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윤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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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명'''
곽윤직(郭潤直)
'''출생'''
1925년 12월 6일
'''사망'''
2018년 2월 22일 (향년 92세)
1. 개요
2. 생애
3. 학자로서의 삶
3.1. 비판론
3.2. 옹호론
4. 곽서
5. 인간됨에 대한 평가
6. 여담


1. 개요


대한민국의 법학자.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명예교수. 고시생의 바이블로 통하는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총론', '채권각론', [1] 등 민법강의 시리즈, 통칭 '곽서(郭書)'의 저자이다.
법조계 최고 지위에 있는 대법관, 헌법재판소 재판관, 검사장부터 말단 변호사에 이르기까지, 40대 이상의 법조인 중에서 수험생 시절 그의 책을 한 번 보지 않고 법을 공부한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지금도 인지도는 매우 높아서, '곽서'라고 하면 사법고시생/로스쿨 학생[2] 중에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다. 민법을 공부하다 보면 통설(通說), 다수설(多數說)의 대다수가 이 사람의 학설일 만큼 영향력이 세다.[3] 민법이 모든 법의 근본임을 감안하면[4] 그는 해방 이후의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을 상징하는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2. 생애


1925년 12월 6일에 충청남도 연기군(현 세종특별자치시) 전의면에서 태어났다. 1944년 당시 5년제이던 성남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이과를 지망하여, 구제고등학교의 입학 시험을 치뤘지만 낙방하였다. 그 후 국내에 있는 의학전문학교의 입학시험을 치렀지만 이번에는 색맹 때문에 낙방하였고, 결국 경성법학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이제나 저제나 군대에 끌려갈 날을 기다리던 중 광복을 맞았다.
경성법학전문학교는 서울대학교로 통합되면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전문부가 되었는데, 곽윤직은 전문부 과정에서는 법학 공부보다는 영어, 독일어 그리고 프랑스어 공부에 매진하였고, 1947년 전문부를 수료하고 학부 과정에 진입하면서부터 법학 공부에 열성을 기울였다. 당시 서울대학교국대안 파동과 좌우대립으로 학생이 공부에 전념하기에 매우 안 좋은 환경이었으나, 법대 소속의 유기천 그리고 김증한 두 젊은 교수가 학생들을 잘 다독여 공부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5][6] 공부에만 전념하는 곽윤직에 대해 몇몇 좌익 계열의 학생들은 리버럴리스트라고 놀려 먹었다고 한다.
6.25 전쟁 발발 후 피난을 가지 못해서 서울특별시에 은거하고 있다가, 9.28 수복후 군대에 통-번역장교로 입대하여 FM을 번역하는 데 군생활 대부분을 보냈다고 한다. 그 공로로 무공훈장을 수훈하였다.
1951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를 졸업하고,[7] 1953년부터 강사생활을 하면서 1956년에 제7회 고등고시 행정과 제3부(외교)에 합격한 뒤,[8] 1956년부터 1958년까지는 법령정리위원회 전문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서울대동국대 등에서 시간강사로도 일했다.[9]
1958년, 우리나라에 민법이 제정되던 해에[10] 서울대 법대에 전임강사로 자리를 잡았다. 첫 제자들은 이시윤[11] 전 감사원장, 가수 최희준등 법대 12회 졸업생이었다. 그 후 1959년 미국 국무부 초청으로 버지니아 대학교에 교환교수로 가서 영미 물권법을 연구했다. 1965년에는 서독 함부르크대학교 법과대학에서 연구하였는데, 당시 로마법의 태두인 겐츠머 교수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12] 박사학위는 1968년에야 받았다.
1991년 서울대 법대에서 정년퇴임하였다. 자녀는 1남 3녀를 뒀는데, 법과 인연을 맺은 사람이 아무도 없고, 아버지와 달리 모두 평범한 직장인이 되었다고 한다.
2018년 2월 22일 숙환으로 별세하였다. 공교롭게도, 2월 22일은 대한민국 민법(법률 제471호)이 1958년에 공포된 날이며, 2018년은 그로부터 60년 되는 해이다.
학자로서의 자세한 생애는 '''후암민법논집'''(1991년) 말미에 수록된 “민법학의 한 평생을 돌아보며(좌담회)”를 참조할 것.[13]

