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르기스스탄/역사

 




1. 개요
2. 고대
3. 중세
4. 근세
5. 근대
6. 현대


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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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니세이강 유역에서 기원한 키르기스인 및 중세에 키르기스인이 이주하게 된 오늘날에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사를 다루는 문서
키르기스인은 유목민족에 관한 중국 최초의 기록에서부터 등장하고, 그 이후 역사 기록 속에서 끊임없이 등장하나, 단 한 번도 유목제국을 건설해보지 못했고, 그럼에도 나타났다 사라진 수많은 민족들과 달리 끝까지 살아남아 현대에까지 그 이름으로 국가를 세운 민족.
키르기스인들의 조상은 원래 시베리아 중부 예니세이 강 상류 삼림지대에서 수렵민 집단으로 생활해 왔다. 이 중 중세에 중앙아시아로 이주한 집단은 오늘날의 무슬림 키르기스인이 되며 러시아의 하카시야 공화국에 잔류하거나 만주로 이주한 이들은 하카스인이 된다. 과거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의 원주민은 인도-유럽어족 유목민, 정확히는 샤카족(스키타이계) 유목민이었다. 당나라 기록을 참고하면 서기 7세기 무렵에도 이 지역 주민 대부분은 적발녹안이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2. 고대


고대 중앙아시아 지역에는 아케메네스 왕조헬레니즘 제국의 지배를 받던 스키타이의 일파 마사게타이족 및 그 동쪽의 샤카족, 토하라인[1]인도유럽어족 유목 민족들이 주로 거주하였다. 인도유럽어족의 청동기 문화인 안드로노보 문화와 아프로시브 문화가 동부로 진출하면서 인도유럽어족 백인종과 예니세이어족우랄어족[2] 황인종 민족들 간의 통혼이 이루어진 것으로 밝혀졌다. 튀르크어족[3]들은 스키타이로부터 기마 유목 문화를 받아들인 후 계속 서진하여 에프탈돌궐 제국 등을 건설하였다. 돌궐 제국을 건설한 튀르크인이나 철륵인이나 같은 튀르크어족으로 정치 연맹체만 달랐을 뿐 많은 공통점을 공유했다.
키르기스인은 한자 기록에서는 주로 '''견곤(堅昆)''' 혹은 '''격곤(鬲昆)'''이라는 이름으로 표기된다. 가장 이른 기록은 사기 흉노열전의 기록인데, 기원전 209년에 흉노의 묵특 선우가 아버지 두만 선우를 죽이고 권력을 장악한 뒤 주변 유목집단들을 병합해 나가는 과정에서 북쪽 바이칼 호 방면으로 혼유, 굴사, 정령, 격곤, 신려 등을 복속했다는 내용에서 등장한다. 기원전 60년 흉노허려권거 선우가 사망한 이후 흉노는 동서로 분열하였는데, 동흉노의 호한야 선우내몽골로 내려가고, 외몽골에 남았던 서흉노의 질지골도후 선우는 북방 여러 민족들을 정복하고 다녔다. 이때 오걸의 군대를 동원해서 격곤을 격파했다는 기록에서 다시 한 번 등장한다.
오늘날의 키르기스스탄 땅에는 당시 샤카족 계열 유목민 오손이 거주했다. 기원전 2세기 무렵 월지가 흉노 연맹에 패해 서쪽으로 이주했으나 오손에게 밀려 박트리아로 남하하였다 한다. 서기 5세기 무렵 에프탈 이른바 백흉노족이 이들을 흡수,정복하고 다시 박트리아 일대로 남하하였다.
이후 오호십육국시대선비가 강성해지자 선비에 복속하였고, 남북조시대에는 유연에 복속하였다. 돌궐이 등장한 이후에는 돌궐에 복속되었는데, 돌궐의 3대 무한 카간 때 "서쪽으로 에프탈을 격파하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패주시켰으며 북쪽으로는 키르기스를 병합하여 새외의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는 《주서》(周書)의 기록에서 이를 알 수 있다. 이를 전후하여 6세기 무렵부터 일찍이 튀르크화되었다. 돌궐이 당나라에 의해 멸망한 이후에는, 646년 당에게 '''격곤 도독부'''라는 이름으로 복속되어 기미지배를 받았다. 이후 돌궐 제 2제국 시기에는 일테리시 카간에 의해 격파당하고 복속되었다. 위구르 제국이 돌궐 제 2제국을 멸망시키고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등장하자, 다시 위구르에 복속되었다.

