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소매 붉은 끝동

 

1. 소개
2. 줄거리
3. 등장인물
3.1. 주인공
3.2. 왕실 인물
3.3. 궁녀들
3.4. 덕임의 가족들
3.5. 은언군 주변
3.6. 그 외 인물[1]
4. 특징
5.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
6. 고증
6.1. 깨알 같은 고증
6.2. 역사와 다른 부분
6.3. 기타


1. 소개


왕은 궁녀를 사랑했다. 그러나 군왕의 삶은 삭막했고 사내에 앞서 임금이기를 선택했다. 필연적으로 베푼 만큼 앗아갔다.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다. 세상은 여자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누가 제일 총애 받았나 따지면서도, 그 여자들은 과연 임금을 사랑했을지는 의문을 삼지 않았다. 덕분에 심사가 꼬인 궁녀는 무엄하게도 거절하였다. 그러자 보잘 것 없던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렸다.

왕으로 살고자 했던 남자. 그 누구보다 스스로에게 엄격했던 왕. 왕의 사랑을 받는 것은 꿈에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여자. 벗과 자유를 사랑했던 여인. 그들은 결국 서로를 마음에 담는다.

의빈 성씨 덕임의 인생과 정조와의 사랑을 그린 사극 로맨스 소설. 사실 로맨스를 다룬 역사소설에 더 가깝다.
작가는 강미강. 2007년에 (한국 나이로) 17살이었다고 하니 1991년 출생인 것으로 보인다. 경영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이 작품이 첫 작품이라고 하니 27살의 젊은 나이에 데뷔한 셈이다.
미디어에 많이 노출된 정조 시대 정치사 부분은 배경으로 가볍게 넘기거나 전개에 필요한 만큼만 다룬다. 보통 극의 원활한 전개나 재미를 위해 고증을 희생시키는 데 비해, 본작은 실제 역사에 상당히 부합한다. 굵직한 정치사 이면의 개인적이고 소소한 기록을 잘 발굴하고 활용해 장르 특성에 맞게 녹여냈다. 상상력으로 창작한 에피소드보다 실제 사건의 각색 비중이 크다.
두 남녀주인공에 집중한 인물 중심적 진행으로 로맨스 장르 본연에도 충실하다. 다만 정조가 무작정 사랑꾼이라는 식의 드라마틱하게 과장된 서술은 지양했다. 실제 기록으로 볼 때 과연 그렇게 사랑한다는 여자한테 할 만한 행동인가 싶은 의문이 드는 부분까지 전부 짚고 넘어가 현실성을 높였다.[2]
책 말미의 작가후기도 충실한 편. 작가가 17살이었던 2007년부터 집필을 시작해 2015년 6월에 완성했다고 밝히고 있다.[3] 또한 집필을 완료한 이후 번역되어 스토리에 반영하지 못한 사료를 정리하여 추가 설명하였다. 진실을 밝히기 어려운 역사적 의문점, 작품을 쓰게 된 계기 등도 덧붙였다.[4]
2021년 9월 MBC에서 드라마화한다.

