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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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축구선수 출신 감독. 2018년부터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을 맡고 있다.
2. 선수 경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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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우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밥을 굶지 않기 위해 운동부에 들어가려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1980년 명지대학교 체육교육학과에 입학한 뒤 체육학 석사, 2006년 8월에 박사학위까지 마쳐 축구선수 출신 박사 1호가 되었으며, 당시 이것이 언론을 통해 보도되어 '축구박사'라는 별명이 있다. 축구 장학생으로 대학교에 입학해 전통의 축구 명문 명지대의 전성기를 이끌며 수차례 우승컵을 거머쥐었지만, 졸업 직후 들어간 국민은행 축구단에서는 프로팀이 아닌 실업팀이어서 그런지 주목받는 선수 생활을 해보지는 못했고, 이후 1992년 32세의 나이에 현역에서 은퇴했다.[3]
은퇴 이후 국민은행에서 은행원 생활을 시작해서 과장까지 승진하였다. 그러다 다시 축구판의 매력에 빠져 직장을 그만두고 정식으로 축구지도자의 길을 걸었다.[4]
3. 지도자 경력
3.1. 국민은행 축구단
한 때는 은행원으로 지점 내 고객 유치실적 1위를 차지하며 안정된 삶을 살고 있었으나, 1993년 국민은행 축구단에서 김학범을 코치로 선임하여 지도자 생활을 시작하였다. 무난하게 코치를 수행하던 도중에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조병득 등과 함께 코치진으로 선임, 올림픽 대표팀 트레이너를 맡기도 하였다. 당시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과 코치진의 중재 역할을 맡았다.
3.2. 천안 & 성남 일화 천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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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7년 외환 위기로 국민은행 축구단이 해체되자 다시 은행으로 돌아갔다가, 1998년 천안 일화 천마의 코치가 되었다.[5] 코치로 일하기 시작한 당시, 성남의 레전드 차경복 감독을 보좌하면서 성남 일화 천마의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성남의 K리그 3연패에 크게 기여하였다. 당시부터 전력 영상 분석에 열심이었고, 구단에 직접 영상 분석 기계를 사달라고 계속 졸라서 본인이 직접 영상 분석 기계를 만져가면서 전력 분석에 열심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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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AFC 챔피언스 리그 알 이티하드 FC와의 결승 1차전 원정 3-2 승리 이후 2차전 홈경기에서 0-5로 대패하여 준우승에 그쳤다. 이에 책임을 지고 차경복 감독이 사임하자 2005년 성남 감독에 선임되었다. 2006년 팀의 7번째 리그 우승을 이끌면서 K리그 감독상을 수상하였다. 2007년에는 K리그 준우승과 AFC 챔피언스 리그 4강을 이끌었다. 2008년 11월 27일 6강 플레이오프 탈락 등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으나, 당시 팬들은 김학범 감독을 경질하는 것에 반대하는 분위기였으며 팀을 계속 이끌어달라는 팬들의 요청이 많았었다. 애초에 일화 프런트진들이 팬들과의 소통은 개나 줘 버린 구단이라서...
3.3. 허난 젠예, 강원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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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동안 휴식기를 거친 이후 2010년 7월, 허정무 국가대표팀 감독의 후임으로 정해성 전 전남 드래곤즈 감독과 더불어 유력 후보로 물망에 올랐지만, 최종적으로는 조광래 감독이 선임되었다.[6] 김학범은 중국 슈퍼 리그의 허난 젠예 감독으로 선임돼 중국으로 건너갔다. 여기서는, 성적 부진을 이유로 5개월 만에 경질되었는데, 성적에 비해 허난 젠예의 팬들과 지역 여론의 반응은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의 인터뷰 기사를 보면 구단 모기업 고위층들 간의 알력과 축구단을 둘러싼 음해에 휘말린 것으로 보인다. 2014년 성남 FC를 맡은 김학범 감독을 응원하러 온 허난 팬 그리고 허난 젠예의 후임은 공교롭게도 한국 대표팀 감독을 했었던 조 본프레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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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2년 강원 FC의 감독으로 부임하였으나 2013년 강등권 추락 등 성적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2012년 중도에 부임한 김학범 감독은 해당 시즌 간신히 잔류를 성공시켰다. 허나 2013년 강원 FC는 나중에서나 밝혀지지만 프런트의 비리 등으로 재정이 어려운 상황이어서 오재석 같은 핵심 선수를 돈이 없어서 이적시키고, 잔류한 선수들은 고향 선수들이거나 나이나 기량의 문제로 타팀에 이적하기 어려운 선수들, 신인급의 선수들로 거의 외인구단에 가까웠다. 당시 강원 FC의 선수층은 얇아서 김학범 감독이 원하는 축구를 실현하기 어려웠고 한 끝 차이로 전술이 성공하지 않는 모습에 선수들은 커다란 스트레스를 받았다. 김학범 감독 또한 엄청난 압박과 스트레스를 받는 모습이 보였다. 이 상황에서 최문순 지사는 임은주(...)를 사장으로 영입했고 그 과정에서 애꿎은 김학범만 경질되었다.
