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사/동양

 


1. 개요
2. 동아시아 철학의 역사
2.1. 중국 철학
2.2. 불교 철학
2.3. 한국 철학
2.4. 일본 철학
3. 인도 철학의 역사
3.1. 브라흐마나 & 슈라마나
3.2. 힌두교
3.3. 근현대


1. 개요


이른바 "동양"의 철학적 전통이 어떤 역사를 거쳐왔는지를 기술하는 항목. 특히 인도한자 문화권을 중심으로 한 철학적 전통을 중심으로 다룬다.
오리엔탈리즘에 관한 논의에서 나타나듯 이른바 "동양"이라는 이름으로 상이한 지적 전통들이 도매금으로 묶일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은 여전히 유효하다. 특히 압바스 왕조 시대의 이슬람 철학이나 페르시아 문화권의 철학, 아니면 아프리카아메리카 원주민, 오세아니아 문화권의 지적 전통까지 고려하게 되면 문제는 더더욱 복잡하게 된다.
따라서 아래에 서술된 분류는 어디까지나 편의상 이루어진 것이며, 해당 문서에서의 분류 방식을 근거로 "동양 철학"의 범위를 규정짓는 것은 정당화될 수 없다.

2. 동아시아 철학의 역사



2.1. 중국 철학


고대 중국에서는 황하유역에서 문명이 발달했으며, 사계절이 존재하고 자연현상 및 재해로부터 자연의 힘 앞에 무력한 인간을 보며 공포와 불안감 등을 느끼면서 자연을 바탕으로 미신을 믿어왔고 거북이 등가죽 등으로 점괘를 치는 등의 행위로 어느 정도 자연이 신격화 된 미신의 종교적인 색깔을 가지고 있었다. 후에 이는 반복관찰 및 누적경험 등으로 터득된 현상법칙으로 인간의 힘으로 어느 정도 미래를 예견할 수 있게 되었고 이에 적정한 대비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는 후에 농경사회로 접어듦에 따라 관측이 중요해졌고 정착생활과 집단생활을 하다보니 자연적으로 인간관계와 물질에 대한 개념이 생기면서 사상과 정치제도가 발달하게 된다.
서주가 중국의 지배력을 상실한 이후 중국 대륙은 윤리 도덕이라곤 없는 희대의 막장 상태였다. 고사성어를 공부해 본 사람들은 이 당시에 얼마나 많은 막장 에피소드가 있었는지를 알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서로를 죽이고 국가들은 민초의 고생과는 상관없이 전쟁을 계속했으며 신의는 박살나고 윤리는 죽었고 정의는 땅에 떨어진 상태였다. 그야말로 '''현실에 지옥이 도래해버렸다.'''
이 시대가 어떠했는지에 대한 맹자의 비판이 이렇다.

"땅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통에 사람 시체가 들판에 가득하고, 성벽을 빼앗기 위해 싸우는 통에 사람 시체가 성안에 가득하다."

