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지훈

 


'''백지훈의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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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 K리그 베스트 일레븐 '''
FW
우성용
FW
김은중
MF
김두현
MF
'''백지훈'''
MF
이관우
MF
뽀뽀
DF

DF
마토
DF
최진철
DF
김영철
GK
박호진


''' 대한민국의 前 축구선수 '''
''' 이름 '''
'''백지훈'''
'''白智勳 / Baek Ji-Hoon'''
'''출생'''
1985년 2월 28일 (39세)
경상남도 사천시
'''국적'''
[image] 대한민국
'''가족'''
1남 1녀 중 둘째
'''본관'''
수원 백씨
'''포지션'''
중앙 미드필더, 공격형 미드필더
'''신체조건'''
175cm, 65kg, A형
'''등번호'''
FC 서울 - 22번, 8번
수원 삼성 블루윙즈 - 20번
상주 상무 - 20번
울산 현대 - 20번
서울 이랜드 FC - 10번
리만 FC - 20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 8번[1], 12번[2], 15번[3], 21번[4]
'''학력'''
봉래초등학교 - 풍기중학교 - 안동고등학교
'''소속팀'''
전남 드래곤즈 (2003~2004)
FC 서울 (2005~2006.7)
'''수원 삼성 블루윙즈 (2006.7~2016)'''
상주 상무 (2012~2013, 군 복무)
울산 현대 (2014, 임대)
서울 이랜드 FC (2017)
리만 FC (2018~2019)
'''국가대표'''
15경기
'''별명'''
파랑새
'''종교'''
불교
1. 개요
2. 경력
3. 플레이 스타일
4. 여담
5.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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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전 축구선수.

2. 경력



2.1. 클럽



2.1.1. 전남 드래곤즈


2003년 전남 드래곤즈에서 데뷔한 후 김남일과 함께 전남의 중원을 먹여살렸다.

2.1.2. FC 서울


데뷔 2년만인 2005년에 이장수 감독의 러브콜을 받아 FC 서울로 이적했다. 이후 재능을 인정받아 2006년 월드컵 국가대표팀 멤버로 뽑히기도 할 정도였으나[5], 당시 서울은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많아서 상대적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다. 서울 팬들은 백지훈의 홈런성 중거리 슛과 부실한 수비력, 아예 없다시피한 어시스트 능력에 학을 뗄 정도로 싫어했으며[6], 무엇보다도 얼빠를 부르는 외모 때문에 그 능력이 과대평가되었다고 이야기하며 박주영이나 정조국, 김동진, 이을용 같은 선수들에 비해서는 낮게 평가받는 입장이었다.

