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루시아 도르트문트/역사

 




1. 노란 바람의 시작
2. 독일을 물들인 노란 바람
3. 첫번째 몰락
4. 유럽에 퍼지는 노란 바람
5. 두번째 시련
6. 클롭과 함께, 보루시아! 다시 한 번 일어서다
6.1. 2011-12 시즌
6.4. 2014-15 시즌, Danke! 클롭!
7. 투헬의 말벌 군단
8. 과도기


1. 노란 바람의 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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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창단한 젊은 청년들'''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는 1909년 12월 19일 트리니티 유스의 불만이 많은 18명의 젊은이들에 의해서 창단되었다. 도르트문트에는 성당을 중심으로 한 지역 클럽이 자리잡고 있었으나, 그들은 지역 청년들의 진취적인 바람을 다 수용할 수 없었고, 18명의 젊은이들은 트리니티 유스를 떠나 '''구기 클럽 보루시아 09 도르트문트(Ballspiel-Verein Borussia 09 e. V. Dortmund)'''를 창단하였다.
그렇게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란 새로운 이름으로 자신들의 축구 클럽을 갖게 된 젊은이들은 향후 차분한 걸음으로 명문 클럽으로의 도약을 꿈꿨다. 보통 젊은 혈기에 의해 건설된 클럽 대부분은 곧바로 리그에 참가하기 위해 전력 보강을 시도하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았다. 도르트문트는 전국 리그(지금의 분데스리가)에 참여하는 것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지 않았다. 대신 지역 리그에 주로 참여해 명문 클럽으로 가는 초석을 닦는데 주력했다. 이러한 결정은 젊은 혈기에 치우치지 않고 차분히 클럽의 미래를 건설하고자 했던 마음에서 나온 것이였다.[1][2]
물론 여기에는 어쩔 수 없는 한계가 작용하기도 했다. 언급했던 도르트문트는 젊은이들에 의해 창단된 클럽인데, 그러다보니 재정적 자립도가 약할 수밖에 없었고,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클럽을 만들었던 탓에 투자를 하려는 사람들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또 창단 후 10년 정도가 지난 1920년대에는 적극적인 스폰서 유치로 인한 클럽의 덩치 키우기에 도전했으나, 이 역시 경험 부족으로 인해 참담한 실패만 맛본 채 막을 내리고 말았다. 당시 도르트문트의 도전은 클럽 파산 위기의 원인이 되는데, 자칫 클럽이 사라질 수도 있었던 극심한 재정난을 이겨낼 수 있었던 원동력은 처음 그들이 보여준 진취적 바람에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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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르트문트의 초창기 홈 경기. 슈타디온 로터 에어데[3] 모인 많은 도르트문트의 홈 팬들'''
지역 주민들은 극심한 재정난에 허덕이는 도르트문트를 그대로 망하게 두지 않았다. 이유는 하나였다. 젊은 사람들이 올바른 축구 클럽을 만들어 보겠다고 했던 그들의 건강한 초심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도르트문트의 팬들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건강한 클럽을 만들어주길 당부하며 도르트문트의 재정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고, 그런 서포터들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은 도르트문트는 클럽의 간판을 내려야 할 위기를 간신히 극복하고 새로운 도전을 시작할 수 있었다.
지역 주민들의 도움으로 큰 위기에서 벗어난 도르트문트는 본격적으로 비상을 준비했다. 20여 년 동안 지역 리그에서 갈고 닦은 실력에다 큰 실패로 인한 교훈, 여기에 지역민들의 깊은 사랑까지 두루 얻은 도르트문트에게 성공은 보장되어 있는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생각하지 못했던 문제가 그들을 괴롭혔다. 1930년대 독일은 물론 유럽 전역을 뒤흔든 나치즘때문이었다. 극도의 전체주의 정당이었던 나치즘은 독일 내 모든 스포츠 및 운동 단체들에게 “우리의 목표에 맞게 팀을 운영하라”라는 간결하면서도 섬뜩한 메시지를 보냈는데, 그들은 자신들의 정권 선전 도구로 스포츠를 이용한 것이다.
이는 축구 클럽인 도르트문트도 예외일 수 없었다. 도르트문트는 나치즘의 그런 권고를 무시해 당에 가입하지 않는 등 항전의 자세를 취했고, 그런 도전은 성난 나치즘으로 하여금 클럽 경영진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큰 생채기를 남기게 하고 말았다. 이후엔 클럽 내부에서 나치즘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작업이 계속됐고, 그렇게 색출된 사람은 공개 처형을 당하는 등 클럽 내 어두운 그림자가 계속 드리워져 있었다. 그렇게 팀이 커다란 혼란에 흔들렸으니 선수들은 물론 도르트문트를 응원하는 팬들까지도 힘든 시간을 보낸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었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자 도르트문트에도 희망의 빛이 깃들 것이라 기대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도르트문트는 나치즘 초창기 가입을 거부하고 항전했다가 클럽 경영진이 송두리째 바뀌어 나치즘 신봉자들이 클럽의 실권을 장악하게 됐는데, 바로 이 문제가 세계대전 종료 후 연합군들에게 또 다른 명분을 제공했다. 연합군은 당시 독일 내 나치즘의 잔재를 몰아내는 데 힘을 쏟았는데, 클럽 경영진과 직원 대부분이 나치즘이었던 도르트문트도 그 대상에 포함되어 클럽이 해체당한 것이다. 다행히 주변에 비슷한 처지에 놓인 다른 클럽들과 합병해 그럭저럭 명맥은 이어갈 수 있었지만, 원하지도 않았던 나치즘으로 인해 수십 년의 암흑기를 거치게 된다.

2. 독일을 물들인 노란 바람


하지만 그러한 위기는 도르트문트를 강팀으로 성장시킨 계기가 되었다. 1940년대 말 도르트문트는 이전과는 몰라보게 강한 팀으로 발전했다. 이유는 연합군에 의한 강제 해체 후 클럽 합병 때문이었다. 당시 도르트문트는 주위 두 개 클럽과 합병에 가까운 상생의 길을 걷고 있었다. 그런데 연합군의 제재 후 도르트문트 출신의 경영진들이 가장 빨리 현장 1선에 복귀해 팀을 재건시켰고, 이 과정에서 세 팀의 우수한 인재들이 모여 팀을 재창단할 수 있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팀 전체의 전력을 강화시키는 계기가 됐고 아울러 베스트팔렌주는 물론, 전국 리그에 나가서도 손색없는 전력을 자랑할 수 있게 된다!
한층 높아진 전력을 보유하게 된 도르트문트는 그때 당시 베스트팔렌 지역 최강으로 꼽히던 샬케04와도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다. 레비어 더비라 불리며 독일 내 최고의 더비 매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때 바로 이 시기다. 그렇게 승승장구를 시작한 도르트문트는 1947-48시즌 샬케04를 물리치고 베스트팔렌 지역을 대표해 전국 챔피언십[4]에 참가하게 됐다. 처음으로 전국 대회의 맛을 알게 된 도르트문트는 다음인 1948-49시즌에도 베스트팔렌 지역을 대표해 전국 챔피언십에 출전했는데, 이때는 결승까지 오르는 괴력을 발휘하며 그 이름을 독일 전역에 알렸다. 그렇게 조금씩 베스트팔렌 지역을 넘어 독일 전역에 존재감을 과시하던 도르트문트는 꾸준한 강세를 보였고, 결국 1955-56시즌에는‘도이치 마이스터’란 이름 아래 '''창단 첫 독일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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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56시즌 우승후 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리는 알프레드 프라이슬러'''
다음 해 디펜딩 챔피언의 자격으로 출전한 1956-57시즌 또 한 번 결승전에 진출했고 함부르크와의 맞대결 끝에 4-1이란 넉넉한 스코어로 우승을 차지, '''대회 2연패'''란 금자탑을 세웠다. 이후 1962-63시즌에는 쾰른을 상대로 한 결승전에서 3-1로 승리하며 대회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달성하기에 이르렀다. 참고로 이 대회는 1963-64시즌부터 시작된 분데스리가 전 마지막 전국 챔피언십이었는데, 도르트문트는 대회의 마지막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대미를 장식한 클럽으로 남게 됐다[5] . 베스트팔렌 지역에서만 조용히 불던 노란 바람이 마침내 전 독일을 물들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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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63시즌 마지막 전국 챔피언십 결승전에서 경기를 치르고 있는 도르트문트 선수들의 모습'''
이 때에 도르트문트는 유러피언 컵위너스컵에 출전하여 우승하게 되는데, 이 우승은 '''독일 클럽이 유럽 대항전에서 거둔 첫 우승'''이 된다.

