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멸망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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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촉한과 위를 멸한 서진이 280년 동오를 토벌하여 삼국을 통일하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2. 전쟁 발발전
2.1. 독발수기능의 난
263년 촉한이 위에 멸망당하고 불과 2년 후에 위마저 사마소의 아들인 사마염에게 제위를 선양하면서 멸망하고 서진이 건국되었다. 서진은 마지막 남은 오 정벌을 감행하려 했지만 오가 멸망당한 해는 280년으로 촉한 멸망 후로 무려 17년을 더 버텼다. 동맹인 촉한의 멸망으로 혼자 남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서진 측에 여러가지 사정이 있었겠지만 오랫동안 오 정벌을 미뤘던 이유 중에 가장 큰 것이 바로 270년 옹주에서 일어난 독발수기능의 반란 때문이었다.
독발수기능은 수년 넘게 서진을 위협했을만큼 강력한 군벌로 대두되었고 이때문에 서진은 오를 토벌하려고해도 독발수기능 때문에 장기간 미룰 수 밖에 없었다. 당장 독발수기능의 난이 끝나마마자 오나라를 멸망시켰다고 봐도 분명하다, '''즉, 한참 막장 테크트리를 타고 있던 동오보다 이민족의 난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사마소와 등애가 촉한 정벌 기간 중 공통적으로 여기던 것이 바로 '''촉한을 멸하면 그 지역의 자원을 통해 3년 안에 오도 멸할수 있다.'''는 것이었다. 다만 등애는 그 꿈을 실현하지 못한채 역적이라는 억울한 누명 때문에 죽었고 하필 사마소도 얼마안가 병사하니 그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서진이 세워진 후에 이런 저런 정리 과정이 있었으므로 그걸 다 정리하고 3년간 촉의 자원을 이용한다치면 대충 270년 쯤에는 오나라를 멸할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10여년간 지속된 독발 선비들의 난이 없었다면 오나라는 역사보다 더 금방 무너졌을것이다.
당장 당시 진왕이 되었던 사마소는 막 즉위한 손호에게 이런 협박을 하기도 했다.
다만 독발수기능이 이끄는 선비족의 침입 때문만으로 10~20년 가까이 오 정벌이 미뤄진 것은 아니며 서촉 동란 - 강유, 종회의 난과 서진 건국으로 인한 내부의 혼란, 육항이 건재할 시기엔 그가 만든 방어진이 진의 침공을 적절하게 방어하고 있었고, 육항 사후엔 양호가 오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했으나 결정적으로는 사마염 본인이 의욕이 적었던 등의 요인도 크다. 그리고 서진 내부의 권력 암투와 양호를 견제하기 위한 가충 일파의 견제 역시 한 몫 했는데, 당시 정세상 오 정벌을 반대하기에 가장 적절한 핑계로 독발수기능의 난만한 것이 없다.(전략)장차 전쟁을 멈추고 인자함을 일으켜 백성들을 위해 목숨을 빌고자 편사에 명령을 내려 촉한을 평정하도록 하였는데 전역이 해를 넘기지도 않고 전군이 촉을 이길 수 있었습니다. '''이 당시에 맹장과 모사, 조신과 뭇 선비들이 모두 하늘의 시기의 마땅함을 받들어 이미 정벌에 나선 군대로 적을 삼킨 기세에 힘입어 응당 깃발을 되돌려 동쪽을 향해 오나라의 국경에 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수군을 강에 띄워 흐름을 따라 아래로 내려가며 육군은 남쪽으로 수레바퀴를 돌려 4군을 지나 성도의 기계와 파한의 곡식을 실어 나른 연후에 중군을 가지런히 하여 3방향에서 운집하면 12일도 채 되지 않아 강표를 평정하고 남하를 궤도에 오르게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국조는 촉을 정벌하던 원정을 심히 우려하여 비록 어지러움을 평정한 공로가 있지만 또한 '''촉의 백성들이 홀로 그 해를 당한 것을 슬퍼하니 면죽관에서 싸운 사람들 중에서 원수이하가 더불어 참륙당해 엎어진 시체가 땅을 덮고 피가 흘러 들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하나가 앞서 가도 뒤따라가는 유한을 참을 수 없거늘 하물며 다시 한번 뒤에서 하겠습니까?''' 