3. 학자로서의 삶


업적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역시 매우 완성도 높은 민법 교과서 시리즈를 저술하여 한국법률문화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민법강의시리즈'를 쓸 무렵 기존의 교과서는 국내에서 실무가 돌아가는 것에는 캄캄하던 사람들이 도쿄대학 와가쓰마 사카에(我妻 榮)[14] 교수 저를 비롯한 일본 교과서를 베끼다시피해 내놓은 것들에 불과하였다. 그의 선배 교수였던 김증한의 민법 교과서는 일본 교과서의 영향으로부터 많이 벗어난 것이긴 하였으나, 독일 이론에 지나치게 경도되었고, 그 분량도 지나치게 얇아서 개설서 내지 요약서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와 달리, 곽윤직은 우리나라 법 현실에 맞는 접점을 찾기 위한 주체적인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 따라서 곽윤직은 일본인의 시각이 아닌, 본격적으로 한국인의 시각으로 바라 본 민법에 관한 교과서를 저술하였다는 평을 받고 있고, 독일이론, 특히 독일법제사 관련 이론들도 많이 소개하여 민법학의 깊이를 더했다는 찬사 역시 받고 있다.[15]
그 밖에도 1977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법학 학회인 민사판례연구회를 조직하여 우리나라 엘리트 판사들[16]에게 혹독한 민법공부를 시키고, 그 스터디모임을 기반으로 하여 마침내 민법주해라는 거대 출판사업을 성공시켰다는 것도 중요한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 곽윤직 교수가 아니었다면, 과연 우리나라 법원 판사들 간에 그 정도로 민법 공부를 빡세게 하는 전통이 확립될 수 있었을지, 그리고 우리나라에 그 정도 수준의 훌륭한 민법 주석서들이 나올 수 있었을 것인지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고 있을 지경이다.
교육자로서 곽윤직은 매우 엄격하기 그지없는 스승이었다. 교수 시절 '곽 교수에게서 A를 받는 것이 사시 민법시험에서 과락을 면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소문이 퍼질 정도로 학생들에게 학점을 박하게 줬다.[17] 그럼에도 그의 강의는 늘 대형강의실에서 진행해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18] 당시 법대 민법강의는 3개 반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교수가 담당했지만, 곽 교수 반이 아닌 학생들도 그의 강의를 들으러 수업에 들어오는 경우가 비일비재했을 정도였다. 김증한 교수, 황적인 교수, 김기선 교수...지못미...ㅠ 강의는 칠판에 쓰는 분필이 뚝뚝 끊어질 정도로 힘차고 자신감에 차 있었고 '했단 말…'로 끝나는 특이한 어투가 반복적으로 사용되었다.
자기 학설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여, 수업시간에 다른 학자들에 대한 비난을 자주 했다. 국내 다른 민법학자의 견해를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였고, 그나마 인정해 주는 학자가 선배인 김증한 교수였지만, 김증한 교수의 학설조차 수업시간 내내 신랄하게 비난해대어,[19] 학생들이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20][21] 가족법 분야에서 김주수 교수와 대립하는 사이기도 한데 서로의 책의 서문에 상대방을 대차게 까는 글이 있어 읽다보면 교수들도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22][23].
학생(교무)과장 이외에는 보직을 전혀 맡지 않았다. 정년 퇴임하는 그 날까지 학장자리 한번 맡지 않고 강의와 연구에만 전념하였다는 점은 그가 얼마나 학문에 충실한 사람이었지를 드러내준다[24].
제자로, 양창수 한양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양삼승 변호사, 송덕수 이화여자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 서 민 충남대 법과대학 명예교수[25] 등이 있다.

