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도날드 할머니
1. 개요
본명은 권하자(1940 ~ 2013). 서울특별시 정동 등의 맥도날드 매장에서 매일 밤을 지새웠기 때문에 '맥도날드 할머니' 라는 별명이 붙었다고 한다.
2. 과거[2]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하였다. 형제들 중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하였다고 하는데, 대학에 진학할 당시 아버지의 사업 실패로 가정 형편이 무척 어려워서 셋방살이를 하는 형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빚까지 져가며 등록금을 냈다고 한다. 부모가 얼마나 금지옥엽으로 키웠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
권하자가 이렇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그녀가 8남매 중 7번째였는데 바로 위인 6번째 형제가 죽은 후에 어렵게 얻게 된 자식이라 그렇다고 한다. 여동생은 "완전히 (언니가) 공주로, 어머니가 시녀로 살았어요."라고 표현하고 있었다.
권하자의 여동생은, 그때 자신은 직장에 다니면서 스스로 일해서 결혼을 했다고 토로하면서 부모에게 언니와 심한 차별대우를 받은 것이 억울하고 성격도 맞지 않기 때문에 '''언니와는 보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여동생은 기자들과의 대화에서 "내가 피를 나눈 자매로서 이런 얘기하기는 뭐하지만, 지금도 난 언니가 내 앞에 나타나는 게 두려워요" 라고 말했다.
1959년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에 입학[3] 했고, 이후 졸업까지 했다.[4]
이후 그는 주일본 대한민국 영사관에서 3년을 근무했고[5][6] , 이후 1976년부터 1991년까지 대한민국 외무부 유엔 담당 부서에서 15년을 근무했다.[7] 18년간 외교부서에서 근무한 것이다. 주일 한국영사관 3년 근무 이후, 외무부 유엔부로 발령된 것인지 아니면 주일영사관을 그만두고 다시 대한민국 외무부 에 입사해서 근무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한 TV 취재프로그램에서는 자신이 주일영사관에서 3년 근무한 것을 밝혔다. 그런데 어떤 이유인지 주일영사관 근무경력은 언론사 보도 내용에는 빠진 기사들이 대부분이다.
그가 외무부에서 근무한 것은 확실하다. 그러나 그가 정식 공무원이었는지 혹은 계약직이나 일용직 등 기간제근로자였는지 여부는 알려진 것이 없다.
권하자는 결혼한 적이 없는데, 권하자의 어머니가 워낙 눈이 높아서 생전에 계속 "더 좋은 사람이 나타날 것"이라면서 결혼을 막은 것이 원인이라고 한다. 실제로 죽는 순간까지도 권하자는 자신과 결혼할 사람은 '''국가의 지도자급'''이어야 하고 1주일에 1번 '''호텔 사우나에서 목욕할 정도'''여야 한다고 말했다.[8]
외무부 시절 동료들의 말에 따르면, 외무부에서 근무하던 1970~1980년대에도 '''어묵을 사먹거나 사탕을 사도 꼭 백화점에서만 샀다'''고 할 정도로 사치가 심했다고 한다.
3. 노숙 생활
어떤 경위로 몰락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연락 등이 단절되었고 주소지도 불명하게 되었다.
2005년 무렵부터 몇 년 동안이나 24시간 영업을 하는 맥도날드 패스트푸드점, 커피숍, 교회를 오가면서 지인이 보내주는 약간의 돈으로 생활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주로 고급 커피만을 마시고 살았다고.