그렇기에 군대를 돌리고 갑옷을 수습하며 남방과 더불어 백성의 생명을 보전하고자 생각하였습니다. 무릇 힘과 세력을 헤아리고 물자와 험난함을 가늠하며 '''멀리 고대의 흥하고 폐하는 원리를 고찰하고 가까이 서촉의 안위의 효과를 거울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덕을 높이고 국조를 보전하며 위태로움을 피하고 순리에 따르는 것으로 자신을 굽혀 사해를 평안하게 하는 것은 인자하고 지혜로운 사람의 높은 경지요 위태로움을 밟고 구차하게 안전을 도모하며 덕을 무너뜨리고 국조를 뒤엎어 후세에 칭해지지 않는 것은 지혜로운 사람이 거하는 바가 아닙니다. 지금 조정에서 서소, 손욱을 보내 편지를 드려 마음속의 생각을 밝히니 만약 편지가 면전에 도착하거든 반드시 약간이라도 의중에 남겨 전쟁하고자 한 생각을 돌리고 우호를 맺어 전쟁을 그치게 하여 더불어 한 집안이 된다면 은혜가 오회뿐만 아니라 중토에도 널리 퍼질 것이니 어찌 태평성대가 오지 않겠습니까! 이것이 소(사마소)의 마음속의 거대한 소원인데 감히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명을 얻을 수 없다면 천하가 모두 대동을 기대하니 비록 다시 한번 전쟁을 한다고 하여도 진실로 부득이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군사 행동 지연의 기저에는 황제 사마염의 후계 문제가 있었다. 사마염의 아들 사마충의 문제는 이미 조야가 알고 있는 상황에서 동오 정벌 3년 전에 사마염이 병환으로 정무에서 잠시 이탈했을 때 황제의 친동생이자 큰아버지 사마사의 가계에 입적된 혈육인 사마유에게 제위가 이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형성되었는데 [2] , 양호와 두예도 이러한 주장에 동조하는 입장이었으며 동오 정벌이 시작되면 황제로부터 가절을 받을 가능성이 높은 인물로 정벌에 반대하는 가충보다 사마유가 유력하다고 생각해 그에게 큰 공적이 될 동오 정벌을 적극적으로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사마염의 보기에는 가충은 사마충의 장인으로 후계자 교체에 미온적으로 보였지만, 그는 사마유의 장인이기도 했기에 말을 갈아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사마염은 자신이 병환으로 누워있을 무렵, 형성된 후계자 교체 여론을 가충이 막지 못한 것인지 방조한 것인지 의심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가절을 받는 총사령관에 가충, 전선군 지휘관에 두예를 임명하는 절충안을 택했다.
상기 두 사람의 대화에서 총사령관 취임을 거부하는 가충이 사마염의 후사와 관련하여 다른 마음을 품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는데, 그가 사마충의 계승에 전력을 다하는 입장이라면 사마유가 배제된 원정군 지휘권을 거부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황제가 직접 출진할 경우 태자인 사마충이 수도의 통치권을 위임받지만, 이는 사마유와 그를 지지하는 귀족관료들에게 자연스럽게 통치권이 넘어가면서 후계자 교체 여론이 다시 일어날 확률이 너무 높았다.가충은 큰 공로를 세워 이길 수 없는 것을 걱정해 상표했다.
'''지금은 군을 일으켜 오를 토벌할 시기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늙어 오와의 싸움에 견딜 수 없습니다.'''
조명이 있었다.
'''그대가 가지 않으면, 내(사마염)가 간다.'''
사마염의 절충안은 가충을 사마충의 장인으로서 원정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황제는 수도를 계속 장악하고, 태자는 혹여 있을지 모를 원정실패의 책임에서 비켜갈 수가 있다. 즉, 사마유가 공을 세울 기회와 사마충에게 흠결이 될 상황을 철저히 봉쇄하는 수를 찾을 때까지 황제의 의지로 동오 원정을 연기하였다는 것. 사마충이 태자로서 직접 흠결있는 행위만 하지 않는다면 서진 정권의 특성상 후계자 교체 여론을 황제는 단호히 거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3][4]
2.2. 양호와 육항
촉 멸망 후에도 오에는 정봉과 육항, 주적이라는 당대 최고의 명장들이 아직 버티고 있었다. 설령 촉 멸망 후에 오 황제 손휴가 충격으로 병사하고 그 뒤를 손호가 잇긴 했지만 오는 넓은 강을 끼고있다는 이점 때문에 공략이 매우 어려웠다.