3.1. 비판론


거의 30여 년에 걸쳐서 민법학계의 최고 실력자로 군림했던 사람이지만, 요즘 들어서는 그의 법학관(法學觀)도 젊은 법학자들,[26] 특히 독일에서 공부한 사람들에게서 신랄하게 까이고 있다. 예를 들어 그의 교과서를 보면 "소유권절대, 계약자유, 과실책임의 민법 3대 원칙이 이미 최고원칙의 자리를 상실했으며, '''그 대신 공공복리가 최고의 이념이 되었고''', 거래안전, 사회질서, 신의성실, 권리남용금지 등은 '''민법의 근본이념인 공공복리의 실천원리로서 자유주의 3대원칙보다 고차적인 기본원리로 승격되었으며''', 3대원칙은 이들 실천원리의 제약내에서 비로소 승인되는 것으로 되었다"는 주장이 나오는데, 이것은 전체주의 이데올로기의 반영에 불과한 것이라는 이유로 여기저기서 까이고 있다. 쉽게 이야기해서 곽윤직 교수의 이론은 "자유주의 법학만을 고수해서는 안 된다"는 정도에 그치고 있지 않고, '''자유주의보다 국가공동체주의가 더 우위에 있다'''는 말!!! 옛날에 '민관군(民官軍)'이란 말 대신에 '''' 군관민(軍官民)''''이란 말을 훨씬 더 많이 썼던 것과 비슷한 마인드라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곽윤직 교수의 학설은 1940년대 나치 독일 법학의 잔재라는 말도 나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 이유는 첫째, 전세계 나라들 중에 민법의 최고원리를 사적 자치가 아닌 공공복리로 삼았거나 삼고 있는 나라는 1940년대 나치 독일일본 제국 외에 찾아볼 수 없으며,[27] 둘째, 곽윤직 교수의 '공공복리 최고원리론'이 역사상 최초로 천명된 것 또한 나치 독일에서 1942년에 발표된 민족사회주의를 위한 민족법전초안의 제1 기본원칙이었고,[28] 셋째, 그 '공공복리 최고원리론'을 이론적으로 전개한 사람 역시 나치 독일의 대표적 민법학자이자 곽윤직 교수의 실질적 롤모델이었던 라렌츠(Larenz)였으며,[29] 넷째, 그 라렌츠 교수의 논문 '계약개념의 변화'[30]에서 곽윤직 교수의 주장과 거의 비슷한 말, 즉 "각 당사자의 계약내용결정에 관한 자유를 제한한다는 것은, 계약자유원칙의 예외가 아니라, 오히려 민족구성원의 정신에 선천적으로 내재하는 공동체관련성의 결과로 이해해야 한다"는 말[31]이 그대로 나오기 때문이다.
그 밖에도 곽윤직 교수가 법학을 처음 공부하던 1940년대에는 어차피 법학 교육에도 일본식의 군국주의와 멸사보국(滅私報國)의 광기가 팽배해 있었고, 나중에 곽 교수가 우리나라 민법학을 일으켜세우는 데 주로 참고했던 자료들 역시도 결국은 일본 경성제국대학 교수들이 경성제대 도서관과 청계천 헌책방 등에 버려두고 간 일본의 1940년대 법서들이었을 것이라는 이유에서,[32] 곽윤직 교수의 민법학은 일본식 국가주의 민법학으로 까이고 있기도 하다. 실제로 일본 제국주의 시대의 민법학이 전체주의적, 반자유주의적 경향을 강하게 드러냈고, 사적 자치보다 공공복지가 더 상위의 가치임을 강하게 천명했던 만큼, 곽윤직 교수의 민법학 역시 나치법학의 잔재가 아니라면, 최소한 일본제국주의법학의 잔재로라도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얘기.
그리고 곽교수가 신의성실의 원칙을 사적 자치의 원칙보다 더 상위에 있는 원칙, 그러니까 무소불위의 도깨비방망이로 만들어 버림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는 개인의 자유로운 법률관계 형성이 법관의 광범한 재량을 통해서 침해되는 불안정한 영역을 매우 폭넓게 제공한 셈이라는 비판도 제기되고 있다. 도무지 당사자의 진의와 법률을 곧이곧대로 해석해서 공정하게 판결을 내리는 것으로 임무가 끝나야 할 판사라는 사람들이 왜 거의 모든 분쟁을 '신의성실'이니 '공서양속'이니 하는 애매모호한 개념을 동원해서 마치 자기네들이 전지자라도 된 양 판결해버리고[33], 그런 것에 우리나라 국민들은 왜 전혀 불만이 없어야 하는가 하는 문제의식이다.[34]

3.2. 옹호론


곽윤직 교수의 '신의성실 원칙'에 관한 견해에 대해 나치법학이니 일본제국주의법학의 잔재라고 비난을 가하는 견해에 대해 법제사적으로 아니면 우리 민법의 체계로 미루어 보았을 때 재고의 여지가 상당히 남아있다.
먼저 '신의성실 원칙'이 민법의 원리로 부상(浮上)하게 된 시대적 배경에는 독일의 바이마르 공화국이 있음을 간과하고 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법학자들은 자본주의 발달과정에서 안고 있었던 문제를 해결짓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러한 문제의식은 일본의 민법학자들도 공유하고 있었다. 대표적인 문헌으로 하토야마 히데오(鳩山秀夫)[35]의 "채권법에 있어서의 신의성실의 원칙"이라는 논문을 들수 있다.