2010년 12월 12일 가수 겸 생명운동가 이광필이 이 할머니의 사연을 널리 알리고 돕기 위해 인터뷰 영상을 작성하여 유튜브에 올리고 신문기사가 나는 등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이씨는 2005년에 자신이 운영하던 커피숍에서 맥도날드 할머니를 5개월 가량 쉬어가게 한 적이 있는데, 그 뒤로 맥도날드 할머니가 가게에 오지 않게 되어 도와주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아쉬웠던 차에 11월에 우연히 할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어 안타까운 마음에 할머니의 사연을 알리고자 이런 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9]
사실 이 할머니는 그쪽에서는 나름 명물이자 악명이 높았다고 한다. 매점 직원들과 손님들에게도 자주 행패를 부려서 커피 전문점 주인들이 합의하고 가게 내에서 못 자게 했었다. 잘 하면 긴급출동 SOS 24에 출연할 '''뻔'''했는데…
방송을 보고 외무부 시절 후배와 지인, 고등학교 동창들이 찾아와 거주지를 마련해주려 하는 등 도움을 주려 했으나 곧 백마 탄 왕자님이 오시니 도움을 거절했다고 한다(후배가 서울 양재동에 산다고 하니 동네가 마음에 안 든다면서 그 집으로 가지 않고 용돈만 받았다.).
3.1. 지인의 도움 거부
고교 동창 및 전직 외무부 직장동료 등의 지인들은 할머니가 편안한 노후를 보낼 수 있도록 거처와 함께 일자리를 제공하고 나섰다. 그런데 할머니는 이 모든 도움의 손길을 거부했다. 자신은 자기의 방식대로 남은 생을 이어가겠다고 했다.[10][11] 생계가 될 수 있는, 약간의 월급이나 봉사료 등이 제공되는 일자리를 스스로 거절한 것이다. 생계가 될 자리를 스스로 걷어찬 것, 자신이 선택한 것이기에 타인이 동정할 필요는 없다.
3.2. 논란
그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 '그 사람'을 만나고 싶어요. 이제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사람을 맞아야 하는데, 아무데나 몸을 누일 수도 아무거나 먹을 수도 없지요[12] "라고 밝혔다.
그의 여동생은 “언니는 하도 눈이 높고, 완전히 공주 같아서 백마 탄 왕자가 나타날 줄 알고 그렇게 기다리다가 결혼도 못했다”고 밝혔다.[13][14] 상술했듯 그의 여동생은 부모로부터 손 벌릴 생각도 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스스로 열심히 일해서 번 돈으로 스스로 결혼까지 해냈고 그 대가로 안정적인 인생을 얻은 사람이다. 성격 차이가 아니라 인간적인 시각에서도 본인의 언니가 곱게 보일 리가 없다.
스스로 생활고를 선택했고 그 결과를 스스로 감당한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결과를 자신이 감당한다면 타인이 왈가왈부할 문제가 못 된다. 그렇다면 누구도 그를 비판, 조롱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그는 마지막에도 자신을 구해줄 누군가가 온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인터넷과 오프라인에서 그를 비난하는 여론이 조장된 이유이기도 하다.
호텔도 그냥 호텔은 안된다. 고급 호텔이어야 된다고 밝혔지만 그는 스스로 그 호텔에 들어갈 수 있는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고급 호텔에 들어가기 힘들더라도 그는 일을 해서 소득을 얻고 그 소득을 모았어야 했다. 자기가 돈을 벌어서 고급호텔에 들어간다면 누구도 그를 비판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그는 고급호텔은 커녕 일반호텔에 들어갈 비용도 스스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스스로 "어렸을 때 곱게 자랐다. 아버지가 성공한 목재 사업가라 시집도 안 가고 부모님 품에서 어려움 없이 살았다”면서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몰라서 죽느냐 사느냐를 고민한 끝에 필사적으로 기도하기 시작했다[15] " 고 밝혔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니 현실적으로 아무 것도 몰라서 고민했다고 스스로 밝혔지만 그 고민을 어떤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는 것도 문제점.
