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티모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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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티모르 섬의 동쪽 부분에 자리잡은 공화국으로 정식 명칭은 '''동티모르 민주공화국'''이다. 수도는 딜리이다. 국토면적은 15,000㎢에 인구 약 132만 명이다. 필리핀과 함께 동남아시아의 둘뿐인 가톨릭 국가이다. 더불어 21세기에 독립한 최초의 나라이다.[3]
2. 국가 상징
2.1. 국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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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르"라는 섬 이름은 마인어로 동쪽이라는 뜻의 "Timur"에서 유래하였다. 그렇다면 동티모르라는 나라 이름은 "동쪽 동쪽"이라는 동어반복이 된다.
하지만 이것이 틀린 표현은 아니다. 포르투갈식 표현이자 공식 명칭인 Timor-Leste에서도 나타나듯, '''"티모르(동쪽)"에서도 동쪽'''에 있는 곳이라는 의미이기 때문. 오스트로네시아어 계열에선 이런 겹말 표현이 많이 나온다. 좋은 예로 일랑일랑(Ylang-Ylang, 꽃 중의 꽃)이 있다.
마인어를 인도네시아어라는 이름의 국어로 지정한 인도네시아에서는 한때 티모르티무르(Timor Timur)라고 했으며, 1975년에서 2002년까지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강점했을 때에도 인도네시아의 한 행정구역으로써 티모르티무르 주라고 칭해졌다.
이리하여 한국어를 포함한 다른 언어에서는 이 나라를 "동부 티모르"에 해당하는 표현으로 칭한다. 영어의 East Timor나 프랑스어의 Timor oriental 등이 있고, 중국어와 일본어에서도 각각 '''東'''帝汶(Dongdiwen), '''東'''ティモール(Higashitimoru)라고 칭한다. 그러나 동티모르 정부에서는 다른 언어에서 동티모르를 칭할 때 가급적 포르투갈어 국호인 Timor-Leste(티모를레스트)를 번역하지 않고 그대로 쓰고 있다. 즉 동티모르 정부에서 영어로 공문서를 작성할 때는 자국을 East Timor가 아닌 Timor-Leste로 칭한다는 말이다. UN과 다른 국제기구에도 Timor-Leste이름으로 가입해 있다. 자국 공용어인 테툼어에서도 공식 국호는 "동부 티모르 민주공화국"에 해당하는 Repúblika Demokrátika Timór-Lorosa'e가 아니라 '티모를레스트'를 써서 Repúblika Demokrátika Timor-Leste이다. 테툼어판 동티모르 헌법(pdf) 이는 '동부 티모르'에 해당하는 말을 쓰는 것이 인도네시아 강점기(?) 시절의 '티모르티무르'를 연상시킬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4]
2.2. 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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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티모르의 국기는 1975년에 포르투갈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동티모르의 독립 준비가 한창일 때 만들어졌다. 그러나 확정되고 나서 9일 뒤 인도네시아가 쳐들어오는 바람에 국기로 쓰이지 못하고 폐기되었다가 2002년에 독립되어서야 다시 쓰이기 시작했다.
2002년에 제정된 동티모르 헌법 제15조에 따라 국기로 제정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황색 삼각형은 '동티모르 역사에 남아 있는 식민주의의 흔적', 검은색 삼각형은 '극복해야 할 반계몽주의', 붉은색은 '국민의 해방을 향한 고투', 오각별은 빛을 의미한다.
2.3. 국가
국가는 Pátria(애국자)이다. 1975년에 포르투갈이 포르투갈 식민지 전쟁을 포기하고 철수하여 동티모르의 독립 준비가 한창일 때 만들어진 노래이다. 프란시스쿠 보르자 다 코스타(Francisco Borja da Costa)가 작사하고 아폰수 헤덴토르 아라우주(Afonso Redentor Araújo)가 작곡했다.
그러나 정작 국가가 다 만들어진 직후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하면서 이 노래는 국가로 쓰이지 못했다. 오히려 작사가인 다 코스타와 작곡가인 아라우주가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살해당하는 수난을 겪었다. 동티모르가 독립을 쟁취한 2002년에 국가로 공식 채택되었다.
