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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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基旭
1943년 11월 02일 ~ 2012년 07월 02일
'''역대 고등고시 최연소 합격자.'''[1]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정치인이다.
1943년 충청남도 서산군(현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7세에 국민학교 3학년으로 월반하였고 공주중학교 2학년 때에는 전국중학생학술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를 수석으로 통과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지원, 1,617명의 지원자 중 6등의 성적으로 합격하여 신문에 이름이 났다. 1957년 서울법대 입학 당시 만13세 4개월(세는나이로 15세).[2]
1961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3] 으로 졸업하면서 같은 해에 고등고시(제13회) 행정과, 사법과 양과에 최연소로 합격하여 만19세에 판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법무부 법무관을 거쳐 검사로 근무하다가[4][5] , 1980년 검사를 사임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에 각각 충청남도 서산군-당진군 선거구로 공천 신청을 하였으나 탈락하였다. 그리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현욱 후보와 민주한국당 한영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김현욱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다시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면서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해 박찬종, 이철, 홍사덕, 조순형, 허경구 등과 같이 노력하였다. 후보단일화가 실패하자 1988년 평화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그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황병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꼬마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가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후신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김중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되어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남도 서산시-태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문석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해 7월 5년 전 행정소송 의뢰인의 보상금을 횡령, 유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를 당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여 정계를 떠난 뒤에도 12·12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 지원 활동, 태안 유조선 원유 유출 사고에 대한 대책 마련을 벌이는 등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2012년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張基旭
1943년 11월 02일 ~ 2012년 07월 02일
'''역대 고등고시 최연소 합격자.'''[1]
대한민국의 전 법조인, 정치인이다.
1943년 충청남도 서산군(현 서산시)에서 태어났다. 7세에 국민학교 3학년으로 월반하였고 공주중학교 2학년 때에는 전국중학생학술경시대회에서 1등을 차지하기도 했다. 경기고등학교 1학년 재학 중 대학입학자격검정고시를 수석으로 통과하여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에 지원, 1,617명의 지원자 중 6등의 성적으로 합격하여 신문에 이름이 났다. 1957년 서울법대 입학 당시 만13세 4개월(세는나이로 15세).[2]
1961년 서울대 법대를 수석[3] 으로 졸업하면서 같은 해에 고등고시(제13회) 행정과, 사법과 양과에 최연소로 합격하여 만19세에 판사로 임명되었다. 이후 대한민국 법무부 법무관을 거쳐 검사로 근무하다가[4][5] , 1980년 검사를 사임하고 변호사 사무실을 개업하였다.
1981년 제1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과 한국국민당에 각각 충청남도 서산군-당진군 선거구로 공천 신청을 하였으나 탈락하였다. 그리하여 무소속으로 출마하였으나 민주정의당 김현욱 후보와 민주한국당 한영수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한국당 후보로 같은 선거구에 출마하여 민주정의당 김현욱 후보와 동반 당선되었다. 당선 직후 민주한국당을 탈당하여 신한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에 가입하였다. 1987년 신한민주당을 탈당하여 통일민주당에 입당하였다가 통일민주당을 탈당하여 다시 평화민주당에 입당하였다. 그러면서도 제13대 대통령 선거에서 후보단일화를 위해 박찬종, 이철, 홍사덕, 조순형, 허경구 등과 같이 노력하였다. 후보단일화가 실패하자 1988년 평화민주당을 탈당하였다. 그리고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서울특별시 강남구 갑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통일민주당 황병태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0년 3당 합당 이후 꼬마민주당에 입당하였다. 1992년 제1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 전국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같은 해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 국회 보건사회위원장을 역임하였다. 1995년 김대중이 정계복귀하여 새정치국민회의를 창당하자 따라가지 않았다. 1996년 제15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후신 통합민주당 후보로 서울특별시 강동구 을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신한국당 김중위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1997년 통합민주당이 신한국당에 흡수되어 한나라당 소속이 되었다. 2000년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충청남도 서산시-태안군 선거구에 출마하였으나 새천년민주당 문석호 후보에 밀려 낙선하였다. 2003년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열린우리당 창당에 참여하였다. 그해 7월 5년 전 행정소송 의뢰인의 보상금을 횡령, 유용한 혐의로 불구속 기소를 당했다.
이후 정계를 은퇴하여 정계를 떠난 뒤에도 12·12 사건 피해자들을 위한 법률 지원 활동, 태안 유조선 원유 유출 사고에 대한 대책 마련을 벌이는 등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2012년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1] 심지어 사법 행정 '''둘 다!'''[2] 다만 이 시대에는 영아사망률이 높은 등의 이유로 호적 신고를 수년씩 늦게 하는 것이 관행이었음을 고려하여야 한다. 실제로 1982년에 만14세로 서울대 최연소 입학한 학생이 있었는데 호적이 2년 늦게 등재된 경우라고 한다. 이 신문기사에서 장기욱도 호적이 늦게 등재된 케이스로 같이 언급되었다.# [3] 단과대 수석으로 총장상을 수상했다. 참고로 당시 전체 수석한테는 대통령상이 수여되었다.[4] 세는나이로 겨우 21세에 임관하였다(!). 이시윤 전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회고에 의하면, 자신이 대학교 4학년 때 '14살짜리가 서울법대에 6등으로 합격하였다'는 공고가 붙은 것을 보고서 눈을 의심하였다고(...)(민사소송법입문, 제2개정판, 98면). 검사가 된 경위도 황당한데, 원래 판사를 지원하여 임명되었으나 미성년자(2013년 6월 30일 이전에는 만 20세가 되어야 성년이 되었다)를 임관시키기 곤란하다고 대법원에서 주저하자 검찰 쪽으로 전직한 것이라고 한다.[5] 그 우병우가 '''23세에 검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