어느 언론 취재진이 떡국을 대접하고 싶다 하니 시시한데 가서 먹고 싶지 않아, 지하 1층 같은데 가서 먹고 싶지 않다고 했다. 자신에게 맞지 않는 음식이라면 괜찮다고 사양할 수도 있고, 다른 음식은 없느냐고 거절할 수도 있다. 이 언론인이 할머니에게 대접해야 될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생면부지인 남에게 고급 음식, 값비싼 음식을 요구했다. 이 언론인이 수용했으니 다행이지만, 타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권리는 누구에게도 없다.
4. 언론 보도
대신에 같은 방송국의 휴먼다큐인 2010년 12월 24일에는 SBS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에서 사연이 방송되어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모으게 되었다. 2011년 1월 14일에는 같은 프로그램에서 좀 더 자세한 취재를 하였다.
1차 방송에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맥도날드 할머니의 본명은 권하자라고 한다. 권하자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불어과를 졸업했으며, 주일본한국영사관에서 3년 근무했다. 이후 1976년부터 1991년까지 외무부(현재의 외교부)에서 공무원으로 일했다. 당시 메이퀸으로 뽑힐 정도로 미모가 출중했다고 한다.
또한 늘 가지고 다니는 쇼핑백에는 영어 신문이 가득 차있었는데, 할머니는 이 신문을 막힘없이 술술 읽을 정도로 영어 실력 수준이 전문가 수준이였으며 프랑스어도 상당히 수준급이었다고 한다. 한마디로 말해서 엘리트. 또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말하는 보그체를 구사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2차 방송에서 공개하기를 외무부에서 퇴직한 뒤에 어떻게 지내왔는지 상세한 것은 불명이나, 동사무소의 기록에 의하면 2005년 1월 24일에 주민등록이 말소되었고, 현재 국내에 권하자의 가족[16] 가운데서는 여동생이 유일하게 남아있었다.
5. 반응
할머니가 가난한 형편에도 불구하고 제작진이 지원을 해주자마자 택시를 타고 호텔 사우나에 가고, 비싼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를 썰고, 소갈비 등 고급 음식을 선뜻 주문하는 등 사치스러운 일을 하며 돈을 탕진했다. 또 설날을 맞아 제작진이 떡국 한 그릇을 대접하겠다고 하자 대뜸 자신이 아는 종로의 한식집을 가자고 했으며, 찾으러 가는 길에서도 제작진에게 잔심부름을 시키고, 한식점이 이전해서 찾기 어렵자 신경질을 내다가 마침내 찾아간 한식집이 지하로 이전한 것을 알고는 '시시한 곳에서 먹고싶지 않다'며 역정을 내는 등 안하무인의 행동을 서슴치 않았다, 더불어 버스, 지하철 같은 대중교통 기관을 20년 이상 이용한 적 없다는 발언 등을 하였다.
추가로 기자와 대화할 때의 태도도 대단히 일방적이고, 자기 생각에 안 맞는 말 같으면 기자의 말을 중간에서 끊어버리며, 기본적인 소통에도 문제가 있어 보였다. 핵심적인 내용에 가려지긴 했지만 기자가 할머니의 짐에서 뭔가를 꺼내려 하면서 물어보자, 기자의 손을 확 뿌리치면서 "이건 내 비밀"이라고 못 건드리게 하는 통에 기자를 당황스럽게 만들기도 했다. (누가 편집한건지 모르겠지만, 일반적으로 남의 물건에 손을 대면서 끄집어 내면 누가 좋아하나.) 보여주기 싫은 것일 수도 있지만 대번에 그런 행동을 보인 것을 본다면 기본적으로 대화하는 데 있어서 고집스러운 성격일 가능성이 많다. 거기에 자기만의 세계에 갇혀있는 모습도 있었다. 물론 잘 살다가 갑자기 망한 사람들이 이런 비슷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딱히 깔 것만은 아니지만... 할머니 자신이 현실을 보지 못하면 상황을 개선할 수도 없다.
