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인학원
1. 소개
1965년 백인엽이 인천광역시 미추홀구 도화동(당시 경기도 인천시 도화동)에 설립했던 사립 학교법인이다. 정식 명칭은 '''"학교법인 선인학원"'''이었지만 보통은 '''"선인재단"'''이라는 이름으로 기억되고 있다. 무려 15개의 학교를 도화동 일대에 설립하여, 1980년 기준으로 인천 중고교생의 23%가 선인학원 소속 학교에 재학하고 있던 당시 동양 최대의 사학재단이었다.
'''1980년대 후반에 태어난 사람까지 한정으로 인천광역시 출신이라면 이 재단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하고 있다.''' 왜냐면 학교 재단의 규모가 워낙 크고 아름다운 점도 있었지만 이 재단의 비리 수준도 차원이 다른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인천 사람들이 백인엽에게 분노하고 그를 비난하고 있다.
결국 숱한 비리 논란 속에 1994년 백인엽이 학교 재산 일체에 대한 경영권과 소유권을 인천직할시에 헌납하겠다고 선언하면서 선인학원은 해체되었고, 학원 소속 학교들은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2. 역사
1958년 7월 현역 장성인 백인엽이 당시 재정난을 겪고 있던 ‘성광학원’(성광상고, 성광중)을 인수하여 시작되었다. 선인학원으로 이름으로 바꾼 것은 1965년이다. 일반적으로 1965년에 설립되었다고 많이 나오지만 이름만 바꾼 것일 뿐 실질적으로 1958년에 시작되었다.
재단의 이름인 선인은 설립자인 백인엽과 그의 형인 백선엽의 가운데 글자를 따서 만들었다. 재단 이름에 백선엽, 백인엽 형제의 이름이 모두 들어가 있지만 선인학원의 소유권은 100% 백인엽에게만 있다. 학원 설립 직전 형의 구명 덕분에 풀려나 학원을 설립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감사의 의미로 형의 이름을 재단 이름에 함께 넣은 듯 하다. 뿐만아니라 재단 산하에 있는 학교 이름에 식구들 이름을 죄다 갖다 붙였다(...).
백인엽은 수만명의 군장병들을 영양실조에 걸리게 한 대규모의 군비리를 저질러 당시 막 집권한 박정희 정권에 의해 1962년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박정희의 은인이자 대한민국 국군의 상징적 인물인 친형 백선엽[2] 덕분에 구명받아 10개월만에 풀려났다. 군복을 벗게 된 백인엽은 1964년부터 본격적으로 선인학원을 대규모로 키우면서 각종 비리를 저지르기 시작한다.
백인엽은 1964년 인화여자중와 인화여상업을 설립했고, 이듬해엔 성광중학교 교명을 선인중학교로 바꿨다. 그 이후 항도상업기술학교를 인수하고, 효열국민(초등)학교 등을 신설했다. 또한 운산기계공업고등학교(1977)와 인천대학(1979)을 설립하고, 인천체육전문대학과 인천공업전문대학을 인천전문대학으로 통합(1981)했다.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이 모여 있는 도화동 캠퍼스 부지는 과거에 많은 중국인들이 살았던 곳이자 묘지촌이었으나 백인엽이 학교를 조성하는 과정에서 이들을 위협하여 강제로 내쫓았다고(...) 한다.
선인학원은 건물 안에 화장실 하나 없고 제대로 마감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내에 분진이 뿌옇게 나는 등 막장인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초중고교만 있던 시절에는 그래도 이러한 사실이 크게 공론화되지 않았다. 당시에 별론 공론화가 되지 않은 이유가 몇가지 있다.