그렇지만 오도 형주나 합비[5] 등으로 여러번 진출을 시도했지만 별 다른 성과를 올리지 못했으며, 서진 건국 후에도 몇 차례 교전이 있었지만 그 때마다 육항이 잘 막아냈고 양호도 육항의 지용을 크게 평가했다.
사실 장료가 너무 쩔어줘서 잘 모르는 사실인데 합비와 건업 사이의 강은 위/진이나 오 아무도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여기서 공격작전을 해서 성공한 유일한 장수가 감녕 하나뿐이었으니[6] 어느쪽으로도 철옹성이었다. 그렇기에 여기서 벌어지는 전투는 거의 대부분 수비군의 승리로 끝났다.
2.3. 손호의 폭정
하지만 육항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는 망국을 맞이하기 몇 십 년전부터 내부에서 썩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이미 이궁의 변과 손준, 손침 형제의 깽판으로 인해 중요 인재들이 죽고 내부가 무너지기 시작한 이래 초대 황제 손권의 아들들 중에 살아남은 인물은 없었다. 6남이자 3대 황제인 손휴마저 죽고 그 뒤를 이은게 하필 이궁의 변으로 희생된 손화의 아들 손호였다. 유선은 난세를 헤쳐나갈 군주로서 능력이 부족하고 놀기 좋아했으나 적어도 학정이나 가렴주구를 일삼은 폭군은 아니었고, 아직도 대외적인 이미지를 생각해서든, 마음속으로든 옛 조국이 망한걸 한탄할 정도로 촉한에 충성하는 신하들도 많이 있었다.
그런데 손호는 유선보다 한술 더 떠서 자신에게 간언하는 신하들을 죽이고 사치를 일삼으로서 폭정을 펼쳐 신료들을 죽이거나 서진으로 도망가는 사례가 종종 발생했다. 서진에서도 오의 내부 상황을 주시하고 정벌 타이밍을 계속 잡으려 했지만 사마염 본인이 의욕이 적었고 가충이 반대했으며 서진 내부의 권력 암투와 양호를 견제하기 위한 가충 일파의 견제 역시 한 몫 했는데, 당시 정세상 오 정벌을 반대하기에 가장 적절한 핑계로 독발수기능의 난만한 것이 없다.
2.4. 곽마의 반란
한편 오나라에서는 손호의 폭정이 이어지는 와중인 279년에 손호가 교주, 광주의 호구를 조사해 조세를 거둬들이고 백성을 징집하려 하자 곽마가 이에 반발해 하전, 왕족, 오술, 은홍 등과 함께 반란을 일으켜 광주, 남해, 창오, 시흥 등을 함락하고 관리들을 죽였으며, 이에 손호가 등수에게 1만 명, 도준에게 7천 명의 군사를 주어 곽마를 토벌하게 했고 도황에게는 수하의 사람들을 포함해 합포, 울림 등 여러 군에서 병사들을 인솔해 동, 서의 군대가 함께 곽마를 공격하게 했다.
3. 전쟁 발발
3.1. 정벌 감행
그러다 오에서 육항이 죽자 양호는 기회는 지금이라며 황제 사마염에게 오 정벌을 주청했지만 가충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후 양호는 살아서 오 정벌을 보지못한 채 눈을 감게되었는데, 죽기 전에 자신의 후임으로 두예를 추천했다. 279년 왕준이 사마염에게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오 정벌을 할 것을 주장한 상소를 올려 이 세 가지 중 하나라도 어그러지면 힘들다고 했다.
