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가 전투
1. 개요
1914년 11월 2일부터 5일까지 독일령 동아프리카(오늘날의 탄자니아 지방)의 탕가(Tanga)에서 벌어진 독일 제국군과 영국군 간의 전투. 일명 '''벌의 전투(Battle of the Bees)'''로도 불린다.
2. 전투의 발발 원인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면서 열강 간의 식민지에서도 교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당시 아프리카는 협상국 소속인 영국, 프랑스가 대부분의 식민지를 차지하고 있었지만 독일 또한 탄자니아 등에 약간의 식민지를 확보하고 있었다.
당시 유럽 식민당국들은 유럽에서 전쟁이 벌어지더라도 아프리카에서는 상호 중립을 유지하자는 협정을 맺고 있었으나, 영국 및 프랑스는 전쟁이 시작되고 며칠 지나지 않아 아프리카에 있는 독일 식민지를 점거하기 시작한다.
8월 8일에는 영국 순양함 2척이 독일령 동아프리카 수도인 다르에스살람을 포격했고, 이에 분개한 주둔군 지휘관 파울 폰 레토브포어베크 보병대령은 인접한 케냐 등 영국령 동아프리카에 침투해 게릴라전을 수행하여 영국군의 군수 물자 및 철도를 파괴하는 등의 성과를 거두었다. 이에 영국은 이 독일령 식민지에 주둔한 독일군을 몰아내고자 했고, 공격 목표로 택한 곳이 바로 탕가였다. 탕가는 당시 독일령 동아프리카의 주요 항구도시였고, 독일령 식민지의 주요 철도인 우삼바라(Usambara) 철도의 기착지였다. 영국은 이곳을 확보할 경우 독일군이 큰 타격을 입을게 분명하다고 판단했다.
3. 양군의 준비 상황
전투가 벌어지기 전 독일군과 영국군의 준비 상태는 대단히 크게 차이가 났다.
독일군 지휘관 포어베크 대령은 몇 안되는 독일군 병력(현지 주둔군에 급히 불러온 증원병력을 합친 것.)만으로 영국군과 정규전을 벌이는 것은 매우 불리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확보한 1천 명도 대부분 현지 원주민 병사인 아스카리(Askari)[1] 였다. 아스카리 병사들은 현지 기후와 지형에 익숙하였고, 독일군 지휘관들도 인정할 만큼 독일군의 근대적인 군사 훈련에 잘 적응하였다. 또한 포어베크 대령 스스로가 솔선수범하여 흑인에 대한 차별 없이 원주민 병사들과 식사를 하고 잠을 자는 등 함께 생활하였고 이로 인해 흑인 병사들은 독일인 지휘관들에게 강한 충성심을 가질 수 있었다.
반면 영국군 지휘관 아서 에이트킨(Arthur Aitken) 육군소장은 인도 식민지에서 징집된 인도계 장병들 '''약 8천여 명'''으로 구성된 영국 육군을 지휘하고 있어 숫적으로는 크게 유리하나 휘하 장병들은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않았고, 광활한 인도 각지에서 징집된 탓에 '''상호간 언어, 문화, 종교들이 달라 사실상 다른 나라 출신이나 다를바 없을 정도로 유대감이 부족했다.''' 게다가 이들을 지휘하는 영국 육군 장교들은 아프리카에 대한 경험은 커녕 기초적인 지식조차 숙지하지 못했고 이런 병사들과 장교들은 '''탕가로 향하는 배 위에서 처음 대면하기까지 했다.''' 미숙한 병사들, 준비되지 않은 장교들, 상호간 유대감 없음,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이었다. 심지어 작전 지도조차 마련되지 않았고 독일군 포어베크 대령과 달리 에이트킨 소장은 '''구식 전술을 추종하는데다가 적군에 대해 미개한 흑인 무리라 무시하며 이미 승리한 전투나 다를 바 없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만 가지고 있었다.'''