사실 1960~70년대 대한민국의 교육 여건은 오늘날 학생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열악했다. 학생수에 비해 학교가 턱없이 모자라서 국민학교에서 2부제 수업이 일상이었던 시절이었다. 당시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는 학교는 흔했다. 서울에서도 1980년대까지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는 학교가 흔했고 90년대에도 좀 오래된 학교는 대개 화장실이 건물 밖에 따로 있었는데, 특히 역사가 깊은 명문 고등학교들이 그랬다. 일례로 1979년까지 종로구에 있다가 강남으로 이전한 경기고등학교는 정독도서관으로 바뀌어 지금도 교사가 남아있는데, 정독도서관은 건물 안에 화장실이 없었다.[3] 1970년대 이전에 지어진 오래된 학교들은 대부분 건물 밖에 화장실이 있었다가 2000년대 이후 새로 건물 안에 화장실이 지어진 경우가 대부분이다. 게다가 선인학원은 실업계 고등학교가 대부분이었고, 인천에서도 평판이 좋지 않아 지원순위가 후순위였던 학교가 많다.당시 인천시의 특성으로 부모들이 맞벌이로 일하는 경우가 많아 학부모들이 교육에 신경을 쓰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9년 인천대학교가 설립되고 대학생들이 들어오면서 상황이 바뀌기 시작한다. 인천대학에 입학한 대학생들은 건물 내에 화장실 하나 없는 막장 환경에 충격받았다. 당시 대학진학률이 20% 미만이었던 시절이라 당시에 대학에 입학했다는것만으로도 엘리트 인증이었던 시절이었다. 중고교는 그렇다 치더라도 당시 기준으로는 정말 비싼 등록금을 내고 다니는 대학교에 화장실이 제대로 없다는 것은 엄청나게 푸대접한 것이다.[4] 과방, 동아리방 공간조차 제대로 없어 건물 밖에 가건물 비슷한 것을 지어 이용해야 했다. 인천대학생들은 열악한 환경에 분노하여 선인재단의 비리를 규탄하는 시위에 나섰다. 1980년초 민주화 바람을 타고 인천대 학생들의 시위는 더욱 거세졌고 마침내 재단 소속 고등학생들까지 시위에 가세했다.
1980년 전두환 정권 초기에 정권의 정당성을 얻기 위한 개혁이 실시되었을 때, 선인학원에 문교부 특별감사가 실시되었다. 그 결과 상상을 초월한 대규모 비리가 밝혀졌고, 1981년 3월 12일 백인엽은 대검찰청 특수부로부터 부정부패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이규호 문교부 장관은 선인학원의 문제점을 심각하게 여겨 선인재단을 해체하고 국·공립으로 만들겠다고 국회에서 발언했다. 결국 백인엽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1981년 3월 23일 선인학원을 국가에 헌납했다고 서약했다.
그러나 이때 백선엽이 개입하여 관선 이사가 되면서 선인학원의 국·공립화는 무산되었고, 백인엽이 일선에서 물러나는 것으로 타협되었다. 백인엽은 표면적으로는 재단 이사장에서 물러났지만 재단 이사진은 여전히 백인엽의 측근들로 구성되어 있어 백인엽의 허락이 없으면 나무 한포기 옮겨 심을 수 없었다고 한다.
1985년 10월 백인엽이 자문위원직을 만들어 복귀하면서 사실상 전권을 휘두르자 학생들과 교직원들의 반발이 격화되었다. 1986년 10월 30일 전국 최초로 53일간 휴교령이 내려지기까지 했다. 인천대 학생들의 학원민주화투쟁이 인천뿐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슈화되자 결국 1986년 12월 백인엽은 '대학 운영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문교부에 제출하고 다시 일선에서 물러났다.
당시 인천대 시위는 당시로서는 매우 드물게도 운동권과 연계되지 않은 순수한 학생 운동이었다고 한다. 당시 서울대 농대 등 운동권에서 몇 차례 연대 제의를 했으나 인천대 학생들은 순수하게 사회의 불의에 저항하는 운동일 뿐이라면서 운동권의 연대 제의를 거부했다고 한다. 인천대 학생들과 동문들은 이점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결국 80년대 후반 새로 구성된 이사회가 나름대로 개혁을 실시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급진적인 학생들의 반감을 사서 퇴진하고 말았다. 학생들에게는 새로운 이사회의 개혁도 성에 차지 않아 더욱 많은 요구를 했고, 재단 이사들에게 사재까지 털어 학교에 기부할 것을 요구했다고 한다(...) 당시 이사회를 못마땅해 하던 백인엽이 배후에서 학생들을 부추겼다고 한다.