사실 긴급출동 SOS 24와 달리 이 방송에서 '''훈훈한 휴먼다큐'''로 제작하려고 했으나, 당사자의 안하무인과 황당함 때문에 결국 그 주제를 제대로 구현하지 못하고 할머니 자신의 실상을 까발리게 되었다. 결국 미모 화제만 언론에서 실어주는 형편. 말하자면 방송 컨셉을 처음부터 잘못 잡은 대표적인 경우. '다큐가 아닌 솔루션 형식으로 갔어야 했다'는 말이 많았다. 이 할머니의 경우는 그 뒤에 나온 화장실 3남매[17] 의 아버지가 보이는 모습과도 꽤 유사한 상황이다. 역시 나름 잘 살던 가장이었지만 사업이 망한 뒤 현실을 인정하지 않으려 하는 모습이 꽤 유사하다.
'방송사에서 흥미 위주로 개인의 사생활을 지나치게 캐는 것이 불쾌하다' 는 반응도 있었는데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나 긴급출동 SOS 24나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도 마찬가지이니 뭐라고 하기는 어렵다. 사실 상황이 저렇게 되면 이미 '개인의 사생활'이라기보다는 '사회문제'에 더 가깝다. 패스트푸드점에서 노숙하면서 사는 것을 제대로 된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2011년 2월 이후 한동안 언론보도가 나오지 않았지만, 각종 커뮤니티에서 맥도날드 할머니를 봤다는 사람들의 말에 의하면 여전히 기존의 자기 패턴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18] 일반인들이 설득하긴 힘들겠고 전문가들이 나서서 설득을 해야 할 듯. 아울러 후속 방송이 필요하긴 한데 이 할머니의 비정상적인 생활과 행동들을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진행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다른 자잘한 개인 문제 이런 거 떠나서 고령인 데다 저 생활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경우 갑자기 건강 악화가 올 수도 있는 문제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이 나선다고 해도 쉽게 설득하기는 어려울 듯. 긴급출동 SOS 24에서 내로라 하는 전문가들이 나서도 설득하는 데 진땀 빼는 광경이 자주 벌어지는 걸 보면 이해가 갈 것이다. 맥도날드 할머니 사연도 사실 긴급출동 SOS 24에 나왔어야 한다는 의견도 많았다.
방송을 탄 2011년 1월 이후 5월까지 전혀 변화가 없다. SBS에서는 한 번 이 문제를 다뤘다면 끝까지 해결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너무 소극적인 방법을 쓰는 거 같은데 긴급출동 SOS 24를 방송하던 때처럼 더 적극적인 전문가의 개입이 필요하다. 할머니의 지인들이나 후배들은 심리상담가나 전문가가 아니기 때문에 한계가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6. 논란
'왜 쉼터에 안 가냐'는 댓글들도 많았는데 이건 무책임한 소리일 수 있다. 제법 노숙 생활 산전수전 겪었다는 일명 왕고 노숙자들도 쉼터를 기피하며 질색까지 한다. 쉼터에서 워낙 통제가 심한 데다가 이런저런 문제 때문에 거칠다는 소리를 듣는 남자 노숙자들조차 기피하며 들어간다 해도 얼마 못 가 제 발로 나가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실제로, 모 신문과 인터뷰에서 쉼터 입소 얘기 나오자마자 할머니가 질색을 하면서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곳이다'라고 못을 박았는데 이건 할머니를 비난만 할 것은 아니다.
거기에 맥도날드 할머니의 경우 70살이 넘은 고령인데 과연 쉼터로 가게 했을 경우 적응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할 듯하다. 이런저런 사정 제껴두고 노숙자들 기준으로 보면 엄연히 할머니는 약자이다. 남성 노숙자들 사이에서도 나이는 별 소용 없고 주먹 잘 쓰는 순서대로 서열 정해지는 거 보면, '왜 쉼터에 안 들어가냐'고 하는 소리는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는 것과 같다. 고령의 노숙자들을 상습 폭행과 구타에 갈취까지 하는 젊은 노숙자들이 많다는 걸 잘 생각해두자.