3.4. 성남 FC 시즌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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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1. 성공적이었던 2014 & 2015 시즌
2014년 여름 대한축구협회의 기술위원으로 선임된 지 얼마 되지 않은 9월 5일, 6년 만에 시민구단으로 전환된 성남 FC의 감독으로 돌아왔다.[7] 그리고 슬슬 분위기를 끌어올리며 2014년 11월 23일, 팀을 대한축구협회 FA컵 우승으로 이끈다. 그리고 감독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기적적으로 최종 순위 9위로 K리그 클래식에서 극적인 잔류를 이끌어냈다.
더불어, 2015 시즌도 상위 스플릿 진출이 점점 유력해지면서 성남 팬들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 '''그리고 2015년 8월 15일, 대전 원정에서 2-0으로 승리하면서 성남 FC를 지휘한 이래 통산 100승을 기록했다!''' 그리고, 9월 23일, 13경기만에 FC 서울 원정 승리를 낚으면서 성남 FC는 3전 4기로 상위 스플릿을 달성했다. 스플릿에서 3위를 놓고 포항 및 서울과 각축전을 벌인다. 서울에 패하는 바람(34라운드, 1:2 패)에 아쉽게 4위 안에 들어가지는 못했지만[8] 클래식 출범 후 팀 최고 성적인 5위로 2015 시즌을 마감했다.
3.4.2. 한계가 찾아온 2016 시즌
2016 시즌이 시작되었고 개막전에서 라이벌 수원 삼성 블루윙즈를 상대로 2-0 승리를 거두면서 김학범 감독의 전술적인 면모는 더더욱 칭송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성남 FC가 재창단된 이후, 처음으로(일화 시절 포함해도 6년만에) 개막전 승리를 기록했다. 이후 홈과 원정을 가리지 않는 경기력으로 11라운드 현재 6승 3무 2패로 3위(승점 21)를 달리며 선두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나 매 경기 출전하는 통에 주전들의 폼이 저하되면서 성남도 승리보다는 패배에 익숙해지고 있다. 23+1라운드까지의 성적은 9승 7무 8패(5위). 지난해와 별 차이 없는 것 같지만, 올해에는 ACL을 치르지 않아 체력에 여유가 있었음에도 이렇다. FA컵에서는 수원 삼성 상대로 8강에서 승부차기 탈락. 탄천에서는 무려 3개월 이상 무승의 굴욕에 시달리고 있다. 한 골 넣으면 무조건 걸어잠그고 공격이 활발해져야 할 때 오히려 수비 보강을 하는데, 이게 오히려 팀의 패착이 된다.
시민구단으로 웬만한 기업구단보다 나은 성적이니 대단한거 아니냐는 옹호도 있는데 전북을 제외한 모든 기업구단이 허리띠를 졸라맨 16시즌의 경우 성남의 구단운영비는 전남, 포항 보다 많으며 수원과 엇비슷하다. 시민구단이라는 타이틀에 가려져서 그렇지 성남의 스쿼드도 전북, 서울을 뺀 다른 기업구단과 비교하면 절대 부족한 스쿼드가 아니다. 전북, 서울이야 애초에 넘사벽으로 쓰는 구단들이니 논외로 치고, 그 외 기업구단과는 비슷하게 지출을 한 성남으로서는 어떻게든 ACL 진출이라는 성과를 내야 하는데 티아고 이적 후 10경기 동안 2승3무5패로 처참한 성적을 찍고 있다.
