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rvana

 


너바나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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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mage]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자'''[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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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너바나
Nirvana'''
'''멤버'''
'''커트 코베인, 크리스 노보셀릭, 데이브 그롤'''
'''입성 연도'''
'''2014년'''
'''후보자격 연도'''
'''2014년'''
'''후보선정 연도'''
'''2014년'''













'''NIRVANA'''
'''출신지'''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
'''멤버'''
크리스 노보셀릭 (베이스)
커트 코베인(보컬, 기타)
데이브 그롤 (드럼, 백 보컬)
'''장르'''
그런지, 얼터너티브 록
'''활동 기간'''
1987년1994년
'''데뷔'''
1989년 앨범 ‘Bleach
'''링크'''

1. 개요
2. 활동
2.1. 초창기
2.2. Nevermind 앨범
2.3. In Utero 앨범
2.4. 커트 코베인의 죽음
2.5. 커트 코베인의 죽음 이후
3. 평가와 영향력
4. 디스코그래피
4.1. 정규 앨범
4.2. 라이브 앨범
4.3. 컴필레이션 앨범
5. 이야깃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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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image]

'''우린 메인스트림을 지양했어요.''' 여러분이 기억해야 할 한 가지는, '''너바나는 메인스트림을 따라하지 않았고, 메인스트림이 너바나를 따라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게 밴드에겐 큰 위험[1]

이었어요.

크리스 노보셀릭, 201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식에서[2]

'''1990년대를 풍미했던 미국의 전설적인 그런지와 얼터너티브 록 밴드'''이다. 밴드 이름 너바나는 번뇌와 고뇌가 소멸한 상태를 말하는 불교 용어 열반(니르바나)의 영어식 표현이다.
록 음악을 넘어 대중음악사에 또 다른 한 획을 그은 밴드라고 할 수 있다. 일개 그룹의 범주를 넘어 '''90년대 전 세계 대중음악계를 강타했던 새로운 음악적 조류 그 자체를 상징하고 있는 밴드'''이며 '''1990~2000년대 록의 흐름을 결정지은 전설적인 록밴드'''로 평가받는다. 얼터너티브 록이 90년대 초부터 2000년대까지 음악시장을 장악하게 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좀 더 넓은 시각으로는 80년대 (좋은 의미로든 나쁜 의미로든) 상업성이 극대화된 당시 록 음악의 틀을 깨고 언더그라운드 씬, 감성 씬, 펑크 씬과 같은 마이너 음악들이 가진 가능성을 재평가하게 만들었다.[3][4] 너바나 덕에 2000년대 후반까지 록 음악·메탈 음악·밴드 음악들이 다양한 음악적 시도와 분화를 이어갈 수 있는 중요한 기폭제가 되었다. 데뷔 이후 미국에서만 4,000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으며 전 세계적으로는 7,500만 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렸다.

2. 활동



2.1. 초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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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미국 워싱턴 주 애버딘에서 보컬/기타의 커트 코베인, 베이스의 크리스 노보셀릭이 결성했다. 결성 뒤 시애틀 주위 언더그라운드 음악 씬[5]에서 공연하며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으며, 1988년 인디 레이블 서브 팝(Sub Pop)에서 처음으로 싱글을 발매했다. 그 뒤 불과 600달러를 들여 첫 앨범 Bleach를 내놓았다.
이 앨범과 더불어 초창기 투어가 시작되었다, 활동량에 비하면 앨범 판매량은 북미에서 약 4만 장 정도에 그쳤다. 하지만 투어와 더불어 인상적인 라이브 공연을 바탕으로 언더 그라운드씬에서 마니아 층을 형성하게 된다. 1989년 11월부터는 유럽 투어가 시작되며 활동 범위를 넓혔다. 투어는 밴드의 독특한 음악, 비쥬얼을 대중과 업계 관계자들에게 각인시켰으며 점차 잡지나 관계자들을 통해 입소문이 나며 언더그라운드 록의 기대주로 서서히 자리잡기 시작한다. 밴드의 잠재력에 대하여 타 밴드 멤버나 외부의 많은 레이블들도 인정하는 분위기가 조성되고 라이브 공연의 규모가 점점 커지게 되면서 밴드 편성에 대한 변화가 있었다.[6] 1990년 채드 채닝의 탈퇴와 동료 '머드 허니'의 댄 피터스를 거쳐, 커트 코베인이 신뢰하던 '멜빈스'의 추천으로 '스크림' 출신의 드러머 데이브 그롤이 합류했다. 이렇게 너바나의 공식적인 최종 라인업이 완성되었다.
한편, Sub Pop으로부터 실력에 비해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한다고 느낀 커트와 크리스는 이때부터 미 전역 및 전세계에 음반 배급망을 갖춘 메이저 레이블과 계약하기를 원했고, 많은 유명한 메이저 레코드 레이블들이 너바나와 계약하기 위한 물밑 경쟁을 벌이게 되었다. 그러던 중 커트 코베인이 존경하고 교류가 많았던 소닉 유스의 서스턴 무어의 권유로 당시 소닉 유스도 속해 있었던 게펜 레코드와 1991년 초에 계약을 맺고 메이저 데뷔 앨범을 프로듀서 부치 빅과 작업하기 시작했다.