- 손호가 폭정을 저지르고 있으니, 손호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세워지면 강력한 적이 된다
- 자신은 정벌 준비를 위해 배를 7년이나 만들었는데, 이대로 가면 배가 그대로 썩는다
- 자신의 나이가 70이라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도 회답이 없자 두예는 다시 상소를 올려 양호가 비밀리 폐하와 계획을 시행하려 한 것은 일의 이로움과 해로움을 비교해 하는 것으로 성공할 가능성이 크고 실패하더라도 공로만 세우지 못할 뿐이며, 만약 중지하면 손호가 두려워서 살아날 계책으로 준비하게 되면 다음 해에 시행해도 목적을 달성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사마염이 장화와 바둑을 두고 있을 때 두예의 상소가 도달하자 장화가 바둑판을 밀어넣으면서 폐하의 나라의 군사는 강력하고 부유하지만 손호는 폭정을 저질러 현명한 사람을 주살하니 수고를 들이지 않고도 평정할 수 있을 것이라 하자 사마염은 오 정벌을 허락했다. 가충, 순욱, 풍담이 오 정벌을 반대하면서 사마염이 크게 화를 내자 가충이 사죄했다.
겨울 11월에 오 정벌을 위한 군사를 크게 일으켜 진군장군 겸 낭야왕인 사마주는 도중, 안동장군 왕혼은 강서, 건위장군 왕융은 무창, 평남장군 호분은 하구, 진남대장군 두예는 강릉으로 나아가고 익주자사 겸 용양장군 왕준과 파동감군 당빈은 파촉에서 나아가게 했다. 왕준은 출발하기 직전에 총애하던 아문장군 이연을 참수하자 장수들이 서로 말을 타고 싸우고자 다투었다.
동쪽과 서쪽의 군대가 20여만 명이었고 가충은 사지절, 가황월, 대도독으로 삼고 관군장군인 양제를 부장으로 삼았으며, 가충이 오 정벌은 이롭지 못하다면서 스스로 늙어 원수의 책임을 감당하지 못한다고 하자 사마염은 그대가 가지 않는다면 자신이 가겠다고 하자 가충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 중군을 거느리고 양양에 주둔해 여러 군대를 통제하고 조절했다.
3.2. 여섯 방향으로 진군
두예가 강릉, 왕준이 서릉으로 향하고 왕혼이 횡강을 나왔고 호분은 하구로 나아갔으며, 사마주는 낭야상 유홍을 시켜 장강에 이르러 오나라의 새수를 바치게 했다. 또 장사 왕항을 시켜 장강을 건너 변경 지역을 지키던 수비병들을 공격해 도독인 채기를 사로잡았고 이 때 참수하거나 항복받은 자가 5, 6만을 헤아렸다.
왕융은 참군인 나상, 유교에게 선봉을 맡겨 무창으로 진격했으며, 오의 장군 양옹, 무창독 손술, 강하태수 유랑, 상서시중 겸 독무창제군 우병 등이 각기 군사를 이끌고 왕융에게 항복했고 두예, 왕혼 등은 오나라 주둔지인 진과 초소인 수를 공격해 가는 곳마다 승리했다.
진나라 측에서는 건업으로 직접 쳐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그 이외의 지역으로 공격루트를 정했고 이 여섯 방향 모두 형주 또는 옛 촉한 지역에서 출발해 뚫고 들어가는 루트로만 구성되어 있다.
3.3. 파촉에서 장강을 돌파하다
진나라에서 오를 공격하기 전에 건평태수 오언이 진나라의 촉 지역에서 배를 만드는 것을 깨닫고 방비하는 병력을 늘리자고 건의했지만, 손호가 이를 허락하지 않자 오언은 장강에 쇠사슬과 쇠말뚝을 이용한 진을 설치했다.
장강에는 모래 사장 요충지에 나란히 쇠사슬로 강을 가로 질러 뱃길을 끊어놓으면서 길이가 1장이 넘는 쇠막대기를 강 가운데 몰래 설치해놓고 전선을 맞이해 막게 했는데, 왕준이 사방으로 100보가 되는 큰 뗏목을 수십 개 만들어 풀을 묶어서 사람처럼 만들어 갑옷을 입히고 무기를 들게 하고는 물을 잘 아는 사람에게 뗏목을 타고 먼저 가게 해서 쇠말뚝에 부딪치게 해 쇠말뚝이 뗏목에 붙어서 내려가게 했다.