그 후 독일과 일본의 역사가 군국주의로 치달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 혹은 다이쇼 데모크라시 시대에 제기된 문제의식을 나치 독일이나 군국주의 일본에서 공감하고 있다고하여 이를 잘못되었다고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다. 패전의 상처와 살인적인 인플레이션을 안고있는 나라에서 활동하고 있는 학자에게 민법의 3대원리를 금과옥조처럼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자기의 본분을 포기하라는 소리나 다름없지 않을까?[36] 민법의 이러한 문제는 대한민국에서도 제기될 수 있다. 예컨대, 친분관계에 의해서 빚보증을 선 사람이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어마어마한 채무를 지게 된다면 이를 '계약은 지켜져야 한다(pacta sunt servanda)'의 도그마에 갇혀서 이를 고스란히 이행하라고 책임을 지운다면 이게 법에서 지향하는 공평의 원리에 합당한 일인가?
신의성실 원칙이 민법의 지도적 원리라고 보는 것이 부담스럽다면 민법 제103조와 제390조와 제750조처럼 하나의 일반규정으로 이해하면 족할 일이다. 제103조의 광범위한 내용에 의해서 무효가 될 수 있는 법률행위가 상당히 많지만, 학자들이고 실무자들이고 유형에 따라서 체계적으로 이해하려는 움직임을 보이는데 '신의성실 원칙'에 대해서 들어내야 할 규정으로만 바라보면 문제가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 법 현실을 미루어 볼 때 '신의성실의 원칙'은 법관이 멋대로 계약 내용을 정하는 수단이 아니라 계약의 내용이 갖고 있는 의미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다. 임대차 계약서를 보더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아무리 정할 것이 많더라도 A4 한장이면 OK인데, 외국에서는 심지어 책으로 만들어도 될 만큼 두꺼운 분량을 갖고 있다. 외국의 현실에서 신의성실을 운운하며 법관이 계약의 내용에 개입하러 든다면 쓸데없는 간섭으로 비추어질 여지가 상당하나,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이것을 계약 내용의 쓸데없는 간섭으로 보는 것은 문제있는 발상이 아닐 수 없다. 계약의 내용을 상세하게 정하도록 장려하는 것이 좋겠지만, 우리나라 사회생활에서 소소한 내용을 계약서에 남기는 것을 좋은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어디에 있을까?
신의성실의 원칙의 적용은 민법에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상법은 물론 민사소송법에서도 확대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1990년 민사소송법이 개정되면서 '''신의성실 원칙'''을 규정한 저의를 젊은 민법학자들은 '''나치스의 부활'''로 볼 것인가? 친일파의 조상땅찾기를 신의성실 원칙에 반해 소의 이익이 없다고 각하한 하급심 법원의 판단을 '''롤란트 프라이슬러'''의 부활로 봐야할까? 상법 특히 회사법에서 대표권 남용의 제한 근거로 다수의 상법학자들이 신의성실 원칙에서 구하고, 법인격부인론의 근거도 거기에서 찾는다면 대체 뭥미??? 형법에서도 부작위범의 성립요건 중 하나로서 '보증인지위'를 정할 때 신의성실 원칙도 기준이 된다고 하는데 이거 먹는 건가요?
게다가 곽윤직 교수는 자신이 내세우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근거로 헌법 제119조 제2항을 내세우고 있다. 곽윤직 교수의 견해를 비난하려면 제119조 제2항이 어떻게 민법의 지도원리를 내세우는 신의성실의 원칙을 끌어낼 수 있는가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는데 비난하는 학자중에 이런 총대를 매는 사람은 아직까지 없다.
결정적으로 '신의성실의 원칙' 자체는 '''프랑스 민법에서 최초로 명시된 것이다.(프랑스 민법 1134조)''' 이래도 과연 독일과 일본의 잔재라고 우길 수 있을까?

4. 곽서


1963년부터 1971년까지 '''8년에 걸쳐'''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총론, 채권각론 교과서가 완간된 이래 한국 민법학계의 바이블 위치에 있다. 1980년대 후반 이영준 변호사의 교과서가 그의 아성에 강력히 도전했으나 KO 패로 끝났다(...).
곽서의 가장 큰 장점은 읽기 쉽다는 점이다. 이 글을 읽고 있을 초심 법학도들은 '곽서'라고 하면 학설 범벅인 데다가 한자 투성이 책일 것이라고 지레 겁을 먹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한글판으로 나온 민법총칙과 물권법 교과서는 전혀 그렇지 않다. 실제로 읽어보면 독자들이 읽기 쉽게 평이한 문체로 서술되어있음을 금방 알 수 있다. 강사저나 다른 교수저를 읽다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다면 백과사전처럼 해당 부분만 찾아가서 읽어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특유의 굵은 줄이 몇 줄 들어가 있는 표지는 독일 법학 교과서의 디자인을 가져온 것이라고 한다. 이 디자인은 오랫동안 많은 법학 교과서들이 따르는 디자인이기도 하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예전만큼 최우선순위로 잘 읽히지는 않는다. 그 이유: 첫 번째로 개정 간격이 보통 '''10년''' 정도로 넓기 때문에[37] 다른 교과서나 신림동 강사들의 수험서에 비해 최신 판례가 덜 반영되어 있다. 두 번째로 곽윤직 교수의 책은 학문적 이해를 돕는 책인지라, 세세한 부분까지 이런저런 이론들이 너무 많이 나열되어 있어서 효율적 합격을 목표로 하는 수험서로서는 읽기 힘들다. 이 때문에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김준호 민법강의가 수험서로 인기를 얻기 시작하였고, 요즈음에는 지원림 교수의 민법강의(흔히들 "지저"라고 부른다)가 많이 읽히는 편이다. 물론 이는 어디까지나 수험서적인 측면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곽서 자체는 지금도 손꼽히는 명저라 할 수 있다.
실제로 신정판까지는 학설 및 이론 등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어 많은 실무가들과 연구자들이 두고두고 참조하는 책이었다. 그러나 1998년 발간된 민법총칙 신정수정판부터 내용을 줄여나가기 시작하였고, 현재는 다른 교과서들에 비해서도 그닥 내용이 많지 않다. 이는 1992년부터 '''민법주해'''라는 실무가들과 연구자들을 위한 주석서가 출간되었으므로, 교과서에는 학부 학생들이 민법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수준의 내용만 남기면 충분하다는 판단하에 제도의 연혁이나 법제사적 기술, 외국의 학설 등을 거의 모두 덜어냈기 때문이다.[38]
2012년부터는 김재형 교수(곽 교수의 제자인 양창수 대법관의 제자)가 공동저자로 개정판을 내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사실상 김 교수가 개정작업을 도맡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민법총칙과 물권법의 개정판만 나온 상태에서 2016년 김 교수가 이인복 대법관 후임으로 대법관이 됨에 따라, 적어도 6년간은 개정판이 나오지 않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만약 김재형 대법관이 채권총론 및 채권각론 까지 개정판을 내었더라면, 수험서에 들어가기 전에 민법을 이해하기 위한 용도로 읽기 좋았을 텐데 아쉬운 노릇이다.