1975년 작곡 당시에는 포르투갈어 가사만 있었지만 독립 즈음에 테툼어 가사도 붙었으며, 두 가사 모두 공식 국가이다. 위 동영상의 국가는 포르투갈어 가사이다.
3. 역사
티모르 섬의 서부 지역은 네덜란드, 동부 지역은 포르투갈의 식민 통치를 받으면서 서구인들에게 처음으로 알려졌다. 본래 하나의 섬이지만, 이쪽 동네가 대개 그렇듯 동쪽과 서쪽의 언어도 문화도 다르다. 식민지배로 인해 달라졌다는 착각이 있는데 '''원래 다르다!''' 동티모르 안에서도 다양한 언어와 문화가 공존한다. 참고로 다른 인도네시아 섬도 여러 언어와 인종, 문화 모든 게 다른 이들이 살던 곳으로 따로 살다가 네덜란드가 식민지배하면서 합쳐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티모르 섬의 경우에는 토양 일부를 네덜란드가 지배했을 뿐 문화적으로는 사실 오스트랄라시아에 더 가깝다. 지형적으로도 인도-오스트레일리아 판(Indo-Australian Plate)에 속해있으며 섬 자체가 인도-오스트레일리아 판과 유라시아 판이 정확히 서로 부딪히면서 생긴 지형이다.[5] 거기다 동티모르의 경우는 아예 수백 년간 정치적으로도 분리되어 있었기에 독립국이 되었을 때는 이미 아무도 토를 달기 힘든 수준의 차이가 있었다.
4만 년 전에 처음으로 사람들이 이주해 왔다. 뉴기니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과 관련이 있다. 이후 프로토-말레이인이 이주해 왔으며, 따라서 지금 동티모르엔 멜라네시아인들이 쓰는 뉴기니계 언어와 프로토-말레이인이 쓰는 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가 모두 쓰인다. 이들은 웨할리 같은 작은 왕국들을 세우긴 했으나 자바섬이나 발리섬 등과 다르게 문자는 사용되지 않았기에 동티모르의 고대사는 잘 밝혀져 있지 않다. 1642년 포르투갈이 현재의 딜리 지역에 목재교역소를 설치한 후 티모르 섬 전체를 식민지이자 향료/목재 무역의 거점으로 삼으면서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이전에는 힌두교, 불교와 이슬람이 근근히 전파되기는 했지만.
그러다가 17세기 이후 포르투갈이 쇠퇴하고 네덜란드가 순다 제도의 패권을 잡으면서 1859년 양국 간 조약에 따라 포르투갈의 양도로 서(西)티모르는 네덜란드가 차지하고 동(東)티모르만 포르투갈 식민지로 남았다. 오랜 세월 동안 가톨릭이 깊숙히 전파되어, 거의 이슬람교 국가에 가까운 인도네시아와는 천지차이로 철저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것도 티모르 분쟁의 중요한 요소였다.[6]
제2차 세계 대전 당시인 1941년 12월 17일 호주-네덜란드 연합군이 포르투갈령 티모르를 점령한다. 당시 총리인 안토니우 살라자르는 항의했지만 그뿐이었고 포르투갈군 수비대도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포르투갈은 오히려 연합국에 협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일본 제국은 원래 마카오처럼 티모르를 건드리지 않을 예정이었으나 연합국 군대가 들어온 이상 일본은 티모르를 침략하기로 결정했다. 1942년 2월 19일 일본이 포르투갈에 선전포고를 때렸으며, 일본군이 티모르에 상륙하기 시작했다. 이후 호주-네덜란드 연합군은 1년 가까이 티모르 전투를 치르며 저항했으나 1942년 12월부터 호주군은 철수하기 시작했고 1943년 2월에는 일본이 승리했다. 이후 티모르는 1945년 8월 15일 패망까지 일본이 군정 지배했고 일본군이 식품을 약탈하고 마을을 불태우는 등의 만행을 저질렀으며, 이에 저항하는 티모르인들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연합군 역시 일본군 퇴치를 위해 마구 폭격하면서 전체 티모르인 중 10여%인 40,000~70,0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전후 호주군이 티모르 주둔 일본군의 항복을 받아냈으며, 1945년 9월 27일 포르투갈군이 전후 복구를 위한 식량과 건축 자재를 싣고 티모르인들의 환영 속에 돌아왔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전세계의 식민지가 서구열강에게서 독립하는 흐름이 있었지만, 포르투갈의 제2공화국 정권은 이 흐름에 역행해 전세계 포르투갈 식민지들의 독립을 무력으로 틀어막았다. 당연히 식민지 이곳저곳에서 독립전쟁이 벌어졌는데, 끝이 없는 지겨운 전쟁에 염증을 낸 군대가 카네이션 혁명을 일으킨 뒤 1974년 이후 포르투갈이 전세계 모든 식민지를 사실상 포기하면서 혼란에 빠졌다. 이에 따라 동티모르 곳곳에선 독립파와 친 인도네시아파가 종교 같은 문화적 차이 등으로 각각 갈라져 내전이 벌어졌고, 같은 해에는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ELIN)이, 1975년 8월에는 동티모르민족해방군(FALINTIL)이 각각 결성됐다.
