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 파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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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2. 제1차 사법 파동
2.1. 배경
2.2. 발단과 전개
2.3. 영향
3. 제2차 사법 파동
4. 제3차 사법 파동
5. 제4차 사법 파동(대법관 임명 제청 파동)
6. 제5차 사법 파동
7. 제6차 사법 파동(사법 농단)


1. 개요


행정부와 사법부의 충돌로 소장 판사들이 중심이 되어 벌인 항명 사건. 사법부는 공식적으로 1차, 2차 사법파동만 인정하고 있으며 4차, 5차 사법 파동을 사법 파동으로 인정할 것인지에 대하여 약간의 논란이 있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다섯 번에 걸쳐 일어났다고 보고 있다.
'사법 파동'은 제1차 사법 파동 당시 언론에서 명명한 것으로 부정적인 인상을 주는 '사법 파동' 대신 '사법 민주화 운동'으로 바꿔 불러야 한다는 의견도 있으나 여기서는 일반적으로 잘 사용되고 있는 '사법 파동'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2. 제1차 사법 파동



2.1. 배경


제1공화국 시절만 해도 일제치하에서 민족변호사로 이름을 날린 초대 대법원장 가인 김병로의 보호 아래 사법부는 외풍을 받지 않고 비교적 편안하게 신념을 지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퇴임 이후 그의 후임들은 그만한 역량을 가지지 못하였고 자연히 사법부의 독립은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5.16 군사정변을 통해 집권한 집권 세력들은 호시탐탐 사법부의 장악을 노렸는데 이 일환으로 집권 직후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을 통해 모든 법관을 퇴임시키고 재임용하는 조치를 하였다. 그리하여 종전의 법관 가운데 47명은 의원면직되었고 5명은 다시 임명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대다수가 군인으로 구성된 혁명검찰부와 혁명재판소를 설치하여 혁신계 정당, 사회단체 관계자, 교원노조 관계자 등 다수계 혁신계 인사들을 용공분자로 규정해 대거 구속 또는 처형 하였으며 현역 군인인 전우영 대령이 사상 최초로 법관 자격 없이 법원행정처장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 뒤로도 한일협정 항의 시위자에 대한 구속영장 기각에 불만을 품은 무장군인의 법원 난입(1964), 동백림 사건에 대한 대법원의 판단을 비난하는 괴전단와 괴벽보, 익명편지(1968) 등 행정부의 사법부 흔들기로 의심되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사법부와 정권과의 갈등은 사법부가 정부의 입장에 반하여 징발보상 관련 법 등에 위헌 결정을 한 것에 뒤이어 대법원 '이중배상 금지'라 불리는 국가배상법 제2조 1항 단서[1]를 위헌으로 결정했을 때 극에 달했다. 이 조항의 위헌 결정을 막기 위해 위헌 결정의 정족수를 대법관 전원의 2/3 이상 출석과 2/3 이상 찬성으로 가중하는 법원조직법까지 통과되었지만 대법원은 법원조직법을 먼저 위헌을 때리고 직후에 국가배상법에 대해 위헌 결정해버리는 패기를 보여주었다. 그동안 정부에 대해 약한 입장이었던 사법부가 제 목소리를 낸 이 위헌 결정은 많은 언론에서 '조용한 혁명'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획기적인 사건이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은 '나라 형편을 모르는 사람들'이라며 분노하였다고 전해진다. 사실 행정부의 사법부 침해 논란과 별개로 당시 베트남전쟁 파병으로 부상.전사가 급증한데다, 당시 지주에게 시세의 50%가량을 보상해야 하는 경제개발에 투입될 돈이 보상금으로 인해 차질을 빚는 상황이 전개될 수 있었다.
또한 사법부가 잇단 시국 사건에서 구속영장을 기각하거나 무죄를 선고하는 것도 정부를 자극했다. 1971년 1월 27일 당시 신민당 대통령 후보였던 김대중 의원의 집 뜰에서 사제 폭발물이 터지자 검찰은 김후보 측의 자작극이라면서 김후보의 조카인 김홍준(당시 중학생)을 구속하였는데 법원에서 구속적부심 심사에서 석방을 명하였다.[2] 또한 대통령 선거에 분노한 대학생들이 신민당 당사에 난입한 사건, 월간 '다리' 지 필화 사건[3]에 대해서 무죄가 선고되었다. 특히 신민당 당사 난입 사건은 정부에서 특별히 대통령 취임 이후 판결을 내릴 것을 청탁한 사건이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판결을 내린 것이기 때문에 박정희가 격노하여 민복기 대법원장에게 항의까지 하였다고 한다.
또한 1971년 민주공화당 당원 난동사건에서 유수호 부장판사는 부산진구 개표소에서 난동을 피운 민주공화당 당원들을 법정구속하였고, 1971년 4.27 개표조작사건의 주범인 울산시장 윤동수에게 징역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하였다. 당시 정국을 뒤흔들게 된다.
이렇게 사법부가 행정부와 충돌하는 일이 많아지자 박정희 정부는 사법부 길들이기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꼈고, 이는 사법 파동으로 이어진다.

