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대 아이돌
1. 개요
1990년대 후반에 데뷔해 2000년대 초반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던 아이돌 그룹들을 일컫는 말이다.
보이그룹으로는 언타이틀, IDOL, H.O.T., 젝스키스, NRG, 태사자, 유비스, UNO(우노), TNB, OPPA, 신화, 이글파이브, A4, 팬클럽#s-2, 클릭비, Y2K, god, 플라이 투 더 스카이, 원타임, UN, 디베이스, K-POP, 블랙비트, 테이크, 악동클럽, 량현량하, 5tion, 오투알(O2R) 등이 있다.
걸그룹으로는 S.E.S., 핑클, 베이비복스, 써클, 클레오, 디바, O-24, 슈가, 티티마, 파파야, 샤크라, 쥬얼리, SWi.T, 투야, 밀크, 신비 등이 있다.
혼성그룹으로는 영턱스클럽, UP, 쿨, 코요태, 오룡비무방, 고구려 등이 있다.
2. 상세
1990년대 이전까지는 '아이돌'이나 '그룹'이라는 개념 자체가 희미했다. 그 시절에는 오히려 솔로 가수가 인기가 많은 시절이었고, 그룹들은 그저 잠깐 밤무대에서 활동하거나 하는 게 전부였다.[1][2]
그러다가 1992년 서태지와 아이들이 데뷔하면서 그룹 문화에 대한 형성이 생기기 시작했고[3] , 듀스, 노이즈, R.ef, 솔리드 등 몇몇 보이그룹들이 팬덤을 형성했다. 서태지와 아이들이 물러간 1996년 2월 IDOL이 데뷔를 하면서 10대들에게 반응을 얻고, 같은 해 9월에 H.O.T.가 데뷔하면서 10대들의 전폭적인 사랑을 받으며 '아이돌' 문화를 만들었다. 이후 1997년 4월 데뷔한 젝스키스와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면서 1세대 보이그룹의 양대산맥을 이뤘다.
걸그룹 역시 발전을 거듭했으나 걸그룹의 경우 그 전까지는 남성그룹들보다 위치가 더 낮았다. 우정의 무대에나 잠깐 출연하고 잊혀지는 경우가 대다수였는데, H.O.T.가 데뷔하고 약 1년 후 1997년 11월, H.O.T.를 데뷔시킨 소속사 SM엔터테인먼트에서 데뷔한 S.E.S.가 남성팬들의 지지를 얻으며 걸그룹 문화를 만들었고, 이듬해 4월 대성기획에서 데뷔한 걸그룹 핑클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했다.
1998년에는 신화가 데뷔했고, 1999년에는 god가 데뷔하면서 두 그룹 역시 라이벌이 되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2000년 5월 18일 젝스키스가 해체되었다. H.O.T.는 젝스키스의 해체에도 불구하고 2000년 10월 5집 앨범을 발매하며 우려를 씻는 듯 했으나 2001년 2월 27일 잠실주경기장에서의 마지막 콘서트를 끝으로 결국 해체되었다.
걸그룹 역시 S.E.S.는 2002년 12월 19일부로 해체했고, 핑클은 공식적으로 해체 선언을 하지 않고 '따로 또 같이' 라는 전략을 내세우며 2002년 말까지 개인활동과 단체 예능 출연, 광고 모델 활동을 병행하였으나 2003년 이후 이런 구분이 뜸해졌고, 이효리와 옥주현이 솔로앨범을 발표하고 소속사를 이적하며 사실상 해체 상태에 들어갔다.[4]
그렇게 4개의 그룹이 사라졌고, 후발주자로 나온 신화와 god는 해체 없이 가는 듯 했으나 god는 2004년 윤계상이 탈퇴하고 4인조로 활동하다 2005년 10월 7집 <하늘 속으로> 을 끝으로 활동을 중단했다. 신화는 이례적으로 2020년인 현재도 멤버 교체 없이 최장수 아이돌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활동 중이며 긴 소송을 통해 본인들의 상표권을 획득하는데 성공했다.
2010년대 이후 토토가 등을 통해 1세대 아이돌들이 재결성받거나 다시 긍정적으로 주목받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물론 예외도 있는데, 원타임은 멤버들의 사정 이외에도 모 멤버의 용서받지 못할 행적 때문에 아예 재결합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금기시되는 수준.
3. 1세대 보이그룹
3.1. H.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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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기간은 1996년 9월~ 2001년 2월말 (27일) 까지이다.