1990년 9월 11일, 쏟아진 폭우로 옛 박문여고와 선인중학교 사이(동구 송림5동 103-9번지) 야산 축대가 무너져 23명이 사망하는 '송림동 매몰 참사'가 발생했다. # 선인학원이 운동장 등 부지 조성을 위해 절개하고 대충 쌓은 축대가 결국 무너진 것이었다. 분노한 유가족은 11월 1일 서울 서대문구 창천동에 있는 백인엽의 자택을 점거하고 농성을 전개했다. 그러자 농성 3일째인 11월 3일, 선인학원은 보상금 전액을 지급했다. 이 사건은 백인엽이 선인학원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알리는 계기가 됐다.
1991년부터 백인엽의 복귀 움직임이 본격화되자 인천대 학생들의 시위가 다시 한번 본격화되었다. 학생들은 총장·부총장·처장실을 점거했으며, 재학생의 과반수가 자퇴서에 서명했다. 1992년 초 인천 지역 각계 인사들과 시민단체들이 ‘선인학원 사태를 우려하는 인천시민의 모임’을 발족했다. 시민단체들은 10만명 서명운동을 벌여 7만명의 서명을 이끌어냈다. 교육부는 종합감사팀을 보내 1992년 4월17일부터 25일까지 감사를 실시했다. 92년 6월 10일 교육부는 감사 결과에 따라 재단 이사 7명을 해임하고 관선 이사 9명을 파견하며 학원을 운영토록 했다. 이에 백인엽 추종세력인 「백파」와 이에 반대하는「비(非)백파」간 갈등이 심화되기도 했다. 1992년 MBC PD수첩이 선인학원 비리를 방영하여 전국적인 관심을 얻게 되었다.
인천대와 인천전문대 학생들은 상경하여 여의도 국회 앞에서 재단 비리 수사를 촉구하며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 결국 1993년 6월9일 백인엽은 권한 일체를 인천시장에게 넘겼다. 인천시는 교육부, 내무부, 총무처 등 중앙부처와 협의를 거쳐 1994학년도부터 대학, 전문대학은 인천시가 관할하는 시립으로, 초중고교는 인천시 교육청이 관할하는 공립으로 전환되었다.
3. 열악한 교육 환경
선인학원 건물들은 크고 웅장하게 지어서 겉으로는 멋있어 보였으나, 실은 준공 검사도 받지 않고 무단으로 지어 사용한 불량 건물들이었다. 겉만 멀쩡할 뿐 내벽 공사를 하지 않아 건물 내부는 매우 열악했고, 실내 바닥에 뿌연 시멘트 먼지가 일었다고 한다.
건물 내에는 수도 시설은 물론이고 실내 화장실이 없는 건물이 많았다고 한다(...) 물론 대한민국에서 1980~90년대까지도 실내 화장실이 없는 학교는 드물지 않았지만 문제는 선인재단 학교 교사가 상당히 고층이었다는 점이다. '''항도 - 운봉 - 운산 3개교의 수천명의 학생들이 함께 사용하던 13층짜리 건물에도 화장실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화장실이 없는 것은 여학교들도 마찬가지. 중고교 건물은 물론이고, 구 인천대, 인천전문대 등 8~9층 짜리 대학 건물에도 80년대까지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화장실을 가려면 1층까지 내려와 실외 화장실을 사용해야 했는데, 그마저도 화장실을 이용하기 위해 학생들과 교사들이 빽빽하게 서서 차례를 기다리는 게 일상이라 사용이 어려웠다고 하며 꽃다운 여학생들이 소변을 참느라 방광염에 많이들 걸렸다고 한다. 나중에 백인엽이 물러난 직후에야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었다고 한다.
게다가 석면을 엄청나게 사용해서 나중에 인천대 등 선인학원 건물들을 해체할 때 석면 유출 문제가 심각하게 문제가 되기도 했다.
선인고등학교의 창문은 1991년까지만 하더라도 옛날식 창문인데다 청소하기 매우 불편한 구조여서 유리창 바깥쪽은 아예 청소를 하지 못했다.(...) 그리고 1991년에 학부모들에게 돈을 걷어 옛날식 창문을 알루미늄 샤시로 교체했다.
