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록도

 


1. 개요
2. 한센인 주거지로서의 소록도
2.1. 소록도 한센인들의 시작
2.2. 일제강점기의 소록도
2.3. 1945년 한센인 학살 사건
2.4. 6. 25 전쟁의 상흔
2.5. 조창원 원장과 <당신들의 천국>
2.6. 한센인들을 향한 차별
2.7. 소록도에 방문한 특별한 손님들
2.7.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84년 방문
2.7.2. 마리안느와 마가렛
2.7.2.1.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2.7.2.1.1.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 현지 상영
2.7.2.1.2. <마리안느와 마가렛>, 제27회 한국 가톨릭 매스컴 대상 특별상 수상
3. 섬에 가는 방법
4. 역사적 장소
4.1. 고흥 소록도 병사성당
4.2.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5. 관련 미디어
6. 여담
7. 관련 문서



1. 개요


전라남도 고흥군 도양읍[1]에 위치한 이다. 이름만 보면 평범한 섬처럼 보이나, 후술할 한센병 환자들의 수용소가 위치했던 섬으로 유명하다. 그만큼 아픔이 묻어 있고, 한국의 근현대사의 가장 아픈 부분을 많이 품고 있는 섬이기도 하다.

2. 한센인 주거지로서의 소록도



2.1. 소록도 한센인들의 시작


소록도는 사실 위의 내용보다 한센병 환자들의 주거지로 널리 알려져 있다. 구한말에 입국한 개신교 선교사들은 주로 의료시설과 학교를 세우는 일을 통해 활동했는데, 당시 전라도 일대에 한센병 환자들을 위한 병원이나 시설을 많이 세웠다.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1909년 8월, 대한제국 칙령 제 75호에 의거, "자혜의원"이라는 이름의 요양병원을 전국 각지에 세우는 작업을 했는데[2], 특별히 한센병 치료를 위한 전문 요양소로 소록도의 자혜의원을 운영하게 되었다.
당시 세계적인 한센병 치료 트렌드(?)는 나요양소를 마련하여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수용하는 방식이었다.[3] 당시 총독부의 위생고문이었던 야마네 마사츠구(山根正次)는 "조선의 나환자도 격리 수용시켜야 한다"고 건의했고[4], 당시 총독이었던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이를 수용, 소록도가 나요양소로 선택된 것이었다. 1916년 2월 24일, 조선총독부령 제 7호가 공포되어 "소록도 자혜의원"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한센인 병원이 운영되었다.

2.2. 일제강점기의 소록도


본래 소록도는 그 이름에 걸맞게 매우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었다. 섬 일대에서는 해산물도 잘 잡혔고, 육지와 가까워서 쌀 등의 식량을 구하기도 쉽다[5]. 어찌 보면, 이런 천혜의 자연조건이 소록도가 한센인들을 위한 섬으로 선택된 조건이 되기도 한 것이다. 소록도에 병원을 세우는 과정에서 많은 소록도의 주민들은 육지로 쫓겨났고, 이런 이유에다 한센병 환자들을 향한 특유의 공포심이 한데 어우러져, 지금도 고흥(특히 녹동항 주변) 주민들과 소록도 주민들의 사이는 그리 좋지 않다고 한다.
소록도 병원 원장들 중에는 매우 선량한 사람도 있었지만, 매우 악랄한 사람도 있었다. 지금도 소록도 주민들에게 칭송을 받고, 심지어 "공덕비"까지 세워진 "하나이 젠기치(花井善吉)" 원장이 전자에 해당하는 경우이다. 당시 병원에서 강요하던 일본식 생활[6]을 전면 폐지하고 자유로운 면회와 자유로운 교육의 기회 제공, 취미생활 장려와 종교생활(특히 개신교천주교 등의 선교활동) 허용 등 많은 혜택을 주려 노력했고, 치료에도 열심을 냈던 사람이 하나이 원장이었다.
그러나 이후 부임한 스오 마사스에(周防正季) 원장은 소록도를 자신의 탐욕을 실천할 도구로 삼아서 수많은 소록도 한센인들을 토목공사에 동원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동상을 만들어 매달 정기적인 참배를 강요하는 짓까지 벌였다. 결국 스오 원장은 원생 이춘상에게 살해되었고[7],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일제의 항복 소식이 전해졌다. 이 시기에 대한 조금 더 자세한 내용은 한센병 항목을 참고할 것.