『맹자』 중

이 시기 제자백가라는 집단이 나타나는데 이들의 목표는 단 하나, 이렇게 막장이 된 중원의 혼돈을 멈추고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였다. 즉 그리스철학이 세상에 대한 '왜?'라는 의문에서 시작되었다면, 중국철학은 '''어떻게 이 지옥을 끝장낼까?'''라는 매우 현실적인 문제에서 출발한 학문이다.[1] 그리고 이 지옥을 종결시키기 위해서 부국강병, 정교하고 강력한 법 시스템, 고도의 훈련을 받은 지식인들의 정치공동체, 백성에 대한 보편복지, 권력의 정당성을 근본을 백성에게서 찾는 움직임, 침략전쟁에 대한 적극적 반대 등 온갖 대안들이 나오게 된다.[2] 그러나 어떻게 질서를 자리잡게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제자백가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공자를 중심으로 한 유가들은 인의와 덕에 의한 통치를, 노자를 비롯한 도가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는 도에 의한 통치를, 법가들은 법에 의한 통치를, 묵가들은 겸애 사상에 바탕을 둔 보편적 복지를 주장했다. 또한, 전란의 시대에 대한 해결책으로 아예 통치 개념과 국가 체제 자체를 부정하는, 현대의 반전 평화주의나 아나키즘에 가까운 주장 역시 등장한다. 장자, 묵자[3], 양주 등이 이러한 성향을 가진 사상가들로, 이들의 후학은 제 왕조 직하학사 등에서 활발히 활동하고, 당시의 유가 및 법가 사상과들과 열렬한 비판과 논쟁을 거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전한 왕조의 통일 이후 이들에 대한 기록은 많이 남지 않거나, 상당히 비판적으로 서술된 것만 남게 된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이들에 대해 남겨진 비판적 서술이 춘추/전국시대 당대에 이들이 누린 인기와, 이들의 사상이 가진 특징을 가장 확실하게 알려주는 사료가 되었다. 대표적으로, 맹자의 경우 묵적/양주를 함께 비판하는 텍스트를 남겼는데, 이 텍스트 덕분에 후세의 연구자들은 당대에 묵자의 겸애론과 양자의 위아론이 가진 위상과 그 특징을 확인할 수 있다.
처음에는 상앙, 이사의 법가식 통치에 의해 질서가 잡혀 강성해진 진나라가 통일왕조를 세우면서 법가가 대세를 타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아직 지옥은 끝나지 않았다. 진시황과 이사의 냉혹한 법가식 통치는 백성들의 마음을 얻지 못해 진 왕조와 함께 단명했다. 이후 한나라가 건국되면서 초기에는 도가적 무위 통치가 시행되었으나, 동중서 이후 유가의 관학화를 통하여 중국의 주요 통치 철학으로 자리매김한다.[4] 결국 유학이 춘추전국시대부터 이어진 지옥을 끝장내버리고 질서를 확립하면서, 제자백가중 압도적 우위를 점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중국 대륙의 민중과 심지어 귀족층에게까지 도교가 깊숙이 자리잡고 있다는 증거 역시 매우 많다. 