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민주당(일본)/파벌

 


1. 개요
2. 파벌 목록
3. 역대 자민당 총재의 파벌


1. 개요


[특파원리포트]“주1회 일치단결 도시락” 아베 떠받치는 자민당 파벌 정치
자유민주당의 파벌
자민당의 파벌은 역사도 대단히 길고,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크게는 보수본류보수방류, 기타로 나뉘는데, 간단히 정리하면 보수본류(비둘기파)는 '''평화 헌법 유지 · 미일 안보 하에서 경제 우선 · 대미협조외교''' 노선을 따르는데 반해 보수방류(매파)는 '''헌법 개정 · 재군비 · 자주 외교'''를 기조로 삼고 있다. 보수 본류는 요시다 시게루로 부터 시작되어 이케다 하야토, 사토 에이사쿠로 이어지면서 80년대 후반까지 일본 경제 발전을 이끈 주류 세력이었다. '본류'라는 이름이 붙은 것 또한 자유민주당을 이끌어 나가는 세력이 이 쪽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초기 자유민주당에는 본류와 방류의 대립 이외에도 관료파, 당인파의 대립 등 다양한 대립이 존재하였으며, 70년대부터는 각 유력 정치인들이 자신의 파벌을 바탕으로 세력 대결을 펼친 각복전쟁 시기에 들어서면서 성향과 관계 없이 정치적 이익에 따라 협력과 대립을 반복했기 때문에 '보수본류'라는 이름은 60년대의 정치 구도를 반영한 다소 낡은 이름이다.
한편 오늘날 입헌민주당, 국민민주당 등 민주당계 정당 역시 보수본류의 계승 세력이라고 볼 수 있는데, 본류의 대표 파벌인 '경세회'의 주도권을 다케시타 노보루, 오부치 게이조, 하시모토 류타로 등이 장악하자 하타 쓰토무, 오자와 이치로 등이 반발하며 신생당을 창당한 것이 55년체제의 본격적인 붕괴를 유발하였다.
보수 방류는 기시 노부스케[1]로부터 연원을 찾을 수 있는데, 현대에 들어서는 방류라는 이름이 무색하게 90년대 후반부터 줄곧 주류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 그들이 자유민주당의 주류 세력을 차지함에 따라 야스쿠니 신사 참배, 위안부 문제 등 과거사 문제가 더 빈번해지는 중이다. 전 총리 아베 신조는 대표적인 보수 방류 정치인으로, 보수방류의 뿌리 기시 노부스케의 외손자이다. 아베 총리의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또한 한 때 보수방류의 대표 파벌인 '청화회'의 수장이었다.
그 외에 1950년대 국민협동당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중도파들은 자민당 내에서 거의 진보/혁신계열에 가까운 목소리를 내면서 당의 균형을 잡아주던 제3세력이었다. 각 정치인들이 자신의 파벌을 이끌고 세력 대결을 펼치던 1970년대에는 보수세력이 분열한 가운데 세력 대결에 참여하면서 미키 다케오가 일시적으로 집권하기도 했으나, 끝내 소수파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얼마못가서 다시 밀려났다. 이들은 청렴한 정치[2]를 내세우면서 정치개혁을 계속 주장하였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제3세력이던 중도파는 대부분 야당으로 넘어갔고, 보수본류 계열도 일부는 순차적으로 탈당하고 나머지는 위축되면서 오히려 비주류로 밀려났으며, 대신 강경우파 성향의 보수 방류가 당을 장악하였다. 미키 다케오의 파벌을 계승했던 '번촌정책연구소'는 현재 아소 다로의 파벌인 '위공회'에 통합되어 '지공회'라는 이름으로 새로 출범하였다.
