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렛 파브
1. 개요
前 미식축구 선수. 포지션은 쿼터백. 소속팀은 애틀랜타 팰컨스→ '''그린베이 패커스''' → 뉴욕 제츠 → 미네소타 바이킹스.
NFL 역사상 최고의 쿼터백 중 한 명. 3회 연속 MVP이자 1997년 슈퍼볼 XXXI에서 그린베이 패커스를 30년만의 슈퍼볼 우승으로 이끌었던 주역. 그리고 비록 준우승에 그치긴 했지만 1998년 슈퍼볼 XXXII에도 나가는 등 명문 부활의 주역으로서 레전드의 길을 걸었다. 또한 무려 321 경기에 선발출장하였고, 그중 297경기에 연속으로 선발출장하였는데 이는 NFL 역대 1위 기록이다. 2위가 필립 리버스의 211경기임을 감안하면 넘사벽.
2. 유년시절 및 고등학교 시절
파브는 미시시피주에 위치한 걸프포트에서 어빈 파브 (父)(교사)와 보니타 앤 (母)(교사)의 두 번째 자녀로 태어났다.
어릴적부터 교사이자 고등학교 미식축구 코치였던 어빙의 영향으로 인해 미식축구는 물론 야구 등을 하면서 자랐다.
그리고 그가 8학년 (한국의 중학교 2학년) 때 그가 다니던 고등학교 야구부의 주전 투수 나서면서 운동에 두각을 보였으며, 이후 이는 미식축구부로도 이어졌다.
허나 파브는 고등학교 때 그렇게 뚜렷하게 잘하는 선수는 아니였다. 강한 팔을 갖고 있었던 점 이외엔 특별히 잘했던 포지션이 없어서 고등학교 3년 동안 쿼터백은 물론 공격과 수비 라인맨, 세이프티 그리고 심지어 키커와 펀터까지 수행했다. 그래서 지금은 상상하기엔 어렵지만 고등학교 선수 시절 당시 파브는 한 경기에서 5개 이상을 던지는 모습을 보기엔 어려웠다.
3. 커리어
3.1. 대학시절 (1987~1990)
그러한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파브는 대학 미식축구 팀들로부터 많은 관심을 끌어모으진 못 했으나 서던 미시시피 대학교에서 관심을 보였다. 허나 당시 제안된 포지션은 코너백이었으며 파브는 이러한 제의를 거절하고 쿼터백만 고집했다. 그리고 그의 고집으로 인해 그는 백업도 아닌 7진으로 대학 선수시절을 시작했었다.
3.2. 프로시절
3.2.1. 애틀랜타 팰컨스 시절 (1991~1992)
1991년 NFL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33번째 지명으로 애틀랜타 팰컨스에 지명되었다. 하지만 당시 감독이었던 Jerry Glanville이 파브를 드래프트에서 뽑는 것을 탐탁치 않아했고, 자신에게 비행기 사고가 나야 파브를 경기장에서 볼 수 있을 것이라고까지 말 할 정도였다.
1991년 10월 27일 로스앤젤레스 램스 경기에 팀이 크게 리드하고 있는 상황에서 출전하여 패스를 기록하지 못했다.
1991년 11월 10일 워싱턴 레드스킨스 경기에 팀이 크게 리드 당하고 있는 상황에 출전하여 커리어 첫 패스를 던졌으나 인터셉션 당했고, 바로 픽식스로 연결되었다. 이 경기에서 파브는 단 네개만의 패스를 던졌는데 그 중 두개의 패스를 인터셉션 당했고, 단 하나의 패스도 연결시키지 못했다.[1]
이로서 파브의 데뷔시즌에 패스 시도 4, 패스 성공 0 (성공률 0%), 평균 야드 -22.5야드라는 경이로운 성적을 기록한다.
3.2.2. 그린베이 패커스 시절 (1992~2007)
1992년 2월 10일, 데뷔 시즌을 제대로 망친 파브를 당시 그린베이 패커스의 단장 Ron Wolf가 1라운드 19번째 지명권[2] 을 내주고 트레이드로 영입했다. 1991년 드래프트 당시 론 울프(Ron Wolf)는 뉴욕 제츠의 단장 딕 스테인버그(Dick Steinberg)를 보좌하는 부단장으로 일하며 1991년 드래프트에서 파브가 가장 뛰어난 쿼터백이라고 평가했고[3] , 그를 1라운드에서 뽑고자 했으나 뉴욕 제츠는 그해 1라운드 드래프트 지명권이 없었다. 그래서 2라운드에서라도 뽑으려 했으나 바로 전 지명차례에서 애틀랜타 팰컨스에 지명되었다.