그렇다 해도 자신의 집에 같이 살자는 후배의 제안을 '동네가 별로'라며 일언지하에 거절하고, 후배들이 준 돈으로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고 택시를 타는 등 자기 자신은 고급스럽게 산다고 인식을 하는 듯한데, 제3자의 눈으로 봤을 때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게 문제다. 실제로 할머니의 코트는 시커멓게 때가 탔으며, 머리를 오랫동안 손질하지 않아 코트 밑까지 머리가 자란 게 보일 정도였다. 후배의 권유대로 그 집에 살면서 자유로운 생활을 누릴 수도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있다.
그러나 이 할머니는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지인이라도 오래 돌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혈연이 이어진 친 여동생도 질색하는 사람을, 후배라고 제대로 돌볼 수 있을 리가 없다. 물론 형제자매와의 사이가 남보다 못하고 그로인해 형제자매보다 차라리 쌩판 모르는 사람을 더 신뢰하는 사람도 적잖게 있지만 이렇게 누가 봐도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얘기가 다르다.
전문가들이 나서서 설득을 해야 한다는 의견이 많은 것도 이 때문이다. 한편 당신이 궁금한 이야기 PD는 지속적으로 노력해서 해결하겠다고 했다. 그렇긴 한데...
6.1. 할머니는 왜 그랬을까
이 할머니를 임종 때까지 보살핀 건 한국인도 아니고 외국인이었다는 사실 때문에 '같은 한국인은 이 할머니를 비난하고 놀려대고, 정작 그녀를 끝까지 도와준 건 외국인이냐'며 반성이 필요하다는 반응도 있었다. 하지만 오히려 도와주려던 사람이 '''외국인이었기에''' 반성에는 재고의 여지가 있다. 할머니의 성격 상 자신의 '''이국에 대한 호감'''을 충족시켜줄 '영어로 말을 거는 외국인'의 도움만 호의적으로 받아들였다는 해석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권하자 할머니는 그 동안의 적극적인 지원을 손수 극구 거부했고, 이 할머니는 가족을 너무 괴롭혀서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다.
권하자는 악질적인 행동을 반복하다 가족에게 버림을 받았음에도, 도와주겠다는 사람들은 많이 있었고 실제로 권하자가 이들의 도움을 받아들이려 했다면 충분히 안락하게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었다. 방송에서도 나왔지만 권하자의 외교부 후배가 자신의 집에서 같이 살 것을 제안했다, 하지만 권하자는 고맙다는 말도 없이 바로 집의 위치를 물어본 뒤 '그 동네(양재동)는 별로'라며 딱 잘라 거절했다.
권하자는 도움을 주려던 사람들을 외국인 빼곤 모두 거부했다. 그것도 누가 협박을 했거나 무슨 정신적 트라우마가 있거나 한 특수한 상황이 아닌, 순전히 자의로 모든 도움을 직접 거부했다. 단순히 도움만 거절한 것이 아니라 맥도날드의 직원들과 손님들에게 행패를 부릴 정도였다.
맥도날드가 외국계 기업이고 자신을 내쫓지 않기 때문에 그나마 그곳에 거처했을 가능성도 있다. 누추한 할머니가 품위를 그렇게 중요시 하면서 맥도날드에 머물러 있다는 게 아이러니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지금이야 한끼 3천원이지 처음 생길 88년도, 권 할머니가 젊었을 당시 맥도날드는 서민층 아이들은 생일때나 파티하러 가볼 수 있는 나름 고급 식당이었다. 굳이 24시간 하는 다른 많은 업종들 내비두고 밤을 지새러 찾았던 가게 리스트에 카페, 교회와 더불어 맥도날드가 포함된 것은 결국 그나마 손 닿는 범위 내에서라도 허영을 채우려 했던 것.