2000년대 들어서는 파벌 정치를 혐오하던 고이즈미의 우정 해산과 정치신인 대거 발탁 그리고 2009년 민주당에게 정권을 뺏겼다가 2012년 다시 찾아오는 과정을 거치면서 기존의 파벌들이 대거 이합집산해서 과거와는 파벌구도가 많이 달라진 상태이다. 자민당의 파벌을 알아야 일본 정치가 보인다.
사실 자민당 내 파벌들의 크기는 수십명 가량으로 적당히 균형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어느 파벌이 빠지면 과반수가 깨지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렇기에 한다 하는 파벌은 죄다 정권에서 지분을 보유할 수 있게 되었다. 아니, 웬만한 파벌은 빠진 적이 없었다. 이러면서 총리는 다른 파벌에서 내보내고 알짜배기(장관)들을 장악하는 일명 '''킹메이커'''도 꽤 많았다.[3] 제왕적 총리를 막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결국 그것도 자민당 안에서의 이야기. 더구나 말이 파벌 안배 내각이지, 제대로 말하면 나눠먹기 내각이란 비판도 있다. 반면 각 파벌들은 크게는 '보수'인 자민당에 몸담고 있지만 세부적으로는 극우보수, 중도보수 등 성향, 대외관이 제각각 다르기 때문에 집권 파벌의 독주를 막는 견제 역할을 잘 하고 있는 편이다. 실제로 일본의 최근 내각 구성원들을 보더라도 총무상에는 아베 총리와 정치적 경쟁 관계에 있는 노다 세이코가 임명되었다.
그렇다고 완전히 2-3개 수준으로 당의 파벌이 대형화되면 일본사회당처럼 좌파사회당, 우파사회당 같은 내분이 강해진다. 일본 자민당은 대체로 5~6개 정도의 파벌이 존재했고,[4] 주요 파벌들 여러개가 연립하는 형식이었기에, 한 파벌이 다수 의석을 점유하고 파벌전쟁을 벌이는 경우는 없었다. 반면에 일본사회당이 망할 때까지 집권에 실패한(...) 것은 바로 이 복수 교섭단체 제도 하에서 “파벌이 딱 두 개”로 갈렸기 때문이다. 당 세력이 둘로 쪼개지니까 내부 다툼에 바빠 자민당 견제를 거의 못했다.
파벌의 가장 큰 문제점은 바로 지역구 세습이다. 한때 자민당 중의원 중 세습 정치인의 수가 무려 '''50%'''를 넘었던 적도 있고, 2018년 현재도 30% 수준이다. 이들은 △명문대를 졸업해 △'정치인 직업 학교'격인 사숙에서 현실 정치를 학습하고 △대기업·정부관청에 잠시 근무한 뒤 △정·재계 명문가 자녀와 결혼해 △아버지의 지역구와 후원회를 물려받아서 편하게 의원에 당선된다. 설령 지역구를 그대로 세습하지 않더라도, 일본에는 대를 이어 정치를 하는 정치인들이 상당히 많다. 이런 세습 정치인들은 ‘오봇짱’, 한국으로 치면 '도련님' 이라 불리며, 서민들이 살아가는 환경은 일절 겪어보지 못해서 격차사회(=양극화), 고령화 등 현실문제에는 둔감하며 헌법개정, 재무장, 역사해석 등 이념투쟁에만 몰두한다는 지적이 많다. 도련님 정치인의 대표적인 예시로 기시 노부스케 전 총리의 외손자이자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의 아들인 아베 신조 전 총리, 후쿠다 다케오 전 총리의 아들인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요시다 시게루 전 총리의 외손자인 아소 다로 전 총리 등이 있다. 이들 세 명은 고이즈미 준이치로 퇴임 이후 연달아 총리를 하였으며, 이들의 집권 이후 민주당으로 정권이 넘어갔다.[5]