3. 중세


위구르 카간국의 알프 빌게 카간이 사망한 뒤 위구르 제국 내부의 권력 다툼 와중에, 840년 카사르 테긴 카간과 대립하던 한 수령이 키르기스인들을 불러들였고, 키르기스 군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들어와 카간을 살해하고 위구르 제국의 수도를 점령한 뒤 약탈을 자행함으로써 위구르 제국을 멸망시켰다. 하지만 키르기스인들은 이를 대신하여 새로운 제국을 건설하지 못하고, 다시 자신들의 땅(예니세이 강 상류)으로로 돌아갔다.[4] 키르기스인들이 위구르의 중심지를 약탈한 뒤 몽골 고원을 버리고 떠난 것은 그 이후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키르기스의 약탈로 다수의 위구르인들은 몽골 고원을 이탈하여 남쪽과 서쪽으로 이주하는데, 이중 남쪽으로 간 위구르인들은 항복하지 않고 물자를 요구하다가 당군에 의해 학살당해 사라졌고, 방테긴의 지휘 하에 서쪽으로 간 무리 중 일부는 하서회랑에 들어가 하서회골을 세웠으며, 다른 일부는 더 서진하여 고창회골을 세웠다. 이러한 위구르인의 이주는 동투르키스탄, 더 나아가 중앙 유라시아의 튀르크화에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위구르 멸망 이후, 위구르인들은 몽골 고원밖으로 뿔뿔이 흩어지고 키르기스인들 마저 예니세이 강 상류로 돌아가버리자, 몽골 초원에는 힘의 공백이 생겼고, 이에 따라 위구르 제국의 동북부 변경지역에 살던 타타르 부족, 그리고 '몽올실위' 등 몽골계 집단이 몽골 초원 중심부로 이주해들어왔다. 몽올실위는 '몽골'이라는 이름이 역사상 최초로 알려진 사례인데, 바로 여기에서 칭기즈 칸이 출현했다. 즉, 키르기스에 의해 초래된 힘의 공백에 의해, 몽골계 부족들은 비옥한 몽골 초원에 진입할 수 있었고, 칭기즈 칸과 그 후손들의 정복활동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5]
중세 키르기스스탄의 도시 발라사군은 늦어도 서기 8세기 무렵 소그드인에 의해 건설된 교역 거점 도시로 카를루크, 카라한 칸국의 수도였다. 서요야율대석 역시 이 도시를 정복한 후 크질오르도(견고한 야영장)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고 수도로 삼았다.

