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베리아호랑이/한반도
'''• ''' 이 항목은 한반도에서 서식했던 시베리아호랑이의 역사에 집중해서 서술하고 있습니다.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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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두산호랑이, 조선범 또는 한국호랑이는 한반도의 거의 전 지역[1] 에 살았던 시베리아호랑이의 일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시베리아호랑이 자체가 호랑이라는 종의 한 아종으로, 한국호랑이는 별도의 유전적인 특질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단지 한반도에 서식하는 시베리아호랑이일 뿐이라고 보고 있다. 아종이 되려면 오랫동안 집단간 유전적 교류가 불가능할 정도로 거대 사막, 히말라야같은 산맥, 섬처럼 지리적으로 고립되어야 가능하다. 한반도의 두만강, 압록강 상류는 얕은 도랑 수준으로 만주, 연해주 호랑이와 유전적 교류가 가능하고 바닷가 근처 하류조차도 겨울철에는 결빙으로 자유로운 자연 생태 이동로가 되기 때문에 유전적으로 시베리아 호랑이와 한국호랑이는 동일하다. 따라서 일부에서 말하는 종으로써 한국호랑이 멸종은 완전히 잘못된 이론이다.
아직도 한국에 산다는 주장이 있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북한에서는 야생에서 서식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제대로 알려진 것은 없는 상황이다. 현재 북한의 상태로 보아 야생 서식은 무리가 있더라도 러시아쪽 약한 개체가 북한쪽으로 밀려날 가능성은 있다.
백두산호랑이라는 별칭은 오직 백두산에만 살아서가 아니라 한반도에서 가장 크고 험한 산이 백두산이니만큼 그 산에 사는 호랑이를 한반도에 사는 호랑이들 중 대표격으로 치다 보니 나온 이름인데, 현대에는 백두산에서 가까운 일부 지역으로 서식지가 축소되어 정말로 백두산호랑이에 가까워지긴 했다. 그 외에 설화 속에서는 "금강산호랑이"나 "지리산호랑이"도 제법 명성을 누리고 있다. 또 인왕산이 서울에 있다는 이유로 "인왕산호랑이"도 대단히 유명하다.
알려진 것과 다르게 호랑이들은 산보다는 습지나 섬 등 물이 많은 곳을 서식지로 더 선호했다는 것이 최근에 밝혀졌다. 물이 많은 강가나 호수 등지에는 식생이 빨리 자라나기 때문에 노루나 고라니 등 발굽동물의 밀도가 높아 호랑이들이 강가 등지에서 많이 살았던 것이다. 다만 인구가 증가한 조선 후기에 들어서면서 이런 지역들이 급속하게 개간되어 사라졌고, 남은 호랑이들이 산속으로 몰리면서 오늘날 잘 알려진 "산에 사는 호랑이"의 모습이 정착된 것이다.
1.1. 한국호랑이?
1950년 이전에는 동북아시아호랑이의 아종을 시베리아호랑이, 만주호랑이, 한국호랑이로 구분했으며, 시베리아호랑이는 연해주와 북만주에, 만주호랑이는 헤이룽장성과 지린성에, 한국호랑이는 한반도와 랴오닝성에 서식한다고 생각했다.
이런 차이가 나타나는 이유는 우선 당시 기록에 따르면 조선범이 실제로 시베리아에 사는 호랑이보다 몸집이 작았다. 한국 호랑이는 중국의 만주호랑이(동북호랑이)나 우수리 호랑이에 비해 다소 작은 체구에도 불구하고, 19세기 중엽의 동북아시아일대의 사냥꾼들사이에서는 한국호랑이가 가장 용맹하고 제일 아름답다고 알려져 있었다.
다만 유전자가 동일하므로 왜소한 체격은 조선 후기 산림 파괴로 인한 먹이감 부족으로 인한 성장기 발육부진 가능성이 높다. [2] 한국호랑이가 제일 용맹하고 아름답다는 기술도 미신적인 부분이 크다고 볼 수 있다.[3]
실제로 오늘날에는 시베리아-만주-한반도에 서식한 모든 호랑이는 시베리아호랑이에 속하는 단일 아종으로 구분되고 있다.