총리가 되기 위해서는 파벌 영수 혹은 그 정도 급의 위상은 거의 필수이며,[6] 파벌에 들지 않고 총리가 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라는 말도 있다. 일본의 총리는 의원들의 간선제로 내각에서 결정하는 것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이건 민주당 정권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또 파벌 때문에 총리 개인이 뭔가 정책을 실현하려고 해도 다른 파벌들이 동의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못하 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게 부정적 요인이 될 때도 있지만 반대로 긍정적 요인이 되어 총리를 견제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애초 헌법 개정과 재무장을 주장하는 매파들이 독주할 수 없었던 이유도 사실은 자민당의 파벌 정치가 한 몫 했다는 평.
한편 2012년 자민당의 정권 재탈환 이후에는 기존의 대형 파벌들에 소속되지 않은 이시바 시게루가 반 아베 진영의 대표 주자가 되는 등 파벌과 별개로 유력한 총리 주자로 떠오르는 인물도 있다.[7] 현재로써는 가능성이 희박해졌지만 한 때 유력한 차기 주자로 부상했던 고이즈미 신지로 역시 특정 파벌의 영수는 아니다.
2009년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대패함에 따라 파벌들이 대부분 반토막나고 심지어 일부는 궤멸되면서, 아무 파벌에도 소속되지 않은 무파가 최대 파벌 비스무리하게 되기도 했지만, 2012년 중의원 선거에서 다시 자민당이 승리해 재기에 성공하면서 파벌 정치가 재개된다. 2010년대 중후반 들어 아베 내각이 장기 집권하면서 아베를 비롯한 강경 보수파들이 자민당을 이끌고 있고, 온건 보수파들은 힘을 많이 잃은 상황이다.
2018년 기준 주요 자민당 파벌은 아베 총리가 속한 호소다 파가 94명, 아소 파가 59명, 누카가 파가 55명, 기시다 파가 48명, 니카이 파가 44명으로 5대 파벌을 형성하고 있으며 아베는 이들 모두의 지지를 받고 있다. 다만 성향차는 있기 때문에 아베가 맘대로 좌지우지한다고 볼 순 없고 선거 낙승에 의한 지지가 강하다고 봐야 할 것이다.[8] 그런데 이것도 크게 나눠서 5대 파벌이고 그 밑에 또 의원들끼리 소형 파벌이 있는데 주로 XX 연구회 같은 이름을 대고 비공식 의원 연구단체 형태로 존재한다.
2018년 이후 자민당 내 친 아베 세력과 반 아베 세력 간의 갈등이 커지고 있으며, 특히 총재 선거에서 이시바 시게루와 관련한 문제 때문에 큰 갈등을 빚었던 것이 한 요인이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자민당의 힘은 정계에서 절대적이지만 아베의 당 내 영향력이 약해지자 내각을 철저한 친정체제의 논공행상으로 진행했는데, 그 사람들이 검증되지 않고 무능하거나 막말로 점철된 자들이라 야당들은 물론 자민당 내 다른 계파들조차 저 혼자 다 해먹으려 한다며 불만을 드러냈다.
이런 파벌의 형성은 의원내각제 정치의 특징이기도 하다. 일본이 유독 자민당 체제로 오랜 기간 집권해서 그렇지, 다른 내각제 국가들도 다 파벌이 있고 심지어 일본 내 다른 정당에서도 파벌은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일본의 국회는 교섭단체가 통일교섭단체(단일교섭단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선거 때는 한몸, 국회 안에서는 남남'''이 가능한 복수 교섭단체 제도(1정당 안에서 복수의 교섭단체가 형성)를 채택하고 있기에, 국회의원이 되면 자민당 내에서 재빨리 자기 라인을 찾아서 교섭단체에 등록하는 형태로 출석관리(...)가 되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복수교섭단체(교섭단체 분할)가 불법이고 분당을 해야 하지만[9], 일본에서는 한 당 안에서 남남으로 지내는 길이 열려있다보니 이런 파벌 정치가 가능해진 것이다. 심지어 파벌항쟁으로 중의원 총리 선출 투표에 자민당에서만 두명이 출마하는 엽기적인 상황이 벌어진적도 있다.[10]


