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테카시노 전투
1. 개요
1944년의 제2차 세계대전의 전투 중 하나. 독일 국방군 공군 공수부대 팔시름예거가 카시노 산을 방어 거점으로 삼고 미국·영국·자유 프랑스·폴란드 망명 정부·오스트레일리아·브라질·벨기에·캐나다 육군 및 공군으로 이뤄진 연합군[1] 과 맞선 방어전이었다. 또한 항복한 이탈리아 정부군과 현지 파르티잔도 연합군을 돕는 데 가세했다. 독일의 정예 공수부대 팔쉬름예거의 용맹함을 널리 알린 전투.
2. 상세
당시 사진
당시 이탈리아 전선에서 독일군은 이탈리아 반도의 남부를 포기하되 로마는 계속 수중에 넣은 상태로 유지하고자 지연전을 수행하며 서서히 후퇴하고, 연합군은 이를 추격하는 형국이었다. 독일군은 '구스타프 라인(혹은 윈터 라인)'이라 불리는 방어선에 도달한 후 후퇴하는 아군의 후미를 방어하려고 독일 공수부대를 급파했다.
독일 공군 제1공수사단은 전선에 도착하자 전략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는 몬테카시노산을 중심으로 방어선을 구축했다. 몬테카시노산에는 수도원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방어하면 연합군의 진격을 능히 저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수도원은 중세 시대에 지어졌고 가치 있는 고문서들도 많은 '''중요한 유적'''이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전선 총사령관 알베르트 케셀링 공군원수는 부대에 수도원에 손 끝 하나라도 대지 말라고 신신당부했고 연합군 지휘부에도 방침을 전달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연합군은 적군의 말을 도통 믿을 수가 없었다. 수도원이 산 정상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위치라 거슬리기도 했지만, 문제는 그것만이 아니었다. 우연히 몬테카시노 수도원의 구조를 대략 알 수 있는 문서를 연합군이 입수했는데, '''돌로 된 외벽의 두께만 3 m에 육박하여''' 어지간한 야포 따위로는 이빨도 안 먹힌다는 것에 다들 경악했다.
결국 연합군 상층부는 내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관측병이 수도원까지 올라와서 관측할지도 모른다.'는 둥 핑계를 들어 수도원에 포격과 융단폭격을 가해 완전히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렸다. 하지만, 수도원 인근에 수도원보다 더 관측에 유리한 봉우리가 널려 있었기에, 독일군 입장에서는 굳이 연합군에게 잘 보이는 수도원에 자리잡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이렇게 무리하게 폭격을 감행한 이유는 분명히 있었다. 이탈리아 전선은 독일군이 이탈리아의 험악한 지형을 끼고 우주방어를 폈는데, 이를 억지로 뚫고 지나가는 양상이었기 때문에 연합군 입장에서는 진격속도가 느린 데 반해 보병의 손해가 엄청났다. 몬테카시노 전투에 참전한 어느 육군 대령은 "이런 험악한 곳에서 연이은 혈전에 지친 병사들에게 그런 요구를 하는 것은 너무 가혹한 것이었다."라고 회상했다.
참고로 이 수도원은 베네딕토회의 첫 번째 수도원이면서 유럽에서 체계적인 수도원을 구현한 최초의 수도원이자 529년에 세워진 매우 유서 깊은 곳이었다. 가톨릭에서는 굉장히 유명한 성 베네딕토가 5세기에 직접 머물렀던 수도원이었다. 그리고 김영옥 미합중국 육군 보병 대령의 회고록에 따르면, 그 당시 수도원 안에는 수도자들과 '''부상당하거나 피난온 민간인도 다수 있었다고 한다!''' 게다가 앞서 말했듯 케셀링 장군이 수도원을 방어에 사용하지 못하도록 예하 부대에 명령을 내렸고, 자신들이 수도원에는 부대를 전혀 배치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연합군에 통보하기까지 했다.
수도원장은 미군이 뿌린 폭격예고 삐라를 보고 부랴부랴 피난행렬을 꾸렸지만, 행정상의 착오인지 조급증이 난 미군의 무리한 작전개시인지 몰라도 삐라에 예고된 날보다 일찍이 미 육군 항공대의 B-17이 폭격을 개시했다. 그 결과 수많은 이탈리아 민간인들이 폭격에 희생되는 대참사로 이어졌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인지 율리우스 슐레겔 공군 공수 중령이 폭격을 피하기 위해 수도원 지하로 옮겨놓은 중세 필사본 서적 등 수도원의 1만 2천 권에 달하는 장서들과 미술품들을 모두 바티칸의 안전한 곳으로 옮겨두었기 때문에 문화재의 소실은 방지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의 입장은 전후 조금씩 정정되었는데, 1969년 최종적으로 확정된 미 육군 공식 문서는 '폭격 당시 수도원은 독일군에게 점거되어 있지 않았다.'고 명시했다.