2.2. Nevermind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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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바나의 대표곡 Smells Like Teen Spirit 뮤직 비디오'''
너바나는 소닉 유스의 멤버 킴 고든의 추천을 받아 LA에 있는 사운드 시티 스튜디오에서 작업을 시작했고, '''Smells Like Teen Spirit'''을 비롯하여 In Bloom, Lithum과 같은 Nevermind 앨범의 전체 수록곡들을 만들어 냈다. 멤버들은 녹음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쓰지 않았고 녹음한 뒤에 프로듀서 부치 빅이 마스터 테입을 들려주자 너무 깔끔한 사운드에 놀랐다고 한다. 그래서 새로 하려고 했다가 어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고 귀찮아서 놔뒀다고 한다.[7] 한편 그러는 사이에 밴드는 각종 페스티벌에 참가해서 인지도를 쌓았다.
마침내 9월 24일 Nevermind 앨범이 발매되었다. 게펜 레코드는 당초에 소닉 유스가 1990년에 발표한 앨범 Goo의 판매량 25만 장 정도가 팔리리라고 예측했다. 앨범은 처음에는 빌보드 앨범 차트 144위를 기록하면서 게펜의 예상대로 가는 듯 했지만, 처음 찍어낸 5만 장이 순식간에 팔려나갔고, Smells Like Teen Spirit의 뮤직비디오를 MTV에서 계속해서 방영하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사태는 겉잡을 수 없이 발전하고 있었다. 91년 말 앨범은 50만 장이 넘게 팔렸고, 92년 들어서는 무려 300만 장이 넘게 팔렸다. '''이는 시대를 바꾸었다.''' 1992년 1월 11일, Nevermind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1위에 올랐다. 시대가 바뀌었음을 선언하는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사실, 마이클 잭슨Dangerous 앨범을 밀어냈다는 말이 있지만 이미 Dangerous 앨범은 4주 연속으로 1위를 차지한 뒤 내려올 시기에 너바나가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또한, 빌보드 차트 1위에 올랐지만 1주 후 브룩스에게 빼앗긴다. 하지만 이는 표면적인 평가로서, 너바나의 'Nevermind'가 발매된 9월 24일을 기준으로 빌보드 앨범차트 1위를 차지한 1992년 1월까지 기간이 약 4개월이라는 점을 간과한 것이다.
'Nevermind'가 주목받기 전 같은 소속사에서 압도적으로 밀었던 거물 '건스 앤 로지스'나 스래시 메탈의 지존이던 '메탈리카'도 1위에 올랐으나 단번에 밀려났다는 점도 눈여겨 볼 만하다. 이 때 너바나는 클럽과 투어를 토대로 소위 싼마이급이지만 저변에서 서서히 마니아층을 빠르게 넓히고 있었다. 1991년 겨울 무렵에 드디어 MTV를 통해 'Smells Like Teen Spirit'이 집중적으로 편성되기 시작하며 폭발적인 추진력을 얻게 된다. 일단 리드 싱글이 한번에 귀에 들어올 정도로 당시의 유행하던 록음과 달랐으며 일단 좋았다. 정의하기 어려운 장르 또한 인기몰이에 힘을 실었다. 차트 1위를 찍을 무렵에는 1월 매주마다 40만장이 팔려 나갈 정도로 폭발력이 있었다. 그 덕에 마이클 잭슨을 누르고 1위를 차지하고, 가스 브룩스를 누르고 1위를 한 번 또 찍는다. 가스 브룩스와 마이클 잭슨이 압도적이던 미국 시장에서 너바나가 1위와 어깨를 견줄 정도로 추진력을 얻었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 1위와 2위간 판매량 차이가 크지 않은 박빙의 순간들이었다. 또한 10위권 내에서는 압도적인 인지도를 지닌 'U2', '건즈 앤 로지스', '메탈리카'와 경합해야 했다. 번외로 당시 너바나의 싱글, 앨범의 주 소비층이 14~30세 정도로 한정되어 있었다는 점에서도 결코 쉬운 소득은 아니었다. 이후 업계에서는 너바나와 비슷한 비주류 음악을 하는 밴드들이 폭발적으로 차트문을 두드렸고, 1994년 즈음에는 확연히 신구 세대교체가 뚜렷하게 윤곽을 드러내게 됨을 볼 수 있다. 'JAY-Z'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힙합 또한 1990년대 전성기를 꽃피울 순간이었으나 너바나의 등장으로 잠시 우리는 기다렸다."