9월 10일 수원 삼성 상대로 홈에서 1:2 패전하며 황기청년단 등의 강성 팬들이 체육회관[9] 앞에서 "감독 나와라"를 시전, 김학범 감독이 팬들에게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다'며 지켜봐달라고 하며 그럭저럭 마무리되나 싶더니, '''결국 2016년 9월 12일. 감독직에서 자진 사임하였다'''고 알려졌으나... 김학범 감독의 인터뷰에 따르면 '''사실은 자진 사임이 아니고 경질'''이라는 점이 논란이 되고 있다.김학범감독 "사퇴? 운동장 갔더니 다 결정됐더라"
이영진 수석코치 이하 코치진 전원도 사직. 다만 2군 코치인 정경호는 유임되었다. 그 공백은 성남의 유소년 사령탑들(풍생고 구상범, 풍생중 변성환, 12세 남궁도)이 급하게 메우게 되었으나, 단 1승 추가에 그치고 있다. 팬들은 '이런 꼴 보려고 경질했냐'와 '어차피 김학범 감독도 오래가긴 힘들었다'로 나뉘어 있다. 그렇지만 다들 구상범 체제는 아니라고 고개를 젓는다. 실제로 하위 스플릿에서 2무 3패로 11위로 추락해버렸기 때문이다.[10]
3.5. 광주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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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성적 부진으로 사임한 남기일 감독의 후임으로 광주의 새 감독이 되었다.
감독 부임 이후 경기력은 좀 더 나아졌지만 결과를 챙기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는데, 김학범 감독은 광주가 기존에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백쓰리 전술을 사용해보고 본즈를 공격적으로 투입하는 등 다양한 시도를 해보았으나 광주 선수들에 대해 파악이 덜 된듯한 모습을 보였으며, 그 결과 부임 후 첫 다섯 경기에서 1무 4패라는 초라한 성적을 기록했다. 특히 강등권 경쟁팀인 인천에게 0:0 무승부 그리고 상주에게 3:2패를 하면서 김학범 감독의 3번째 소방수 역할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시즌 중반 이후 광주의 추락의 원인이었던 수비진의 불안정 문제가 해소하면서 완델손과 본즈를 필두로 잠잠했던 공격진도 살아나기 시작했으며, 기존에 수비형 미드필더 자원이었던 김정현을 상황에 따라 올리고 내리면서 백쓰리와 백포를 혼용하는 전술이 성공적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2017년 10월 15일 전남 드래곤즈와의 원정 경기에서 4:2 승리를 거두면서 감독 부임 후 두 달만에 승리의 맛을 보게 되었다. 이후 10월 22일 상주 상무와의 홈 경기에서 1:0 승리, 10월 29일 인천 유나이티드와의 원정 경기에서 0:0 무승부를 기록하며 3경기 연속 무패를 달성하며 꺼져가는 잔류 불씨를 살려보려 했으나, 11월 4일 대구 FC와의 원정 경기에서 0:2로 패하며 3년 만에 K리그 챌린지로 강등이 확정되고 말았다. 설상가상으로 11월 18일 포항 스틸러스와의 홈 경기마저 0:4로 패하며 유종의 미조차 거두는 데 실패하자 강등의 책임을 지고 3개월 만에 자진 사퇴했다.
문제는 구단 측에서 설득을 거듭하며 잔류를 요청했지만, 감독 본인이 사퇴를 고집했다는 것.[11] 많은 축구팬들은 김학범이 챌린지(2부) 감독을 하고 싶지 않아서 그만둔 거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평소 외골수인 면을 자주 보여주었던 감독이기에 축구팬들은 반쯤은 정설로 믿고 있는 편이다.
3.6. 대한민국 U-23 축구 국가대표팀
전임 감독이었던 김봉길이 2018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4위에 그쳐 경질되자 최용수와 함께 차기 감독 후보로 거론되었다. 그 결과 2018년 2월 28일 감독선임위원회에서 만장일치로 최종 선임되었다. 계약 기간은 일단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까지 보장되지만, 그 결과에 따라서 2020 도쿄 올림픽까지 연장될 수도 있다고 한다.