3. 첫번째 몰락


분데스리가 출범 후 도르트문트는 전국의 내로라하는 강호들과 어깨를 나란히 했다. 도르트문트는 당시 팀 내 넘버 원 골잡이였던 프리드헬름 코니츠카를 선두에 내세워 유수의 강호들과 대등한 싸움을 했고, 젊은 청년들의 혈기에 의해 창단된 축구 클럽은 나치즘과 세계대전이란 후유증을 잘 이겨내고 독일 내 명문 클럽으로 빠르게 자리 잡는듯 했다.
그렇게 순조로운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던 도르트문트는 처음 맛보는 성공에 취해 방만한 클럽 운영을 하게 되는데, 유러피언 컵위너스컵 우승과 분데스리가에서의 선전으로 지금껏 만져보지 못했던 막대한 자금을 얻었기 때문이었다. 성공에 눈이 먼 클럽 경영진은 쓸데없는 지출과 무작위 선수 영입을 일삼아 순식간에 금고를 바닥냈고, 도르트문트의 재정상황은 급격하게 악화되었다. 아직까지 경험한 적 없는 재정 위기와 마주친 도르트문트는 이후 급격한 내리막길을 타기 시작했다. 팀의 주축 선수들이 자금이 바닥난 팀을 떠났고, 그것이 직접적인 충격파로 작용해 성적까지 곤두박질치고 말았다.
거의 매년 분데스리가에서 두 자릿수 승수 이상을 기록하며 베스트팔렌 지역을 대표하는 축구 클럽으로 이름값을 했던 도르트문트였지만 1970-71시즌엔 간신히 10승을 기록하며 13위로 급락하는 충격을 맛봤다. 그 다음 시즌인 1971-72시즌에는 6승을 올리는 데 그치며 급기야 2부 리그로 강등되는 최악의 상황에까지 직면했다. 2부 리그에서 혹독한 수련을 쌓은 끝에 1976-77시즌 다시 1부 리그로 돌아왔지만, 이후엔 항상 중위권에 턱걸이 하는 것에 머물렀었고, 심지어 1977-78 시즌 마지막 리그 경기였던 1978년 4월 29일에는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 '''12-0'''이라는 최악의 흑역사급 스코어로 대패한 적도 있을 정도로 초창기의 명성을 쉽게 회복하지 못했다. 당시 독일은 바이에른 뮌헨을 중심으로 유럽을 제패했고 월드컵에서도 잇달아 좋은 성적을 기록해 전성기를 맞았는데, 도르트문트만은 그런 행복한 나날들과 거리가 멀었던 것이다.
그런 도르트문트에게도 1974년 서독이 개최한 월드컵은 어느 정도 콩고물을 떨어트려줬다. 도르트문트가 월드컵 개최 도시로 선정되어 5만 4천석의 신구장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을 신축하게 된 것이다. 물론 멋들어진 홈 경기장을 새로 받았다고 해서 당장 도르트문트가 재기한 것은 아니였다. 그러나 창단 초기 몰락해가던 도르트문트를 구했던 지역 주민들의 사랑은 여전했고, 그 사랑이 채워질 수 있는 드넓은 홈 경기장을 가졌다는 것은 도르트문트가 재기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그리고 도르트문트는 어렵게 주어진 그 발판을 허투루 밟지 않았고 1989년 클럽 역사상 두 번째 DFB-포칼 우승을 차지하게 된다.


4. 유럽에 퍼지는 노란 바람


DFB-포칼과 독일 슈퍼컵을 차지하며 더블을 달성한 도르트문트는 본격적인 비상을 시작했다. 1991-92시즌 명장 오트마어 히츠펠트를 감독으로 선임, 스위스 최고의 스트라이커 스테판 샤퓌자 등을 앞세워 분데스리가 준우승을 차지한 후 1992-93시즌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권위 있었던 UEFA컵에서 준우승[6]까지 달성하게 된다. UEFA컵에서의 선전으로 독일축구협회는 이례적인 상금 2억 5천만 마르크[7]를 도르트문트에게 지급했는데, 이 돈으로 도르트문트는 빅 클럽으로의 도약에 가속을 붙일 수 있게 됐다. 독일축구협회는 이 돈을 도르트문트에 지급하며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는 팀에게 주기 위해 마련한 포상금이다”라고 밝혔는데, 1970년대 유럽을 호령한 바이에른 뮌헨 이후 독일 클럽들이 유럽 클럽 대항전에서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자(...) 당근으로 마련해 두었던 것이다.
뜻밖의 거액을 손에 쥔 도르트문트는 이전처럼 방만한 운영으로 거액을 날리는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1970년대 겪어야 했던 암흑을 경험 삼았기 때문인데, 도르트문트는 적절한 투자로 유망한 선수들을 영입하는 동시에 클럽의 재정 자립도를 더욱 튼튼하게 하기 위해 거액을 계획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위르겐 콜러, 외르크 하인리히, 마티아스 잠머, 안드레아스 묄러 등 당시 유럽 축구에서 이름 꽤나 날리던 선수들을 대거 영입할 수 있었고, 이들을 바탕으로 하여 도르트문트는 유럽 무대에 본격적인 명성을 알리기 시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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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95시즌 우승후 마이스터샬레를 들고 있는 안드레아스 묄러(왼쪽)와 마티아스 잠머(오른쪽)'''
그중 절정은 1994-95시즌부터 1996-97시즌까지였다. 히츠펠트 감독은 특유의 뚝심 있는 지도력으로 도르트문트를 조직적으로 강한 팀으로 조련시켰는데, 개인보다 팀을 더 중시했던 그의 지도 철학은 많은 스타 선수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르트문트가 잡음 없이 굴러갈 수 있도록 큰 힘을 보탰다. 스타 플레이어와 조직력을 두루 갖춘 도르트문트는 해당 시즌 독일 분데스리가 정상에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전국 챔피언십에서 우승을 차지한 후 분데스리가 정상 등극은 처음이었는데, 다음 시즌인 1995-96시즌에도 분데스리가 정상에 서며 리그 2연패를 달성한다. 같은 기간 독일 슈퍼컵까지 휩쓴 도르트문트는 '''2년 연속 더블'''이라는 진기록까지 달성하며 독일 최고 클럽으로 급부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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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단연 정점에 있는 업적은 '''1996-97시즌 달성한 UEFA 챔피언스리그 우승'''이다. 도르트문트의 이 대회 우승이 특히 더 깊이 뇌리에 남았던 것은 뮌헨 올림피아슈타디온에서 열린 결승전에서 마주친 상대가 4년 전인 1992-93시즌 UEFA컵 결승에서 패배를 안겨준 유벤투스였기 때문이다. 당시 유벤투스는 프랑스 아트 사커의 지휘관인 지네딘 지단이 이끌고 있었는데, 도르트문트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3-1로 승리하며 4년 전 UEFA컵에서의 패배를 설욕하는 동시에 클럽 역사상 최초로 빅 이어까지 품는 영광을 안았다.[8] 또한 그것을 더해 그해 겨울에는 남미 클럽 우승팀과 격돌하는 인터컨티넨탈컵에서 남미 챔피언 크루제이루(브라질)를 격파하며 세계 최고의 클럽으로 등극하기도 했다.
당시의 도르트문트는 인기, 자금력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맞설 수 있었던 유일한 클럽이었다.

