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나우두/국가대표 경력
1. 개요
호나우두의 국가대표 경력을 서술하는 문서.
전세계를 통틀어서 4회 연속으로 FIFA 월드컵에 출전하는 축구선수는 절대로 흔하지 않다. '''특히, 재능이 넘치는 인재들이 마르지 않는 브라질 출신의 축구선수라면 더욱 그렇다.'''
심지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에 뽑히지 못해서 다른 국가로 귀화를 한 뒤 국가대표로 뽑히는 브라질 출신 축구선수들이 많을 정도다. 대표적으로 포르투갈의 페페, 데쿠. 그리고, 스페인의 디에고 코스타나 마르코스 세나가 있다. 그러므로, 이 문서는 그의 천재적인 재능을 잘 보여주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2. 1994 FIFA 월드컵 미국
[image]
1994년 미국 월드컵에서 처음으로 카나리아 군단의 엔트리에 들었으나 베베투, 호마리우, 둥가처럼 기라성같은 쟁쟁한 선배들에게 밀려서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했다[3] . 하지만, 그는 월드컵에 출전하지는 못했지만 상당한 경험을 쌓았다고 이야기를 했었다.
이 시기의 그는 호나우지뉴, 즉 '작은 호나우두'라고 불렸다. 왜냐하면 이미 A매치 14경기를 뛴 수비수 호나우두가 대표팀에 있었기 때문이다[4] . 그리고 약 10년 후 외계인이라고 불리던 공격수 호나우지뉴도 똑같은 이유로 평생 호나우지뉴라고 불리게 된다. 그러나, 카나리아 군단은 호마리우의 경이적인 활약으로 4번째 우승을 차지했고, 호나우두는 생애 첫 FIFA 월드컵 우승을 경험하게 된다.
더불어, 당시 국내 언론이나 방송에서는 영어 발음인 로날도라고 불렀다.
3. 1996 애틀랜타 올림픽
[image]
[image]
이 당시까지 호나우두는 호나우지뉴로 불렸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에선 주전 스트라이커로 출전, 브라질, 헝가리, 나이지리아, 일본으로 구성된 D조에 소속되어 꿀조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카타 히데토시가 이끌던 황금세대 일본과의 첫 경기, 브라질은 파상공세를 퍼붓고 이에 경기 내내 브라질 아나운서가 매우 찰진 음성으로 골키퍼 까와~구치를 연호할 정도로 일본은 힘든 경기를 펼치나 실점만은 기어코 막아낸다. 끝내 포백에 더블 볼란치로 단단하게 정비한 일본의 골문은 열리지 않고 오히려 브라질의 골문이 열리며 1:0 패배. 이후 경기에서 호나우두는[5] 헝가리 상대로 선취골을, 나이지리아 상대로도 선취골이자 결승골을 넣는다. D조는 승점셔틀이었던 헝가리를 제외한 일본, 나이지리아, 브라질은 서로 6점을 기록하게 되고 브라질은 득실차로 간신히 토너먼트에 올라간다.[6]
가나와의 8강전에서 호나우두는 2골을 넣으며 승리를 이끌었고, 검은 돌풍 나이지리아와 4강에서 다시 한 번 맞붙으며 희대의 명경기를 연출한다. 브라질은 시작하자마자 콘세이상의 수비벽 맞은 행운의 프리킥이 터지며 경기를 리드한다. 허나 나이지리아의 공세 앞에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자책골이 터지며 경기는 원점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동점이 되기가 무섭게 골키퍼가 펀칭한 호나우두의 슈팅을 베테랑 베베투가 주워먹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주닝요의 환상적인 어시스트를 콘세이상이 득점으로 연결하며 승부는 기운 듯 보였다. 허나 경기 내내 공격적이고 소울 넘치는 아프리카 축구로 일관한 나이지리아는 역습의 역습으로 멋진 추격골을 터트리고, 기세를 이어 브라질을 몰아붙이며 90분에 롱 스로인에 이은 문전 혼전 상황에서 은완코 카누가 동점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는 연장까지 간다. 이후 길게 갈 것도 없이 연장전 4분 만에 환상적인 등짝 패스를 받아 은완코 카누가 역전 골든 골을 터트린다.[7]
3, 4위전에서 브라질은 포르투갈을 맞아 5:0으로 분풀이를 한다. 호나우두는 선취골을 기록하며 동메달을 차지한다.