여기서 승리한 동티모르독립혁명전선(FRETELIN)이 독립의 주도권을 잡아 1975년 11월 28일 동티모르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독립을 주도한 FRETELIN이 공산권 좌익 계열이었기 때문에, 안 그래도 베트남이 적화통일로 마무리되던 상황에 동남아시아의 공산화 위기감이 고조되어있었고, 미국-호주-인도네시아 모두 "태평양의 쿠바"가 태어나는 것을 원치 않아, 3국의 암묵적 합의 하에 1975년 12월 7일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침공해 27번째 주인 티모르티무르 주로 일방적으로 병합했다.[7]
이후 세계적인 무관심 속에 인도네시아의 식민통치와 군정(軍政)이 이어져 혹독한 탄압을 받았다. 1970년대 내내 70만 인구 중 무려 20만(!)이 추방되거나 학살되는 등 엄청난 탄압을 받았으며, 질병과 기아로 죽는 주민들도 속출했다. 위와 같은 탄압 때문에 겉으로는 조용한 듯 했지만, 1981년에 사나나 구스마오가 팔린틸 총사령관이 된 이후 1992년 투옥 때까지 무장투쟁을 총지휘하며 끈질기게 저항을 시도했다.
냉전이 종식된 1991년 10월에 터진 산타쿠루즈 대학살 사건이 1992년 1월 영국 ITV 다큐멘터리 <Cold Blood: The Massacre of East Timor>가 방영된 후 전 세계 방송사에 차차 보도되며 겨우 국제사회의 관심을 받아 해외에서 구호물자가 쇄도했고, 자원봉사자들이 동티모르를 찾았다. 1996년에 프레틸린 대표 조제 하무스 오르타와 카를로스 벨로 대주교가 노벨평화상을 수상해 인도네시아 정부를 놀라게 했다.
1997년 들어 동아시아 외환위기 크리로 휘청거려 이듬해 수하르토 독재정권이 인도네시아 민중의 힘에 못 이겨 퇴진하고 인도네시아가 민주화되면서 과거처럼 억지로 탄압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됐고 독립 열망이 고조되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하비비 대통령이 타개책을 제시해 1999년 2월에 종신형을 살던 구스마오 전 팔린틸 사령관을 가택연금 형식으로 석방했고, 8월 30일에 열린 UN 감독하 주민투표에서 독립 찬성파가 압도적으로 승리했다.