5. 두번째 시련


독일을 넘어 유럽을 점령한 도르트문트의 앞날에는 창창한 빛만 있을 것 같았다. 한두해 반짝이 아닌 꾸준한 성적을 내주고 있었고, 열광적인 팬들이 있어 성적에만 집중하면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이후 도르트문트는 그대로 '''리즈 유나이티드와 비슷한 길을 걷기 시작한다.''' 클럽의 계속된 성공에 고무된 클럽 운영진들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일에 욕심을 내기 시작했는데, 바로 독일 축구 클럽들 가운데 최초로 주식 시장[9]에 상장을 시도한 것이다. 보다 투명한 클럽 운영을 위한 도전이었는데, 결과적으로 이 도전은 또 한 번 '''구단 경영 역사에 큰 오점'''을 남기고 말았다. 무리한 주식 상장으로 구단 재정에 또 한 번 흑풍이 불어 닥친 것이다. 주식 상장을 위한 무리한 투자는 커다란 적자라는 차가운 현실로 이어졌고, 이는 1990년대 팀의 돌풍을 이끌었던 주축 선수들이 다시 이탈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고 말았다.
이전에도 비슷한 경영난을 겪은바 있는 도르트문트는 꽤 현명한 대처를 할 것으로 믿었지만 그렇지 못했다. 이번에는 문제의 심각성이 더했기 때문이다. '''홈 경기장을 매각'''해야 했고 선수단의 '''주급을 모두 20% 삭감'''해야 하는 등 위험 수위가 달랐다. 더해 토마스 로시츠키, 얀 콜러, 크리스토프 메첼더 등 몸값이 비싼 선수들을 팔아야 했다. 이런 상황은 좀처럼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결국 2005년에는 다시 한 번 '''구단 부도'''라는 최악의 상황을 감수해야 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10] 베스트팔렌 슈타디온이란 멋드러진 홈 경기장의 이름이 지역 보험 회사의 이름을 딴 지그날 이두나 파크로 바뀐 것도 막막한 구단의 경영난을 타파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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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스터샬레를 들어올리는 슈테판 로이터'''
'''물론 도르트문트는 클럽이 심각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시기에도 한 차례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2001-02시즌의 일이었는데, 레버쿠젠을 시즌 막바지에 따돌리고[11] 클럽 역사상 여섯 번째 1부 리그 우승을 달성하며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는 속설을 입증하는데 성공했다.[12][13] 하지만 도르트문트의 영광은 그것이 끝이었다. 2002-03시즌 최종전을 치르기 전까지 챔피언스리그 직행 티켓을 얻을 수 있는 2위였고 최종전 상대가 꼴찌 코트부스와의 홈경기라 이변이 없다면 도르트문트가 2위를 차지하는 것이 유력했으나 예상외로 경기종반에 동점골을 헌납하며 1:1로 비기고 말았고 2위 자리를 마가트의 유치원 VfB 슈투트가르트에 내주며 챔피언스리그 예선을 치르게 되었다. 결국 2003-04시즌 챔피언스 리그 예선에서 벨기에의 브뤼헤 FC에게 승부차기 끝에 패하면서 중요한 수입원이었던 챔피언스 리그 수입이 끊겼고, 설상가상으로 독일 최대의 미디어 그룹이던 키르히 그룹이 파산하여 TV 중계권료도 끊기고 만다. 주식 상장으로 번 돈은 챔피언스 리그 하나만을 바라보고 선수 영입하는 데 쓴 상태에서 기껏 영입한 주전 선수들이 줄부상을 끊었으니, 미래는 불보듯 뻔했다. 게다가 시즌 초반 주축선수들이 대거 부상으로 신음하며 제대로 베스트 라인업을 짜기 어려워 리저브팀과 유소년팀에서 선수를 끌어올려야 했다. 최악의 상황을 맞이한 가운데에서도 분전하여 리그 6위로 끝마쳤음에도 불구하고 팬들사이에서도 잠머는 대리석과 같다며 경직된 전술구사에 비판이 끊이지 않았고 챔피언스리그 진출에도 실패하였기 때문에 여론은 잠머에게 좋은 상황만은 아니었다. 결국 2003/04 시즌을 끝으로 도르트문트 감독직에서 경질된다. 잠머의 후임으로 2년 전 UEFA컵에서 준우승의 쓴맛을 안겼던 베르트 판 마르바이크가 부임하였다.
이후 한동안 도르트문트에는 꿈도 희망도 없어 보이는 시즌의 연속이었다. 재정위기 속에서 2004-05시즌과 2005-06시즌 연속 7위를 기록하더니, 2006-07시즌에는 심지어 '''2부 리그로 추락할 위기'''[14]에 빠지기도 했으며, 2007-08시즌에도 13위까지 순위가 떨어졌다. 클럽은 2005년 파산위기를 맞이하고 11유로에 달했던 클럽의 주식 가치는 80% 가까이 폭락했고, 선수 연봉도 20% 삭감해야 했다. 재정난으로 2006년 팀내 최고 유망주 다비드 오동코어레알 베티스로, 핵심 선수인 토마시 로시츠키아스날 FC로 이적시켜야 했고 2007년에는 핵심수비수 크리스토프 메첼더를 이적료 없이 레알 마드리드로 넘겨주었다.
하지만 도르트문트 팬들은 열렬한 성원을 꾸준히 보내주었고 구단 역시 뼈를 깎는 재정 개선 노력을 진행했다.[15] 그런 노력이 계속되고 있던 와중, 재도약의 기회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도르트문트는 2007-08시즌 DFB-포칼컵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과 격돌했는데, 아쉽게 패해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바이에른 뮌헨이 이미 UEFA 챔피언스리그 진출권을 획득한 상태라 운 좋게 UEFA컵 출전권을 따냈던 것이다. 오랜만에 UEFA컵 출전권을 손에 쥔 도르트문트는 회생의 실마리를 잡았고, 2008-09시즌부터 40세의 젊은 위르겐 클롭 감독을 선임하여 재기를 노렸다.