할머니는 약 20년 간 한국 맥도날드에서 노숙을 하였는데, 이런 환경에서 영어의 사용 빈도는 높을래야 높을 수 없다. 하지만 할머니는 긴 노숙 생활을 했음에도 습관적으로 한국어와 영어를 섞어서 사용했고, 굳이 영어로 된 신문을 읽는 등 서양 문화를 의도적으로 많이 접하고 과시하려 했다. 프랑스 외교 일을 했었던 엘리트 경력이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미련과 자아 정체성을 포기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해석할 수 있다.
할머니의 말투를 들어보면 품위를 유지하려는 모습이 들린다. 좋게 말하면 엘레강스한 말투고, 나쁘게 말하면 '홍홍홍' 스러운 말투다. 보통 할머니들 말투는 절대 아니다. 남들이 깨뜨릴 수 없는 강한 허영심을 가진 할머니로 보인다. 한마디로 극한의 공주병을 앓다 간 할머니라 할 수 있겠다. 자기애성 성격장애도 참고.
7. 사망
이후 2013년 5월 29일, 서울역 노숙자 다시서기 지원센터에서 쓰러진 채 발견되었고, 국립중앙의료원으로 후송되어 검사한 결과 암 말기로 밝혀졌다. 이후 2013년 7월 12일 송파구 새희망 요양병원에서 투병 생활 중에 세상을 떠났으며, 무연고 변사자로서 화장되었다고 한다.(관련 기사) 참고로 권하자는 무연고 변사자이기 때문에 다른 무연고 변사자와 마찬가지로 묘지에 묻힐 수 없고 무조건 화장해서 봉안당 안치 혹은 산이나 바다에 뿌려진다.[19]
언론사 등을 통해 2013년 10월 14일 이 할머니의 임종을 지켰던 외국인과의 인터뷰 기사가 올라왔다. 한국에서 영어강사로 일하는 캐나다 여성인 스테파니 씨는 우연히 할머니와 대화하게 되면서 서로 절친해졌고, 만남을 지속하며 풍부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고 한다. 할머니의 긴 머리를 잘라주기도 했다고. 또한 몸이 편찮아 보이는 할머니를 설득해서 보호소에 가시도록 도와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할머니가 임종 직전에 그녀에게 "'''이제 당신이 제 유일한 가족이군요.'''"라고 했던 말이 잊히지 않는다며, 그녀가 과거에 안주하려고 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를 단순히 정신이상자로 치부해서는 안 되며 그녀 또한 자신에게 도움을 준 소중한 친구였다고 말했다.(관련 기사인터뷰)
한편 이광필 역시 2013년 10월 10일 마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진심으로 애도를 표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이전 행보를 기억하는 대부분의 네티즌은 언플이라며 달갑지 않아했다.
8. 그 외
2011년 7월 31일자 보도에 의하면 처음 이 사연을 방송에 알렸던 이광필을 우산으로 폭행해 왼쪽 눈을 실명시킬 뻔했다고 한다. 우산으로 때린 것도 모자라 우산 꼭지로 정면으로 눈을 찔렀다고. 하지만 이광필은 법적 조치를 취할 생각은 없고, 눈 치료가 끝나는 대로 할머니를 또 돕겠다고 한다. 이광필의 증언에 따르면 실제로 옷을 가져다줬을 때 할머니에게 욕을 먹기는 했는데, 할머니가 욕을 먹게 될까봐 사건 당시에는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눈의 상태가 안 좋아서 시력 회복이 어려울 정도라고 한다. (#)
하지만 할머니의 입장에 따르면 할머니는 아무 이유 없이 옷을 입으라고 고집을 부리는 이광필이 무서워서 장소를 옮겼지만 이광필 씨는 계속 따라왔고, 이광필이 자신의 팔목을 잡자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마음에 우산을 휘둘렀지만 그를 다치게 한 적은 없다고 한다. 당시의 목격자들도 할머니의 진술을 확인해줬다.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인터넷상에서 '과연 그 할머니를 도와주는 게 옳은가'라는 의문과 더불어 언론의 보도 태도 등지에서 논쟁이 일었고, 설상가상으로 이광필이 하리수의 트랜스젠더 사진전 참가에 대해 음란하다며 하리수 씨를 음란물 유포죄로 고소한 것 때문에 네티즌들이 이 씨의 딸인 이나비의 미니홈피에 악플을 마구 올리는 사태가 발생하자 악플러들을 즉각 고소했고, 이후 2011년 8월 11일에 자신에게 악플을 단 1,200명의 네티즌들을(청소년 포함) 악플 삭제 여부와 상관없이 악플들을 미리 캡처해 놓고 형사고발과 민사소송을 동시에 진행해 참작이나 경중 없이 즉시 고소하겠다고 엄포를 놓은 바 있다.