1996년 9월 1집 <We Hate All Kind Of Violence> 로 데뷔, 타이틀 곡 <전사의 후예> 는 1위 수상에 실패했지만 후속곡 <Candy> 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으면서 10대 우상으로 등극했다. 원래는 H.O.T. 약자인 High Five Of Tenneagers 처럼 10대로 이루어진 그룹으로 멤버가 20대가 되면 그룹에는 졸업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려고 했었다. 그러나 Candy의 큰 히트 이후, 팬층이 넓어지고 팬 수가 많아지자 팬들의 반발을 우려해 그냥 둔 것. 이 제도는 13년 후 애프터스쿨이 이어받게 된다.
이 후 2집 <Wolf and Sheep> 의 타이틀 곡 <늑대와 양> 으로 엄청난 인기를 얻었으며, 후속곡 <행복> 으로 1997년 골든디스크, 서울가요대상, MBC 한국가요제전, SBS 가요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1997년 한 해에만 4개의 대상을 손에 쥐게 된다. KBS 가요대상에서는 임창정에게 밀려 대상 수상에 실패하며 지상파 트리플 크라운은 달성하지 못했다.[5]
1998년 발표한 3집 <Resurrection> 의 타이틀 곡 <열맞춰> 와 강타가 작사 작곡한 <빛> 역시 큰 인기를 얻으며 그 해 골든디스크 시상식을 제외한 KBS 가요대상, MBC 10대 가수 가요제, SBS 가요대전, 서울가요대상에서 모두 대상을 차지하였고 팬클럽 회원수는 20만명이 넘어가게 된다.
이 시기는 그냥 H.O.T.의 시대였다. 주경기장에서 열리는 드림콘서트나 환경콘서트, 012 콘서트에서는 3층은 무조건 H.O.T.의 하얀색 풍선이 채웠다. 1999년 드림콘서트에는 무려 '''12만명'''의 팬들이 몰렸다. 이 때 지방팬들이 직접 대절해 올라온 버스가 300대가 넘었다고
1999년 9월 발표한 4집 <I Yah> 의 타이틀 곡 <아이야>와 후속곡 <환희> 는 컴백부터 생방송 음악캠프에서 1시간 H.O.T. 특집 방송을 편성하는 등 H.O.T.에 대한 기대치가 이미 극에 달해있었다. 이 역시 히트를 기록했고, 비록 대상을 타지는 못했지만 10대들의 절대적인 지지는 여전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라이벌 그룹 젝스키스가 2000년 5월 해체되고, H.O.T. 역시 해체설에 휘말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를 극복하기로 하듯 2000년 10월 정규 5집 <Outside Castle> 을 발매하고 방송활동을 꾸준히 했으나 이전만큼의 인기를 얻지는 못했고, 결국 2001년 2월 27일 마지막 고별 콘서트를 끝으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이 날 주경기장에서 열린 콘서트에는 무려 10만명이 넘는 팬들이 몰렸고, 서울지하철이 연장운행을 하기도 하였다.
2018년 무한도전 토토가3 - H.O.T. 에서 재결합에 성공, 이후 10월 주경기장에서 콘서트를 열었다.
데뷔곡 전사의 후예 무대 모습이다.
본격적으로 인기를 얻기 시작한 1집 후속곡 <Candy> 무대 장면.
첫 대상의 영광을 안겨준 2집 후속곡 <행복>.
최전성기를 상징하는 3집 후속곡 <빛>
1999년 드림콘서트에서의 모습. 총 '''12만명'''이 몰린 공연이었다.
1999년 H.O.T. 4집 <I Yah> 의 컴백 스페셜 생방송 음악캠프 방송.
2000년 마지막 정규 5집 앨범의 타이틀 곡 <Outside Castle>.
2001년 2월 27일 마지막 콘서트에서의 <Outside Castle>.
3.2. 젝스키스
활동기간은 1997년 4월~ 2000년 5월까지이다. DSP미디어(당시 대성기획)에서 데뷔했다.
H.O.T.가 데뷔하고 7개월 뒤인 1997년 4월 1집 <학원별곡> 으로 데뷔했다. 데뷔 때부터 그룹 내에서 강인함을 담당하는 '블랙키스', 부드러움을 담당하는 '화이트키스' 로 부분을 나누어 활동했다.
동명의 타이틀 곡 <학원별곡> 은 상대적으로 묻힌 감이 있으나, 후속곡 <사나이 가는 길(폼생폼사)> 가 인기를 얻으면서 순식간에 아이돌 스타로 급부상하였다. H.O.T.와 이 때부터 라이벌 구도가 형성되었다.