2.3. In Utero 앨범


'''MTV Unplugged 공연에서 연주하는 모습. 이 공연은 나중에 앨범으로 발매되었다.'''
1992년, 커트 코베인코트니 러브와 결혼했고, 8월에는 레딩 페스티벌의 헤드라이너를 장식하면서 생애 최고의 공연을 펼쳤으며, 곧바로 MTV 비디오 뮤직 어워드 시상식에서 여러 상들을 거머쥐었다. 또 딸 프랜시스 빈 코베인도 태어났다. 1993년 2월에는 In Utero 앨범을 녹음했다. 앨범의 원래 제목은 I Hate Myself And I Want to Die였고, 동명의 곡도 수록될 예정이었으나 커트 코베인은 자기 유머를 팬들이 진심으로 여겨 자기가 자살하고 싶어하는 줄 알까봐 제목도 바꾸고 곡도 넣지 않았다고 한다.
프로듀서는 부치 빅에서 당시 여러 얼터너티브 밴드와의 작업으로 유명세를 타던 스티브 알비니로 교체되었고, 커트 코베인은 최대한 무겁고 더러운 사운드를 수차례 주문했다고 한다. 인디 시절의 펑크 음악으로 돌아가고 싶어서였다. 그러나 결과물로 나온 사운드가 멤버들도 놀랄 정도로 지나치게 무겁고 더러웠고 결국 게펜 레코드는 몇몇 곡을 손보고 발매하였다. 그러나 커트 코베인은 Nevermind 처럼 레코드사의 손을 거치면 자신이 원한 방향과는 다른 앨범이 나올까봐 우려해서 레코드사의 결정을 계속 반대했고 결국 시중에 나온 앨범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인디 시절 발매한 Bleach도 돈이 없어서 프로듀서는 커녕 제대로된 엔지니어도 구하지 못한 상태에서 녹음실 대여날짜는 다가왔기에 일단 녹음을 하고 멤버들끼리 어떻게든 해보려다가 대충 마무리해서 발매한 것이어서 코베인은 앨범의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너바나가 발매한 모든 앨범들은 커트 코베인이 마음에 들어한 사운드가 실리지 못한 것이다.'''
In Utero 앨범이 1993년 9월에 발표되었고 앨범은 또다시 빌보드 앨범 차트 정상에 올랐다. 이에 너바나는 미국 투어도 다니고 MTV Unplugged에서 공연도 했지만, 코베인은 주류 록 밴드가 되어 버린 것에 복잡한 심경을 갖고 있었고, 다른 정신적 문제도 심해져서 헤로인에 깊숙히 빠져들었다. 거기에 팀 내부 불화까지 겹친다. 1994년 초, 너바나는 유럽 투어를 시작했으나 코베인은 3월 로마에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발견되어 병원으로 후송되기까지 했다. 이후 헤로인 중독을 치료하기 위해 재활 시설에 들어갔으나 코베인은 치료를 견디지 못하고 병원에서 도망친 후 시애틀로 돌아갔다. '''그리고....'''