2.3. 1945년 한센인 학살 사건


그러나 한센인들의 고난은 해방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해방 직후, 병원 운영문제의 주도권을 두고 병원생(=한센인)들과 직원 사이의 갈등이 발생한 것이다. 당시 병원에서는 운영권에 대한 투표를 실시했고, 운영권을 노렸던 의사 "석사학"은 주도권을 되찾으려는 음모를 꾸몄다. 당시 한센인 원생의 대표인 이종규에게 "운영권을 장악한 자들이 원생들이 먹을 식량과 의약품 등을 반출하려 한다"는 거짓 정보를 주었고, 결국 직원들과 원생들은 격렬하게 충돌하게 되었다.[8] 이 과정에서 직원들은 실탄사격을, 병원생들은 직원 몇 명을 폭행치사하는 등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고, 결국 조선인 직원들은 원생들과의 협상을 제안했다. 그러나 직원들은 결코 운영권을 한센인들에게 넘겨줄 생각이 없었고, 고흥 치안유지대에 몰래 선을 넣어 지원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8월 21일 아침, 원생들은 대표자 90명을 선발하여 협상장소로 나갔다. 그러나 그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죽창과 총이었다. 무장한 직원들과, 이들이 동원한 치안유지대는 이들 90명을 포박하고 사격을 하거나 죽창으로 마구 찔러 죽여버린 것이다. 이들 중에서 아직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이들도 있었으나, 직원들은 구덩이를 파고 이들의 시신과 생존자들을 전부 던져버리고 기름[9]을 쏟아붓고 불을 질러 이들을 생화장을 시켜버린 것이다. 이 사건으로 숨진 한센인들은 84명에 이르고, 최근까지도 이 사건의 목격자와 생존자가 소록도 내에 거주하고 있다고 한다. 이 사건은 소록도 외부에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지금도 소록도에서 벌어진 최악의 사건으로 회자되고 있다. 2002년 8월 22일 11시 30분, 사건 현장이던 국립소록도병원 치료본관 앞에 이 사건을 기리는 '''"애환의 추모비"'''가 건립되어 있다. 방문객들은 추모비에 찾아가 묵념이라도 하고 돌아오자. 자유로운 사진촬영이 가능한 장소이다.

2.4. 6. 25 전쟁의 상흔


6.25 전쟁 와중에는 공산주의자와 섬 내 기독교인들 사이의 충돌(이라기보다는 북한군의 일방적인 학살)이 이어졌다. 섬을 점령한 북한군은 피난가지 않고 남아있던 섬의 10명의 직원과 1명의 목사[10]를 총살했고, 북한군 부역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인민재판에 회부하여 김민욱, 박순호 장로사형에 처하려 하였다. 그러나 기적적으로 미군기가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했다는 삐라를 뿌렸고 인민재판을 종용하던 사람은 돈을 가지고 빠져나가다가 때문에 의심받고 그자리에서 총살당했다고 한다. 참고로, 이 삐라가 뿌려진 이후에 김정복 목사가 순교했다고 한다.