하지만 동티모르 주민 중 인도네시아 잔류파와 인도네시아인 거류민들이 조직하고 인도네시아 군부와 연결된 '친 인도네시아 민병대'가 대량 살육 작전을 시작했다. 군의 묵인 하에 독립운동가, 기자 등을 참수하고 주민들에게 자동화기를 난사하였으며 학교, 병원 등 공공시설을 무차별적으로 파괴하였다. 연구에 따르면 당시 티모르섬의 기간시설 중 70퍼센트가 파괴되고 주민 2천여명 이상이 살해됐으며, 주민 수천명이 서티모르나 산 속 등지로 피신했다. 이 상황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인도네시아가 곤경에 빠졌고, 결국 미국, 영국 등 강대국의 비호 아래 국제연합은 무장병력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8]
이 과정에서 김대중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의 적극적인 도움과 노력이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의 21세기 첫 노벨평화상 수상은 남북평화 노력뿐 아니라 한국 및 아시아의 민주화에 대한 도움과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을 막은 평화협상을 주도한 데에 대한 공로가 인정된 것이다.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에서 철수를 진행하며 가는 곳마다 학살을 진행하며 빠져나올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한 김대중 대통령이 APEC 정상회담 자리에서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여타 정상들이 모인 자리에서 아시아의 문제를 다루는 회의이니 이런 심각한 민간학살의 위험을 막는 것도 의제가 될 수 있다고 주장해 긴급안건으로 상정하여 동티모르에서의 학살을 막고 인도네시아의 민주주의와 개발 원조를 약속함으로서 인도네시아와 동티모르 양쪽이 윈윈하는 결과가 도출되었고, 이에 따라 양국이 클린턴 미국 대통령에게 감사를 표하자 클린턴 대통령은 "김대중 대통령께서 주도하신 일이니 그쪽에 감사를 표하라"는 말을 했다.[9]
1999년 10월 말부터 유엔 감시하에 동티모르 임시정부가 수립돼 무정부 상황을 끝내 헌법과 국가 건설의 기틀을 다진 뒤, 2002년에 완전한 독립국가가 되어 상당 기간을 외국 원조를 받아가며 내전 등으로 망가진 국가 인프라 재건 등에 주력했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에 반대하는 친 인도네시아파 민병대는 정부정책에 불만을 품으며 테러를 벌였고, 또 반란과 권력 분쟁으로 인한 2006년 쿠데타가 있었다. 인도네시아를 지지하던 군인들이 해고당하여 무직 상태가 되자 벌인 쿠데타로 결국 진압되었다. 그리고 2008년에는 주제 하무즈오르타(José Ramos-Horta) 대통령에 대한 암살 시도같은 테러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탓에 한동안 유엔평화유지군에 치안을 맡겨야 했으나, 2012년에 정부는 유엔평화유지군으로부터 치안권을 넘겨받았다.
4. 경제
5. 군사
6. 행정 구역
동티모르는 13개의 현으로 구성되어 있다.
- 라우텡 현 - 현도: 로스팔루스
- 바우카우 현 - 현도: 바우카우
- 바케크 현 - 현도: 바케크
- 마나투투 현 - 현도: 마나투투
- 딜리 현 - 현도: 딜리(수도 겸임)
- 아일레우 현 - 현도: 아일레우
- 마누페이 현 - 현도: 사므
- 리키사 현 - 현도: 리키사
- 에르메라 현 - 현도: 글레누
- 아이나루 현 - 현도: 아이나루
- 보보나루 현 - 현도: 말리아나
- 코바리마 현 - 현도: 수아이
- 오에쿠시 현[10] - 현도: 판트마카사르
7. 언어
인도네시아어를 쓰는 서티모르와 달리,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어와 테툼어를 공용어로 하고 있다. 한때 이 테툼어를 한글로 표기하기로 했다는 보도가 있었으나, 오보 및 과장으로 판명. 테툼어는 오스트로네시아계 언어로 처음부터 인구 대다수가 구사하는 언어는 아니었으나 종주국인 포르투갈과의 무역에 종사하던 이들은 대부분 해안가에 사는 말레이인들이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결국에는 국어로 격상되었다.[11]
작은 나라지만 수십 개(!)의 언어가 사용된다! 크게는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통의 언어[12] 나 트랜스뉴기니어족[13] (TNG) 계통의 언어가 쓰이며 세세하게는 국어인 테툼어나 맘바이어, 토코데데어 같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열 언어와 마카사이어, 파탈루쿠어 같은 TNG 계열 언어들, 그리고 카와이미마어처럼 TNG 계열인지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열인지 불분명한 언어들이 쓰인다.