2.4. 커트 코베인의 죽음


1994년 4월 8일, '''코베인은 시애틀의 집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경찰은 사망 추정시간이 4월 5일 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커트 코베인의 자살은 수많은 논란을 몰고 왔다. 일단 경찰은 '하나뿐인' 문이 안쪽에서 잠긴 점, 유서의 존재, 타인의 지문이 없는 점 등을 들어서 자살이라고 발표하였으나, 어떤 사람들은 문이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인 점, 유서의 끝 글씨체가 다르다는 점, 총에도 지문이 없다는 점, 코베인의 몸에 엄청난 양의 헤로인이 들어있었던 점 등을 들어 타살되었다고 주장했다. 타살의 배후에는 코트니 러브나 기획사가 있다는 주장도 제기되었다. EI Duce 라는 한 무명 락 뮤지션이 어떤 한 인터뷰에서 " 코트니 러브가 나에게 커트를 죽이면 500만 달러를 준다고 한 적이 있어. " 라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까지 정확한 진실은 밝혀진 적이 없다.[8] 코베인의 시신은 화장되어 일부는 코트니 러브가 가졌고, 일부는 뉴욕으로 갔다가 워싱턴 주로 돌아왔다. 그런데, 한 언론 기사에 따르면 커트 코베인의 유해 일부분이 도둑질 당했다고 전해졌다. 그리고 한 미술가는 자신이 커트 코베인의 유해를 가지고 있다면서 이 유해로 담배를 피우겠다고 해서 큰 논란이 되었다.
커트 코베인의 사망은 당시 전세계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안겨주었다.

2.5. 커트 코베인의 죽음 이후


코베인이 사망하자 밴드는 사실상 해체되었고, 여러 컴필레이션 앨범들이 나오고 리마스터링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으로, 코베인이 죽은 직후 발매된 앨범 MTV Unplugged In New York이 있다. MTV 언플러그드 공연 때 불렀던 노래들을 모은 것으로, 공연을 중간 리허설이나 잡담 부분을 빼고 노래만 엮은 것이다. [9] 너바나의 노래들 뿐 아니라 각 멤버들이 좋아했던 밴드의 곡들을 리메이크한 커버들은 아직까지도 유명하다.[10] 2002년에는 컴필레이션 앨범 Nirvana가 발매되었는데, 여기에 수록된 미발표곡 You Know You're Right가 전 세계에서 히트했다. 2014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밴드 해체 후, 밴드의 드러머 데이브 그롤은 자신의 밴드 푸 파이터스를 만들었고 베이시스트 크리스 노보셀릭은 정치인이 되었다. 코트니 러브는 코베인이 죽기 전에 이미 홀(Hole)이란 밴드를 만들어서 활동하고 있었는데, 은근 좋은 곡들을 많이 냈다. 영화배우로도 활동해서 <래리 플린트> 같은 영화에도 출연했다.
2012년 허리케인 샌디 피해자들을 위한 자선 공연에서 폴 매카트니와 나머지 너바나 멤버들이 함께 무대에 서서 Cut Me Some Slack이란 제목의 곡을 연주하였다.[11] 이후 몇 번의 세션이 더 있었고, 데이브 그롤의 다큐멘터리가 흥행하면서 사운드시티 멤버가 함께하는 투어 세션에 기존 멤버들이 다시 등장하며 공연을 가졌다.
2014년 너바나는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후보로 선정되며, 선정된 그 해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였다. 시상식 당일 커트 코베인 사후 20년 만에 모든 멤버가 한 자리에서 히트곡을 연주했다. 당시 커트 코베인을 대신할 프론트맨을 찾았고 일부 'A급' 프론트맨이 거론되며 비공식 접촉이 있었으나 부담감에 모두 거절했고, 최종적으로 너바나의 오랜 팬이던 '조안 제트', '킴 고든', 너바나, 데이빗 보위에 많은 영향을 받은 후배 뮤지션인 세인트 빈센트(애니 클락), 로드가 무대를 장식했다. 이후에도 몇 번의 공연이 있었으며 2018년 푸 파이터스의 'Cal Jam'에서 다시 한 번 너바나의 멤버들이 공연하였다.
2019년 12월 이번에는 '벡', '세인트 빈센트'와 함께 멤버들이 다시 뭉쳤으며 특이하게 데이브 그롤의 딸이 무대에서 너바나의 곡 'Heart-Shped Box'를 부르기도 했다. 크리스 노보셀릭의 새로운 밴드인 'Giants in the Trees'가 푸 파이터스의 투어에 종종 참여하며 멤버들 간 이벤트가 이어지고 있다.
2019년 크리스마스를 기점으로 너바나의 히트곡 'Smells Like Teen Spirit'이 10억뷰를 돌파하며 뉴욕과 L.A의 전광판에 10억 돌파 기념 광고가 개시되며 이슈가 되었다. 최근 데이브 그롤은 푸 파이터스 25주년을 대비하여 새 앨범을 준비하고 있으며, 크리스 노보셀릭은 '더 도어즈'의 자선 공연에서 세션으로 참여하는 등 다시 뮤지션으로서 활동에 집중하고 있다. 너바나의 음악은 꾸준하게 다운로드, 스트리밍 시장에서도 강세를 보이며 여전히 그 이름값을 하고 있다.