또 길이가 백여 장이고 크기가 수십 아름인 커다란 횃불을 만들어 참기름을 부어서 배의 앞에 달아놓고 쇠사슬에 부딪혀 여기에 불을 붙여 태우니, 쇠사슬이 녹아서 끊어지자 배가 나아가는 것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게 되었다.
왕준은 장강을 돌파하자 2월 1일에 당빈과 함께 단양감 성기를 격파했으며, 3일에는 서릉에서 무창감 겸 진남장군인 유헌, 의도태수 우충, 서릉감 정광, 정남장군 성거를 죽였다. 5일에는 형문, 이도에서 승리해 이도감 육안을 죽이고 8일에는 악향을 공격해 편장군 겸 중하독 육경을 죽였으며, 평서장군 시홍이 왕준에게 항복했다.
3.4. 파죽지세
두예의 명령으로 휘하의 아문장인 주지, 관정, 오소 등에게 명령하고 800명을 거느리고 배를 타고 밤 중에 장강을 건너 낙향을 습격하면서 기치를 많이 걸어두고 파산에 불을 놓도록 했다.
그러자 낙향독 손흠이 두려워해 강릉독 오연에게 북쪽에서 내려온 여러 군사들이 장강을 날아서 건넌 것 같다고 전했으며, 주지 등이 군사를 낙향성 밖에 매복시켜두고 손흠이 군사를 파견해 왕준을 막으려 했지만 대패하고 돌아갔다. 주지 등이 매복한 군사를 움직여 손흠의 군사를 뒤따라 성 안으로 들어가게 하자 이를 알지 못한 손흠은 곧바로 진나라의 군사들이 손흠의 장막으로 가서 손흠을 사로잡혔으며, 왕준이 먼저 위에 손흠의 머리를 얻었다고 보고했다가 두예가 살아있는 손흠을 보내자 낙양의 사람들이 이를 큰 웃음거리로 여겼다.
이어서 강릉으로 진격하고 승리해 17일에 강릉독 오연을 참수하고 원강, 상강의 남쪽으로 내려가자 교주와 광주에 인접한 군에서는 풍문을 듣고 인수를 보내 항복했으며, 이 때 참수되거나 사로잡힌 자로 오의 도독과 감군이 14명, 아문장이나 군수는 120여 명이었다.
18일에 사마염이 조서를 통해 왕준, 당빈이 파구를 평정했으니 호분, 왕융과 함께 하구, 무창을 평정해 물길을 따라 멀리 내려가 말릉으로 곧바로 전진하게 했으며, 두예에게는 형주 남쪽을 평정하고 군사를 나누어 왕준, 당빈에게 보태고 가충은 군사를 이동시켜 항현에 주둔하게 했다.
주변에서 '군사들이 남방의 풍토에 익숙치 않고 지리가 험하니 시일을 기다렸다 공격하자'고 건의하자 두예는 지금 군사들의 기세는 대나무를 쪼개는 것처럼 급하고 빠른 성세이니 오히려 속공을 펼 때라고 답하고 즉시 군사를 몰아야 한다고 말하면서 여러 장수들에게 계책을 알려주어 지름길로 건업으로 가게 했다.
3.5. 오군이 우저에서 진군과 맞서다
왕융이 대군을 통솔해 장강에 이르면서 오의 아문장인 맹태를 이기고 기춘, 주 2개의 현을 함락하고 호분은 하구를 나아가 강안을 함락했다. 횡강에서 나온 왕혼은 참군 진신, 성양도위 장교를 보내 심양의 뇌향을 함락했으며, 이어서 오의 아문장 공충을 공격해 전멸시켰고 오의 무위장군 주흥 등 5명을 포로로 사로잡았고 진오호군 이순에게 고망성을 지키게 했다. 왕혼은 이어서 오의 장군 유공을 격파해 사로잡거나 참수한 자가 많았고 오의 역무장군 진대, 평로장군 주명 등이 왕혼에게 항복했다.