일단 반응은 긍정적이다. 세밀한 전력 분석으로 상대방의 전술을 잘 파악하고 유럽의 선진 축구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공부하는 지도자로 대중에게 평이 좋다. 또, 인천을 한 시즌 상위 스플릿에 보낸 김봉길 감독과 달리 K리그 내에서는 잔뼈가 굵은 지도자이고 성남을 이끌면서 리그 우승, AFC 챔피언스 리그 4강, FA컵 우승 등 성과도 많이 냈고, 소방수로도 많이 활약했기 때문에 팀을 만드는 데 시간이 좀 걸리는 최용수 감독과의 경쟁에서 이긴 것이다.[12] 본인은 제로 베이스를 선언했고, 시간이 없다면 호흡을 많이 맞춘 U-20 멤버들 중심으로 짤 가능성이 있으며, 이승우나 백승호, 김정민의 차출 가능성도 언급했다. 참고로 손흥민은 확정이라고 한다. 2018 러시아 월드컵에서 최고의 활약을 한 조현우 역시 미필이라 와일드카드로 출전할지 관심을 받고 있다.
아시안 게임 최종 명단에 이승우와 김정민은 차출했으며, 백승호는 부상으로 낙마했다. 와일드카드로 손흥민, 조현우, 황의조를 차출했다. [13]
2018년 8월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에서 말레이시아와의 조별리그 2차전에서 패배하자 로테이션을 잘못 사용하여 팀을 패배를 몰고 갔다고 여론의 몰매를 맞으면서 조 1위에 실패해 이후 이란, 우즈베키스탄을 만나는 고난의 행군을 스스로 걷게 되었다. 다행히 혈전 끝에 이들을 차례로 꺾고 4강전 박항서 감독의 베트남을 만나 승리하여 결승전 일본을 꺾고 금메달을 차지하여 아시안 게임 남자 축구 2연패를 이루어냈다.
2020년 1월 올림픽 최종예선을 겸한 2020 AFC U-23 챔피언십 태국에서는 '''전승으로 U-23 대표팀 사상 첫 AFC U-23 챔피언십 우승이라는 업적을 달성'''하며, 2020년 도쿄 올림픽 출전도 확정지었다. 김학범 감독은 지난 아시안 게임에서의 잘못을 반면교사 삼아 대회 준비를 철저하게 잡고 경기에 임했으며, 로테이션의 적극적인 사용으로 선수단의 체력 관리를 일정하게 유지하면서 안정적으로 팀을 운영했다. 김학범 본인도 대회 종료후 폭스 스포츠 아시아에서 선정한 대회 최고의 감독에 선정됐다.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 게임''', '''2020 AFC U-23 챔피언십 태국 우승'''에 보다 자세한 내용은 김학범호 문서 참조.
3.6.1. 관련 문서
4. 지도 스타일
K리그에서 손꼽히는 명장으로 평가받고 있으며, 성남 FC의 남기일 감독[14] 과 함께 박사학위를 갖고 있는 학구파 감독. '항상 공부하는 감독', '연구하는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속칭 '레알 성남'의 최전성기라 불리던 2번째 3연패 코치 시절, 선수 선발과 용병술은 차경복 감독 그리고 실질적인 전략, 전술은 김학범 코치가 모두 실행했을 정도로 전략과 전술에 뛰어난 지도자였다. 코치 때 영상분석을 위해 기기를 구입해달라고 해 혼자서 밤을 새워가며 상대를 연구하고 그 계책을 내놓았으며, 밤잠을 줄여가며 이길 비책을 궁리했다. 대략적인 특징은 다음과 같다.
재미있게도 아래 문단에서 제시된 단점들은 U-23 대표팀 감독으로 선임된 이후 상당수가 개선되었다. 아시안 게임 당시에는 조기 로테이션 실패로 인해 잘 안먹히는 플랜 A를 버리고 플랜 B로 넘어가서 우승까지 이끌었고, AFC U-23 챔피언십에서는 매경기 6명 이상 선발 명단이 바뀌었을 정도로 로테이션에 적극적이었다. 후자의 경우 선수층이 워낙 두꺼워서 가능하기도 했지만 돌발변수 대응에도 능숙해진 건 사실이다.[15]
4.1. 장점
첫째, '''세계 축구계 흐름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이를 접목하여 적용'''시킨다.
2006 독일 월드컵 전후로 유행하기 시작한 4-2-3-1 포메이션을 세계 축구의 흐름보다 1년 앞선 2005년부터 K리그 최초로 성남에 도입해 2006년 K리그 정상에 올렸다.[16] 영국 프리미어 리그의 전술 흐름을 독자적으로 연구해 반영하는 모습에서 '학범슨'이라는 별명도 붙었다. 주 전술인 4-2-3-1의 완성도가 높고, 이 체계가 제대로 작동한 게 2006~07년의 성남이었다.[17] 현 U-23 국가대표팀에서도 이런 스타일은 여전하여, 파울루 벤투 감독과 마찬가지로 대한민국의 토탈 사커를 바탕으로 한 후방 빌드업과 빠른 공수 전환을 추구해 성인 대표팀으로의 징검다리 역할도 잘 수행하고 있다.
