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무라 슌스케

 

[image]
<color=#373a3c> '''요코하마 FC No. 46'''
'''나카무라 슌스케
(中村 俊輔 / Shunsuke Nakamura)'''
'''생년월일'''
1978년 6월 24일[1] (45세)
'''국적'''
[image] 일본
'''출신지'''
가나가와요코하마토츠카
'''신체 조건'''
178cm, 70kg
'''포지션'''
공격형 미드필더
'''가족'''
배우자 이마이 마나미
'''소속팀'''
요코하마 F. 마리노스 (1997~2002)
레지나 칼초 (2002~2005)
'''셀틱 FC (2005~2009)'''
RCD 에스파뇰 (2009~2010)
요코하마 F. 마리노스 (2010~2016)
주빌로 이와타 (2017~2019)
요코하마 FC (2019~ )
'''국가대표'''
98경기 24골
1. 개요
2. 선수 경력
2.1. 요코하마 1기
2.2. 레지나 칼초
2.3. 셀틱 FC
2.4. 에스파뇰
2.5. 요코하마 2기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5. 기타


1. 개요


일본축구 선수. 현재는 요코하마 FC에서 뛰고 있다.
포지션은 공격형 미드필더.[2][3] 포메이션에 따라 측면 미드필더로 뛴 적이 있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스피드와 체력, 체격 뭐하나 받쳐주지 않고 기술력과 패스로 승부하는 타입인지라 측면에서는(...) 그래서 2000년대 초반 일본에서는 공격형 미드필더 자리를 놓고 나카무라와 함께 나카타 히데토시오노 신지 중 누가 더 나은가를 따지는 키배가 유행하기도 했다.[4]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바로 이나모토 준이치가 몸빵하고 나머지 셋이 공격하는 일본판 황금4중주(...)[5]
정교한 왼발 프리킥과 테크닉 부분만큼은 아시아에서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선수로, 과거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스코틀랜드 리그의 셀틱 FC에이스로 활약했다. 일본에서는 한 때 박지성의 대항마로 나카무라를 내세우기도 했을 정도. 영상
일본 내에서도 상당한 인기가 있는 선수인데, 1999년 일본 천문학자가 발견한 소행성에 나카무라 슌스케의 이름을 딴 '''29986 슌스케'''라는 이름을 명명했을 정도.

2. 선수 경력



2.1. 요코하마 1기


1997년 19세의 나이로 요코하마 마리노스에서 데뷔했으며, 그 해 FIFA 청소년 월드컵에 참가하는 일본 대표팀 명단에 포함되었다. 1999년에는 올림픽 대표팀에 선발되어 오노 신지 등과 호흡을 맞추었으며, 2000 시드니 올림픽 8강 진출에 공헌하였다.
2000년 AFC 아시안컵 예선 당시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어 싱가포르와의 경기에서 A매치 데뷔전을 치렀으며, 브루나이와의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뜨렸다. 이후 대표팀에서 빠르게 주축으로 자리잡아 팀의 2000년 AFC 아시안컵 우승을 이끌었으며, 그 해 리그에서 30경기에 출장해 5골 1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J리그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다.
하지만 2001년 프랑스와의 친선경기에서 0:5로 대패한 이후 개인기보다 팀워크를 중시하는 타입인 필립 트루시에 감독의 눈 밖에 났으며, 2002년 초에 잠시 선발되었다가 무릎 부상을 당한 이후 유럽 전지훈련에서 극심한 난조를 보이면서 '''일본 축구팬들의 절대적인 지지에도 불구하고'''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제외되었다.[6] 덧붙여서 당시 레알 마드리드 입단을 추진했다가 월드컵에 나오지 못해 무산되었다 카더라.