4. 전투의 전개
1914년 11월 2일, 에이트킨 장군과 영국 육군 병력을 태운 영국 해군 순양함 HMS 폭스 함이 함장 프랜시스 웨이드 콜필드(Francis Wade Caulfeild) 해군대령의 지휘 아래 탕가 근해에 도착하였다. 포어베크 대령은 이미 인도 지역의 정보망을 통해 영국군이 탕가를 공격할 것임을 알고 탕가의 방어를 보강하였다. 에이트킨 장군은 탕가 항구에 기뢰가 부설되어 있을 수 있다고 판단하고, 2일 밤부터 다음날까지 탕가에서 약 3마일 떨어진 해안에 병력을 상륙시켰다. 하지만 이곳은 모기와 뱀들이 우글거리는 맹그로브 늪지대였고, 이들의 움직임은 이미 독일군이 파악한 상태였다. 반면 영국군은 제대로 된 사전 정찰조차 행하지 않았다. 영국군은 늪지대를 통과하면서 전투력이 크게 낮아졌지만 어쨌든 11월 4일에는 탕가 시가지 근처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곧 독일군의 맹렬한 반격을 받았고 300여명의 사상자가 발생해 후퇴해야 했다.
그 다음날인 5일에는 영국군이 추가로 병력을 상륙시켰으나 이미 독일군은 철조망과 참호, 기관총으로 견고한 방어진을 구축한 상태였고 여기에 더해 독일식 사격훈련을 받은 원주민 저격수들이 정글에 숨어서 영국군에게 저격을 가해 영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다. 그 와중에도 간신히 일부 병력이 독일군의 방어선을 돌파했고 현장의 영국군 지휘관은 HMS 폭스 함에 함포 사격 지원을 요청했다. 문제는 포어베크 대령을 비롯한 독일군 지휘부는 현장에서 직접 지휘에 나서고 있는 반면, 영국군 에이트킨 장군은 '''먼 바다위의 함상에 머무른 탓에 현장의 상황을 제때 파악하지 못해 함포 사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물론 독일군에게도 아주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비록 독일군이 분전하였지만 약 8:1이라는 병력의 열세는 명백하였고, 계속된 전투로 탄약이 거의 다 떨어져 독일군 장병들은 곧 백병전을 각오해야만 했다. 이 때 다음과 같은 일화도 있었다. 전투가 계속되면서 아스카리 장병들이 전의를 잃기 시작하자, 포어베크를 비롯한 독일인 장교들은 "내가 지금 보고 있는게 나약한 여자애들인가, 아니면 용맹한 전사들의 후예인가?" 라고 호통을 쳤다. 그런데 어느 병사가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한 장교가 그에게 술병을 던져서 넘어뜨렸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본 이웃 부족 출신 병사들은 폭소를 터뜨렸고 해당 병사가 속한 부족 출신 병사들은 자존심이 상해서 그 병사를 족친 뒤 분기탱천해서 전장으로 뛰쳐 나갔다. 이 때 순간적으로 독일군 방어선에 공백이 생겼지만 영국군은 미처 이 부분을 공략하지 못했다.
5. 대자연의 벌입니다
잠시 후 뒤늦게나마 상황을 파악한 HMS 폭스 함이 함포 사격을 개시했다. 그리고 이것이 영국군은 물론, 독일군도 전혀 생각하지 못한 '''행운과 불행'''을 불러왔다.
당시 탕가 시가지를 공격하던 영국군이 주둔한 숲에는, 현지 원주민들이 양봉을 위해 만든 벌집들이 잔뜩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 벌들은 '''온순하게 품종 개량된 양봉용 꿀벌'''이 아니라 온전한 '''야생 벌'''이었다.