3. 평가와 영향력


상업성에 찌든 록 씬을 60년대의 순수성으로 초기화시킨 밴드이자 모든 언더그라운드 음악가들의 은인으로 꼽힌다.
대체적인 평가는 '마지막 록 스타(커트 코베인)를 가진 밴드'. 물론 그 이전에 R.E.M., 사운드가든 등 얼터너티브 밴드는 있었지만, 돌풍을 일으킨건 너바나이다. 그래서 때때로 '너바나는 실력에 비해 거품이다'라는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는 사람들도 있다. 너바나가 메인스트림에 오르기 직전에 이미 80년대부터 이어진 메탈의 전성기가 점점 쇠퇴하고 있었고, 그 덕을 크게 본 게 바로 너바나라는 것이다. 이들은 잘생긴 외모의 커트 코베인 + 메탈의 쇠퇴 등의 버프를 받은 상태에서 '3장의 앨범만을 남긴 채 인기의 최절정의 순간 자살한 락스타'라는 이미지가 거의 '''신화화'''에 가까울 정도로 너바나를 급부상시켰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많은 평론가들이 '만약 커트 코베인이 자살하지 않았더라면 너바나가 지금과 같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을까' 하는 물음에 부정적으로 답한다. 그들의 음악성도 음악성이지만, 커트 코베인의 자살도 분명히 밴드의 인기에 영향을 미친 요소 중 하나라는 것.
그렇지만 이러한 비판을 제쳐두고서라도, 결과적으로 그들은 '''시대를 바꾸었다'''. 너바나는 쇠퇴해가던 메탈 시대의 종지부를 찍고 록의 역사를 얼터너티브 록과 모던 록의 시대로 바꿔놓았다. 이는 록이라는 장르 자체에 활기를 불어넣었고 다양한 실험을 할 수 있는 기폭제가 되었으며, 록이 현재와 같은 모습으로 있을 수 있게 한 기반을 마련했다.
또한, 너바나의 파급력은 록 음악을 넘어 패션, 예술 전 분야에 자극을 주었다. 당대 모든 젊은 이들의 대변자와도 같은 커트 코베인 특유의 패배주의는 당시의 행동양식을 상징하던 것이었다. 과도한 레이어드 패션과 카고바지, 구겨진 핏 등이 너바나의 영향을 받은 패션으로 2018년 즈음 부터 유행한 홍대 힙스터들의 시그니쳐 패션인 딘드밀리룩도 그 중 하나다. 비록 록 음악은 메인스트림에서 사라졌지만 요즘은 오히려 힙합 뮤지션들에게 너바나, 커트 코베인의 에디튜드가 우상시되고 있다.
2020년 롤링 스톤 선정 500대 명반 리스트의 개정이 있었는데, 록 씬의 쇠퇴를 반영하듯 기존 록 앨범들의 순위가 대폭 하락한 반면 너바나의 앨범은 오히려 순위가 상승했다. 특히 Nevermind는 17위에서 6위까지 순위가 상승했다.