4. 1997 코파 아메리카
주요 성인 대회에서 그의 국가 대표 커리어가 시작된 것은 97년도 볼리비아 코파 아메리카였다. 준결승에서 만난 페루를 7:0으로 짓밟는 위엄 넘치던 팀이던 브라질은 6경기에 3골만 먹히고 22골을 처넣으며 가볍게 전승우승, 호나우두는 볼리비아와의 결승전에서 결승골을 기록하고 파라과이와의 준결승에서 골키퍼 호세 루이스 칠라베르트에게 페널티 킥을 막히며 아쉽게 해트트릭을 실패하는 등 주전 스트라이커로서 5골을 기록하며 활약했다. 그리고 대회 최우수 선수 선정 및 결승전 mom도 먹었다. [8]
5. 1997 투르누아 드 프랑스[9]
[image]
1998 프랑스 월드컵의 전초전 형식으로 치뤄진 4개국 초청대회에 호나우도도 브라질 대표팀으로 참가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컨페드컵의 성격을 띄었으나 당시 컨페드컵이 대륙간컵이라는 이름으로 사우디에서 열렸던 관계로 친선경기로 분류된다. 참가팀은 브라질, 이탈리아, 잉글랜드, 프랑스였는데 원래는 이탈리아 대신 독일이 출전하기로 되었으나 갑작스런 불참의사 통보로 이태리가 대신 참가한다. 4개국 모두 우승후보로 분류되는 팀들이라 매경기 매경기가 흥미진진의 연속이었다. 대회는 잉글랜드가 2승 1패로 우승. 잉글랜드에 저 1패를 안긴 팀이 바로 브라질이다. 브라질은 첫경기와 두번째 경기인 프랑스와 이탈리아와 무승부를 기록했지만 잉글랜드를 잡아내면서 유일한 무패팀으로 대회를 마감한다. 데뷔 후 A매치 전승 (1997년 4월 노르웨이전 패배 제외)을 이끌고있던 호나우두-호마리우 콤비의 환상적인 플레이를 팬들은 기대했었지만 정작 이 대회의 최고 브라질 스타는 데닐손이었고, 호나우두는 이 대회에서 이탈리아 전에서만 1득점을 올리는데 그쳤다.
6. 1997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12월에 열린 사우디아라비아 컨페더레이션스 컵에서도 브라질은 5경기 4승 1무, 12골을 넣고 난적 멕시코에게만 2점을 내주며 당연한 듯 우승한다. 특히 호주와의 결승전은 결승전인지 양학의 현장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브라질이 시종일관 호주를 썰어대며 6:0의 참극을 만들어냈다. 23분경 비두카가 카푸에게 장절한 로우 킥을 날리며 퇴장당한 이후 호주는 아무것도 못했고, 이 경기에서 호나우두는 호마리우와 사이 좋게 3골씩 해트트릭을 기록한다. 호나우두는 대회 총 4골을 넣었지만 동료 스트라이커였던 호마리우가 득점왕과 실버볼을 차지한 것에 비해 4골로 브론즈 슈를 차지하며 살짝 밀리는 모습을 보여줬다.[10]
7.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image]
98년 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호마리우의 다리에서 꽤 큰 부종이 발견된다. 원래 호마리우와 호나우두가 투톱을 이룰 예정이었으나 호마리우가 엔트리에서 탈락되었고, 호마리우가 나간 자리에는 베베투가 들어왔다. 호나우두는 명실상부한 브라질의 주전 스트라이커였고, 넓은 활동범위와 상당히 이타적인 플레이를 선보이며 대회 기간동안 4골 3어시를 기록했다. 그는 조별 예선 모로코와의 경기에서 선제골을 넣었고, 칠레에 4:1로 승리한 16강 경기에서 2, 3번째 골을 넣었다. 그리고 1:1로 비겨 승부차기로 브라질이 진출한 네덜란드와의 경기에서 황금 같은 선제골을 터뜨렸고 승부차기에서도 첫 번째 키커로 나서 골을 성공시키면서 결승전에 진출한다.