2. 한국 문화에서의 위치
호랑이가 서식하는 지역이 으레 그렇듯, 한국에서도 무기가 발달하기 전까지 호랑이는 공포의 존재로 경외시되거나, 신적인 존재로서 숭배되었다. 과거 호랑이가 많이 서식하던 시절에는 호랑이와 사람들과의 접촉이 빈번할 수밖에 없었고 이로 인한 인명피해도 많은 편이었다. 그래서 호랑이에 대한 두려움과 경외심을 담아 산신령 내지는 산군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런 호랑이에 대한 이중적인 감정은 각종 소설이나 시, 민화, 전승 등에서 확인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맹혹한 거대 포식자라는 점 때문에 주로 지배계층에 비유되기도 했으며, 그에 따라 풍자적이거나 해학적인 모습으로 희화화되기도 했다. 이로 인해 맹수라는 이미지가 많이 희석되어 친숙한 동물 이미지도 많이 박힌 편.
구체적인 사례는 호랑이/문화 쪽을 참조하자.
2.1. 설화 속에서의 모습
인간을 해치는 짐승이었던 것의 반작용인지 옛날 이야기 속에서는 지나치게 우습게 표현을 당하는 굴욕의 아이콘이다. 천적은 돌 가지고 떡이라고 사기치는 토끼, 곶감, 썩은 동앗줄, 꼬마, 형제라고 사기치는 가짜 인간동생 등이 있으며, 떡을 좋아한다. 가장 나쁜 이미지는 함정에서 빠진 자신을 구해준 사람을 잡아먹으려는 배은망덕한 짓을 하다 토끼 때문에 다시 함정에 빠진 설화도 있다는 것. 단군신화에 따르면 곰과 함께 인간이 되기 위해 100일 동안 동굴 안에서 쑥과 마늘만 먹기를 자청했지만 호랑이는 포기하고 뛰쳐나갔다고 한다.
물론 자신이 아버지라고 믿은 사람에게 매일같이 사냥감을 주고 대신 제사를 지내거나 자신이 잡아먹은 청년의 어머니를 대신 봉양하는 등의 훈훈한 에피소드도 있다.[4]
호랑이의 눈썹은 인간으로 변장한 동물의 본모습을 보여주는 신기한 도구 내지 약으로 이용되었다. 그 예로 어떤 이야기에서 호랑이에게 잡아먹혀 죽으려던 가난한 총각은 호랑이가 준 눈썹 덕에[5] 요리집을 차려서[6] 대박을 내거나[7][8] 어머니의 약재인 호랑이 눈썹을 구하러 온 효자에게 자신의 눈썹을 떼어준 호랑이 얘기 등이 있다. 그 외에도 호랑이 설화는 생각보다 많다. 관심이 있다면 찾아보자. 사실 우리나라엔 유독 호랑이 얘기가 많은데, 호랑이가 애증의 대상이어서 그랬던 듯. 시인 최남선은 '조선은 호담국(虎談國)'이라 한 바 있고, 중국의 대문호 루쉰도 조선사람을 만나면 꼭 '알고 있는 호랑이 이야기를 해 달라'며 졸랐다고.
동화에서의 이미지를 보면 꽤나 골초였던 모양으로,[9] 트라우마에서는 단군신화에서 호랑이가 곰처럼 참지 못한 것은 담배의 금단증상 때문이었다는 해석을 선보였다.
3. 영광과 수난
3.1. 고대
반구대 암각화에 새겨져 있다. 그 시절에도 공포의 대상이자 사냥감이었다는 이야기다.
단군신화에 등장한다. 웅녀가 될 곰에게 근성에서 밀려서 한민족의 시조가 되지는 못했다(...) 이에 대해 일반적으로는 호랑이를 토템으로 숭배하던 부족이 곰을 숭배하는 부족에게 밀려났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하지만 주류가 아닌 다른 단군 설화에는 환웅이 백호와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도 한다. 특히 이 설화는 한국이 아닌 중국 산둥 성 지방에 많이 퍼져있다.
삼국사기에서도 신라 문무왕, 혜공왕, 문성왕, 헌강왕 때 등 여러 차례 호랑이가 경주에 출몰한 기록이 있다. 왕궁인 경주 월성에 들어왔다는 기록도 있다.