2.1.3. 수원 삼성 블루윙즈


그리고 2006년 당시 FC 서울 감독이던 이장수 감독이 김동진, 박주영, 백지훈과의 불화로 선수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면서 팀내에서 입지가 좁아져 있었다. 게다가 6개월 뒤에 FA가 되면 국가대표팀 미드필더를 돈 한 푼도 받지 못하고 내보내야 할 상황이었다. 결국 감독과 구단의 이해가 맞아떨어졌고, 마침 전남 시절부터 백지훈을 탐내던 수원이 15억원 이상의 이적료를 제시하자 '''선수의 동의 없이''' 구단 간 이적을 합의한다.
백지훈 측은 하우젠컵 우승을 눈앞에 두고 서울을 떠나기 싫어하기도 했으며, 이렇게 비싼 이적료로 이적을 하게 되면 해외리그 진출에 어려움이 있을 것으로 판단하여 수원 이적을 원하지 않았으나, '''수원으로 이적하지 않으면 임의탈퇴를 시키겠다는 서울의 협박'''으로 인해 월드컵 직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유니폼으로 갈아입게 된다. 관련글 관련기사
[image]
수원 팬들은 고종수김두현의 공백을 메워주며 수원의 중원에 창의성을 불어넣을 수 있는 인재라는 이유로 환영했으나, 서울 팬들은 '확실한 핵심 선수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하필이면 왜 수원이냐...'하는 심정으로 백지훈의 이적을 지켜보았다. 서정원 이적 파동 때와 달리 백지훈은 양 팀간 증오를 낳는 수준은 아니었다.
수원으로 이적한 후 백지훈은 팀의 중심으로 활약하게 된다. 2006년 반 시즌만 수원에서 뛰었음에도 불구하고 14경기 5골을 기록하며 수원 팬들에게는 기쁨을, 반면 서울 팬들에게는 혈압을 선사했다(...) 이후 2007년 23경기 6득점 1도움, 2008년 22경기 4득점 2도움을 기록한다.
서울 시절에는 팀 내에 걸출한 공격형 미드필더 히칼도가 있었기 때문에 주로 2선으로 내려가 수비형 미드필더를 맡아 장점인 공격력은 살리지 못하고 단점인 수비력 부족만 노출했던데 반해, 수원에서는 김남일, 이관우 등의 지원을 등에 업고 보다 공격적인 역할을 맡게 되며 재능을 펼칠 수 있었다.
다만 2009년부터 최성현과 주전 경쟁에서 밀리면서 출장경기 수 대비 출장시간은 줄어들어갔고, 2010년부터 벤치를 데우는 일이 많아지며 팀내의 입지가 많이 불안해졌다. 그러나 2010년 6월 차범근 감독이 사임하고 윤성효 감독이 부임한 이후부터 주전으로 출장기회가 늘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9월 22일 AFC 챔피언스리그 8강전 성남과 경기에서 무릎 부상을 입고 난 후 '''시즌 아웃''', 기나긴 재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긴 부상 기간과 불안한 입지 때문에 이적 루머에 단골로 이름을 올리고 있으나, 일단 수원에 남았다. 그러나 2011년에는 재활에 전념하느라 2011년 9월 17일 현재까지 단 1경기도 출장하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면 이관우의 사례가 다시 벌어지지 않을까 싶다. 결국 2011년은 끝내 복귀하지 못한 채 한 시즌을 통째로 까먹었고, 2012년 상주 상무 서류 전형 합격자 명단에 이름을 올리면서 상무로 입대했다.

2.1.4. 상주 상무


2012년 3월 4일, 1라운드 상주 홈 개막전에서 후반전 9분 교체로 출전하며 무려 '''547일'''만에 복귀했다. 박항서 감독은 백지훈 선수에 관해 아직 완벽한 몸상태는 아니지만 만족스럽다고 평가했다.

2.1.5. 울산 현대


2014년 1월 28일 울산 현대로 임대 이적하였다. FA공시 자격을 미취득[7]하여 아직까지 수원 소속이다. 백지훈은 이적료가 발생하는 FA지만, 울산-수원의 합의가 이뤄져 임대 이적이 가능해졌다.#
3월 8일 포항전에서는 교체로 출전해 나름대로 괜찮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새로 울산에 부임한 조민국 감독이 철퇴축구를 버리고 빠른 패스 위주로 팀 전술을 개편하기 위해 야심차게 영입한 카드였으나, 어째 영 생각대로 폼이 안올라온다 싶더니 시즌 종료후 결과는 19경기 2득점 0도움....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결국 울산은 부진한 성적과 여론을 반영해 1년만에 윤정환 감독으로 교체하는 강수를 두고, 윤정환 감독은 '''가급적 지금 있는 자원을 그대로 살려쓰는''' 특유의 운영 방침을 천명한 가운데, 백지훈은 1시즌만에 수원으로 복귀하였다 (...) [8]

2.1.6. 수원 복귀


2015 시즌에는 수원의 미드필더 자원이 워낙 얇은데다가, 김은선의 부상까지 겹치며 구멍이 커지자 자주 기용되고는 있지만 기복을 매우 탄다. 잘 하면 그냥 평범한 수준이고 못 하면 투명인간급. 권창훈과 같이 기용될 경우 백지훈 쪽이 김은선이 맡던 중원 장악을 시도하기는 하는데....김은선 수준의 미칠듯한 중원장악 능력을 기대하는 것은 무리이고, 가끔 창의적인 패스를 찔러주기는 하지만 권창훈의 탈압박능력이 좋은 편이다보니 백지훈이 공격 물줄기를 열어주는 게 과거처럼 많이 나오진 않는다. 그래도 중앙 미드필더 요원인 김은선오장은이 동시에 드러누운 상황에서 빈 자리를 메워 줄 로테이션 멤버 정도로서는 나쁘진 않지만...... 주전으로서 중용하기에는 애매한 상태의 경기력을 보여주고 있다.
2016 시즌에는 수비형 미드필더 자리에서 주로 기용되고 있다. 김은선의 입대와 이용래의 부상 후유증 등으로 볼란치 자리가 마땅치 않은 상황에서 백지훈이 대체제로 등장하고 있는 것인데, 팬들은 대체적으로 공격형 미드필더에 걸맞는 백지훈이 자신의 재능을 제대로 펼치지 못하는것 같다며 아쉬워하는 편. 결국 2016 시즌도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고 그대로 계약이 종료되었다.