2.2. 발단과 전개


1971년 7월 28일 새벽, 서울지방검찰청의 이규명 검사는 제주도로 출장을 나가 피고인 측 변호인으로부터 향응을 받았다는 혐의로 서울형사지방법원의 이범렬 판사 등에 대한 구속 영장을 청구하였다. 이범렬 판사가 여관비나 식대 등의 향응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당시 법원 예산의 부족으로 출장비는 출장 신청인(이 경우에는 피고인)이 부담하는 것이 관례였던 점, 당해 사건에서 피고인 측이 지급한 돈이 통상의 출장의 경우와 그다지 차이가 나지 않는 점, 이범렬 판사가 반공법 위반 사건을 포함된 사건들에 무죄를 선고하거나 선고 유예를 했다는 점에서 이는 검찰 측의 보복 조치로 판단한 서울형사지방법원[4] 판사들은 항의의 의미로 사표를 제출하였고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들도 이를 비난하는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제1차 사법 파동의 시작이었다.
구속영장은 도주와 증거인멸의 우려가 없다고 하여 기각되었으나 검찰은 다음날 새벽 다시 구속영장을 청구하였다. 이에 지방 소재 법원 판사들도 사태의 추이를 보아 사표를 제출하기로 결의하였으며 나아가 국회에서까지 문제가 되었다. 비록 구속영장이 기각되기는 하였으나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들은 결국 사표를 제출하였고 서울형사지방법원 판사들과 함께 '사법권 수호 결의문' 을 발표하여 사법권 독립을 위태롭게 하는 일곱 가지 요소를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대한변호사협회를 포함한 지방의 변호사협회도 성명을 발표하였다.
8월 3일 대법원판사회의 이후 잠시 소강 상태였다가 개선 조치가 취해지지 않자 서울형사지법과 서울민사지법이 다시 성명을 발표해 검찰 관계자의 처벌을 요구하였고 검찰은 즉각 반발하였다. 그리하여 다시 사표 제출이 연이어져 8월 말까지 법관 150여 명이 사표를 제출하였다. 당시 전국 판사 정원이 450명이었던 것을 볼 때 1/3이 사표를 제출한 것이다.
하지만 상황은 그리 좋지 않았다. 실제야 어떻든 뇌물수수 사건이기 때문에 판사들의 '제 식구 감싸기' 로 보일 수 있었고 거기다 피고인이 반공법 위반이었기 때문에 색깔론까지 덧씌워졌다. 8월 27일 민복기 당시 대법원장의 사표 철회 호소를 계기로 줄줄이 법관들의 사표는 철회되었고 사법권 독립 요구는 흐지부지 되었다.

2.3. 영향


사건의 중심에 있던 이범렬 부장판사는 파동이 마무리 된 뒤 의원면직되었고 사법파동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송명관 서울형사지방법원장은 대전지방법원장으로 좌천되었다가 의원면직되었다. 소장파 판사로 사법권 독립과 검찰 측의 인책 요구에 앞장섰던 홍성우, 김공식 두 판사도 사표를 제출하였다. 반면 검찰 측 관계자는 잠시 지방으로 좌천되기도 하였으나 1년도 되지 않아 청와대 등 주요 요직으로 복귀하였다.
1972년 1972년 국민투표유신헌법이 제정되자 박정희 정권은 사법 파동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사법부의 독립을 박탈했다. 헌법위원회를 만들어 대법원의 위헌법률심사권을 박탈하였고 '''대통령이 대법원장과 대법관을 포함한 법관의 탄핵과 임명을 자유롭게 할 수 있게 하였다.''' 또한 1973년 법원조직법을 개정하여 기존의 모든 법관들을 재임용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리하여 국가배상법 제2조 제1항에 대한 위헌 의견을 낸 대법관 9명이 재임용에서 탈락하였고 김대중 대통령 후보 폭발물 사건에서 피의자를 석방했던 백종무 판사, 신민당사 사건의 양헌 판사, '다리' 지 사건의 목요상 판사 등이 의원면직되었다. '말 안듣는 판사'로 낙인찍힌 유수호 부산지법 부장판사 역시 재임용에서 탈락한다. 그리고 제1차 사법 파동의 발단 중 하나인 이중배상금지는 헌법에 들어가 현행 헌법까지도 남게 되었으며 '위헌인 헌법조항'에 대한 끊임없는 논쟁을 낳게 되었다.[6]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사법 파동의 실패 이후 법원의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것이다. 사법 파동 전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도 법원을 어려워하는 편이었고 법원도 중앙정보부나 경찰의 눈치를 봐서 그 위세가 무서워서 할 것을 못 한다든가 하는 분위기는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분위기는 사법 파동의 실패 이후 급격히 변화하기 시작했다.