5. 인간됨에 대한 평가


공부 이외의 일에는 신경쓰는 것 자체를 싫어했고, 한번 일에 몰두하면 무서운 집중력으로 일을 했으며, 점심 식사마저 귀찮아서 거르는 일도 예사였다고 한다.[39] 취미도 바둑 두고 가끔 골프를 치는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3급 실력인 바둑[40]도 골몰해서 둔다면 휴식이나 오락의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굉장한 속기로 두었다고 한다.
퇴임한 후에는 후배 교수들이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학교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는 귀감을 보여주었다. 1995년 고희(古稀)기념논문이 출간돼 후학들이 열어준 행사에 참석했을 때, "이런 자리가 쓸데없이 시간을 허비하는 허식의 자리가 돼서는 안 된다"며 예고없이 '상속법, 재산법인가 가족법인가'라는 논문을 발표해 후학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41][42]
호가 후암(厚巖)인 이유도 그저 후암동에 오래 살았다는 이유로 후암이다. 서재의 책을 옮기는 번다함이 싫어 1965년부터 2018년까지 계속 같은 집에서 살았다. 어떻게 보면 가장 교수다운 교수였고, 우리나라 법학발전에 그 누구보다도 공헌한 바가 큰 사람이다. 지금도 많은 법학도들은 그에 대해서 "우리나라 법학교과서들 중에 민법 교과서들이 가장 읽을 만하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 놓은 데 가장 크게 기여하신 분은 바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곽윤직 교수님이시다."라고 얘기한다고 한다.