그러던 중 결승전이 시작되기 바로 직전에 브라질의 에이스였던 호나우두가 명단에서 제외된 것이 알려지고, 전 세계는 이에 충격에 빠지게 된다. 마침내 호나우두가 다시 명단에 들어온 것이 알려지면서 이에 대해 사람들은 행정상의 실수이었다는 둥 아니면 경기를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술책이었다는 둥 여러 말이 나오게 되고 마침내 결승전이 시작하지만 별 활약을 못 보여주고 지단의 프랑스에 3:0으로 패배하며 우승컵을 넘겨준다. 호나우두는 결승전 내내 무기력한 플레이로 일관하며 패배의 주범 혹은 2인자로 지목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결승전이 시작하기 전 MVP를 선정하였고 또 결승전을 감안하더라도 대회 내내 좋은 활약이었기에 호나우두는 골든 볼을 수상한다.[11]
당시 브라질 대표팀의 허무한 패배를 두고 말이 많았는데, 가장 유행하던 찌라시는 호나우두가 경기 전 간질 증세를 보여 컨디션이 영 아니었고, 뛰어서는 안 되는 상태였었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이 아니다'''. 결승전 하루 전, 호나우두는 여느 때처럼 숙소의 TV 앞에 누워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파라소니아(몽유병과 같은, 수면 중 나타나는 비정상 증세) 증상으로 인해 나타난 수면 중 몸을 떠는 현상[12] 이 룸메이트였던 호베르투 카를루스에게 발견되었고, 이 장면을 보고 굉장히 충격을 받은 호베르투 카를루스는 대표팀이 머물던 호텔이 떠나가도록 소리를 질렀다. 열 명 정도 되는 선수들이 우르르 몰려들었고, 그 중 세자르 삼파이우는 호나우두에게 간단한 응급처치를 해 주기도 했다. 이런 것은 팀 닥터였던 리디우 톨레두조차 처음 보는 증상이었기 때문에, 그는 호나우두가 수면 중에 떨고 있는 모습을 보고 상당히 놀라 진료 카드에 '수면 중 간질과 유사한 발작 증세를 일으킴'이라고 적었다. 그러나 호나우두는 사실 평상시와 다름없는 괜찮은 상태였고 오히려 호나우두가 침대 위에서 거품을 몰던 모습을 봤던 선수들이 정신이 산만해졌다.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과장된 설명과 의사의 진단 때문에 선수들은 호나우두를 매우 걱정했고, 잠에서 깬 후 멀쩡하게 돌아다니는 모습에 오히려 신기해했다. 선수들이나 코치진 중 아무도 잠에서 깨어난 호나우두에게 낮잠 자는 동은 일어났던 일을 말하지 않았고 호나우두 자신만 모른 채 경기가 진행되었다. 호나우두는 이 날의 일에 대해 회고하였는데, '''점심 식사 후 오후의 회의에서 호나우두가 갑자기 3~4분간 의식을 잃었고 의사는 호나우두를 따로 불러 호나우두가 경련을 일으켰다고 설명하며 결승전 경기에 뛰면 안된다고 말했다 한다.''' 이 의문의 경련 혹은 발작의 원인은 아무도 모르지만, 호나우두 본인은 압박감이나 긴장이 원인일 수 있음을 부정하지 않았으며 실제로 데이비드 옐롭의 저서인 '누가 월드컵을 훔쳤나'와 조르제 칼데이라의 '호나우두, 한 축구영웅의 시련과 영광의 드라마'같은 책들을 읽어 보면, 그 당시의 심정을 결승전이 끝난 며칠 후 호나우두는 "브라질 국민 전체가 나에게 기대 오는 것만 같았다." 라고 부담감을 토로한다. 이후 호나우두는 수많은 테스트를 했지만 결론을 얻지 못했고, 모든 팀원들이 호나우두의 발작으로 인해 충격에 빠지며 그들을 결승전으로 이끌던 자신감을 잃고 만다.