2. 줄거리



동궁전 생각시 덕임은 자신이 맡고 있는 별간에 어떤 남자가 찾아오는데, 덕임은 꼬치꼬치 캐묻는 이 남자를 쫓아내나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남자가 자신의 상전인 세손임을 알게 된다. 그 이후 세손과 엮이게 되고, 덕임은 세손이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세손이 왕이 된 후 세손 시절부터 왕을 보좌한 덕로가 권세를 휘두르고 중궁이 자식을 낳지 못한다는 핑계로 자신의 여동생을 후궁으로 보내고, 덕로의 여동생은 숙창궁 원빈이 된다. 숙창궁은 어린 나이에 외로운 궁중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금방 죽어버리고, 덕로는 숙창궁의 죽음이 중궁과 관련 있다고 여긴다. 어느날부터 중궁전 나인들이 실종되고 덕임의 친구 경희도 비밀암호만을 남긴 채 사라진다. 덕임은 중궁전 나인들이 덕로에게 잡혀 문초를 당하고 있음을 알게 되어 대비에게 서신으로 구명을 요청하고 덕로를 찾아간다. 그러나 대비 대신 왕이 덕로를 실각시키는데 왕은 덕임에게 서신을 보여주며 자신은 세손 시절부터 덕로를 이용하고 버릴 생각이었음을 알려주고 덕임이 자신을 배반하고 대비와 내통했다며 분노한다.
덕임은 현록대부 댁으로 쫓겨나게 되고 시간이 지나 새 후궁인 경수궁이 간택되면서 덕임은 궁으로 돌아와 경수궁의 나인으로 배치된다. 경수궁이 친정에서 데려온 시종들과 갈등이 생기고 경수궁은 왕이 덕임에게 마음이 있음을 어렴풋이 눈치채고 덕임을 점점 냉대한다. 경수궁의 시종들이 덕임을 모함하는 사건이 발생하지만 덕임은 이를 잘 극복하고 왕은 덕임에게 승은을 내린다. 덕임은 정조의 승은을 입은 후 내명부 정5품 상의를 얻었으며 이후 2번의 유산을 겪은 후 1782년 정조 6년 아들을 출산하면서 내명부 정3품 소용에 봉해진다. 그리고 덕임이 낳은 아들에 원자 정호가 내려지면서 덕임은 정1품 의빈에 오른다. 덕임은 또 회임하여 이번에는 옹주를 생산한다. 옹주라는 이유로 주목은 덜 받았지만 덕임은 온전한 자기 자식이 생겼다는 생각에 기뻐했다.[5] 그러나 옹주는 고작 2달만에 병사하고, 슬퍼하는 덕임에게 효강혜빈은 "원래 아기는 약해서 잃기 쉽다. 또 가지면 된다. 그러니 자식을 잃은 전하를 위로해 드리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 덕임은 남아 있는 원자 덕분에 겨우 마음을 추스른다.
시간이 흘러 원자가 세자로 봉해진다. 이제 글공부를 시작한 세자의 명목상 어머니는 중전이기에 덕임은 세자와 만날 때마다 "나를 어머니라 부르지 말라"고 거듭 신신당부해야 했다.[6] 그러다 세자가 유모에게 옮은 홍역을 앓게 된다. 당시 덕임은 셋째를 회임 중이었던 데다가 어렸을 적에 홍역을 앓은 적도 없었기에 왕은 행여 덕임에게도 홍역이 전염될까봐 애끓어하는 덕임이 세자를 만나는 걸 철저히 막았다. 그래서 덕임은 아들의 회복을 기원하는 기도를 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어의는 물론 왕까지 처방에 나선 덕분에 세자의 증세는 잠시 호전되는 듯 했으나 갑자기 악화되기 시작했다. 세자의 임종을 앞두고 대비, 효강혜빈, 중전이 찾아오고 마지막으로 왕이 세자를 만나는데 이때 세자는 "어머니만 없다"는 얘기를 하고 결국 숨을 거둔다.
또다시 자식을 잃었는데도 후궁이란 이유로 자신의 슬픔을 감추고 왕, 중전 등 윗전들의 슬픔을 달래야 했던 덕임은 셋째를 위해 억지로 살려고 한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에 의문을 가지고 경희에게 만약 자신이 잘못되면 자신 대신 조사를 계속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몇 달 뒤에 세자와 똑같은 증세를 보이며 앓기 시작한다.[7] 왕이 덕임의 임종을 지켰는데 죽음을 앞두고 왕이 아닌 친구들인 경희, 복연을 찾았던 덕임은 왕이 곁에 있는데도 친구들을 만나야 했다면서 안타까워한다. 그리고 슬퍼하는 왕에게 자신 없이도 잘 사실 거라고 다소 냉담한 말을 하고 눈을 감는다.
왕은 몹시 슬퍼하지만[8] 이후 왕실은 후사가 급하다는 이유로 즉시 새 후궁(가순궁)을 간택한다. 3년 뒤 가순궁이 또다른 원자를 낳아 후사를 잇자, 덕임은 애초부터 없었던 사람처럼 잊힌다. 하지만 왕은 새로운 세자가 돌아가신 형님에 대해 묻자 일찍 죽은 큰아들이 살아 있으면 지금쯤 어땠을지 남몰래 생각하며 그리워 했고, 말년에 병을 앓을 때 덕임의 친구인 경희를 만나면서 자신이 그녀를 잊은 척은 할 수 있어도 결코 잊을 수는 없었음을 깨닫는다. 마침내 병사해서 먼저 떠나 있었던 덕임과 아들을 만나는데 돌아가 보라는 덕임의 권유에도 불구하고 덕임의 곁에 남는다.