2.5. 조창원 원장과 <당신들의 천국>


1960년 7월 1일에 국립소록도병원이 정식으로 건립되었고, 조창원 대령이 원장으로 부임했다. 조 원장은 당시 섬의 다수세력인 개신교 교회와 충돌을 빚기도 했다. 소록도의 7개 부락(리)에는 각 부락민들을 위한 교회가 세워져 있다. 그런데 조 원장은 "각 부락의 예배당이 병원 건물이니, 건물을 즉시 반환하고 한 곳에서만 예배하라"는 강제 퇴거명령을 내리고 교회의 종탑을 철거하는 등의 강경 대책을 세웠다. 소록도에는 개신교 선교사들의 영향으로 개신교인과 천주교인의 비율이 상당히 높은 편이어서, 이러한 명령은 섬 주민들의 신앙과 부딪치는 일이었다. 그러나 1962년, 김두영 목사가 담임목사로 부임하면서 병원측과 교회의 갈등은 수습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소록도 내의 이러한 소란이 잦아들면서 조창원 원장은 주민들을 위한 원대한 계획을 세우게 되었다. 소록도 인근에는 "오마도"라는 무인도가 있는데, 이곳에 간척사업을 벌여서 한센인들이 거주하며 농사를 짓게 하자는 아이디어를 낸 것이었다. 당연히 한센인들은 크게 호응했고, 몸이 조금이라도 성한 사람들은 전부 간척지 개간 사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문제는 고흥 주민들에게서 나왔다. 고흥 주민들은 "문둥이들과 함께 살 수 없다!"면서 결사반대를 외쳤고, 이러한 간척사업은 곧 난항에 부딪치게 된 것이었다. 결국 이 사건은 개척이 90% 이상 완료된 상황에서 새로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공화당 소속 모 의원이 정책을 뒤집어 간척사업의 주체를 전라남도로 돌려버리며 해결되었다. 조 원장은 곧 국립의료원 부원장으로 강제 보직이동 조치를 당해 소록도를 떠나게 되었고, 오마도 간척지는 1988년, 일반인들에게 불하하면서 소록도 주민들에게 아픔만 주고 끝나버린다. 이 사건을 각색하여 일반에 알린 사람이 바로 소설가 이청준 이고, 이 소설의 이름이 <당신들의 천국>이다.

2.6. 한센인들을 향한 차별


한센인들을 차별하고 핍박하는 일들은 일제뿐만 아니라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계속 되었다. 2016년 7월,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소록도 한센인들을 향한 끔찍한 일들이 폭로되면서 소록도는 다시 한 번 일반인들의 기억 속에 아픔으로 남게 되었다. 이에 관한 더 구체적인 이야기들은 한센병 항목을 참고할 것.

2.7. 소록도에 방문한 특별한 손님들


소록도 주민들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은 이들이 몇 있다.
  • 박정희의 영부인인 육영수는 이곳 주민들에 인상 깊었다. 일제강점기 이후 소록도에 처음으로 방문한 높으신 분이 바로 육영수였기 때문이다. 당시 육영수는 소록도 병원에 방문하여 한센인 환자들을 직접 만나 위로하며 봉사활동을 간단히 하고 떠났다고 하는데, 소외된 곳에 처음으로 온 그녀가 이곳 주민들에게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이 영향으로 소록도 내 투표소는 호남 지역 중 보수 계열 정당 득표율이 가장 높은 곳이다. 아래 여담 문서 참조.
  • 나훈아가 1997년 5월 14일 소록도에서 위문공연 '나훈아, 그리고 소록도의 봄'을 진행했다. 휠체어 50대를 소록도에 개인적으로 기증하기도 했다. 이 무대는 SBS에서 생방송되었다.
  • 조용필은 소록도 주민들에게는 특별한 추억을 선사한 사람이다. 조용필은 2010년 런던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함께 소록도 우촌복지관에서 공연을 가졌다. 그 때 조용필은 프로그램 상 꿈, 친구여 등 두 곡만 불렀고,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고, 실제로 그 약속을 지켰다. 그 뒤 2011년, 아예 자신의 팀들과 함께 소록도를 다시 찾아 환자들과 병원 직원들을 위하여 무료 공연을 개최했다. 이 공연은 더욱 파격적인데, 아예 자신이 프로그램을 짜서 오지 않고 즉석에서 신청곡도 받아 환자들과 어울렸다고 한다. 당시 강당은 거대한 노래방이 따로 없었다고. 병원 직원의 증언에 따르면 여태껏 이 곳을 찾은 수많은 유명인사들이 나중에 다시 오겠다고 하고 오지 않았지만 조용필은 거의 유일하게 다시 온 사례였다고 한다. 더욱 감동인 것은, 당시 조용필은 아예 객석 밑으로 내려가 한센인 어르신들과 일일이 악수도 하고 포옹도 하면서 마이크를 넘겨주고 함께 즐겁게 노래했다고 한다. 역시 가왕의 풍모는 다르다.

