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이펑 유대인

 



1. 개요
2. 역사
3. 역사학계의 연구
4. 이스라엘의 반응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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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중국 허난성 카이펑에 수백년간 존재했다고 알려진 유대인이다.

2. 역사


여러 기록이나 정황으로 보아 북송 때부터 카이펑에 살기 시작해 적어도 말기까지는 존재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카이펑에 살던 유대교도들의 선조는 중앙아시아에서 건너온 것으로 추측된다. 또한 카이펑 유대 회당 비문에 기원전 108년, 전한 무제때 국경을 넓히기 위해 간쑤성에서 파견된 페르가나 일대로 파견된 이광리 장군과 그의 군사들에게 발견되었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1]
1054년 송나라에선 경제권을 움켜쥔 이방인을 대거 학살한 기록이 있는데, 이들이 돼지고기를 전혀 안 먹고 괴이한 촛대를 신성시한다는 기록으로 보면 누가 봐도 유대인들이다. 또한 1163년 우스타드 레위가 쉬나고그(유대교회당)를 건설했다는 기록도 있다.[2]
명나라 황제로부터 , , , , , , 의 7개의 성을 하사받았다고 하는데 이는 유대인들에게서 흔히 보이는 성인 에즈라, 시몬, 코헨, 길버트, 레비, 조슈아, 조나단을 한자로 옮긴 것이다.
중국에 유대인 공동체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서구세계에 알린 것은 17세기 예수회 선교사인 마테오 리치로 알려져 있다. 1605년, 마테오 리치는 카이펑 출신의 애전(艾田)이라는 60세 노인을 만났는데[3] 애전은 자신이 유대교를 믿고 있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카이펑에는 이들의 존재를 증명하는 걸로 보이는 비석이 몇개 발견되었는데 이들은 스스로를 이츠러예(一賜樂業:이스라엘)족이라 일컬었다 하며, 그중에는 유대인들이 악비의 휘하에 들어가 군과 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이 유대인들은 카이펑이 금에게 함락될 때 조구(남송의 송고종)를 수행해 임안(항저우)까지 내려가 임안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살게 되었다고 한다. 카이펑의 유대인들은 명대까지 번성했으나 명말청초의 혼란기에 세력이 많이 약화되어 결국은 중국인[4]에 흡수되었다고 한다. 다만, 그 이후에도 극히 일부가 그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현대까지 내려왔는데, 이들은 현재 자기들이 후이족의 일부로 분류되는 것에 불만이 있으며, 자기들을 별도의 민족으로 분류해달라고 요구하고 있다. 한국어 위키백과카이펑 유대인 문서를 참조하길 바란다.[5]
사실 오늘날까지 유대교 신앙을 유지한 사람들도 에도 막부 시기 일본가톨릭 신자들의 후예인 카쿠레키리시탄처럼 이스라엘 본토의 유대인들이 이질감을 느낄 만큼, 율법이나 생활상이 심하게 변형되어있다. 하지만 일본가톨릭 신자들보다 더 오랜 기간동안 존속해있으면서[6], 타국의 유대교 커뮤니티와 단절된 채로 살았던 까닭에 그나마 기독교인이었다는 흔적이라도 남은 카쿠레키리시탄과는 달리 유대인으로서의 특징이 거의 없어진 것이다.[7][8][9]
종교 단체에 대한 중국의 광범위한 단속 범위가 카이펑(開封)시의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에까지 미쳐, 카이펑에는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심이 짙게 깔렸다.
중국 공산당, 카이펑 소규모 유대인 공동체를 침묵시켜 Bitter Winter, 2019.01.20 타이 조플린(Ty Joplin)

3. 역사학계의 연구


일부에서는 카이펑의 유대교도들이 주작의 산물이라는 주장을 펴기도 한다. 정확히는 유대인이 유입된 적이 없었다는 주장이 아니라, 조상만 유대인이지 중세에 이미 혈통, 문화가 완전히 동화되어서 발견 당시 기준으로는 더 이상 유대인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다는 주장. 그러나 중국에 사는 유대인들이 중국인들과 결혼해 외양은 중국인이지만 여러 풍습으로는 실제로 유대교적인 풍습을 고수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작되었다는 설은 지나치다는 반론도 있다. 또한 근현대에 와서는 상기했듯 중화인민공화국이 유대인을 공식 소수민족으로 인정하지 않고 소수자 집단에 대한 탄압이 강하다 보니, 불이익을 피하기 위해 유대계라는 사실을 숨기는 경우도 있고 해서 함부로 단정하기는 어렵다는 의견도 있다.[10]
중국 사학계의 최신 학설에 따르면 이들은 송나라가 아닌 원나라가 서역에서 색목인들을 데려오면서 같이 중국에 들어온 페르시아계 유대인들이라고 한다. 이후 원나라를 멸망시키고 들어선 명나라가 색목인들을 원나라가 들여온 이방인 취급하면서 탄압하고 강제 동화정책을 펴자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원나라가 데려온 이방인이 아니라고 주장하기 위해 중국에 들어온 연대를 송나라에서 한나라 시대까지 앞당기는 기록들을 만들어놓았다는 것. 물론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당나라 시기 이후로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중동 지역과 활발한 교류를 해왔기 때문에, 원나라 이전에도 중국 땅에 유대계 이주민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된 바는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이전까지는 일시적인 방문이나 극소수 인원의 정착만 있었을 것이며, 중국의 역사학자들은 소수민족으로 분류될 만큼 대규모로 이주한 건 훨씬 이후의 일로 추정하고 있다.[11]