14개나 되는 학교들이 몇 개 안되는 운동장을 나눠 써야 했기 때문에 매우 불편했다고 한다. 초등학생은 중학생에게, 중학생은 또 고등학생에게 쫒겨나기 일쑤였다고 한다.
무자격 교사들의 임용 비리 문제도 끊임없이 지적되었다. 실제로 1991년에 선인고등학교에서는 학생주임 겸 수학교사가 있었는데, 수업 시간에 수학의 정석 유제를 풀어달라는 한 학생의 요청에 시간 내내 유제도 제대로 풀어주지 못하고 끙끙대기만 하다가 고대로 수업이 끝나버려 개망신을 당한 흑역사가 있었다. 빽으로 들어온 거 아니냐는 뒷담화로 두고두고 까였다고 한다.
또 선인학원은 설립자 백인엽의 영향을 받아서였는지 군대식 문화로도 유명했다. 교사들에게 예비군 군복을 입혀서 보초를 서게 하고, 순찰을 돌게 했다. 이는 여교사들이라고 해서 또 예외가 아니었는데, 등교 시 교문 앞에 나와 있던 여교사들까지 수통을 착용해야 했으며, 순찰시 암구어를 대야 했다고 한다(...).
이런 전근대적인 문화에 대한 반발이었는지 1989년에 전교조가 설립된 후 선인재단 소속 학교 교사들 중 젊은 교사들이 전교조에 다수 가입했다. 훗날 선인고등학교 출신의 민주노동당 한 핵심 당직자는 '평범하게 살 뻔했던 내 인생은 비리 투성이인 선인재단과 전교조 선생님들이 바꿔놓은 것'이라고 술회하기도...
인천전문대 학생들도 '''교복을 착용하고 아침 정시 등교 및 두발 단속을 받았다고 한다'''(...).
선화여중의 경우 1980년대 중반 전두환 정권 시절에 도덕 과목 문제로 '위대하신 우리 선인학원의 설립자와 이사장님은 누구인가?'라는 어이를 상실한 문제를 주관식으로 출제한 적이 있었다.
또 드넓은 교지에 14개교에 달하는 학교 건물들을 계속 지으면서 신축 공사에 '''학생들을 동원'''했다고 한다. 또한 매일같이 학생들을 동원해 제초 작업까지 벌였다고 한다.
이렇게 열악한 교육환경에도 불구하고 학생과 학부모들의 반발이 생각보다는 크지 않았던 것은 당시 인천 지역의 상황이 맞물려 있었다고 한다. 당시 재단 학교들은 대부분 실업계열이었고, 고등학교 평준화 제도가 시행되기 이전 선인재단 소속 학교들은 학생들에게 인기가 바닥이라 지원율이 낮았다고 한다. 또 소속 학생들의 학부모들은 대부분 맞벌이하고 있어 자녀 교육에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고 한다.
고교 평준화가 된 이후 평준화 지역 중에서 가장 학력이 떨어졌던 곳이 바로 인천광역시였는데, 인천에서도 가장 학력 수준이 떨어졌던 곳이 바로 이 선인학원이었다. 그러다 보니 인문계 고등학교였던 선인고등학교나 인화여자고등학교의 경우 대학 진학률의 질보다는 양으로 승부했다.
1993학년도 학력고사[5] 를 맞아 당시 선인고등학교 3학년 전체 600명 중(문이과 모두 합쳐) 100명이 전북 이리시[6] 의 원광대학교에 몰빵 지원을 했는데, 그 중에서 11명만 붙고 나머지들은 다 탈락했을 정도로 선인재단의 학력 수준은 전국 평균을 밑돌았다.[7]
예전부터도 선인고는 원광대와의 커넥션이 있었는지 유독 원광대로 물량 공세를 폈다고 한다. 아예 3학년 교무실에 원광대 응시생들을 위한 숙박 안내[8] 가 별도로 붙어 있었다.
4. 재단 산하 학교들
4.1. 현재도 있는 학교
아래에 서술된 학교는 모두 1994년 3월 1일을 기해 사립학교에서 공립(시립)학교로 전환됐다. 이 중 인천대학교는 국립학교로 전환돼 대한민국의 교육기관 중 유일하게 사립, 공립, 국립을 모두 경험한 학교가 됐다.