트레이드 이후 신체검사에서 무혈성 괴사(Avascular necrosis) 증상이 발견되어 팀 의사들이 신체검사에서 탈락시키고 트레이드를 취소할 것을 권유했지만 Ron Wolf의 직권으로 트레이드를 완료시켰다. 이로서 그린베이 패커스에서의 16년간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브렛 파브의 그린베이 패커스의 주전 쿼터백으로서의 업적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NFL 역사상 유일한 3년 연속 MVP (1995~1997), 2회 연속 슈퍼볼 진출 (1996~97시즌, 1997~98시즌), 슈퍼볼 우승 1회, 프로볼 11회 선정, First-team All Pro 3회 선정, 253경기 연속 선발 출장. [4]
3.2.3. 첫 번째 은퇴 (2008)
3.2.4. 뉴욕 제츠 시절 (2008)
3.2.5. 두 번째 은퇴 (2009)
3.2.6. 미네소타 바이킹스 시절 (2009~2010)
3.2.7. 세 번째 그리고 마지막 은퇴 (2011)
그렇게까지 선수 생활을 계속했지만 결국 나이는 속일 수 없었던 듯, 통산 297경기 연속 출전 기록은 부상으로 중단되었고 2009시즌 슈퍼볼 직전까지 갔던 팀은 온갖 삽질 끝에 4승팀으로 추락, 본인도 쓸쓸히 은퇴하게 되었다. 이 와중으로 그를 떠나보낸 그린베이 패커스는 13년만에 슈퍼볼 우승. 이제 패커스의 팬덤은 더 이상 파브를 그리워하지 않게 되었다.
3.2.7.1. 은퇴 관련
말년에는 매년 시즌 오프만 되면 '''은퇴할까 말까'''가지고 기자 낚시를 자행하다가 막판에 이르러서야 '''1년만 더 해볼래''' 선언하면서 소속 팀에 민폐를 끼치는 처신을 되풀이했다. 오죽했으면 기자들도 더 이상 은퇴기사를 쓰지않고 기다리기만했다. 2011년 은퇴선언 이후에도 한동안은 다시 뛸거라는 의심기사만 나올정도. 위의 현대차 광고도 파브의 철인에 가까운 능력과 현역생활에 대한 욕심에 대한 풍자가 약간 들어 있다. 2020년이면 파브의 나이가 무려 51세가 되는 해인데 그 때까지도 현역으로 뛰면서 리그 MVP를 차지해서 MVP 수상 소감을 인터뷰하는 가공의 상황을 설정한 내용이다. 저기서도 은퇴할까 말까로 기자들을 상대로 낚시질을 하고 있는데, 세상일은 파브의 현역 연장여부 결정처럼 어떻게 진행될지 모르지만 현대차는 일단 사면 파브의 현역기간만큼 오랜 기간 동안 변치 않고 보증을 해 준다는 얘기...
쿼터백을 중심으로 팀의 시스템이 구축이 되는 미식축구의 특성상 은퇴 직전에 있는 프랜차이즈 쿼터백은 은퇴 여부를 빨리 결정해 줘야 팀도 다음 시즌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전력을 구축할 수 있다. 파브처럼 개막 직전이 되어서야 1년 더 해볼래 이러고 나오면 본인이 아무리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어도 팀도 곤란을 겪을 수 밖에 없는 것. 게다가 파브는 연속 경기 선발 출전의 대기록이 걸려있었기 때문에, 파브를 로저스의 백업으로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린베이 시절 말년에는 매년 이 문제로 팀의 골치를 썩였으며, 무엇보다도 파브의 후계 쿼터백으로 들어온 '''애런 로저스'''가 3년간 백업으로 썩으면서, 애당초 파브를 존경의 대상으로 보던 시선도 변해서 불만이 폭발 직전까지 갔다. 결국 파브는 이 때문에 팀을 떠나는 길을 선택했다.
3.2.8.
은퇴한지 2년이나 지난 2013년, 원래 구상했던 전력이 흐트러지면서 기대이하의 성적을 내던 세인트루이스 램스가 시즌 개막 당시의 주전 쿼터백을 벤치로 보내고 대체 쿼터백을 물색하면서 이 사람에게까지 연락을 취했다고 한다(...) 얼마나 급했으면...물론 은퇴한 후로 미식축구계를 떠나서 야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거절했다.