4. 근세


1207년 칭기즈 칸의 통일 몽골에 의해 복속되었다. 1260년 몽케 칸의 사망 이후 쿠빌라이 칸아리크부카의 칸위 계승 전쟁에서 아리크부카가 키르기스로 피난하기도 하였다. 15세기 전반에는 오이라트의 지배를 받았던 것으로 보이며, 현재의 키르기스스탄의 위치인 천산 북방으로 언제 이주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러시아 제국의 동양학자인 바실리 바르톨트는 오이라트가 모굴 칸국과 전쟁을 할 때 키르기스도 동참하여 모굴리스탄으로 왔다가 1470년대에 전쟁이 끝난 뒤 그대로 남은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러나 키르기스인들의 유명한 서사시 『마나스』에는 이들이 '칼미크에센 칸'의 공격과 학살에 직면하여, 고향을 떠나 천산 지방으로 이주했다는 내용이 보인다. 즉, 키르기스인 본인들의 기록에 따르면 1440~50년대 에센 칸 치하 오이라트의 압력을 피해 지금의 위치로 남하가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이후 키르기스인은 미르자 하이다르의 『라시드사(Tarikh-i-Rashidi)』의 야르칸드 칸국의 압둘 라시드 칸에 의해 공격을 주고 받았으며, 백산당 지도자인 호자 부르한 앗 딘과 호자 야흐야가 바다흐샨 산지로 도주했을 때 그곳에서 유목하던 키르기스인에 의해 피살되어 건륭제에게 수급이 인도됐다는 기록도 등장한다. 준가르 칸국은 키르기스인 전쟁 포로들을 잡아 농노로 이용하거나 요새를 축조하는 노동을 시켰는데 이들은 준가르 칸국 멸망 이후 해방되어 위구르인과 동화되었다. 청나라는 준가르 칸국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키르기스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키질수 지역을 정복하였고, 해당 지역의 키르기스 유목민들은 청나라의 신민으로 편입되었다.
준가르족들이 청나라의 학살로 사실상 멸족당하자, 청나라가 장악하지 못한 준가르 칸국 서부 영토를 두고 키르기스인들과 카자흐인들 사이에서 여러차례 접전이 벌어졌다. 하지만 통일된 부족 연합체를 이루지못한 키르기스 부족들은 카자흐인들과의 전쟁에서 힘이 소진된 이후 코칸드 칸국에게 차례로 병합당하기 시작했다. 페르가나 계곡 일대의 키르기스 부족들은 청나라에 편입된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코칸드 칸국에게 합병당하였다.

5. 근대


1864년 신강무슬림 봉기 시기에도 많은 키르기스인들이 휘말렸는데 카슈가르 지역에서 키르기스의 수령 시디크와 퉁간(Tungan)[6]들이 연합하여 봉기한 후 코칸트에서 백산당계 호자 부주르그를 초치하였다.
이후 얼마 안가 중앙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던 러시아 제국에 코칸드 칸국을 비롯한 키르기스스탄 전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 제국은 여세를 몰아 위구르인 봉기가 일어난 신장 지역의 동부 영토 상당부분을 병합하였고, 1881년 청나라와 러시아 제국 사이에 체결된 상트 페테르부르크 조약을 통해 해당 지역의 영유권을 인정받는다. 이를 통해 과거 야쿱 벡 정권 이전 청에 귀속되었던 키르기스인 상당수가 러시아 제국에 귀속되었다.