6. 클롭과 함께, 보루시아! 다시 한 번 일어서다


2008-09 시즌 슈퍼컵에서 FC 바이에른 뮌헨을 꺾으며 우승했고, 비록 UEFA컵에선 1라운드에서 우디네세 칼초를 만나 승부차기 끝에 탈락했지만, 분데스리가에서 최소패(5패)[16]와 최소 실점 2위(37실점)[17]로 6위를 차지하며 가능성을 보인 클롭은 '''뛰어난 전술적 능력'''은 물론이고''' 경기장 안에서의 열정적인 모습과 뛰어난 입담'''으로 '''선수단을 완벽히 장악했다.''' 그리고 스타 선수 영입과 유망주 발굴도 균형감있게 진행하며 1990년대 유럽을 강타했던 노란 바람을 다시 일으킬 준비를 착실히 수행했다.
그 결과 2009-10 시즌엔 도르트문트를 5위권에 진입시켰고[18], 그 다음 시즌인 2010-11 시즌에는 루카스 바리오스, 카가와 신지, 누리 사힌, 네벤 수보티치 등 여러 유망주들이 포텐을 터트리면서 10라운드 선두였던 돌풍의 팀 1.FSV 마인츠05를 꺾어 1위에 오른 뒤 시즌 끝까지 1위 자리를 놓치지 않았고 결국 32라운드에서 '''분데스리가 정상에 도르트문트의 노란 깃발을 꽂으며 7번째 우승을 확정지었다.'''
'''9년 만의 우승이자, 지옥 같았던 암흑기의 종료를 알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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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 시즌 분데스리가 우승 축하 퍼레이드. 왼쪽부터 루카스 바리오스, 마르첼 슈멜처, 마츠 후멜스, 케빈 그로스크로이츠.'''

6.1. 2011-12 시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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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UTSCHER POKALSIEGER
2011-12 DFB-포칼 챔피언
'''
'''DEUTSCHER MEISTER
2011-12 분데스리가 챔피언
'''
11-12 UEFA 챔피언스 리그 32강에서 아스날 FC, 올림피아코스, 올랭피크 드 마르세유와 조를 이뤄 해볼만하다는 평을 받았으나, 올림피아코스에게 3:1, 마르세유에겐 3:0으로 원정경기에서 모두 참패했다. 아스날과 안방 경기에서 1:1로 비기고 가장 약체로 평가받던 올림피아코스를 안방에서 1:0으로 이겼을 뿐.결국 1승 1무 4패로 조 꼴찌로 탈락했다.
11-12시즌은 전반기 초반 6경기에 2승1무3패에 그치는 부진을 겪으며 순위가 많이 떨어졌었으나[19] 전반기 막판 11경기 8승 3무 성적으로 바이에른 뮌헨을 맹추격하여 3점 차이가 난 상태에서 전반기를 마쳤다. 거기에 챔피언스리그 탈락으로 유로파리그도 참여하지 않기에 후반기에 바이에른과는 달리 리그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전반기 최종전 프라이부르크 원정에서 4:1 승리를 시작으로 24라운드 홈에서 마인츠를 2:1로 이기기 까지 8연승을 달리며 1위 자리를 바이에른으로부터 빼았았다. 그 사이 바이에른은 묀헨글라트바흐와 레버쿠젠에 패하고, 함부르크와 프라이부르크에 비기는 등 주춤하면서 승점차가 7점 차로 벌어졌다.
연승행진은 의외로 치열하게 잔류를 위한 경쟁을 하고 있던 승격팀 아우크스부르크 원정에서 0:0으로 비김으로써 8경기에서 막을 내렸다. 같은 라운드 바이에른은 홈에서 호펜하임을 7:1로 이김으로써 승점차는 5점으로 좁혀졌다. 26,27라운드에서는 각각 베르더브레멘에 홈에서 1:0 승리, FC쾰른 원정에서 6:1 대승을 거두며 승점차를 유지했다. 28라운드 슈투트가르트와의 안방 경기에서 난타전 끝에 4:4로 비겼고 다음날 바이에른이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추가시간 결승골로 승리하며 도르트문트와 바이에른의 승점차는 3점으로 좁혀졌다. 29라운드에서 도르트문트는 볼프스부르크 원정에서 3:1로 이기고, 바이에른은 홈에서 구자철이 골을 넣은 아우크스부르크에 2:1로 승리하며 승점차는 여전히 3점. 4월 11일 30라운드 도르트문트 안방경기를 통해 분데스리가의 우승의 향방이 가려지게 되었다. 이 경기에서 로벤이 페널티킥을 실축했고, 레반도프스키가 결승골을 넣어 바이에른을 1:0으로 이기면서 승점을 6점으로 다시 넓혔다.[20]
그 후 샬케 원정에서도 2:1로 이기고 그날 바이에른이 홈경기에서 마인츠에게 비기는 바람에 8점이나 승점이 벌어져 사실상 리그 우승이 거의 확정되었다. 결국 한국기준 4월 22일 일요일. VfL 보루시아 묀헨글라트바흐와의 홈경기에서 2:0으로 이기며 '''리그 2연패'''를 달성했다. 남은 경기에서 카이저슬라우테른 원정에서 5:2로 승리했고, 프라이부르크와의 최종전 홈경기에서 4:0으로 이겼다. 분데스리가 최종 기록은 25승6무3패 승점 81점으로 '''분데스리가 최다승점 신기록'''을 세웠다.[21] 아울러 5월 12일 베를린에서 열린 포칼 결승에서 레반도프스키의 해트트릭에 힘입어 바이에른 뮌헨을 5:2로 격파하고 23년만의 우승을 차지, 더블을 달성했다.

