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토 네레틀랴크
1. 개요
크로아티아의 축구 감독. 마시엘, 아디와 함께 K리그 역대 최고의 외국인 수비수로 꼽힌다.[1]
2. 선수 경력
2000년 NK 오시예크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고, 2002년에서 2005년까지 HNK 하이두크 스플리트에서 활약하였다. 이 때 04-05 챔피언스리그 2차 예선전에서 선발로 뛰었었다. 이 시기에 대표팀에도 뽑혔는데 독일과의 친선전에서는 비록 1대2로 패했으나, 종료 직전 코너킥 헤딩골을 넣기도 했다. 당시 골키퍼는 올리버 칸이었다. 유로 2004 23인 엔트리에도 뽑혔으나 본선에서 뛰지는 못했다.
2005년 K리그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이적해 4시즌 동안 맹활약했다. 2008 시즌 종료 후 유럽 진출이 유력해 보였으나 J리그 오미야 아르디자와 연봉 1억엔에 계약을 맺었다.
'''통곡의 벽'''이라 불리 정도로 빼어난 수비력을 선보여 2006, 2007, 2008 시즌 연속으로 K리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었고 2008년 수원의 정규리그 우승에 절대적으로 기여했다. 다만 2008년에는 마토보다 이정수의 지분이 더 컸다고 평가받는다.
J리그 진출 초반 컨디션 난조를 보이기도 햇으나 이내 적응해 8골로 팀내 최다득점자가 되었으며 변치않는 수비력으로 자칫 강등당할뻔한 오미야의 구세주가 되었다. 그러나 2년차부터는 스피드가 눈에띄게 저하되어 발빠른 일본 공격수들에게 농락당하는 모습이 자주 포착되었다.
그리고 2년만에 다시 '''수원 삼성 블루윙즈'''로 복귀한다. 2011 시즌 초반에는 타점높은 헤딩으로 공중볼을 잘 걷어내고 프리킥과 헤딩으로 득점을 해내면서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칭찬을 듣기도 했으나 시즌이 진행되어갈수록 이전보다 더 느려진 발 때문에 빠른 공격수들에게 신나게 털리면서 수원 팬들이 리웨이펑을 다시 찾게 만들었다. 심지어 최성환에게 주전 경쟁에서 밀리나 싶었으나 후반기 들어 다시 폼을 끌어올려 황재원, 곽희주가 부상으로 이탈한 수원의 수비진에서 한 시즌 내내 꾸준히 뛰어주면서 다시 성원을 받았다.
2012 시즌을 앞두고 방출되었다. 그 자리를 비슷한 스타일의 호주 출신 에디 보스나가 메꿨다.[2] 방출 이후에는 크로아티아 리그로 돌아갔다.
3. 은퇴 후
2014년에 은퇴하고 코치 연수를 시작했다. 그 해 여름에는 연수차 한국에 잠깐 왔는데 빅버드에 모습을 드러내서 팬들의 박수를 받기도 했다. 2015년 6월 27일 상암에서 열린 FC 서울과의 경기에서 과거 팀 메이트였던 이싸빅과 함께 응원차 방문했다.
2020년 현재 보스니아 리그의 NK 즈비예즈다 그라다차츠팀의 감독이자 크로아티아 U-20의 수석코치이다.
4. 플레이 스타일
190이 넘는 장신에 뛰어난 위치선정, 점프력, 경합능력을 갖추고 있어 공중볼에 강했고 탁월한 기술과 노련미를 바탕으로한 끈적끈적한 대인마크, 날카로운 태클, 예측수비력을 자랑했다.
또한 공격면에서도 돋보였다. 크로아티아에서도 유명했던 왼발킥과 장신에 걸맞는 우수한 헤딩능력을 갖추고 있어 프리킥 상황에선 키커로, 코너킥 상황에선 헤더로 맹활약했다. 2005년에는 팀내 최다골을 기록하기도 했고[3] 2006년 8월 13일 서울과의 FA컵 8강전에선 그림처럼 휘어들어가 김병지를 꼼짝못하게 만든 프리킥 골이 유명하다.[4] 2011년 수원에 복귀했을때는 염기훈이라는 역대급 왼발잡이가 있었음에도 프리킥을 나눠찼다.
그리고 마토의 킥은 패스선택과 시야를 겸비하고 있었다. 커맨더형으로 분류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김영권처럼 브레인 없이 킥만 좋은 반쪽짜리는 절대 아니었기 때문에 빌드업을 맡길 수 있었다. 2011년 수원에 리턴했을때 롱패스를 이용한 카운터 어택을 쓸 경우 마토가 약간 전진한 후 왼발 킥으로 상대 페널티 에어리어로 공을 배달해줬다.