2.2. 레지나 칼초


월드컵 이후에는 350만 달러에 6개월 선 임대 후 3년 계약으로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레지나 칼초로 이적해, 일본에서는 네 번째로 이탈리아에 진출했다.[7] 입단 당시 팀의 에이스를 상징하는 10번을 받았는데, 리그 데뷔 직후에는 '최악의 11'에 선정될 정도로 부진한 모습을 보였지만 이후 기량을 회복해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32경기에서 7골(컵 대회 포함 공식 경기 36경기 8골)을 넣었다. 이 활약 덕분에 시즌 중반부터 AC 파르마 등 여러 구단의 관심을 받았다.# 2003-04 시즌에는 부상으로 16경기에서 2골을 기록해 좋지 못한 모습을 보였지만 2004-5 시즌에는 다시 주전으로 활약하며 레지나 칼초 클럽 창설 이후 최고 순위(10위)에 기여했다.[8]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에서는 필립 트루시에의 후임으로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지쿠 감독의 신임을 받아 미드필더에서 플레이메이커 역할을 완벽하게 소화해냈으며, 2003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프랑스와의 경기를 포함해 3골을 넣는 등 좋은 활약을 보였다.(참고 영상) 그리고 팀의 2004년 AFC 아시안컵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었으며, '대회 최우수 선수'에 선정되었다. 이후 2005년 컨페더레이션스컵에서 브라질을 상대로 골을 기록하는 등 팀의 에이스로 자리잡았으며, 나카타 히데토시와 함께 일본 축구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자리잡았다.(참고 영상)

2.3. 셀틱 F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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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레지나와 계약이 만료된 이후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아틀레티코 마드리드, 독일 분데스리가베르더 브레멘에서 이적 제의를 받기도 했으나, 나카무라의 선택은 스코틀랜드셀틱 FC였다.[9] 이적료는 270만 파운드이며, 연봉은 3년간 40만 파운드를 받는 조건이었다. 이적 이후 스코틀랜드 리그 데뷔전에서 '맨 오브 더 매치'에 선정되었으며, 이후 연속 선발 출전을 하며 네 경기만에 첫 골을 기록하는 등 팀에 빠르게 적응했다. 그 결과 2005-06 시즌 팀의 리그와 FA컵 우승에 기여했으며, 나카무라 본인은 유럽 리그에서 첫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이러한 활약을 바탕으로 스페인 프리메라 리가의 세비야 FC의 관심을 받기도 했다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으며, 나카무라에 이어 두웨이가 셀틱 이적에 성공해 아시아에서 두 번째로 셀틱에 입단한 선수가 되었다.[10] 또한 2006 FIFA 월드컵에 출전해 핵심 선수로 활약했으며, 오스트레일리아와의 조별 라운드 첫 경기에서 선제골을 뽑아냈다.[11]
2006-07 시즌에는 셀틱에서 전성기를 맞이했는데, 던디 유나이티드와의 리그 경기에서 셀틱 이적 이후 자신의 첫 해트트릭을 기록해 '맨 오브더 매치'에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참고 영상) 또한, UEFA 챔피언스 리그 조별 라운드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로 홈 경기와 어웨이 경기에서 모두 득점에 성공했으며, 특히 홈 경기에서는 나카무라의 골이 결승골이 되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1:0으로 꺾고 UEFA 챔피언스 리그 16강 진출을 확정지었다.[12](참고 영상) 당시 나카무라가 터뜨린 프리킥 골은 많은 극찬을 받았으며, 알렉스 퍼거슨이 나카무라에게 관심이 있다는 기사도 나왔다. 팀에서 핵심적인 활약을 보이면서 팀의 리그 우승을 견인했으며, 리그가 종료된 이후 '스코틀랜드 올해의 선수상'을 포함해 개인이 받을 수 있는 상(신인상 제외)을 모두 수상하는 위업을 달성했다.
2007-08 시즌에는 초반 무릎 부상으로 인해 약 두 달 반 가량 경기에 나오지 못했으며, 부상 복귀 이후에는 극심한 부진을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자신의 기량을 회복했으며, 레인저스 FC와의 경기에서 중거리 슛으로 골을 터뜨려 일본 선수 중에서는 처음으로 올드펌 더비에서 골을 기록한 선수가 되었다. 또한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나카무라의 적극적인 추천으로 셀틱이 미즈노 고키를 영입하기도 했는데, 셀틱에서 나카무라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시즌 종료 이후 나카무라의 계약 만료 시점이 다가오자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볼로냐 FC가 나카무라의 영입을 추진했지만, 나카무라는 계약 만료 이후 친정팀인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돌아갈 것이라면서 영입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2008-09 시즌에도 셀틱에 잔류하게 되었고, 리그 100경기 출장과 두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하였다.(참고 영상)

'''142경기 28골 36도움'''