한대 유학의 대세인 동중서의 유학조차도 어느 정도 정치 권력과의 타협 + 유교가 하지 않는 자연세계에 대한 설명을 위해 도교와의 혼합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나라 시기에도 유학은 그 위치가 굳건했으나 이 시기부터 중국이 국제교류가 활발해지면서 불교 같은 외래종교가 유행하면서 새로운 철학계의 경쟁자로 떠오른다.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당나라는 멸망하면서 또 다시 혼돈의 시기가 오자 유학은 위기를 맞이하는 듯 했다. 그러나 송 시기 고전 찾기 운동으로 다시 유가는 부활하기 시작했고 이 시기 유학 역사상 공자와 함께 더불어 유명한 주희주자학을 창시하면서 불교를 주류에서 밀어낸다. 그러나 주희의 주자학은 동시기 심즉리설을 주장한 육상산에게 지나치게 이론적이라는 비판도 받았으며 명 시기에 왕양명도 육상산을 계승한 양명학을 창시하였다.
그리고 청나라가 건국되면서 유교는 형이상학적인 기존 학풍을 버리고 고증학 시대에 접어든다. 하지만 청 말엽 아편전쟁이 벌어지면서 중국 철학은 역사의 격동에 휩쓸리게 된다. 처음에는 '중체서용' 정신으로 개혁하려 했으나 그럼에도 중국은 서구 열강들에게 약한 모습을 보였다. 결국 근현대 중국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유학이 서양 철학에 비해 열등해서 이렇게 된 것이니 유학을 버리고 서양 철학으로 무장하자!!'''는 주장이 퍼지기 시작한다. 소수의 학자들이 유학과 서양철학의 공통점을 찾으며 이것이 지나친 것 아니냐며 반박해보기도 했지만 대세는 거스를 수 없었다. 중국 유학이 다시 재조명을 받는 데에는 긴 세월이 걸렸으며, 무엇보다 일부 사람들은 아직까지도 현재진행형으로 이 주장을 하기도 한다.
한편 중국은 기존의 유학을 폐기하고 중국인들을 이끌 새로운 사상으로 어떤 것이 좋은지 찾기 시작했다. 영미권의 철학자들이 중국에 와서 강연을 하기도 했으나 영국은 아편 전쟁으로 국민 감정이 남아 있었고 당시 중국은 침략받던 현실이였기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키지 못했다. 이때 러시아에서 공산 혁명이 일어나면서 러시아의 공산주의가 중국으로 수입되었고 공산주의의 반제국, 반계급 사상은 당시 중국의 현실과 맞물려 큰 반향을 일으켰으며[5] 소련이 중국과 맺은 불평등 조약을 모조리 파기하는 등 공산주의 확산에 노력을 기울였고 천두슈, 리다지오 등의 적극적인 지지로 공산주의는 중국 지식인들의 중심 사상이 된다. 그리고 결국 국민당과의 전쟁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중국은 공산주의 이념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시대가 온다.
하지만 문화대혁명 등을 거치면서 중국에서는 과연 과거 유학을 무조건 타파한 것이 옳은 것이었나 하는 회의가 나오기 시작한다. [6] 중국 철학계에서는 반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현대의 중국은 과거 자신들이 잃어버렸던 중국 철학을 다시 복원, 연구하고 있다.
여담으로 현대 중국철학은 물론 중국 학문의 중심지는 베이징에 있는 베이징대학이다. 베이징 대학의 위상은 5.4 운동시기에 중심이 되면서 공고해졌고 대부분의 중국 지도자들이 이곳 출신이기도 하다.