중고등학교 소속 교직원은 (지방)교육공무원 및 국가공무원[9] 으로, 대학교 소속 교직원은 시립/국립 법인 직원으로 전환되었다.
개교 당시에는 백인엽 일가가 운영했던 사립 법인이었던 만큼 대부분의 학교들은 교명에 백인엽 일가의 이름이 들어가 있다.[10] 이후에도 특성화고들을 제외하면 교명이 그대로 유지되고 있다.
4.1.1. 대학교
시립 법인/국립 법인으로 전환되었으며, 교직원은 공무원으로 전환되지 않았다.
1979년 인천공과대학으로 개교했다가 그 해 말 인천대학으로 학교명을 바꿨다. 1988년 종합대학으로 승격했다. 1994년 시립 대학교로 전환됐고 2013년에는 국립 대학법인으로의 전환이 완료돼 현재는 국립대학교로 운영되고 있다. 2009년 대부분의 학과가 송도 새 캠퍼스로 이전했고 일부 시설만 도화동 옛 캠퍼스에 남아 있다.
4.1.2. 고등학교
남자 인문계 고등학교. 1947년 성광중학원으로 개교했다가 성광기술학교-성광상업고등학교-선인상업고등학교-선인종합고등학교를 거쳐 1973년 선인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꿔 지금에 이른다. 재단 캠퍼스 내에서 학교 건물을 꽤 여러 번 옮겼는데 현재 부지는 인화여중 운동장 부지다.
여자 인문계 고등학교. 1964년 인화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교했다가 3년 뒤 인화여자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꿔 현재에 이른다.
남녀공학 마이스터고등학교. 선인재단 실업계 도봉산 3총사에서 도를 맡았던 학교. 1952년 항도중학원으로 개교했다가 1954년 항도상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1982년 항도실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11] 1996년 전자공업고등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2010년 마이스터고등학교로 전환되면서 남녀공학 학교가 됐다. 그리고 마이스터고로 지정된 후에는 국제기능올림픽 금메달리스트를 배출하는 등 과거의 오명이 무색할 정도로 실력적으로 인정받는 학교가 됐다.
남녀공학 특성화고등학교. 선인재단 실업계 도봉산 3총사에서 봉을 맡았던 학교. 1971년 운봉공업고등학교로 개교해 2012년 인천하이텍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참고로 옛 교명이던 운봉은 사립 시절 설립자 백인엽의 호. 이후 2020년부터 예술 계열 과를 신설하고, 기존의 있는 과는 기존의 다니는 학생들이 졸업하는 2023년에 폐지, 2021년에는 인천대중예술고등학교로 전환 개교하면서 인천을 대표하는 (...) 똥통학교였던 과거를 뒤로 하고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남자 특성화고등학교. 선인재단 실업계 도봉산 3총사에서 산을 맡았던 학교. 1977년 운산기계공업고등학교로 개교해 2004년 도화기계공업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참고로 옛 교명이던 운산은 사립 시절 설립자 백인엽의 형인 육군 대장 백선엽의 호.
여자 특성화고등학교. 1970년 선화여자상업고등학교로 개교했다가 2009년 인천비즈니스고등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학교가 있던 부지가 도시재생지구로 지정되면서 2012년 옛 인천체고 부지 쪽으로 학교 건물을 옮겼다.
4.1.3. 중학교
남자 중학교. 1952년 인천성광기술학교로 개교해 1954년 성광중학교로 이름을 바꿨고 선인학원 인수 후인 1965년 현재의 이름인 선인중학교로 교명을 바꿨다. 원래의 건물은 도화기계공고가 사용하고 있으며 과거의 선인고 건물을 사용하고 있다.
4.2. 없어진 학교
인천대학교보다 먼저 생겼는데, 인천대학교와 통합돼 사라졌다. 1960년에 설립된 5년제 인천공업고등전문학교가 뿌리다. 1981년 인천체육전문대학과 통합돼 인천전문대학이 됐고 1994년 선인학원 소속 학교들과 함께 시립화 됐다. 2010년 인천대학교와 통합돼 없어졌다.[13]
- 효열국민학교[14]
1965년 11월 개교했으나 1994년 선인재단의 해체와 시립화 과정에서 결국 폐교됐다.[15] 학교 이름인 효열은 백선엽-백인엽 형제의 어머니인 방효열 여사의 이름에서 따왔다.[16] 효열국민학교가 폐교된 후 인화여중이 해당 부지를 계속 사용하였으며 선인고는 인화여중 운동장 부지에 신축하였다.