3. 등장인물



3.1. 주인공


  • 성덕임[9](의빈 성씨)
가난한 중인 집안의 고명딸. 어머니가 죽기 전 "절대 궁녀가 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나 집이 가난해 약조를 어기고 입궁하고 필사 일을 하면서 번 돈으로 오라비들 무과 급제를 뒷바라지 한다.
본작의 제목인 '옷소매 붉은 끝동'은 궁녀를 상징하는 동시에[10], 누군가의 아내나 딸로 정의되기 보단 자유로운 궁녀의 삶을 스스로 선택한 덕임을 상징한다.
작중에서 직접적으로 정체는 안 밝혀진다. 사전정보 없이 읽다 보면 이거 정조 아닌가 싶은 느낌이 드는데 그 느낌이 맞다.
좋은 임금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사랑이 쉽지 않은 딜레마를 안고 있다. 주로 정조 하면 떠오르는 자상한 개혁군주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다. 실제 정조의 다혈질적이고 꼰대스러운 성격이 상당히 고증이 잘 되었다. 정치가답게 현실적이고 계산적인 면모도 보인다. 때문에 덕임에게 자주 까인다.
비정상적인 가족과 왕실에 갇혀 자라 감정 표현에 서툴고 세상 물정도 잘 모른다.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츤데레라 아닌 척 하면서도 덕임을 걱정하고 신경쓴다. 제 딴에는 잘 해주려고 노력도 한다. 철두철미한 성리학자로서의 한계를 넘을 만큼 덕임을 사랑한 점은 충분히 묘사된다. 그러나 본문에도 나오듯이 신분상 덕임을 사랑하는 한 남자이기보다는 왕이어야 했기에 마음껏 애정을 표시할 수 없는 측면도 있었다.
최근에서야 의빈 성씨 관련 사료가 많이 국역되면서 정조가 '로맨티스트'로 재조명 받고 있는데. 지고지순한 사랑은 본인이 인증도 했지만, 정사에 기록된 정조의 행동은 '세기의 사랑'에만 초점을 맞춰서는 설명될 수 없는 부분이 많다.
"왕의 자식을 낳지 않은 궁녀는 절대 후궁에 봉하지 말라"고 일찍이 수교를 내린 점, 같은 후궁이라도 출신에 따라 차이를 둔 점, 의빈성씨가 아들을 낳자마자 친정오라비 성식을 파직시킨 점, 문효세자 사후 만삭이던 의빈 성씨를 두고도 '지체가 낮은 호산청을 일찍 설치하는 건 전례에도 없는 일'이라며 단칼에 자른 점 등등.[11] 의빈 성씨 사후 책봉한 수빈 박씨와 그 친정에 취했던 태도와도 대비되는 점이 많다.[12] 정조의 이러한 엄격한 면은 화빈 윤씨의 친정과 관련된 유교 질서와 어긋나는 형사 사건에 대해 엄히 처리하라고 형조에 전교를 내린 발언에서도 잘 드러난다.#
사실 정조의 가장 애매한 태도는 후계와 관련이 있다. 화빈 윤씨에겐 애초부터 중전을 위해 세우는 산실청을 설치해줬다. 문효세자가 탄생한 날에도 "앞으로 '종실'이 번창하고 경사가 이어지리라는 기대"라고 말했다. 신하들의 즉각적인 원자책봉 주청도 물리치다가 몇 달 후 서명선과 언쟁 끝에 윤허한다. 이는 궁인 성씨에게서 얻은 장남은 '종친'으로 생각하며, 당시 공식적으로 임신 상태였던 화빈 윤씨의 자식을 원자로서 기다리고 있었다는 일부의 주장에 설득력을 실어주기도 한다.[13][14] 정조 본인은 "내가 만년이 되어서야 이러한 경사를 보았으니, 보호하여 기르는 일에 있어서 복을 아끼려는 마음을 매양 간직하고 있었다."는 이유를 들었다.[15] 하지만 작중에도 서술된 것처럼 문효세자 탄생 후에도 여전히 화빈의 산실청은 유지된 점, 이에 대해 산실청을 몇 년 동안 세워두는 것은 잘못이라는 상소에 격분하여 대사간을 파직시킨 점, 이후 수빈의 소생인 순조는 탄생 당일 원자로 삼은 점 등을 미루어 볼 때 개운한 변론은 아니다.
적어도 이 책은 이렇듯 이해하기 어려운 정조의 행적을 모른 척 덮거나 '창작물'이라는 이름으로 왜곡하지 않았다. 오히려 인간으로서의 정조와 그의 치세 전반부를 아울러 합리적인 해석을 찾으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현대적인 시각에서 보면 지나치다 싶은 묘사도 있지만, 단지 작중의 로맨스가 성에 차지 않는다고 해서 작품의 이런 면까지 폄하하는 건 다분히 지나친 감상이 아닐 수 없다.