일반적으로 경기를 위해 브라질 국가대표팀이 호텔을 나설 경우 흥 많은 선수들이 사방에 음악을 가득 틀어놓곤 하지만, 그 날 팀버스에 음악은 없었으며 모든 팀원들이 호나우두에 대해 물어보기만 할 뿐이었다. 이후 호나우두가 결승전 명단에 포함된 것에 대해도 숱한 음모론이 나왔는데, 가장 힘을 얻는 것이 당시 스폰서였던 나이키의 출전 압박으로 경기 시작 직전에 선발 명단에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출전조항은 있었다고 하나, 나이키는 선발 명단에 압박을 넣었다는 것을 지금까지도 부인하고 있다.
당사자인 호나우두가 밝힌 결승전 명단에 포함된 정황은, 호나우두의 발작으로 인해 호나우두 대신 에드문두가 결승전 명단에 포함되고 이에 뒤늦게 경기장에 도착한 호나우두는 당시 감독이었던 자갈로에게 "제발요 저는 뛰어야 해요. 아무 문제도 없대요." "병원에 갔었는데 모든게 괜찮대요." '이건 결승전이잖아요. 나는 괜찮아요. 문제 없다고요."라고 말했고 이에 자갈로는 의사의 전화를 기다렸으나 그 포함 어느 누구도 아무 얘기가 없었고, 호나우두에게 괜찮겠더고 묻자 그는 "나는 어린애가 아니라고요."라고 답했다고 한다.
호나우두가 출전하게 되면서 브라질 선수들은 에드문두와 함께 코너킥, 코너킥 수비, 수비, 맨마킹을 함께 준비했지만 이를 바꾸게 되면서 문제가 생기고, 이로 인해 지네딘 지단이 코너킥에서만 두 골을 넣게 된다.
호나우두에게는 이 결승전이 두고두고 안타까울 것이다. 축구에 만약은 없다지만 브라질이 결승전에서 승리하고 이어지는 2002 월드컵에서도 마찬가지로 우승했다면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은 전무후무한 월드컵 3연패(1994-1998-2002)를 이루었을지도 모르는 일이고 호나우두는 이 세 번의 우승에 모두 개근한 주역으로 두고두고 회자되었을 것이다. 참고로 월드컵에서 3회 우승한 축구선수는 오직 '''축구황제 펠레''' 뿐이다.[13]
Castrol Index에서 1998년 전 포지션 통틀어 11위, 포워드론 1위를 했다. 점수는 9.20을 받았다.
8. 1999 코파 아메리카
[image]
1997년 대회에 이어 1999년에 열린 파라과이 코파 아메리카에서도 브라질은 6경기 전승, 17골 2실점을 기록하며 최종 보스로 군림했다. 첫 경기부터 베네수엘라에게 7:0으로 악몽을 선사했고 결승전도 3:0 스코어로 우루과이를 요리하며 손쉽게 우승했다. 주전 스트라이커였던 호나우두와 히바우두는 사이 좋게 5골씩을 넣고 득점왕도 나눠 먹었다. 국가대표 호나우두의 절정기였다.