둘째, '''경기 영상 분석 기법을 국내에 선구적으로 도입한 전문가'''이다.
성남 코치 시절부터 팀에 최신 영상기기를 사달라고 요청했는데, 기기를 다룰 줄 아는 직원의 추가 고용이 필요하다고 거절당하자, "내가 직접 할꺼니까 그냥 사달라"고 설득, 구단에 기기를 들여와, 새벽 3, 4시까지 밤을 샐만큼 분석하고 '''편집''', 즉 영상 발표자료를 만드는 일에 매진했다고 한다. 이전까지는 따로 영상분석관을 두지 않고 코칭스태프의 감으로 운영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고, 있다고 쳐도 경기를 시간 순서대로 쭉 돌리면서 분석하는 방식이었는데, 김학범 감독이 중요 장면을 발췌하여 제시하는 방식을 적용해, 선수단의 시청 시간을 1/3 수준으로 줄여 분석의 효과를 높였으며, 이를 알게 된 다른 팀 코치들도 영상 분석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만큼 영상분석 및 활용이 일상 생활로 정착된 축구인이고, 선수들 말에 따르면 경기 중에 김학범 감독이 말하는 것처럼 상황이 흐르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셋째, '''체력훈련을 매우 중시'''한다.
항상 체력과 정신력을 강조하고 비시즌 전지훈련 때마다 강도 높은 체력훈련으로 선수단을 굴리는 걸로 유명하다.[18] 특히 2015 시즌이 끝나고 유럽으로 자비 연수를 받으러 간 자리에서 '''아틀레티코 마드리드'''의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의[19] 훈련 참관 후 전보다 더 강한 체력훈련 일정을 제시, 선수들 입에서 단내 그칠 날이 없었다는 후문. ATM의 훈련 장면을 본 김 감독이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훈련과 다른 한국 구단에서 빡센 훈련이라고 했던건 여기에 비교하면 아무것도 아닌 수준이다."'''라며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20][21]
4.2. 단점
'''첫째, 철저하게 베스트 일레븐 위주로 시즌을 운영하며 로테이션에 소극적이다.'''
성남 시절 이런 모습이 굉장히 심했는데 이로 인해 벤치만 지키며 커리어에 피해를 본 선수들이 몇몇 있다. 성남 2기 시기까지 U-23 의무 출전 규정에 가장 부정적인 감독이기도 했다. 2006년 우승으로 리그에 AFC 챔피언스리그와 피스컵, 리그컵, FA컵, A3 챔피언스컵까지 무려 6개 대회에 출전하는 2007년에조차 이 방식을 고집스렇게 적용시켰고 결국 무관으로 시즌을 끝냈다. 2007 시즌을 앞두고 영입된 중앙 수비수 조용형은 김영철과 조병국만 기용하느라 본 포지션에선 전혀 기회를 못받고 박진섭 대신 풀백으로 몇경기 나왔다고 부진하자 바로 벤치에 박았다.[22]
이같은 단조로운 선수 기용은, 노쇠한 주전 멤버들의 과도한 혹사로 이어져 시즌 후반에 항상 체력적인 문제를 야기하기 일쑤였다. 공격적인 선수 영입에도 불구하고 스쿼드를 폭넓게 활용하지 못하고 주전급 선수 한두명의 부상으로 심각한 전력 공백을 빚게 되는 위험도 높았다. 성남 2기 때는 황의조를 키워냈으나 폐쇄적인 운영 자체는 변하지 않아 김두현, 장학영 등 몇몇 노장들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는데 시민구단으로 전환한 이후의 성남 프런트가 워낙 일을 못해서 감독 과실과 구분하기 애매해서 자주 거론되진 않는다.
'''둘째, 임기응변에 대처하는 게 굉장히 서툴다.'''
타고난 분석력으로 판짜기에는 능하지만 이게 틀어지면 수습 못하고 어버버하다 경기를 내주는 일이 흔했다. 2007년 6강 플레이오프 경기 텀이 굉장히 길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초 결승 상대로 예상되었던 울산과 수원이 아닌 5위 포항이 올라오자 맥없이 우승을 내줬다.[23] 변수에 약하니 2006년 우승 시즌을 제외하면 플레이오프에 취약했는데 2007년엔 5위 포항, 2008년엔 6위 전북에 무릎을 꿇었다.