오나라의 주군인 손호가 왕혼이 남하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승상 장제를 시켜 무리 3만 명을 이끌고 호군 손진, 부군사 제갈정을 인솔해 장강을 건너 맞아서 싸우게 했는데, 오군이 우저에 도착해 단양태수 심영이 이 곳에 군사들을 모아두고 오기를 기다렸다가 싸울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장제가 오나라가 장차 망할 것이라는 누구나 다 알 것이고 촉 지역에 있던 군대가 이 곳에 도착하면 많은 무리들이 마음으로 놀라워 두려워 정돈되지 못할 것을 걱정해 따르지 않았다.
왕혼은 오군이 성양으로 향하는 것을 알고 왕혼은 사마 손주, 양주자사 주준, 성양도위 장교 등을 보냈으며, 3월에 장제 등이 장강을 건너 왕혼의 부장인 성양도위 장교를 양하에서 포위하자 장교를 포함한 7천 명이 항복했다. 제갈정이 이들을 모두 죽이려 했지만 장제가 반대하자 제갈정은 이들이 거짓 항복임을 간파해 진언했지만 장제가 이를 따르지 않았으며, 장제는 토오호군 장한, 양주자사 주준과 서로 대치하자 심영이 단양병 5천 명을 이끌고 여러 번 수비진을 함락하고 진나라의 군대를 세 번 공격했지만 실패했다.
이로 인해 심영이 퇴각하면서 무리들이 혼란에 빠지자 진나라의 장군인 설승, 장반이 혼란한 틈을 타 오군을 공격하자 오나라의 군사들을 무너졌으며, 거짓 항복을 했던 장교는 뒤에서 오나라의 군대를 공격해 판교에서 격파했다. 제갈정이 수백 명을 인솔해 숨어서 도망치다가 장제를 보고 달아날 것을 권고했지만 장제는 이를 거부했으며, 제갈정은 달아나고 진나라 군사들의 공격으로 장제, 손진, 심영 등이 전사해 7천 8백여 명이 참수되자 오나라 사람들은 왕혼의 무력에 크게 떨었다.
장제의 오군을 격파하고 양주별가 하운이 주준에게 빨리 군사를 이끌고 장강을 건너 곧바로 건업을 향할 것을 권하자 주준이 왕혼에게 이를 이야기해 건업으로 향할 것을 권했지만 왕혼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4. 오나라의 멸망
사마염이 처음에 조서를 내려 왕준에게 건평으로 내려가서 두예의 통제를 받았다가 건업에 도착해서는 왕혼의 통제를 받게 했는데, 두예가 강릉에 도착해 여러 장수들에게 만약 왕준이 건평을 탈취하면 물길을 따라 멀리까지 달려가게 되어 위엄있는 이름이 이미 나타나게 되니 자신에게 통제받지 않게 할 것이고 만약 공략하지 못한다면 명령이 시행될 수 없을 것이라 했다.
손호가 유격장상 장상에게 수군 만 명을 이끌고 왕준을 막게 했지만 장상은 진나라의 깃발을 보자마자 항복했으며, 3월 9일, 오나라 조정에서는 수백 명의 관리들이 머리를 조아리면서 손호에게 잠혼을 죽일 것을 요청했다. 손호는 황당하고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들의 요구에 따랐다. 손호는 당연히 그 놈으로 백성에게 사죄할 것이라 말했을 뿐이지만 그 무리들은 '예!'라고 대답하면서 나란히 일어나 잠혼을 잡았으며, 손호가 계속해서 그만두기를 말했지만 무리들이 이미 잠혼을 도륙했다.
서릉독 도준이 1년 전에 교주에서 일어난 곽마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병사 7천 명을 이끌고 남쪽으로 향하다가 진나라의 군사가 공격한 소식으로 인해 무창에 주둔했다가 3월 11일에 건업에 돌아왔다. 도준이 수군 상황에 대해 물어본 후에 촉의 배는 모두 작다면서 2만 명의 병사를 얻어 큰 배를 타고 싸운다면 그들을 격침시킬 수 있다고 했으며, 손호가 병사들을 모아 도준에게 이끌고 가게 했지만 다음날 도준이 출발하기도 전에 병사들이 모두 달아났다. 손호는 외삼촌 하식에게 편지를 보내면서 도준의 표를 얻어보니 말하길 무창 이서(형주)는 더불어 다시 수비하지 못한다하는데 수비하지 못하는 것은 식량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성이 견고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병사와 장군들이 전투를 거부하기 때문이라고 탄식했다.