2.4. 에스파뇰


시즌 종료 후 계약이 만료된 이후에는 바이에른 뮌헨으로 이적할 것이라는 카더라 통신이 있었지만, 나카무라 본인은 연봉 120만 유로에 RCD 에스파뇰과 2년 계약에 합의하여 자신이 평소 원하던 프리메라 리가 무대로의 진출을 이뤄냈다. 6000여명의 팬들 앞에서 입단식을 가져 한껏 구단의 기대를 자아냈으며, 리버풀 FC와의 경기장 신축 기념 경기에서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기대가 현실이 되는 듯 했다. 하지만 아틀레틱 빌바오와의 경기에서 데뷔한 이후 비야레알 C.F.와의 경기에서 평점 3점을 받는 등 부진한 경기를 펼쳤으며, 서서히 출전 기회가 줄어들자 잉글랜드 챔피언쉽에 있던 미들즈브러에서 영입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나카무라 본인의 거절로 팀에 잔류했으며, 결국 2월 시점까지 12경기 출전(선발 6번)에 1도움만을 기록하는 저조한 성적을 남겼다. 프리메라 리가 2009-10시즌 최악의 이적 랭킹 1위로 꼽히기도 했다.

2.5. 요코하마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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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2010 FIFA 월드컵에 참가하기 위해서 본인의 친정팀인 요코하마 마리노스로 이적해 일본 무대에 복귀했으며, 데뷔전에서 골을 터뜨려 쇼난 벨마레를 3:0으로 제압하고 팀에 승리를 안겼다. 이후 본인의 소원대로 월드컵 최종엔트리에 포함되어 월드컵에 참가했지만, 대표팀 에이스가 혼다 케이스케로 넘어간 상황에서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고 월드컵이 끝난 이후 국가대표팀에서 은퇴하였다. 은퇴 당시 A매치 98경기 출장에 24골을 기록한 상황이었으며, 이로 인해 일각에서는 센추리 클럽까지 채우지 않을까 여기기도 했지만 다시 복귀하는 일은 끝내 없었다.
J리그로 복귀한 이후 회춘했다는 평가를 듣고있다. 2010시즌 6골 4도움을 기록한 이후, 2011시즌 6골, 2012시즌 8골 3도움, 그리고 2013시즌에는 무려 13골 8도움을 기록하고 J리그 MVP[13]를 차지했으며, 팀에게는 천황배 전일본 축구 선수권대회 우승을 안겼다.[14] 35세라는 나이가 무색한 활약에 자케로니 당시 일본 대표팀 감독도 브라질 월드컵 대표팀 발탁을 고려하기도 했다고 한다.참고 기사 다만 실제로 발탁되지는 않았다.
2016년에는 클럽 사상 최장 기간인 6시즌 연속 주장으로 취임하였다. 하지만 시티 풋볼그룹의 방침[15]에대한 불만과 많은 나이로 인해 선발보다는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아지자 요코하마의 1억2천만엔의 재계약 제의를 거부하였고, 8000만엔의 연봉에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하였다. 이에 대한 여러가지 손실은 엄청났고 급기야 공식홈페이지에 사과문을 게재하기에 이르렀다. 사과문

2.6. 주빌로 이와타


2017년 결국 요코하마 마리노스와의 갈등끝에 주빌로 이와타로 이적했다.
첫시즌에는 괜찮은 플레이를 펼치면서 이와타의 상위권 등극에 공헌했지만, 2018시즌부터 거의 나오지 못했다.

2.7. 요코하마 FC


노쇠화에 따른 폼 저하로 2부리그팀인 요코하마 FC로 이적하게 된다. 이적 초반에도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줬지만, 수비형 미드필더로 리그 후반기에는 선발 출전을 하면서 팀의 승격에 일조했다. 그러나 요코하마와의 재계약 여부는 불투명한 상태라고 한다.