2.2. 불교 철학


불교는 석가 족의 왕자인 석가모니가 우파니샤드를 기본으로 기존 브라만 교의 카스트 제도 등을 부정하며 만들어진 종교이다. 초창기 불교는 마우리아 왕조 아소카 왕의 지원으로 인도 전역을 지배적인 종교로 급 성장하고 쿠샨 왕조 시대에 카니슈카 왕의 지원에 힘입어 중앙아시아로 전파된 이후, 상인들의 열렬한 지원에 힘입어 동아시아로도 전파되기 시작한다.
특히 쿠샨 왕조 시절 대승 불교는 과거 출가자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하던 기존 부파 불교를 개혁하여 중앙아시아 유목민들에게 많은 호응을 얻었는데, 이는 5호 16국 시대 중국에 유입된 유목민들도 대승 불교 교리를 적극 받아들이는 요인이 되었다. 유목민 지배자들은 한족이 비한족보다 우월하다는 중화주의를 대체할 목적으로 불교를 적극 보급하였고, 여기에 잦은 전란으로 염세주의 성향이 강했던 당시 한족 지식인들의 불교 교리가 크게 어필하면서 불교는 단순한 외래 종교를 넘어 동양 전통에 한 부분이 되었다. 5호16국시대 이전에는 불교가 주로 장안과 낙양 및 서역 교역로 위주로 점과 선 형태로 퍼져 있었다면, 5호 16국 시대 이후로는 유목민족이 불교를 보급하고 불교를 믿는 한족이 계속 강남으로 남진하면서 불교가 중국 전역에 퍼지게 되었다.
특기할 만한 점은 동양 불교 교리와 철학의 발전은 불경 번역과 함께 발전했다는 점이다. 인도 문화권과 중국 문화권은 단순히 언어만 다른 차원을 넘어 문자 체계도 판이하게 달랐으며, 세속주의 성향의 중국 고대 전통 가치관과 내세지향적인 불교 사이에도 많은 간극이 있었다. 그러나 쿠마라지바현장 법사같은 여러 학자들의 피땀어린 노력을 통해 불경 상당수가 한문으로 성공적으로 번역되면서 교종 불교는 커다란 발전을 이루었다. 이후 교종 불교에 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달마를 중심으로 선종 불교가 발전하면서 중국 불교계의 발전은 중세 쇠퇴 일로를 걷던 인도 불교를 넘어선 고유의 독자적인 발전을 이루게 되었다.
중국 불교의 발전은 이후 화북지방에서는 정복 유목왕조인 요나라 때도 이어졌다. 그러나 중국 강남 지방에서 불교를 대체할 목적으로 유학의 일파인 성리학이 발전되면서 지식인들이 북방 유목민과 밀접한 관계이던 불교를 배척하고 성리학을 숭상하는 분위기가 생기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중국 불교는 지식 계층과 상공업 계층이 선호하던 사상으로서의 위치를 상실하고 민간 기복 신앙으로 전락하였다.
자세한 내용은 교종, 선종, 정토교, 백련교 문서 참조

