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준명당

 


1. 소개
2. 이름
3. 역사
4. 구조
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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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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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
德壽宮 浚眀堂
덕수궁건물이다. 석조전의 동쪽, 중화전의 서북쪽에 있으며 즉조당과는 복도로 이어져있다.
현판글씨는 의정부찬정 박제순이 썼다.#[1]

2. 이름


‘준명(浚眀)’ 뜻은 ‘다스려 밝힌다’, 또는 ‘다스리는 이치가 맑고 밝다’이다. 《서경(書經) - 고요모(皐陶謨)》 편에 나온 구절인 “날마다 세 가지 덕을 밝혀, 밤낮으로 소유한 집을 다스려(浚) 밝힌다(眀)."에서 따왔다.#
특이하게 ‘명’자를 흔히 ‘밝을 명’자로 쓰는 ‘明’이 아닌 ‘眀’자로 썼다. 얼핏 보면 잘 구분이 안가지만 ‘明’에서 ‘해 일()’ 이 아닌 ‘눈 목()’이 들어가있다. ‘明’과 모양만 다른 같은 글자이며, ‘밝게 볼 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를 두고 여러 설이 있다. 그 중 일제가 '明'이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眀'을 대신썼다는 주장과 반대로 일본('''日'''本)을 싫어한 대한제국 정부에서 '日'이 들어간 '明'대신 '眀'을 썼다는 이야기가 있다. 결론을 말하면 '''둘 다 낭설이다.''' '眀'은 '朙'의 이체자이며 엄연히 대한제국 이전부터 쓰던 한자이다. 진짜로 '明'이 마음에 안 들었다면 창경궁에 있는 명정전은 물론 다른 전각들의 편액에 들어간 '明'을 모조리 갈아치웠을 것이다. 이런 거짓 정보에 속지 말자.

3.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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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운당#
준명당은 덕수궁건물들 중에서 창건 시기가 늦은 편이다. 기록그림에 의하면, 1904년(광무 8년) 이전에는 현재 준명당 자리에 경운당(慶運堂)과 덕경당(德慶堂), 그리고 관명전(觀明殿)이 있었다. 경운당의 창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기록 상으로는 1901년(광무 5년) 2월 3일 자 《승정원일기》에 처음 나타난다.#
준명당과 즉조당이 붙어있는 지금과 달리, 경운당이 있던 시절에는 경운당과 즉조당[A] 사이에 행각을 두어 영역을 구분하였다. 고종은 경운당에서 주로 전배하거나# 진찬을 열었다.# 이후 같은 해 7월#에서 12월 사이에 이름을 덕경당으로 바꾸었으며# 1902년(광무 6년) 10월에는 관명전으로 개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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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명전을 그린 그림. 왼쪽이 관명전, 오른쪽이 즉조당, 동남쪽 하단이 석어당이다.#
이름을 바꾸면서 건물도 새로 지었다. 즉조당[A]과 덕경당 사이의 행각을 헐어 두 건물을 한 영역에 두었다. 또한 건물도 정면을 9칸으로 늘리고 용마루에 취두, 추녀마루에 잡상도 설치하는 등 전보다 훨씬 큰 규모로 지었다. 이런 변화는 진연 장소의 격을 높이고, 공간을 넓혀 진연을 효율적으로 하기 위한 것이었다.#
1904년(광무 8년) 경운궁 대화재로 불탔고 직후 복구하였다. 재건하면서 이름을 준명당(浚眀堂)으로 바꿨으며 건물도 관명전 시절보다 작아지는 등 전보다 격을 낮추었다.[2] 즉조당과 통하는 복도도 이 때 지은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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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 앞에서 친구들과 함께 한 덕혜옹주(주황색 원 안)
일제강점기 초에는 고종이 외동딸 덕혜옹주를 위해 만든 유치원이 되었다. 1919년 고종 승하 후 1933년 일제궁궐 공원화 계획으로 많은 덕수궁의 전각이 헐렸음에도 살아남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4. 구조