3. 플레이 스타일 및 평가


드리블, 패싱력, 왼발 킥력이 뛰어나다. 특히 일본 대표팀과 소속팀에서 프리킥과 코너킥을 도맡아 찼을 정도로 데드볼 상황에서 강점을 보인다. 그중에서도 왼발 직접 프리킥 능력은 세계 정상급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16] 다만 빈약한 피지컬과 그다지 빠르지 않은 스피드는 단점이다.
일본 축구 국가대표로 A매치 98경기를 뛰며 아시안컵컨페더레이션스컵 등 수많은 국제대회에서 활약했지만 유독 월드컵에서는 큰 활약을 하지 못했다. 2006년 독일 월드컵 때는 조별리그 3경기에 모두 출전해 1골을 넣긴 했지만[17] 전체적인 경기력은 기대 이하였고 2010 남아공 월드컵 때도 신예 혼다 케이스케에게 밀려서 조별리그 2차전 네덜란드전에 후반 교체 출전하는데 그쳤다.
일본에서는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는 편이다. 그러나 셀틱 시절 이후 스페인 라 리가에서 삽질만 하다가 J리그로 복귀하고 A매치에서도 별다른 활약을 보이지 못하던 시기에는 자국의 일부 축빠들에게 대차게 까이기도 했다.[18] 특히 경기후 인터뷰에서는 늘 부상에 대한 핑계가 많아 일부에선 '다리가 아프다'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기도 했다. 일본 미디어가 붙이는 '기적판타지스타'라는 근사한 수식어와는 달리 일본 축빠들이 호칭하는 별명은 キノコ(버섯). 십수년째 불변인 헤어스타일이 이유인 듯 싶다.
반면 한국에선 그의 커리어 중 가장 화려한 시기가 셀틱 FC에서 활약하던 시절이었다는 점에서 별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다. 스코티시 프리미어십(SPL)은 셀틱과 레인저스 FC를 제외하면 다수의 한국 선수가 뛰고 있는 잉글리시 프리미어 리그(EPL)보다 수준이 훨씬 낮고 스코틀랜드 리그에서 아무리 잘 하는 선수라도 EPL에서는 안 먹힐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19] 일본 대표팀 감독도 이를 지적한 바 있다.[20]
한국 해축빠, 또는 반일 일까들이 나카무라가 스페인 라 리가에서 말아먹는 바람에 한국선수가 라 리가 가는 게 어려워졌다고 비웃는 경우도 있는데 우습게도 일본에선 정반대로 이천수박주영을 두고 똑같은 소리를 하며 비웃는 경우가 있다. 이에 대하여 재일교포 축구전문가 신무광이 포포투 플러스 한글판에서 그러면 나카무라 슌스케는? 라 리가에서 말아먹은 선수는 한국(2명)보다 일본이 많다(6명), 솔직히 아시아 선수로 라 리가에서 잘한 선수라곤 자바드 네쿠남 하나뿐인데 그럼 이란을 칭송할 것인가? 라고 반박한 바 있다.[21]

4. 기록



4.1. 대회 기록



4.2. 개인 수상


  • J리그 최우수 선수: 2000, 2013
  • J리그 베스트 XI: 1999, 2000, 2013
  • JFA 올해의 선수: 2000, 2013
  • AFC 아시안컵 MVP: 2004
  • SPFA 올해의 선수: 2006-07
  • SFWA 올해의 선수: 2006-07
  • 셀틱 FC 올해의 선수: 2006-07
  • 셀틱 팬 투표 올해의 선수: 2006-07
  • 스코틀랜드 PFA 시즌의 팀: 2006-07
  • 스코틀랜드 PFA 시즌의 골: 2006-07