진덕여왕 때는 남산에 있는 우지암 바위에서 화백회의를 하고 있는데 호랑이가 회의장에 난입해 알천이 그 호랑이를 잡은 일화가 있다.
고구려 무용총에 있는 수렵도 벽화에서 말을 탄 무사들이 활을 겨누며 호랑이를 추격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호랑이를 고구려인들이 사냥 대상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3.2. 고려시대
강감찬이 남경(지금의 서울)을 담당하는 관리가 되었을 때 호환이 심하자 인왕산에 서식하는 호랑이들을 모두 위협해서 쫓아내 버렸다는 설화가 있다. 그만큼 호랑이가 번성하고 호환이 심했음을 알 수 있다.
불교가 처음 들어온 것은 삼국시대지만 이때까지는 오랜 전란으로 인해 불교의 불살생 교리는 유명무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고려 성립 후 안정기에 들어서자 불교의 교조화와 함께 살생 금지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졌고, 따라서 식인 호랑이에 대한 토벌도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인육에 맛들린 호랑이는 야생동물 대신 지속적으로 인간을 노리게 되는데 반격조차 없으니...
그렇게 고려시대에는 조선과 달리 대대적인 포획도 없었고 아직 인구가 많지 않아서 환경 변화로 인한 서식지 파괴도 적었으니, 그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차츰 개체수가 감소했던 조선 시대보다는 호랑이가 안정적으로 번영했을 듯. 그렇지만 최루백 설화[10] 를 보았을 때 당대에도 사냥꾼이나 무인들처럼 호랑이를 때려잡았던 사람은 그냥 때려잡았던것으로 보인다. 당대에도 모피는 사치품이었던데다가 인명피해가 많았으니 아무리 불교가 융성했다고는 하지만 귀족들이나 무인들 사이에서도 고기를 먹었고, 양수척들이 소나 돼지 같은 가축을 도살해서 먹고살았던것을 생각하면 아주 때려잡지 않았던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3.3. 조선시대
신라 때와 마찬가지로 호랑이가 기록에 많이 나타난다. 심지어 세조 때는 창덕궁 후원까지 들어온 기록이 있다. 인왕산, 북악산으로 이어지는 산자락을 타고 들어온 것이다. 게다가 궁궐 후원은 사람이 쉽게 드나들 수 없으면서 나무까지 우거져 있어서 그 안에서 새끼까지 낳아 길렀다고 한다. 17세기 초까지 매년 잡히는 호랑이와 표범의 수가 1000마리 내외일 정도였다. 그 덕에 "조선은 1년에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고 나머지 반은 사람이 호랑이를 잡으러 다닌다."는 말이 중국에서 나오기도 했다.
하지만 호랑이가 사는 서식환경이 점점 달라진다. 인구증가 및 면포 수요의 증가 등으로 인해서 농경지 개간이 늘어난다. 15~16세기에는 강변의 습지가 농토가 되고, 17~19세기에는 고원 평지나 완경사지가 화전의 대상이 되었다. 야생동물이 서식할 환경이 파괴되자 먹이를 잃은 호랑이들은 굶어 죽거나 사람이나 가축을 덮치게 되었다. 그나마 호랑이가 오지 못하는 지역이 제주도다.
헌데, 호랑이에 대한 기본적인 인식도 고려시대와 달라졌다. 불살생을 기본으로 하는 불교를 숭상한 고려와 달리 유교를 국가적인 바탕으로 하다보니 백성을 해치는 호랑이를 해로운 동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국가가 호랑이 사냥을 권장하게 된다. 서식지 파괴와 사냥으로 인해 호랑이 수가 감소하면서 1724년에는 호표피를 진상하는 제도가 폐지되었다.
헌데, 이때 사냥 풍속을 보면 사냥꾼이 호랑이를 잡아오면 일단 관아로 끌려가서 형식적인 곤장 3대를 맞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호랑이도 엄연히 '''산군(山君)'''인데 '''괘씸하게 왕을 잡았다'''고 해서인데, 물론 풀파워로 때리는 것은 아니고 툭 건드리는 수준이다. 그리고 나서 포상금을 받았다.