한편, 이렇게 수도원이 박살나서 더 이상 방어거점으로서 작동을 못하면 그나마 미군에게 위안이 되었겠지만, 원래 튼튼한 요새였던 만큼 아무리 폭격으로 두들겨 패도 폐허가 남았고, 이 폐허가 보병에게는 매우 유용한 은엄폐를 제공해 주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더 이상 눈치 볼 게 없어진 독일 공수부대원들은 수도원의 폐허 속에 더욱 더 튼튼하고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했고, 연합군은 항공 지원과 포격 지원을 등에 업고 대규모 공세를 가해도 거점을 점령하지 못하고 번번이 물러나야만 했다. 결국 '''문화유산도 날려버리고 아무 죄 없는 민간인들을 대량살상도 한 데다, 열악한 방어진지를 난공불락의 요새로 바꾸어 적군에게 헌납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건 뭐... 공포와 편견에 사로잡혀 대국을 보지 못한 결과.
다급해진 연합군은 이 지역을 무슨수를 써서라도 무조건 돌파하기 위해 기존의 몇십 배에 달하는 병력을 계속해서 더 투입하였다. 자신들의 몇십 배에 달하는 병력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계속해서 공격을 격퇴하였으나, 연합군 측도 정예부대였는지라 한 번은 양측의 전선이 10 m까지 좁혀진 적도 있었다. 결국 이 전투는 독일군의 철수 후미를 경계하며 시간을 끄는 작전에서 독일 공수부대와 연합군 정예부대들 간 '''자존심 싸움'''으로 바뀌었다. 당시 연합군 부대 중에서 '브와디스와프 안데르스' 장군이 이끄는 폴란드군 육군 제2군단은 특히나 독일에 대한 복수심과 보복심이 뼛속 깊이 박혔기 때문에 무서울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다고 한다.
당시 독일 제1공수사단의 한 소대장 '하인츠 베르거' 중위의 증언에 의하면 "우리는 명실공히 세계 최강의 군대였고 그 점은 이미 우리의 적들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다. 하지만 폴란드군은 모든 점에서 이성을 상실한듯 보였다. 그들은 흡사 이 전투에서 전원이 몰살당하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나는 부상을 입은 어느 폴란드군 부상병이 우리가 다가가자 마치 야수같은 괴성을 질러대며 마구 돌을 집어던지며 계속해서 저항하는 것을 보았다. 그의 하반신 전체는 이미 수류탄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만큼 뭉그러져 있었음에도 말이다". 또한 프랑스 육군 원정군단(FEC)에 소속된, 모로코의 구미에 산악병들은 고향이 험한 산악지형이라 몬테카시노산 정도를 등반하기는 쉬운 일이었다.
연합군이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서 몬테카시노 수도원을 포함한 산악지역 전체를 감싸려 한다는 사실이 독일군 상층부에 보고되자, 케셀링 장군이 명령을 내려 독일 공수부대가 철수함으로써 몬테카시노 전투는 막을 내렸다. 지금 몬테카시노산에 재건된 수도원에는 몬테카시노 전투에서 전사한 장병들의 묘비가 세워져 전사자들의 넋을 달랜다.
이 전투에서 몬테카시노의 초록 악마들이라는, 독일 공수부대의 별명이 하나 추가되었다.
3. 여담
결국 몬테 카시노를 점령한 것은 자유 폴란드군이었고[2] , 전사자 수만도 4,000명을 넘어가는 등 가장 큰 희생을 치러 냈다[3] . 전사자 대부분은 인근 언덕에 묻혔고 그 비문은 다음과 같다.
이탈리아의 푸른 악마였던 독일 정예와, 각종 우주방어라인을 분쇄하여 질주한 미군의 전과도 눈부시지만, 잃어버린 조국을 위해 헌신했던 폴란드군도 이탈리아 전선에서의 진정한 일원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우리 폴란드군은
우리의 자유와 당신들의 자유를 위해[4]
우리의 영혼을 하느님께
우리의 육체를 이탈리아의 흙에
우리의 마음을 조국 폴란드에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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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몬테카시노의 성 베네딕토회 수도원은 전쟁이 끝난 후 복구되었는데, 이 수도원은 이로써 총 5회 파괴되고 5회 재건되었다. 현재 수도원의 청동제 정문 하단부 좌측에는 수도원을 처음으로 파괴한 랑고바르드족의 얼굴을, 우측에는 2차대전 중에 수도원을 파괴한 연합군 폭격을 뜻하는 군용 철모와 '''폭탄'''을 새겨넣어, 역사를 아는 사람들에게 쏠쏠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이 전투 당시 이곳에는 크루프 K5라는 그나마 실용적인 열차포가 배치되어 있었다. K5는 일반 철로에도 쓸 수 있어서 한동안 갈긴 뒤 터널 등으로 도망치는 방법으로 나름 활약했지만 후퇴할 때 폐기되었으며, 잔해는 연합군이 확보했다.