4. 디스코그래피




4.1. 정규 앨범



4.2. 라이브 앨범


  • MTV Unplugged in New York (1994년 11월 1일)
  • From The Muddy Banks of The Wishkah (1996년 10월 1일)
  • Live At Reading (2009년 11월 3일)
  • Live At The Paramount (2019년 4월 12일)

4.3. 컴필레이션 앨범


  • Incesticide (1992년 12월 14일)
  • Nirvana (2002년 10월 29일)
  • With The Lights Out (박스세트, 2004년 11월 23일)
  • Sliver: Best of the Box (2005년 11월 1일)
  • Icon (2010년 8월 31일)

5. 이야깃거리


이 밴드의 이름을 어떻게 부르는가의 문제에 의견이 갈리고 있다.
우선 'Nirvana'에 대해 산스크리트어로는 '니르바나'라고 읽고, 힌두권에서는 '니얼바나', 미국에서 부를 때는 '니어버너' 와 '너배너' 두 방식으로 나뉜다. 참고로 영어 사전 발음은 이렇다. 링크 '니얼바나'를 빨리 발음하면 미국식 발음과 비슷해지긴 한다. 대한민국에서는 '너바나'라는 표기가 가장 많이 쓰이고 있다.Nirvana 멤버들 역시 '너바나'(너봐나) 로 발음한다
한편 다른 의견으로는, 대표적으로 배철수가 Nirvana를 '니르바나'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고 주장하며 배철수의 음악캠프에서 Nirvana의 노래가 신청곡으로 들어오면 '니르바나'라고 발음한다. 그러나 90년대 초반에 배철수 본인은 이를 '너배너'로 발음하기도 했었는데, 그걸 생각하면 배철수의 주장에 일관성이 없기도 하다. 참조1 참조2
한편 중국어로는 '''열반악대'''(涅槃樂隊/涅槃乐队)라고 표기한다.
세컨드 기타였던 팻 스미어를 세션 멤버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팻 스미어는 너바가 말기때 영입된 정식멤버였다. 커트 코베인은 원래 너바나를 4인조 밴드로 구상하고 있었지만 여건이 안돼서 3인조 밴드로 계속 유지했던 것이다. 더군다나 팻 스미어는 다른 멤버들보다도 나이가 많은 편이고[12] 전설적인 펑크 록 밴드인 '점스(Germs)'[13]의 멤버이기도 했다.
1992년 1월 10일, 너바나는 SNL에 뮤지컬 게스트로 출연했는데, 노보셀릭과 그롤, 그리고 코베인은 공연이 끝나고 입을 맞추었다. 이는 주류 문화를 비판하며 동성애를 지지함을 표시하는 행동이었다. 영국 BBC음악 방송 탑 오브 더 팝스에 나와서 대규모 깽판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당시 연주 및 보컬 모두 립싱크핸드싱크를 해달라는 방송사 요청을 거부하면서 출연조건을 조정하다 결국 연주는 MR로 대체, 노래는 라이브로 부르는 것으로 절충하여 공연했다. 방송사 측에서는 "그 정도 쯤이야..." 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나, 너바나는 BBC 엿이나 먹어라라며 방송시 누가 봐도 MR이 흐르고 있음을 알 수 있도록 말도 안 되는 포지션을 취하며 연주했다. 손바닥으로 기타연주하기, 요가(?) 드럼, 아크로바틱하게 휘두르는 베이스에 묘기급 점프 등, 거기다 똘끼 폭발한 커트가 보컬톤을 극도로 낮춰 부른 것도 이러한 의도의 연장선이었다. 심지어 가사까지 정신나간 개사[14]를 하면서 슬슬 이상함을 알아차린 팬들이 무대에 난입하고 멤버들이 난입한 팬들과 신나게 뛰어놀며 쇼는 그야말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 사건은 영국의 록 매거진에서 "가장 반항적인 락 퍼포먼스" 베스트 10에 선정하기도 했다. 당시 커트 코베인 본인은 모리세이의 모창을 시도한 것이라고 했다. 이후 이 퍼포먼스는 커트 코베인 마이크 먹는 영상으로 유명세를 더욱 탔다.
마블의 영화 캡틴 마블(영화) 중간에 너바나의 Come as You Are이 나온다. 또한 노트에서 nirvana라고 적힌 것을 볼 수 있다고 한다. 너바나 뿐만 아니라 의 celebrity skin 등도 영화 중간중간에 나온다. 이유는 영화가 90년대 배경이기 때문이다.
2,3 집 가사번역
유로비트로 가득찬 이니셜D의 오락실 게임버전 중 하나인 이니셜D 아케이드 스테이지 5에 있는 수록곡 중 "Sweet sixteen girl"에도 Nirvana가 언급[15]된다.