3.2. 왕실 인물


왕과 덕임의 아들. 어린나이에 왕실어른들에겐 어엿하지만 사친인 덕임에게만은 응석쟁이로 변한다.
어머니라고 부르지말라는 덕임의 말에 울상을 짓기도 하고 문효세자에게 뱃속의 아이가 남동생이라하자 덕임은 여아를 좋아하니 남동생이 아닌 여동생을 바란다고 말하는 등 덕임을 굉장히 생각하고 잘 따른다.
마지막 순간까지 어머니 덕임을 찾지만 끝내 보지못한채 홍역으로 사망한다.[16]
왕이 덕임 사후 가순궁에게서 얻은 아들.
일궁자가. 왕의 친여동생. 덕임에게 《곽장양문록》 필사를 의뢰한다.
이궁자가. 왕의 친여동생. 기생집을 들락거리는 남편 때문에 마음고생한다.
초반부 궐에서 길을 잃은 덕임을 만나 다정하게 대해준다.
  • 의열궁 영빈 이씨[17]
초반에 시신인 상태로 등장하고 그 후에는 간접적으로 자주 등장한다. 작품의 시작 부분에서 영조의 대사로 앞으로 덕임의 생을 암시하는 중요한 복선 역할을 한다.[18]
기존의 이미지와 다소 다르다. 위엄 있는 여장부로 묘사된다. 속을 알 수 없고 야심도 있지만 정조와 사이가 좋은 편이다. 덕임의 조력자 포지션이기도 하다. 다만, 덕임과의 관계에는 애매한 부분이 많다. 단순한 고부 관계는 아니라는 암시가 짙다.
  • 효강혜빈[19] (혜경궁 홍씨)
자궁. 기억력이 비상하고 정이 많은 대신 정이 얕은 편이라고 묘사된다.
경수궁과 그의 본방나인들로 인해 위기에 처할 당시 덕임이 증인으로 지목한 서 상궁이 너무 옛 일(의열궁이 사망하던 해)이라 기억을 못해 곤경에 처해 있을때 효강혜빈이 덕임의 진술을 듣고 예전 선왕에게 덕임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증언하여 덕임이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숙창궁이 입궐했을 땐 같은 가문의 출신이라고 잘해줬다가 후에 경수궁이 입궐하여 임신하였을 때는 숙창궁과 덕로 남매를 욕하는 모습을 보였다. 덕임이 승은을 입고 경수궁이 해산하지 못한 채 회임이 길어지자 무언가 잘못되었다 눈치채고 재빠르게 문효세자를 출산한 덕임을 잘해주게 된다. 그러나 덕임이 둘째로 낳은 옹주를 두 달만에 잃고 실의에 잠기자 원래 아기는 약해서 잃기 쉬우니 또 가지면 된다고, 슬퍼하는 윗전들을 보필하라는 냉담한 반응을 보인다.[20][21]
문효세자가 죽고 셋째를 임신한 덕임이 만삭일 때 원인 모를 병으로 몸져 누워 사경을 헤매고 급기야 하혈까지 하자 달은 찼으니 용종이라도 보존해야 하지 않겠냐며 해산 유도를 하자는 의견을 내지만 정순왕후, 정조 모두 반대하여 현실에 옮기지는 못했다.[22]
여담으로, 1662년 혜경궁은 친정 청지기의 딸인 성덕임을 입궁시켜 직접 기르고 자신의 몸종과 유모를 성덕임이 출산할때 보냈다.
맥아리가 없고 의기소침한 성격이나 숙창궁에게 대놓고 야박하게 구는 등 의외의 면모도 있다. 반가 출신 후궁보단 차라리 궁녀 출신인 덕임이 낫다고 여긴다. 얼굴에 얽은 자국이 있다고 외양 묘사를 하는데 어린 시절 입궁했을 때 천연두를 앓은 것은 실제 사실이다. 작중에 천연두를 앓았을 때 그 화기가 자궁에까지 미쳐 불임이 됐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13세의 어린 소녀. 오라비와 중전 사이에서 시름하다 병으로 요절한다.
생전에 중전과 숙창궁에게 안부를 전하러오는 덕임에게 마음을 주어 유일하게 속내를 털어놓는다.
숙창궁 사후 간택한 후궁. 늘 숨죽이며 조마조마하게 살았던 숙창궁과는 다르게 제멋대로인 성격이다.
본방나인들을 더 감싸고 돌아 기존궁녀들과의 갈등을 유발시키게 만들기도 한다.
왕이 덕임을 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은 점과 본방나인들의 입방아로 덕임을 궁지에 내몰지만 오히려 역공을 맞게된다.
게다가 상상임신인 것과 방중술을 썼다는 사실을 들키는 바람에 입지가 좁아져 그 이후론 조용히 지내고 있다.
덕임 사후 간택한 후궁.
선왕의 총애를 받았으나 선왕 사후 쫓겨나며 '반가의 딸로 태어났어야 했다'며 악다구니를 쓴다.
  • 광은부위 김기성
청연군주의 남편. 목석 같은 성격이라 청연군주가 대하기 힘들어 한다. 덕임의 충고를 받은 정조가 타이르자 부부관계가 좋아진다.
  • 흥은부위 정재화
청선군주의 남편. 기방이 출입이 잦아 청선군주의 속을 썩였으나 나이가 들고 정신을 차렸는지 이후 사이가 원만해져서 아들도 가졌다.