<리보위츠를 위한 성가>(포스트 아포칼립스)의 저자 윌터 M. 주니어는 이 베네딕토회 수도원 폭격에 승무원으로 참여했다가 죄책감에 시달려 1996년에 자살했다. 참고로 저 소설도 인류의 문화유산을 수납한 교회에 대한 것이다.
HBO 드라마 밴드 오브 브라더스에서 가니에의 형이 이 전투에서 죽은 것으로 언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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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이탈리아 중부 몬테카시노에서의 전투가 연합군의 승리로 끝나자, 자유 프랑스군 사령관 알퐁스 쥐앵은 인근 지역인 치오치아리아(Ciociaria)에서 50시간의 약탈을 허용하였다. 이때 모로코 식민지인 구미에 병사들이 총 2,000여명의 여성들을 강간하고[5] , 800여명의 남성들을 살해했으며, 마을을 불태우고, 재물들은 모두 약탈했다.[6] 소피아 로렌 주연의 이탈리아 영화, <두 여자(Two Women, 1960)>는 이 사건 당시 강간당한 두 자매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몬테카시노에서 발생한 강간 피해자들을 이탈리아에서는 Marocchinate라고 부른다. 그러나 프랑스가 나치에게 어지간히 데인 국가였기 때문에[7] 소련군의 범죄와 비슷하게 현재까지도 잘 언급되지 않는다. 또한 프랑스군은 이후 독일 슈투트가르트에서도 다시 한번 강간, 살해, 약탈로 악명을 떨쳤고 프랑스 정부는 현재까지도 이 전쟁 범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물론 모로코에서도 이건 프랑스가 허용한 짓이라고 하고 덤으로 이탈리아도 북아프리카 리비아나 에티오피아 쳐들어와서 뭔 짓 저질렀는지 전쟁범죄 인정하냐고 비웃지만..
그 외에도 폴란드군 소속으로 참전한 보이텍이 유명하다. 한 폴란드군이 이란에서 구입해 그의 손에서 길러진 시리아 불곰 보이텍(Wojtek)은 자유 폴란드군 2군단 포병사단 22탄약보급중대 소속으로 참전했으며 상병(Kapral) 계급까지 받았다. 어릴 때부터 인간들 손에 길러진 탓에 야생적 본능은 많이 사라져 있었기 때문에 병사들과 레슬링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몬테카시노 전투에서는 포탄 운반을 담당했는데 이 모습이 형상화되어 22탄약중대의 부대마크가 되어 장병들의 인기를 끌기도 했다. 또한 운반중에 탄약을 단 한 발도 떨어트리지 않았다고. 부대 안에 잠입한 스파이를 잡기도 했다. 2차대전이 끝난 이후 폴란드는 공산화되었기 때문에 자유 폴란드군 소속이었던 보이테크는 폴란드로 가지 못했고, 글라스고의 동물원에서 살다가 1947년 에딘버러의 동물원으로 옮겨진 뒤 1962년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맥주와 담배를 즐겼고 동물원에 옛 전우들이 보러오면 담배를 달란 제스쳐를 했다고 한다.
스웨덴 록 밴드인 Sabaton에서 노래 'Union'의 배경이 되었다.
4. 관련 항목
[1] 독일군의 결사방어에 연합군은 마지막 공세에서 몬테카시노 공략을 위해 영연방과 타 연합국의 망명정부들의 군대, 심지어는 연합군에 전향/항복해서 재편한 구 이탈리아군 군대까지 총동원했다.[2] 물론 엄청난 서방 연합군의 포위공격이 바탕이 된 것이었지만[3] 폴란드군 소속 제4소총대대의 경우 대대장이 단 하루만에 2명이 전사했다. 3월 17일에 카롤 판슬라우 중령이 전사하고 유제프 스토예프스키-리브친스키 소령이 지휘권을 인계받았는데 같은 날 전사한 것.[4] Za naszą i waszą wolność. 폴란드 독립운동을 상징하는 모토다.[5] 피해자 중에는 현재까지 정신병원에 수용되어 있는 여성도 있다고 한다.[6] 주민이 2,500명에 불과했던 도시인 에스페리아(Esperia)에서만 700명이 강간당한 것으로 보고되었다.[7] 동유럽에서 워낙에 스케일 큰 학살들이 많이 일어났기에 가려진 사실이지만, 서유럽에서도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나치에 살해당했다. 프랑스는 하루만에 어린 아이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 642명이 죽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이 일어났고 프랑스까지 갈 것도 없이 네덜란드에서는 전후 5년 새 20만명이 이미 사라지고 없는 상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