4. 은퇴 후
4.1. NFL 명예의 전당 헌액
2016년에 명예의 전당 후보로 오른 첫해에 바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며 영광을 더했다. NFL 명예의 전당 위원회가 2016년 헌액자들에 대한 회의를 8시간을 넘게 가졌는데, 그 중 브렛 파브의 자격에 대한 논의는 단 9초가 걸렸다고 한다.
4.2. 그린베이 패커스 명예의 전당 헌액
2015년 7월, 그린베이 패커스 측에서 16년 간 팀에 공로한 업적을 인정받아 파브를 그린베이 패커스 명예의 전당에 헌액했고 동시에 그의 현역 시절 등번호였던 4번을 영구 결번 처리했다. 바이킹스로 이적했을 때만 해도 마치 자이언츠 팬이 다저스로 이적한 제프 켄트를 대하는 듯 하는 분위기였으나 불과 5년만에 그런 분위기는 눈 녹듯이 사라지고 램보 필드는 '''돌아온''' 파브에 대한 열광적인 환성과 지지만 있었다. 결국 패커스 팬들은 파브의 바이킹스 이적은 현역 연장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며 여전히 팀의 역사를 빛낸 자신들의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 [5]
5. 기록
2011년 은퇴 후에도 쿼터백 관련 각종 통산 기록은 죄다 이 선수가 보유하고 있다. [6] , 통산 패스 시도수, 통산 터치다운 수, 스타팅 쿼터백으로서의 긍정적인 통산기록에서부터 통산 인터셉션(...), 통산 펌블(...)에 이르기까지.
5.1. 철인
파브는 1992년 처음으로 주전이 된 이래 290경기동안 '''단 한번도 결장한 적이 없는 철인이다'''. 연속 출장 기록을 이어가던 중 손등이 부러지는 부상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랑곳없이 계속해서 출장했다는 후문도 있다. 위의 광고 주인공이 되기도 했으며 팀을 가지고 낚시한다고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40이 가까운 나이에서도 주전 쿼터백의 기량을 유지하면서 자기 기록을 갱신, 늙지 않는 노익장 신화를 작성했다. 현재 최다경기 연속출장기록을 세운 것이 '''무려 297 연속경기출장.'''
그러나 이 기록에는 양분된 시선이 존재한다. 긍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그만큼 파브의 철저한 자기관리와 프로페셔널리즘을 칭찬하지만,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기록을 의식해서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경우에도 출전해서 팀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한다.
6. 플레이스타일
6.1. 건슬링어
7. 평가
8. NFL에서의 위치
9. 팬들과의 관계
파브의 말년 행보에 패커스 팬들이 분개하는 것은, 바로 지구 라이벌 바이킹스로 돌아온 것 때문. 사실 뉴욕 제츠에 갔을때만해도 패커스 팬덤은 파브에 대해서 할만큼 하고 떠났으니 그다지 나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결국 돌고돌아 철천지 원수인 바이킹스에 갔다는 사실로 파브에 대한 옛 애정은 결국 바닥으로 떨어지고, 2009년 미네소타 바이킹스 주전 쿼터백으로 7주차에 램보 필드에 와서 패커스를 물리친 그 경기로 패커스 레전드 브렛 파브는 싹 사라지고 파브는 돈때문에 팀을 두번이나 엿먹인 배신자로 바닥에서 땅을 파고 지하로 내려가게 된다. 사실상 지금 그린베이에서 브렛 파브는 상당히 복잡한 감정이다. 나중에 시간이 가면 브렛 파브가 그래도 그린베이에서 제자리를 찾아 갈거라는 의견도 있지만, 골수 그린베이 패커 팬은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날수 없다고 생각하고 브렛 파브는 영원한 하나의 배신자라고 생각한다.
10. 기타
10.1. 이름 관련
아는 사람은 다 알겠지만 이 선수는 자기 이름을 Fa'''vr'''e라고 쓰고 읽기는 Fa'''rv'''e처럼 읽는 변태스러운 철자법을 사용하고 있다. 뭐 자기 말로는 자기 조상이 프랑스계 이민자라서 옛날부터 그렇게 읽어왔다고 하는데, 프랑스어식 읽기하고도 그다지 상관없는 듯.[8] 현재 미국에서야 워낙 유명한 스포츠 스타라서 웬만한 스포츠 팬이면 이제 이 사람 이름을 잘 못 읽는 사람은 없다만, 그래도 이런저런 연유로 이 사람을 모르는 사람은 전부 이름을 잘 못 읽는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가 드래프트 때 커미셔너가 이름을 호명하면서 "애틀랜타 팰컨스는 서던 미시시피 대학의 쿼터백 브렛 '''페이버''' 선수를 지명했습니다." 하고 당당하게 잘못 읽은 것. 물론 한국에서도 미식축구 모르는 기자는 기사 쓸 때 하나같이 '''파브르''' 아니면 '''파버'''로 쓴다.