1997년 12월 2집 <Welcome To The Sechikies World> 의 타이틀 곡 <기사도> 가 좋은 반응을 얻으면서 인기를 누렸고, 1998년 3집 <Road Fighter> 발매 이후 젝스키스 주연 영화 세븐틴을 찍었다. 그리고 그 세븐틴의 주제곡을 모아 스페셜 앨범 <Special> 의 타이틀 곡 <커플> 로 H.O.T.와 함께 서울가요대상 '''대상'''을 공동수상했다.
1999년 9월 H.O.T.와 비슷한 시기에 컴백을 잡고 4집 <Com' Back> 을 발매, 타이틀 곡 <Com' Back> 과 후속곡 <예감> 으로 H.O.T.의 <야이야> 와 경쟁을 펼쳤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2000년 5월 18일 갑작스러운 해체 기자회견으로 많은 팬들과 국민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팬들은 시위를 벌이며 해체를 반대했으나, 미성년자의 그들의 의견을 들어주는 사람이 없었고 결국 예정대로 2000년 5월 20일 드림콘서트에서의 무대를 마지막으로 3년 1개월간의 짧고도 굵은 활동을 마감했다.
이 후 멤버들은 각자 솔로 활동을 했으나 은지원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고지용은 아예 연예계에서 발을 빼 사업가로 전업하였다.
2016년 무한도전 토토가2 - 젝스키스에서 재결합을 하였다! 이 후 5월 멤버 이재진의 매제 양현석의 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와 고지용을 제외한 5인이 계약을 하였고[6] 9월 타블로가 작곡한 신곡 <세 단어> 을 발표, 각종 음원차트를 올킬했고 9월 연간차트 1위를 하였다.
데뷔곡 <학원별곡> 무대.
본격적인 인기를 얻은 1집 후속곡 <폼생폼사>
젝스키스의 노래 중 가장 많은 사랑을 받은 곡이자 스페셜 앨범 타이틀 곡, 또 첫 대상을 안겨준 곡인 <커플>
젝스키스의 마지막 앨범이 된 4집 타이틀 곡 <Com' Back>.
2000년 드림콘서트에서의 고별무대. 고별앨범 수록곡 <Bye> 와 1집 수록곡 <기억해줄래> 를 불렀다.
[1] 그 시절은 댄스음악이라는 장르 자체가 생소하던 시절이었기에 그룹은 백두산이나 무한궤도 같은 밴드가 대부분이었고, 댄스음악의 경우는 나미와 붐붐, 현진영과 와와, 인순이와 리듬터치 등 가수 뒤의 댄스팀 개념으로 서는 방식이 대세였다. 이후 등장한 '서태지와 아이들' 이라는 (지금와서 보면 다소 불평등적인) 팀 이름 또한 그 시기의 산물이자 다소 흔한 그룹 작명법이었다. 허나 서태지와 아이들은 3인조로 온건한 하나의 그룹이었고 이들의 대성공 이후로는 댄스그룹에 한해서는 이러한 작명법은 사라지게 되고 보컬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밴드들만이 이런 작명을 사용하고 있다.[2] 허나 소방차 만큼은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으며 이들을 보이그룹 아이돌의 시초로 보아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또한 그룹의 성공에 고무된 소방차 기획자 이호연이 DSP를 창립하여 1세대 아이돌 중 최고 선배인 IDOL을 배출한다. 또한 소방차의 멤버인 정원관, 김태형은 이후 1세대 아이돌 NRG를 키워냈고, 또다른 멤버인 이상원은 소방차 탈퇴 후 만복이로 유명한 잉크를 만들었다. 당시로는 어마어마한 물량인 7인조로 등장했다. [3] 전술하였듯 이전부터 조금씩 씨앗은 뿌려지고 있었으나 태지보이스의 성공이 너무나 빠르고 거대했으며 업계를 뒤엎을 만큼 파괴적이었다. 이후 데뷔하는 그룹들이 롤모델을 꼽을때도 태지보이스 이전의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일은 절대 없는 것이 그 증거다.[4] 여담으로 보이그룹 god를 양자로 삼은 JYP엔터테인먼트 역시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는 걸그룹도 아예 안만들었다. 그 후로 뒤늦게 원더걸스를 히트시켰으니...[5] 당시 시상식 분위기를 임창정이 밝히기를, 엄청나게 많은 H.O.T. 팬들이 KBS홀을 메웠었는데 자신이 대상 수상자로 발표되자 모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려 결국 10명 정도의 관객 앞에서 앵콜송을 불러야 했다고 한다.[6] 고지용은 앨범 참여 가능성 정도만 열어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