6.2. 2012-13 시즌


여름이적시장에서 카가와 신지맨체스터 유나이티드로 떠났으나 그 공백을 묀헨글라드바흐의 마르코 로이스를 영입하여 메웠다. 그리고 지난 시즌 레반도프스키와의 공격수 경쟁에서 밀려난 루카스 바리오스는 광저우 에버그란데로 떠났고, 백업 공격수로 슈투트가르트의 율리안 쉬버를 영입하였다.
DFL-슈퍼컵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에 1:2로 졌다. DFB 포칼 1라운드는 레기오날리가의 오버노이란트를 상대로 이적생 로이스의 결승골과 페리시치, 쿠바의 골로 3:0으로 이겼다.
12-13 시즌 개막전인 베르더 브레멘과의 안방경기는 이적생 로이스의 선제골과 마리오 괴체의 결승골로 2:1로 이기면서 첫 시작을 끊었다. 뉘른베르크 원정에서 1:1로 비겼지만 곧이어 레버쿠젠을 안방에서 손쉽게 3:0으로 이기면서 상위권에 도약, 리그 3연패를 향하여 순항하는 듯 했지만, 4라운드 원정에서 3연패로 강등권에 빠져 있던 함부르크 SV손흥민에게 2골을 허용하며 2:3으로 함부르크의 시즌 첫 승 제물이자 첫 시즌 패배를 당했다. 이 패배로 지난시즌부터 이어오던 분데스리가 31경기 연속 무패가 끊겼을 뿐 아니라 승점 7점으로 4위로 추락했다. 그 후 바이에른 바이에른과 프랑크푸르트가 4연승으로 12점으로 1, 2위를 기록 중인데 5라운드 주중 프랑크푸르트 원정을 난타전 끝에 3:3으로 비겼다. 그 다음 6라운드 묀헨글라트바흐와의 안방경기를 5:0으로 이겼으나 7차전 하노버 96원정을 1:1으로 비기면서 리그 4위를 기록중이다. 7연승의 뮌헨과 승점 9점 차, 레버쿠젠과 하노버가 1점으로 추격 중인 상황.
이 뒤로 리그 2위까지 올라섰으나 26차전까지 1위인 바이에른 뮌헨과 승점차가 17점이나 벌어져서 사실상 리그 우승은 힘들어졌다. 나머지 8경기를 다 이기고 바이에른이 연패하면 모를까. 하지만 25차전까지 21승 3무 1패라는 압도적인 승세를 유지하고 있는 바이에른이 그럴 가능성이 적어보인다. 여담으로 21차전 안방에서 벌어진 함부르크와의 경기에서도 손흥민에게 또 2골을 허용하면서 1:4 참패를 당하면서 12~13시즌에 손흥민에게 4골이나 헌납했다.
12~13 챔피언스리그에서는 죽음의 조인 D조에 들어가서 레알 마드리드, 맨체스터 시티, AFC 아약스와 한 조에 속해있다. 1차전 조별리그 야약스와의 홈경기에서 1:0승리를 거뒀다. 2차전에 맨체스터 시티와의 원정 경기에서 1:0으로 이기고 있었으나 후반 83분 핸들링 반칙으로 인해 마리오 발로텔리의 패널티킥 동점골로 1:1로 비겼다. 3차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홈경기에서는 2:1승리하면서 조선두에 올라섰다.
최근 유로파에서 분데스리가의 강세가 이어지고, 챔스에서 바이에른의 강세가 이어지면서 그 바이에른도 꺾은 도르트문트가 챔스에서 쉽사리 거꾸러지는 걸 보면 도르트문트는 리그 중시라는 인식이 한국에 있는데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맞는 말도 아니다. 도르트문트가 챔스에서 약한 이유는 리그 위주라기보단 그냥 스쿼드가 얇아서...챔스 선수 명단을 보면 그 주간의 상황을 보면 대개 최선으로 여겨지는 카드를 선택하곤 한다. 다만 스쿼드의 한계상 카드 트러블, 부상 등이 있으면 주중 경기 여건상 체력문제까지 겹쳐 전력이 심각하게 약해지면서 자동적으로 떨어지는 것일 뿐이다.[22]
2012년 10월 25일에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챔스 조별리그 D조 3차전 홈경기에서 로베르트 레반도프스키의 선제골과 마르셀 슈멜처의 결승골을 앞세워 짜릿한 승리를 거두었다. 전반 36분 제바스티안 켈이 페페의 패스를 가로채 넘겨준 공을 레반도프스키가 오른발 슛으로 마무리해 기선을 제압했고, 2분 뒤 호날두에게 만회골을 내주었으나, 후반 19분 마리오 괴체의 크로스를 골키퍼 이케르 카시야스가 쳐낸 것을 슈멜처가 차 넣어 결승골을 만들어냈다.이어 4차전 레알 마드리드 원정경기에서는 2:2로 비겼다. 결국 4승 2무 무패로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하면서 샤흐타르 도네츠크와 격돌하게 되었다. 2013년 2월 14일(한국시각)에 원정에서 2:2로 비겼고, 3월 6일 안방에서 열린 2차전은 3:0으로 완승을 거두면서 8강에 진출했다.
15일에 가진 8강 조추첨에선 말라가 C.F.와 맞붙게 되었다. 원정 1차전 경기에서 0:0으로 비기면서 2차전 안방경기가 유리해졌다는 분석이다.
그리고 4월 10일 열린 2차전, 비록 심판의 결정적인 오심들이 많았지만 '''이번 챔피언스리그 최고의 극장경기를 만들어내며 3:2 승리, 극적으로 4강 진출에 성공했다!!!''' 1차전을 0:0으로 마쳐서 그런지 전반전 초반은 양팀 모두 조심스럽게 풀어나가다가 25분 호아킨 산체스의 선취골이 터지면서 원정골 다득점 원칙에 의해 순식간에 2골이 필요해진 절박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다. 이후 패스들이 번번이 말라가 수비진에 의해 끊기면서 답답한 경기양상이 될 찰나, 전반 40분 레반도프스키의 만회골로 그나마 한숨 돌릴수 있었다. 그리고 벌어진 후반전, 서로가 간간히 결정적인 찬스를 잡았으나 그때마다 양팀의 골키퍼들의 선방으로 인해 무산되던 도중, 후반 82분 엘리세우의 골로 인해 말라가가 2:1로 앞서가며 멘탈이 하늘나라로 갈 위기에 처했다. 비기기만 해도 탈락하는 절체절명의 상황, 추가시간이 될때까지만해도 골이 나오질 않으면서 4강의 문이 닫혀가는가 싶었으나 후반 91분, 혼전끝에 마르코 로이스의 만회골이 터지더니 1분만에 산타나의 극적인 역전골이 들어가며 이번 챔스 최고의 드라마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경기 내에서의 심판의 판정은 매우 난감한 수준이었다. 일단 후반전 도중 이미 경고를 한장받은 마르셀 슈멜처가 드로인 상황에서 상대편 수비수인 헤수스 가메스의 목을 고의적으로 비틀고(...) 지나가는 모습을 보였으나 경고누적으로 퇴장은 커녕 오히려 가메스에게 경고가 주어졌고[23], 이후에 오프사이드 상황에서 말라가의 2번째 골이 터졌으며, 결정적으로 도르트문트의 결승골 역시 오프사이드 상황에서 나온것이었다. 오심도 경기의 일부라지만 이번 챔스 8강 경기마다 최소한 한두개씩 논란이 될만한 오심들이 나오고 있으니 답답할 따름(...). 어찌되었든 이런 극적인 역전승을 거두었으니 선수단의 사기는 오를대로 오를듯. 말라가만 불쌍하게 됐다. 슈멜처의 명백한 퇴장감인 행동이 오히려 말라가의 옐로카드란 결과가 되었고 3번째 골은 크로스시점 골시점 모두 오프사이드...
그리고 4강전 상대는 추첨으로 또 레알 마드리드와 격돌하게 되었다. 조예선에서 1승 1무를 거뒀기에 사기가 오른 도르트문트가 자신있을 듯. 그래도 레알이 조예선과 달리 부상선수들이 많이 복귀하였고, 경기 이틀전 팀의 핵심 선수 중 하나였던 마리오 괴체의 바이에른행이 확정되어 분위기가 가라앉을 것이라 예상했지만 4월 25일 벌어진 안방경기 1차전에서 4골을 터뜨린 레반도프스키의 활약으로 호날두가 1골에 그친 레알을 4:1 완승을 거두고 17년만의 챔피언스리그 결승 진출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괴체에 이어 레반도프스키까지 바이에른으로 간다는 소식이 들려오면서 마냥 기뻐할 수는 없게 되었다...
2차전 레알 마드리드 원정에선 수비로 나서면서 팽팽한 경기를 벌이다가 후반 10분 쯤 남겨두고 2골을 실점하여 0:2로 졌지만 끝내 골득실에 앞서''' 16년만에 챔피언스리그 결승에 올랐다.'''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