10.2. 첫 번째 패스
여담으로 프로 첫 패스 성공이 본인에게 던진 패스가 되었다.
10.3. 할아버지 파브
2010년 시즌 도중 딸이 딸을 출산해서 NFL 역사상 최초로 '''현역 선수로서 할아버지가 되면서''' 아무도 이루지 못한 또 하나의 업적을 달성했다. 아직 41살인데 딸이 20살이고, 또 그 딸이 20살에 애를 낳았다. 문제는 애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는 거. 법적으로야 당연히 문제가 없지만, 그래도 선수 본인 젊었을 시절부터 악명을 휘날리던 양아치적 행실은 집안의 유전일지도.
10.4. 그 외
2020년 미국 대통령 선거 때 본인의 트위터를 통해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한다고 견해를 밝혔다.
11. 구설수
11.1. 성추행
뉴욕 제츠 시절에는 구단 여직원에게 외설 메시지를 보낸 사실까지 들통나서 리그 사무국으로부터 거액의 벌금을 먹는 등 말년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것도 흠이다. 원래 NFL 입단할 때도 더러운 성격에 양아치같은 행실로 그의 성공 가능성에 대하여 회의를 가진 팀이 많았다. 그 때문에 드래프트 지명도 2라운드에서 받았고. 패커스로 트레이드 되고 나서 마이크 홈그린이라는 명감독을 만나 사람 좀 되었나 싶더니만 결국 제 버릇 개 못 준다고, 은퇴할 때까지 본인의 화려한 업적에 스스로 먹칠을 한 셈. ...
[1] 심지어 색도 한번 당해 11야드를 잃었다.[2] 이 19번째 지명권은 1992년 NFL 드래프트에서 토니 스미스(Tony Smith)라는 러닝백을 영입하는데 사용되었는데 이는 철저히 실패한 드래프트 지명으로 평가 받는다. 여담으로 당시 감독이었던 제리 글랜빌(Jerry Glanville)은 팀이 토니 스미스를 뽑는 것도 탐탁치 않아했다.[3] 실제로 브렛 파브보다 먼저 뽑힌 두명의 쿼터백의 프로 경력은 파브와 비교할수 없을 정도로 초라하다.[4] 이 기록은 은퇴 번복후 다른 팀들로 이적을 한 후에도 이어져 297경기 연속 선발 출장을 기록했고, 이 또한 NFL의 기록이다.[5] 미국의 타 프로스포츠들과 달리 미식축구의 세계는 철저히 비지니스 마인드로 운영되기 때문에 이러한 경우들은 대개 용납이 되는 편이다. 일례로 2020 프리시즌 톰 브래디가 뉴잉글랜드 패트리어츠를 떠나 탬파베이 버커니어스로 이적을 했을 때에도 뉴잉글랜드 팬들은 이적을 비난하기보다는 그의 결정을 응원하는 편이었다. 다만 파브의 경우에는 하필이면 이적한 팀이 철천지 원수로 여기는 지구 라이벌 팀인데다 그 팀 유니폼을 입고 패커스의 앞길을 가로막는 역할을 했기 때문에 브래디와는 달리 현역 막판에는 그린베이 팬들에게 꽤 까였다. 브래디도 패트리어츠와는 완전이 동떨어진 버커니어스로 이적했으니까 응원을 하는 거지 새팀 찾아본다고 하고 팀을 나가서는 계약한 팀이 뉴욕 제츠나 마이애미 돌핀스였다면 파브와 마찬가지로 까는 팬들이 나왔을 것이다.[6] 2014년 10월 20일자로 510개를 성공시킨 페이튼 매닝이 경신했다. 파브는 통산 508회[7] 패스가 상대에게 인터셉트당한 횟수[8] 프랑스어 발음으로 '''파브흐'''에 가깝다. 하지만 미국식 영어발음은 원체 타 언어의 발음을 뭉개뜨리는 습성이 있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