6. 여담


낙엽이 나무에서 떨어지는 걸 보고 '부동산동산이 되었구만'[43]이라는 말을 했다고 하여 소위 리걸 마인드(Legal Mind)의 정점을 보여주는 일화라고 소개되기도 한다.[44]
정년퇴임 후인 1997년 학교 측의 초청으로 특강을 하는데 질문시간에 어느 학생이 "교과서를 파셔서 돈을 얼마나 버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하자 "내가 지금 처와 미혼의 대학원생 막내딸과 셋이서 함께 살고 있는데, 세 식구가 부족한 것 없이 살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1] 상속법은 곽윤직 교수의 민법강의 시리즈에 포함이 되나, 고시생의 바이블은 아니다. 친족-상속법의 바이블은 김주수 교수가 쓴 '''친족상속법'''이다.[2] 로스쿨 입학생의 평균연령이 30대 미만으로 내려가면서 이제는 곽서를 모르는 사람이 훨씬 더 많다. 법학전공 출신이라도 2009년 이후의 비인가 법대 출신이라면 4년 내내 곽저를 볼 일은 없었다고 봐도 무방한 정도. 1학년 때부터 강사저를 메인으로 보는 학생들이 많기도 하고 1~2학년때에 교수저를 보았다 하더라도 지원림 저, 김준호 저, 양창수 저, 송덕수 저 등을 보는 편이기 때문이다. 더구나 곽서 중 민법총칙, 물권법은 김재형 교수에 의해 최근에 개정판이 나왔으나(최신이라고 해봤자 각각 2013년과 2015년...) 채권총론과 각론은 2003년에 제6판이 나온 뒤로 15년째 개정이 되지 않았으니, 로스쿨 신입생이 손에 잡기 쉽지 않다. 2018년 기준으로 곽서를 알고 있는 로스쿨생이라면 책을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은 알고 있는 경우거나 고령의(...) 사시 유경험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라고 하나 로스쿨생 중에 과연 곽윤직을 모르는 이가 있기나 할까 의문일 정도이다. 민법수업을 듣다보면 좋든 실든 거쳐서 듣게되는 학자이기 때문.[3] 곽서를 읽어보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여야 하고(=곽 교수의 입장), '''다수설과 판례도 나와 같다.'''』[4] 법체계상으로는 헌법이 최상위 법규범으로서 민법을 포함한 모든 법률이 헌법에 근거를 두지만, 법학의 원류는 민법학에 있으며, 따라서 가장 잘 발전되고 법적 사고의 기초를 배우는 데에 적합한 분야가 다름 아닌 민법이다. 원래 정치의 세계는 법논리가 그대로 적용되는 데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법과대학에서도 가장 먼저 배우는 법과목이 민법총칙이다.[5] 곽윤직 교수는 선배인 김증한 교수에게서 민법강의를 들었다. 혹독했던 김증한 교수의 강의 밑에서 살아남은 학생은 그와 그의 친구 단 2명 뿐이었다고 한다. 독일어와 독일법도 선배인 김증한 교수에게서 배웠다.[6] 김증한 교수와 곽윤직은 고작 5살 차이만 나므로 스승이라기보다는 선배에 가까웠다. 그러나 김증한 교수는 1988년에 사망한 반면 곽 교수는 선배보다 30년을 더 살았다.[7] 그는 경성제국대학이 아니라 서울대를 나온 최초의 서울대 법대 교수였다.[8] 군복무 직후 고등고시 시험이 있었는데 사법과가 2달, 행정과는 3달 남았더란다. 그래도 행정과가 여유있다는 생각에 시험을 봤는데 2등으로 덜컥 붙어버렸다고 한다.[9] 그 당시 외교관을 권유받았지만 강의나 하겠다며 학교로 되돌아 왔다고 한다. 그때 여유가 있어 사법과를 보아 합격했다면, 법원에 들어갔을 것이므로, 교수가 안 되었을지도 모른다고 회고한 적도 있다.[10] 1945년 ~ 1957년까지는 일본 민법을 그대로 적용했다. 지금은 그 시절의 판례를 공부하는 경우가 드물지만, 가끔 등장할 경우 '의용민법'이 적용된 판례라는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의용민법이 일본 민법을 말하는 것이다.[11] '''민사소송법'''의 그 이시윤이 맞다.[12] 당시 함부르크대학교 로마법세미나의 어떤 젊은 독일인 조교는 곽윤직 교수를 대할 때마다 부동의 차렷자세를 하고 서서 아주 깍듯한 예절로 대우를 해주었다고 한다.[13] 당시 좌담회에 참석한 사람은 서민, 손지열, 김황식 그리고 양창수.[14] 우리나라 민법의 시초가 만주국의 만주민법인데, 그 만주민법의 틀을 마련한 사람이 와가쓰마 사카에다. 여담이지만 우리나라의 부동산 점유취득시효제도는 이 사람이 만든 만주민법에서 가져온 제도이다.[15] 실제로 곽윤직 교수는 대학 시절 독일어를 열심히 공부했고, 헤르만 헤세의 '청춘은 아름다워', 루돌프 폰 예링의 '권리를 위한 투쟁' 등을 탐독했다고 한다. 이때 배운 독일어 실력이 일본책을 통하지 않고도 민법을 연구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다고 한다. 그러나 그의 연배 대부분의 교수님들이 그렇듯 곽윤직 교수도 독일어나 영어보다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사람이었고, 그의 교과서도 독일이론보다는 일본이론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게 사실이다. 우리나라 민법 교과서 가운데 독일이론을 제대로, 그리고 풍부하게 소개한 첫 번째 책은 독일유학파인 고려대 법대 김형배 교수의 저서이다.