'''2012-13 UEFA Champions League Final'''
'''2013. 05. 25 / 웸블리 스타디움 (잉글랜드, 런던)'''
[image]

'''FC 바이에른 뮌헨'''
[image]
[image]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2 - 1'''
'''60' 마리오 만주키치
89' 아르연 로번
'''

'''68' 일카이 귄도간 (PK)'''
''' '''
[image]
그리고 결승전 상대는 바이에른 뮌헨. 영국축구의 심장부인 런던 웸블리에서 독일리그팀끼리 결승을 장식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나오게 되었다. 올해는 바이에른이 압도적으로 리그를 먹었지만 작년과 재작년에는 도르트문트가 제동을 걸었던적도 있고, 다음시즌 마리오 괴체의 이적 등 떡밥거리는 풍부한 매치. [24]올시즌 상대전적은 1무 2패(슈퍼컵, 포칼컵에서 바이에른 승리, 리그 바이에른 홈 경기는 무승부)로 바이에른이 우위지만 경기내용 자체는 대등했다는 평. 일단 챔스 결승에 앞서 양팀은 5월 5일, 도르트문트 홈에서 리그 경기를 펼치게 된다. 이미 바이에른이 우승을 확정지었고 도르트문트도 2위를 거의 굳혔기때문에 양팀다 풀전력으로 나올것 같지 않긴 해도 전초전으로서는 좋은경기가 될듯.
5월 26일 웸블리에서 바이에른과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을 치뤘다. 엘 클라시코 더비를 꺾고 올라온 데어 클라시커 더비로 화제를 모은 이 경기에서 양팀 모두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라는 타이틀에 걸맞는 수준 높은 경기를 보여주었으나 결과는 2:1 바이에른 뮌헨의 승리였다. 대등한 경기였기에 도르트문트 선수들과 클롭 감독의 아쉬운 마음이 매우 컸을 것이다.