3. 제2차 사법 파동


1972년 이후 사법부는 오랜 침묵을 지켰다. 그것은 6월 항쟁으로 제6공화국이 출범한 이후로도 마찬가지였다. 전두환 시절의 김용철 대법원장을 다시 대법원장으로 임용하려는 정부의 시도와 이를 빌미로 정치적 거래를 시도하는 국회의 행태에 분노한 서울 지역의 소장 판사들은 '새로운 대법원의 구성에 즈음한 우리의 견해'를 발표하고 연판장을 돌렸다. 지방의 법관들도 서명에 동참하여 335여명의 판사들이 서명하였다. 결국 김용철 대법원장이 사퇴하였다.
정부는 사태가 어느 정도 진정된 뒤 정기승[7] 대법원 판사를 대법원장으로 내정하였다. 이는 정기승이 신민주공화당 김종필 총재의 고향 후배라는 점을 노려 야권을 분열시키려는 의도로 해석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회에서 과반수에 달하는 기권표을 던져 헌정 사상 처음으로 대법원장 임명 동의안이 부결되었다. 그리하여 유신 치하에서 소신을 지켰던 이일규 전 대법원 판사가 대법원장으로 취임하였다. 이일규 대법원장은 인민혁명당 판결 당시 유일하게 반대의견을 냈다.
제2차 사법 파동 이후 파동의 주역들이 모여 창립한 우리법연구회는 제3, 4차 사법 파동에서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제5차 사법 파동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하였다.

4. 제3차 사법 파동


문민정부 출범 직후인 1993년,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으로 사회가 시끄럽던 때에 박시환, 강금실, 김종훈 등 서울민사지방법원의 소장 판사들 40여명이 '사법부 개혁에 관한 우리의 의견'을 발표하였다. 이미 광주지방법원방희선 판사, 서울지법 서부지원의 김종훈 판사, 대구지법의 신평 판사 등이 개혁의 필요성을 제기한 뒤였다. 본 성명에서 소장 판사들은 '판사들은 판결로 말해야 할 때 침묵하기도 했고 판결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말하기도 했으며 판결이라는 방패 뒤에 숨어 진실에 등을 돌리기도 했다'는 뼈아픈 자기 반성과 함께 다시는 과거와 같은 잘못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사법부 내에 대법원장 인사권의 제한, 관료적 직급제의 개선, 법관회의 상설화 등 제도적 장치를 마련할 것을 촉구하였다.
소장판사들의 사법부 개혁 촉구는 7월 1일 대한변협과 민변의 수뇌부 및 정치판사 퇴진 요구로 이어졌고 7월 16일 사법연수원생도 이에 동참하여 성명서를 발표하였다. 사법수뇌부는 처음에는 '독립을 침해하는 중대 사태'로 규정하였으나 각계각층의 사법 개혁 요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결국 김덕주 당시 대법원장은 공직자 재산공개 파동과도 겹쳐 납득할 수 없는 재산을 소유하고 있다는 사유로 사임하였다.

5. 제4차 사법 파동(대법관 임명 제청 파동)


2003년 5월 22일 서울지법 판사 26명이 대법원에 법관인사제도 개선위 건의문 및 사법 개혁 방안을 전달하는 등 사법개혁의 필요성이 제기된 결과 마침내 동년 8월 12일, 임기만료로 퇴임하는 대법관의 후임자 선임을 위해 사법 사상 최초로 대법관제청자문위원회의가 열렸으나 종전 관행에 따라 서열대로 후보자 3명이 선정되었고 강금실 법무장관과 박재승 대한변호사협회장은 이에 항의하는 의미로 회의 도중 퇴장한 뒤 사퇴하였다. 다음 날 박시환 서울지법 부장판사가 사표를 냈으며 이날 오후 서울지법 북부지법 이용구 판사가 '대법관 제청에 관한 소장 법관들의 의견' 이라는 글을 법원 내부 게시판에 올려 159명[8]의 판사가 이에 서명하여 14일 오후 대법원장에게 제출하였다. 법원일반직원도 제청파문에 대한 의견을 묻는 이메일을 돌렸다.
8월 18일 최초로 전국법관대표회의가 소집되었고 심야까지 이어진 격론 끝에 이번에는 최종영 대법원장의 의견을 존중하되 다음에는 인사제도를 개혁하자는 것으로 논의는 일단락되었다. 비록 예정대로 김용담 광주고등법원장이 신임 대법관으로 임명되었으나 개혁요구는 받아들여져 전효숙 서울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첫 여성 헌법재판관으로 임명되었고 2004년 김영란 대전고등법원 부장판사가 첫 여성 대법관으로 임명되었다.