  • 장대석을 3벌대로 쌓아 기단을 구성하고 기단의 상부는 전돌로 마감하였으며, 정면에 4벌짜리 계단 하나를 길게 두었다. 기단의 동쪽 측면은 기단 자체를 계단식으로 쌓았으나 서쪽 측면은 그렇지 않다. 그리고 그 위에 네모난 주춧돌기둥을 쌓아 건물을 올렸다. 지붕은 팔작지붕, 처마는 겹처마로, 공포는 초익공 양식이다. 용마루와 내림마루, 추녀마루는 기와를 쌓아 마감하였으며 용두를 올렸으나 잡상은 두지 않았다. 단청은 모루단청으로 칠하였다.
  • 정면 6칸, 측면 3칸으로 동북쪽에 덧대인 방 4칸을 더해 총 22칸이다. 정면 기준 제일 왼쪽(서쪽)의 1칸은 온돌방이고, 그 옆에 2칸이 대청, 그 다음 온돌방 1칸, 마지막으로 제일 동쪽에 마루 1칸이다. 앞면과 대청 뒷면의 가장자리 칸에는 툇마루가 깔려있으며 동북쪽 4칸짜리 방은 온돌이다. 대청의 천장은 우물반자로 마감하고 ‘복 복(福)’자를 써넣어 황실의 안녕과 행복을 기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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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
  • 왼쪽으로부터 2 · 3 · 4번째 칸은 대청으로 통하는 현관이다. 2 · 3번째 칸은 대청과 바로 통하나 4번째 칸은 온돌방이라 문선과 을 둔 으로 막혀있다.
  • 준명당 남쪽 기단의 가장자리에는 몇 개의 구멍이 파여 있다. 준명당이 덕혜옹주가 다니던 유치원일 때, 행여 아이들[3]이 뛰어 놀다가 떨어져 다칠 것을 우려한 고종의 배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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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명당 난간의 구멍#
  • 준명당 본채와 동북쪽 온돌방이 만나는 부분에 쪽문이 있다. 쪽문을 들어서면 마루가 나오고 누마루 동편에 즉조당으로 갈 수 있는 복도가 있다.
  • 서쪽의 온돌방은 정면 1칸, 측면 2칸의 총 2칸이다. 동온돌은 정면 2칸, 측면 2칸의 총 4칸으로 중간에 기둥을 두고 기둥의 동, 서, 남쪽으로 문지방을 두었다. 다만 동온돌의 북쪽 2칸과 동북쪽 온돌의 서남쪽 방은 서로 트여 ‘」’ 자 평면을 이룬다. 동북온돌 4칸 중 동남쪽 방은 다른 방과 문지방으로 나누었고, 나머지 칸은 서남쪽 방을 제외하고 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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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 좌측 부터 서온돌, 동온돌, 맨 아래는 동북온돌
  • 바깥 창호의 경우, 대청 툇간(退間)에는 띠살 창호를 달고 위쪽에 빗살로 된 교창(交窓)을 달았으나 정면의 온돌방 바깥 칸과 뒷면의 가퇴 부분은 정(井)자 살이다. 실내 창호의 경우 대청에서 뒤로 나가는 문짝은 화려한 아(亞)자 살이고, 온돌방의 창호는 전부 용(用)자 살이다. 다만, 동, 서 양 온돌방에서 뒷면의 툇간으로 나가는 은, 가운데는 정(井)자 살로, 위와 아래는 용(用)자 살로 서로 다르다.

5. 여담


  • 문화재청에서 2016년 이후 3월 말 ~ 4월 초 의 1주일 가량을 준명당즉조당, 석어당, 중화전, 함녕전 등 덕수궁의 주요 전각 내부를 개방하였다.# 해설자의 인솔 하에 단체관람을 했으며 덕수궁 홈페이지에서 예약을 하고 가야했다. 2020년에는 코로나 19 사태로 진행하지 않았다.

[1] 을사오적의 그 박제순 맞다.[A] A B 당시엔 중화전이었다. 1902년 새 중화전 건립 후 즉조당으로 환원.[2] 1904년 4월 13일(음력 2월 28일), '''대화재 바로 전날'''에 고종이 관명전에서 신하들을 만났다는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있다.# 이를 보아 준명당은 화재 전까지 존재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3] 덕수궁 유치원에 덕혜옹주만 다닌 것은 아니었고, 신하들의 자녀들도 같이 다니게 하였다. 양반가의 딸들 중 덕혜옹주 또래의 아이들을 원생으로 모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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