[16] 이용훈, 양창수, 김황식, 양승태, 양삼승, 민일영, 김용담, 손지열, 서성, 윤재식 같은 사람들을 그 대표적 예로 들 수 있다. 이 중에 전직 대법관, 대법원장이 몇 명이나 있나 살펴보자. 말 그대로 우리나라 사법부의 로열패밀리 소속원들이라고 할 수 있겠다. [17] A를 받은 중에는 인권 변호사로 명망을 떨친 조영래가 있었다. 민법은 아니지만 '독일 법제사' 과목에서 이영준 변호사도 A를 받았는데, "아주 훌륭한 답안이었다"고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칭찬을 할 정도였다.[18] 강의실에 학생들은 넘쳤지만 앞자리는 항상 텅 비었다고 한다. 안 들을 수는 없고 듣자니 곽 교수의 눈초리가 너무 매서웠기 때문이다. 학생들에게 질문도 아주 날카롭게 했고, 대답이 부족하면 매우 심하게 무안을 주었다고 한다.[19] 선배인 김 교수에게 배운 독일어와 독일법은 두고두고 그에게 평생 밑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했다.[20] 참고로 김증한 교수는 경성제국대학을 졸업하였고, 대법관과 검찰총장까지 지낸 아버지를 둔 금수저에다가 훤칠한 키에 미남이었지만, 곽윤직 교수는 경성법전 출신에 작달막한 키의 추남이었기 때문에, 김증한 교수에 대해 열폭을 한 것이었다는 뒷말도 있음. 어쨌든 김증한 교수의 교과서 가운데 특히 물권행위에 관한 부분은 곽윤직 교수의 맹렬한 어그로를 맞았다.[21] 제자는 스승을 닮기 때문인지, 양창수 대법관도 서울대 법대 교수 시절 수업시간에 곽윤직 교수의 학설을 신랄하게 비판해댔다(...).[22] 특히 상속에 대해서 곽윤직 교수는 이를 재산법 분야라고 강조하며 상속법 책을 냈으나, 그에 대한 김주수 교수의 비판이 거셌다. 일설에는 모 대학에 강연을 가서 1시간 동안 곽윤직 교수의 상속법에 대한 비판(...)만 하고 왔다는 말이 있다..[23] 그 탓에 민법주해는 가족법 파트가 없다. 아무래도 이 분야는 김주수 교수가 본좌인지라(...)[24] 최근 들어 현실참여로 나름의 명망을 떨치고 있는 서울법대 조국 교수 같은 사람들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 서울법대 선배교수인 곽 교수와 완전히 다른 노선을 가고 있는 게 사실이다. 물론 이것은 옳고 그름의 문제보다는 두 교수의 학문을 대하는 차이에서 기인한다. 곽윤직 교수의 이론은 정치한 논리 체계에 기반한 순수 법학에 가까운 반면, 조국 교수는 논리적 정치함은 조금 떨어지기는 해도 사회참여적이다.[25] 서민 교수는 채권양도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비록 교과서를 쓰진 못했지만 훌륭한 논문을 많이 쓰고 정부에서 추진하는 제도정비작업의 위원으로 활약하여 1998년 국민훈장 모란장을 수여받았다. 서민 교수가 충남대학교를 정년퇴직하였을 때 기념논문집을 헌정받았는데 그 서문을 쓴 사람이 양창수 교수였다. 정년퇴직, 환갑 혹은 고희를 맞았다는 이유만으로 기념논문집을 받는 법학계의 세태에 대해서 큰 불만을 표시한 양창수 교수가 서민 교수에게만큼은 예외로 서문을 써주었다. 서민교수는 정년퇴임한지 12년이 지난 지금도 법무부의 특별임명(이라고 쓰고 바짓가랑이 붙잡기라고 읽는다)에 의해 10년간 법무부 산하 민법개정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6] 대표적인 인물로 숙명여자대학교 백경일 교수를 들 수 있다. 젊은 학자는 아니지만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인 백태승은 다른 학자와 공저로 출간한 '''법학개론''' 에서 아주 대담하게 곽윤직의 견해에 대해 비난을 가하고 있다.[27] 사회주의 법권도 공공복리가 최고 아니냐는 반론도 물론 존재하겠지만, 사회주의 법권에서는 민법 자체가 존재하지 않거나 유명무실하고, 설령 존재하더라도 그 최고원리는 '공공복리'와 같은 관료적 개념이 아니라 '사회적 연대' 같은 비관료적 개념들임에 예외가 없다.[28] 독일어로는 'Grundregel 1 im Entwurf eines Volksgesetzbuches für den Nationalsozialismus'라고 한다.[29] 독일의 라렌츠 교수는 마치 한국의 곽윤직 교수처럼 독일 고시생들에게 바이블로 통하던 민법 교과서 씨리즈의 저자였으며, 1940~1960년대에 독일 최고의 민법학자로 군림하던 사람이기도 하였다. 곽윤직 교수의 민법 교과서 디자인은 바로 이 라렌츠 교수의 민법 교과서 디자인을 그대로 본딴 것이다. 라렌츠 교수는 나치 독일 시절 나치에 부역하여 나치 민법학 이론을 정립하는 데 최선봉 역할을 담당하였으나, 나치 패망 이후에는 재빨리 변신하여 독일 전통의 자유주의 민법학 이론으로 돌아와 이를 계속해서 이어나가고 발전시켰다. 그런데 곽윤직 교수가 받아들인 라렌츠 교수의 이론은 유감스럽게도 나치 시절에 라렌츠 교수가 잠깐 취했던 이론이었다.[30] 독일어로는 'Die Wandlung des Vertragsbegriffs'라고 한다. 'Deutsches Recht'라는 학술지의 1935년도판 488페이지부터 나온다. 나치법학이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유명하고, 라렌츠 교수에게는 일종의 흑역사와도 같은 논문이다.