2.7.1.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1984년 방문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또한 특별한 손님이다. 1984년에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는 "한국에서 가장 소외된 곳이 어디인가?"라고 질문한 후, 소록도에 방문하여 원생들을 위로했고, 그의 방문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병원 측은 그간 원생들과 일반인들이 따로 사용했던 선창과 배를 하나로 통합하여 이들에 대한 차별대우를 시정했다.
당시 교황은 "마음으로 친애하는 여러분. 머나먼 길을 떠나 한국에 올 채비를 하면서, 이 소록도에 계신 여러분과의 만남을 특별히 기대했습니다. 그리고 여러분에게서 아름다운 글을 받은 후로는, 더더욱 여러분을 보러 오고 싶었습니다. 그것은 여러분과 함께 하고, 여러분을 위로하고, 여러분에게 내 사랑을 전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라는 인사말을 직접 읽어주었다.
소록도중앙공원 내 천주교 부지에는 교황의 방한을 기념하는 자그마한 기념탑이 세워져 있다. 참고로 이 천주교 부지는 과거 1940년대, 소록도의 건물을 짓기 위한 벽돌공장이 있던 자리였다. 한센인들의 애환을 신앙의 힘으로 치유하려는 뜻에서 공장을 없애고 작은 연못 위에 성모상을, 그 앞에 자그마한 제대를 만들어서 천주교인들의 야외 미사터를 만든 것.
[image]
마리안느와 마가렛, 그리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2.7.2. 마리안느와 마가렛


소록도에서 40년간 헌신적으로 봉사하던 간호사[11]들이었던 마리안느와 마거렛은 지금도 소록도 주민들에게 큰 감동으로 남아있다. 오스트리아에서 오신 두 분은 한센인들을 위해 온갖 궂은 일을 마다하지 않았으나, 더 나이가 들어 건강이 나빠지자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다. 이에 소록도 주민들이 성대한 환송식을 준비하려 하자, 이들을 번거롭게 하기 싫다며 편지 한 장을 남긴 채 야반도주하듯 소록도를 떠났는데, 얼마 전에 다시 소록도를 방문하여 주민들과 눈물로 인사를 나누었다고 한다.

2.7.2.1.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 출신인 마리안느 스퇴거(Marianne Stoeger·83)와 마가렛 피사렉(Margareth Pissarek·82) [12]은 각각 1962년과 1966년에 가톨릭교회의 재속회인 오스트리아 그리스도왕 시녀회 회원으로 처음 소록도 땅을 밟았다. 간호사로서 이들은 한센병 환자들 거주지인 소록도에서 구호활동에 매진한다. 이후 공식적인 파견 기간이 끝난 뒤에도 자원봉사자로 남아, 반세기에 가까운 43년(39년) 동안 조건 없는 사랑으로 한센병 환자들과 그 자녀들을 보살폈다.
2005년 11월 23일, 소록도의 집집마다 편지 한 통이 도착한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보낸 마지막 편지였다. 죽어서도 소록도에 묻히길 원했던 두 사람은 건강 악화로 예전처럼 일을 할 수 없고, 오히려 소록도에 부담이 될까 염려하여 2005년 11월 편지 한 장만을 남기고 홀연히 섬을 떠났다.[13]
두 사람이 소록도를 떠나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고 10년이 지난 2016년은 소록도병원 개원 100주년이 되는 해로 휴먼 다큐 <마리안느와 마가렛>(감독 윤세영·작가 양희·내래이션 이해인 클라우디아 수녀)은 두 사람의 아름다운 삶을 조명하는 의미에서 기획되었다. 소록도가 위치해 있는 전라남도 고흥군이 제작·지원하였다.
다큐멘터리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랑 예고편
다큐멘터리는 소록도에서 자원봉사자로 40여년 동안간 오직 한센병 환자들을 사랑으로 보살펴 온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소록도 생활과 주변인들의 이야기, 그리고 현재의 생활 모습과 오스트리아 현지 가족들의 인터뷰로 구성됐다. 또 인위적인 요소를 배제하고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아닌 주변 사람들의 인터뷰를 통해 담담하게 두 분의 삶을 조명하는데 초점을 뒀다.
특히 이 작품은 소록도의 아름다운 영상미가 더해져 다큐멘터리로써의 품격을 한 단계 더 높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2.7.2.1.1.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 현지 상영