9. 2002 FIFA 월드컵 한국·일본
[image]
멈추지 않는 상승세였지만, 상술했듯 호나우두는 1999년 말부터 시작해 2년이 넘는 기간을 부상으로 신음했다. 그러나 '''정말 불사조처럼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딱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시점에서 부상에서 회복한다'''. 호나우두에게 이제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한번 세계에 알릴 기회가 찾아왔다. '''그리고 전설을 쓰기 시작했다.''' 브라질이 월드컵 역사상 최악으로 꼽혔던 남미예선을 힘겹게 통과하고 맞이한 월드컵에서 호나우두는 기자들 앞에서 호기롭게 '전 경기 득점'을 공약으로 내세웠고, 조별 예선 첫 경기 터키 전부터 시작하여, 중국, 코스타리카, 16강전 벨기에, 4강전 (다시) 터키, 결승전 독일과의 경기에서 골을 기록(8강전 잉글랜드전에서만 골을 못 넣었다), 총 8골로 득점왕과 함께 실버볼, 그리고 이 활약에 힘입어 발롱도르를 차지했다.[14][15]
10. 2006 FIFA 월드컵 독일
[image]
2006년 독일 월드컵에서는 예선서 10골을 넣으며 남미 예선 최다 득점자가 되었으며, 본선에서는 3골 1어시, 일본과 가나와의 경기에서 3골을 터뜨리며 월드컵 통산 15호골을 기록하여 쥐스트 퐁텐과 게르트 뮐러 기록을 차례로 넘기며 월드컵 통산 최다 골을 기록했다. 19경기 15득점, 경기당 0.78골. 그렇지만 그후 8강전에서 지네딘 지단의 크로스를 받은 티에리 앙리의 골로 프랑스에게 1:0으로 패배하며 기록을 계속 이어나가는 것에는 실패했다.
[image]
이 때 브라질 국민들 반응도 웃겼는데 월드컵 통산 최다 골을 기록했을 때 찬양 일색이던 사람들이 8강에서 무기력한 경기력으로 탈락하자 귀국하던 대표팀에게 한 아줌마가 "호나우두 당신은 살부터 좀 빼라"(...)고 독설을 날렸던 것. 덧붙여서 호나우두의 월드컵 통산 최다 골 기록은 2014년 브라질 월드컵에서 독일의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경신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 기록이 브라질과의 4강전에서 깨져버린 데다가 이 경기에서 브라질은 7-1이라는 치욕적인 점수로 대패를 당하고 말았는데, 심지어 그 경기장에서 호나우두는 해설을 하고 있었다는 거다. 최다 골 타이틀도 빼앗기고 브라질도 대패한 상황에서 호나우두는 착잡함을 감추지 못하였다.
[image]
11. 2011 국가대표 은퇴
[image]
2011년 6월 8일에 열린 브라질과 루마니아의 친선 경기에서, 호나우두는 전반 30분 프레드와 교체되며 세인의 경악을 자아낼 정도로 뚱뚱보가 된 모습으로 나타났다. 35세의 위대한 스트라이커는 후배들의 아낌없는 패스를 몰아받으며 은퇴 경기를 골로 장식할 절호의 기회를 잡았지만 골을 넣진 못했다. 후반 시작과 함께 호나우두는 네이마르와 교체되며 마지막 국대 경기를 끝냈고 그에겐 국가 대표 98경기 62골이라는 기록이 남겨졌다. 그리고 이 경기를 끝으로 그는 클럽과 국가 대표팀에서 모두 은퇴하게 된다.
이처럼 호나우두는 클럽에서도 잘해왔었지만 국가대표로서는 자신이 출전한 거의 모든 메이저급 국가대표간 대회에서 득점왕을 하거나 MVP로 선정되는 매우 빼어난 활약을 해왔다. 짧은 전성기라서 아쉬운 클럽 커리어에 비해 국대에서의 그는 펠레와 디에고 마라도나에 필적하는 대활약을 하며 역사에 그 이름을 남겼다.
