황이 퇴위를 결정하고 공식적으로 나루히토 황태자의 차기 천황 즉위가 선언되며 상황이 역전된다. 미치코 황후 역시 큰며느리 마사코 황태자비에게 직접적으로 힘을 실어주었고, 작은며느리 키코 비와는 공식적으로도 상당히 거리를 두었다. 게다가 아이코 공주가쿠슈인에서의 우수한 성적과[11] 거식증 논란, 후미히토키코 비의 문제점이 마코 공주의 결혼으로 대중에 널리 알려진 점, 그리고 결정적으로 황태자인 나루히토가 황위를 계승하는 것이 확정되면서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해 나쁜 소리를 늘어놓고 있던 우익들은 전부 천황 내외의 결정에 무어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된다. 건강도 이전보다 좋아져서 공무도 활발하게 하고 있는 상황이기 때문에 모두들 데꿀멍.
그리고 이때쯤부터 올라오는 기사에 달린 댓글을 보면 일본인들의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입장이 하나로 모아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모두 '몸에 무리가 안 되는 선에서 할 수 있는 만큼만 하면서 새로운 시대를 상징해 달라.'고 말한다.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점화되고 나서도 한참 동안 마사코 황태자비의 공무에 대해서는 비판적이기만 하던 사람들이, 아키시노노미야 일가의 치부가 계속 쏟아져 나오고 신 천황 즉위가 다가오자 생각이 완전히 바뀐 것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일본인들은 지금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를 보면서 자신들이 지난 10년 넘게 언론 등에 의한 거짓말에 아주 철저하게 속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궁내청&우익&주간지는 나루히토에게서 황위를 빼앗기 위해 여론 공작을 벌이며 국민 여론을 조작해왔다. 나중에 후미히토의 자녀 3남매의 부정 입학 문제가 떠오르면서 차츰 이상하다는 생각을 갖기는 했지만, 후미히토에게는 수 십년 후 황실을 짊어질 유일한 존재인 '아들' 히사히토가 있었기 때문에 다들 애써서 후미히토 일가에 대한 치부를 무시해왔다.[12] 게다가 이 당시에는 황태자 일가의 상황도 그리 좋지 못했기 때문에, 공무에 열심이고 미인인 두 공주만으로도 아키시노노미야 일가는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점수를 많이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들의 세금 문제[13]가 걸린 마코 공주의 결혼 논란이 터지고, 이에 대해 궁내청후미히토 일가가 제대로 대응을 하지 않고 사건을 계속해서 질질 끌기만 하자, 그제야 일본인들은 자신들이 완전히 속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들의 세금으로 먹고 살면서도 자신들의(국민) 여론은 완전히 무시하고 오로지 황족으로서의 자각없이 오로지 황족의 특권에 목매여 살아가는 후미히토 일가의 태도에 일본인들은 분통을 터뜨렸다. 아키히토 덴노와 나루히토 황태자로 대대로 이어진 '국민과 함께 나아가는 황족관'[14]에 전혀 맞지 않았다. 덴노를 영혼의 일부이자 일본의 상징으로 여겨오고 자랑스러워하던 일본인들에게, 후미히토 일가의 '국민 무시'와 '온갖 특혜에 대한 뻔뻔한 태도'는 분노를 사기 충분했다.
아마 생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일본인이라면, 이 일련의 사태들을 겪으면서 그동안 말도 안 되는 이유만으로 언론들에 의하여 공격을 받아야 했던 나루히토 황태자 일가에 대해 대단히 미안한 생각을 가졌을 것이다. 그리고 히사히토 탄생 후 10년 간 말도 안 되는 음해와 괴롭힘을 당해왔음에도 서로를 보듬고 사랑하면서 시련을 견뎌내고 때가 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여러가지 준비를 해두었던 나루히토 일가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15][16]
특히나 아키히토 덴노의 양위 발표와 더불어 나루히토 일가의 반격에 강력한 무기가 되었던 것이 바로 아이코 공주의 훌륭한 성장이었기에, 와병 중에도 그 교육을 전담했을 마사코 황태자비의 역량은 누가봐도 놀라웠으리라. 그리고 종내에는 아이코 공주의 덴노 즉위를 대놓고 거론하기에 이르고, 그 후사에 대해서도 우익과 궁내청에서조차 구 황족[17]과의 결혼을 통해 해결[18]하려는 데까지 이르렀다.
황태자 일가에 대한 여론을 호평으로 반전시킨 양대 요소가 양위 발표와 아이코 공주의 우수한 성장[19]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마사코 황태자비가 그간 얼마나 현명함과 인내심을 발휘해 왔는지 누구라도 알 수 있다. 여기에 아버지 나루히토 황태자의 훌륭한 책임감과 적극적인 지지, 상당한 수준의 교육 참여[20]도 큰 역할을 했다. 그 사이에서 자라난 아이코 공주의 황족다운 모습[21]과 자력으로 도쿄대학 합격도 가능하다는 두뇌명석함은 일본 국민이 그동안 황실에 원하던 황족의 기본 모습이었기에 자연스럽게 환호를 받게 되었다.