2. 파벌 목록



'''명칭'''
'''통칭'''
'''회장'''
'''세력'''
'''중의원'''
'''참의원'''
'''비고'''
청화(세이와)
정책연구회
호소다파
호소다 히로유키
97
62
35
역대 일본 최장기 집권 총리 아베 신조의 파벌인 동시에 자민당 최대 파벌
지공회
아소파
아소 다로
56
43
13
위공회+번촌정책연구소의 통합으로 만들어진 파벌
평성(헤이세이)
연구회
다케시타파
다케시타 와타루
54
33
21
통칭 '경세회', 보수 본류파벌 직계
지사회
니카이파
니카이 도시히로
47
37
10
과거 가메이 시즈카의 파벌
굉지회
기시다파
기시다 후미오
46
33
13
중도보수 온건파로 알려짐
수월회
이시바파

19
17
2
반아베 성향의 신흥 파벌. 이시바 사임 이후 집단관리 체제로 전환
근미래정치연구회
이시하라파
이시하라 노부테루
11
11
0
극우파 이시하라 신타로의 아들
무파벌
-
-
67
48
19
[11]
'''계'''
397
284
113
-

3. 역대 자민당 총재의 파벌


  • 파벌의 명칭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청화정책연구회는 십일회, 팔일회, 청화회라는 이름을 거쳐 현재의 '청화정책연구회'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 이런 경우 아래에 가재하는 각 파벌의 명칭은 현재 통용되는 명칭을 따른다. 청화정책연구회는 '청화회', 헤이세이 연구회는 '경세회'로 표현하며 '지공회', '지사회', '굉지회'는 현재의 명칭을 그대로 사용한다.
'''총재'''
'''총리'''
'''이름'''
'''파벌'''
1
52-54
하토야마 이치로
하토야마파[12]
2
55
이시바시 단잔
이일회(→정책간담회→지공회)[13]
3
56-57
기시 노부스케
청화회[14]
4
58-60
이케다 하야토
굉지회[15]
5
61-63
사토 에이사쿠
경세회
6
64-65
다나카 가쿠에이
경세회
7
66
미키 다케오
정책간담회[16]
8
67
후쿠다 다케오
청화회
9
68-69
오히라 마사요시
굉지회
10
70
스즈키 젠코
굉지회
11
71-73
나카소네 야스히로
지사회
12
74
다케시타 노보루
경세회
13
75
우노 소스케
지사회
14
76-77
가이후 도시키
정책간담회[17]
15
78
미야자와 기이치
굉지회
16
-
고노 요헤이
위공회(창립)[18]
17
82-83
하시모토 류타로
경세회
18
84
오부치 게이조
경세회
19
85-86
모리 요시로
청화회
20
87-89
고이즈미 준이치로
청화회
21
90
아베 신조
청화회
22
91
후쿠다 야스오
청화회
23
92
아소 다로
위공회
24
-
다니가키 사다카즈
굉지회
25
96-98
아베 신조
청화회
26
99
스가 요시히데
무파벌[19]