[1] 이를 옳은 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메인스트림을 노리지 않았던 인디 지향적 성향의 너바나가 정작 메인스트림의 커다란 환호와 지지를 얻은 것에 밴드 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던 커트 코베인은 큰 혼란을 겪었고, 이는 그의 자살 이유들 중 하나로 거론되기도 하였다.[2] "We repelled the mainstream. And see, there’s one thing you have to remember about Nirvana, is Nirvana didn’t go to the mainstream, the mainstream came to Nirvana. And that was our big crisis." ㅡ Krist Novoselic at Nirvana‘s 2014 Rock and Roll Hall of Fame Induction[3] 당대의 록의 메인 스트림은 LA 메탈을 필두로 하는 팝 메탈(혹은 글램 메탈)이었다. 다만 이들은 상업성이 짙어져 (국내에선 록발라드로 알려진) 파워발라드들이 무수히 쏟아져 나왔고 매너리즘에 빠져 비슷비슷한 밴드들이 양산되던 때였다. 이런 상황에서 너바나를 비롯한 시애틀그런지 록그린 데이, 오프스프링 등의 네오 펑크/팝 펑크가 등장하면서 헤비 메탈의 전성기는 막을 내리게 된다. 그래서 80년대 메탈 팬 중에는 너바나를 싫어하는 사람도 많다.[4] 80년대 메탈 역시 상업성에 찌들긴 했지만 헤비메탈 자체가 당시에 지나치게 테크니컬해졌기 때문에(특히 기타 솔로연주 같은 부분은) 혹자들은 너바나가 등장하지 않았더라면 현대의 록은 일반인이 듣기엔 복잡하고 진입장벽이 높아져 마치 클래식과 같은 장르가 되었을 것이라고 평하기도 한다.[5] 이 당시 시애틀을 위시한 워싱턴 주에서는 하드코어 펑크가 유행이었다. 커트 코베인 역시 블랙 플래그의 공연을 보고 지대한 영감을 받는 등 너바나의 뿌리는 펑크 록이라고 할 수 있다.[6] 공연 규모가 커지며 노래와 동시에 기타를 치는 커트 코베인의 중심적인 위치에 대한 불협화음으로 채드 채닝과 제이슨 에버맨이 밴드를 탈퇴한다. 커트 코베인이 스쿨 밴드에서 드럼을 연주한 과거 경력이 이와 관련이 있다는 썰도 있으나 확인된 바는 없다.[7] 녹음이 완료될 때 까지 커트 코베인은 이 앨범의 사운드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8] 사실 밝혀진 것이 없다기 보다는 당시 커트 코베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사람들의 음모론에 가깝다. 경찰의 주장대로 코베인은 자살한 것이 맞다.[9] 커트 코베인 평전에 따르면, 코베인은 공연 직전에 헤로인 중독으로 인한 자신의 컨디션 문제와 언플러그드 공연인데 몇 몇 곡에 기타 이펙트를 넣은 사운드가 들어가서 관객들이 자신을 사기꾼이라고 하지는 않을까 걱정 하고 공연 직전에 공연을 취소하려 했을 정도로 매우 노심초사했으나 공연이 끝난 후 매니저와 단둘이 있는 자리에서 처음으로 이번 공연은 정말 만족스러웠다고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10] David Bowie의 The Man Who Sold the World나 Lead Belly의 Where Did You Sleep Last Night이 있다.[11] 다만 이 곡은 데이브 그롤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Sound City를 위해 만들어진 곡이다. 멤버 구성은 공연과 동일.[12] 1959년생이다.[13] 이 밴드의 보컬인 '다비 크래시'는 1980년 12월 7일에 자살했는데, 그의 자살 소식은 락계에서 한동안 묻혀질 수 밖에 없는 불운을 맞아야 했다. 하필이면 자살한 다음날에 '''존 레논마크 채프먼이 쏜 총탄에 맞아 죽었기 때문.'''[14] 첫 소절부터 "Load up on drugs and kills your friends" (약빨고 친구들을 죽여)로 바꿔서 부른다. [15] 가사중 '''Radio plays Nirvana'''라는 부분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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