3.3. 궁녀들


  • 손영희
여리고 순한 성격의 동궁(정조) 세수간 궁녀로 경희와 오촌지간이지만 경희는 유복한 상단의 딸인데 비해 영희는 한낱 가난한 평민 집안이라 한다. 영조가 사망한 후 언문 소설 등을 태울 때 군주자가 및 친구들과 함께 필사한《곽장양문록》을 발견하고 덕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책들을 지킨다. 결국 덕로의 도움으로 책들을 경희네 사가로 빼돌리는데 성공한다. 존재감이 없어 쟤 이름이 뭐였더라, 영순이? 영숙이? 라는 말을 많이 듣고 본인도 이를 인지하고있다. 후반부엔 덕임이 승은을 입기 전부터 몰래 만나온 별감과 사통하다 유산한 사실을 들켜 사형을 당한다. 영희 때문에 혹독한 취조를 받아야 했던 경희와 복연은 당시 둘째를 임신 중이던 덕임에게 영희의 죽음에 대해 함구하려 했으나 이를 수상하게 여긴 덕임이 결국 사실을 알게 됐고 절친한 친구를 잃은 충격에 덕임은 급기야 혼절하기에 이른다. 혼절한 와중에도 덕임은 이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미리 방지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에 힘들어했고 그런 덕임에게 영희가 환상으로 나타나 정을 나눈 남자는 그래도 자신의 이름을 기억해 주었다며 하소연을 한다.
  • 배경희
절세미인에 야심찬 빈궁전(효의왕후) 침방 궁녀. 덕임의 친구들 중 가장 의리있고 행동력 있는 능력자. 정조와 성격적으로 닮았다는 서술이 자주 등장하는데, 작품 말미에서는 결정적인 부분에서 극명한 차이를 드러낸다. 덕임이 소중하게 생각한 절친한 친구였고 그래서 덕임이 임종 직전에 복연과 함께 경희를 찾았으나 덕임을 모시던 궁녀가 좋지 못한 예감이 들어 정조를 대신 불러오는 바람에 결국 덕임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
정조 말년엔 다른 노상궁들보다 젊지만 능력이 좋아 제조상궁이 되어 덕임의 흔적을 찾는 정조에게 《곽장양문록》을 건네주는데 그 과정에서 정조는 경희가 덕임이 임종 당시에 찾던 친구임을 알게 된다. 그리하여 정조와 함께 덕임을 회상하는 시간을 잠시 갖는다. 비록 경희는 궁녀로서 성공한 인생을 살았으나 친하게 지낸 영희, 덕임, 복연이 차례로 숨져 혼자 남았고, 이 때문에 덕임을 여전히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정조는 경희에게 '너 역시 혼자 남았구나.'라면서 은연 중에 쓸쓸한 심경을 내비친다.
  • 김복연
눈치가 없고 몸가짐이 서툴러 실수를 많이하지만 먹성좋고 덩치 큰 대전(영조) 세답방 궁녀. 영조가 죽자 사가로 출궁하여 집안일을 돕다 말년엔 늙은 궁녀들이 모여 사는 곳에서 여생을 보낼 예정이었으나 덕임이 정조와의 내기로 다시 궐로 돌아와 정조의 세답방 궁녀가 되었다.
훗날 제조상궁이 된 경희의 말에 의하면 정조 말년에 병사하였다고 한다.
  • 서옥금 상궁
덕임이 성인식을 치를 때까지 한방에서 지내며 훈육하는 스승이자 동궁(정조) 시녀상궁. 친정 엄마에 가까운 포지션.
  • 강월혜
동궁(정조) 지밀나인. 덕임의 선배 궁녀이자 고향언니이기도 하다. 후에 정유역변에 연루된다. 붙잡혀 고문 당할 때 정유역변 당시 덕임과 함께 순찰을 하고 같은 방을 쓴다는 이유로 공범의심을 살 수 있는 덕임을 무조건적으로 감싸주었다. 실존인물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에서는 강월혜라는 나인이 반정에 가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구 상궁
본래 선왕(영조)을 모시던 궁녀였다가 경수궁의 지밀상궁이 되었다. 당시 경수궁 처소의 궁녀들 중 자신과 덕임 외에는 제대로 된 녀석들이 없다며 불평을 한다. 실제로 구 상궁과 덕임을 제외한 모든 궁녀들이 화빈이 친정에서 데려온 이들이라 기강이 해이한 상태였기 때문에 덕임에게 대놓고 우리만 죽어나게 생겼다고 투덜거릴 정도였다.
경수궁이 자신과 덕임을 천대하고 본방나인들을 감싸는 것이 늘 불만이었고 가만히 당하기만하는 덕임에게 답답해하기도 한다.
후에 덕임이 궁지에 몰릴 때 옆에서 거들어주고 경수궁의 위태가 밝혀진 후 총대를 매고 방중술을 쓴 사실을 모두 고해 바친다. 덕임이 정조의 승은을 입어 경수궁을 떠난 뒤에도 경수궁을 보필했으나 경수궁이 또 위태를 꾸미다 들통이 나는 바람에 책임을 지고 출궁하게 되었다.

3.4. 덕임의 가족들


  • 성윤우
덕임의 아버지로 무과에 급제한 후 한직을 떠돌다 익위사로 배정된 후 가선대부까지 제수받고 마지막 관직이 첨철제사(종3품 무관직)이었다. 경모궁의 측근으로 경모궁이 승하할 때까지 곁을 지켰다고 한다. 덕임이 입궁한 임오년에 사망한 것으로 추정. 떡밥스럽게도 덕임은 부친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 한다.[23]
  • 임씨
덕임의 어머니. 노산에 난산으로 해산방에서 죽었다. 그래서 덕임이 출산에 대해 두려워하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듯하다. 덕임에게 "궁녀만은 되지 말고, 자신을 위한 삶을 살되 가늘고 길게 살라"고 말하나, 결국 덕임은 궁녀가 되고 승은을 입어 당시 기준으로는 늦은 나이에 출산한다.[24]
  • 성완
덕임의 첫째 오라비로 설정상 가상인물.[25] 수줍음을 많이 탄다.
  • 성식
덕임의 둘째 오라비로 정확한 실존인물이라 그런지 가족 중에서 가장 비중이 크다. 간신히 과거에 급제하여 무관이 되지만 덕임이 승은을 입으면서 무관직에서 쫓겨나게 된다.
과거에 급제해 무관이 되었을 때 궐에서 덕임과 자주 만났는데 남매인데도 불구하고 외모가 닮지 않았는지 이를 본 왕은 질투를 하고 경수궁의 본방나인들은 덕임이 외간남자와 만난다 생각하여 모함을 꾸미게 된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
참고로 덕임이 승은을 입자 그게 좋은 거냐면서 덕임에게 진지하게 전하가 총애해 주시냐고 묻는 장면이 나온다. 덕임은 이에 오라버니를 참 잘 두었다고 생각한다.[26][27]
  • 성흡
덕임의 막냇동생으로 설정상 가상인물.[28] 몸이 약하다. 덕임과 많이 닮아 왕이 좀 마음에 들어한다.
  • 요절한 두 언니
덕임이 태어나기 전 사망한 언니들로 둘 다 어린나이에 시집을 가 출산을 하다 사망했다.[29]

3.5. 은언군 주변


왕의 서제.
은언군의 장남.
  • 연애
은언군의 궁비로 과거엔 의열궁을 모신 궁인이였다. 현록대부의 궁녀로 쫓겨난 덕임에게 살갑게 대하며 잘해주고 덕임이 의열궁과 비슷한 면이 있다고 자주 말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지만 《정조실록》에 등장하는 실존인물. 정순왕후의 하교 때문에 은언군이 독살 의혹을 받았을 때 고초를 겪다 사망했다고 한다.