2.1.7. 서울 이랜드 FC


이후 한동안 무적 신분으로 지내다가 해가 바뀐 2017년 2월 5일 서울 이랜드 FC에 입단하면서 선수 생활을 지속하게 되었다. #
그러나 2017 시즌을 끝으로 서울 이랜드 FC와 계약이 만료되었고, 재계약이 되지 않아 무적 상태로 2018시즌을 맞이하게 되었다.

2.1.8. 리만 FC / 은퇴


한동안 뛸 팀을 구하지 못하고 무적 상태로 지내다가 작년 창단된 홍콩 프리미어 리그 팀인 리만 FC와 1년 계약을 체결했다는 보도가 올라왔다. # 백지훈의 풍부한 경험을 보고 영입했다고. 이적이 성사되면서 2018~19 1년간은 홍콩에서 활약하게 되었다.
다행히 리그 적응도 잘하고 활약도 하면서 팀내 입지를 다지고 있었고 # 2018~2019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결정하였다. 2019년 10월 6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림 수원 삼성과 FC서울의 ‘하나원큐 K리그1 2019’ 33라운드 슈퍼매치에서 공식 은퇴했다. FC서울와 수원 삼성에서 뛰었고, 수원에서의 활약이 컸기 때문에 수원에서 은퇴식을 슈퍼매치에 맞춰 마련한 듯 하다.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90926/97611583/4 https://www.youtube.com/watch?v=qSqcSg1MoAM

2.2. 국가대표



2.2.1. 청소년 대표팀


2003년 말레이시아 청소년축구대회를 위해 박성화 감독이 이끄는 U-20 대표팀에 만 18세의 나이로 처음으로 국가대표로 소집되었다. 이후 2004년 일본 도쿄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평가전에서 후반 10분 결승골이자 청대 마수걸이골이 골을 넣으며 1:0으로 한국이 승리했다. 당시 한일 청소년 대표팀 상대전적이 22승 4무 3패로 압도적으로 한국이 우위에 있었지만 올림픽대표팀에 승선했던 히라야마가 버티고 있었고 원정이라는 열세에 있던터라 쉽지만 않은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 활약을 한 박주영과 백지훈은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일본 킬러'''라는 타이틀을 획득했다.
부산 4개국 청소년축구대회에서도 당당히 승선하여 주축 공격라인으로 활약하였다. 미국과 폴란드를 꺾은 데 이어 사상 처음으로 브라질과의 경기에도 승리하며 우승을 차지했다.[9]아무리 홈이라고 하지만 브라질 멤버들이 대부분 프로에 몸담고 있었고 FIFA주관 U-17, U-20 경기를 다 휩쓸었던 강팀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값진 승리였다. 물론 브라질 결승골의 주인공 박주영김진규가 언론의 주목을 많이 받았지만 잘생긴 외모와 매경기 통쾌한 중거리슛을 날린 백지훈도 상당히 찬사를 받았다.
이후 부상을 당했지만 기존에 있었던 대표팀과 클럽에서의 활약에 힘입어 말레이시아에서 열리는 아시아청소년(U-20)선수권대회 엔트리에 들게된다. 주축 선수들의 부상과 동남아시아 우기까지 겹쳐 조별예선에서 탈락위기까지 몰렸지만 박주영의 활약으로 간신히 8강 진출하게 되고 우즈벡까지 꺾으며 4강 진출을 확정했다. 이후 4강 한일전에서 백지훈은 선취골을 넣으며 일본킬러로 확실히 눈도장을 받았고 팀은 2:2로 비겼지만 연장전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끝에 승리하며 결승까지 진출했다. 결승전 상대는 중국이었는데 지긋지긋한 공한증의 역사를 중국에 다시 한번 뼈저리게 각인시키며 우승을 차지한다. 당시 성인대표팀이 성적부진과 졸전으로 많은 팬들의 질타가 있었기에 청소년대표팀의 선전과 투혼은 많은 축구팬들에게 감동과 희망을 주었다. 백지훈은 이 대회를 통해 신영록과 같이 차세대 스타플레이어라는 기대를 받게된다.
2005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세계청소년대회에서도 선발되어 공격진엔 박주영 중원엔 백지훈 수비진엔 김진규, 부동의 주전으로 뛰었다. 언론과의 인터뷰를 통해 '스위스 이기는' 심리전 3가지를 말했는데 상당히 순수하다. 물론 스위스한테 1:2로 패배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도 중거리슛은 상당히 위력적이었고 신영록의 선취골도 백지훈의 슛팅이 포문이 되었다. 이후 나이지리아전에선 인저리타임에 무각골을 넣으며 국민들에게 백지훈이라는 이름을 알렸고 그 경기와 골은 아직도 회자될 만큼 최고의 역전명경기와 역전골이 되었다. 그리고 이 경기의 감동은 정치인들까지 이용했다. 그러나 나이지리아전에 모든 걸 쏟아부는 태극전사들은 다음 브라질전에서 거짓말 처럼 패배하고 만다. 세계선수권 조별예선탈락 이후 백지훈, 박주영, 박성화 모두 세계의 벽을 넘기위해선 조직력과 체력, 투혼만으로는 안된다는 것을 깨달았고 선수개인기량 향상이 숙제라고 얘기했다.
분명 동 나이 한국 선수 중에선 최고의 미드필더이자 아시아에선 경기 운영 능력이나 중거리슛과 같은 능력은 월등히 좋은 선수였지만 세계수준에 비하면 아직 부족하다는 걸 알 수 있는 대회였다. 하지만 FIFA에서도 예비스타로 낙점할만큼 잠재력을 높게 평가했고 박성화 감독도 백지훈의 개인기량이 일취월장 발전했다고 한 점이 위안거리가 되었다. 잘생긴 외모와 나이지리아 전 역전골로 인해 검색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10]