문제는 김학범의 시즌 운영은 돌발상황이 생기기 쉬운 방식이라는 점이다. 주전 의존도가 매우 높고 로테이션에 소극적이니 당연히 예기치 못한 부상이나 결장, 폼저하가 생기기 쉽다. 그런데 그런 감독이 변수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지니... 이 같은 문제점이 발목을 잡아 대표팀 감독과는 인연이 되지 않았다. 토너먼트는 변수의 연속이니까.
이 같은 문제점들은 지도자로서 출발점이 압도적인 자금력으로 선수들을 쓸어 모으던 성남 일화의 구조에서 온 문제를 보완하지 못한 게 커보인다.[24][25] 이런 팀은 육성 능력이나 임기응변을 기르기에 좋은 환경이 아니었다.
5. 기타
- 지독한 애연가다. 하루에 3갑 이상 피우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경기 전 상대팀의 비디오 분석을 하면서 많은 양을 태운다고. 팬들이 가장 걱정하는 부분. 어느 인터뷰에서 의사가 어차피 못 끊을 담배는 계속 피우는 게 스트레스 안 받고 좋다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한편 아시안게임 때는 담배를 줄여가며 선수들과 밀당을 했다고 한다.
- 빛나는 이마 덕에 일화 시절부터 상당히 나이가 많아 보였고, 지금도 그러하다. 그러나 1960년생이다! K리그에선 최강희보다 1살 어리며, 유럽에선 라파엘 베니테스, 요아힘 뢰프와 동갑이고 주제 무리뉴보다 3살 밖에 많지 않다. 비슷한 처지의 얼굴 나이대를 가진 카를로 안첼로티보다는 1살 어리다. 2015 시즌 개막전 때 상대팀인 전북 현대의 최강희 감독과 기싸움을 벌인 적이 있는데, 김학범이 '개막전은 우리 성남의 놀이터다'라고 도발하자 최강희는 '도발하지 말고 머리부터 심고 와라. 도발 노. 가발 이식!'이라고 받아쳤다.[26]
- 마우리치오 사리와 공통점이 많다. 두 사람 모두 대머리에 선수 경력이 한미하고 은행원을 본업으로 했다가 감독으로서 성공했다. 게다가 애연가인 점까지 동일.
- 다만 별명으로는 알렉스 퍼거슨과 합친 학범슨이 많이 쓰인다.[27] 특히 헤어드라이어로 유명한 퍼거슨의 불같은 성격과 유사하게 무서울 때는 굉장히 무섭고 한편으로 사적일 때는 따뜻한 면도 있다는 공통점이 있다.
- 일화 시절에는 경기 내적인 면뿐만 아니라 외적인 면에서도 상당히 외골수적인 면이 강했다. 언론플레이와 팬 서비스에도 인색한 감독이었는데 어느 정도였냐면 경기력에 손실이 생긴다는 이유로 선수나 프런트 차원의 팬 서비스도 제한을 가했다. 후임이었던 신태용은 이런 면에서 김학범과 아예 정반대였다. 다만 본인도 야인이 된 후에는 꽤나 유해졌다고는 하지만 성남 FC로 복귀한 이후에도 그리 달라진 모습을 보이진 않는다. 일설에 의하면 성남 FC의 검은 유니폼은 경기력에 지장을 준다는 김학범 감독의 반대로 무산될 뻔하기도 했다. 그래도 U-23 대표팀 감독 부임 이후로는 이런 단점들이 많이 개선되긴 했다.