또한 국가적으로도 사냥을 했다. 조정이 직접 관리하는 호랑이잡이 특수부대와 착호갑사가 존재할 정도였다.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고을에서는 호랑이가 나타났다고 하면 고을 수령이 장정들을 소집[11] 해서 군대를 편성하고 호랑이를 추적하는 일이 다반사였다. 호랑이 사냥을 위해서라면 고을 간 경계를 넘어서 군사를 움직여도 처벌받지 않을 정도였고, 인조반정에서 실제로 반정군이 '호랑이 사냥'을 핑계로 군사력을 움직이기도 했다.
사람을 잡아먹은 악호를 사냥할 때는 창, 활, 조총 등 도구를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가죽을 얻기 위한 사냥을 할 때는 가죽을 상하지 않기 위해서 그물이나 덫을 주로 사용했다. 독이나 벼락틀, 함정을 사용한 사냥도 있었지만 이쪽은 어차피 가죽이 상하게 되는지라... 가끔 백호라 해서 흰 호랑이가 아니라 100관(=375kg)짜리 왕대범들이 간혹 잡혔다는 기록도 몇 있다.
1900년대 초 영국인 사냥꾼 포드 바클레이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의 통치가 시작되고 뒤이어 화기를 몰수하기 이전에는 호랑이의 사냥이 잦았는데, 인접한 마을들의 활동적인 남성들이 대략 대여섯 명은 화승총으로 무장하고 더 많은 숫자는 창으로 무장해 하루에서 이틀 정도 인접한 야산들로 몰이를 나갔다."고 한다. 구한말 러시아 사냥꾼들도 조선 일대에서 호랑이를 사냥했는데, "조선의 포수들은 16세기식 구형 화승총으로 호랑이를 잡는다."라는 글을 남겼다. 적어도 구형 조총으로 호랑이를 잡는 것이 심각하게 말도 안 되는 수준의 난이도는 절대로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12] 서양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포수들은 호피를 상하지 않게 하려고 '''호랑이의 눈을 조준해서 총을 쏘았다'''고 한다.
3.4. 구한말
1800년대 말에 개항이 이루어지고 외국 문물이 들어오면서 후장식 라이플총이 들어오고, 신무기로 무장한 사냥꾼이 증가하면서 호랑이가 격감하게 된다. 게다가 일제가 세력을 뻗치기 시작하면서 이국의 맹수인 호랑이에 욕심을 내고[13] , 일본인들이 스포츠로 호랑이를 사냥하는 경우도 늘어난다.
3.5. 일제강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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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수구제사업으로 종 존속에 치명타를 맞는다. 이 시기에 유명했던 호랑이 사냥꾼으로 야마모토 타다사부로가 있다. 야마모토 정호군 참조.
3.6. 현대
1945년 해방 시점에서는 이미 잔존한 호랑이가 거의 없었다. 남한 지역에서는 이미 20년 이상 호랑이 목격 보고가 없었고, 북한 지역에도 만주와 인접한 평안북도나 함경도에만 일부 잔존하고 있었다.
하지만 1950년에 발발한 6.25 전쟁으로 인해 서식지가 파괴되면서 남아있는 호랑이가 있다고 해도 살기 곤란한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하지만 운좋게 현재 6, 7마리는 백두산 일대에 아직도 서식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백두산 일대에만 서식하지 않고 압록강과 두만강 너머 만주, 연해주 지역까지 드나들 것이 확실하므로 그 점은 감안해야 한다. 한반도 내에 서식하던 호랑이는 죽고 그 뒤에 만주에서 유입된 호랑이일 수도 있는 것이다.
실제 일제 강점기 시대 사냥꾼들은 "만주범"과 "조선범"을 구분했는데, 만주범이 강을 건너 조선땅에 들어와서 돌아다니다가 만주로 돌아가는 경우도 심심찮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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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서는 1999년까지 북부 지역에서 호랑이가 발견되었고, 외국 귀빈들이 사냥하게 하거나 남북과 관계가 좋을 때는 생포해서 선물로 주는 등 외교적인 목적으로 활용하였다 그러나 이 이후에는 확인이 되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은 호랑이가 발견된 지역들을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였다.[14] 하지만 연변에서 나타난 것을 보아 백두산 부근에 아직 있다는 것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
4. 생존?