3.6. 그 외 인물[30]


서브 남주인 듯 아닌 듯하다. 겉은 밝고 장난스럽지만 속은 위험한 남자. 덕임과 주거니받거니 잘 놀다가도 그녀의 위선에 대해 일침을 날리기도 한다. 키는 좀 작지만 얼굴이 예쁘장하게 잘 생겨서 인기가 많다. 덕임 때문에 왕의 질투를 사기도 한다.
실제 홍국영 관련 야사와 《한중록》 기록 등을 많이 참고하여 캐릭터를 구상한 것으로 보인다.
  • 계중 서명선
  • 사초 구선복
  • 정여 홍인한
  • 사원 김조순
  • 덕보 홍대용
  • 금성위 회보 박명원
  • 내관 이윤묵
  • 김우진
  • 강용휘
  • 신응현
  • 김홍도[31]

4. 특징


작가가 17살 때부터 8년 동안 조사하여 쓴 소설이라고 한다.
작중에 나오는 왕이 정조라고 명시되어 있지 않고 후궁들도 잘 알려진 빈호 대신 궁호로 나오며 홍국영은 이름 대신 덕로라는 자로 나온다. 그러나 작중 내용으로 누군지 알 수 있다. 작가는 워낙 유명하고 이런저런 해석이 많은 시대라 일부러 낯설게 접하게끔 유도하려 했다고 설명했다.

5. 작품 속에 등장하는 역사적 사건


  • 기축별감사건 (1769년)
  • 정유역변 (1777년)

6. 고증


시간선이 대단히 촘촘하고 세세하게 짜였다. 특히 덕임이 승은을 입은 3부 파트부터는 전개를 위한 사이사이의 에피소드를 제외하면, 역사를 거의 옮겨다 놨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
동일한 실존인물을 모티브로 삼은 타 작품들과 달리 의빈 성씨궁녀로 나오고 본명인 덕임으로 등장하는 등 역사적 사실에 충실하였다. 다만 작가는 2015년에 집필을 완료했는데, 2017년 출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 번역되어 공개된 사료를 접했다고 한다. 그로 인해 결과적으로 역사적 사실과 다른 부분이 생겨 아쉽다고 밝히고 있다.
2010년대 초중반까진 《일성록》 등의 번역 및 전산화 공개가 상대적으로 미진했으며, 《이재난고》나 《어제의빈묘지명》 등 의빈 성씨에 대한 각종 사료가 지금처럼 대중적으로 정리되지도 않았던 점을 고려해보면[32] 작가가 상당히 공들여 조사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집필 완료 후에 새로 국역된 사료를 메인 스토리에 반영시키지 못했음을 추가하여 설명하는 작가후기에서는 아쉬움이 느껴진다.

6.1. 깨알 같은 고증


인물들의 대사, 그냥 지나가는 서술 한 줄마다 소소한 고증이 상상 이상으로 산재해 있다. 특히 《일성록》 을 거의 옮겨놓다시피 했다 싶은 부분이 많다.
  • 덕임의 친구로 등장하는 영희, 경희, 복연은 의빈 성씨와 《곽장양문록》 필사를 함께한 실존 인물이다.
  • 실제 정조는 "아낄수록 더 엄하게 대한다"는 요지의 말을 한 적이 있는데, 이는 작품 전반에 녹아있다.
  • 실제 정조는 8세~9세가 되면서부터 내시들과 대화하는 일도 별로 없었다고 한다. 정조가 승하했을 때에도 곁에 있던 이들은 대신과 각신·승지·사관들일 뿐 내시나 궁녀들은 한 사람도 가까이에 없었다고 한다.[33]
  • 왕이 여자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내는 동궁에서의 시강 장면은 홍대용의 《계방일기》 기록을 각색한 것이다.
  • 덕임과 정조의 첫 만남 계기가 되는 동궁전 익명서 투서 사건은 1775년에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다.[34]
  • 내시가 뭘 떨어뜨리면 왕이 "다친 사람이 없느냐"고 묻는다는 언급이 나오는데, 《일득록》을 참고해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 정조가 가장 좋아하는 책으로 《대학연의보》를 꼽는데 이는 《홍재전서》에서도 언급이 된다.
  • 정조가 직접 덕임의 빈호를 지은 것은 《일성록》에 기록된 실제 사실을 각색한 것이다.
  • 정조가 덕임의 오라비 성식을 불러 외척을 경계한다며 훈계하는 장면은 《일성록》의 기록을 각색한 것이다.
  • 덕임이 임신했을 때 혜경궁이 "본방나인 복례와 나의 유모를 시켜 돌봐주겠다"고 하는데, 이들은 《한중록》에 언급된 실존인물들이다.[35]
  • 덕임이 머루술을 올릴 때 입을 속이는 법을 말하는데, 이는 정약용의 《여유당전서》를 참고해 쓴 장면으로 보인다.
  • 정조가 덕임에게 파초 그림을 그려주는 장면이 나오는데 실제로 정조가 그린 파초도가 전해진다.
  • 정조가 허난설헌을 높이 평가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와 관련되어 홍대용의 일화도 스쳐 지나간다.
  • 작중 중요 소재로 등장하는 《여범》은 묘사된 대로 실제 영빈 이씨가 쓴 책이다.
  • 문효세자와 계마수에 대한 에피소드가 나온다.
  • 보초가 졸아 밤중에 궁궐에 불이 났는데 문효세자가 크게 울어 화재를 알렸다는 일화는 박지원의 《문효세자진향문》에 나온다.
  • 후반부에 정조가 세자(순조)에게 자신이 같이 못 가게 되면 혼자서라도 문효세자의 묘에 다녀오라고 한다. 순조 7년, 효창묘와 의빈묘에 순조가 친히 작헌례를 행한 기록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
  • 문효세자가 중국 황제로부터 선물 받은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장면이 등장한다.