- 나이에 비해 풀업을 상당히 잘한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김학범 감독은 지독한 골초다! 자세 또한 정자세로 유지할 정도면 만 60세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코어 힘이 상당하다는 소리가 된다. 이러니 선수들이 말을 안 들을 수가 없다[28]
[1] 2011년 강릉중앙고등학교로 교명 변경.[2]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새에덴교회에 출석 중이다. 신앙은 아내의 권유로 2018년 초에 처음으로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3] 당시에는 나이가 30세를 넘어가면 선수 생활을 그만두던 시기여서 꽤 운동을 오랫동안 했다고 할 수 있다.[4] 다만 축구와 거리를 두려했었던 것도 사실이다. 축구 잡지 인터뷰에서 밝히길 국민은행 축구팀 코치 제의를 거절하고 은행 업무에 집중하려 했었다고 한다. 하지만 당시 국민은행 축구팀 감독이 우승파티 자리에서 김학범을 코치로 달라고 사장에게 요구했고, 사장이 이를 수용하면서 은행 업무 자리를 떠났다고 말했다.[5] 은행원의 삶도 좋아서 고민을 많이 했다고 한다. 동기들 중에서 은행원으로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었지만, 지금 코치로 들어가면 안 그래도 1997년 외환 위기 시점인데 당시 평생 직장인 은행에서 받는 것보다 훨씬 적은 연봉을 받으면서 코치 생활을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은행 업무와는 달리 축구는 자진해서 밤을 새워도 아무렇지 않았기에, 그런 자세로 남보다 앞서가는 자세로 반드시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다시 지도자 커리어를 시작했다고 한다.[6] 조광래는 김호와 함께 축구계 비주류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었는데, 이들을 적극적으로 끌어안아 화합하려던 이회택 당시 기술위원장의 의지도 컸다.[7] 성남 FC는 시민구단 첫 시즌부터 총체적 난국이었다. 선수 폭행 논란으로 박종환 감독이 경질되고 이상윤 수석코치가 감독 대행을 맡았으나 곧 경질되며 대행의 대행을 선임하는 추태를 보였다.[8] 3위 서울이 FA컵을 들어올리며 4위 팀도 아챔에 나갈 수 있게 되었고, 포항이 이 기회를 가져갔다.[9] 탄천요새 바로 옆. 선수단은 이쪽으로 퇴장한다.[10] 하지만 감독 본인도 티아고 이외의 카드는 없이 무한 체력 훈련만 요구하였고, 결국 붙박이 주전들이 지쳐 나가떨어지며 3위 이상, 최소 6위를 기대했던 팀이 하위스플릿으로 추락하는 계기를 제공한 것도 사실이다.[11] 광주는 강등되더라도 김학범 감독으로 가려고 했고 또 계약 기간도 남아있었기 때문에 감독 선임에 대해 큰 준비를 하지 않았지만 김학범이 갑자기 사퇴를 한다고 하자 감독 선임에 난항을 겪었다.[12] 불안한 점도 있는데 아시안 게임까지 1년이 채 안 남은 데다가 엔트리가 20명이고 일정도 빡빡하여 로테이션이 필수인데 김학범의 성향이 베스트 멤버 의존이 강해서 로테이션 돌리는 것에 인색하고, 시즌 중 빡센 체력 훈련을 시켜 시즌을 망친 경험도 있어 일부에서는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로테이션을 잘 돌리는 최용수가 낫지 않았냐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13] 손흥민은 대표팀의 주장으로서 어린 선수들을 잘 이끌고 조력자 이미지에 충실한 모습을 보이며 팀의 공격에 도움이 되었다. 조현우는 2018 러시아 월드컵 때와 마찬가지로 든든하게 골문을 지켜냈으며 특히 경쟁자였던 송범근이 대회 내내 불안한 모습을 보였기에 더욱 빛이 났다. 가장 많은 논란을 일으킨 황의조는 대회 기간 내내 가공할 득점력으로 스트라이커로써 제 역할을 매우 충실하게 잘 해내며 논란을 완전히 씻어냈다.[14] 남기일 감독은 현역 선수 시절에, 김학범 감독이 2005~2008년에 지휘했던 성남 일화의 선수로 활약했었다.[15] 돌발상황을 임기응변 식으로 대처하는 게 아닌, '''어지간한 상황들에 대한 대응전략을 미리 준비하는 식'''으로 돌발변수 발생을 커버하고 있다.[16] 김학범 감독의 성남 일화 시절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인 딕 아드보카트는 세계 축구의 흐름에 따라가는 팀이 축구 변방인 한국에도 있다는 것에 감탄하여 성남의 전술을 대표팀으로 이식시킬 정도였으며, 인천 유나이티드 소속이던 데얀은 김학범 감독이 이끄는 성남을 K리그에서 유일하게 전술적인 축구를 하는 팀이라 평했다. 