왕준이 서릉에 이르자 두예가 편지를 보내 이미 서쪽의 울타리를 부쉈으니 건업을 함락시키라고 하자 왕준은 기뻐했고 강의 흐름에 따라 삼산에 이르렀다. 왕혼은 아직도 군대를 주둔시키고 전진하지 못하고 있어서 왕준에게 편지를 보내 잠시 들러 일에 관해 논의하자고 했지만 왕준은 돛을 펴고 지나가면서 바람이 이로우니 정박할 수 없다고 보고하면서 건업으로 향했다.
이 때 사마주, 왕혼 등이 모두 오나라 변방 근처까지 도달했고 제갈정, 손혁 등이 사마주에게 항복했으며, 오나라의 사도인 하식, 건위장군 손안 등이 인신과 부절을 왕혼에게 보내 투항 의사를 전달했다. 손호가 광록훈 설영, 중서령 호충의 진언에 따라 태상 장기 등을 시켜 왕준, 사마주, 왕혼에게 각기 사자를 파견해 항복 편지를 전했는데, 15일 건업에 왕준이 8만 명을 이끌고 가장 먼저 도착했다.
손호는 석두성에서 망국의 예법을 갖춰 백마가 이끄는 흰 수레에 피부를 들어내고 스스로를 결박하고서 입에는 옥을 머금고 양을 끌었다. 대부들은 상복을 입고 관리들은 관을 실은 수레를 끌며 태자인 손근(孫瑾)과 손근의 동생인 노왕 손건(孫虔) 등 21명의 사람들을 이끌고 군문에 당도하였다. 왕준은 친히 결박을 풀어주고 옥을 받아들고 관을 불태웠으며 초청해 만났다. 도적(圖籍)을 거둬들이고 창고를 봉인했는데 군중에서 사사로이 취한 것이 없었다.
왕준이 거두어들인 지도와 호적이 4개 주, 43개 군, 313현, 52만 3천 호, 관리 3만 2천, 군사 23만, 남녀 호구 230만이었으며, 미곡은 280만 곡, 선박은 5천여 척, 후궁 5천여 명이었다.
4.1. 최후의 저항
오나라의 관료들은 대부분 항복해서 진나라의 관리를 지냈고 손호의 폭정으로 쫓겨나거나 실망해 물러났던 이들은 양주자사 주준을 통해 등용되었으며, 석위, 제갈정, 범평, 진훈처럼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다가 여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었다.
282년에 오나라의 옛 장수였던 완공과 백봉이 군사를 일으켜 건업을 공격하고 양주를 포위했는데, 진나라의 서주자사인 혜희에게 토벌되어 오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5. 후일담
동오가 멸망하는 순간 동오는 4개 주(양주, 형주, 교주, 예주), 가구 52만 3000호, 인구 230만 명, 병력 23만 명, 관리 3만 2000명, 식량 280만 섬, 배 5000척, 궁녀 5000명의 규모와 재산을 보유하고 있었다.
촉한멸망전때 만큼은 아니지만 동오 정벌과 관련된 인사들의 결과도 좋다고는 할 수 없었다.
주요 인물들의 포상 내역을 보면, 적극적으로 정벌을 주장하였고 이를 완수한 두예는 「춘추좌전」 해설서 집필이 마지막 행적이 되었고,[7] 일선 지휘관 중 공이 큰 왕준은 대장군 직함을 받았지만 운신의 폭이 좁아졌으며,[8] 사마염에게 동오 정벌을 설득해낸 장화는 도독유주제군사가 되어 잠시 수도를 떠났으나 사마염이 죽고 사마충이 즉위했을때 중앙정부로 돌아와 황후 가남풍의 총애를 받다가 가남풍이 사마륜에게 숙청당할때 본인도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사마유를 지지한 인물들은 힘을 잃은 반면, 원정에 끝까지 부정적이었던 사마충의 장인 가충을 공신에 포함을 시킨 조치에 대해 와타나베 요시히로 교수는 황제 사마염의 직계 혈육에게 후사를 넘기기 위한 편파성이 있었음을 주장한다.[9]
오 멸망 후 손호는 낙양으로 끌려가 4년 후에 사망했고 손호의 후궁 5천여 명은 사마염이 거둬들여 자신의 후궁에 넣는 등 사치와 향략을 벌였다. 그리고 서진도 통일한지 얼마안되어 팔왕의 난, 영가의 난이라는 역대급 국가 막장 테크를 밟고 멸망하면서 중국은 '''삼국시대보다 더한 혼란기를 맞이하게 된다.'''