6.2. 역사와 다른 부분


앞서 언급된 것처럼 작가가 집필을 완료한 이후 새로 국역된 사료는 메인 스토리에 반영되지 못하고 대신 후기에 추가 설명되었다. 비교적 사실성이 높은 책이지만 일단 로맨스 장르소설이고, 전개상 타협이 불가피한 픽션이므로 스스로 판단할 것을 권한다.
  • 가족관계 및 전반적인 생애의 비교는 상세하게 정리된 의빈 성씨정조 등 인물별 항목 참조.
  • 《곽장양문록》의 필사 시기는 1773년 봄이었지만, 작중에서는 1775년 필사한 것으로 나온다.[36]
  • 청선공주의 남편은 흥은부위이지만, 작중에서는 홍은부위로 나온다.[37]
  • 작중에서는 정조의 침소인 영춘헌수빈 박씨가 사용했던 집복헌이 붙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 정조가 살아있을 당시 영춘헌은 집복헌의 동남쪽에 있었으며 별개의 영역이었고. 정조는 침전 건물인 영춘헌에 거처하며 영춘헌을 서재로 사용하였다. 그런데 정조 사후 순조 대인 1830년(순조 30년)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다시 복구할때 영춘헌과 집복헌이 이어져 연결하여 건립되었다.# # ......근데 작중 문장은 건축학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묘사라기보다는 단순히 영춘헌과 집복헌은 가까이 있었다는 표현으로 보여서 고증오류라고 단정 짓기는 애매하다당시 동궐도 링크참조

6.3. 기타


  • 작중에서 후궁화빈 윤씨의빈 성씨의 생일상 관련 에피소드가 있다. 실제 정조의 여러 후궁들의 생일상 잔치에 관련된 역사적 기록은 없다는데 작중 묘사된 것처럼 정조는 스스로 성리학적 미덕을 앞세워 웃전의 생신은 성대하게 챙긴 반면 자신의 생일상 받기를 꺼려했던 것은 사실이다. 이러한 그의 실제 성향에 착안한 창작이라 납득되는 면이 있다.
  • 문효세자의 죽음 뒤 의빈 성씨가 장례식에 참여하지 못했다는 에피소드는 양전과 효의왕후의 왕세자 상례 복색 및 절차는 정사에서 전하는 반면 의빈성씨는 기록되지 않은 것을 각색한 것으로 보인다.[38]
  • 작중의 터진 만두소에 관련 에피소드와는 달리, 실제 의빈 성씨는 음식을 잘 만들었다고 《어제의빈묘지명》에 정조가 기록하였다. 다만 작중에서도 덕임이 음식 솜씨가 꽤 좋다는 묘사는 여러 번 되어 있다. 만두소 에피소드는 전형적인 사대부가의 현숙한 여성인 수빈 박씨에 대비되는 자유분방한 매력의 덕임을 애틋하게 환기시키는 소재에 가깝다.

7. 드라마화


옷소매 붉은 끝동(드라마)