90%의 사람들이 테툼어를 할 줄 알고 밖에서 쓴다고 한다. 테툼어와 같이 공용어로 지정돼 있는 포르투갈어는 전통적으로 많은 동티모르 사람들에게 통용되는 언어는 아니었으나 최근에는 점점 사용이 확산되고 있다. 오랜 포르투갈 식민 통치 역사를 갖고 있고, 포르투갈과 브라질 정부의 지원으로 의무 교육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인도네시아어와 영어가 실무 언어로 지정되어 있다.
테툼어는 정부 수립과 행정, 학술 등에서 필요한 전문용어가 발달하지 못해 아프리카 국가들처럼 양언어현상이 발생했다. 사용 인구가 3억에 가까운 포르투갈어에 비하면 테툼어는 국제적으로 소수어 중에서도 소수어라 공식 석상이나 공공 기관 표지는 무조건 포르투갈어만 쓰이거나 포르투갈어가 우선이다. 교통어이자 학술언어로 쓰일 수 있는 언어로는 인도네시아어도 있으나 강압 통치에 대한 반감 때문인지 실무언어로만 쓰이며 소수의 엘리트만 쓰는 포르투갈어가 공식어이다.
동티모르는 포르투갈의 지배를 오래 받았기 때문에 포르투갈에 대항해 독립운동을 하던 사람들조차 포르투갈어를 쓸 정도로 식자층에게 포르투갈어가 뿌리박혀 있었다. 그리고 포르투갈에 대한 반감도 시대가 흐르면서 사그라들었는데, 포르투갈이 민주화되고 난 후 식민지를 포기하자마자 인도네시아가 동티모르를 점령하여 동티모르 민족주의자들의 적이 포르투갈이 아닌 인도네시아가 되었기 때문이다. 동티모르 민족주의자들은 민주화된 포르투갈에 도움을 요청했고, 포르투갈은 유럽연합을 통해 동티모르를 독립시키도록 인도네시아에 압력을 가해 동티모르 독립에 기여했다. 오늘날 포르투갈은 옛 식민지들을 자기 편으로 두는 게 어떻게든 이익이다보니 동티모르 및 구 아프리카 식민지(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상투메 프린시페, 적도 기니 등) 국적자는 포르투갈 대학에 쉽게 진학할 수 있도록 했다. 이러한 이유로 독립 후에도 엘리트 계층은 옛 종주국인 포르투갈에 우호적이다.
8. 외교
9. 동티모르 출신 인물
초대 대통령 샤나나 구스망과 199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2대 대통령 주제 하무스 오르타가 잘 알려져 있다.
10. 스포츠
하계 올림픽은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서 첫 출전을 하였지만 당시에는 독립한 직후 주권 국가 수립 작업을 진행하고 있던 중이라 선수들은 국가 소속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였다.[14] 그러므로 동티모르란 이름으로 정식 참가한 것은 2004년 아테네 올림픽이 처음이다.
동계 올림픽은 유일하게 알파인 스키 종목의 요한 구 공칼베가 2014년 소치 올림픽과 2018년 평창 올림픽에 연속으로 출전하였다. #
아시안 게임에서 부탄, 몰디브와 함께 메달을 획득한 적이 없는 나라이기도 한다.
10.1. 한국인 감독과 동티모르 유소년 축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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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으로 여기에서 유명한 사람이라면 단연 유소년 대표팀 감독으로 8년째 이끄는 김신환 감독이다.
실업팀 선수로 활약하던 그는 사업에서 실패하고 빚으로 인해 구속되어 6달 수감했으며, 이혼과 여러 가지로 파멸하여 삶을 포기하려다가 동티모르로 가서 사업으로 재기하려고 했다. 그러다가 유소년 축구팀을 맡게 되었다. 이 과정에 자비로 수천만 원을 써가며[15] 유소년 팀을 맡으면서 여러 가지 고생을 해야 했다.