남한 지역에서는 공식적으로는 1918년 강원도 춘천군 가리산에서 수컷 1마리, 1922년 경상북도 경주군 대덕산에서 수컷 1마리, 1924년에 강원도 횡성에서 한 마리가 잡혀 사진이 찍힌 것이 남한 지역에서 잡힌 마지막 호랑이다. 물론 자료와 사진이 남아있는 공식자료에 한해서 이며 신문기사나 증언을 감안하면 강원도 횡성 호랑이가 남한에 살던 마지막 개체는 아니었을 것이고, 이후로도 사냥된 개체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자료의 미비로 확인할 길이 없을 뿐이다. 마지막 빨치산으로 유명한 정순덕은 빨치산 생활 중이던 1954년에 지리산에서 "누런 몸에 검은 줄무늬가 있는" 호랑이를 목격했다고 주장했으나 30년 뒤에 한 증언인데다 실제적인 증거가 전혀 없고, 북한 지역에서는 1946년 평안북도 초산에서 1마리가 잡혔고 그 이후에도 가끔 포획되거나 백두산, 개마고원 일대에서 영상이 찍힌 적이 있으나 현재는 이곳 마저도 절멸 상태다.
1969년 충청북도 영동군에서 호랑이가 출몰해 주민들이 공포에 떤다는 신문기사가 나는 등 불과 50년 전까지도 주변에 호랑이가 있을 수 있다는 인식이 있었으며[15] , 일부 나이 드신 분들의 증언에 따르면 아직도 가야산이나 봉화군 등에 생존해 있다지만 확증이 없는 풍설에 불과하다. 강원도 주변의 심마니들 사이에서도 목격담 등이 종종 나오고는 있으나 역시 공식적으로 증명할만한 근거는 전혀 없다.
호랑이가 아직 있다고 생각하고 찾으러 다니는 동물학자들이 있기는 한데, 간혹 산속에서 호랑이 배설물 같은 것을 발견할 때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삵의 발자국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고, 그 이상 직접적인 증거가 없다.
호랑이 생존을 주장하는 쪽에서 증거로 제시하는 사례로 1989년에 DMZ에서 활동 중이던 미군이 레이더 촬영을 통해 야생 호랑이를 포착하여 지역 근무자들에게 호랑이를 조심할 것이라고 당부한 사실(단, 링크된 블로그에 의하면 1986년이며 세마리의 호랑이가 포착되었다고 한다 해당 블로그)과 2000년, 러시아 전문가가 강원도 화천과 구룡령 계곡에서 호랑이의 생존 가능성을 확인한 뒤, 그 해 5월 내셔널지오그래픽 잡지에 이에 대한 내용을 소개했다는 일화 등이 제시된다. 여기에 강원도의 깊은 산골은 인적도 드물고 대형 고양잇과를 보았다는 목격담이 꾸준히 나오는 곳이므로 생존 가능성을 아예 배제할 순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호랑이가 야생에서 생존하기 위해 필요한 영역과 먹이의 양을 생각하면 이제까지 단 한번도 공식적으로 확인된 목격 사례나 호환 사례, 사진이 없을 수가 없다. 크게 양보해서 60년대 말, 70년대 초까지 생존한 호랑이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번식을 통한 개체군 유지가 불가능한 단독 개체였을 공산이 크고, 2020년대가 된 현재까지는 다 늙어 죽었을 것이다.
환경부가 호랑이를 '멸종'이 아닌 '멸종위기 1급 포유류'로 분류하고 있는 상황을 호랑이 잔존의 증거로 제시하는 경우도 있으나, 이는 한국호랑이와 유전자가 일치하는 시베리아호랑이가 한국의 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기사) 그래봐야 진짜 야생 생태계에서는 멸종상태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5. 복원사업
국내의 호랑이 보호 단체로서 호랑이에 대한 활발한 연구를 진행해 온 (사)한국범보전기금의 한반도 호랑이 복원에 대한 공식적인 입장은 '''"현재 남한에서 야생 호랑이를 복원한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이다. 범보전기금이 추구하는 한반도 야생 호랑이 복원은 사육 개체의 방생 등을 통한 인위적인 복원이 아닌 현재 러시아 연해주에 서식하는 야생 호랑이의 개체수를 안정적으로 늘려 자연스럽게 호랑이들의 서식지가 러시아와 중국에 접경한 한반도 북부까지 확장될 수 있도록 하는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러시아-중국-한반도의 생태계를 잇는 동북아 생태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이다.