[31] 물론 라렌츠 교수는 이 논문에서 전개한 학문적 입장을 나치 패망 이후 즉시 철회하였다. ("그들이 그렇게 쓰라고 시켜서, 무서운 나머지 그렇게 썼어요... ㅠㅠ") 그런데 독일에서는 이미 버려진 지 오래인 이러한 이론을 곽윤직 교수는 그대로 수입하여 수십년 동안 그의 민법학 교과서를 통해 우리나라에 전파하였고, 심지어는 우리나라 거의 모든 엘리트 법률가들의 머릿속에 이를 계속적으로 주입해오시기까지 했으니... ㄷㄷㄷ[32] 실제로 곽 교수가 대학에서 민법수업을 들을 때는 일제가 1930년대에 들여놓은 법전을 봤고, 일본학자들 책 번역서 몇 가지를 본 것이 전부였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 손으로 책을 만들어 보자는 오기가 일었다고 했을 정도다.[33] 다만, 실무와 학계에서 어디까지나 신의성실의 원칙은 최후의 수단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34] 심지어는 우리나라 법조계의 '전관예우' 관행을 만들어낸 이론적 원흉이 바로 곽교수님이라는 음모론까지 있다.[35] 하토야마 이치로 수상의 동생으로, 도쿄대 민법교수를 역임하였다.[36] 사적자치, 계약자유, 과실책임의 원리가 구현된 결과가 19세기 하층민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상이었다. 경제적 약자들은 '사적자치'와 '계약자유'라는 명목하에 경제적 강자인 자본가들에게 노동력을 수탈당했고,(우리 공장에서는 공장주의 자유로운 결정에 따라, 노동자들에게 주는 임금은 이 정도다. 계약이야 자유니까 너 하기 싫음 말고.) '과실책임주의'의 명목 하에 공장에서 사고 등으로 노동력을 잃어도 '당신이 실수한 거지 우리 공장이 잘못된 것이 아니니 우리 공장은 책임 안 진다.' 식의 비참한 삶을 살았다. 물론, 이러한 사례는 노동법이라는, 근로관계에 적용되는 특별법의 제정으로 인하여 해결되는 것이 바람직하며, 또한 그렇게 해결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결국 노동법 또한 개인 대 개인의 관계를 규율한다는 점을 감안하여, 넓은 범주에서의 민법의 하위 카테고리에 포함될 수 있음을 고려해 본다면, 곽윤직 교수의 주장에 대한 비판은 심히 부당한 측면이 있다. 공장주의 이러한 횡포를 제어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체의 공공복리를 위하여, 권리를 남용하지 못하도록 규율하고, 신의성실하게 공장주로서의 책임을 다할 것을 요구해야하지 않을까? [37] 그에 따라 곽서 중 채권총론, 채권각론은 아직도 한자로 된, 몇 안 되는 법학서 중 하나로 남아있다.[38] 곽윤직 저, 민법총칙 제7판 서문 참조.[39] 보통 식사는 오후 1시쯤, 밤 10시쯤, 이렇게 2번 먹는 것이 다였다고 한다. 그 덕분인지 위장병을 얻어서 위절제수술을 받기도 했다. 그 수술 당시 전신마취의 후유증으로 기억력이 많이 쇠퇴했다는 후문도 있다. 거기다 원래부터 '아침형 인간'과는 거리가 멀어서, 보통 새벽 4시까지 책을 뒤적이고 오전 11시쯤 늦게 일어나는 습관을 갖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담배도 하루에 1갑 이상을 피웠다고 한다. “줄인다고 줄인 게 1갑이에요. 나 같은 사람에게 담배는 밤의 벗이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40] 같은 서울대 법대 교수인 정희철 교수가 그에 대해서 "곽윤직 교수는 나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났다. 오로지 바둑만 예외였을 뿐이다."라고 평가했는데, 그에 대해 곽윤직 교수는 "바둑도 내가 더 뛰어났지요."라고 대꾸했다고 한다.[41] 참고로 곽서가 최고 전성기였을 때를 포함해도 민법의 1/5에 해당하는 친족상속법에서만큼은 단 한 번도 김주수 교수의 위상과 인지도를 이긴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인지 어쩐지 곽윤직 교수는 상속법이 가족법이 아닌 재산법이라고 주장했고, 친족상속법 중 친족법은 김주수 교수에게 밀리는 것을 인정하더라도 상속법에서나마 우위를 차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두 교수 사이의 견해 차이는 논문을 봐도 알 수 있지만 서문을 봐도 알 수 있다.[42] 그래서 곽서는 친족법이 없고, 민법총칙, 물권법, 채권총론, 채권각론, 상속법으로 다섯권이다.[43] 수목은 토지(부동산)의 일부분이며, 입목등기(입목등기에 관한 법률에서 정한 절차에 따라, 관청에 수목을 자기 명의로 등기하는 것)나 관습법상 명인방법(나무에 페인트로 이름을 쓰거나, 나무 주변에 줄을 두르고 팻말을 세워 '이 나무는 제 겁니다'라고 표기하는 등의 방법으로 소유권을 표시하는 것)에 의하여 토지와 별개의 물건으로 구분 지을 수 있지만 이 경우라도 벌목하기 전에는 토지에 정착한 부동산이다. 낙엽은 유체물이므로 물건이고(민법 제98조), 부동산이 아니므로 동산이니깐(민법 제99조 제2항) 오직 민법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정확한 말이긴 하다(...).[44] 다만 이 일화는 일본 민법학회에서 나온 시구(詩句)였다는 말도 있긴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