2.3. 한국 철학


한국[7]은 '''근대 이전'''엔 '''유불선의 강력한 영향'''으로 체계화된 고유 사상이 등장하지 않았으나 '''근대'''에 들어오면서 여러 사상가들에 의해 '''한국 고유의 사상'''들이 꽃 피웠다.
삼국시대가 되면서 고대 왕국이 성립되자 기존의 토속 신앙들을 억누르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불교의 수입이 시작되었다. 또한 노장 사상에서 비롯된 도교 또한 불교와 함께 전래되면서 삼국 문화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8] 물론 삼국시대 말엽부터 유학을 새로운 지배 체제로 하자는 논의는 나왔으나 이미 대부분의 백성들은 불교 신도였기에 이러한 시도는 대부분 무위로 돌아갔고 오랜 세월동안[9] 한반도의 사상은 불교가 지배하였다.[10]
그러나 고인 물이 썩는 법. 불교는 세월이 지나면서 세속화되고 부패해 폐단이 늘어났다. 이에 대해 정치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불교계를 개혁을 하기 위해 의천, 지눌, 요세등의 노력이 있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한편 고려의 유학은 경전을 공부하는 경학보다 글이나 시를 짓는 제술 중심으로 발전해 실천성이 떨어졌으며, 무신정변 이후 유학은 침체기에 들어선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경학 중심의 진흥운동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때 안향에 의해 성리학이 받아들여진다. 고려말에 들어서 유학자들이 정치적 주류로 들어서면서 부패한 불교를 몰아내자는 운동을 시작했고[11] 결국 조선이 세워지면서 불교는 쇠퇴하고 유교 국가가 된다.
조선조에는 유교이념이 체계화 및 정리가 되었으며 성리학이 융성했다. 전기에는 현실 중심의 개혁을 강조한 관학파들과 도학 중심의 인간내면과 현실을 중시한 사림파들에 의해 발전하기 시작한다. 사림파의 집권 이후 성리학은 도학을 바탕으로 인간 본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로 "주자학은 중국에서 나와 조선에서 완성되었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로 많은 성과물을 내었다. 이황의 뒤를 잇는 퇴계학파, 이이 이후의 율곡학파간의 논쟁, 그리고 율곡학파 내부의 여러 논쟁들은 성리학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켰다. 그러나 이는 성리학 이외의 학문이 쇠퇴하게 하는 반작용을 낳기도 하였으며, 이는 양난과 기근으로 시련을 겪었던 17세기에 성리학의 경직화로 두드러진다. 후에 기존 성리학의 지나친 이론화에 의한 경색을 비판한 사상가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15세기에 이미 들어와 있던 양명학을 공부하는 강화학파, 성리학의 실천적 모습을 상실한 것을 비판하며 등장한 성호학파북학파, 그리고 이들의 사상을 종합한 정약용의 등장과 더불어 청의 고증학이 유입되기도 했다.
구한말의 한국의 철학사상은 성리학의 계승을 기치로 내세운 위정척사파개화파, 그리고 그 뒤를 잇는 동도서기과 서구사상의 급진적 수용을 주장하는 변법적 개화론과 더불어, 애국계몽사상과 민족주의적인 신흥종교로 나뉘게된다.

2.4. 일본 철학


일본의 철학사는 중국과 한국의 역사를 비슷하게 따랐으며 한국의 삼국시대에는 백제와 고구려를 통해, 삼국시대가 끝나갈 때는 견수사, 견당사를 보내 중국의 문물을 받아들였고 고려말~조선 중기까지는 왜구의 난리와 임진왜란으로 한반도와의 교류는 소원했으나 임진왜란 후 통신사를 통해 문물을 전해받았다. 메이지 유신 이후로는 동아시아에서 서양 문물을 가장 먼저 가장 활발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일본으로 들어온 사상이나 철학들은 원래의 내용과 매우 큰 차이를 보인다. 예컨데 형이상학적인 주자학에서 일본의 주자학자들은 형이상학적인 부분을 부정했고 맹자에서는 역성혁명 부분을 빼버렸다. 또한 서양 기독교도 일본에서는 원래 기독교 신도들이 보기엔 괴이하게 변질되었다.
이것은 일본이 해외 문물을 받더라도 오리지널 그대로를 받지 않고 일본의 사정에 맞게 그들 특유의 전통신앙과 문화, 사상을 기반으로 외래 문물을 해석하고 변형시켰던 것이다. 오리지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 노력하던 한국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게 좋은 면에선 일본만의 독자적인 수용성을 나타낼 수도 있지만 나쁘게는 원형을 알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된다는 점이 있다. 여기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은 딱히 선악의 가치가 아니지만 일본만의 것으로 변질된 문물은 보편성이 사라지고 일본내에서만 한정적으로 유통될 수 있다는 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중국인도의 영향을 적게 받은 고유 사상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는 것 역시 중요하다. 중세시대엔노 오즈누슈겐도를 설립한 뒤에 그에 영향을 받아 신토도 체계화 되기 시작했다. 허나 이러한 일본의 고유 사상전국시대 즈음 계속된 전쟁으로 발전이 둔화 되었지만 에도 막부 시대때 국학으로써 일본 고유의 사상이 활짝 피게 된다. 허나 국학에는 어쩔 수 없이 국수적인 면이 존재했다. 더군다나 유교식 근왕주의가 이와 결합하여 독자적으로 해석되면서 훗날 일본군국주의화라는 부정적인 측면을 낳기도 했다.
여담으로 한국에서 일본 철학이나 전통 사상[12]을 가르치는 학과가 별로 없다. 철학계에서도 동양철학 하면 중국, 한국, 불교만 가르치지 일본철학은 배울 기회가 별로 없다. 아래의 철학자들 목록에 일본인 철학자가 거의 없는 것도 이러한 현실이 반영되어 있는 셈이다.