[1] 참고로 상기된 사토 에이사쿠가 기시 노부스케의 동생이다. 아버지가 데릴사위로 들어가면서 가족의 성이 사토로 바뀌었으나 기시만 성을 유지한 것.[2] 중도파의 리더였던 미키 다케오의 별명이 "청렴한 미키"였다.[3] 대표적인 인물이 70-80년대 자민당의 당내 정치를 이끌었던 다나카 가쿠에이. 다나카는 정치자금 문제로 인해 총리 퇴임 이후 자민당을 탈당하는 불명예를 겪었으나, 다나카파는 여전히 자민당의 핵심 파벌로 활동하며 자민당의 당내 정치를 주도하였다. 다나카는 자신의 총리직 복귀 때까지 다나카파에서 총리가 나오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나카파는 자민당 내에서 킹메이커 노릇을 했다.[4] 크게 보수본류에는 사토 에이사쿠를 뿌리로 하는 '목요회계', 이케다 하야토를 뿌리로 하는 '굉지회계'가 있고, 보수방류에는 기시 노부스케를 뿌리로 하는 '십일회계', 고노 이치로를 뿌리로 하는 '춘추회계', 보수좌파에는 미키 다케오를 뿌리로 하는 '정책간담회계'가 있었다. 이 중 '굉지회계'에서 고노 요헤이가 떨어져 나가면서 만들어진 '위공회계'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으며, 최근 정책간담회계 파벌인 '번촌정책연구소'를 흡수했다.[5] 그러나 막상 민주당 정권의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 역시 자유민주당 창당의 주역이었던 하토야마 이치로 전 총리의 손자이다. 세습정치가 자민당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애초에 민주당계 정당의 뿌리는 자민당 탈당파인 마당이니.[6] 아베 신조는 의외로 자기 파벌의 영수가 아니다. 다만 호소다 파는 그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의 파벌이 그 시초이며, 아버지인 아베 신타로 역시 이 파벌의 영수였기도 했던 만큼 아베 가문의 영향력이 짙게 배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영수인 호소다 히로유키는 사실상 바지사장일 뿐, 아베 신조가 실질적인 파벌의 영수라고 봐도 무방하다.[7] 현재 이시바 시게루는 신흥 파벌을 형성하였다. 대다수 파벌들이 1955년 자민당 창당 때부터 내려오는 오랜 계보를 가지고 있는 것과 달리, 이시바파는 뿌리가 없는 완전한 신흥 파벌이라는 점이 특징이다.[8] 여담으로 저 3파는 2005년 우정 총선에서 고이즈미 준이치로가 우정민영화 문제로 기존 주류였던 시슈회(니카이파)를 절단내버리고(이후 시슈회 일부는 민진당으로 넘어가 민진당 우파 계열이 된다) 사실상 고이즈미가 인원을 재구성한 파벌이기도 했다. 다만 이게 지금도 무슨 대단한 영향을 미친다고 보긴 어려운 것이 애초에 아베 신조도 고이즈미가 직접 지명했던 고이즈미의 직계 후계자였지만 알다시피 2007년 총리에서 한번 나가리되었고, 2010년대 들어 아베가 복귀하긴 했지만 정작 고이즈미는 자민당 밖에서 탈원전을 기치로 반아베 후보를 지원하고 있다.(...) 또 2009년 선거 대패로 애초 계파 자체가 대폭 물갈이되기도 했다. [9] 물론 이 법 때문에 한국이 일본보다 정당 변천이 훨씬 복잡하고 빈번한 문제도 생기고 있다. 일본 자민당은 그래도 55년 체제 이후 당명 변경도 없이 일단 당 자체는 계속 유지되고 파벌만 갈리지만, 한국은 이렇게 국회 내 복수 파벌 형성이 법적으로 금지되어 있다보니 분당 및 합당 사태가 비교도 안 되게 빈번하다. (당명 변경을 포함하면) 정당 평균 수명이 5년이 채 안 된다는 말도 있으니...[10] 1979년에 오히라 마사요시후쿠다 다케오가 동시에 출마한적이 있다. 각복전쟁 항목 3라운드 참조.[11] 스가 요시히데 현 총리는 무파벌이다.[12] 청화회의 뿌리인 기시 노부스케, 지사회의 뿌리인 고노 이치로는 모두 하토야마 이치로 휘하의 정치인이었다.[13] 미키의 파벌인 정책간담회에 흡수되었다가 번촌정책연구소(정책간담회의 이후 명칭)가 위공회와 통합하며 지공회가 되었다.[14] 청화회 계열의 창립자로, 창립 당시 명칭은 십일회였다.[15] 굉지회의 창립자. 굉지회는 이름이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16] 정책간담회를 승계한 번촌정책연구소는 지공회에 흡수되었다.[17] 정책간담회를 승계한 번촌정책연구소는 지공회에 흡수되었다.[18] 번촌정책연구소와 통합하면서 명칭이 지공회로 전환된다.[19] 과거 헤이세이 연구회(경세회), 굉지회에 가입했던 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