3. 플레이 스타일


월드컵 국가대표팀에 뽑혔을만큼 공격 가담 능력이 뛰어난 미드필더이며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할 수 있다.

한편 가장 큰 단점으로 지적받는 부분은 '''기복'''. 몇 경기에서 MOM급 활약을 보여주며 큰 인상을 남기다가도 몇몇 경기에서는 경기장에서 거의 안 보이는 닌자급 활약을 보이기도 한다. 또한 잔부상 때문에 꾸준하게 출장하지 못하며, 간신히 출장해도 몸이 덜 만들어져서 활약 미진 - 몸이 만들어져서 활약 - 팬들 기대 - 부상 - 회복 - 몸이 덜 만들어져서 미진한 활약 식의 무한 로테이션을 탄다(...)
2009 시즌 이후부터는 공격형 미드필더 치곤 패스의 정확도가 그리 높지는 않다는 점 또한 단점으로 꼽힌다. 그리고 공격에 특화한 선수라 아무래도 수비 가담 능력이 좋지 않아서 백지훈을 기용할 때에는 다른 미드필더에게 수비 부담이 따른다는 한계도 있다. 그나마 2015년 들어서 중앙 미드필더로 출장하면서 수비 가담에 잘 참여하기는 하지만 안드레아 피를로사비 알론소같은 레지스타들처럼 3선에서 패스로 경기를 풀어가지 못하고 중원장악력이 우수하지도 못하다보니 2015년부터는 다소 계륵같은 위치에 있었다.

4. 여담



5. 관련 문서


[1] 2005 FIFA 세계 청소년 축구 선수권 대회, 2010 나이지리아전[2] 2005 동아시안컵 [3] 2006 FIFA 월드컵 독일 [4] 2006 겨울 전지훈련[5] 주전은 아니었다. 월드컵 직전 가나와 벌인 평가전에서 마이클 에시엔에게 지우개질을 당하면서 현대 축구에서 공격특화 공미가 어불성설임을 처참하게 증명했다 (...)[6] 2년간 37경기 3골 0어시스트.[7] 2005년 이전 K리그 입단한 선수로 전 소속팀 수원과의 계약기간 내에 50% 이상 출전 경기를 소화하지 못함.[8] 조민국 감독을 깔때 가장 많이 쓰이는 말이 '마스다 거르고 백지훈' 이다...[9] 당시 상대전적은 0승 6패, 더더욱 97년도에는 3:10으로 졌었다.[10] 링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