한-오스트리아 수교 125주년을 맞아 2017년 6월 6일(현지시각) 오후 7시 오스트리아 빈 우라니아홀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상영회가 열렸다.
'소록도 천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오스트리아서 상영 (2017년 6월 6일)

2.7.2.1.2. <마리안느와 마가렛>, 제27회 한국 가톨릭 매스컴 대상 특별상 수상

다큐멘터리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2017년 5월 열린 제27회 한국 가톨릭 매스컴 대상 시상식에서 특별상을 수상했다.
한국천주교주교회의 매스컴 위원회의 관계자는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다큐 영화의 새 지평을 열었다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받아 특별상 수상작으로 결정됐다"고 말했다.
영화 <마리안느와 마가렛> 가톨릭 매스컴 대상 '특별상'

3. 섬에 가는 방법


과거에는 녹동항에서 를 타고 이동해야 했으나, 2008년에 소록대교가 건설되어 현재는 자동차를 타고 이동이 가능하다. 27번 국도의 종점이 이 섬 남쪽에 있는 거금도로, 거금대교로 소통이 가능하다. 그 27번 국도가 고속화도로 스펙으로 지어진 것도 소록도가 통제된 곳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또, 금호고속에서 운행하는 광주~소록도 시외직행버스를 이용해서도 갈 수 있다.
소록도는 섬 전체가 병원이다. 외부인은 일부 개방된 구역[14]만을, 그것도 정해진 시간 동안만 탐방할 수 있다. 특히 '''마을'''은 그 자체가 일종의 거대한 생활치료센터 또는 요양원 역할을 하므로 병원의 허가를 받은 자 외에는 일절 들어가면 안 된다. 주민들이 싫어한다!
소록도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면 국립소록도병원 봉사안내 페이지를 참고하자. 사이트에도 소개되어 있지만, 병원 측에서는 2주 이상 진득이 눌러앉아 환자들과 교감을 쌓을 수 있는 사람을 선호한다.