요란한 폭발음과 진동, 사방으로 튀는 포탄 파편으로 인해 벌집의 벌들은 잔뜩 흥분했고, '''마침 근처에 있던 영국군 장병들을 맹렬하게 공격했다!''' 이로 인해 영국군은 도저히 전투를 수행할 수 없었고, 자신들이 타고 온 순양함으로 도로 후퇴해야만 했다. 한 통신병은 이 와중에도 무전을 보낸 공으로 이후 빅토리아 무공훈장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통신병은 300번 이상이나 벌에게 쏘였다고 한다.[2]
이때 참전한 한 영국 육군 장교의 회고에 따르면, "피에 굶주린 독일 놈들이 총을 들이대는 건 하나도 겁나지 않았지만 '''벌들이 엉덩이를 쏘아대는 것만은 견딜 수가 없었다."''' 고 한다.
6. 전투의 결과
이 전투로 독일군은 독일인 16명, 원주민 병사 55명이 죽고 76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만을 입은 반면, 영국군은 약 500여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487명이 부상당하는 피해를 입었다. 또한 목표로 한 탕가의 점령 및 독일군 병력의 일소 또한 실패했다.
이후에도 영국군은 연인원 10만에 달하는 대군을 독일령 동아프리카에 파견해 독일군과 교전을 벌였으나, 포르베크 대령의 독일군은 제대로 된 병력과 물자의 지원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3] 적절하게 게릴라전을 펼치며 영국군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영국군이 이 지겨운 전쟁를 끝낼 수 있던 건 1918년 독일이 항복하여 포어베크 장군[4] 이 교전을 중지하고 영국군과 종전협정을 맺은 뒤에야 가능했다. 동아프리카를 들쑤시고 다닌 포어베크 군의 여정에 대해서는 제1차 세계 대전/아프리카 전선 항목 참조.
포어베크 장군은 동아프리카에서의 전공을 인정받아 "아프리카의 사자(Der Löwe von Afrika)"라는 별명을 얻었고, 전쟁에서 패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에서 승전(?) 퍼레이드를 할 수 있었다. 포르베크 장군은 육군에서 퇴역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의 의회 의원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나치당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는데, 아프리카에서 흑인 장병들과 함께 활동한 경험으로 인해 나치식 인종주의에 반감을 가진 것으로 추정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이후 나치 정권은 그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며 그를 독일 민족의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프로파간다를 형성했으며, 1938년에는 포어베크 장군에게 독일 국방군 육군에서 활동하도록 하였다. 하지만 당시 포어베크 장군은 70이 다 된 노인이었기 때문에 이후 제2차 세계 대전 기간 동안 딱히 활동한 행적은 없다. 군 원로로서의 명예직 정도로 존재한 모양. 포어베크 장군은 90이 넘게 장수하고 1964년 노환으로 사망했다. 그리고 전투가 벌어진 지 50년이나 지난 그 해에 서독 정부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참전했던 아스카리 중 생존한 장병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기로 했다.
[1] 아스카리는 특정 부족 이름이 아니고 원주민 병사를 가리키는 호칭이다. 카투사가 한국인 중 특정 집단을 가리키지 않는 것과 같다.[2] 다른 훈장이거나 존재하지 않은 사건일 가능성이 높다.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의 활약을 반드시 싣는 영국 관보 The London Gazette를 인용한 영문위키 자료를 보면 1차 세계대전 빅토리아 훈장 수훈자는 총 627명에게 628회(1명은 2번 수훈) 수훈됐지만, 탕가니카(현 탄자니아)에서 수훈한 이들은 총 3명뿐이고 탕가 전투에서 수훈한 사례는 나오지 않는다. 다만 탕가 전투 약 3주 후(11월 28일) 다르에스살람 습격 작전 때 HMS 골리앗의 함장이었던 해군 대령이 받기는 했다.[3] 지리상의 거리와 해군력의 부족으로 인해 독일 본토로부터 제대로 된 보급을 받지 못했다. 근해에 침몰한 경순양함 쾨니히스베르크함에서 함포를 뜯어내 야포로 사용하고 승조원들인 수병들과 부사관, 장교들을 합류시킨 게 사실상 유일한 증원이었다.[4] 전쟁 중 소장으로 진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