아무르 호랑이는 1,000 km(서울 부산간 거리 325km)까지 이동하며 러시아 야생동물 보호협회에 따르자면 수컷 호랑이는 약 1,385km²의 영역을 필요로 하고 암컷은 성공적으로 새끼들을 길러 내기 위해서 약 250-450km²의 영역을 필요로 한다. 한국의 평균적인 1개 시군 면적을 500km²로 보면 암컷 1마리 영역이 1개군 전체 면적과 맞먹으며 수컷의 경우는 서울시 면적의 2배가 필요하다. 다만 호랑이의 영역 넓이는 먹이인 초식동물의 서식 밀도에 따라 형성되므로, 꼭 시베리아 기준(초식동물 서식밀도가 낮아서 호랑이가 그만큼 멀리까지 돌아다닐 수밖에 없는)을 그대로 한반도에 적용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아무리 너그럽게 계산해도 현재 한반도에 서식하는 초식동물의 밀도가 야생에서 존속 가능한 규모의 호랑이 개체군을 유지할 정도가 아님은 분명하다.
애초에 한국호랑이(아무르 호랑이와 유전자 100% 동일)는 멸종된 적도 없으니 복원이라는 게 이상하지만 정부나 단체에서 말하는 소위 복원이라는 게 동물원 번식(에버랜드나 서울대공원같은 동물원에서 번식 성공)이 아닌 생태 복원이라면 물리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 따라서 정부든 지자체든 호랑이 복원 비슷한 이름의 프로젝트들은 높은 확률로 세금 낭비일 가능성이 있다.
6. 산림청의 '자칭' 호랑이 복원
호랑이의 연이은 죽음, 산림청 20년 졸속행정의 역사
산림청에서는 호랑이 복원을 명분으로 국립시설인 백두대간수목원을 건립했다. 해당 시설에서 호랑이들을 사육·전시 중에 있으나 산림청의 이러한 행동은 호랑이 복원에 있어서는 사실상 아무런 의미 없는 행동으로 평가받고 있다.
산림청은 한반도 호랑이 복원을 명분으로 하여 중국으로부터 1994년 6월 9일 국교수립기념으로 수컷 '백두'와 암컷 '천지'를 들여왔다. 산림청은 자신들이 들여온 호랑이들이 당시 국내 동물원에서 전시하던 시베리아호랑이와는 다르게 중국에서 들여온 백두산호랑이라며 생물학적으로 엄연히 같은 종인 백두산호랑이와 시베리아호랑이를 다른 종으로 오해할 혼란의 여지가 있는 표기를 사용했으며, 산림청의 이러한 백두산호랑이라는 표기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중이다.
산림청은 호랑이들을 수용할 시설을 채 건설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백두와 천지를 기증받아 그 사육을 서울동물원에 맡겼다가 12월 광릉 수목원으로 옮겨 수용했지만 짧은 기간에 급격하게 사육환경이 두 차례 바뀌면서 환경변화에 예민한 동물인 호랑이였던 백두와 천지에게 스트레스로 인한 질병이 발생했는데, 특히 백두는 다발성 위궤양을 앓아 반입 당시 160kg이었던 체중이 90kg으로 떨어지기까지 했지만 광릉 수목원에는 제대로 된 수의인력이 배치되어 있지 않았던 탓에 서울동물원, 에버랜드 등 외부 동물원 수의사들의 왕진 진료를 받다 백두의 상태에 개탄해 개인동물병원을 운영하다 자진하여 광릉수목원의 사육사로 입사한 수의사의 2년에 걸친 지속적인 치료로 1997년에 비로소 건강을 회복했다.