4. 역사적 장소


아무래도 장소의 특성상 유적지가 많다. 물론, 어디나 다 가볼 수는 없다. 그러나 소록도 내의 한센인들이 고령인 점을 감안한다면, 10~15년 뒤 소록도는 "한센인 거주지로서의 소록도"가 아니라 "역사유적지"로 바뀔 가능성이 높다. 혹시라도 봉사활동 등의 목적으로 소록도에 방문하게 된다면 다음 장소들을 참고해볼 것.
  • 국립소록도병원 한센병박물관 : 2016년 5월 17일, 소록도 자혜의원 개원 100주년을 기념하여 세워졌으며, 7월에 정식으로 개관한 박물관으로, 한센병 자체를 다루는 박물관으로는 전세계에서 유일한 곳이다. 소록도의 역사와 자료들을 상당히 잘 모아둔 곳이다. 소록도에 방문한다면 반드시 들려보아야 하는 곳. 특히 남도의 찌는 더위와 맞닥뜨릴 때, 딱히 쉴만한 장소가 없는 소록도 내에서는 안식처의 역할도 할 수 있도록 건물이 잘 설계되어 있다. 개관시간은 매일 09:30∼16:30까지이며, 매주 월요일과 공휴일은 휴관한다.
  • 소록도 자료관 : 과거 일제강점기에 건립되었던 나환자 요양소와 부속건물들을 보존하고 관련 유물들을 전시한 곳으로, 소록도와 한센인들에 대한 사전지식이 없는 사람들에게 큰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다. 다만, 박물관의 개관으로 이제는 그 위상이 조금씩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
  • 양지회 기념관 :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기 1달 전 1974년 7월 15일 건립한 시설로 1973년 10월에 소록도 성실고등공민학교 학생 16명은 육영수 여사의 초청으로 청와대를 방문하였고 이후에도 육 여사는 원생들의 노후생활을 염려하여 그들에게 편안한 안식처를 마련해 주고자 기부금을 희사하였는데, 이 기부금으로 양지회 기념관이 준공되었다. 양지회 기념관 앞에는 육 여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원생들의 순수한 모금액으로 공덕비가 세워져있다.
  • 소록도중앙공원 : 1934년부터 환자 위안장으로 가꾸었던 산책지를 대유원지로 만들어 2년 뒤인 1936년 12월 1일 준공한 곳이다. 그냥 방문하면 굉장히 아름다운 곳이지만, 공원 곳곳에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곳이기에 가볍게 볼 수만은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한하운 시인의 시비(詩碑)가 있는데, 시비가 기록되어 있는 돌은 악명높은 스오 원장 당시 수간호사로 재직하며 한센인들을 혹독하게 괴롭힌 "사토" 간호사가 한센인들을 채찍으로 때려가며 옮겨놓은 돌이다. 이곳 어르신들은 이 바위를 "사토한테 맞아죽으나, 옮기다 깔려서, 혹은 지쳐서 죽으나 어쨌든 갖다 놓기는 해야겠으니 '죽어도 놓고 죽자"고 하던 의미에서 "죽어도 놓고" 바위라고 부른다. 이런 바위를 "한낱"[15] 시비 "따위"로 썼기에[16] 한센인 어르신들 입장에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 이런 역사적인 흔적이 공원 곳곳에 널려있다.
  • 소록도 해수욕장 : 소록도가 평범한 섬이었다면 상당히 인기를 끌었을 곳으로, 민간인에게 개방된 지 얼마 되지 않는 곳이다. 진입로로부터 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길이 아름답고, 경치가 뛰어난데다 소나무 숲이 울팡하고 모래가 고와서 이국적인 느낌도 조금 드는 곳이다. 사람이 많지 않아 썰렁하고 수심이 깊지 않아서 발 담그고 놀기에 좋다. 다만, 섬 안에서 숙박은 금지되어 있으므로 저녁 6시 이전에는 반드시 육지로 나오거나 거금도로 들어갈 것.
  • 수탄장(愁嘆場) : 본래는 소록도 병원(당시 이름으로는 소록도 갱생원)의 직원지대와 한센인들이 생활하는 병사(病舍) 지대를 나누는 경계선이었고, 50~60년대에는 철조망이 쳐 있었던 곳이었다. 자녀들의 감염을 우려하여 병사지대의 부모들은 아이를 키울 수 없었고, 감염되지 않은 가족과 이 선을 경계로 1달에 1번만 만나는 것이 허락되었다. 그래서 이 슬픈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이 "근심(愁)과 탄식(嘆)의 장소(場)"라고 하여 붙인 이름이 수탄장이다. 표지판 하나만 달랑 세워져 있어서 눈썰미가 좋지 않은 사람들은 그냥 휙 지나갈 수 있는 곳으로, 소록도 입구에 위치해 있다.
  • 소록도 자혜의원 구 본관 : 1916년에 세워진 병원의 본관 건물인데, 본래는 T자형 건물이었다. 지금은 흔적만 남아있다. 병원 앞에 하나이 원장 송덕비가 세워져 있다. 소록도 내부 깊숙이 위치해 있어서 일반인들은 가보기 쉽지 않고, 딱히 볼만한 것도 있지는 않으나 역사적 의의가 있어서 한 번은 가볼만한 곳이다. 그런데... 진짜 건물 하나만 달랑 있고, 주변이 울창한 소나무로 가려져 있어서 가면 실망할 확률이 매우 높다. (...) 하나이 원장 송덕비는 한반도에 잔존하는 유일한 일본인의 송덕비이다.[17] 하나이 젠키치 씨가 실제로 덕행을 많이 한 사람이라 환자들이 철거를 원하지 않았기에 해방 후에도 그대로 남았다.
  • 순천교도소 소록지소 : 정확한 명칭은 고흥 순천교도소 구 소록도지소 여사동(高興順天矯導所舊小鹿島支所女舍棟)으로, 소록도 지소에서 여성 한센인 수감자들을 가두던 곳이었다. 1935년에 세워졌고, 1998년 재소자 감소로 인해 63년만에 문을 닫았다. 일제강점기 당시 한센인들의 인권유린 현장을 보여주는 유적이다. 건물의 훼손은 심각한 상태. 2010년 8월 24일 등록문화재 제469호로 지정되었다.