[1] 이 내용의 대부분은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권하자 본인과 권하자의 여동생, 그리고 지인들과 인터뷰했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2] 이 내용의 대부분은 SBS <궁금한 이야기 Y>에서 권하자 본인과 권하자의 여동생, 그리고 지인들과 인터뷰했던 내용을 발췌한 것이다.[3]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1010/58123221/1[4]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1/07/31/2011073100633.html[5] http://weekly.khan.co.kr/khnm.html?mode=view&dept=&art_id=201112201904181[6] 다른 언론사들에는 주일본 영사관에서 3년 근무한 것은 생략되어 있다. 이것까지 합치면 그는 외무부에서 18년을 근무한 셈.[7] http://www.donga.com/news/article/all/20131010/58123221/1[8] 이렇듯 권하자의 어머니가 딸을 다른 형제들과 차별대우 해가며 공주대접 한것이 오히려 딸 인생을 망치는데 일조했다고도 볼 수 있다. 주변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려고 해도 권하자가 백마탄 왕자님 운운을 하면서 끝내 거절하게 만들었고 죽는 순간까지도 자기와 지나치게 수준이 차이나는 배우자감만 바라보고 있었으니(...)[9] 하지만 후에 벌어진 권하자와 이광필의 몸싸움 사건의 전말을 살펴보면 과연 이것이 이광필의 말처럼 순수한 의도였을지 의심된다. 자세한 내용은 이광필(가수) 항목으로.[10]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101131044393&mode=sub_view[11] http://www.newsen.com/news_view.php?uid=201101131032531001[12] http://bntnews.hankyung.com/apps/news?popup=0&nid=04&c1=04&c2=04&c3=00&nkey=201101131044393&mode=sub_view[13] 언론의 취재 결과 맥도날드 할머니는 한사코 제작진과 주변의 도움을 외면한 채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대신해줄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으로 밝혀졌다. 한 정신과 전문의는 “현실에서는 더이상 돌봐주거나 전적으로 사랑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인식은 하지만 인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면서 “그렇기 때문에 언젠가는 어머니를 대신할 더 멋진 남편, 훌륭한 남편이 나타나서 ‘나의 모든 것을 일시에 해결해줄 것’이라는 믿음을 구축해 나간 것 같다”는 소견을 밝혔다.[14]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1010500063#csidx322169f19f49873982bff9a7e629a91[15] http://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131010500053#csidxea67c3f1e84541ebe3d29524084b4ad[16] 다른 형제는 사망하거나 해외로 이민을 갔다고 한다.[17] 이 3남매의 사례는 같은 방송사의 그것이 알고싶다에서도 방송되었다.[18] 종로, 중구 쪽에 회사를 다니는 회원들의 목격담이 심심찮게 나타났다. 몇몇 유저는 1990년대 후반부터 맥도날드 할머니를 맥도날드, 스타벅스, 롯데리아 등에서 목격했다고 한다.[19] 묘지에 묻히고 싶거든 자기 묘지를 관리해줄 가족들이 있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