그럼에도 단 1년 만에 일본 히로시마 리베리노컵 국제 유소년 축구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다. 비록 일본에서 열린 유소년 친선대회이지만, 인프라와 체력적으로 압도적인 일본 유소년 클럽들을 상대로 7전 전승 26득점 2실점이라는 가공할 점수차로 우승했다. 동티모르 독립 이후 처음으로 가진 국제대회 참가이자 우승이었다.[16] 참고로 이 대회에 나갈 때 동티모르 축구협회는 일절 도와주지 않고 아시아나항공이 지원을 해줘서 겨우 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대회 우승당시, 동티모르 반응은 월드컵에서 우승한 분위기였다.
곧이어 다음 해에 열린 이 대회에서 6승 1무로 2연패를 차지했다. 그러자 싱가포르에서 김신환 감독에게 유소년 대표팀 감독 제의가 왔는데 월급은 4천 달러에[17] 온갖 혜택으로 유혹했지만 거절했다. 세 번째 대회 일본 히로시마 리베리노컵 대회는 불참했는데 아시아나항공 측의 사정으로 항공기 지원을 받지 못하자 불참할 수밖에 없었고 2006년 벌어진 내전 때문에 김신환 감독도 한국으로 대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내전에서 유소년 대표팀 선수 부모가 살해당하기도 했다. 내전이 진정되자 김신환 감독은 동티모르로 돌아가서 다시 감독을 맡았다.
곧이어 동티모르 유소년 대표팀은 2007년 중국 쿤밍에서 열린 유소년 대회 우승, 2008년 말레이시아 유소년 대회에서도 8전 전승으로 우승하였다. 2008년에는 포르투갈어권 친선 17살 이하 유소년 대회에서도 참가했으나 여기선 14살 정도 선수들로만 데려갔고 결국 우승후보였던 브라질 17살 이하 대표팀에게 1-7, 포르투갈에게 2-5,앙골라에게 1-3으로 완패했다. 그래도 상대들이 체력과 여러 모로 압도적인 팀들[18] 이며 브라질에서 열렸던 대회인 걸 생각하면 선전했다는 걸 알 수 있다.
2009년 AFC 16살 이하 아시아 대회 예선에 나가 중국과 0-0,싱가포르와 홍콩, 괌을 3-0, 마카오를 13-0으로 크게 이기면서 본선에 진출하기도 하여 아시아 유소년 정상급 실력을 보여주는가 했지만, 본선에선 일본에게 0-1 아쉬운 패배를 당하고 호주와 베트남에게 패하며 8강에서 탈락했다.
2011년 같은 대회 예선에선 중국에게 0-2,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에게 0-3, 북한에게 2-11로 대패하면서 조 꼴지로 일찌감치 탈락했다.
2011년 8월에 열린 전남지사컵 유소년 국제대회에 참가하여 전남 드래곤즈 유소년 팀과 0-0으로 비겼고 중국 광저우 헝다 타오바오 유소년팀을 6-0으로 대승하면서 6강에 진출했다.[19] 동티모르 유소년 대표팀에게 패하자 결국 광저우 헝다 유소년팀 감독이 경질될 정도로 중국에선 화제를 불러 일으켰다. 그리고 6강에서 전년 대회 우승을 거둔 FC 바르셀로나 유소년 A팀과 격돌하여 1-5로 대패했다. 대회 우승은 전남 유소년 팀이 바르셀로나 팀을 이기고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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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한국 영화 맨발의 꿈이 이 동티모르 유소년 팀과 김신환 감독을 모델로 만들었던 영화이다.
김신환 감독은 유소년에서 잘해도 성인 클럽, 프로리그가 워낙 열악한 동티모르 사정으로 유소년에서 빛을 보인 선수들이 성장하지 못하고 축구를 그만둔 채로 다른 일로 생계를 이어간다는 것에 대해 안타까워하고 있다고 한다.
2013년 8월에 경주시에서 열린 경주컵 U-12 유소년 대회에서도 김신환 감독이 이끄는 동티모르 유소년팀은 충무 유소년 팀이나 나고야 그람퍼스 유소년 팀을 비롯한 팀을 차례로 이겼고 결승에선 스포르팅 리스본 유소년 팀까지 제치고 우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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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14년 1월, 맨발의 꿈의 주인공인 알베스(좌측)와 마리아누스(우측)가 챌린저스 리그의 전주시민축구단에 입단해서, 코리안 드림을 꿈꾸었으나, 챌린저스 리그의 규칙상 외국인 제한에 걸리고, 부상과 팀의 저조한 성적 등으로 몇 경기 출전 못하고 결국 2년만에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코리안 드림을 이루어내지는 못하였다.