참고로 이러한 인식은, 나루히토 황태자가 즉위하면서 마사코 황후의 황태자비 시절에 대한 이야기들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생겨났다. "궁내청이 늦었지만 황후가 그동안 바라오던 본인의 해외 친선 공무에 신경을 써주게 해서 아직까지 불안정한 건강 상태를 안정케해주었으면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제법 나오고 있다.
최근엔 남편의 덴노 즉위 이후 한국매체에도 그녀의 기구한 삶을 다룬 기사들이 나오고 있다.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일본 황실에 대해 별로 관심도 없고, 경멸하고 있다. 하지만 나루히토 일가와 마사코 황후에 대해서는 (후미히토 일가와 우익보다는 상대적으로) 덜 나쁘게 보고, 마사코 황후가 황실에서 겪은 왕따와 구박에 대해서는 안타깝게 보는 시각도 간혹 있다.
마사코 황후의 성격은 남편과 마찬가지로 타인을 늘 배려하는 성격이라고 한다. 공무 중에는 동선에 있는 사람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자연스럽게 다가가 말을 거는 등의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에, 과거 극우세력들이 황태자비에 대한 흠집을 찾으려고 안달이 났을 당시에도 당시 황태자비의 인성 논란은 일절 없었다. 설사 있다고 해도 단숨에 반박당할 정도로 부실한 주간지 기사에 실린 추측성 찌라시뿐이었다.
2019년 황후가 되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국빈방문에 참석하면서 일본 국내외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남편과 함께 통역없이 트럼프 부부와 적극적으로 대화하며 편안한 분위기를 주도한 것. 남다른 외국어 실력과 외교관 출신의 매너[22]가 돋보였다. 무엇보다도 일본 국민들인 황후의 생기넘치는 모습에 놀라면서도 반기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적응장애다 우울증이다 하면서 두문불출하고 요양만 하던 사람이, 황후가 돼서 본인이 활약할 무대가 생기자마자 결혼 전 및 신혼 초기의 밝은 모습으로 부활했으니… 기사 댓글도 황후의 밝은 모습을 기뻐하며 '몸에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하고싶었던 외교에 힘써달라'는 내용이 대부분이며, '재능 넘치는 황후를 그동안 억누르기 위한 온갖 비방중상의 허위소문을 언론들에 흘려서 황후를 꾀병쟁이로 몰고가는 데 크게 기여한 궁내청 등의 잘못이 크다'는 내용도 상당히 많다.
그리고 키코 비와는 다르게 친정에 대한 논란이 거의 없다. 키코 비의 친정 식구들은 그동안 숨겨왔던 여러가지 논란들이 하나 둘씩 생기고 있다. 반면 마사코 황후의 친정식구들은 논란이 거의 없이 조용하게 지내는 편. 과거 고위 외교관으로 불과 최근까지 국제기관에서 활동했었던 친정아버지 히사시는 상당한 공격을 받았지만, 물론 그 공격 내용들이 하나같이 대놓고 허술하기 짝이 없어서 해당 기사를 믿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을 정도라서, 금방 비난을 접어야만 했다.

6. 미디어물에서


  • 김진명 작가의 소설 <황태자비 납치사건> : 이 소설의 메인 히로인으로 등장한다. 과거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비밀을 폭로하는 일환으로 마사코 황후[23]를 납치하여 일본의 산중에 구금한다. 일본으로 귀화한 한국인 목사 하야시[스포일러]와, 을미사변 당시의 시위대 병사의 후손이 합작해서 일으킨 것.
마사코 황태자비를 인질로 일본 외무성 보관고의 어떤 서류를 공개하라는 요구를 일본 정부에게 하는데, 일본 정부는 당황하며 거부. (제2차 세계대전전범들의 후손이 다수를 차지함) 마사코 황태자비의 고교시절 선배[24]인 다나카 형사가 낌새를 알아채고 을미사변 당시의 관계자들의 호적을 조사해서 범인을 특정하고 두 사람을 체포. 체포가 임박하자 대학생인 청년은 마사코 황태자비를 죽이려고 했지만, 하야시는 만류한다. "그녀는 선량한 일본인들의 대표야!"
결국, 돌입한 일본 경찰의 집중사격에 의해 그 청년은 죽고, 하야시는 체포된다. 구출된 황태자비는 도리어 그 청년을 죽인 경찰간부의 뺨을 때렸다. 나중에 나루히토 황태자가 개인적인 연줄로 이 문서를 조사해서 황태자비에게 가르쳐 준다. 한편 다나카 형사는 외무성에 압수수색의 영장을 들고 찾아가나, 이 문서는 이미 문부과학성 대신에게 옮겨지려고 한 상태. 결국 이 문서를 되찾는데 성공한다.