3. 인도 철학의 역사



3.1. 브라흐마나 & 슈라마나


인도 문화권 철학은 크게 브라흐마나 계통과 슈라마나 계통으로 구분지을 수 있는데, 브라흐마나 계통의 철학은 브라만 교의 성전인 베다의 권위를 바탕으로 그 뜻을 밝히고 보존, 계승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으며, 슈라마나 계통의 철학은 베다의 권위에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의 노력으로 깨달음을 추구해 나가는 과정에서 형성되었다. 브라흐마나 계통의 사상은 브라만 교의 사제인 브라만 계급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브라만 계급의 특권을 합리화하는 카스트 제도의 계급 질서를 옹호하는 방향으로 나아갔으며, 특별히 엄선된 제자들에게 비의적으로 전수되었는데, 그들의 사상은 베다의 부록인 브라흐마나, 아란야카, 우파니샤드에 나타나 있다. 이에 대해 슈라마나 계통의 사상은 非 브라만 계급 출신의 자유 사상가들의 주도로 전개되었고, 따라서 베다의 권위 및 브라만 계급의 특권에 도전적 태도를 취했으며, 각지를 떠돌면서 여러 사람을 모아 놓고 공개적으로 자신의 사상을 설파했는데, 이러한 흐름의 대표적인 사상가로 아지비카[13]의 선구자인 아지타 케샤캄발라, 자이나교의 개조인 바르다마나(마하비라), 그리고 불교의 개조인 고타마 싯다르타(석가모니) 등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브라흐마나 계통의 사상과 슈라마나 계통의 사상은 공통적으로 종교적, 탈세속적, 출세간적 경향을 나타냈고, 이러한 경향은 인도 철학의 고유한 특징으로 자리를 잡게 된다.
석가모니 붓다가 입적한 후 붓다의 가르침은 경(經), 율(律), 논(論) 삼장으로 결집되는데, 이 과정에서 불교 교단은 상좌부(테라바다)와 대중부의 분열을 시작으로 여러 차례 분열을 겪게 된다. 이들 부파들은 제각각의 삼장을 갖추고 있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팔리어로 기록된 상좌부 불교의 삼장(니카야)이다. 초창기 부파불교는 출가자와 평신도를 엄격하게 구분하고, 출가자만이 열반이 가능하며, 평신도는 여러 차례 환생을 거치고 출가자가 되고 나서야 열반이 가능하다는 입장이었다. 출가 수행 문화에 익숙하던 인도인들에게는 이런 교리가 별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었으나 중앙아시아에서 인도로 새로 유입되던 유목민 및 인도-그리스 왕국 출신 그리스인들에게는 불교 진입에 큰 장벽이 되었다. 대승 불교는 출가자와 평신도 사이의 차등 계율을 완화하고 평신도의 열반, 성불 가능성을 인정하면서 진입 장벽을 낮추고 중앙아시아 여러 민족들에게 활발한 포교를 시작하였다.
불교 부파들 가운데 특히 사상적으로 두드러진 업적을 남긴 부파는 카슈미르를 중심으로 중앙아시아에서 유행하던 설일체유부로서, 이 부파의 논사들은 "발지론", "아비달마대비바사론", "아비달마 구사론" 등 주요 논서를 저술했다. 이들은 대체로 '무아(無我)'를 인정하면서 법(法)의 고정 불변성, 실재성 또한 인정하는 경향을 나타냈는데, 이러한 경향은 자연히 교리의 배타성, 경직성으로 이어지게 된다. 사실 팔리어 경전의 가르침을 그대로 따르자면, 법은 끊임없이 변화한다. 그러면서 상속한다. 따라서 이런 논쟁이 벌어질 이유도 없다. 법은 연기하면 상속한다. 이 점은 언제나 불교의 핵심 가르침이었다. 다만 역사적 상황에 따라 종파들이 강조하는 점이 조금씩 달라졌을 뿐이다. 아래 서술한 용수 역시 법이 너무 강조되는 점을 비판하기 위해 무아, 공을 강조했던 것이다.
이에 2~3세기 경 나가르주나(용수)는 당시 흥기한 대승불교의 흐름에 따라 자아는 물론 법 역시 고정적으로 존재하지 않으며 자아니 법이니 하는 것들은 어디까지나 이름으로써 가립된 것(名言所立)에 불과하다는 이른바 절대적 공(空) 사상을 주장함으로써 대승 불교의 이론적 바탕을 정립했다. 이후 바수반두(세친)는 나가르주나의 절대적 공 사상을 발전시켜 마음 밖에 그 어떠한 실재도 존재하지 않으며 오직 마음이 유일한 실재라는 유식(唯識) 사상을 정립한다. 바수반두 이후 인도 불교는 니야야, 상키야, 미망사 등 브라만 교에 기초한 사상들의 도전에 맞서 치열한 논쟁을 전개했고, 디그나가(진나) 등 탁월한 논사들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결국 몰락의 길에 접어들게 된다. 그리고 밀교로서 명맥을 유지하던 인도 불교는 10세기 이후 이슬람의 침입에 결정적인 타격을 받아 인도에서 자취를 감추게 되지만 불교와 경쟁하던 자이나교는 밀교화를 피하고 현재도 인도에서 살아남았다. 슈라마나 철학이 발전은 자이나교 존속에 국한되지 않고 이후 이슬람의 영향을 받아 인도 펀자브 지방에서 시크교가 발생하는데 영향을 준 것은 물론 중앙아시아와 인도의 수피 철학과 교단 구성에도 많은 영향을 준다.