[결함있는민주주의] 7.06점[1] 한국과 시간대가 같은 지역이다. 이에 해당하는 다른 국가로는 북한과 일본, 팔라우 등이 있다.[2] #[3] 다음은 몬테네그로와 남수단. 2006년, 2011년에 독립했다.[4] 오늘날 인도네시아어에서도 독립국 동티모르를 칭할 때 Timor-Leste라고 한다.[5] Wheeler, Tony. <East Timor>. Melbourne: Lonely Planet, 2004[6] 서티모르도 머릿수로 따졌을 때는 인구의 91%가 기독교를 믿는다. 다만 개신교 비중이 40% 정도로 동티모르보단 많이 높은 편.[7] 당시 호주 기자 4명과 뉴질랜드 기자 1명이 이 침공을 취재하러 동티모르에 갔다가 인도네시아군에게 처형당했으며 그들을 찾아 동티모르로 떠난 다른 호주인 기자 로저 이스트도 동티모르인들과 함께 인도네시아군에게 처형당한 후 바다에 수장당했다. 이 사건을 영화화한 것이 '발리보. Balibo (2009)', 영화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주제 하무즈오르타(José Ramos-Horta) 대통령은 이때 로저 이스트 기자를 동티모르로 인도하는 역할을 했다. 시간날 때 한번 보면 당시가 얼마나 막장이었는지 이해하기 좋다.[8] Joshua Kurlantzick, 2013, Democracy In Retreat, Yale University Express; 조슈아 컬랜칙, 2015, 어떻게 민주주의는 망가지는가, 노정태 역, 들녘, 75-76면[9] 빌 클린턴은 학생운동가로서 정치경력을 시작했고 김대중 대통령은 사회운동가로서 박해를 받다가 대통령직까지 오른 자기 커리어 모델의 대선배격에 해당하기 때문에 사적으로도 꽤나 존경했다는 이야기는 여기저기서 들려온다.[10] 인도네시아령 서티모르 북부에 위치한 월경지이다.[11] 오스트랄라시아와 멜라네시아의 경우 고지인(高地人)들과 저지인(低地人)들의 인종이 확연하게 다르며 특히 고지인들의 경우 섬에 정착하고 나면 해양 생활을 하기보다는 섬 깊숙이 들어가 산악 생활을 하는 것을 선호했기 때문에 이들 중에는 심지어 1930년대가 돼서야 유럽인들과 처음 접촉을 이룬 경우도 많았다.[12] 오스트로네시아어족 계열 언어는 전원이 말레이폴리네시아어파에 속한다.[13] 트랜스뉴기니어족('''T'''rans-'''N'''ew '''G'''uinean languages)은 뉴기니 섬 제어의 대부분이 속한 언어다.[14] 당시 출전 선수들 중 육상선수 아귀다 아마랄의 일화는 제7차 교육과정 시절인 2002년에 출간된 초등학교 5학년 도덕 교과서에 수록됐다.[15] 동티모르 정부에겐 1원의 지원도 받지 못했으며, 오히려 선수들 밥 먹일 돈까지 자비로 부담해야 했다고 한다.[16] 동티모르는 2006년부터서야 국대팀이 국제대회에 참가했으며 2011년까지 국제 전적이 1무 11패를 기록한 최약체였다.[17] 당시 김신환 감독은 동티모르에서 무상으로 일하고 있었다. 2011년까지 동티모르 정부가 해준 일이라곤 그나마 땅을 제공한 게 전부이며 이마저도 한국 측의 지원으로 유소년 경기장 및 시설을 갖췄다.[18] 모두 유소년 대회 세계적 강호들이다.[19] 당시 광저우 헝다는 엄청난 지원을 받았었고 유소년도 투자를 펑펑 하는 팀이었다.