이 사건은 한일 양국에 엄청난 파장을 몰고 오게 되고, 원래는 사형 또는 무기징역이지만, 이 하야시를 처벌할 경우 뒷감당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일본 정부는 하야시를 한국으로 추방하는 선에서 끝낸다. 하야시는 도중에 마사코 황태자비가 작별선물로 준 도시락을 보며 생각에 잠기는 것으로 끝.

7. 관련 문서



[1] 최고 등급인 숨마 쿰 라우데(summa cum laude, 약 5% 이내)의 바로 아래 등급인 마그나 쿰 라우데(magna cum laude, 약 5~10%)[2] 참고로 스페인어중국어를 제외하고는 외교관이 되기 전에 아버지를 따라가 현지에 거주하면서 습득한 언어들이라고 한다.[3] 사실 나루히토 덴노나 딸 아이코 공주가 평상시에도 외국어 교육을 받았다는 걸 감안하면, 마사코 황후 본인도 나름대로 계속 다양한 외국어를 잊지 않기 위해서 여러모로 노력했을 것으로 보인다.[4] 대표적으로 스페인, 영국,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 네덜란드 등등. 이 나라들은 직계 왕족이 자국 평민은 물론 문제 많은 인간이나 외국인과 결혼해도 뭐라고 하지 않는다. 물론 이 '문제 많은' 것도 어느 정도의 암묵적인 선은 있으며, 외국 출신 배우자의 경우에는 황실예절과 자국의 언어는 기본으로 익혀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압박감도 은근히 심한지, 유럽 왕실에 시집 온 외국 출신 왕비/왕자비들은 남편과 시부모 왕국 나라들의 언어를 마스터하고 왕실의 법도와 예절을 배우기 위해 고군분투한다고 한다. 물론 이는 공주에게 장가 온 외국 출신 부마도 마찬가지이다.[5] 임진왜란 때와 상황이 뒤바뀐 셈.[6] 물론 비자민당 계열 야당으로 정권 교체가 2번씩 이뤄진 적도 있긴 하다.[7] 물론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말이 평민이지, 마사코 황태자비의 배경은 대단하고 마사코 본인도 하버드 유학생 출신에 외교관으로 상당한 유망주로 손꼽히던 인물이었다. 아버지도 외교관 겸 국제 판사에 할아버지는 교장, 외가는 재벌집에 일본 제국 해군 중장까지 있어서 일반적인 관용어구 표현으로 충분히 '귀족'이라 할만한 상류층 금수저 집안이다.[8] 여성이 오른쪽 다리를 굽혀 자세를 낮추며 하는, 서양의 전통적인 인사법. 유럽 왕실에서는 아직도 널리 사용되는 인사법이다.[9] 유엔여성차별위원회가 일본 여성차별 보고서에 "여성도 왕위를 잇게 하라"는 내용을 포함하려 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2018년 기준으로 국제사법재판관인 친정아버지 히사시가 자신의 국제적 영향력을 이용해서 외손녀의 덴노 승계를 위한 뒷공작을 벌였다는 말도 안 되는 말을 할 정도다. 물론 이러한 이야기는 2019년 생전 퇴위라는 초유의 사태가 성립된 이후에는 대폭적으로 줄어들었고 오히려 많은 일본 국민들이 대놓고 "아이코 공주를 차기 덴노로 올려서, 장녀 마코 공주의 결혼 문제를 비롯해서 이런저런 문제가 많은 후미히토 일가에게 덴노직을 넘기지 못하게 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10] 일본의 역대 덴노들이 대대로 부계 핏줄로 계속 이어져 왔다는 주장. 정작 학술적으로는 그거 헛소리라고 판명난 지 오래다.[11] 마사코 황태자비가 건강문제로 공무를 거의 참여하지 못하는 와중에도 무남독녀 아이코 공주를 황실의 훌륭한 재원으로 키워낸 것이, 세간의 평가를 역전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아이코 공주보다 5살 어린 히사히토 친왕과는 다르게, 아이코 공주는 학창시절 이런 저런 논란이 있었어도 우수한 성적과 부모를 쏙 빼닮은 방정한 행동과 차분한 성품 등이 그대로 보도되면서 아키히토 천황의 양위 발표 이후로는 마사코 황태자비에 대한 여론이 호의적으로 바뀌게 되었다.[12] 실제로 아키시노 일가에 대해 일본인들이 깊은 의심을 하게 된 때는, 마코 공주국제기독교대학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할 때부터였다. 입학 과정이 누가 봐도 비정상적이었기 때문에, 황족이라는 이유로 특혜를 받았다는 것이 명백했다. 그래서 일본 국민들뿐만 아니라 마코 공주의 재종고모(7촌)이자 일본 황실 최초의 여성 박사인 아키코 공주조차도 이러한 걸 두고 대놓고 강하게 비판했을 정도다. 사실 아키코 공주는 과거 '황실의 망나니'라고 불리우던 아버지 토모히토 친왕으로부터 "황족으로 태어난 이상, 공부할 거면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해라. 