또한 2005년 피스컵 당시 PSV의 히딩크 감독도 성남의 전술에 대해 찬사를 보낸 적 있다.[17] 이 때문에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 이후 허정무의 뒤를 이어 대표팀 감독으로 취임할 거란 예상이 많았으나, 정작 후임으로 결정된 건 조광래였다. U-23 대표팀 감독직을 맡게 된 뒤로는 2022 FIFA 월드컵 카타르 이후 파울루 벤투의 계약이 만료된다면 국내파 중에서 가장 유력한 차기 감독 후보가 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아졌다.[18] 성남의 비시즌 체력훈련은 김학범 이전 차경복 시절이나 더 거슬러 올라가 박종환 시절부터 이어진 팀의 전통이다. 이건 신세대 감독으로 평가받는 신태용 감독도 일화 시절부터 내려온 전통은 거스른 적이 없다. 이후 안익수도 마찬가지고 다시 돌아온 박종환과 다시 돌아온 김학범 시대까지 계속 이어졌는데...[19] 아틀레티코 마드리드 구단, 디에고 시메오네 감독 모두 스페인에서 강한 압박을 바탕으로 하여 체력과 피지컬을 강조하는 것으로 유명하다.[20] 실제로 K리그 클럽들과 유럽 빅클럽들과의 차이점은 지도자의 지도 능력, 선수단의 기술, 전술 이해능력, 피지컬 등 여러 차이가 있는데 가장 큰 차이를 꼽는 것이 피지컬이다. 히딩크 감독도 한국 대표팀에 부임하고 나서 한국 선수들이 유럽 선수들에 비해 제일 부족한 점은 기술보다는 피지컬이 훨씬 부족하다고 가장 먼저 집어주었고, 월드컵 직전까지 장기 합숙을 통한 체력훈련을 계속해왔다.[21] 뿐만 아니라 대다수 동남아 국가대표팀들은 "체력이 안되니 기술을 연마하자"는 마인드로 자국 팀을 운영했으나, 인도네시아로 부임한 신태용 감독은 체력을 먼저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다. '''축구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체력이기 때문.'''[22]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성남의 미드필더진과 수비진은 거의 변화가 없었다. 30을 넘긴 김상식, 김영철, 박진섭이 계속 주전이었다. 김학범이 키우려고 한 젊은 선수는 공격수 조동건 정도 밖에 없었다.[23] 이 당시 플레이오프 경기 텀이 너무 길어서 5위팀 포항이 연속으로 강팀을 꺾고 올라와 사기가 올라왔다는 점이 있으나 성남은 맨위에서 기다리던 1위팀이었다. 분석하고 대책세울 기간은 충분했으나 포항이 경남, 울산, 수원 3경기에서 이미 사용한 좌원재 우효진에 아무런 대응도 못했다. 2008년에도 주전인 두두와 모따의 폼이 시즌 후반 하락하고 수비진의 김영철과 박진섭이 노쇠화로 부진하는데 아무 대응도 못했다.[24] 2000년대의 성남 일화는 포항이나 수원, 서울처럼 유소년에 장기간 투자하는게 아니라 리그 수위급 선수를 사와서 스쿼드를 보강하는 팀이었다. 01~03 3연패 시기 스쿼드가 그러했고 김학범 시기에도 2007년 한동원, 최성국, 김동현 3명을 각각 17억, 20억, 24억 도압 61억에 사올 정도로 거액 영입에 망설임이 없었다. K리그 최강팀으로 늘 우승에 도전하고 리그 최고 수준의 선수들을 영입하여 베스트 일레븐을 기용하는게 당연했으니 리빌딩 고민도 별로 할 필요가 없었다.[25] 현재 전북 현대가 K리그 1강으로 군림하는 것 또한 그렇다. 거기에 전북은 영입 못지 않게 판매도 잘 하는 팀으로 선수 판매 자금으로 선수단 재투자에도 거리낌이 없다.[26] 근데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과의 아시안 게임 준결승전에서 어느 팀을 응원할 거냐는 질문에 최강희가 '머리 남은 김학범 응원할 것, 항서형 미안~'이라고 했다...[27] 이 별명은 사리가 유명해지기 훨씬 전부터 널리 퍼진 별명이기 때문이다.[28] 감독이 선수들에게 모범이 되는 이 모습은 선수들이 믿고 따르는 원동력이 된다. 비슷한 예시로 손흥민은 어린 시절 아버지 손웅정에게서 개인 훈련을 받고 기본기를 익혔는데 아버지가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보였기에 손흥민 본인도 불평없이 아버지를 믿고 따르면서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지기까지 큰 원동력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