4.1. 고흥 소록도 병사성당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658호

'''659호'''

660호
간호교과서
'''고흥 소록도 병사성당'''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전라남도 고흥군 양지회관길 35 (도양읍)
등록문화재 제659호 (2016년 6월 14일 지정)
소록도 거주 한센인들이 직접 공사에 참여하여 지은 벽돌조 성당 건축물로, 그들의 육체적·정신적 아픔의 치유를 위한 영적 장소가 되었던 건물이며, 소록도라는 지역적 특징 속에서 한센인과 함께 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 문화유산 정보

4.2.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659호

'''660호'''

661호
고흥 소록도 병사성당
'''고흥 소록도 마리안느와 마가렛 사택'''
의병장 유인석 심의

전라남도 고흥군 소록선창길 116-10 (도양읍)
등록문화재 제660호 (2016년 6월 14일 지정)
40여 년간 한센인들에 대한 적극적인 의료 봉사활동을 하였던 마리안느와 마가렛이 거주했던 벽돌조 주택으로, 한센인들이 겪었던 아픔을 함께 나누었던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희생과 봉사의 상징적인 주택으로 역사적 가치가 있다.
문화재청 - 문화유산 정보

5. 관련 미디어



6. 여담


  • 소록도는 '작은 사슴모양의 섬'이라는 뜻인데, 이름값이라도 하듯 실제로 사슴이 자주 출몰한다. 소록도 주민의 말에 의하면 집 마당에서 마주친 적도 있다고... 게다가 운이 좋다면 백사슴도 볼 수 있다고 한다.
  • 섬 안쪽은 일반인 출입제한구역이기 때문에 인프라 개발 등이 전무하다시피 했었다. 그래서 현재도 일제강점기 시대 소나무에서 송진을 채취한 흔적과 일본식 가옥, 건물, 신사 등이 남아 있다. 그래서 영화 동주를 촬영할 때 이 곳에서 촬영했다.
  • 호남 지역임에도 보수 성향이 강한 지역이다. 전라도 출신이 아닌 외지에서 온 고령 환자들이 많이 머물고 있다는 점[18], 육영수 여사뿐만 아니라 그녀의 박근혜도 찾아 육영수의 향수가 남아있는 점 등이 그 원인이다. 그래서 거주자들이 투표할 수 있는 도양읍 일부 투표소민주당계 정당보다 보수 계열 정당 득표율이 훨씬 더 높다. 실제로 1987년, 제13대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정의당 노태우 표가 김대중의 표보다 훨씬 많이 나왔으며, 이는 이후로도 이어져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박근혜가 호남에서 문재인을 득표수로 제친 단 하나뿐인 투표소가 바로 여기였다. #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호남 전체에서 1위를 한 유일한 투표소가 소록도 병원에 설치된 도양읍 제6투표소였다.