3.2. 힌두교


한편 브라만 교는 불교와 자이나 교의 도전에 직면하여 대대적인 혁신을 단행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쉬바 신앙과 남근(링가) 숭배, 요가 등 드라비다 민간 신앙적 요소들이 브라만 교에 편입되었고, 인도의 고전 서사시인 "마하바라타"의 일부분인 '바가바드 기타'가 경전으로 승격되었다. 따라서 브라만 교는 인도아리아인의 민족 종교적 성격에서 탈피하여 범 인도적 종교인 힌두교로 개편되기에 이른다. 힌두교의 사상가들은 이전의 비의적 방식에서 탈피하여 공개적 방식으로 가르침을 설파하는 한편, 불교, 자이나 교 및 브라만 계열의 다른 학파들과 논쟁을 벌임으로써 그들의 이론적 허점을 공격하고 자신들의 이론의 우월성을 선양하고자 했는데, 이때 등장한 대표적인 학파들이 카필라의 상키야(수론), 파탄잘리의 요가, 가우타마의 니야야(정리론), 카나다의 바이셰쉬카(승론), 자이미니의 미망사(성론), 바다라야나의 베단타로서, 이들을 한데 묶어 육파 철학이라고도 한다. 니야야와 바이셰쉬카는 이들 육파 철학 가운데 형이상학적으로 다원론적, 원자론적 경향을 대표하며, 이성적 추론을 통해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보고 그에 따라 정교한 논리학을 개발했다. 한편 상키야와 요가는 세계는 다수의 자아(푸루샤)와 단일한 원질(프라크리티)의 결합으로 생성되며, 자아는 원질로부터 파생된 지성(붓디)을 통해 외부 대상을 인식하게 되는데, 이 지성이 이그러지거나 혼탁해지면 대상이 있는 그대로 인식될 수 없으므로, 요가 수행을 통해 지성을 항상 맑고 교요한 상태로 유지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미망사는 형이상학적, 인식론적 바탕을 니야야, 바이셰쉬카와 대체로 공유하지만, 신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 및 유사성의 원천을 과거 및 전생의 경험이 아닌 선험적인 보편상에서 찾는다는 점 등에서 서로 구별된다. 베단타는 유일무이한 궁극적 실재인 브라흐만으로부터 현상 세계가 산출되었다는 일원론적 형이상학에 바탕을 두고 있는데, 이러한 브라흐만과 현상 세계의 관계를 어떻게 설명하는가에 따라 샹카라의 절대적 일원론과 라마누자의 제한적 일원론으로 구분된다. 샹카라는 불교의 유식 사상을 수용하여 브라흐만을 고정 불변하며 어떠한 작용을 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고 현상 세계를 브라흐만의 환영에 불과하다고 보는 반면, 라마누자는 브라만 교의 전통적인 전변설에 기초하여 브라흐만을 세계의 궁극적 원인으로 간주하고 현상 세계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산출되어 나온 것으로 본다. 이들 학파들은 서로 자신들이 베다, 브라만 교 사상의 이론적 정통임을 강조하면서 브라만 교의 다른 학파들 및 불교 등 비 브라만 사상과 논쟁을 별였으며 그 결과 니야야는 바이셰쉬카와 연합하고 베단타는 상키야, 요가, 미망사를 흡수한다.
라마누자 이후의 베단타 철학은 종교적 색채가 한층 강화되면서 철학이라기 보다는 힌두교 신학에 가까운 양상을 나타내게 된다. 게다가 불교가 인도에서 사라진 후 이슬람이 침입하여 그 빈 자리를 대체하게 되는데, 이들은 비록 무력으로 인도를 정복했지만, 정교한 교리보다 독실한 신앙을 강조하는 종교적 특성상 불교와 같은 이론적 철학적 파괴력을 몰고 오지 못했다. 힌두교 신앙은 비슈누 신앙과 쉬바 신앙이 대표적인데 쉬바 신앙은 비슈누 신앙에 비해 대중적이었으나 철학적으로 그다지 두드러진 활동을 나타내지 못한 반면, 비슈누 신앙은 비록 대중적이지 못했으나, 마드바, 님바르카, 발라바, 차이탄야, 라마크리슈나 등 걸출한 사상가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라마난다, 카비르 등의 사상가들은 힌두교 전통을 거부하고 이슬람의 유일신 사상과 샹카라의 절대적 일원론을 절충하여 힌두교와 이슬람교의 회통을 도모했고, 이러한 정신은 시크교의 개조인 구루 나나크 및 무굴 제국의 왕자였던 다라 쉬코에 계승되었다.