6. 현대


러시아 제국 투르키스탄에 속하게 된 키르기스스탄 일대는 러시아 혁명 이후에는 소련의 지배에 들어가게 되었으며 1936년부로 키르기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들어선다. 스탈린 대국처럼 키르기스스탄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는데, 1937년 스탈린에 의하여 민족주의 인사 137명이 학살당해 비밀리에 매장되는 일이 있었다. 이들의 시신은 1991년에서야 발굴되었는데, 키르기스스탄의 경우 몇몇 목격자가 계속 입으로 그 장소를 알렸다가 소련에서 독립하자마자 시신을 파내고 성지화했다. 20세기 중반에는 중국 내 문화대혁명대약진 운동의 여파로 중화인민공화국 내 키르기스인 상당수가 소련 영토로 탈주하였다.
1991년 소련에서 독립한 후 2005년 튤립 혁명이라 불리는 민주화 혁명으로 아스카르 아카예프 독재정권이 축출되고 쿠르만베크 바키예프가 대통령이 된다. 2008년 지진이 일어나 69명이 사망했다. 하지만 이 당시 보여진 정부의 무능한 대비와 여전히 비리가 넘치는 현실. 그리고 우즈베크인들이 대거 와서 경제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에 여론이 분노하였다.
결국 2010년 4월 7일, 바키예프의 오른팔이었던 로자 오툰바예바의 주도 하에 다시 민중봉기가 일어나 열두 시간 만에(...) 바키예프 정부가 뒤집어지고 대통령은 망명했다. 더불어 두 달 후인 6월, 남부 지방 대다수 키르기스인들이 우즈베크인들을 마구 집단공격하면서 우즈베키스탄과 갈등이 크게 벌어졌다.
2010년혁명이후 헌법 개정을 통하여 중앙아시아 국가로는 최초로 의원 내각제를 도입하였다. 여성 임시 대통령 로자 오툰바예바는 이후 각종 평화상을 수상한다.
2011년 12월 1일, 중앙아시아 최초의 민주적인 절차를 거친 대통령 선거로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그러나 대통령은 명예직에 가깝고, 총리가 행정 관련 업무와 모든 권한의 위임 등을 차지하고 있는 내각의 실질적인 수장이다.
2015년 5월 1일에는 경제부 장관을 역임한 바 있는 테미르 사리예프가 총리로 취임하였다. 2016년 4월 13일 총선에서는 독립당과 소론바이 젠베코프가 이김으로써 정권 이양을 했으며 그는 전 총리의 실권을 그대로 물려 받아 실질적인 의회의 수장이 되었다.
2016년에, 2010년에 작성된 헌법 원본이 사라지는 소동[7]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가 2016년 12월 11일에 치러진 국민투표로 개헌이 통과됨에 따라 자신의 임기 연장을 노리려고 한다는 것이 점점 우려되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2017년 대통령 선거에서 아탐바예프 대통령은 출마하지 않았고, 같은 당 소론바이 젠베코프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2017년 12월 1일부터 임기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후에 알마즈베크 아탐바예프 전 대통령과의 갈등이 있더니 2019년 8월에 전격 체포하였다. 이후 재판에서 징역 11년형을 선고했다. 이후, 하술하게 될 사건 의해 석방되었다.#
2020년 10월 4일에 총선에서 집권 여당이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유럽안보협력기구(OSCE)에 의하면 선거가 후보자들이 자유롭게 선거운동을 하는 가운데 치러졌으나, 유권자 매수가 심각하게 이루어졌다고 밝혔고, 야당 측 참관인들은 투표소로 유권자들을 미니버스로 실어나르거나 투표소에 범죄단체를 동원해 야권 참관인을 공격하는 등의 부정 행위가 있었다고 주장하였다.# 총선 직후 야권에 의해 선거 과정의 부정을 규탄하는 반정부시위가 발생하여 시위대가 대법원과 의회를 점령해 방화로 1명이 사망했다.##
2020년 10월 6일 키르기스스탄 중앙선관위에서 선거결과를 무효화하기로 결정했다. 기사 대통령 탄핵 철자에 들어간다.# 결국 9일. 대통령이 사의 표명했다.# 15일에 사퇴를 하였다.#
12월 총선, 2021년 1월 대선을 실시한다.#
2021년 1월 10일에 대선이 실시됐다.# 대선에서 사디르 자파로프 후보가 당선됐다.#

[1] 언어학 상으로는 켈트족과 동계에 해당하는 민족이다.[2] 고대에는 튀르크어족과 매우 밀접한 관계였다.[3] 영어로 Turkish tribes라고 한다.[4] 이는 때마침 몽골 고원에 닥친 혹한 및 폭설과 같은 자연재해와도 관련있다. 혹한과 폭설로 인해 가축들이 집단으로 폐사한 것. 몽골어로는 이런 종류의 재해를 '''조드'''라고 하는데, "전사는 화살 한 방에 죽고, 부자는 조드 한 번에 망한다"는 속담이 몽골에 있을 정도로 그 위력은 엄청나다.[5] 참고로, 후일 몽골 제국을 세우는 칭기즈 칸의 보르지긴 씨족이 본디 키르기스부에서 나왔다는 설도 있다.[6] 당시 신강 지역에 있었던 한회(漢回), 즉 무슬림화된 한족(漢族)이다. 현대에는 둥간(Dungan)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며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지방에서 집단을 이루어살고 있다.[7] 한국 또한 제헌 헌법 정본을 분실하여 지금까지 찾지 못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