5. 기타


한국 뉴스 기사에서 이 선수의 이름이 '나카무라 쑞봬'나 '나카무라 ?스케' 등으로 바뀌어 나온 적이 있었다. 그 원인은 슌스케에서 '슌'이라는 글자가 KS X 1001 완성형 코드에 없는 글자다 보니까 그게 깨져서 그렇게 나온 것 같다.[22] # 한자 이름이 다른 야구 선수인 와타나베 슌스케를 다루는 기사에도 간혹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
스포츠 인터렉티브에서 개발하고 세가에서 유통하고 있는 축구 게임 풋볼 매니저에선 기술 능력치가 박지성보다 훨씬 좋다. 적어도 기술 능력치만 놓고 본다면 여타 다른 잘하는 선수들이 부럽지 않다. 하지만 피지컬 능력치는 박지성보다 훨씬 낮아서 오래 굴리기 힘들다.
작은 체구를 가져 수많은 좌절을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실한 노력으로 세계적인 스타로 성장했다는 내용으로 일본 소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2006년에 한 유튜버유튜브에 나카무라와 데이비드 베컴의 프리킥을 비교하는 영상을 올려서 화제가 된 바 있다.(참고 영상)
2008년 영국의 한 사이트에서 여성팬 2500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축구선수' 선정에서 20위를 차지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1] 아르헨티나의 축구선수 후안 로만 리켈메, 스페인의 축구선수 루이스 가르시아와는 생년월일이 같다. 과연 1978년 6월 24일, 어떤 일이 있었길래...[2] 한국에서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측면 미드필더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카무라는 일본식으로 トップ下라 불리는 공격형 미드필더로 선수생활 대부분을 보냈다.#[3] 링크에서 OH로 표기된 포지션이 바로 공격형 미드필더다. 참고로 OH는 Offensive Half라는 고전적 포지션 용어.[4] 정작 저 둘은 유럽에서 각각 중앙 미드필더, 중앙/사이드 미드필더로 활동했다.[5] 물론 실제로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트루시에는 체력과 체격이 탄탄하지 못한 나카무라를 중용할 생각이 전혀 없었고, 이후 부임한 지쿠가 실전에서 가동하자마자 탈탈탈(...) 그도 그럴 것이 이나모토를 제외한 나머지 셋이 전부 온더볼 플레이를 즐기는 공미인지라 중앙 장악도 안되고 수비진 보호도 안되고 사이드 라인 활용도 제대로 이뤄지질 않았다(...). 애초에 이나모토조차도 수비력보다는 공격 가담으로 유명한 판에 이건(...)[6] 닛칸스포츠가 실시한 여론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 중 86%가 나카무라의 최종 엔트리 제외를 반대했다고 한다.[7] 앞의 세 명은 제노아에 입단한 미우라 카즈요시, 베네치아에 입단한 나나미 히로시, AC 페루자에 입단한 나카타 히데토시이다.[8] 시즌 종반에는 치골염이나 무릎 부상 때문에 교체 출장하기도 했다.[9] 실제로는 라싱 산탄데르와 이적 협상을 했다고 한다.[10] 참고로 두웨이가 레전드(?)를 만들어낸 경기에 나카무라도 같이 선발로 출전했었다.[11] 골 장면을 보면 일본 선수들이 마크 슈워처 골키퍼를 밀어 넘어뜨리는 동작이 있다.[12] 하지만 이후 나카무라는 손목 부상을 당해 정작 AC 밀란과의 16강전에는 출전하지 못했다.[13] 최초로 J리그 MVP를 두 차례 탄 케이스가 되었고, 2000년 처음 시상할 때는 최연소 수상(20살), 2013년 수상할 때에는 최고령 수상(35살)이라는 기록을 세웠다.[14] 사실 요코하마 마리노스는 리그 우승도 목전에 두고 있었다. 시즌 종료까지 두 경기를 남겨둔 상황에서 한 경기만 승리했어도 우승을 확정지을 수 있었으나 모두 패배하면서 산프레체 히로시마에게 우승을 넘겨주고 말았다. 대신 천황배에서 산프레체 히로시마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복수에 성공. 나카무라는 천황배 결승전에서도 1도움을 기록하며 팀의 우승에 기여했다.[15] 많은 공적자들의 감봉과 전력 외 통보 방침[16] 2008년 골닷컴에서 진행한 '세계 최고의 프리키커' 설문 조사에서 나카무라 슌스케가 20.79%의 지지로 알레산드로 델피에로에 이어서 2위를 차지한 바 있다.#[17] 원래 크로스를 올렸으나 공격수 다카하라 나오히로가 호주 골리 마크 슈워처를 밀어서 공을 못잡게 어시스트(?)해줬다.[18] 그 후 나카무라가 J리그에서 회춘한 이후에는 그를 찬양하는 팬들이 다시 많아졌다.[19] 다만 나카무라 슌스케는 셀틱에서만 맹활약한게 아니라 셀틱으로 이적하기 전 세리에 A의 레지나에서도 그럭저럭 활약한 적이 있다.[20] 기성용이 셀틱에서 뛰던 시절 당시 한국 축구 국가대표팀 감독이었던 최강희전북 현대 모터스 감독도 비슷한 지적을 한 적이 있다.[21] 다만 현재는 이누이 다카시가 라 리가에서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가고 있다.[22] 그래서 이런 사태를 막기 위해 '나카무라 '''순'''스케' 등으로 돌려 쓰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