6.3. 2013-14 시즌


겨울까지 뛰지못하는 피슈첵과 샬케로 이적한 산타나의 대체자로 센터백과 풀백을 모두 소화할수있는 소크라티스 파파스타토풀루스를 브레멘에서 영입.
또한 괴체의 대체자로 우크라이나 리그 득점왕을 차지한 FC 샤흐타르 도네츠크의 헨리크 미키타리안을 영입, 프랑스에서 득점 2위를 차지한 공격수 피에르 오바메양을 영입하며 공격진을 강화, 나름 성공적인 이적시장을 보내고 있다.
13-14 시즌 챔피언스리그에선 SSC 나폴리, 아스날 FC, 올랭피크 마르세유와 같은 조를 이뤘다. 1차전 9월 19일에 열린 나폴리 원정에선 1:2로 패했다. 선제골을 먹힌 뒤 클롭 감독은 대기심에게 항의를 하다 퇴장을 당했고 후멜스는 부상으로 교체아웃, 바이덴펠러는 페널티 박스 밖에서 손을 써서 퇴장 당하는 등 여러모로 경기가 안 풀린 날이었다. 막판 나폴리 수비의 자책골이 아니었으면 영패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던 경기.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3차전 10월 23일에 열린 아스날 FC와의 원정경기에서 미키타리안의 선제골과 레반도프스키의 결승골로 2:1 승리를 거두었다. 클롭 감독의 장기인 게겐프레싱이 돋보인 경기였다.
리그에선 9차전까지 바이에른 뮌헨(7승 2무)에 이어 7승 1무 1패로 2위를 달리며 추격 중이다. 다만 바이엘 레버쿠젠이 7승 1무 1패(골득실 차로 3위)로 추격 중이라 이 2팀과 경기 여부에 따라 리그 우승이 가능할 듯. 그러나...12차전 볼프스부르크 원정에서 1-2로 역전패하면서 4점차로 승점이 벌어졌다. 게다가 같은 12차전을 손흥민이 3골 1도움 환상적 활약으로 이긴 레버쿠젠과 같은 28점이 되더니만 13차전 바이에른 뮌헨과의 안방경기에서 0-3으로 참패하면서 1위인 바이에른과 승점 차가 7점이나 벌어져 리그 우승은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레버쿠젠이 13차전을 이기면서 2위마저 넘겼다. 14차전 마인츠 05 원정은 3:1로 이겼으나 15차전 안방경기인 레버쿠젠 전에서 손흥민에게 결승골을 허용하며 0:1로 패했다. 이로서 10승 1무 4패로 4위 묀헨글라트바흐와 똑같아졌다. 여기서 불행은 끝나지 않았는데 이 경기에서 미들진이 모조리 박살났다. 스벤 벤더가 발목을 밟혀 먼저 실려나갔고 이후 누리 사힌이 공중볼 경합 도중에 착지하면서 잘못 발을 디뎌 부상당했다. 여기에 수비수인 소크라티스 파파스토플로스가 후반 막판에 퇴장당했고 경기 도중 레반도프스키가 경미한 부상을 당해 쩔뚝거렸다. 말 그대로 부상병동의 끝판왕[25]. 그나마 골득실차로 3위를 버티고 있긴 하지만 1위인 바이에른과 10점이나 벌어진 상황이라 우승은 힘들어졌다. 레버쿠젠에게도 6점차로 벌어진 상황.
리그 후반기 개막전은 아우크스부르크와의 홈경기였는데 1-0으로 앞서다 벤더의 자책골로 동점이 되었고 누리 사힌의 골로 2-1이 되었으나 14-15시즌부터 합류할 지동원에게 동점골을 허용해 무승부가 되었다. 허나 이때 챔스 진출권 경쟁팀인 레버쿠젠과 묀헨글라트바흐가 모두 패해 승점차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챔스 4차전에서는 초반 아스날은 슛팅조차 못날려볼정도로 강하게 압박을 가하여 아스날을 압도했으나 도르트문트 선수 실책으로 인해 외질에게 크로스 타임을 내주었고 이것을 지루가 머리에 맞춘것을 아론 램지가 헤딩으로 우겨넣어 먼저 실점하엿고 그 후 단단한 아스날의 수비를 뚫지 못하고 결국 1대0으로 패하여 조별탈락의 위기를 맞게되었다 이 과정에서 레반도프스키의 패널티 논란이있었으나 심판에 따라 불수도 안불수도 있는 수준이었다는 평이고 그전에 레반도프스키가 헐리웃을 하여 심판에게 찍혔다는 평도있다. 나폴리가 마르세유를 잡음으로써 나폴리 전을 이기지 못하게 된다면 조별 탈락할 가능성이 매우 높아졋다.마르세유 역시 복병이기도 하고...또 안좋은 소식으로 수보티치가 십자 인대가 파열하여 시즌아웃을 당했다. 엎친데 덮친격으로 A매치기간중 잉글랜드와의 경기에서 슈멜처와 후멜스가 부상당해 사실상 수비진이 초토화되었다(...). 슈멜처는 최소 3주 결장에 후멜스는 2014년 1월까지 결장이라 매우 뼈아프다. 일단 자유계약으로 긴급하게 센터백 마누엘 프리드리히를 영입했지만 바이에른 뮌헨과의 데어 클라시커SSC 나폴리와의 챔스 외나무다리 싸움을 앞두고 날벼락이 아닐수가 없다.
그러나 우려와는 다르게 수비수의 줄부상에도 불구하고 좋은 경기력을 보여주었고 데어 클라시커에서는 마리오 괴체의 활약으로 패했으나 나폴리를\3:1로 완파[26]하면서 순식간에 조 2위로 상승하여 마르세유전을 이긴다면 16강 진출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게 되었다.
챔피언스리그 조별리그 최종전, 마르세유 원정경기에서 레반도프스키가 선취골을 넣었으나 곧 동점골을 먹혔다. 그리고 얼마 안가 마르세유쪽에서 1명 퇴장을 당해 쉽게 올라가는 분위기가 형성되나 했지만 좀처럼 골을 넣지 못했고, 그렇게 73분까지 답답한 경기가 지속될동안 산파올로에서 나폴리가 아스날을 상대로 선취골을 넣었다는 청천병력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급해진 도르트문트는 더 맹공을 퍼부었지만 좀처럼 마르세유의 골문은 열리지 않았고, 점점 유로파리그 진출티켓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으나 후반 86분, 케빈 그로스크로이츠의 극적인 결승골로 극적으로 16강 진출에 성공한다. 도르트문트의 무승부를 바라고 80분대 초반부터 산파올로 경기장에서 천천히 공을 돌리고 있었던 아스날, 나폴리선수들, 특히 나폴리선수들은 순식간에 맥이 빠져버릴수밖에 없었다. 결국 나폴리가 추가골을 넣어 2:0 승리를 거뒀지만 경기는 그대로 종료. 종료 5분전만해도 조 3위자리에 있었던 도르트문트는 순식간에 조 1위 16강 진출티켓의 주인이 되어 엄청난 부상자 속출에도 불구하고 2년연속 죽음의 조를 1위로 돌파하는 저력을 보였고, 16강 진출은 했지만 1위에서 2위로 내려간 아스날은 앞으로의 16강 험난한 대진에 한숨을 쉴수밖에 없었으며, 눈앞에서 16강 진출을 놓쳐버린 나폴리는 망연자실할수밖에 없었다. 조 추첨식 종료 후 상당한 죽음의 조로 관심을 모았던 F조였고, 그 명성답게 마지막 경기 종료직전까지도 감히 진출판도를 예상할수 없을정도로 엄청난 혈전들이 펼쳐졌다. 결과적으로 1~3위 3팀이 승점 12점을 획득하며 서로간의 상대전적과 골득실을 따져야하는 상황까지 왔고, 결국 승자는 도르트문트와 아스날이 되었으며 승점 12점을 기록하고도 탈락, 유로파리그에 나가는 비운의 팀은 나폴리가 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16강에서 제니트를 만나게 되었다.
그리하여 16강전, 1차전 원정 제니트를 4:2로 이기면서 2차전을 여유롭게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2차전 안방에서 제니트에게 의외의 일격을 맞으며 1:2로 패배했지만 8강 진출에는 문제가 없었다. 그러나 경기 후반에 슈멜쳐가 부상으로 교체되었고 공격의 핵심인 레반도프스키가 경고누적으로 8강 1차전 결장이 확정되어 걱정거리가 생겼다.
8강전은 레알 마드리드와 리벤지 매치를 치르게 되었다.
리그에선 27차전에 무려 25점이나 승점이 벌어진 바이에른 뮌헨이 리그 최단 우승을 확정지으면서 2위 유지에 매달리게 되었다. 3위 샬케 04와 겨우 1점차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DFB-포칼에선 4강에 진출하여 5위 VfL 볼프스부르크와 맞붙게 되었다. 결승에 올라간다면 결승진출이 유력시되는 바이에른과 또 맞붙게 된다.
챔피언스리그 8강 1차전 레알 마드리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0:3으로 패배하며 4강 진출이 많이 어려워졌다. 벤더,슈멜처,수보티치,귄도간,쿠바 등 주전들의 줄부상에 레반도프스키의 결장으로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던 게임이었지만.... 흔들리던 수비쪽에서는 그나마 후멜스와 바이덴펠러가 분투해서 3실점으로 막았고, 공격쪽은 로이스가 사실상 진두지휘해서 찬스도 많이 만들어냈지만 오바메양이 대부분 날려먹어버렸다(...).
2차전 경기에서는 전반 초반 레알에게 PK를 허용하며 허무하게 4강의 꿈이 날아가나 싶었지만 디마리아의 킥을 바이덴펠러가 선방하며 희망을 이어가게 만들었고, 강력한 압박끝에 결국 페페의 실수를 놓치지 않은 로이스가 전반 24분 선제골을 득점하다니, 13분후 전반 37분에 로이스가 추가골까지 득점하며 희망의 불씨를 살렸다. 그리고 후반전에는 전반전만큼의 압박은 아니었으나 간간히 오는 공격기회에서 위협적인 모습을 보였지만, 그때마다 미키타리안이 번번이 날려먹어버리며 도르트문트 팬들의 억장이 무너지게 만들었다. 결국 더 추가골을 득점하지 못한채 경기는 그대로 종료. 2-0으로 승리를 거뒀음에도 불구하고 합산스코어에서 2-3으로 밀려 탈락해 2차전에서 선전한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뒤에는 리가 30라운드에서 비록 조기 리가 우승으로 동기부여가 떨어졌다지만 주전을 총가동한 바이에른 뮌헨을 '''원정에서 3-0으로 완파하는''' 저력을 보여줬고, DFB-포칼 4강에서 VfL 볼프스부르크를 2:0으로 누르고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DFB-포칼 결승에서는 바이에른 뮌헨에게 0-2로 지면서 준우승했다. 2년전과 달리 바이에른의 더블 제물이 되어버린 셈. 바이에른이 오심으로 이긴 결승이었다.

6.4. 2014-15 시즌, Danke! 클롭!


항목 참조.

7. 투헬의 말벌 군단


클롭 감독 사임 발표 후, 토마스 투헬 감독은 바로 후계자로 낙점되었고, 2015-16 시즌부터 도르트문트를 맡게 되었다. 여담으로 클롭 감독과 똑같은 루트(마인츠 감독➡도르트문트 감독)로 왔다. 전술적으로 단조로운 모습을 보여주는 클롭 감독과 달리, 전술적 다양함을 구사하는 감독이라 다들 많이 기대하고 있다. 다만, 일부에서는 유럽 클럽대항전에 대한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을 걱정하고 있다.[27]

7.1. 2015-16 시즌



7.2. 2016-17 시즌


'''눈물 없인 볼 수 없는 마르코 로이스의 커리어 첫 우승'''

8. 과도기



8.1. 2017-18 시즌


'''부상으로 골골대던 마리오 괴체마르코 로이스가 멱살 잡고 이끌다'''
'''득실차의 소중함을 깨닫게 된 시즌'''

8.2. 2018-19 시즌


항목 참조.