그래서 누구에게도 '특권으로 학위를 땄다'는 등의 딴지를 받지 않도록 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그 가르침에 따라 아키코 공주는 본인의 노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토모히토 친왕도 상당히 기뻐했고, 아키코 공주 본인도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13] 공주가 황실을 떠나 시집갈 때면 품위 유지비 등을 이유로 1억엔 가량이 지출되며, 그 이후에도 하가한 다음의 거처 경비 등에 상당한 돈이 지속적으로 지출된다. 여기에 드는 모든 비용들은 전액 일본 국민들의 세금. 따라서 일본인들은 이러한 것에 상당히 민감할 수밖에 없다. 참고로 하가한 전 여성 황족의 거처에 경비가 깔린 이유는, 과거 쇼와 덴노의 3녀 다카쓰카사 가즈코가 당한 강도 사건과 5녀 시마즈 타카코유괴당할 뻔했던 사건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 시집가서 평민이 된 공주에게도 경호를 해주는 것이다.[14] 이는 일본 헌법에 근거한 상징 덴노제에 가장 걸맞는 황족관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15]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사람의 기준으로 꼽는 특징 중 하나가 '인내심'이다. 나루히토 일가의 인내심에 비하면, 생각 없이 '덴노와 황후가 되겠다'고 날뛰며 경솔하게 행동했던 후미히토키코 비에게는, 인내심은 고사하고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할 머리도 없었다.[16] 궁내청, 주간지, 극우 세력, 후미히토 일가 등등 사방팔방에서 20여년 동안 황태자 일가를 아주 다양하고 창의적인 방법으로 돌려까고 괴롭혀 왔는데도 황태자 부부의 금슬이 아직도 각별하고 가족 간의 애착이 강한 것, 궁내청과는 적대시해도 궁내청 내부 직원들과 황태자 일가의 시종들을 잘 대우해 주며 내부에서부터 조금씩 편을 만들어놓았던 것, 마사코 황태자비의 우울증과 아이코 공주의 이지메, 생명의 위기까지 지적받을 정도로 심각한 거식증에도 불구하고 아이코 공주를 일본 내에서도 탑클래스 우등생으로 키워낸 것 등등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일을 전부 하고 있었다.[17] 1947년 신적강하 때 평민으로 강등당한 방계 황족 가문의 후예들.[18] 아이코 공주의 후사 문제가 발생하는 이유는 이렇다. 현 황실전범에 의하여 여성 황족의 자녀는 황족이 아니기에 덴노 승계 대상이 아닌데, 만일 구 황족과 결혼할 경우 구 황족의 혈통을 이어받은 거니 아이코 공주의 자녀라도 구 황족 남성의 자녀이기도 하므로 덴노 승계권이 부여될 수 있는 것이다. 즉, 이러한 조치는 현 황실전범을 대대적으로 개정할 필요없이 아이코 공주와 그 자손들을 무사히 덴노 자리에 올릴 수 있는 가장 좋은 조치인 것이다.[19] 성적뿐만 아니라 성격 등 다양한 방면에서의 성장을 의미한다.[20]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아이코 공주와 함께 시간을 보내기도 했으며, 때때로는 등교 거부를 하는 아이코 공주를 잘 타일러서, 아이코 공주가 제대로 자라게 하는 데 크게 기여를 했다.[21] 이지메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먼저 친구들과 후배들에게 다가가는 등, 상대방을 배려하는 게 몸에 철저하게 밴 부모님의 영향을 받아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모습 등이 많았다. 참고로 황태자 일가에 대한 패싱이 심해서 조그만 흠집도 크게 부각되어 공격받던 시절, 황태자 부부와 아이코 공주의 성격에 대해서는 그 '''궁내청'''조차도 칭찬할 정도였다.[22]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형을 알코올 의존증으로 잃은 탓에 을 마시지 않기에 만찬회 등에서는 보통 주스 등으로 대체하는데, 저녁 만찬에서 그에게 돌아온 건 진짜 술이었다. 그래서 트럼프가 당황해하자 옆에 있던 마사코 황후가 트럼프에게 몇 마디 했고, 그제서야 트럼프는 잔을 입에 가까이 하되 마시지는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이러한 행동은 마사코 황후의 조언이 아니었는가'라는 평가를 하였다.[23] 이 소설이 발매되던 당시에는 황태자비[스포일러] 친일파의 후손이 참회하기 위해 이번 사건을 기획[24] 픽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