7. 관련 문서



[1] 도양읍의 포구#s-1 이름이 '녹동'이다.[2] 1년 후, 강제적인 한일합방이 일어나서 이 사업은 조선총독부에서 물려받아 진행하게 된다. 이렇게 전국에 세워진 자혜의원은 총 19개소였다.[3] 한센병 환자들을 격리조치하는 것은 문명국은 물론 비문명화된 문화에서도 흔히 나타나는 풍습이었다. 비단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니다.[4] 일본에서 1907년 3월 19일, 나예방법(癩豫防法)을 제정하여 큰 효과를 보았기에 이런 방법을 건의한 것이다. 다만, 마사츠구 본인이 조선인에 대하여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는 알 수 없다.[5] 2016년에 방영된 예능인 삼시세끼 어촌편에서 이서진에릭, 윤균상이 생활했던 섬은 득량도인데, 소록도에서 가까운 거리에 위치해 있다. 실제로 영상에서는 세 사람이 배를 타고 득량도에 들어갈 때, 배경으로 "소록대교"가 자주 보였다.[6] 일본식 의복, 다다미를 비롯한 일본식 주거문화, 일본 음식[7] 이춘상 의사는 국사범으로 취급되어 1943년 2월 19일 처형되었다. 나환자이기 때문에 그의 의거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며, 병 때문에 친척들이 다 부정했으므로 아무도 독립유공자로 신청하지 않았다.[8] 운영권에 대한 것은 하나의 견해일 뿐, 이청준 소설 <당신들의 천국>의 주인공 조창원 원장은 “그것은 거짓말”이라고 말했다. 그의 인터뷰에 따르면 "소록도에 해방 소식이 전해진 것은 1945년 8월 18일이다. 원장이었던 니시키가 한국 의사 석사학을 불러 창고 열쇠를 주면서 “환자들 먹고사는 데 지장이 없도록 창고의 식량과 약품을 잘 지키라”고 부탁했다. 석사학이 환자와 직원들을 찾아가 그 얘기를 그대로 전했다. 그러자 병원 직원이었던 오순재와 송희갑이 “‘문둥이’들에게 먹을 것을 다 주면 우리는 어떻게 사냐”며 의사를 두들겨팬 뒤 열쇠를 빼앗았다. 해방 이후의 혼란을 틈타 창고를 강도질하려고 든 것이다." 라고 말했으며, 2018년 국립소록도병원에서 발간한 "소록도 100년, 한센병 그리고 사람, 백년의 성찰"에 따르면 "어떠한 시각에서 사건을 해석하든 적어도 8월 22일의 총격과 학살은 무장한 직원들에 의해 계획적으로 일어난 집단학살이었다"고 저술했다.[9] 정확하게는 당시에 일제가 만들게 한 송탄유(松炭油)였다. 전쟁물자가 부족했던 일제는 소나무를 베어 숯을 만들고 그 숯에서 기름을 짜내어 비행기나 탱크를 돌리려고 했는데, 이 과정에서 소록도에도 이 송탄유가 제법 많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10] 당시 소록도교회 담임목사로 있던 김정복 목사이다.[11] 처음 언론에서 수녀라고 오보를 내서 지금도 이분들이 수녀인 것으로 아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수녀가 아니라 천주교 소속 단체의 간호사이다.[12] 두 사람의 신분에 대해 약간의 혼선이 있는데, 재속회원으로 수녀(수도자)는 아니고 가톨릭 신자로서 성자처럼 봉사를 했기에 ‘수녀님’으로 불리기도 했다고 한다.‘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삶’ 영화와 책으로 [13] 수도회 소속 재속회원으로 수녀가 아니었던 만큼, 이들이 고국인 오스트리아로 돌아가서의 생활은 40여 년 가까이 얼굴도 보지 못한 친척들에게 신세를 져야 하는 처지였다. 그럼에도 소록도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 오스트리아로 갔다고 한다. 오스트리아로 돌아간 후 최저 수준의 연금으로 생활해야 하는 상황에서 마리안느는 암에, 마가렛은 치매에 걸리기까지 했다. 다행히 구본무 LG그룹 회장이 두 간호사가 사망할 때까지 매달 생활비를 지급하도록 조치했다고. 두 사람은 큰돈이라며 고사했지만, 구본무 회장측에서 계속 설득해서 받아들였다고 한다.[14] 27번 국도 서쪽으로는 중앙공원과 박물관, 국도 동쪽으로는 해수욕장이 외지인에게 개방돼 있다.[15] 실제 한센인 어르신의 표현이다.[16] 한하운은 출소 이후 한센인들을 시켜셔 앵벌이를 했기 때문에 그들에게는 평가가 좋은 편이 아니다.[17] 물론 다른 비들도 많았지만 해방후 다 부숴졌고, 어쩌다 살아남은 것들도 뭔지도 모른 채 기둥이나 주춧돌 같은 걸로 사용되었다.[18] 실제로 소록도 한센인들에게서 쉽게 들을 수 있는 사투리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상도 사투리이다. 물론, 전라도 사투리가 다수이긴 하지만, 기대하지 않았던 경상도 사투리가 꽤 자주 들린다는 것이 이채로운데, 이는 섬 특성상 가능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