[1] 전원 실존인물. 작품 내내 본명 대신 자(字)로 등장하거나, 정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안 나온다.[2] 실제로 같은 소재(정조의빈 성씨의 사랑)를 다룬 드라마 《이산》에서는 정조가 그림 솜씨가 뛰어난 송연(의빈 성씨)에게 "여자라서 안 되고, 신분이 낮아서 안 되는 낡은 관습은 내가 바꿔줄 것이니 화원의 꿈을 펼치라"는 말을 한다. 이는 신분 의식이 확고했던 정조의 모습과는 거리가 먼 각색이다.[3] 출간은 2017년 4월[4] ebook에는 작가후기가 실려있지 않다.[5] 부담감 때문에 원자를 가졌을 때에도 대놓고 태아가 아들이기를 바란 왕과는 달리 딸이기를 원했다.[6] 기본적으로 후궁 소생 왕자녀들은 생모보다 신분이 높았다. 본문에서도 왕의 자손은 있어도 후궁의 자손은 없다는 표현이 나오며, 심지어 예전에 효종후궁안빈 이씨가 공식석상에서 자기 소생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했다가 난리가 났다는 비화가 소개되기도 했다.[7] 덕임이 원래 건강한 체질이긴 했으나 겨우 5년 동안 무려 3차례나 임신한 데다가 태어난 아이들이 모두 요절하면서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건강이 많이 상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셋째를 가졌을 때에도 전에 없이 몸이 무겁다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8] 덕임과 셋째 아이의 죽음 그 자체에도 슬퍼했고, 덕임이 자신을 한 남자로 사랑해 주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 것 때문에도 슬퍼했다. 다만 결국은 덕임 또한 왕을 사랑했음을 그동안의 암시와 마지막 대화로 짐작할 수 있다.[9] 의빈 성씨의 본명[10] 궁녀들은 옷소매 끝을 붉게 물들여 입어 홍수(紅袖)라고 불렸다.[11] 정조나 황윤석의 주관적인 사료들보다 객관적으로 서술된 정사에 존재하는 기록들이다.[12] 수빈 박씨의 친정은 정조로부터 대접을 잘 받았고, 이후 순조 때 일어난 홍경래의 난에서 국정농단의 주범으로 지목 당할 정도의 권세가로 성장한다.[13] 이산 방영 당시 모 카뮤니티에서 제기된 의견이기도 하다.[14] 이산 방영 당시 메인커플의 러브라인 전개에 대해 혹평이 많았고, 반대급부로 화빈 윤씨수빈 박씨에 대한 해석도 많이 나왔었다.[15] 본작은 이 발언에 근거한 해석을 내세우는 편.[16] 덕임이 임신한 상태에다 홍역을 앓았던적이 없었기에 정조가 둘을 못 만나게 했다.[17] 후에 선희궁으로 궁호를 새로 올리지만 작중 시점에서는 의열궁이 맞다.[18] 후에 정조의 회상으로 한 번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는 한다.[19] 효강은 정조가 내린 존호. 혜빈은 정조 즉위 전 쓰이던 칭호. 작중에서는 즉위 후에도 혜경궁이 아닌 '효강혜빈 저하'로 불린다. 정조 대의 유명한 인물이라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으려 의도한 것으로 짐작된다.[20] 이 장면은 혜경궁의 실제 일화를 반영해 묘사한 것으로 보이는데《혜경궁 지문》에 따르면 혜경궁의 첫 아들, 의소세손이 어린 나이에 죽자 삼전(인원왕후, 영조, 정성왕후)이 매우 슬퍼하였고 혜경궁은 윗전들이 더욱 슬퍼할까 염려하여 윗전들을 뵐 때 슬픔을 감추고 얼굴빛과 말씀을 평상시처럼 했다고 한다.[21] 하지만《일성록》에 의하면 혜경궁은 옹주의 죽음을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22] 정순왕후는 '어미를 죽이며 자식을 얻는 건 도리에 어긋난다.'고 반대했는데 설령 혜경궁의 뜻대로 유도 분만을 했더라도 작중 묘사된 정황을 감안하면 아이가 사산됐을 가능성이 크다. 덕임이 하혈할 때 태동이 있었는데 여느 때와 같은 태동이 아니라 아이가 괴로워서 몸부림치는 듯한 태동이었다고 했기 때문.[23] 작가는 《승정원일기》를 조사해 유원 첨절제사를 지낸 무관 성윤우를 덕임의 부친으로 판단했다고 밝혔다. 《승정원일기》의 무관 성윤우와 《이재난고》의 청지기 성윤우는 동일인물이다. 《창녕성씨상곡공파보》, 《어제의빈묘지명》, 《무보》를 토대로 성윤우의 부친은 성수산, 조부는 성근립, 증조부는 성경. 아들은 성담, 성완, 성흡이라는 부분이 일치한다.[24] 의빈 성씨의 어머니 부안 임씨는 1722년에 태어나 1756년 6월 8일에 사망했다.[25] 실제 의빈 성씨의 둘째 오빠이다. 성식에서 성완으로 개명했고 1743년에 태어나 1806년 7월 10일에 사망했다.[26] 당시 여느 남자라면 누이가 왕의 총애를 입었으니 자신도 그 덕을 볼 수 있으리라 생각하며 좋아했을 것이다. 그러나 성식은 도리어 왕의 쾌락 때문에 소중한 여동생이 농락당한 건 아닌가 걱정했던 것. 얼마나 여동생을 소중히 여겼는지 알 수 있다.[27] 실제 성식과 성완은 동일인물이다. 성식이 성완으로 개명했다.[28] 실제 의빈 성씨의 막냇동생이다.[29] 의빈 성씨의 큰 언니는 승평 강씨의 덕순, 둘째 언니는 파평 윤씨의 귀영과 결혼했다.[30] 전원 실존인물. 작품 내내 본명 대신 자(字)로 등장하거나, 정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안 나온다.[31] 어진화사 장면의 대사로 추정.[32] 2016년 이전에는 잘못된 정보가 넘쳤고 위키피디아 등의 의빈 성씨 항목도 불모지에 가까웠다.[33] # # [34] 홍인한이 연루되었을 것으로 추정하는 시각이 있다.[35] 혜경궁 홍씨의 친정 어머니가 혜경궁이 출산할 때마다 옆에서 도와주었다는 대사도 실제 역사와 일치한다(...)[36] 1773년의 영조어용화사와 곽장양문록 필사를 1775년의 익명서 투척 사건과 계방일기 성학집요편으로 연결시켜 동궁과의 시작되는 인연을 극적으로 연출하기 위해 시간선을 조정한 것으로 짐작된다. 책 말미의 곽장양문록 챕터에서는 영조49년(1773년)이라고 명시했다.[37] 이상하게도 각종 서적에서 보이는 부분. 심지어 일성록과 실록에서도 이와 같은 표기가 보인다.[38] 명분론이 극에 달한 조선후기에 적법한 적모가 있는 상황에서 입장이 붕 뜬 첩실의 처지에 대해 주목하는 것은 작품의 주제의식과도 연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