굉장한 강심장이라 공격수 못지않은 높은 페널티킥성공률을 자랑했는데 K리그에서 5시즌을 뛰며 2007년 FA컵 서울전 승부차기 실축을 제외하면 단 한번도 실축하지 않았다. 그래서 20대 최전성기였던 차범근 감독 시절엔 이따금씩 왼쪽 풀백으로 뛰기도 했었다.[5]
단점은 느린 발. 전성기때도 이 문제로 종종 뒷공간을 내주곤 했다. 그래서 2000년 후반 수원 센터백 중에 가장 준족이었던 곽희주와 궁합이 좋았다. 일본에서 수원으로 복귀한 2011년에는 노쇠화가 진행되어 이 문제가 한층 두드러졌다. 초반엔 눈에 띌 정도는 아니었는데 중반기 들어 이 문제점이 심히 부각되어 상대의 공략대상이 되는 바람에 실점위기를 자주 내줬다.
5. 기타
- 홍명보 이후 뚜렷한 대체자가 나타나지 않는 중앙수비진에 답답해하던 K리그 팬들 중에는 마토가 귀화해서 대한민국 국대로 뛰기를 은근히 바란 팬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어차피 길진 않아도 크로아티아 대표팀에선 뛴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귀화했어도 한국국대는 애초에 뛸 수가 없었다. 2001년 4월 25일 벌어진 그리스와의 친선 경기에서 데뷔했고, 유로 2004에서 크로아티아의 23인 엔트리에 포함되었지만 경기에 출전하지는 못했다. A매치 첫 골은 2004년 2월 18일 벌어진 독일전에서 기록했고(이때 독일의 골키퍼가 올리버 칸) 2006년 홍콩에서 열린 칼스버그컵에서 두 경기에 대표선수로 출전하여 한국대표팀과 맞대결했다.[6]
- 2007년 미국에서 열린 월드시리즈 오브 풋볼 2007 대회에서 첼시와 수원이 맞대결했는데, 첼시의 셰브첸코와 드록바를 준수하게 막아내서 마토를 잘 모르던 해축팬들이 많이 놀란 적이 있다.
- 2006년부터 크로아티아 축구 국가대표팀을 6년간 맡았던 슬라벤 빌리치와 하이두크 스플리트 시절부터 친분이 있었던 덕인지, K리그에서 뛰던 그를 대표팀에 뽑으려 했으나 여론 문제로 끝내 뽑히진 못했다. 슬라벤 빌리치 항목 참조. 마토의 인터뷰에 따르면 빌리치가 뽑으려했으나 아시아에서 뛰는 마토를 뽑기에는 여론의 눈치를 봐야했던 것 같다.
- 수원으로 이적한 이유는 수원의 이적료가 제일 높았기 때문. 당시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 베르더 브레멘, 페예노르트등의 팀들이 수원과 같이 오퍼를 넣었는데 이적료가 가장 높았던 수원을 택해서 친정팀에 돈을 안기고 싶었다고한다. 2003년 즈음 UEFA 컵 예선 경기에 나선 그를 차범근 감독이 눈여겨보고 이적을 요청했다고 알려져있다.
- 귀염둥이 딸아이를 둬서 한때 화제가 되기도 했다.##
- 한국에서 얻은 별명인 '통곡의 벽'을 무척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1] 3명 중에선 가장 한국에서 오래 뛰었고 센터백과 풀백, 미드필더 모두 빼어났으며 말년까지 기복없이 꾸준했던 아디가 꼽힌다.[2] 공교롭게 크로아티아계 호주인[3] 당시의 수원 공격진이 얼마나 빈약했는지를 보여주는 예 이기도 하다.[4] 2대1로 뒤진 상황에서 종료 5분을 남기고 들어간 동점골이었다. 이 동점골에 힘입어 수원은 승부차기까지 끌고가는데 성공했고 서울 7번째 키거 김치곤의 실축에 이은 조원희의 마무리로 승리를 거머쥐었다.[5] 하지만 메리트가 킥밖에 없었기 때문에 좋진 않았다. 참고로 차범근은 2006년 마토, 이싸빅, 이정수, 곽희주 센터백 4명으로 포백을 구성한 적도 있다.[6] 당시 같은 수원삼성 소속의 팀 메이트였던 조원희와 강력한 몸싸움을 벌이면서 볼 다툼을 벌이다 둘이 같이 넘어지는 장면이 있었는데 서로 일으켜 세워주면서 격려하던 모습이 수원팬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자랑거리로 회자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