4. 이스라엘의 반응


이스라엘에서는 어느 정도 사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조상이 중국에서 살았다던 에후드 올메르트 전 이스라엘 총리도 이 점을 거론하며 오래전부터 중국과 이스라엘은 우방이라며 아랍 문제 및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중국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고자 많이 어필했다. 또한 이를 이용해 중국에 군사기술을 팔아먹는 것은 덤이다.
[1] 고고학적으로 밝혀진 바로는 이란 동부와 아프가니스탄 일대에 규모 있는 유대인 공동체가 정착한 시점은 서기 4세기 무렵이다.[2] 참고로 우스타드는 페르시아어로 헤브루어의 랍비와 같은 의미.[3] 몇몇 기록에는 청년이라고 되어 있지만 실제 해당 인물의 과거 급제 기록 등을 보면 노인이었던 게 맞다.[4] 주로 같은 아브라함 계통의 종교이슬람교를 신봉하는 회족.[5] 링크된 문서에 따르면, 카이펑 유대교도들 중에서 석씨(시몬)가 그나마 유대교 율법을 잘 준수하는 편으로, 돼지고기를 아예 안 먹는 것은 아니지만 돼지 뒷다리나 둔부의 힘줄은 먹지 않으며, 유월절양고기를 삶고 의 피를 바른다고 한다. 나머지는 유대인이라는 자각만 간신히 있을 뿐이다.[6] 일본기독교 역사는 중세가 거의 끝나가던 센코쿠 시대 중반에나 시작됐는데 반해, 카이펑의 유대교도들은 최소 송나라에서 원나라 때부터 중국에 있었다.[7] 현재 남아있는 카이펑 유대인들의 모습을 보면, 한족과 전혀 구분이 안 된다. 다만, 이건 타국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로, 서유럽유대인들인 아슈케나지나, 이스라엘토착 유대인, 에티오피아 유대인이나 인도 케랄라 주의 유대인들도 각각 유럽인, 아랍인, 암하라인케랄라인들과 외양상 전혀 차이가 없다.[8] 사실 카이펑 유대인들이 근대 이후에도 원래의 정체성을 회복하지 못한 이유로는 유대교가 일정한 종교지도자 직위도 없고, 종교적 구심점 역할을 하는 기구도 없다는 것이 매우 크게 작용했다. 가톨릭은 옛날부터 교황이라는 구심점이 존재했고, 이를 바탕으로 세계 각지에 엄청난 교세를 확보했으므로, 일본카쿠레키리시탄들의 대다수는 수백 년의 세월이 지났음에도 무난히 가톨릭으로 원복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유대인들이 개화기를 맞았을 당시는 이스라엘이 건국되지 않았을 때였다. 당연히 유대교 커뮤니티들이 종교적인 구심점도 없이 점조직화된 상태여서 교세도 별 볼 일없었고, 심지어는 타 종교의 박해를 받기도 해서, 모처럼 자신들의 존재를 세간에 드러내도 원래의 유대교로 원복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처지였던 회족이 칼리파라는 구심점 덕분에 각종 탄압에도 불구하고 이슬람교 신앙을 계속 유지해온 것과는 대조적이다.[9] 유럽의 사례이긴 하지만 폴란드정교회 신자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폴란드 제2공화국, 폴란드 인민 공화국에 의해 박해를 당하는 와중에도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라는 구심점 덕분에 어렵게나마 정교회 신앙을 대대로 유지할 수 있었다.[10] 참고로 혈통이 섞였는지의 여부는 사실 중요하지 않다. 동남아 각지에서도 유대인을 자부하는 이들이 있는데 6망성 및 촛대를 신성시하며 돼지고기를 먹지 않고 있다. 그 밖에도 에티오피아 등지의 흑인계 유대인도 상당히 큰 집단이다. 사실 세계 각지에서 발견되는 유대인 후예들을 보면 현지의 타 민족과 혼혈하여 현지인들이랑 같은 외견을 하고 있는데, 당장 아슈케나짐도 중부 유럽인들과 그리 다르게 생기지 않았다. 실제 현대의 유대인의 기준은 '''유대교를 믿으면 유대인'''이라고 보면 된다.[11] 실제로 원나라 시기는 동북아시아에 중동계 이주민들이 대거 유입된 시대이기도 했다. 카이펑 유대인의 조상인 페르시아계 유대인 이외에 아랍계, 페르시아계, 튀르크무슬림들이 대거 유입되었는데, 이들은 원명 교체 시기를 거쳐 한족에 동화된 뒤에 오늘날의 후이족의 조상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