6. 제5차 사법 파동


2009년, 신영철 대법관이 서울중앙지법원장에 재직할 시절 촛불집회 관련 사건에 대해 '현행법대로'[9] '신속하게' 재판할 것을 담당 판사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다는 것이 KBS에 의해 보도되었다(그가 서울중앙지법원장에 재직할 시절에도 일부 소장 판사들이 촛불집회 사건 배당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바 있었다.). 대법원은 3월 6일 진상조사단을 꾸려 조사에 착수하였으며 신영철 대법관은 사상 최초로 윤리위원회에 회부되었다. 5월 8일 윤리위원회는 재판권 침해 소지가 있었음을 확인하고 경고를 권고하였으며 5월 13일 이용훈 대법원장의 엄중 경고가 있었다.
그러나 소장 판사들은 이러한 재판권 침해 행위가 경고에 그쳤다는 것에 반발하여 전국의 각 지법에서 단독판사회의를 열었다. 이 와중에 제2~4차 사법 파동의 주역인 박시환 대법관이 이 사건을 '제5차 사법 파동' 으로 규정하면서 논란은 확산되었다.
민주당친박연대 등 야5당은 신 대법관에 대한 탄핵소추안을 발의하였으나 폐기되었다. 한때 신 대법관은 사퇴의사를 밝히기도 하였으나 곧 철회하고 2015년까지 정상적으로 임기를 마쳤다. 퇴임사에서 사과나 유감 표명은 한 구절도 없었다. 일선 판사들은 "재판관여 논란이 없었다면 신영철 대법관이 법원행정처장이 됐을 것이다. 그거라도 막은 게 어디냐."라는 자조 섞인 말을 주고받았다.

7. 제6차 사법 파동(사법 농단)


위의 사건들은 민주화와 정의를 위한 사법부의 파동이라면, 이 사건은 위와 반대로, 사회 최후의 양심이 되어야할 사법부가 이를 망각하고, 사법 불신을 초래한 사건이다. 자세한 것은 양승태 대법원 사법농단 의혹 사건 문서 참조.
[1] 제2조 (배상책임) ① 공무원이 그 직무를 집행함에 당하여 고의 또는 과실로 법령에 위반하여 타인에게 손해를 가하였을 때에는 국가 또는 지방자치단체는 그 손해를 배상하여야 한다. 다만, 군인 또는 군속이 전투·훈련 기타 직무집행중에서 발생하였거나 국군의 목적상 사용하는 진지·영내·함정·선박·항공기 기타 운반기구안에서 발생한 전사·순직 또는 공상으로 인하여 다른 법령의 규정에 의하여 재해보상금 또는 유족일시금이나 유족연금등을 지급받을 수 있을 때에는 이 법 및 민법의 규정에 의한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없다.[2] 이 건은 김대중측의 자작극이거나 암살시도는 터무니없다는 것이 중론이다.[3] 피고인들이 김대중 후보에 대한 홍보 지원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선거 방해를 위한 표적 수사였다는 견해도 있다.[4] 당시 서울지방법원은 형사지방법원과 민사지방법원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또한 지금처럼 서울 내의 지방법원이 동부, 서부, 남부, 북부, 중앙으로 분리되기 전이기도 했다.[5] 국가원로자문회의법은 1989년에 폐지되었다.[6] 현행 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성립되는 1987년 개헌당시 이 조항을 폐지할 기회가 있었는데 정치인들의 이해관계 등으로 흐지부지되었고 개헌이 이루어지면 사문화국가원로자문회의[5]와 함께 가장 먼저 삭제해야 할 조항으로 손꼽힌다.[7] 참고로 정기승은 엄청난 친박이다. 유신 시절부터 온갖 이득은 다 봤고, 노무현 대통령 탄핵사태 때에는 국회 측 변호인단으로 참여했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심판 때에는 박근혜 측 변호인단으로 참여했다.[8] 서명 마감일인 14일 오후 1시까지 144명이 서명하였으며 그 후 15인이 추가로 동참 의사를 밝혔다.[9] 당시 집시법의 해당 조항이 위헌법률심판제청이 되어 있던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