8.3. 2019-20 시즌


항목 참조.

8.4. 2020-21 시즌


12월 13일 뤼시앵 파브르 감독이 경질되었다.
[1]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이름 중 "Borussia"의 어원은 팀 결성 당시 그들이 모였던 양조장인 "Borussia Brewery"에서 따온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이센 왕국과의 연관성은 없다고 할 수 있다.[2] 출처 : http://www.bvb.de/eng/BVB/History/1909, "By the way, the name ”Borussia“ is leant from the Borussia brewery on the street Steiger Strasse."[3] Stadion Rote Erde. 현재는 도르트문트 2군의 홈 경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도르트문트 1군이 1974년까지 이 곳을 홈 경기장으로 이용할 당시엔 약 4만 2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축구 전용구장이었으나 이후 리노베이션을 통해 육상 트랙이 추가된 오늘날의 종합경기장의 모습으로 탈바꿈했다. 육상 경기 수용인원은 2만 5천명, 축구 경기 수용인원은 9,999명이다.[4] 컵대회, 차후 분데스리가로 개편[5] 이때 준우승을 했던 쾰른은 이듬해 분데스리가 초대챔피언 자리에 올랐다.[6] 결승에서 유벤투스에 1차전 1-3패(홈) 2차전 0-3패(원정)으로 준우승했다.[7] 당시 원화 환산 약 140억 원[8] 특히 교체 투입된 당시 도르트문트의 유망주 라르스 리켄의 쐐기골이 가장 인상적이였는데, 역습 상황에서 안드레아스 묄러의 킬패스를 받아 멋진 슛을 날리면서 골을 기록하는등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그리고 이 골은 리켄이 이경기에서 처음 공을 건드렸을때 터진 골이였다.[9] DAX(프랑크푸르트 증권거래소)[10] 이때 바이에른 뮌헨으로부터 200만 유로를 빌리기도 했다.[11] 시즌 종료를 3경기 남기고 레버쿠젠이 승점 5점차로 선두를 달리고 있었으나 2연패를 당하며 2위로 미끄러졌다. 이때 레버쿠젠은 분대스리가-DFB 포칼-챔피언스리그에서 모두 준우승에 그치며 콩레블을 달성하고 말았다.(...)[12] 마티아스 잠머는 선수 및 감독으로 분데스리가 우승을 달성하였다.[13] 해당 시즌 UEFA컵 준우승도 기록했다. 페예노르트 로테르담에 3:2로 패하여 우승에 실패했다.[14] 반 마르바이크 감독이 당초 시즌 후 떠날 예정이었고 메첼더와 켈 등 선수들이 부상으로 아웃된 상황에서도 5승7무5패 9위라는 중위권의 성적으로 전반기를 마감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질되었다. 후임 감독은 위르겐 뢰버였는데 감독 부임 후 첫 경기에서 바이에른을 3:2로 잡으며 쾌조의 스타트를 기록하는 듯 했으나 이후 7경기에서 6패를 당하며 17위까지 떨어지자 경질되었고, 얼마 전까지 함부르크의 감독이었던 토마스 돌이 강등위기의 팀을 수습하며 9위로 마감했다. 33라운드 홈에서 열린 샬케와의 더비경기에서 2:0 승리를 거두며 라이벌의 첫 분데스리가 우승을 가로막았다.[15] 재정 개선 + 꾸준한 성적으로 인해 2013년 현재 도르트문트의 수입은 세계 축구 구단중 10위이며(딜로이트 풋볼 머니 리그 기준) 주급제한을 풀고 유스에 대대적인 투자가 가능할 정도의 수준에 올라왔다. 이렇게 부활한 건 바츠케 회장이 돈을 잘 안 쓰고 쓸 곳에만 쓰며 아낀 것이 크다. 여담으로 14/15시즌이 시작되기 전 챔스 진출에 실패했을 때를 대비해 챔스 보험을 들어놨다고 한다. 여기서도 그의 운영력과 예지력(?)을 엿볼 수 있다. [16] 우승팀 볼프스부르크과 준우승팀 바이에른은 7패였다. 5위 함부르크는 11패.[17] 1위는 35실점의 샬케. 도르트문트는 불과 전 시즌인 2007-08 시즌 62실점으로 최다 실점팀의 굴욕을 안았다.[18] 브레멘-레버쿠젠과 막판까지 챔스 경쟁 3파전 양상이었으나 마지막 2경기에서 자신들보다 순위가 아래였던 볼프스부르크와 프라이부르크에게 1무 1패에 그치며 아쉽게 5위를 차지했다.[19] 6라운드 하노버 96 원정경기에서 1:2로 패배한 후 다음 시즌 4라운드 함부르크 SV 원정에서 2:3으로 패배할 때까지 분데스리가 31경기에서 지지 않았다[20] 이때까지 이번 시즌 바이에른전 2경기를 모두 1:0으로 이겼다.[21] 그러나 다음 시즌에 바이에른이 승점 91점을 따내 그 기록을 경신했다.[22] 이는 분데스리가 팀들의 어쩔 수 없는 한계, 혹은 특성으로 볼 수 있다. 겨울철 휴식기는 커녕 박싱 데이가 있어 경기를 계속 하는 EPL은 물론, 프리메라리가, 세리에 A보다도 훨씬 긴 분데스리가의 빈터파우제(Winterpause)로 인해 선수들은 다른 어느나라보다 길고 충분한 휴식기를 갖게 된다.(그래서 분데스리가는 각 팀의 전반기와 후반기 전력차가 상당히 심하다. 전후반기의 팀이 서로 다른 팀처럼 보일 정도.) 게다가 리그 경기, 포칼(컵 경기)을 다 합친 경기 숫자도 적다. 두터운 스쿼드 자체가 애초에 리그 경기에는 필요하지 않은 셈. 재정이 남아도는 바이에른 뮌헨 정도라면 챔스를 위한 스쿼드도 마련할 수 있겠지만 다른 팀들이 그럴만한 여유는 별로 없다.[23] 아마 주심은 가메스가 고의적인 시뮬레이션 액션으로 슈멜처를 퇴장시키려 한다고 본듯 하다.[24] 정작 괴체는 부상으로 결승전에 결장했다. [25] 2013년 12월 8일까지 부상당한 선수들은 마르켈 슈멜처, 마츠 후멜스, 네벤 수보티치, 스벤 벤더, 누리 사힌, 일카이 귄도간, 마르코 로이스...주전 선수 중 7명이 나가리되었다.[26] 말이 좋아서 3:1이지 레이나가 없었으면 더 큰 스코어로 털었을 경기였다. 그야말로 완전히 압도한 경기[27] 클롭 감독도 초반에 이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