백두가 건강을 회복한 뒤에는 번식을 위해 천지와 지속적으로 합사되었지만 알 수 없는 이유로 번식에는 성공하지 못했고, 백두와 천지가 15살이 되어 번식을 기대하기 어려운 나이가 된 2005년에 산림청은 새로운 호랑이 반입 계획을 세워 2005년 11월 16일 한·중 산림협력회의를 통해 다시 중국에서 수컷 '두만[16] '과 암컷 '압록'을 들여와 광릉수목원에 수용했지만 2006년 3월 29일에 압록은 돌연 폐사했다. 압록의 사인은 세균성 신장염으로, 서울대 수의학 부검팀의 부검 소견에 따르면 이송과 환경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 및 연이은 합사와 교미로 인한 세균 감염이 원인으로 추정되었다. 이처럼 산림청에서는 호랑이들의 번식을 독촉했으면서도 국내에는 알맞은 혈통이 없다는 등 중국 혈통에 대한 자부심으로 자신들의 호랑이를 국내의 타 호랑이들과는 합사하지 않았지만 산림청이 중국에서 들여온 호랑이들 부터가 국제적으로 순혈 시베리아호랑이임을 인정받지 못한 개체들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산림청의 행동은 무의미했다.
백두와 천지는 끝내 번식하지 못한채 각각 2011년과 2010년에 폐사했다 산림청은 다시 호랑이 반입을 계획해 2011년 10월 26일 중국 동북호림원 출신의 수컷 '금강'과 암컷 '금송'을 들여왔으나, 앞서 서울동물원 측에서 두만을 2009년부터 1년 간 임대 사육하면서도 두만의 혈통 등재 여부에 '등재 불가'라고 기재하는 등 중국 혈통의 호랑이들은 순혈 여부가 불확실하다는 것이 국내에 확실히 공인되었음에도 금강과 금송의 반입에 대해 백두산호랑이의 귀환이라며 대대적인 홍보를 통해 국내 호랑이들과의 차별성을 꾀했지만 오히려 산림청의 금강, 금송 반입보다 앞선 한·러 수교 20주년 기념으로 2011년 6월 24일 한국에 기증된 야생 시베리아호랑이를 조부모로 두고 있는 실제 순혈 시베리아호랑이인 수컷 '로스토프'와 암컷 '펜자'가 서울동물원에서 사육되고 있었기 때문에 산림청의 이러한 홍보 또한 거짓이었다.
산림청의 실책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아 1994년 백두와 천지의 반입 때부터 사육 시설을 여러 차례 옮겨 호랑이들의 건강을 악화시켰던 전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금강과 금송을 당시 2014년 완공 예정이었던 백두대간수목원에 사육할 것을 표명하며 둘의 사육을 대전 오월드에 위탁했다. 대전오월드의 임시 우리에 금강과 금송을 수용하면서도 둘의 번식을 추구해 금강과 금송을 합사하여 번식을 유도했고, 2012년 6월 27일 금강과 금송 사이에서 딸 '미호'가 태어났지만 미호를 낳은 금송은 출산 후 자궁 패혈증과 위궤양을 앓다가 2015년 7월에 폐사했다. 산림청은 어미 금송의 사망으로 산림청 소유의 유일한 암컷 개체가 된 딸 미호의 번식을 추구하여 2015년에 미호의 첫 교미가 이루어졌지만 미호가 아비인 금강과 자주 합사되어 있었던 정황상 아비인 금강과의 근친 교배가 의심되었고, 질병으로 폐사한 어미 금송처럼 미호도 질병으로 가슴 종양을 앓아 9차례에 걸쳐 수술을 진행했지만 2016년 9월 경 미호도 폐사했다.
금송, 미호의 폐사 이후에야 금강과 금송의 사육 시설로 예정되어 있던 백두대간수목원이 완공되어 2017년 1월 25일 광릉수목원에 수용되어 있던 두만과 대전오월드에 수용되어 있던 금강이 이송되었으나 이송된지 얼마되지 않은 2017년 2월 3일에 먹이를 거부하던 금강은 돌연 폐사했는데, 부검 결과 사인은 만성 신부전증으로서 오랫동안 앓아온 지병이었으나 '''이송과 환경 변화로 인한 스트레스가 가중되어''' 사망한 것으로 여겨졌다.
금강의 사망 이후 산림청 보유 호랑이는 2005년에 들여온 나이 든 수컷 두만 밖에 남지 않자 산림청은 서울동물원의 시베리아호랑이를 들여오는 것을 추진해 서울동물원에서 수컷 '우리'와 암컷 '한청'을 들여와 백두대간수목원에 전시하는 것으로 백두대간수목원 전시 호랑이를 확보했으나 우리와 한청 등을 비롯한 서울동물원의 시베리아호랑이들 대다수는 근친교배로 태어난 개체들인 동시에 조상 개체인 STB 2538 '호돌'이 북미권 시베리아호랑이 혈통대장에서 교잡된 개체로 명시된 교잡 개체들이었고, 특히 수컷인 우리는 앞선 혈통 문제로 중성화 수술을 받은 개체이며 한청은 13세인 고령의 개체이다.