[1] 그 유명한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바나나슛"이 나왔던 대회다.[2] 게르트 뮐러의 월드컵 통산 14골 기록을 갱신한 것이며 2014 월드컵에서 미로슬라프 클로제가 16골로 갱신했다.[3] 예전에는 대회에서 1경기 1분이라도 출전한 선수에 한하여 팀 성적을 부여한다는 잘못된 서술이 있었지만, 사실이 아니며, 출전 여부와는 관계 없이 팀 성적은 말 그대로 팀 선수단 전원에게 부여한다. 엔트리에 이름만 올리고 출전은 거의 못 하는 백업 골키퍼들(대표적으로 스페인 축구 국가대표팀의 페페 레이나와 빅토르 발데스)도 결승전 이후 시상식에서 똑같이 우승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트로피 행사에도 똑같이 참가했다. 호나우두도 당연히 이 대회의 우승 멤버로 인정받았다.[4] 당시 브라질 대표팀 엔트리에 있던 호나우두는 브라질에서 현재 '호나우당(Ronaldão, 호나우두 어르신)'이라는 애칭으로 불린다. 하지만 호나우두와 마찬가지로 월드컵 엔트리에만 이름을 올리고 한 경기도 뛰지 못했지만, 우승의 영광은 함께 누린다. 본명은 호나우두 호드리게스 지 지수스(Ronaldo Rodrigues de Jesus)[5] 상술한 1994년 월드컵 당시의 수비수 호나우두와는 또다른 두 살 위의 수비수 호나우두가 올림픽팀에서 같이 뛰어서 당시 호나우두는 호나우딩요라고 불렸다. 참고로 이 또다른 호나우두는 벤피카와 베식타쉬에서 물경 10년을 뛰지만 국제대회 기록은 올림픽이 유일하다.[6] 반대로 일본은 2승 1패를 거두고도 탈락했다. 그리고 2000 시드니 올림픽에서 허정무가 이끌던 한국 올림픽 대표팀이 모로코와 칠레를 1:0으로 이겼으나 스페인에게 패한 0:3 실점으로 골득실로 밀려 일본과 똑같이 탈락했다.[7] 나이지리아는 아르헨티나와의 결승전에서도 극적인 90분 역전 골로 우승하며 검은 돌풍을 과시한다. 참고로 이 때 나이지리아의 감독이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조 본프레레.[8] 그리고 본명도 되찾은 대회였다.[9] 그 유명한 호베르투 카를루스의 "바나나슛"이 나왔던 대회다.[10] 이때의 브라질 공격진은 몹시 화려했는데, 그 면면이 호나우두, 호마리우, 히바우두, 베베투, 데니우손 등이었다.[11] 이 때문인지 2002년 월드컵부터는 MVP 선정을 결승전 하프타임에 실시하는 것으로 변경되었는데, 이때는 올리버 칸이 골든볼 수상자로 뽑힌 후에 후반전에 실책성 플레이로 실점하는 상황이 벌어지는 바람에 2006년 월드컵부터는 아예 결승전 후반전 경기 종료 후 MVP를 뽑는 현행 규칙으로 자리잡았다. 그런데 이때는 MVP 주인공이었던 지네딘 지단이 연장전에서 박치기로 퇴장을 하게된다.[12] '야밤의 공포'라는 증상이라고 한다. 이 증상이 있는 사람은 자다가 갑자기 겁에 질린 표정을 짓고 숨도 불규칙적으로 쉬며 몸을 부르르 떨거나 입에 거품을 몰기도 한다. 당사자는 잠에서 일어나고 나면 이러한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며, 오히려 당사자의 옆에서 이 증상을 목격한 사람이 공포감을 느끼거나 트라우마에 시달리게 된다고 하여 야밤의 공포라고 한다.(출처:호나우두, 한 축구영웅의 시련과 영광의 드라마)[13] 그러나 호나우두는 1994년 월드컵에서 단 1초도 뛰지 못했으므로 펠레하고는 차이가 있다. 펠레도 1962년 월드컵에서 한 경기 출전해 1골 1도움을 기록하고 다음 경기에서 부상당해 남은 대회기간동안 아마리우두가 대신 뛰었으므로 1962년 월드컵에는 사실 크게 기여하진 않았지만 펠레는 부상으로 못뛴 것이고 호나우두는 실력적으로 국대 선배들을 밀어내지 못한 것이기에 차이가 분명하다.[14] 1978 아르헨티나 월드컵부터 월드컵 득점왕은 6골을 넘기지 못한다는 징크스가 생긴 이후 이 징크스를 깬 유일한 사례이다.[15] 다만 호나우두가 월드컵이 치뤄지기 전이었던 본 시즌에서 통합 16경기 정도 밖에 뛰지 못했기 때문에 월드컵 우승뿐 아니라 챔스 우승까지 차지했던 호베르투 카를루스가 더 적절한 수상자였다는 논란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