- 진홍유치원
정확한 개교 시점이 정확하게 알려진 바가 없으나 선인학원의 공립화 과정에서 폐원됐다. 다만 1994년 공립화 당시에 재학중인 원생이 있어서 1994년 바로 폐원하지 않고 1995년에 폐원하게 된다. 유치원 이름인 진홍은 백인엽의 아들[17] 이름이라고 한다.
5. 역대 이사장
- 백인엽 (1965~1981)
- 김종면 (1981)
- 신기석 (1981~1983)
- 이호 (1983~1986)
- 신능순 (1987~1990)
- 심창유 (1990~1992)
- 노창현 (1992~1994)
6. 관련 문서
[1] 1994년 3월 1일부로 재단 해산 후 소속 학교 전원 공립화.[2] 백선엽은 6.25 전쟁에서의 공훈으로 친일 논란에도 불구하고 군에서 최고의 예우를 받았다.[3] 나중에 리모델링하면서 건물 안에 화장실이 추가로 설치되긴 했으나 2000년대초까지 정독도서관의 화장실은 전부 건물 밖에 별도의 화장실이 있었다.[4] 다른 막장사학인인 김문기, 이홍하, 박철웅도 건물지을때는 최소한 화장실은 지었다는 점에서 알마나 막장인지 알수있다.[5] 1992년 12월 22일에 치러진 최후의 학력고사였으며, 이후 1994년도 대학입시부터는 대학수학능력평가로 바뀌게 된다.[6] 1995년에 전북 익산군과 도농 통폐합되어 익산시가 되었다.[7] 수도권의 대도시에서 같은 수도권 지역이 아닌 먼 타지 지방으로 몰빵을 했음에도 10%만 붙고 나머지는 다 탈락할 정도면... 더 이상의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8] 당시 학력고사는 자신이 지원한 대학교에서 하루는 필기시험을 치르고 하룻밤을 묵은 뒤 면접을 봐야 해서 타지에서 온 수험생들은 이틀 밤을 자야 했다.[9] 교사[10] 선인중&선인고의 선인은 당연히 백선엽의 '''선'''과 백인엽의 '''인'''을 합친 것이고, 여학교인 선화와 인화는 선과 인에다가 여성의 이름에 주로 쓰이는 한자인 꽃 화(花)를 붙인 것이다.[11] 특이하게 다른 학교들과 달리 교명의 어원이 불분명한데, 운봉은 백인엽의 호, 운산은 백선엽의 호, 효열은 두 형제의 모친인 방효열, 진홍은 백인엽의 아들인 백진홍에게서 따왔지만 유일하게 항도의 어원이 무엇인지는 알려지지 않았다.[12] 인천체고 역시 개교 이후 줄곧 인천체고라는 교명을 유지하고 있다.[13] 건물은 아직 남아있다. 건물이 10년 이상 관리 없이 방치되었기 때문에 그 외관이 다소 흉물스러울 수도 있다.[14] 1996년 3월에 국민학교의 명칭이 초등학교로 개칭되기 전에 폐교되었으므로 국민학교로 기재한다.[15] 이때 효열국민학교가 폐교되면서 선인재단 부지 내에는 초등학교가 없다. 그나마 서화초등학교가 인천대 제물포캠퍼스 북쪽으로 있긴 한데, 서화초등학교는 1966년에 따로 개교한 공립학교라 선인재단과는 접점이 없다.[16] 실제로 백선엽은 6세, 백인엽은 3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어머니에 대한 효성이 지극했다는 사실이 잘 알려져 있다.[17] 몇째 아들인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백인엽이 슬하 4남 3녀가 있는 다둥이 아빠인데다가 전처 사이에 2남 2녀, 후처 사이에 2남 1녀로 자식들이 서로 이복형제들이기 때문에 족보가 워낙 복잡해서 (...) 잘 알려지지 않은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