2020년 12월 20일 두만이 만 19세로 폐사했다.
이처럼 산림청의 호랑이 복원은 호랑이 종보전에조차 어떠한 기여도 하지 못한 단순 호랑이 전시에 그치고 있을 뿐이며, 범보전기금 측도 제한된 우리에서의 방사가 아닌 야생 호랑이 복원의 필요성을 말하며 백두대간수목원을 언급하고, 범보전기금의 대표인 서울대학교 이항 교수도 산림청의 이러한 행보에 대해 "자연에서 호랑이가 살기 위해 필요한 면적의 24000분의 1에 불과한 곳에 가둬놓고 백두산 호랑이를 복원했다고 말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중국 동북호림원의 혈통 기록은 학계의 공개적 검증을 받은 적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라고 기고하는 등 산림청이 주장하는 호랑이 복원은 언론보도와는 다르게 사실상 자칭에 그친 수준이다.
[1] 그 수가 매우 줄어든 20세기에도 한반도 동남부의 경주와 서남부의 목포에서 호랑이가 잡힌 사례가 있다. 하지만 제주도에는 호랑이가 있었다는 기록이 없다. 애초에 제주도에는 대형 맹수들이 살지 않았다.[2] 거기다 당시 만주는 청의 만주 공동화 정책으로 상대적으로 더욱 동물이 살기 좋은 환경이었다.[3] 다만 용맹하단 기록과 비슷하게 실제로 근대 사냥꾼이 사냥을 하면서 조선범이 만주범에 비해 훨씬 사나웠다고 기록이 있는데, 인간과의 잦은 충돌로 인한 결과일 가능성이 높다[4] 전래동화에서 '효성스런 호랑이'라는 제목으로 묘사되었다.[5] 잡아먹지 않은 이유는 총각이 '''진정한 인간'''이었기 때문이라고 한다.[6] 호랑이 눈썹 덕에 인간으로 변장한 동물의 본 모습을 알고 그 동물의 입맛에 맞게 요리를 내는 것.[7] 또는 가난한 사내가 호랑이에게 죽으려다가, 호랑이가 준 눈썹 덕분에 바가지를 긁는 아내가 돼지가 변신한 것임을 알아보고, 호랑이가 주선해주어 또다른 진정한 인간인 과부와 살림을 차려서 잘 먹고 잘 살게 된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런 류의 이야기 중에는 본래 닭이었던 가족을 호랑이가 싸그리 죽여버린 뒤 진짜 인간과 삶을 다시 시작하도록 주선하기도 한다.[8] 일본에서는 동일한 설화에 호랑이 대신 늑대가 등장하기도 한다.[9] 일단 '옛날 옛날 호랑이 담배 필 적에'부터…[10] 자신의 아버지를 잡아먹은 호랑이를 잡은 다음에 그 호랑이를 해부한 다음에 냇가에 묻었고, 장례를 치르고 나서 호랑이 고기를 먹으면서 복수했다. 이 설화는 삼강행실도에 실렸으며, 현대에도 전설의 고향을 통해 드라마화되기도 했다.[11] 조선시대 지방 수령은 자기 관할구역 내에서 행정권, 징세권, 재판권, 군사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다.[12] 구식 화승총도 탄의 운동에너지는 상당히 크다. 실제로 머스켓탄도 운동에너지만큼은 현대의 돌격소총 탄과 맞먹는다. 호랑이 같은 맹수도 몇 발 맞추면 충분히 죽일 수 있다.[13] 당시는 물론이고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일본에는 야생 호랑이가 살지 않았다.[14] 그러나 대한민국 법에서는 이를 인정하진 않는다.[15] 단 이것은 표범과 착각했을 수 있다. 한국 표범은 해방 후에도 남한에서 발견된 사례가 있기 때문. 조선시대에도 표범과 범은 구분하지 못하거나 한통속 취급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16] 2001년 5월 16일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