6. 평가
삼국지연의를 읽은 독자들에게 있어서 촉한의 멸망은 슬픔과 분노가 교차되는 사건이었다. 반면에 오의 멸망은 삼국지의 마지막 전투 치고는 다소 허무하게 끝났다.[10] 그렇지만 촉 멸망 후에도 오가 외로이 17년을 버틴 것이 대단할 정도. 물론 오나라의 지리적 이점과 더불어 서진에서도 여러 사정이 겹쳤기 때문에 쉽게 오 정벌을 단행할 수 없었고 계속 연기했다는 점도 한 몫하였다.
만약 손호가 폭정을 펼치지 않았으면 이보다 더 오래가지 않았을까하는 시각[11] 도 있는데, 17년을 버티긴 했지만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결국 오도 멸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촉한이 존속한 상황이면 몰라도 촉한이 망한 순간 이미 세력균형은 서진으로 쏠려버렸고 게다가 오(吳)의 군사력이 감당하기엔 전선이 너무 넓어졌다. 촉한이 망한 순간 위진은 오나라를 공략할 고속도로를 얻었다. 합비에서 바로 건업을 뚫는 건 아예 불가능하고, 형주에서 촉으로 들어가는건 매우 힘들지만 촉에서 형주로 가는 수로는 물살을 타고 가는 루트라서 훨씬 편하다. 가뜩이나 양번이 서진 영토라 육지로 남군과 이어져 있어서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촉한까지 넘어갔으니 오나라의 형주는 삼면에서 한꺼번에 적을 막아야하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육항이 죽을때 촉이 망하는 바람에 서릉(=이릉)을 방비하기가 너무 힘들어 졌다면서 군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손호가 씹었고 후에 왕준이 수군 이끌고 나는듯 한수로 넘어오면서 형주를 순식간에 잃었다. 촉한이 망하면서 오나라는 자동문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오나라의 방어라인은 촉한이 동맹으로 살아있다는걸 전제로 한 것이므로 오나라를 정벌은 누가 먼저 적의 수도에 도착하냐 경쟁하는 느낌이 강하다. 사서에 남은 대화문구도 '다른 놈들보다 더 빨리 도착해야한다' 이런게 메인이니까. 영안, 양번, 신성합비군 전부 배타고 와서 밀어버렸다. 육항이 나헌을 공격한것도 영안 백제성을 못 얻으면 자립에 문제가 생기니까였다.
통일을 완수한 서진은 그러나 종친에 대한 분봉, 헤이해진 기강, 관리를 포기한 황제 가문의 가정사 문제, 여러모로 역량을 쌓아가는 이민족 세력, 사회분배 문제로 일어난 하층민 반란군 등등의 문제로 쓰러지게 되는데, 의외로 서진은 적어도 옛 오나라 지역에 대해서는 세심한 관리를 하여 훗날 강남에서나마 야만족 정권들에게 맞서싸울 힘을 얻게 된다. 여러 편견과는 달리 동진은 서진보다는 기강이 어느 정도 서 있는 상태였고, 옛 오나라에 비해서는 회수를 비롯한 화북 지역 영역을 더 많이 갖고 있었으며 군대와 인민도 그보다는 더 많은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6:2:1로 평가되는 삼국 시대 위:오:촉한 구도와는 달리, 동진은 적어도 3 정도는 되었고 6이라 할 수 있는 옛 위 지역은 오랫동안 통합이 어려운 상태였다.
한편, 오나라에 손휴 정도의 군주만 있었어도 망하진 않았을 것이라는 주장도 있다. 실제로 남조에는 손호는 명함도 못내밀 정도로 막장 군주가 많았지만, 북방 정권들은 진숙보가 군주가 된 후에야 겨우 남조를 멸할 수가 있었음을 볼 때, 조금 더 연명했을 개연성은 높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