3.3. 근현대


이후 영국이 인도에 침입하여 쇠퇴기에 접어든 무굴 제국을 꼭두각시로 만들고 강성한 시크교국과 마라타 동맹마저 제압한 데 정신적 충격을 겪게 된 인도의 사상가들은 힌두교의 개혁을 두고 서구화와 전통의 사이에서 진지하게 고민하게 되는데, 람 모한 로이는 서구 문화를 수용하여 힌두교 전통을 개혁하고자 했던 반면, 다야난다 사라스와티는 힌두교의 개혁이 서구화가 아닌, 전통을 재발견함으로써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고대에 인도로부터 불교가 유입되었던 스리랑카의 경우 싱할리족이 주로 믿는 상좌부 불교가 영국계 기독교 선교사들에 의해 의협을 받있으나 파아나두라 대논쟁에서 상좌부 불교계가 기독교 선교사들을 논파하면서 불교의 부흥이 이루어졌다. 일본 불교계 역시 파아나두라 대논쟁에서 불교계의 승리에 고무되었으며 이는 상좌부 불교 경전과 교리가 일본에서 연구, 재해석되는 계기가 된다.
영국의 식민 지배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인도 민족주의는 마하트마 간디와 자와할랄 네루에 의해 발전되었는데, 간디는 영국 식민 지배로부터 해방을 인도 철학이 전통적으로 지향해 왔던 해탈과 연결시킴으로써 정치적 자유와 정신적 자유를 동시에 추구하고자 했다. 그 밖에 라마크리슈나의 제자인 스와미 비베카난다, 인도의 시성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슈리 오로빈도 고슈, 인도 대통령을 역임한 라다 크리슈난 등이 근대 인도의 주요 사상가로 꼽힌다. 그리고 인도의 초대 법무장관을 역임한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는 만년에 인도에서 오랫동안 그 명맥이 단절된 불교를 서구식 무신론,불가지론과 결합시키며 현대화인 방향으로 부흥시키는 운동을 폈다.
[1] 물론 중국 역시 왜? 라는 의문을 중시한 학파들이 있으나 학살이 벌어지고,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판국에서는 아무래도 설득을 얻기 어렵기 때문에 사그러들고 말았다. 이후에도 이런 경향은 부의 축적, 과학과 기술의 발달, 아름다움의 추구 등에 대해서, 그래서 그것들이 선하고 어진 것보다 중요하느냐? 사람들의 풍속에 그런 거 필요없다! 하는 물음과 주장을 던져 데꿀멍시키게 만드는 흐름으로 나타난다.[2] 이러한 현실적 이유 때문에 이 시기 철학들은 인식론이나 형이상학보다 윤리학, 사회 철학에 더 전문성을 보인다. 또한 매우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문제점에서 출발했다보니, 이들의 서적은 기초적인 배경지식만 갖춰진다면, 2000년 전의 서적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읽기가 쉽다.[3] 다만 묵자의 경우는 다분히 공동체주의적인 면모를 띠기 때문에, 아나키즘적이라고 해석하기에는 껄끄러울 수도 있다. 애초에 묵가 후학들 중 법가와 함게 율령을 정비하는 쪽으로 간 사람들도 있고, 묵가가 주장한 '보편적 복지'는 법가와 유가에서 어느정도 받아들이고 흡수하였으며, 묵가의 겸애론은 양주의 위아론과는 정반대의 방법론을 취한다. 물론 둘 다 국가주의에 대한 저항을 표한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하지만 논리학파의 사공파로 분파된 뒤 사공파는 다시 전도파와 실행파 등으로 이어지는데 실행파는 묵자의 역행주의를 이어 허행과 진상 등은 철저한 무정부주의를 주장했었기 때문에 앞서 작성한 위키러의 주장에서 아나키즘적이라고 해석하기에 껄끄러울 수도 있다는 주장은 전적으로 맞지 않다.[4]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의 기록과, 사마천 본인의 사기를 대조하면 이 헤게모니의 변화를 간단히 알 수 있다.[5] 이건 중국뿐 아니라 대부분의 식민지배를 받은 국가들에게서 일어났던 현상이다. 한국도 마찬가지로 이 시기 공산주의 세력이 커진다.[6] 다만, 확실한 근거보다는 그냥 뜬소문 같은 이야기일 뿐이다. 실제로 서양은 중국/인도철학등에 대해 평가 이전에 별 관심이 없으며 애초에 자료가 부족하다. 몇개 없는 중국고전 철학 번역서의 번역도 그야말로 왈도체 수준인것이 많으며, 어떤 서양철학자는 자신들이 중국/인도철학등에 대해 별로 관심이 없는 가장 큰 이유가 언어차이라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7] 이는 현재 대한민국만이 아닌 한국 전체 역사를 말한다.[8] 고구려 고분 벽화에서 볼 수 있는 청룡이나 주작 등에서 도교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9] 고구려 소수림왕 때 불교를 받아들이고 공인한(372년) 이후 숭유억불을 내세운 조선이 건국될 때(1392년)까지 무려 1천년이 넘는다.[10] 고구려 말에 연개소문에 의해 도교를 국교화하기 위해 당나라의 힘을 빌려 도교를 강화하려 했지만, 이에 반발한 승려들은 고구려를 떠나버렸다.[11] 이때 승려들의 부패는 만만찮은 수준이었다. 신돈에 대해 20세기까지 민간에 퍼져 있던 야사를 생각해 보자[12] 대학에 따라 메이지 유신 이후 들어온 서구 철학과 그 이후 영향을 받은 사상만을 철학이라고 하며 일본 전통사상과는 따로 구분한다. 크게 교토대파와 도쿄대파로 나뉜다.[13] 불전에서는 사명파(邪命派), 사명외도(邪命外道)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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